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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친일 동상, 철거는 커녕 ‘알림 표지’도 어려워
[앵커] 대표적인 친일 잔재 가운데 하나가 전국 곳곳에 세워져 있는 ‘친일 인사’ 동상입니다. 친일에 관한 정보는 쏙 빼고 ‘미화’의 취지만 부각돼 있어서 철거하려는 시도도 꽤 있었는데 뜻을 이룬 사례는 드뭅니다. 대안으로 친일 행적을 알리는 알림 표지, 이른바 ‘단죄문’을 옆에 세우려는 움직임도 있는데 그것도 쉽진 않습니다. 정해주 기자가 취재했습니다. [리포트] 공원에 자리 잡은 난파 홍영후의 동상입니다. 친숙한 노래의 작곡가, 홍난파로 알려져 있습니다. [사실 그는 일제 침략을 미화하는 곡도 여럿 만들었는데 그런 행적을 아는 이는 많지 않습니다. [김백훈/수원시 권선구 : “유명 인물 기념하는 동상 이런 거 아닐까?”] [주미경/수원시 권선구 : “친일파? 아 그래요? 친일파라는 거 처음 들은 것 같아요.”] 지난해 그 옆으로 ‘단죄문’이 세워졌습니다. 동상은 못 없애더라도 적어도 ‘정확한 정보’는 알리자는 취지였습니다. [조성순/수원시 권선구 : “친일파라고 생각하면, 거의 다 속속들이 우리 국민들이 알았으면…”] 친일 동상 등 잔재가 남은 장소는 경기도에만 161곳. 그 중 10곳에 ‘단죄문’이 세워졌습니다. 많은 수는 아니지만 그것도 어렵게 세운 겁니다. 윤보선 전 대통령 생가로 알려진 해평 윤 씨 가옥. 윤 전 대통령의 아버지인 윤치소와 당숙 윤치호 등 친일 인사 4명이 살았던 곳입니다. 시설은 보존하더라도 친일 행적을 알리는 안내문을 세우자고 도의회가 권고까지 했지만, 지역 여론의 반대에 막혀 있습니다. [아산시 관계자/음성변조 : “친일과 관련된 내용들을 적게 해버리면 마을의 이미지가 많이 훼손이
[오마이뉴스] 일본 국회의원이 된 한국 조폭… 친일로 살다
[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박춘금 조직폭력배 출신 친일파가 있었다. 깡패를 거쳐 기업인이 되고 친일파로 활약하더니 나중에는 일본 중의원 의원으로 변신했다. 이 비상한 이력의 주인공은 박춘금이다. 서울시청과 광화문광장 중간쯤에 서울시의회 청사가 있다. 이 건물 옆에 비석이 하나 놓여 있다. ‘부민관 폭파 의거 터’라고 적힌 비석이다. 네이버 지도에서는 ‘경성 부민관 폭탄 의거지’로 검색된다. 부민관 폭파 의거 부민관(府民館)은 일제강점기 경성부가 1935년에 건립한 종합 공연시설이다. 훗날 미군정 건물, 국립극장, 국회의사당을 거쳐 1970년대에 시민회관으로 바뀌었다가 세종문화회관 건립 뒤 그 별관이 됐다. 바로 그 부민관에서 발생한 폭탄 의거를 기념하는 비석에 박춘금이 등장한다. “1945년 7월 24일 애국청년 조문기, 류만수, 강윤국이 친일파 박춘금 일당의 친일연설 도중 연단을 폭파했던 사건”이란 문구가 적혀 있다. 훗날 역사학자 임종국(1929~1989)의 뜻을 계승해 <친일인명사전> 편찬에 뛰어들 독립투사 조문기(1927~2008)가 부민관에서 박춘금을 처단하려 했던 것이다. 1973년 7월 18일자 <조선일보> 4면 좌상단 기사는 “해방되기 20여 일 전인 1945년 7월 24일 지금 국회의사당인 경성부민관에서는 일-중-만-조선(-몽골)의 오족협화를 표방한 아시아민족분격대회가 있었다”라며 “이 대회는 몇 달 전에 일본에서 죽은 친일파의 거물 박춘금이 이끄는 대의당(大義黨)이 주최한 친일파들의 발악 경연장이었다”며 부민관 폭파 사건의 배경을 설명한다. “몇 달 전에 일본에서 죽은”이란 표현은 1945년 당시가 아니라 1973년 당시를 기준으로 한다. 1973년 3월 31일에 박춘금이 죽은 일을 가리킨다. 위 기사는 조문기 등이 부민관에 진입해 폭탄을
[식민지 대중가요 시리즈] 6편, 조선재즈의 왕은 누구? ‘김해송과 손목인’
