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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조병옥 ‘경무부장’ 이력만 기록? 민간인 학살 책임도 적시해야”
민족문제연구소 충남지회-4.3단체-천안시와 만났지만… 입장차만 확인 충남 천안시가 역사적으로 논란이 있는 조병옥에 대한 홍보를 강행하자, 천안시민들과 제주 4.3관련 단체들이 잇따라 성명서를 발표하고 집회를 벌이며 반발하고 있다. 앞서 천안시는 지난 5월 태조산 보훈 공원에 유관순 열사 표지판과 함께 ‘조병옥 홍보’ 표지판을 세웠다. 천안시민들과 제주 4.3 관련 단체들은 표지판을 철거하거나 적어도 표지판에 조병옥의 ‘과오’를 분명하게 기록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천안시가 난색을 표하면서 갈등이 계속되고 있다. 최기섭 민족문제연구소 충남지회장은 28일 <오마이뉴스>와의 통화에서 “우리 시민들의 입장은 천안시가 조병옥 홍보 표지판을 철거하고 싶지 않다면 적어도 그의 행적을 정확하게 기록해야 한다는 것이다. 제주 4.3에 대한 조병옥의 책임을 명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하지만 천안시는 조병옥의 ‘경무부장’ 이력 정도를 표시하겠다는 입장이다. 그것은 단순 이력일 뿐이다. 조병옥의 이력서가 아닌 조병옥의 역사적 과오를 분명히 기록할 필요가 있다”면서 “앞으로도 1인 시위와 집회를 통해 지속적으로 문제 제기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민족문제연구소 충남지역위원회 천안지회, 제주4.3범국민위원회, 제주4.3유족회 등도 지난 27일 천안시청 앞에서 “천안시는 조병옥에 대한 홍보를 즉각 중단하라”고 촉구하며 집회를 벌였다. 이번 집회는 지난 6월 6일 태조산 보훈공원 집회에 이은 두 번째 집회로 제주 4.3 관련 단체와 천안 시민 등 20여 명이 참석했다. 이들 단체는 성명서를 통해 “천안시가 조병옥 표지판을 세운 것은 독립운동의 성지라는 자부심을 지닌 천안 민들을 모욕하고 70만 제주도민들에게 다시 한번 씻을 수
[한겨레] “낙천적 자세로 역사 큰 흐름 보시던 실천적 역사학자셨죠”
[가신이의 발자취] 고 강만길 선생님을 보내드리며 강만길 선생님이 우리 곁을 떠나셨습니다. 1933년 일제 식민지배를 받던 엄혹한 시기에 태어나 해방 뒤 한반도의 분단과 전쟁의 참화, 독재와 민주화의 격동 속에서 꿋꿋이 식민잔재 청산, 분단극복, 평화통일의 한길을 걸으셨던 역사학자 강만길 선생님이 눈을 감으셨습니다. 학문과 사회 실천에 정진하시던 선생님의 건강한 모습이 생생한데, 갑작스러운 부고를 받으니 황망하고 애통하기 그지없습니다. 더구나 한국 사회가 그 어느 때보다 거대한 역사의 변화를 통찰하며 나아갈 길을 밝혀줄 현자의 목소리를 갈망하고 있기에, 남겨진 우리는 막막하여 어찌할 바 모르겠습니다. 선생님의 영전에 서니 선생님께 배운 바가 새록새록 떠오릅니다. 선생님의 학문 세계를 살펴보면 크게 정체성론, 타율성론으로 대표되는 식민사학을 극복하고 근대화의 흐름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길을 닦았던 시기, 분단시대의 모순을 직시하며 통일시대를 전망하기 위해 좌우합작에 기반한 민족운동과 탈냉전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정초했던 시기로 나눌 수 있습니다. 선생님은 역사는 인간의 고투 속에서 변화하고 진전한다는 자명한 사실을 강조하며 이를 학문적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선생님께 배우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가르침은 역사학자는 현실 문제에 외면하지 말아야 하나, 철저히 자신의 학문적 성찰을 기반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아울러 선생님은 항상 역사의 거대한 흐름과 변화를 말씀하시며 역사학자로서 낙천적인 자세를 견지하라고 강조하셨습니다. 몸소 20세기 고난의 한국 근현대사를 직접 겪었으면서도 21세기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 그리고 인간다운 삶을 사는 세상이 열리리라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학문적 열정을 다하셨습니다.
