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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기사

[한겨레] 친일파가 이용한 안중근의 죽음, 겨레 향한 도발

2022년 8월 24일 916

[함세웅의 붓으로 쓰는 역사 기도] (47) 안중근 평화연구원 박정희가 만든 안 의사 기념 ‘숭모회’ 초대이사장·2대 이사장 모두 친일파 안 의사는 남북 모두에 존경받아 남북 평화와 공존의 매개체 될수도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마태오 5,9) “하느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 (마태오 27,46) “여러분은 죄에 맞서 싸우면서 아직 피를 흘리며 죽는 데까지 이르지는 않았습니다.” (히브 12,4) 안중근 의사는 조선의 유교적 전통과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충실하게 사신 분입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교육의 중요성을 설파하셨고 민족자강을 위해 물산을 진흥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셨습니다. 무엇보다 학교와 기업을 설립하여 자신의 주장을 몸소 실천하셨습니다. 한중일 삼국 중심의 ‘동양평화론’도 주창하셨습니다. 아쉽게도 미완성 원고로 남아 있지만, 무력의 사용과 전쟁을 불가피한 수단으로 생각하셨습니다. 일제의 취조 문서와 재판 기록이 이를 증명합니다. 안중근 정신을 우리 시대에 맞춰 실천하는 것이 그를 기억하고 기념하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이미 오래전, 독립항쟁에 참여했던 분들도 의사의 행적을 따르고자 했고 자라나는 어린이들에게 안 의사처럼 나라와 민족을 위해 헌신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안 의사와 함께했던 우덕순 선생은 해방 후 환국하셔서 1946년에 의열사안중근선생기념사업협회를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발발한 뒤 우덕순 선생이 사망하면서 사업은 중단되었습니다. 현재 안중근 의사를 기념하는 일이라고 하면 대부분 ‘안중근 의사 숭모회’와 숭모회가 국가보훈처로부터 위탁받아 운영하는 남산의 ‘안중근 의사 기념관’을 떠올릴 것입니다. 이것 자체가 부끄러운 일입니다. 우덕순 선생이

[세계타임즈] 일제강점기 학교 희귀 기록물 최초 공개

2022년 8월 25일 909

1912년 총독관저와 관저 일대 행사 사진 14점 발굴, 일반에 공개 [서울 세계타임즈=이장성 기자] 서울특별시교육청(교육감 조희연) 소속 서울특별시중부교육지원청(교육장 임규형)은 1912년 ‘데라우치 총독 조선인 관공립보통학교 생도 접견 행사’ 사진을 『중부교육디지털박물관』을 통해 공개한다고 밝혔다. 당시 매일신보 기사에 따르면 일제강점기 초대 조선 총독이던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는 1912년 5월 25일 서울 시내 조선인 보통학교 학생 약 2,800명을 남산 총독관저에 초대하고 관저 일대에서 원유회(園遊會) 행사를 열었는데, 바로 이날 촬영된 사진 기록물 14점이다. 이 행사와 관련해서 지금까지 확인된 자료는 조선총독부에서 발간한『애뉴얼 리포트(Annual Report), 1911~1912』(민족문제연구소 소장)에 수록된 사진 하나가 유일하며, 존재 자체도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행사의 사진이 묶음으로 발견됨으로써 일제강점기 근대교육사 정리에 귀중한 자료가 될 것으로 보고, 일반에 공개하기로 했다. 이번에 공개되는 사진은 2019년 서울광희초등학교로부터 이관받아 중부교육지원청 기록관에서 보관 중이던 393점의 사진 중 일부로,‘중부 학교역사기록 관리체계 구축’사업 추진 과정에서 해당 자료의 내용과 가치를 확인하였다. 사진 자료에는 총독관저로 입장하는 조선인 학생들에게 일장기를 나누어주는 모습, 학생들의 행렬을 지켜보고 있는 데라우치 총독 이하 총독부 관리 일행의 모습, 야마가타 정무총감, 이완용의 처인 양주조씨, 총독관저, 녹천정 등의 모습이 담겨 있다. 또한 총독관저 정문으로 입장하여 관저 후면의 녹천정(錄泉亭)과 호도원(好道園)을 거치고 다시 보륭교(寶隆橋)를 지나 경무총감부 광장으로 넘어가는 행로가 두루 포착되어 있다. 이번 사진 발굴에 대해 민족문제연구소 이순우 책임연구원은 “총독관저는 식민통치권력의 최고 정점을 차지하고 있는 공간임에도 상대적으로