[식민지 대중가요 시리즈 6편] (2022년 6월 7일 방송) 조선재즈의 왕은 누구? ‘김해송과 손목인’ 이준희, 이영미와 함께합니다. 00:11:51 싱싱싱 조선 재즈의 일인자는 누구인가? 같은 음반회사 소속으로 음반과 무대에서 치열할 경쟁을 펼쳤던 김해송과 손목인. 00:24:31 청춘 계급 작곡가로, 연주가로, 밴드마스터로 다채로운 활약을 선보인 두 사람이었지만 가수 활동의 흔적은 김해송이 손목인보다 훨씬 더 많은 편임 00:33:12 항구의 붉은 소매 ‘목포의 눈물’, ‘해조곡’ 등으로 가수 이난영의 성장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작곡가 손목인. 이난영이 김해송과 결혼한 것에 대한 일말의 아쉬움이 있기는 한 듯 00:42:38 고향 반듯하고 잘 짜인 느낌을 주는 곡이 많은 손목인과 달리 김해송 곡들에는 독특한 착상과 표현이 많이 등장하는 편이다. 개인적인 성향 차이일 수도 있고, 제도권 음악교육 경험 유무와 관련이 있을 수도 있음 00:50:30 선죽교 1940년대 악극 전성기가 펼쳐지면서 탁월한 기획력으로 최고의 무대를 선보인 김해송. 손목인 역시 활발한 활동을 했지만, 이 시기 김해송은 대한민국 대중음악의 그야말로 넘버원 01:14:05 가스바의 여인 전쟁 발발과 함께 납북된 김해송은 금기의 인물. 반면 손목인은 1952년 일본으로 밀항하여 일본에서 계속 활동을 이어 가다가 1957년에 추방 형태로 귀국 ▶민족문제연구소 https://www.minjok.or.kr ※ 지난 에피소드 다시보기 ☞식민지 대중가요 시리즈 5편: 신민요의 여왕들 ‘왕수복과 이화자’ ☞식민지 대중가요 시리즈 4편: 대중가요 작사의 쌍두마차 ‘박영호’와 ‘조명암’ ☞식민지 대중가요 시리즈 3편: 스스로 삶을 개척해 나간최고의 가수
[식민지 대중가요 시리즈] 5편, 신민요의 여왕들 ‘왕수복과 이화자’
[식민지 대중가요 시리즈 5편] (2022년 5월 31일 방송) 신민요의 여왕들 ‘왕수복과 이화자’ 이준희, 이영미와 함께합니다. 00:23:59 고도의 정한 1930년대 신민요 가수로 ‘여왕’ 소리를 함께 들었던 왕수복과 이화자. 왕수복은 공전의 히트곡 ‘고도의 정한’으로 최초의 가수 인기투표에서 1위로 선정. 바로 그때 이화자는 김용환의 테스트를 받으며 가수로서 가능성을 확인 00:41:16 노랫가락 평양 권번에서 음악을 익힌 왕수복은 과감하게 대중가요 가수가 된 것은 물론, 전통음악과 서양음악을 결합시키는 방안에 대한 생각도 많았음. 반면 1936년에 데뷔한 이화자는 남자와 돈, 나아가 아편으로 점철된 삶을 살았던 것으로 유명 00:53:44 아리랑 성악 공부를 하고 돌아온 왕수복은 사실상 가수 활동을 더 이상 하지 않음. 1940년에 아내와 사별한 작가 이효석의 연인이 되는데 이후 이효석이 1942년에 세상을 떠난 뒤에는 경제학자 김광진과 결혼. 반면 이화자는 평생 결혼을 하지 않고 분방하게 생활. 남자의 선택을 받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남자를 선택하는 자기주도적 연애를 실천 01:03:42 화류춘몽 최고의 신민요 가수로 갈채를 받기는 했지만, 그런 인기만으로는 채울 수 없는 허허로움이 있었는지, 1940년대 들어 이화자는 심각한 아편 중독자가 됨 01:15:20 꼴망태 목동 해방 후 남한에서는 잊힌 존재가 되었고, 북한에서 새로운 음악 인생을 시작. 왕수복의 독특한 창법은 민족적이면서도 봉건적이지 않은 노래로 평가를 받았던 듯하며, 북한을 대표하는 공훈배우가 되기도 01:27:11 어머님전상백 계절에 맞지도 않는 낡은 여우 목도리를 언제나 두르고 다니며 삶의
[통일뉴스] “한일 시민들, ‘일본 역주행‧한국 부화뇌동’ 제동장치 만들어야”
