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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TN라디오] 독립군가 복원 프로젝트 : 100년의 소리 간호특별기획 9편 : 정순자 (518 간호사)
민족문제연구소는 2017년 『항일음악 330곡집』을 발간한 이후 <항일음악회> 개최 등 항일음악 보급을 통한 독립정신 선양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YTN 라디오는 민족문제연구소의 자문을 받아 2020년 11월 ‘국치추념가’를 시작으로 <독립군가 복원 프로젝트 : 100년의 소리>를 방송 중입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독립군가 복원 프로젝트 : 100년의 소리> ☞ 간호특별기획 9편 : 정순자 (518 간호사) ☞ 간호특별기획 8편 : 독립운동가 최혜순_외손녀 김정 ☞ 40편 : 대한인_황기환(장철우 목사) ☞ 39편 : 대한소년기개_부석현(부두전 손자) ☞ 38편 : 대한제국 애국가_신지영(신팔균 손자) ☞ 간호특별기획 7편 : 독립운동가 정종명_박경목 서대문형문소역사관장 ☞ 간호특별기획 6편 : 독립운동가_김순애 ☞ 간호특별기획 5편 : 파독간호사 정옥련 ☞ 간호특별기획 4편 : 파독간호사 김병연 ☞ 간호특별기획 3편 : 이정숙 지사(연구자 강영심) ☞ 간호특별기획 2편 : 임수명 지사_신지영(신팔균, 임수명 손자) ☞ 간호특별기획 1편 : 박자혜 여사_이덕남(단재 신채호, 박자혜 여사 며느리) ☞ 37편 : 효창 아리랑_김영심(김상옥 손녀) ☞ 36편 : 긴날이 맞도록_이덕남(단재 신채호, 박자혜 여사 며느리) ☞ 35편 : 해방의 노래_장영달(여운형 기념사업회 이사장) ☞ 34편 : 여명의 노래_조정화(조문기 외동딸) ☞ 33편 : 김구 나의 소원_김용만(김구 증손자) ☞ 32편 : 이육사의 꽃_이옥비(이육사 딸) ☞ 31편 : 그리운 강남_김시중(백하 김대락 후손) ☞ 30편 : 소년남자가_최재황(권준 후손) ☞ 29편 : 한국행진곡_한종수(한형석 후손) ☞ 28편 : 해방행진곡_손명원(손정도, 손원일 후손) ☞ 27편 : 거국행_박만규(흥사단 이사장)
[뉴시스] 정의기억연대 “인권위, ‘수요시위 보호’ 권고 서둘러야”
인권위, 지난해 1월 수요시위 긴급구제 조치 “인권위가 직접 현장 방문해 조사할 것 요청” [서울=뉴시스]임철휘 기자 = 정의기억연대(정의연)를 비롯한 위안부 피해자 지원단체들은 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가 ‘수요시위 보호’ 긴급구제 조치 권고를 내린 지 1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수요시위가 보호받고 있지 못하다며 인권위의 빠른 권고 결정을 촉구했다. 정의연은 3일 오전 10시30분 서울 중구 인권위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긴급구제 결정이 나온 지 1년3개월이 지나도록 인권위는 최종 권고를 내리지 않고 침묵하고 있다”며 이같이 밝혔다. 이나영 정의연 이사장은 “오직 수요시위 방해와 공격, 역사부정을 목적으로 거짓과 혐오 발언을 내뱉는 집단행동을 평화로운 집회라고 착각하면 안 된다”며 “(인권위)는 민주주의 기본 질서 확립과 인간 존엄성 보호가 인권위의 존재 이유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들은 인권위가 직접 수요시위 현장을 찾아 조사에 나설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김영환 민족문제연구소 대외협력실장은 “수요시위 현장은 활동가와 참가자들이 심한 모욕과 협박을 받고 있는 인권침해 현장”이라며 “인권위 위원들이 현장을 직접 방문해서 현장의 목소리를 직접 듣기를 바란다”고 촉구했다. 정의연을 비롯한 위안부 피해자 지원단체들은 지난해 1월 극우 성향의 일부 단체들이 소녀상 인근 장소에 집회 신고를 선점하는 등 수요시위를 방해하고 있다며 인권위에 긴급구제 조치를 해달라고 진정을 냈다. 이에 인권위는 수요시위 관리를 담당하는 종로경찰서장에게 반대 단체의 방해 행위에 대해 경고하는 등 수요시위를 적극적으로 보호하고, 수요시위 반대 집회에 집회 시간과 장소를 달리할 것을 권유하라고 권고했다. 한편
