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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기사

[오마이뉴스] 김일성 곁으로 간 열성 친일파… 뉴라이트가 덥썩 물다

2023년 10월 10일 489

[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장헌근 해방 직후의 급격한 인구이동에서 나타난 특징 중 하나는 친일파들의 대거 남하다. 일본제국주의에 부역한 반민족행위자들이 38도선 이북에서 이남으로 남하하는 현상이 있었다. 미군정이 남한 진보진영을 견제할 목적으로 이북 출신 극우세력을 끌어들이고 후원했기 때문에, 남쪽을 향하는 친일파들의 발걸음은 한층 가벼웠다. 그런데 이런 흐름에 역행하는 사례들도 있었다. 북에서 내려오는 친일파들의 틈을 비집고 북으로 올라가는 소수의 친일파다. 1946년 7월에 월북한 무용가 최승희는 이남에서 친일 행적이 논란이 되자, 이를 피해 북으로 달아난 사례다. <친일인명사전> 제3권 최승희 편은 그가 중국에서 1946년 5월 귀국한 일을 설명한 직후 “일제강점기 행적 등이 문제가 되어 정착하지 못하고 7월 20일 남편 안막, 큰오빠 최승일과 함께 월북했다”고 기술한다. 그 뒤 김일성의 지원 하에 최승희무용연구소를 열고 활발하게 활동했다. 최승희처럼 친일파인데도 월북해 북한 사회의 중심적 인물로 활약한 인물들은 더 있다. 조선총독부 자문기관인 중추원의 참의를 지낸 장헌근도 그런 사례로 거론되고 있다. 일제의 녹봉 받아먹던 장헌근의 36년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보고서> 제4-15권과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에서 친일파로 규정된 장헌근은 임오군란 1년 전인 1881년 6월 28일 출생했다. 태어난 곳은 서울이다. 그의 프로필에서 눈에 띄는 것은 10대 시절부터 경력이 꽤 다채롭다는 점이다. 이곳저곳에서 여러 가지 경험을 한 것이 이목을 끈다. <친일인명사전>에 따르면, 16세 때인 1897년에 일본 야마구치현에서 양잠을 배우고, 이듬해 사가현에서 직물 실습을 배웠다.

[팟캐스트] 역발상 시즌2_조선혁명선언 100년 2부_조선혁명선언 전문 읽기

2023년 9월 26일 791

☞ (09.26) ‘역발상’ 시즌 2: 조선혁명선언 100년 2부_조선혁명선언 전문 읽기 2부에서는 조선혁명선언 전문을 낭독합니다. 낭독_MC노 조선혁명선언 강도 일본이 우리의 국호(國號)를 없이하며, 우리의 정권을 빼앗으며, 우리의 생존적 필요조건을 박탈하였다. 경제의 생명인 산림, 천택(川澤), 철도, 광산, 어장 … 내지 소(小)공업 원료까지 다 빼앗아 일절의 생산기능을 칼로 베이며 도끼로 끊고, 토지세, 가옥세, 인구세, 가축세, 백일(百一)세, 지방세, 주초(酒草)세, 비료세, 종자세, 영업세, 청결세, 소득세 … 기타 각종 잡세가 날로 증가하여 혈액을 있는 대로 다 빨아가고, 웬만한 상업가들은 일본의 제조품을 조선인에게 매개하는 중간인이 되어 차차 자본 집중의 원칙하에서 멸망할 뿐이오, 대다수 인민 곧 일반농민들은 피땀을 흘리어 토지를 갈아, 그 종년(終年) 소득으로 일신과 처자의 호구거리도 남기지 못하고, 우리를 잡아 먹으려는 일본 강도에게 진공하여 그 살을 찌워주는 영세의 우마(牛馬)가 될 뿐이오, 내종(乃終)에는 그 우마의 생활도 못하게 일본 이민의 수입(輸入)이 연년(年年) 고도의 속율(速率)로 증가하여 ‘딸깍발이’등쌀에 우리 민족은 발 디딜 땅이 없어 산으로 물로 서간도로 북간도로 시베리아의 황야로 몰리어 가 아귀(餓鬼)부터 류귀(流鬼)가 될 뿐이며… 이하 생략……. ※지난 방송 ☞ (09.19) ‘역발상’ 시즌 2: 조선혁명선언 100년 1부_조선혁명선언에 담긴 혁명사상 ☞ (09.05) ‘역발상’ 시즌 2: 간토대학살 100년 2부 “학살 이후 식민지 조선에서는 어떤일들이?” ☞ (08.31) ‘역발상’ 시즌 2: 소설 ‘범도’의 작가 방현석과 함께_특별편성2부 ☞ (08.30) ‘역발상’ 시즌 2: 소설 ‘범도’의 작가 방현석과 함께_특별편성1부 ☞ (08.29) ‘역발상’ 시즌