610단체, 한일역사정의평화행동 발족…윤덕민 주일대사 사퇴 촉구 “일본 정부에게 더 이상 할 것이 없는 사람은 그 자리에서 물러나야 합니다. 윤덕민 주일 대사의 사퇴를 촉구합니다.” ‘역사적 과오에 대한 반성을 토대로 한반도와 동북아의 항구적 평화를 위해 행동하고자 한다’며 610여 개 단체들이 9일 발족을 선언한 한일역사정의평화행동에서 터져나온 일성은 윤덕민 주일대사의 사퇴 촉구다. 김영환 민족문제연구소 대외협력실장은 9일 오전 11시 서울 중구 프란치스코교육회관에서 개최된 ‘역사정의와 평화로운 한일관계를 위한 공동행동’(약칭 한일역사정의평화행동) 발족식에서 “한국의 외교책임자, 주일 한국대사가 한국 피해자들의 요구를 일본 정부가 받아들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얘기한다면, 그 사람은 일본에서 일본 정부를 위해서 할 일이 없다”며 물러나라고 했다. 윤덕민 주일대사는 8일 도쿄 주재 특파원들과의 간담회에서 “현금화가 이뤄지면 한일 관계가 어떻게 될지 상상하고 싶지 않지만, 아마도 우리 기업과 일본 기업 (사이에) 수십조원, 수백조원에 달하는 비즈니스 기회가 날아갈 가능성이 있다”며 “현금화 동결이 필요하다”고 언급했다. 윤석열 정부는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배상을 판결한 대법원의 후속조치에 사실상 브레이크를 걸고 있고, 윤 대사는 여기에 더 노골적인 발언을 보탠 것. 김영환 실장은 “일본 정부는 지난 7월 6일 근로정신대 피해자 정신영 할머니에게 99엔을 지급했다”며 “70년 전에 목숨 바쳐서 그리고 침략전쟁의 한 가운데서 겨우 살아남은 피해자에게 모욕을 주기위한 행위를 매번 되풀이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한 “한국 정부는 외교부 민관협의회가 진행되는 도중에 피해자들에게 한 마디 상의도 없이 현금화를 저지해달라는 의견서를
[프레시안] 강제동원 피해자가 싸워 받은 판결마저 일본에 양보하라는 주일대사
윤덕민 “강제동원 현금화 동결”에 외교부는 조율된 입장 아니라고 설명 윤덕민 신임 주일본 한국대사가 대법원의 판결에 의해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일본 가해기업을 상대로 벌이고 있는 자산매각에 따른 현금화를 동결해야 한다고 주장해 논란이 되고 있는 가운데, 해당 발언은 외교부와 조율되지 않은 대사 개인의 견해인 것으로 전해졌다. 9일 기자들과 만난 외교부 당국자는 윤덕민 대사의 현금화 동결 발언에 대해 “강제징용 관련해 국민적 우려와 관심이 높은 사안으로 정부는 조속한 해법 도출을 위해 다각적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며 “해당 발언은 (가해 기업 자산에 대한) 현금화가 이뤄지기 전에 바람직한 해결 방안을 도출해야 한다는 취지로 이해하고 있다”고 밝혔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8일 윤 대사는 부임 이후 첫 기자간담회에서 “현금화가 이뤄지면 한일 관계가 어떻게 될지 상상하고 싶지 않지만, 아마도 우리 기업과 일본 기업 (사이에) 수십조원, 수백조원에 달하는 비즈니스 기회가 날아갈 가능성이 있다”며 “현금화 동결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앞서 2018년 11월 29일 대법원은 근로정신대 피해자인 양금덕·김성주 할머니가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강제동원 피해배상에 대해 1억~1억 5000만 원의 위자료를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하지만 미쓰비시의 이행이 이뤄지지 않자 원고인 양금덕·김성주 할머니는 국내에 있는 미쓰비시의 상표권 2건, 특허권 2건에 대해 강제 매각인 ‘현금화’ 명령을 내려달라고 소를 제기했고 1,2심 모두 승리했다. 이에 미쓰비시중공업은 지난 4월 대법원에 재항고했는데, 일반적인 재판 기간 등을 감안할 때 이에 대한 대법원 판결은 오는 9월 중에 나올 것이라는