[오마이뉴스] 독도의 운명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다
[김종성의 히,스토리] 감출 수 없는 일본의 욕망 독도에 대한 일본의 욕망은 감출 수 없다. 전용기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2일 독도 방문에 대한 일본의 반응이 그것을 잘 보여준다. 7일 열릴 한일정상회담을 앞두고 양국 정부가 회담 개최 사실을 발표한 날이었다. 이런 날에도 일본 정부는 독도를 언급하며 불쾌한 심기를 드러냈다. 이날 일본 외무성은 후나코시 다케히로 아시아대양주국장을 통해 김용길 주일한국대사관 차석공사에게 항의의 뜻을 전하고, 구마가이 나오키 주한일본대사관 차석공사(총괄공사)를 통해 서민정 외교부 아시아태평양국장에게 항의의 뜻을 전했다. 2일 일본 외무성 홈페이지 보도 발표에 따르면, 후나코시 국장과 구마가이 공사는 “다케시마가 역사적 사실에 비춰봐도, 또한 국제법상으로도 명백히 일본 고유의 영토인 점을 감안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고 극히 유감”이라며 항의했다. 대외침략과 관련된 국가적 욕망을 가장 잘 대변하고 이를 다음 세대에 가장 잘 전승하는 집단이 극우세력이다. 일본의 독도 침략에서는 흑룡회라는 극우단체가 그런 역할을 담당했다. 이들은 1901년 3월호 기관지 <회보>에서 독도를 앙코섬으로 표기하면서 이곳을 주인 없는 섬으로 선전했다. 이런 활약은 1905년 2월 22일 일본이 독도를 시마네현에 편입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일본의 활동 영역을 한반도·만주·몽골·시베리아로까지 확장하는 대아시아주의를 표방한 흑룡회는 1905년 을사늑약(을사보호조약) 이후에 한국 지배를 위한 비밀 정보활동에도 가세했다. 한국통감부 촉탁 신분으로 이토 히로부미 한국통감의 막료 역할을 한 우치다 료헤이도 이 단체 간부였다. 독도에 대한 욕망이 지금의 일본인들에게도 강하게 전해진 데는 이들의 역할이 컸다.
[투데이신문] 민족문제연구소 김영환 “尹 ‘무릎’ 발언, 국가가 인권 무시하고 역사 봉합한 것”
[인터뷰] 민족문제연구소 김영환 대외협력실장 尹, 외신 인터뷰서 한 발언 도마 위에 올라 국민들 분노 드러내…정치계에서도 큰 파문 진영논리·상하관계로 외교 문제 다뤄…규탄 시대 뒤떨어진 인식…실질적인 구호 외쳐야 【투데이신문 박효령 기자】 “지금 유럽에서는 참혹한 전쟁을 겪고도 미래를 위해 전쟁 당사국들이 협력하고 있다. 100년 전 일을 가지고 ‘무조건 무릎 꿇어라’라고 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 지난달 24일 미국 언론사 워싱턴포스트(WP)에서 진행한 윤석열 대통령과의 인터뷰 중 일부분이다. 당시 윤 대통령은 최근 논란이 제기된 대일 외교에 대한 WP 기자의 질문에 이같이 대답했다. 윤 대통령의 발언이 공개되자, 과거사 문제 해결 보다 한·일 관계 개선만을 우선시하는 ‘저자세’ 외교 정책으로 해석돼 파장이 일었다. 이에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와 김용민 의원은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결코 해선 안 될 발언”, “한반도 100년 이내 역사에서 최악의 대통령”이라며 각각 윤 대통령을 비난했다. 대통령실은 즉시 “‘100년 전의 일’은 이런 식의 접근이 미래 한·일 관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취지”라고 반박했다. 여당도 방어에 나섰다. 국민의힘 유상범 수석대변인은 논평을 통해 “윤 대통령은 주어를 생략한 채 해당 문장을 사용했다”며 “‘무조건 무릎 꿇어라’라고 하는 것은 ‘일본’이 받아들일 수 없다는 뜻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처럼 대통령실과 국민의힘이 ‘오역’ 주장하자, 윤 대통령을 인터뷰한 WP 미셸 예희 리 기자는 지난달 25일 자신의 SNS를 통해 윤 대통령의 발언 원문을 공개했다. 원문에 따르면 윤 대통령은