[오마이뉴스] 일제의 고급 밀정, 반성 대신 “내 돈 돌려달라”

2022년 8월 22일 570

[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박병일 화신백화점 사장인 친일파 박흥식은 반민특위 체포 1호다. 1949년 1월 8일 국회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붙들렸다. 그가 내세운 변명 논리 중 하나는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해방 이듬해에 자금 횡령 혐의로 법정에 섰을 때도 그랬다. 일제 침략전쟁을 지원하는 비행기회사를 설립한 동기가 무엇이냐는 재판장 질문에 그렇게 답했다. 재판 다음날 발행된 1946년 3월 20일자 <조선일보> 기사 ‘박흥식 공판’에 따르면, 일제 당국의 계속되는 권유를 이기지 못해 어쩔 수 없이 했노라는 게 그의 답변이었다. 대부분의 친일파들은 박흥식과 비슷한 논리를 내세웠다. 하기 싫었지만 억지로 했다는 것이 친일파들의 일반적인 변명이다. 일본의 고급 밀정 하지만 친일파 박병일의 삶은 그런 변명이 구차하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그는 돈을 벌기 위해 친일을 했고, 친일 때문에 손해 보는 것도 원치 않았다. 그리고 그런 속내를 숨기지 않고 공개적으로 드러냈다. 박병일은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보고서> 제4-6권과 일본 경찰 기록에는 박용환이란 이름으로 소개돼 있다. <친일인명사전>과 일본 재판 기록인 <박병일 소송사건철>에는 박병일이란 이름으로 등장한다. 그가 태어난 것은 조일수호조규(강화도조약) 2년 뒤인 1878년 7월 1일 경기도 광주에서였다. 그는 비교적 일찍 서양문물을 접했다. 14세 때인 1892년에 한양에서 기독교청년학교를 졸업했다. 그 뒤 사업가의 길로 들어섰다. 한양 종로에 그의 사업장이 있었다. 이곳에서 그는 잡화상과 금융업을 경영했다. 그의 사업 무대는 1910년 국권 침탈 이후 블라디보스토크로 옮겨졌다. 사업 실패에 따른 결과였다.

[취재요청] 전범기업 미쓰비시에 대한 대법원의 신속한 강제집행 결정을 촉구하는 기자회견 (8.25)

2022년 8월 24일 623

[보도자료] [바로가기] 한일역사정의평화행동 취재요청 수신: 각 언론사 정치, 사회부 날짜: 2022년 8월 24일(수) 문의: 민족문제연구소 김영환 010-8402-1718 / 겨레하나  정은주 010-9458-9439 전범기업 미쓰비시에 대한 대법원의 신속한 강제집행 결정을 촉구하는 기자회견 – 일시 및 장소 : 2022년  8월 25일(목) 오후 2시, 대법원 후문(서초역 6번 출구) 1. 평화와 화해의 인사를 드립니다. 2. 대법원 3부(주심 김재형 대법관)는 2018년 대법원 판결과 관련한 일제 전범기업 미쓰비시중공업 자산의 강제 매각(특허권 2건) 재항고 사건에 대해, 19일까지 심리불속행 기각 결정을 할 수 있었지만, 아쉽게도 그 시한을 넘기고 말았습니다. 3. 지난 7월 26일 외교부가 이 사건 담당 재판부에 ‘의견서’ 형식을 빌어 판결을 사실상 보류 해 줄 것을 요청하는 의견서를 제출한 것이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분석하고 있습니다. 4. 2018년 대법원 판결에도 불구하고 미쓰비시는 4년이 다 되도록 법원 명령을 이행하지 않는 것은 물론, 양자 대화 요구마저 거부해 왔습니다. 그 사이 원고 5명 중 3명은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외교부의 의견서는, 절박한 상황에 놓여 있는 90대 고령의 피해자들에게 사실상 유일한 권리확보의 수단이라고 할 강제집행마저 가로막은 또 다른 국가폭력입니다. 동시에, 일본기업 자신이 현금화될 경우 다시 보복 조치를 취하겠다는 일본의 부당한 압력에 굴복한 윤석열 정부의 저자세 굴욕외교의 결과라 할 것입니다. 5. 이에 국민적 요구를 담아 대법원에 좌고우면하지 않고 신속한 판결을 내릴 것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SBS] 전범기업 마크가 교표?…학교에 남은 일본 잔재