[오마이뉴스] 친일경찰 성공기… 윤 정권에서 부활한 그의 후예들

2023년 9월 26일 877

[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전봉덕 해방 이후 80년 가까이 되도록 친일 청산이 성사되지 못했다. 이를 훼방하는 세력이 항상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윤석열 정권이 그 바통을 쥐고 있다. 친일파 백선엽을 띄우고 독립투사 홍범도를 폄하하는 윤석열 정권의 모습에서 그 세력의 노골적인 몸부림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런 노골성을 선구적으로 보여준 인물이 있다. 친일파 아무개보다는 헌병사령관이나 법사학자(法史學者)로 더 많이 기억되는 전봉덕이다. 일제강점기의 친일행위보다는 해방 이후의 친일청산 훼방에서 훨씬 혁혁한 기록을 세운 인물이다. 친일 경찰, 일제 패망 후에는 ‘친일 청산’ 훼방 전봉덕은 백선엽의 고향인 평안남도 강서군의 동쪽인 평양에서 태어났다. 출생 연도는 백선엽보다 10년 빠르다. 1910년 12월 12일이다. 22세 때인 1932년에 경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만주 펑톈(봉천)보통학교 교원이 된 그는 1934년 경성제국대학 예과에 들어갔다. 그런 다음, 1937년 경성제대 법문학부에 입학해 3년 뒤 졸업했다. 그의 인생이 친일의 궤적으로 접어들고 있음을 표상하는 상징적인 두 사건이 대학 졸업 1년 전에 있었다. <친일인명사전> 제3권 전봉덕 편은 “재학 중이던 1939년 10월 일본 고등문관시험 행정과에, 같은 해 11월 사법과에 합격했다”고 설명한다. 행정고시와 사법시험을 1개월 간격으로 통과했던 것이다. 그는 두 개의 ‘고문’ 시험에 합격한 상태에서 30세 때인 1940년 3월 경성제대를 졸업하고 조선총독부 내무국에서 수습 생활을 시작했다. 그런 뒤인 1941년 2월, 평안북도경찰부 보안과장으로 기용됐다. 1993년에 발간된 <친일파 99인> 제2권에 수록된 김무용 구로역사연구소 연구원의 기고문 ‘전봉덕:

[일요신문] [인터뷰] ‘지청천 외손자’ 이준식 “홍범도 흉상 이전, 모든 독립투사 모욕”

2023년 9월 22일 1647

(일요신문, 2023.09.22) 기사원문 보기 ☞ [인터뷰] ‘지청천 외손자’ 이준식 “홍범도 흉상 이전, 모든 독립투사 모욕” “일부 극우 예비역 장성들, 독립군과 단절 시도…반공은 육사·국군의 최종 지향점 아냐” [일요신문] 육군사관학교에 설치된 홍범도 장군 흉상 이전을 둘러싼 논란이 뜨겁다. 9월 15일 육군사관학교로부터 명예졸업증서를 받았던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은 졸업장을 반납하며 항의 뜻을 나타냈다. 윤기섭 선생 외손자 정철승 변호사, 지청천 장군 외손자 이준식 전 독립기념관장, 이상룡 선생 증손자 이항증 국무령이상룡기념사업회 상임이사 등이 참여했다. 일요신문은 9월 21일 이준식 전 관장을 만나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이 전 관장은 통일부 공보관,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회 상임위원, 근현대사기념관장 등을 역임했고, 현재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다음은 일문일답. ―흉상 이전 방침을 언제 처음 들었나. “8월 24일 연락을 받았다. 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 사무총장이었다. 저녁 7시쯤이었다. 당시 집사람과 저녁을 준비하고 있었다. 사무총장은 내일(8월 25일) 육사에서 다섯 분(홍범도 지청천 이회영 이범석 김좌진)의 흉상을 철거하려고 한다고 했다. 소식을 듣고 한동안 멍하게 있었다. 상황 파악이 잘 안 됐다. 그다음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독립운동가들에게 이렇게 모욕을 줄 수 있는가. 참담했다. 그날 잠도 잘 못 잤다. 외할아버지(지청천)에 대한 모욕을 떠나 독립운동을 한 모든 이들에 대한 모욕이다.” ―바로 기자회견을 열었다. “소식을 들은 날 급하게 주변 사람들과 의견을 나눴다. 가만히 있으면 안 되겠다고 판단했다. 다음 날(8월 25일) 국회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했다. 김좌진 장군의 후손인 김을동 전

