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기사
[오마이뉴스] 역사망언 3종세트… ‘대통령 속성 과외’는 실패했다
[주장] 삼일절 기념사, 강제동원 피해자 3자 변제, 이번엔 ‘일본 무릎’… 퇴행과 거짓을 어찌할까 윤석열 대통령이 기어이 ‘역사 망언 3종 세트’를 선보였다. 삼일절 기념사에서 그는 “세계사의 변화에 제대로 준비하지 못해 국권을 상실하고 고통받았던 우리의 과거를 되돌아봐야” 한다면서 일본 제국주의의 폭력적·반인도적 팽창에 대한 비판은 생략한 채 식민주의 역사학의 단골 논리인 정체성론(停滯性論, 조선은 근대로 이행하지 못하고 낙후된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는 주장)을 들고 나왔다. 3월 6일엔 ‘강제징용 대법원 판결 관련 정부 입장’을 발표하면서 식민지배의 불법성과 전범기업의 반인도적인 불법행위에 대한 배상책임을 인정한 2018년 대법원 판결을 무시하고 정부가 일본 강제동원 가해 기업의 사법적 책임을 면책시켜주는 월권을 자행했다. 그러더니 급기야 “100년 전 일로 일본이 무릎 꿇어야 한다는 생각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서 일찍이 역대 한국 대통령과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역대급 역사 망언을 자행했다. 지난 24일 <워싱턴포스트>에 실린 망언의 전체 문장은 이렇다. “유럽은 지난 100년 동안 여러 번의 전쟁을 경험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 중인 국가들은 미래를 위해 협력할 방법을 찾았습니다. 저는 100년 전에 일어난 일 때문에 어떤 일을 하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고 그들(일본)이 100년 전 우리의 역사 때문에 (용서를 위해) 무릎을 꿇어야 한다는 생각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결정이 필요한 문제입니다. 설득력 면에서 저는 최선을 다했다고 믿습니다.” 미래를 위한 협력… 독일은 어떻게 했나 이 발언의 문제점을 살펴보자.
[한겨레] 사도광산 근무 일본인 “강제동원은 사실”…한·일 시민이 밝혔다
강제동원 공동조사보고서 발간 “가동 나쁜 자(일을 못하는 이)에게 탄압 정책을 취하고 근로과에 데려와 때리는데 차마 보고 있을 수 없는 폭력이었다.” 옛 미쓰비시광업이 운영하던 니가타현 사도시 사도광산의 노무 담당자 스기모토 소지는 1974년 이 광산의 역사를 조사하던 혼마 도라오(1926~2006)에게 편지를 보내온다. 스기모토는 1940년 1월 충청남도 논산에서 조선인 100명(실제 광산 도착은 98명)을 ‘집단 모집’ 방식으로 강제동원한 인물이었다. 편지엔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여부를 놓고 현재 한-일 간에 치열한 줄다리기가 진행 중인 사도광산으로 조선인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동원되고 어떤 대접을 받았는지 적혀 있다. “그들 입장(조선인 노동자)에서 본다면 강제노동을 당하고 1년 모집이 수년으로 연기돼, 반 정도 자포자기인 상태가 됐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 없는 사실이었다.” 한국 민족문제연구소와 조선인 강제동원과 관련한 역사의 진실을 파헤쳐온 일본 시민단체 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가 24일 사도광산의 강제노동 실태를 규명한 한·일 시민 공동조사보고서 ‘사도광산과 조선인 강제동원’을 내놨다. 한·일 시민들은 일본 정부·경찰이 만든 18개의 공문서, 스기모토 등 노무계 직원의 증언, 2004년 설립된 한국 정부의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위원회)에 접수된 피해신고(148명이 피해자로 인정) 내용 등을 종합 검토해 사도광산으로 끌려갔던 조선인 1519명의 강제노동 실태를 종합적으로 규명해냈다. 한·일 시민들은 이 가운데 700여명의 명부를 완성했고, 18명의 사망 실태를 확인했다. 조선인 노동자들은 광산에 말 그대로 ‘강제동원’됐다. 스기모토는 모집에 앞서 희망지역·고용기간·직종 등을 적어 조선총독부에 제출했고 희망지역에서 노동자들을 할당받기 위해 총독부·도청·군청 관계자에게 “외교전술”(접대를 의미하는 말)을 사용했다. 조선총독부의