2022년 8월 26일 913

<앵커> 올해가 광복 77주년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일부 학교에 일제시대의 잔재가 남아있습니다. 전범기업의 이름을 그대로 따 오거나, 학교의 상징에 욱일기 이미지를 쓴 곳도 있습니다. 임상범 기자가 취재했습니다. <기자> 경기도의 한 초등학교. 교문 주위로 학교명과 교표가 여기저기 새겨져 있습니다. 한자로 석 삼에 우물 정, 즉 ‘삼정’, 일본어로 읽으면 미쓰이. 조선인 강제징용으로 악명 높았던 대표적인 일제 전범 기업 미쓰이의 회사명과 표식을 그대로 따왔습니다. [학교측 : 교장 선생님도 고민을 하고 계신 부분이에요. 이게 그냥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게 아니라 학생들하고 토론도 해야 되고, 학부모 설문도 받아야 되고, 그 다음에 학교 운영위원회 심의도 받아야 되고.] 일제는 1937년 학교 상징을 일본식으로 바꾸라는 이른바 교표 개정령을 발표합니다. 창 씨 개명, 한글 사용 금지와 함께 민족 말살 정책의 일환이었습니다. [한시준/독립기념관장 : 민족을 유지하는 가장 중요한 개념은 혈통이고 그 다음에 언어고 문화죠. 가장 근본적인 목적이 한국 사람들을 일본 민족으로 만들려고 했던 거 아니에요?] 광복 직후 바로 고치지 못한 것도 문제지만 더 심각한 건 광복 한참 뒤에 개교했으면서도 일본식 교표를 채택한 학교가 적지 않다는 겁니다. 취재진이 점검해보니 욱일기와 일장기는 물론, 일본 기관이나 기업의 이미지에서 따온 일본식 교표가 전국에 부지기수입니다. [방학진/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 : 초,중,고등학교가 한 1만 개쯤 되는데 전수 조사라든지 (지금껏) 어떤 개선 캠페인도 벌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경각심을 갖고 다시

[경향신문] 또다시 ‘그때 그사람’…국교위 위원장에 ‘한국사 국정교과서’ 인사 거론

2022년 8월 19일 702

이배용 전 이대 총장 ‘유력’ 관측 박근혜 정부 교과서 국정화 주도 국가교육위원회(국교위) 위원장 후보로 이배용 전 이화여대 총장(사진)이 유력하게 거론되고 있다. 이 전 총장은 박근혜 정부 시절 교육부가 추진한 한국사 국정교과서 편찬에 참여한 역사학자다.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에 참여한 인사들이 윤석열 정부의 교육정책 수립 과정에 속속 등장하자 역사·교육단체는 반발 움직임을 보인다. 19일 교육계에 따르면 대통령이 지명하는 국교위 위원장으로 이 전 총장이 유력하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이 전 총장은 경향신문과 통화하면서 “다른 후보들과 함께 내가 거론되고 있다고는 들었다”며 “아직 확정됐다는 연락을 받은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다만 이미 법정 출범시한을 넘긴 국교위에 위원장을 포함해 대통령이 지명하는 위원 5명을 계속 비워둘 수 없는 상황이어서 위원장을 중심으로 국교위 본격 출범을 준비할 가능성은 크다. 이 전 총장은 박근혜 정부 때 한국사 국정교과서 편찬에 참여했다. 또 2011년 역사교육과정개발추진위원장 시절부터 뉴라이트 진영이 요구한 역사교과서 검정 기준을 대거 수용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한국학중앙연구원장으로 있으면서 교과서 국정화에 주도적인 역할을 해 윤석열 대통령이 당선인 시절 그를 특별고문으로 임명할 때도 논란이 일었다. 윤석열 정부 들어 교육정책을 좌우하는 요직에 한국사 국정교과서 사태 당시 주요 실무 책임자들이 복귀하면서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 최근 ‘만 5세 입학’ 논란이 벌어진 직후 물러난 권성연 전 대통령실 교육비서관은 2014년 교육부 역사교육지원팀장으로 재직하며 국정화 찬성 여론을 조성하는 등의 역할을 맡았다. 또