[한겨레] “일본 산업화 유산, ‘강제동원 삭제’ 안 돼”

2023년 9월 21일 480

(한겨레, 2023.09.21) 기사원문 보기 ☞ “일본 산업화 유산, ‘강제동원 삭제’ 안 돼” 일본 근대산업유산 특별전 ‘세계유산에서 기억해야 할 강제동원의 역사’ 2015년에 ‘8개 현 23개 시설’ 등재 유네스코, 전체 역사 알도록 권고 일 정부, 약속하고도 지키지 않아 등재 신청 중인 사도광산에 촉각 “일본의 산업유산 현장은 왜곡되고 역사는 사라졌습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은평구 녹번동 너나들이센터 기획전시실에서 강제동원 및 일본 근대산업유산 특별전 ‘세계유산에서 기억해야 할 강제동원의 역사’ 전시회(9월 5~24일)를 열고 있다. 14일 전시 현장에서 만난 김승은 민족문제연구소 식민지역사박물관 학예실장은 “일본이 산업화 유산 속에서 산업 발전의 밝은 면만 알리고 전쟁을 위해 강제동원한 사실을 외면하거나 삭제하면 안 된다”며 “그래서 우리는 강제동원 역사를 증언하는 피해자의 목소리에 더욱 귀 기울여야 한다”고 했다. 이번 전시는 2015년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일본 메이지 산업혁명 유산’ 현장을 소개하며, 일본 정부가 의도적으로 배제한 침략 전쟁, 식민 지배, 강제동원의 역사를 알리고 있다. 일본 메이지 산업혁명 유산은 1850년대부터 1910년까지 철강·조선·석탄산업을 중심으로 구성됐다. 모두 8개 현 11개 도시에 흩어져 있는 23개 시설이다. 일본정부는 유산의 가치를 ‘서구와 기술 교류를 통해 비서구 국가에서 달성한 최초의 산업화 유산’이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정작 강제노동의 역사는 쏙 빠져있다. 한국인과 중국인, 연합군 포로들을 강제노동시켰던 현장은 후쿠오카현 기타큐슈시에 있는 야하타제철소, 오무타시의 미쓰이 미이케탄광, 나가사키현 나가사키시의 미쓰비시 나가사키조선소, 다카시마탄광, 하시마탄광(군함도) 등 5곳이다. 민족문제연구소의 노력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등재 당시 각