[MBC 뉴스] 윤 대통령 방미길 오르자 학계·시민사회 “굴욕 외교 규탄” 비판
앵커 앞서 전해드린 것처럼 오늘 윤석열 대통령이 미국 방문길에 올랐는데요. 학계와 시민사회 곳곳에서 정부의 외교 정책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잇따르고 있습니다. 성균관 대학교에서는 교수와 학생 250여 명이 시국 선언에 나섰습니다. 김정우 기자가 취재했습니다. 리포트 오늘 오전, 서울 성균관대학교 정문 앞. ‘굴욕외교를 규탄한다’는 현수막을 든 교수와 졸업생, 재학생들이 모였습니다. “대미 굴욕 외교 전면 수정하라!” <수정하라! 수정하라! 수정하라!> 윤석열 대통령이 미국 방문 길에 오른 날, 정부의 외교 행보를 거세게 비판했습니다. [임경석/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정상회담을 앞두고 우크라이나에 무기 제공 의사를 공언했어요. 대만의 ‘현상 변경’ 운운했어요. 안보 외교정책의 난맥상이 무능과 굴욕을 넘어서 이제 전쟁의 위기를 불러들이는 상태에‥” 안보 위기를 자초하면서도, 미국 정보기관의 도청은 왜 모른 척 하냐고 따졌습니다. [김진균/비정규직교수노조 성대분회장] “대통령실 도청 사실은 대한민국 주권에 대한 유린 행위입니다. 그런데 대통령실에서는 ‘아무 문제 없다’고 하면서 지나치고 있습니다. 미국과의 굴욕 외교도 감수하고 있는 것입니다.” 민족문제연구소 등 시민사회단체들도 잇따라 기자회견을 열었습니다. 산적한 외교적 의혹에 입장도 안 밝힌 윤 대통령이 미국 방문길에 나섰다며, 유감을 나타냈습니다. [안충석/천주교 서울대교구 원로 신부] “불법적 도청에 대한 미국의 사과와 우크라이나 지원과 관련된 모든 의문이 해소되지 않는 상태에서 한미 정상회담 추진은 안 된다는‥” 용산 대통령실 앞에 모인 진보 성향의 정당들 역시 “도청은 미국의 내정 간섭이자 주권침해”라며 “누구를 위한 한미 동맹이냐”고 비판했습니다. MBC뉴스, 김정우입니다. 영상취재: 윤병순,
[오마이뉴스] 남한과 북한에 각각 자수한 어느 유명 시인
[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김동환 전두환 손자인 전우원씨처럼 조상의 잘못을 사과하는 데 적극성을 보인 인물이 있다. 친일파인 김동환의 아들인 김영식씨가 그런 사람이었다. 1994년에 펴낸 <아버지 파인 김동환-그의 생애와 문학>에서 “가족을 대신하여 국가와 민족 앞에 깊이 머리 숙여 사죄합니다”라며 용서를 빌었다. 전직 고등학교 국어교사인 장호철의 <부역자들, 친일 문인의 민낯>은 “부친의 일대기를 펴낸 바 있는 파인의 셋째아들이 2002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연 학술 심포지엄에서 부친의 친일 죄과를 민족 앞에 사죄한 것은 특기할 만하다”라며 “친일 인사가 스스로 자신의 행위를 참회한 예도 드물지만, 후손이 선대의 친일 행위를 사죄한 것은 처음이 아니었나 싶다”라고 평했다. 그런데 김동환 본인도 그런 자발성을 보인 일이 있었다. 국회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의 친일파 체포 작업이 한창일 때 발행된 1949년 3월 1일 자 <경향신문> 기사 ‘김동환 자수’는 “김동환(삼천리사 주간)은 작(昨) 28일 오후 2시 반민특위에 자진 출두하여 과거의 친일 행위에 대한 적당한 벌을 민족 앞에 받아야 할 것이라고 자수”하여 왔다고 보도했다. 같은 달 3일 자 <동아일보> 2면 좌단에 따르면, 그 직전까지 반민특위는 영장 발부 일주일이 지나도록 김동환을 체포하지 못하고 있었다. 소재가 불명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가 도주했다는 소문이 떠돌던 차에 자진 출석하는 그를 맞이하게 됐던 것이다. 자수 직후에 그는 <삼천리> 3월호 발간을 준비하느라 바빴다며 “3월호 편집이 끝나면 출두할 각오로 있었던 것으로 3천만 민족 앞에 적당한 벌을 받아야
민족사랑 2023년 04월호
[바로보기] * 왼쪽 바로보기로 들어가셔서 표지의 각 목차를 클릭하시면 해당페이지로 이동합니다.