[민중의소리] 문 전 대통령 등 故강만길 추모 “실천적 지성인의 표상”
민족문제연구소 “민족사 자체의 해방을 위해 헌신한 선생님의 뜻 잊지 않겠습니다” 평화통일운동에 헌신해 온 대표적인 진보 역사학자 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의 별세에, 추모성명이 이어지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25일 ‘촛불행동’ 명의의 추모 성명을 홈페이지에 게시했다. 지난 23일 향년 91세로 별세한 강 교수는 민족문제연구소와는 창립 당시부터 고문으로 참여하고 친일인명사전편잔위원회 지도위원 및 내일을여는역사재단 명예이사장을 맡아 깊은 인연을 이어왔다. 촛불행동은 해당 추모성명에서 “유신체제의 폭력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역사학자로서 실천과 투지를 온전히 보여준 강만길 선생님은 실로 시대의 사표(師表)”라며 “일제 식민지 사학의 늪에 빠져 있던 우리의 역사학을 바로 세우는 작업에 평생을 바쳤고, ‘분단의 고통과 통일의 임무’를 끊임없이 일깨우면서 ‘모든 역사학이 현재의 가장 통렬한 고통에 답을 내야 한다’는 원칙을 가르침으로 남겨줬다”고 밝혔다. 이어 “오늘날 강만길 선생님의 뜻은 더욱 절박한 우리의 과제가 되고 있다”라며 “일상에서는 분단의 고통에 무감각해지도록 기만당하고 있고, 통일은 망각된 시대적 주제로 치부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무엇보다 “강만길 선생님은 ‘민족해방운동’의 뿌리를 깊이 탐구하고 ‘분단이 존재하는 한 민족해방의 과업은 끝나지 않았’음을 절절하게 강조해 왔다. 그리고 외세가 지배하는 분단체제는 민주주의를 근본적으로 억압하고 민족의 미래를 가로막는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일생을 민족사 자체의 해방을 위해 헌신한 선생님의 뜻을 잊지 않겠습니다”라고 다짐했다. 문재인 전 대통령도 24일 페이스북과 트위터 등에 추모 글을 올렸다. 강만길 교수는 김대중 정부부터 노무현 정부까지 약 10년간 통일고문을 역임했으며,
[오마이뉴스] 일본 대신 한국인의 정신 수준 탓하는 원로목사들
[김종성의 히,스토리] 한국 기독교, 누구의 길을 따를 것인가? 윤석열 정부의 대일외교로 인해 기독교 내부도 갈라져 있다. 지난 5월 4일 서울 종로구 한국기독교회관에 모인 목사들은 윤 정부를 정면으로 비판했다. 이들은 서명에 참여한 목회자 1016명을 대표해 ‘윤석열 정부 1년에 부치는 기독교 목회자 시국선언’을 발표했다. 그중 한 대목은 이렇다. “일방에 치우친 외교는 국가의 위신을 추락시킬 뿐 아니라 오히려 경제적·군사적 안보의 위협 요인이 되고 있다. 민족의 역린을 건드린 대통령의 3·1절 기념사,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노동자 문제에 대한 해법, 국가안보실 도청 사건에 대한 대처 등은 주권국가에서 있을 수 없는 일로, 미국과 일본에 치우친 사대적이며 굴욕적인 외교 가운데 빚어진 참사이다.” 1016명보다 숫자는 훨씬 적지만 힘에서는 밀리지 않는 정반대 선언도 있었다. 김삼환·김진홍·이영훈·소강석·길자연을 비롯한 원로 목사 206명은 5월 3일 여의도 사랑의나눔 사무실에서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런 한일관계를 원한다’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들은 성명서에서 윤 정부뿐 아니라 일본 자체를 적극 지지했다. 이 206명은 한국 국민들의 “정신 수준”을 이렇게 비판했다. “지금 한국은 많은 분야에서 일본을 능가하고 있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전 세계 사람들로부터 일본인과 한국인 누가 더 존경받는가다. 누가 상대방을 더 열심히 돕고 어려운 나라를 더 열심히 돕는가? 한국은 이런 정신 수준이 아직 일본보다 높다고 말할 수 없다.” 이들은 윤 정부가 ‘일방적인 양보를 하는데도 일본이 성의를 보이지 않으면, 윤 정부에 문제가 있는 게
[오마이뉴스] 한국문인협회가 제정한 조연현문학상의 실체