[한겨레] [현장] 일본 군함도 홍보관, ‘조선인 차별 없었다’ 왜곡 추가

2023년 9월 21일 521

(한겨레,  2023.9.21) 기사원문보기 ☞ [현장] 일본 군함도 홍보관, ‘조선인 차별 없었다’ 왜곡 추가 도쿄 ‘세계유산 등재 홍보관’ 가보니…개악 엉뚱한 사업장 급여 자료로 “대우 좋아” <기사 발췌> 20일 오전 일본 도쿄 신주쿠구 총무성 제2청사 별관 1층. 이곳엔 일본 정부가 2015년 군함도(하시마) 등 일본 근대산업시설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하며 시설과 관련한 ‘모든 역사’를 기억하겠다고 약속한 뒤 만든 산업유산정보센터가 자리해 있다. 일본 정부 입장에선 널리 홍보해야 할 시설이지만, 어쩐 일인지 3년 넘게 사전 예약을 해야 갈 수 있고 내부 사진은 전혀 찍을 수 없는 등 폐쇄적인 운영 방침을 유지하고 있다. …중략… 위원회는 결정문에 방문객들이 정보무늬(QR코드)를 통해 세계유산 등재 과정에서 한·일 정부 대표가 했던 발언을 확인할 수 있는 곳이 생겼다는 점을 긍정 평가했다. 실제 큐알코드를 찍어보니, 2015년 7월 하시마 등의 세계유산 등재가 결정된 위원회 회의 장면이 동영상으로 연결됐다. 일본 대표인 사토 구니 주유네스코 일본대사와 한국 대표인 최종문 유네스코 협력대표의 발언이 잇따라 나왔다. 사토 대사는 “1940년대 일부 시설에서 수많은 한국인과 여타 국민이 본인의 의사에 반해 동원돼 가혹한 조건에서 강제로 노역했다. 일본은 정보센터 설립 등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한 적절한 조치를 하겠다”고 약속했다. 다만 일본어 자막이 없이 영어 발언만 나와 방문객들이 얼마나 이를 이해할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들었다. 큐알코드 바로 옆에 새로 설치된 ‘희생자를 기억에 남기다’라는 제목의 티브이 모니터 전시도 유네스코가

[팟캐스트] 역발상 시즌2_조선혁명선언 100년 1부_조선혁명선언에 담긴 혁명사상

2023년 9월 19일 469

☞ (09.19) ‘역발상’ 시즌 2: 조선혁명선언 100년 1부_조선혁명선언에 담긴 혁명사상 100년 전 1923년 1월 ‘조선혁명선언’이 중국 상해에서 의열단 이름으로 나왔다. 출연_김영범(대구대 명예교수) 오늘의 이야기 1.조선혁명선언의 발포 배경 2.작성경위 3.왜 혁명이어야 하는가? 4.어떤 성질의 혁명이어야 하는가? 5.조선혁명의 주체와 방법론 6.조선혁명의 최종 목표와 비전 ※지난 방송 ☞ (09.05) ‘역발상’ 시즌 2: 간토대학살 100년 2부 “학살 이후 식민지 조선에서는 어떤일들이?” ☞ (08.31) ‘역발상’ 시즌 2: 소설 ‘범도’의 작가 방현석과 함께_특별편성2부 ☞ (08.30) ‘역발상’ 시즌 2: 소설 ‘범도’의 작가 방현석과 함께_특별편성1부 ☞ (08.29) ‘역발상’ 시즌 2: 간토대학살 100년_1부 “은폐된 학살_누가 어떻게 얼마나 학살하였나?” ☞ (07.11) ‘역발상’ 시즌 2: 항일음악 이야기(4) “중일전쟁 이후 청년들의 공연활동과 항일음악” ☞ (07.04) ‘역발상’ 시즌 2: 항일음악 이야기(3) “항일음악 속 우리민요와 일제 잔재” ☞ (06.27) ‘역발상’ 시즌 2: 항일음악 이야기(2) “신흥무관학교의 항일노래” ☞ (06.20) ‘역발상’ 시즌 2: 항일음악 이야기(1) “항일음악 종소리 프로젝트” ☞ (06.13) ‘역발상’ 시즌 2: 친일파와 반민특위_나는 이렇게 본다 2부 ☞ (06.06) ‘역발상’ 시즌 2: 친일파와 반민특위_나는 이렇게 본다 1부 ☞ (05.30) ‘역발상’ 시즌 2: 이승만의 역사적 평가는 끝났다_씻을 수 없은 이승만의 죄과들 ☞ (05.23) ‘역발상’ 시즌 2: 이승만 띄우기에 나선 보훈처_기념사업에 약 460억원 추산 ☞ (05.16) ‘역발상’ 시즌 2: 민중가요사 8부_”존재 방식이 달라진 민중가요” ☞ (05.09) ‘역발상’ 시즌 2: 민중가요사 7부_”1990년대 중반 민중가요의 변화” ☞ (05.02) ‘역발상’ 시즌 2: 민중가요사 6부_”노동가요의 변화와 대학

민족사랑 2023년 9월호

2023년 9월 19일 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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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간토학살 추모 마음 짓밟는 한국 정부 규탄” 일본 주최측 단체 입장