[더팩트] [야스쿠니 신사의 한국인들 <상>] 빼앗긴 삶, 가둬진 넋
전사통지·합사동의 없이 한인 2만1천여명 야스쿠니 신사에 ‘제국 병사’라며 전쟁 끌고가놓고…전후보상엔 “너흰 한국인” [더팩트ㅣ조채원 기자] 경기도 강화군의 이사현(李思炫)은 아내와 돌이 갓 지난 딸을 둔 가장이었다. 스물 셋이 되던 1944년 2월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때 징용 영장을 받았다. 식량 수탈과 강제징용 압박이 숨통을 조여오던 때였다. 그가 가지 않으면 집성촌에 함께 사는 가족들까지 괴롭힘을 당할 게 뻔했다. 병참부대 군속으로 편입된 그는 1945년 5월 중국 광시성 전장에서 총상을 입었다. 그 해 6월, 광시성 한 병원에서 파상풍으로 죽음을 맞았다. 중국 베이징에서도 약 2300km 떨어진 이역만리 타국에서다. 사망 후 그는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됐다. 유족들은 이 씨의 사망 소식조차 듣지 못했다. 신사 합사 역시 유족 동의 없이 진행됐다. 유족들은 1992년이 돼서야 이 씨의 사망 기록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일본 정부가 1971년 한국 정부에 보낸 기록물 ‘피징용 사망자명부’를 통해서였다. 이 씨가 강화를 떠나 사망하기까지 행적을 좇던 유족은 1996년 일본 정부가 1993년 10월 한국 정부에 제공한 유수명부(일본 후생성이 1945년 일제 강점기 일본군으로 강제 징용됐다가 행방불명된 16만148명의 조선 군인·군속 등의 신상을 담은 문서)의 존재를 알게 된다. 명부 속 이 씨의 창씨 이름, ‘이원사연'(李原思連) 옆에 적힌 합사제(合祀濟). 이 씨의 딸 이희자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협의회) 공동대표가 아버지의 야스쿠니 합사 사실을 알게 된 순간이다. 전쟁에 끌려가 죽음을 맞은 것도 억울한데 전쟁을 일으킨 자들과 함께 신으로 모셔진다니,
[프레시안] “쓸모없는 바위섬 폭파하자”던 김종필도 지켜낸 독도인데…
[김재명의 전쟁범죄 이야기 17] 누구를 위한 ‘역사전쟁’인가 (下②) 독도에 대해 쓰려니 축구선수 박종우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는 지난 2012년 런던 올림픽 축구 3,4위 전에서 한국이 일본을 2 대 0으로 이긴 뒤 ‘독도는 우리 땅’이라 적힌 피켓을 들고 축구장을 돌았다. 그 때문에 FIFA로부터 징계를 받고 동메달 시상식에도 오르지 못했다. “올림픽 시설이나 경기장 등에서 정치적 선전 활동을 금지하는 올림픽 헌장을 어겼다”는 이유에서였다. 다행히 6개월 뒤 동메달을 전해받긴 했지만, 많은 사람들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독도는 우리 땅’인데 그게 그렇게 문제가 되느냐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일본에선 크게 반발했다. 축구에 져서 분한데 박종우 선수가 화를 돋우었다고 여겼다. 여기서 한 가지 새삼스런 사실이 드러났다. 독도는 한일 간의 민감한 정치적 사안일 뿐만 아니라, 외국인들의 눈에는 독도가 국제분쟁지역의 하나로 비친다는 것이다. 일본이 독도를 일본 영토로 편입한 것이 1905년이니 경술국치(한일병합) 5년 전이다. 우리 민족이 일본에 첫 번째로 빼앗긴 영토가 독도다. 1945년 패전 뒤 잠시 숨죽이던 일본은 곧’독도가 일본의 고유영토’라 우기기 시작했다. 그런 억지는 21세기 넘어와서도 이어진다. 일본 외무성 홈페이지는 ‘다케시마(독도)는 역사적 사실에 비춰보더라도, 국제법상으로도 분명히 일본의 고유영토’라고 못 박고 있다. 이 글에서 살펴보겠지만, 역사적 사실로나 국제법으로나 일본은 독도를 일본의 고유영토라 우길 수 없다. 억지로 채워진 일방 논리일 뿐이다. 문제는 한국의 독도 영유권을 인정하지 않고 일본의 주장에 동조하는 듯한 (그렇다고 ‘독도는 일본땅’이라 자신들의