[경기신문] 학계·시민·사회단체 “尹 역사 인식 부재”…이명박근혜 정부 시절 건국절 논란 또 재연

2022년 8월 20일 837

반공·대일 관계 개선”…광복절 축사 의미 해석 놓고 의견 분분 윤석열 대통령 “전체주의 국가 위한 독립운동 아님…일본, 힘을 합칠 ‘이웃’” 황희형 광복회 “좌익 사상 독립운동가들 배제…당사자와 후손들에게 상처 준 것” 이주현 평화나비 “선결 조건 언급도 없이 ‘친일’…국민·피해 당사자들 동의 못 해”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한국 근현대사 인식 부족…극우적 과거사 왜곡 형태 반복 우려” ‘과거사’ 한 번, ‘자유’ 33번. 윤석열 대통령은 제77주년 광복절인 지난 15일 “우리의 독립운동은 끊임없는 자유 추구의 과정으로서 현재도 진행 중이며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며 ‘자유’를 33차례 언급하며 강조했다. ‘과거사’는 단 한 번 언급했다. 윤 대통령은 이날 오전 서울 용산 대통령실 잔디마당에서 열린 광복절 경축식에서 “독립운동은 민주공화국, 자유와 인권·법치가 존중되는 나라를 세우기 위한 것”이며 “자유와 인권이 무시되는 전체주의 국가를 세우기 위한 독립운동은 결코 아니었다”고 말했다. 또 한·일 관계에 대해 “세계시민의 자유를 위협하는 도전에 맞서 함께 힘을 합쳐 나아가야 하는 이웃”이라며 “양국 간 경제·안보·사회·문화 등 폭넓은 협력을 통해 국제사회의 평화와 번영에 이바지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시민사회 및 학계에서는 윤 대통령이 일제강점기 일본의 민족 탄압에 대한 역사 인식이 부재할 뿐만 아니라 항일 독립운동에서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들을 배제했다는 지적이 나왔다. 경기신문은 이번 광복절 경축사를 통해 윤 대통령의 역사 인식 문제를 제기한 시민·사회단체 및 학계의 목소리를 들어봤다. [편집자 주] ◆ 황희형 광복회 “좌익 사상 독립운동가들

[식민지 대중가요 시리즈] 8편, 식민지 대중가요에 큰 족적을 남긴 두 사람 ‘강홍식과 신불출’

2022년 8월 30일 548

[식민지 대중가요 시리즈 8편] (2022년 6월 21일 방송) 식민지 대중가요에 큰 족적을 남긴 두 사람 강홍식과 신불출 이준희, 이영미와 함께합니다. 00:12:45 처녀 총각 딱히 대중음악가라고 할 수는 없으나, 식민지 대중가요에 큰 족적을 남긴 두 사람 강홍식은 가수로 신불출은 많은 작품이 있는 것은 아니나 작사가로 활약. 원래 연극계에서 활약하던 두 사람이 식민지시기 대중가요에서 의미 있는 활동을 했다는 것은 당시 ‘대중가요계’의 형성이 아직은 충분치 않았음을 보여 주는 점 00:29:40 장한가 일본 유학 당시 뮤지컬배우를 꿈꾸었던 강홍식은 아사쿠사오페라에도 참여를 했고 가창력과 연기력을 나름 인정받기도 했다. 하지만 간토대지진으로 아사쿠사오페라가 몰락을 하면서 그 역시 귀국, 연극과 영화 중심으로 활약 00:41:02 조선타령 평양 부잣집 아들인 강홍식과 달리 신불출은 유명세와 인기에도 불구하고 개인 이력에 관해 알려진 바가 거의 없는 편. 그의 작품 중에는 사회 비판적인 내용이 이따금 보이는 편. 00:53:36 노들강변 두 사람이 가장 활발하게 노래하고 작사했던 1930년대 중반은 신민요의 전성기이기도. 때문에 두 사람의 작품 가운데에는 신민요로서 주목되는 곡들이 있는 편.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역시 신불출이 작사한 ‘노들강변’ 01:02:33 대머리 대중가요라 할 수는 없지만 신불출은 극 음반을 매우 많이 쓰거나 녹음. 신불출이 단번에 스타덤에 오른 것도 1933년에 발표한 ‘대머리’ 덕이라 할 수 있음 01:29:51 청춘타령 두 사람은 분단 이후 한동안 이름을 언급하기 어려운 금기 대상. 신불출은