[오마이뉴스] 세계가 주목한, 독일 대통령의 통렬한 반성문
[전문] ‘바르샤바 게토 봉기 80주년’ 프랑크 발터 슈타인마이어 독일 대통령 연설 3.1운동이 일어난 지 80주년이 된 1999년 3월 1일. 독립기념관이 있는 충남 천안에서 3.1절 80주년 행사가 열립니다. 이 자리에 일본의 총리가 참석해 연설을 합니다. ‘잘 가시오 조선인들이여, 다시는 그런 재앙이 없기를’이라는 유창한 우리말로 시작한 연설에서 유관순 열사를 추모하며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인 양금덕 할머니에게 용서를 구하고 ‘저는 오늘 여러분 앞에 서서 일본군이 이곳에서 저지른 범죄에 대해 용서를 구합니다’라며 고개를 숙입니다. 그러나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일본은 이미 여러 번 사과했는데 왜 자꾸 과거를 재론하느냐며 짜증스러워하는 모양새입니다.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는 회고록에 ‘몇 번을 사과해야 끝나는 거냐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고 쓴 것으로 알려지기도 했습니다. 직접 사죄를 피하려는 온갖 전략과 책임을 면하려는 권모술수가 횡행하는 모습을 보면 할 말을 잃게 됩니다. 그런 일본을 향해 독일의 사과를 들려주고 싶습니다. 지난 19일은 독일 나치군이 점령한 폴란드 바르샤바 게토(유대인 강제거주지역)에서 유대인들이 일으킨 대규모 무장투쟁인 ‘바르샤바 게토 봉기’ 80주년이었습니다. 1943년 일어났던 이 봉기로 인해 유대인 1만 3000여 명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열린 바르샤바 게토 봉기 80년 기념식에 안제이 두다 폴란드 대통령과 프랑크 발터 슈타인마이어 독일 대통령, 이츠하크 헤르초그 이스라엘 대통령이 함께 참석했습니다. 독일 국가원수로는 처음으로 이곳에서 연설을 한 슈타인마이어 독일 대통령은 독일의 끝없는
[오마이뉴스] ‘이승만 기념관’ 추진하는 박민식 국가보훈처장의 궤변
[김종성의 히,스토리] 이승만 가장 큰 잘못이 ‘노년에 주변 관리 못한 것’? 윤석열 대통령의 63주년 4·19 기념사는 어딘가 개운치 않은 느낌을 준다. 서울 수유동 국립4·19민주묘지에서 거행된 기념식에서 그는 “이곳 4·19민주묘지에는 오백일곱 분의 4·19민주영령들께서 영면해 계십니다”라며 “자유와 민주주의를 향해 횃불을 높이 들었던 학생과 시민의 위대한 용기와 희생에 경의를 표하며 머리 숙여 명복을 빕니다”라고 말했다. 그런 뒤 그는 4·19의 주역들을 4·19의 적들과 대비시키지 않고 엉뚱하게도 ‘사기꾼’을 꺼내 들었다. “거짓 선동, 날조, 이런 것들로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세력들은 독재와 전체주의 편을 들면서도 겉으로는 민주주의 운동가, 인권 운동가 행세를 하는 경우를 세계 곳곳에서 저희는 많이 봐왔습니다”라며 “이러한 거짓과 위장에 절대 속아서는 안 됩니다”라고 경고했다. 이런 다음, “4·19 혁명 열사가 피로써 지켜낸 자유와 민주주의가 사기꾼에 농락당해서는 절대 안 되는 것입니다”라고 강조했다. 4·19가 만들어 낸 자유와 민주주의가 이승만 같은 독재자들에 의해 농락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지 않고, 위선적인 민주주의 운동가나 인권운동가들에 의해 농락당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위선적인 운동가들을 당연히 경계해야겠지만, 4·19 영령들을 추모하는 자리에서 이승만과 자유당 정권을 겨냥하지 않고 ‘사기꾼’들을 겨냥하는 것이 과연 적절한지 생각하게 된다. 