2023년 9월 18일 445

[보도자료] [다운로드] [성명 전문] 조선인 학살 희생자 추도식전 한국인 참가자에 대한 윤석열 정부 탄압에 항의한다 올해 9월 1일은, 1923년의 간토대지진과 조선인 학살로부터 100년의 절목이었다. 조선인 학살의 역사에 대해 일본 정부는 “정부 조사에 한해 사실 관계를 파악할 수 있는 기록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유감의 뜻을 표명할 예정이 없다”는 입장이며, 진상규명에 대한 조사를 게을리하고 있다. 이에 일본 정부에 의한 식민지배의 책임은 모호한 상태로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2차 대전 이후에도 재일동포들은 차별 속에서 살아왔다. 간토학살 100년을 맞아, 일본 사회 식민주의를 불식하고 다민족 공생의 사회를 만들고자 재일동포와 일본인은 지금까지의 역사와 사회에 존재하는 다양한 울타리 등을 넘어 협력하고 추도식전과 추도 집회를 실시했다. 일본 많은 언론은 이에 공감해 지면을 크게 할애하여 보도했다. 이처럼 일본 사회는 협력하여 지금도 재일동포를 괴롭히는 식민주의·차별을 극복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이러한 일본의 움직임과 함께 한국 국내에서도 종교 단체, 평화 단체, 인권 단체, 노동조합 등이 ‘한국 간토학살 100주기 추도사업 추진위원회’를 조직하여 일본 현지에서 개최되는 다양한 추도식전과 집회에 참가했다. 우리는 이에 진심으로 찬사와 연대의 뜻을 표하는 바이다. 그런데 ‘동아일보’와 ‘문화일보’ ‘조선일보’ 등 일부 한국 언론은 예단이 가득한 기사를 게재하였고, 일본 사회의 이러한 노력에 찬물을 끼얹었다. 일본에서는 9월 1일, 희생자에 대한 순수한 추도의 마음을 담아 조선인 학살 희생자의 위령비가 있는 요코아미쵸 공원에서 매해 추도식전을 개최해 왔다.

[오마이뉴스] 위대한 독립운동가 밑에서 큰, ‘친일파 사위’의 정체

2023년 9월 20일 750

[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김만건 윤석열 정권은 반공이냐 아니냐로 독립운동 재평가를 시도하고 있다. 이로 인해 봉오동 전투의 영웅인 홍범도에게 가장 먼저 날벼락이 떨어졌다. 이런 식의 재평가는 러시아나 중국을 무대로 전개된 항일 무장투쟁을 우리의 독립운동 영역에서 배제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다. 1917년 러시아 혁명과 1921년 중국공산당 창당으로 인해, 한반도 바로 옆에서 공산주의 정권이나 정치세력이 급격히 팽창했다. 이 때문에 일제의 탄압을 피해 한반도 바깥에서 무장 항일투쟁에 헌신하려면, 현지 정권이나 정치세력과 협조하는 일이 부득이했다. 윤석열 정권 논리대로 러시아·중국의 협조하에 전개된 독립운동을 반국가 활동으로 규정하면, 한국 독립운동에서 가장 강력한 부분이자 일본제국주의가 가장 두려워했던 부분이 한국 독립운동의 역사에서 쏙 빠지게 된다. 홍범도에 대한 윤석열 정권의 폄하는 그런 위험성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윤석열 정권의 역사 재평가가 러시아나 중국을 무대로 한 독립운동에만 영향을 주는 것은 물론 아니다. 식민지 한국 내에서 노동운동이나 소작쟁의 등의 방법으로 저항한 독립투사들도 윤석열 정권하에서 ‘좌파 빨갱이’로 매도될 수 있다. 1919년 3·1운동과 더불어 일제강점기의 대표적인 대규모 민족운동인 1926년 6·10만세운동 역시 마찬가지다. 배후에서 이 운동을 이끈 조직이 박헌영으로 대표되는 조선공산당이기 때문이다. 독립운동의 근간을 뿌리째 뒤흔드는 윤석열 정권의 재평가로 인해 이익을 얻을 그룹도 당연히 존재한다. 반역자에서 애국자로 일거에 둔갑할 수도 있는 그룹이 있다. 러시아 등에서 독립운동가들에 맞서 친일 활동을 한 인물들은 윤 정권의 논리대로라면 애국자로 변신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