[한겨레21] 과거사 사죄 요구가 ‘무릎 꿇리는’ 일인가
독일은 2000년 ‘기억·화해·미래 재단’ 기금 조성, 2006년까지 약 6조원 배상 또 ‘말’이 문제다. 윤석열 대통령이 미국 국빈방문에서 앞서 <워싱턴포스트>와 한 인터뷰에서 내놓은 말이 거센 논란을 부르고 있다. 대통령이 하지 않아도(때로 하지 말아야) 될 말을 하고, 이를 해명하려 대통령실을 비롯한 여권이 내놓은 말이 문제를 더욱 키우는 건 이 정부 소통의 특성으로 굳어진 듯싶다. ‘어리석음’은 누구의 것인가 “정말 100년 전의 일들을 가지고 지금 유럽에서는 전쟁을 몇 번씩 겪고 그 참혹한 전쟁을 겪고도 미래를 위해서 전쟁 당사국들이 협력하고 있는데 100년 전에(전의) 일을 가지고 무조건 안 된다 무조건 무릎 꿇어라라고 하는 이거는 저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미셸 예희 리 <워싱턴포스트> 서울·도쿄 지국장이 2023년 4월25일 오전 소셜미디어에 “번역상의 오류에 대한 의문과 관련해, (인터뷰) 녹음 파일을 교차 확인했다”며 올린 내용이다. 전날 보도된 윤 대통령 인터뷰 내용에 대해 국민의힘 쪽에서 나온 ‘번역상의 오류’란 주장에 대한 반박성이다. “안보협력이 긴요한 상황에서 (일본이) 무릎 꿇지 않으면 두 나라 관계 개선 절대 안 된다는 주장을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취지의) 말이었다. …나라를 위해 (한-일 관계 개선을) 더 이상 늦출 수 없었다는 점을 말을 한 것이다.” 같은 날 미국 현지에서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가 내놓은 해명도 논란을 키웠다. 그는 한-일 관계 개선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김대중 전 대통령이 1998년 10월8일 일본 의회에서 한 연설 일부(“50년도
[오마이뉴스] 독립선언서 집필자가 일본에 붙은 역적 되다니
[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최남선 “처얼썩 처얼썩 척 쏴아아/ 따린다 부순다 무너버린다/ 태산 같은 높은 뫼 집채 같은 바윗돌이나/ 요것이 무어냐 요게 무어야”로 시작하는 ‘해에게서 소년에게’는 육당 최남선이 만 18세 때인 1908년 11월 <소년> 창간호에 권두시로 실은 작품이다. 이 시를 쓴 최남선은 11년 뒤인 1919년에는 3·1 독립선언서 집필도 맡았다. 29세 때인 이 당시의 활약은 일제 재판 기록에도 묘사돼 있다. 1972년에 원호처(국가보훈처)가 발간한 <독립운동사 자료집> 제5권에 담긴 재판 기록은 “각 서면의 기초는 최남선이 이를 담당”했다고 말한다. 민족대표 33인 명의로 발표될 독립선언서·의견서·청원서 등의 집필을 그가 맡았다는 것이다.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보고서> 제4-17권은 “1920년대 들어와 최남선은 <심춘순례><백두산 근참기> 등을 집필하면서 조선의 역사와 지리 연구를 지속적으로 진행했으며, 아울러 단군 연구에 많은 성과를 낳았다”고 한 뒤 “그러나 그는 1928년부터 조선사편수회 위원으로 활동”했다고 설명한다. 식민사관에 입각해 한국사를 재편성하는 조선사편수회였다. 거기에 들어간 것은 역사상 최악의 착취 시스템인 제국주의를 옹호하는 역사 왜곡에 가담하는 일이었다. 이때부터 그의 삶은 친일 인생으로 평가됐다. 1890년 4월 26일 한성부에서 출생한 최남선은 12세 때인 1902년 경성학당에 들어가 일본어를 배웠다. 대일본해외교육회가 1896년 설립한 학교에 입학했던 것이다. 그 뒤로도 그와 일본의 학연은 계속 이어졌다. <친일인명사전> 제3권 최남선 편은 이렇게 서술한다. “1904년 10월 대한제국 황실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으로 유학했다. 같은 해 11월 도쿄부립 다이이치중학교에 입학했으나
[YTN라디오] 독립군가 복원 프로젝트 : 100년의 소리 40편 – 황기환_대한인(장철우 목사)