[MBC강원영동] 친일 행적 감춰진 시장·군수

2022년 8월 17일 1416

 어제 친일파 출신 강원도지사와 6.25 전쟁 때 민간인 학살을 저지른 주범이었던 강릉시장이 강원도와 강릉시의 무관심 속에 과거 잘못된 행태가 감춰지고 있는 실태를 보도해드렸습니다. 이런 상황이 비단 강원도지사와 강릉시장만의 일일까요? 김인성 기자가 보도합니다. 지난 1940년 5월 4일자 조선일보. 당시 속초면장 박상희의 축사가 실렸습니다. 조선 병합 이후 30주년을 맞아 천황의 은혜로 발전을 이루게 돼,  반도의 민중으로서 감격을 감당하기 어렵다는 내용의 사설이 당시 속초면장 박상희의 이름으로 실렸습니다. 박상희가 친일행정가이자 황국신민정책의 대변자임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대목인데 속초의 관문 설악해맞이공원엔 이 박상희 초대 속초읍장을 기리는 비 2개가 서 있습니다. 한눈에 들어오는 큰 추모비에 이 비를 세우는 데 도움을 준 수많은 속초시민들의 이름이 적혀 있습니다. 이 비의 건립일은 30년 전인 1992년 8월 15일, 광복절이었습니다. 고성군청 부근에는 특별히 큰 공적이 있었던 역대 군수들을 기리는 비석 18기가 있습니다. 이 가운데 1908년부터 한일 강제 병합이 있었던 1911년까지 당시 간성군수를 지낸 이면익의 비도 있습니다. 고성문화원의 연구 결과 ‘군수 이공면익 영세불망비’라고 적혀 있고 건립 연대는 1909년 3월이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그런데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에는  이면익이 1859년생으로 1909년 사립 수성학교를 세우는 등 많은 공을 세웠지만 1928년 쇼와 천황 즉위 기념 대례기념장을 받은 친일파로 소개돼 있습니다. 고성군은 다음 달부터 2,200만 원을 들여 이 18기의 비석을 보존 처리하고 안내판도 제작할 예정입니다. 군수로서의 공적과 친일파로서의 과오를 함께 지역주민들이 알 수 있도록 하는

[KBS] 교장실서 발견한 110년 전 사진…훈시하는 ‘초대 총독’

2022년 8월 17일 1413

일제강점기 초기인 1912년 5월 25일에 찍힌 사진입니다. 기모노를 입은 여성들이 교복을 입은 어린 학생들에게 일장기를 나눠주고 있습니다. 이곳은 어디이고, 저 학생들은 누구일까요? ■ 초대 총독의 조선인 학생 ‘훈시 행사’ 초대 조선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는 학생들에게 직접 훈시를 했습니다. 앞서는 일본인 학생들을 불러 모았고, 이날은 조선인 학생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장소는 총독 관저였습니다. 총독의 위세를 어린 조선인 학생들에게 과시하고 싶었나 봅니다. 사진 분석 결과, 경성 관내 보통학교 학생 3,000여 명이 한자리에 모인 것으로 추정됩니다. 학생들과의 만남은 토요일 데라우치 총독은 반드시 오는 25일(토요일)에 조선 학생 2,800명을 불러 만나고 다과와 국기(일장기)를 나누어 줄 것이라고 하더라 -매일신보 1912.05.24. 이 행사는 당시 신문기사로만 관련 기록이 남아있었는데, 최근 사진 자료가 발견됐습니다. 발견된 곳은 당시 행사에 참여했던 서울 광희초등학교의 교장실입니다. 발견된 사진은 총 14장입니다. 행사 과정이 동선별로 나와 있습니다. 위 사진은 일장기를 받아든 학생들이, 총독 관저 뒤쪽 ‘녹천정’이라는 건물 앞을 지나 이동하는 장면입니다. 사진 속 소나무에 붙어 있는 표지판에는 “작년 총독 부인이 양잠(누에를 치는 일)을 했던 곳”이라는 설명이 적혀 있어, 당시 시대상을 짐작게 합니다. 다음 사진은 녹천정을 지나온 학생들이, 안쪽에 있는 식물원 옆을 지나는 장면입니다. 총독 관저의 공간 배치 현황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사료로 평가됩니다. 총독 관저 뒤편으로 경성 시가도 보입니다. 다음 사진은 다리를 건너가기 전 순서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