이날 기념식의 주제는 ‘자유의 꽃이 피련다’였다. 국가보훈처는 18일 보도자료에서 “독립유공자이자 4·19 공로자이신 이희승 님이 4·19혁명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해 쓴 비문의 일부”라며 이 문구를 택한 이유에 관해 “4·19 혁명에 참여한 정의로운 학생과 시민들의 고귀한
[오마이뉴스] “대법원, 전범기업 자산 강제매각 결정 즉각 선고해야”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단체 기자회견…”피해자들 최장 31년째 법정 투쟁, 부정의 끝내야” 일제강제동원 피해자와 피해자 지원단체는 19일 일본 전범기업 국내 자산 강제매각을 위한 특별현금화명령 재항고 사건을 장기간 심리 중인 대법원을 향해 “좌고우면 말고 즉각 선고하라”고 촉구했다.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 등 피해자 지원단체와 소송 대리인단은 이날 오전 서울 대법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망국적 외교의 시간은 끝났다”며 이같이 요구했다. 이제 다시 사법부의 시간…”부정의 상태 끝내야” 현재 대법원에는 전범기업 배상책임을 인정한 2018년 대법원 판결과 관련해 미쓰비시중공업 상표권과 특허권 각각 2건에 대한 특별현금화명령 재항고 사건, 피고 일본제철이 소유한 피엔알 주식 19만 4794주에 대한 특별현금화명령 재항고 사건이 계류돼 있다. 이 중 근로정신대 피해자 김성주 할머니(95)가 압류한 미쓰비시중공업 특허권 2건에 대한 특별현금화명령 재항고 사건의 경우, 2022년 4월 19일 대법원에 접수돼 이날로 꼬박 1년이 흘렀다. 2018년 전범기업 책임을 인정한 대법원 판결에도 피고기업들이 배상을 미루면서 미쓰비시 근로정신대 소송의 경우 첫 소송을 제기한 2012년부터 무려 11년이 흐르도록 배상을 받지 못했다. 일본제철 소송의 경우 장장 18년(2005년 소 제기)이 걸리도록 손해배상을 받지 못했다. 일본 법원에 제기한 소송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미쓰비시 근로정신대의 경우 24년(1999년 소 제기), 일본제철의 경우 무려 26년(1997년 소 제기)에 이른다. 근로정신대로 동원된 양금덕 할머니의 경우, 1992년 도쿄지방재판소에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이래 무려 31년째 법정투쟁을 이어가고 있다. 정부와 법원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면서 수많은
[오마이뉴스] 매일 신선한 생선 갖다바쳤던 기회주의 처세술의 화신