민족문제연구소는 2017년 『항일음악 330곡집』을 발간한 이후 <항일음악회> 개최 등 항일음악 보급을 통한 독립정신 선양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YTN 라디오는 민족문제연구소의 자문을 받아 2020년 11월 ‘국치추념가’를 시작으로 <독립군가 복원 프로젝트 : 100년의 소리>를 방송 중입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독립군가 복원 프로젝트 : 100년의 소리> ☞ 40편 : 대한인_황기환(장철우 목사) ☞ 39편 : 대한소년기개_부석현(부두전 손자) ☞ 38편 : 대한제국 애국가_신지영(신팔균 손자) ☞ 간호특별기획 7편 : 독립운동가 정종명_박경목 서대문형문소역사관장 ☞ 간호특별기획 6편 : 독립운동가_김순애 ☞ 간호특별기획 5편 : 파독간호사 정옥련 ☞ 간호특별기획 4편 : 파독간호사 김병연 ☞ 간호특별기획 3편 : 이정숙 지사(연구자 강영심) ☞ 간호특별기획 2편 : 임수명 지사_신지영(신팔균, 임수명 손자) ☞ 간호특별기획 1편 : 박자혜 여사_이덕남(단재 신채호, 박자혜 여사 며느리) ☞ 37편 : 효창 아리랑_김영심(김상옥 손녀) ☞ 36편 : 긴날이 맞도록_이덕남(단재 신채호, 박자혜 여사 며느리) ☞ 35편 : 해방의 노래_장영달(여운형 기념사업회 이사장) ☞ 34편 : 여명의 노래_조정화(조문기 외동딸) ☞ 33편 : 김구 나의 소원_김용만(김구 증손자) ☞ 32편 : 이육사의 꽃_이옥비(이육사 딸) ☞ 31편 : 그리운 강남_김시중(백하 김대락 후손) ☞ 30편 : 소년남자가_최재황(권준 후손) ☞ 29편 : 한국행진곡_한종수(한형석 후손) ☞ 28편 : 해방행진곡_손명원(손정도, 손원일 후손) ☞ 27편 : 거국행_박만규(흥사단 이사장) ☞ 26편 : 애국가_김흥태(오희옥 지사 아들) ☞ 신흥무관학교 제8편 : 끝나도 끝나지 않았다 ☞
[오마이뉴스] 역사망언 3종세트… ‘대통령 속성 과외’는 실패했다
[주장] 삼일절 기념사, 강제동원 피해자 3자 변제, 이번엔 ‘일본 무릎’… 퇴행과 거짓을 어찌할까 윤석열 대통령이 기어이 ‘역사 망언 3종 세트’를 선보였다. 삼일절 기념사에서 그는 “세계사의 변화에 제대로 준비하지 못해 국권을 상실하고 고통받았던 우리의 과거를 되돌아봐야” 한다면서 일본 제국주의의 폭력적·반인도적 팽창에 대한 비판은 생략한 채 식민주의 역사학의 단골 논리인 정체성론(停滯性論, 조선은 근대로 이행하지 못하고 낙후된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는 주장)을 들고 나왔다. 3월 6일엔 ‘강제징용 대법원 판결 관련 정부 입장’을 발표하면서 식민지배의 불법성과 전범기업의 반인도적인 불법행위에 대한 배상책임을 인정한 2018년 대법원 판결을 무시하고 정부가 일본 강제동원 가해 기업의 사법적 책임을 면책시켜주는 월권을 자행했다. 그러더니 급기야 “100년 전 일로 일본이 무릎 꿇어야 한다는 생각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서 일찍이 역대 한국 대통령과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역대급 역사 망언을 자행했다. 지난 24일 <워싱턴포스트>에 실린 망언의 전체 문장은 이렇다. “유럽은 지난 100년 동안 여러 번의 전쟁을 경험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 중인 국가들은 미래를 위해 협력할 방법을 찾았습니다. 저는 100년 전에 일어난 일 때문에 어떤 일을 하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고 그들(일본)이 100년 전 우리의 역사 때문에 (용서를 위해) 무릎을 꿇어야 한다는 생각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결정이 필요한 문제입니다. 설득력 면에서 저는 최선을 다했다고 믿습니다.” 미래를 위한 협력… 독일은 어떻게 했나 이 발언의 문제점을 살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