[김종성의 히,스토리] 일제강점기 20대 남자 친일파로 맹활약한 조연현 10대와 20세 전후는 3·1운동, 4·19혁명, 6월항쟁과 2016년 촛불혁명 등에서 큰 역할을 했다. 이 세대는 결정적인 순간마다 역사의 물꼬를 트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일찍부터 기득권을 편들며 세상의 발전을 저해하는 이들이었다. 일제강점기 막판에 20대 남자 친일파로 맹활약한 조연현도 그런 사람이었다. 유관순이 18세 나이로 순국하기 2개월 이틀 전인 1920년 7월 26일 경상남도 함안군에서 출생한 조연현은 함안공립보통학교·배재중학 등을 거쳐 혜화전문학교(훗날의 동국대)에서 수학한 뒤 시인·비평가·언론인으로 성장했다. 그는 18세 때인 1938년에 배재중학을 졸업한 뒤, 친일파 방응모가 창간한 대중잡지인 <조광>에 ‘하나의 향략’이란 시를 발표했다. 이렇게 문단에 데뷔한 다음, 스무 살을 갓 넘은 시점부터 문학비평 분야에서 친일파로 두각을 나타냈다. 그가 출생한 함안군 바로 위쪽에 창녕군이 있다. 여기서 1929년에 출생하고 한국 친일파 연구의 토대를 닦은 임종국은 한일협정 이듬해인 1966년에 발간된 <친일문학론>에서 조연현 또래의 문인들을 일제강점기 말기의 ‘신진 작가들’로 묶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태평양전쟁(대동아전쟁)이 발발했다. 이 시기를 전후해 활동을 개시한 문인들이 임종국이 말한 신진 작가들이다. 임종국은 이들의 특징과 관련해 “1941년 전후로부터 등장한 작가들이 기성 작가들과 구별되는 가장 근본적이요 뚜렷한 차이점은 그들이 조선의 특수성 문제를 별로 논의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라고 정리한다. 한국 문학을 일제 어용문학인 국민문학으로 바꾸는 일은 임종국의 표현에 따르면 “4천년의 전통을 해소하고 2600년 속으로 융화”시키는 일이었다. 4천년이 넘는
[동영상] [이제는 말할 수 있다] 6.25, 일본 참전의 비밀
오마이뉴스(2001.6.12)_기사링크 ☞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6.25, 일본 참전의 비밀
[뉴공 아카이브]방학진(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 독립운동가 후손들 분노 유발한 한희원 교수 임명, 왜? ‘식민사관’ 발언의 중심 ‘요시다 쇼인’은 누구인가.
아래 인터뷰는 2023년 06월 20일자, “김어준의 겸손은 힘들다 뉴스공장” 방송분입니다. 신속한 정보 제공을 위해 녹취에는 내용 이해에 무리가 없는 범위 내, 약간의 오타가 있을 수 있으니 이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 내용 인용 시 [김어준의 겸손은힘들다 뉴스공장] 인터뷰 내용임을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 ▶김어준 : 한희원 교수라는 분이 경북독립운동기념관장에 임명이 됐습니다. 자,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이 임명에 대해서 일제히 반발하고 나섰는데 왜 그런지 짚어보겠습니다. 민족문제연구소 방학진 실장 전화 연결돼있습니다. 안녕하세요. ▷방학진 : 예, 안녕하십니까. 방학진입니다. ▶김어준 : 자, 지난 6월 15일 경북도청 앞에서 독립운동 하셨던 분들의 후손들이 여러 분 나오셔가지고 이 한희원 내정자를 임명한 것을 철회하라, 이런 기자회견 했는데 현장에 계셨죠? ▷방학진 : 그렇습니다. ▶김어준 : 자, 이 한희원 교수가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진 인물은 아닌데 한희원 관장, 이제 임명이 됐으니까 관장입니다. 한희원 관장이 어떤 발언을 했길래 독립운동가들, 그 경북 쪽의 독립운동가들이 다 나서신 것 같던데,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이. 어떤 발언을 했길래 이게 이렇게 연결된 겁니까? ▷방학진 : 지금 현재 경북독립운동기념관은 도립이거든요, 경북 도립. ▶김어준 : 도립. ▷방학진 : 이철우 도지사가 임명권자인데요. 3년 임기고, 어제 날짜로 이전의 3대 관장 임기가 끝나서 5월 초에 이사회를 열어서 한희원 씨를, 이제 당시 동국대학교 대학원장 한희원 씨를 내정했다는 소식이 나왔는데 그때는 별 반응이 없었는데 어떤 언론에서 이 한희원