[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이근택 을사오적들은 오늘날뿐 아니라 당대에도 당연히 미움을 받았다. 물리적 공격도 받았지만, 욕도 많이 먹었다. 그중에서 인상적으로 욕을 먹은 것이 군부대신 이근택(1865~1919)이다. 1905년 11월 17일 대한제국 외교권을 넘긴 을사늑약(을사보호조약)의 핵심인 당시 40세의 이근택은 이완용·권중현·박제순·이지용과 함께 거국적 지탄의 대상이 됐다. 이때 그가 땀을 뻘뻘 흘리며 집으로 돌아가 가족들에게 한 말이 있다. “나는 다행히도 죽음을 면했다”라는 말이다. 당시 역사를 담은 황현의 <매천야록>에 따르면, 이근택의 그 한마디가 주방의 가사도우미 귓속으로 들어갔다. 이근택의 며느리인 한씨가 결혼할 때 데리고 간 몸종이었다. 며느리 한씨는 이토 히로부미에 맞서 을사늑약 체결을 저지하다가 징계를 받고 연금됐다가 늑약 직후 풀려난 한규설의 딸이다. 한규설은 1910년 국권침탈 뒤에 일본이 주는 남작 작위도 거부했다. 바로 그 한규설의 집에서 노비로 살다가 이근택 집에서 일하게 된 여성이 이근택의 그 말을 부엌에서 듣게 됐던 것이다. <매천야록>에 따르면, 이 여성은 주방에 있던 난도(鸞刀)를 들고 밖으로 나왔다. 짐승 잡을 때 쓰는 제례용 칼을 손에 쥔 그는 주인집 가족들 앞으로 다가가 이렇게 소리쳤다. “이근택! 너는 대신이 되어 나라의 은혜를 입은 게 얼마나 많으냐. 그런데도 나라가 위태한데 죽지 못하고, 한다는 말이 ‘나는 다행히 면했다’이냐? 너 정말 개·돼지만도 못하구나. 내 비록 천한 사람이나, 어찌 개·돼지의 노비가 될 수 있겠느냐? 내 칼이 약해서 너를 만 동강이로 벨 수
[프레시안] 수탈이냐 근대화냐, 민족주의자 신용하와 탈민족주의자 이영훈의 논쟁
[김재명의 전쟁범죄 이야기 15] 누구를 위한 ‘역사전쟁’인가 (中) ‘신친일파’들의 주요 논리 가운데 하나가 ‘식민지 근대화론’이다. 변화와 개혁의 동력을 잃은 조선 왕조를 쓰러뜨린 일본의 식민 통치를 거치면서 조선이 근대화를 이루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많은 연구자들은 (학교가 많이 들어섰다느니, 철로의 길이가 길어졌다느니 하는) 통계 숫자 뒤에 가려진 식민지 근대화의 어두운 그늘을 거듭 지적해왔다. 그래서 이들은 묻는다. “누구를 위한 근대화였는가?” <반일 종족주의>의 대표필자 이영훈과 고교와 대학(경북고, 서울대 경제학과) 동기인 허수열(전 충남대교수, 토지경제학)도 그런 물음을 던진 연구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오래 전부터 일제의 농업개발을 통한 ‘식민지 근대화론’을 실증적으로 비판해온 그는 일제 강점기의 개발은 조선인에게 있어서 (그의 책 제목처럼) ‘개발 없는 개발’이라 못 박는다(1951년생으로 고교와 대학 동기인 이영훈의 이론적 비판자였던 허수열은 올해 초 타계했다). [일본 제국주의의 지배 기간 동안 조선은 급속한 개발을 경험했다. 그러나 그 개발의 이득은 조선인들에게 거의 귀속되지 않았다. 조선인들의 경제적 처지도 거의 개선되지 않았고 또 개선될 전망도 없었으며 극심한 경제적 불평등과 그에 따른 민족차별이 구조적으로 확대재생산되고 있었다.](허수열, <개발 없는 개발> 은행나무, 2017, 28쪽). 그는 말한다. 이른바 식민지 근대화론은 한결같이 조선이라는 ‘지역’을 대상으로 삼고 있지만, 이런 분석은 의미가 없고 잘못됐다고 여긴다. ‘지역’ 기준보다는 조선인이라는 ‘민족’ 기준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일제 강점기에 조선의 국내총생산(GDP)이 연평균 4.1% 성장했다는 통계자료가 있지만, 이런 통계가 일제의 피지배층인 조선인들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