[한겨레] 금송아지를 섬기는 이들에게 묻는다
[함세웅의 붓으로 쓰는 역사 기도] (45) 금송아지를 부수어야 사람 아닌 자본을 좇는 현대사회 일그러진 사회·경제·정치의 모습 “모세는 진영에 가까이와 사람들이 춤추는 모습과 수송아지를 보자 화가 나서 손에 들었던 돌판들을 산 밑에 내던져 깨버렸다. 그는 그들이 만든 수송아지를 가져다 불에 태우고 가루가 될 때까지 빻아 물에 뿌리고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마시게 하였다.” (탈출기32, 19-20) “예로보암은 마음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였다. ‘어쩌면 나라가 다윗 집안으로 돌아갈지도 모른다. 이 백성이 예루살렘에 있는 주님의 집에 희생 제물을 바치러 올라갔다가 자기들의 주군인 유다임금 르하브암에게 마음이 돌아가면 나를 죽이고 유다임금 르하브암에게 돌아갈 것이다.’ 그래서 임금은 궁리 끝에 금송아지 둘을 만들었다. …… 그러고 나서 금송아지 하나는 베텔에 놓고 다른 하나는 단에 놓았다. 그런데 이 일이 죄가 되었다. 백성은 금송아지 앞에서 예배하러 베텔과 단까지 갔다.” (1열왕12, 26-30) 2011년 12월, 제가 청구 성당에서 은퇴하기 직전에 손석춘 교수와 두 차례의 대담을 가졌습니다. 은퇴를 기념해 이를 정리해 책으로 엮기로 한 것입니다. 대담을 하고 며칠 뒤 정리된 내용을 이메일로 받았는데 상당히 원색적이고 거친 표현이 많았습니다, 저는 이틀 밤을 꼬박 새워 많은 부분을 교정하고 종합했습니다. 그리고 책 제목은 ‘금송아지를 부수어야’로 하자고 제안했습니다. 손 교수는 좋다고 동의했습니다. 그런데 한 달여 뒤에 출판사 대표 등이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청년 100여 명에게 의견을 물었더니 ‘금송아지를 부순다’라는 것에 부정적인 의견이
[오마이뉴스] 재심 끝에… ‘백마 탄 여장군’ 김명시 독립유공 서훈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결정… “당연한 일, 가슴 벅차게 반가우면서도 안타까워” 드디어, 아니 이제야 ‘백마 탄 여장군’ 김명시(金命時, 1907~1949) 장군이 우리 정부로부터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았다. 국가보훈처가 광복절을 맞아 김명시 장군에게 ‘국민훈장 애국장’을 추서하기로 했다고 12일 밝혔다. 경남 창원마산 출신인 김명시 장군은 일제강점기 중국 화복지역에서 조선독립동맹 조선의용군의 여성부대를 이끌고 일본군과 직접 전투를 벌여 ‘조선의 잔다르크’ 내지 ‘백마 탄 여장군’으로 불렸다. 김명시 장군은 1925년(18세) 모스크바 공산대학에 입학했고, 1927년 재학 중 상하이로 파견돼 ‘동방피압박민족반제자동맹’을 조직했으며, 1930년 하얼빈 일본영사관 공격을 주도했다. 장군은 신의주에서 일경에 체포돼 7년간 복역했고, 1939년 출옥한 뒤 중국으로 탈출해 ‘팔로군’에 들어가 천진, 제남, 북경, 태원 등지에서 항일투쟁을 벌였다. 광복 후 장군은 1945년 12월 ‘조선부녀총동맹’ 선전부 위원, 1946년 2월 ‘민주주의민족전선’ 중앙위원과 4월 서울지부 의장단에 이어, 1947년 6월 29일 ‘민주여성동맹’ 대표로 군정청을 방문해 하지 중장에게 ‘반탁시위 항의서’를 제출했다. 이후 1949년 10월 10일 부천경찰서에서 사망했다. 김명시 장군은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을 해왔고, 해방 이후에는 ‘신탁 통치 반대’ 활동을 벌였지만 오랫동안 잊혀진 인물이었다. 독립유공 서훈도 쉽지 않았다. 공적심사 탈락… 시민단체가 자료 찾은 끝에 재심 2000년대 들어 시민사회단체가 나서면서 김명시 장군이 새롭게 조명되기 시작했다. 열린사회희망연대가 흉상 건립과 생가터 표지판 제작에 이어 독립유공자 포상신청에 나선 것이다. 이 단체는 2018년 12월 ‘김명시 장군 흉상 건립’을 제안한 데 이어 ‘김명시 장군 친인척 찾기