민족사랑 2023년 0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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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박정희의 유혹을 두 번이나 뿌리친 친일파
[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이한림 전두환보다 한 살 적은 노태우(1932년생)는 친구 전두환의 정변을 두 번이나 도왔다. 전방의 9사단장이었던 그는 1979년 12·12 쿠데타를 회고하는 대목에서 “9사단의 예비연대를 출동시키기로 결심했다”(<노태우 회고록> 상권)고 말했다. 12·12로 군부는 장악했지만 행정부는 아직 충분히 장악하지 못한 전두환은 이듬해 5월 17일 두 번째 쿠데타를 감행했다. 이날도 노태우는 친구를 도울 결심을 했다. “나는 병력을 동원하기에 앞서 곰곰이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라고 한 뒤 “시위의 근원지를 진압해 무력화시키기로 했다”고 위 회고록에서 밝혔다. 전두환 친구 노태우와 달리 박정희 친구 이한림은 정반대였다. 박정희보다 4년 뒤인 1921년 2월 10일 출생했지만 만주국 육군군관학교(신경군관학교)와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함께 다닌 이한림은 박정희가 야심을 드러낼 때마다 뜯어말리거나 참여를 거부하곤 했다. 이한림은 만주 군관학교에 들어간 1940년 4월부터 일본제국주의의 밥을 먹었다. 일본 육사를 졸업하고 군대 현장에 투입된 1944년 4월 이후에는 일제에 대한 경제적 의존도가 더 높아졌다. 이처럼 동기 박정희와 보조를 맞추며 5년간 친일 재산을 축적한 그는 24세 나이로 1945년 해방을 맞이했다. 박정희는 8·15로부터 9개월이 지난 1946년 5월 6일 텐진(천진)에서 귀국선을 타고 이틀 뒤 부산에 도착했다. 그가 한국 육사의 전신인 조선경비사관학교에 입학한 것은 그해 9월 24일이다. 해방의 충격으로 박정희가 멈칫하는 사이에 이한림은 동기 박정희보다 훨씬 민첩하게 움직였다. 그는 친일에서 친미로 신속히 전환했다. <친일인명사전> 제3권 이한림 편은 함경남도 안변 출신인 그가 “1945년
[대구MBC] 이승만·트루먼 전 대통령 동상 결국 기습 설치
◀앵커▶ 얼마 전 이승만, 트루먼 한미 전직 대통령 동상을 칠곡 다부동전적기념관에 세우기로 해 논란이 일고 있다는 보도를 해드렸습니다. 6월 16일 새벽 기습적으로 세웠습니다. 현재 5m 높이의 장막이 처져 있고 조만간 공개할 것으로 보이는데요. 반대 단체가 강하게 반발하고 있어 갈등이 커질 전망입니다. 한태연 기자가 보도합니다. ◀기자▶ 경북 칠곡 다부동전적기념관 한 켠에 5m 높이의 장막이 처져 있습니다. 장막 안에는 높이 4m 20cm, 중량 3t인 청동 조형물 2개가 세워져 있습니다. 민간 단체인 ‘이승만·트루먼 동상건립추진 모임’이 16일 새벽 기념관에 옮겨 세운 이승만, 트루먼 동상입니다. 동상건립추진 모임은 “한국전 승리의 두 주역의 동상을 다부동 전적지에 세워 자유세계를 구한 결전장의 역사적 의미를 새기고, 자유통일을 이루겠다는 다짐으로 국내외 두 나라 국민들의 희생과 용기를 자랑할 수 있게 되었다”며 설립 취지를 밝혔습니다. 동상 설립 일정을 공개하지 않은 것은 충돌을 막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이동복 동상건립추진위원▶ “반대하는 입장에 서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는 순수하지 못한 사람도 많이 있다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 할 수 있는 입장도 아니지만 가령 지금 시점에서 일정이 공개되면 그 일정을 그런 사람들한테 신호를 주는 거나 마찬가지이지.” 4.19 반독재 민주혁명으로 물러난 이승만 전 대통령의 동상을 세우는 것에 대해서는 정치적 해석이 아닌 6.25전쟁에 대한 관점에서 봐달라고 설명했습니다. ◀이동복 동상건립추진위원▶ “이것은 6.25전쟁에서 대한민국을 지킨 공적에 대한 우리의 기념물이지, 이승만 대통령의 정치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