[연합뉴스] 16일 국회서 일본군 위안부 등 한일관계 현안 토론회
강제동원 피해 해결 방안 등 모색 (서울=연합뉴스) 강성철 기자 = 시민단체 연대인 ‘역사정의 실현과 평화로운 한일관계를 위한 공동행동(이하 공동행동)’은 16일 국회 의원회관 제1 세미나실에서 ‘한일관계 현안 긴급 토론회’를 개최한다고 11일 밝혔다. 공동행동에는 겨레하나, 민족문제연구소, 일본군 성노예 문제 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연대, 한국진보연대, 지구촌동포연대, 전국여성연대, 재일동포 인권단체 등이 참여하고 있다. 홍익표·이탄희·이수진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배진교 정의당 의원이 함께하는 행사로 ‘역사정의 실현과 평화로운 한일관계, 과제와 실천’을 주제로 열린다. 일본군 위안부와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군사 안보 문제와 시민사회 제언 등 3개의 패널로 나눠서 시민단체·법률 \단체·학계 관계자의 발표와 토론이 이어진다. 공동행동 관계자는 “일본군 위안부와 강제동원 피해 문제 해결 없이 양국 간 진정한 평화 관계 구축이 어렵다는 것을 밝히고 바람직한 대안을 모색해 보려고 마련한 토론회”라고 말했다. wakaru@yna.co.kr <2022-08-12> 연합뉴스 ☞기사원문: 16일 국회서 일본군 위안부 등 한일관계 현안 토론회
[오마이뉴스] 교회 재산 일본에 바친 목사… 한국 정부는 상 줬다
[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김응순 부처님을 팔아 친일한 승려도 있었다. 지금의 서울 강남구 봉은사에서 범종 등을 수집해 일본군에 헌납한 봉은사 주지 홍태욱이 그중 하나였다. 종교만 다를 뿐, 홍태욱과 별반 다를 바 없는 기독교 목사들도 있었다. 교회 재산을 마치 자기 재산처럼 일본에 바친 인천 보합교회 김응순 목사가 그중 1인이다. 기독교 내부 친일 세력은 교인 1인당 1원씩 일왕(천황)에게 헌금하는 운동을 벌였을 뿐 아니라 교회 시설을 뜯어 일본에 바치기까지 했다. 류대영 한동대 교수가 저술한 <한 권으로 읽는 한국 기독교의 역사>는 “1941년 총회 보고에 의하면 한 해 동안 놋그릇 2165점과 교회종 1540개를 헌납했다”라며 “그해 장로교 교회 총수가 2543곳이었으므로 60% 이상의 교회가 일본의 전쟁 수행을 위해 종을 제공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장로교만 그랬던 것은 당연히 아니다. 감리교를 비롯한 여타 교단도 사정이 다르지 않았다. 위 책은 “국민총력감리회연맹은 예배당과 교회시설을 비상시국 관련 집회·피난소·특별작업장으로 제공하고 철문과 철책을 헌납하기로 결정했다”고 말한다. “통리자 정춘수는 1942년 2월 각 교구장에게 공문을 보내 성전(聖戰) 완수를 위해 교회종도 헌납할 것을 요구”했다고도 말한다. 단순히 전쟁 헌금을 갖다 바치는 정도가 아니었다. 교회 철문과 철책을 뜯고 교회종도 떼어다 바쳤다. 그것도 단순한 국가가 아니라, 이교를 숭배하는 국가를 위해 그렇게 했다. 일왕을 신으로 모시는 일제를 위해 교회종까지 뜯어다 바쳤다는 것은 기독교 친일 세력이 최소한의 금기사항마저 지키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이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