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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피해자의 권리를 무시하는 윤덕민 주일대사의 발언을 강력히 규탄한다
책무를 망각한 윤덕민 대사는 즉시 사퇴하라
[다운로드] [성명] 피해자의 권리를 무시하는 윤덕민 주일대사의 발언을 강력히 규탄한다 책무를 망각한 윤덕민 대사는 즉시 사퇴하라 오늘 윤덕민 주일대사는 “피해자들이 요구하는 안(일본 기업의 배상 참여와 사과 등)을 100% (일본이) 받아들였다면 현재의 한일관계가 이렇게 되지 않았겠지만, 일본은 이를 다 수용하기에는 거의 불가능하다는 수준”이라며 대법원판결의 현금화를 막아야 한다고 발언했다. 이는 강제동원 대법원판결을 이행을 가로막고 대한민국의 사법 주권을 무시하는 일본 정부와 가해 기업의 태도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며, 피해자들의 인권 회복을 위해 일본 정부를 설득하고 대법원판결의 실현을 위해 외교적인 노력에 앞장서야 할 주일대사의 책무를 망각한 대단히 위험한 발언이다. 우리는 피해자의 인권을 무시하고 심지어 권리 실현을 가로막는 윤덕민 대사의 발언을 강력히 규탄한다. 또한, 윤 대사는 “현금화가 이뤄지면 한일관계가 어떻게 될지 상상하고 싶지 않지만, 아마도 우리 기업과 일본 기업 (사이에) 수십조 원, 수백조 원에 달하는 비즈니스 기회가 날아갈 가능성이 있다.”며 현금화는 피해자 단체에 “도덕적 차원의 승리”일지는 몰라도 “승자는 없을 것”이라며 피해자는 물론 한일 국민, 기업이 모두 큰 피해를 보게 된다는 논리를 폈다. 이는 1965년 한일청구권 협정,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 당시와 마찬가지로 국익을 위해 피해자 개인의 권리를 희생해야 한다는 논리와 그대로 맞닿아 있다. 윤 대사는 피해자들이 요구하는 사죄와 배상이 도덕적 차원의 승리에 지나지 않는다며, 피해자들이 수십 년 동안 호소해 온 정당한 요구의 의미를 폄훼하고 지원단체와 피해자의 분열과
[cpbc]日, 강제징용 피해자에 지급한 돈 ’99엔’
○ 방송 : cpbc 가톨릭평화방송 라디오 <오창익의 뉴스공감> ○ 진행 : 오창익 앵커 ○ 출연 : 김영환 민족문제연구소 대외협력실장 주목해야 할 뉴스를 꼽아서 청취자 분들에게 들려드리고 있습니다.일본 정부가 일제강점기에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99엔, 처음에 보도를 보고 99엔으로 끝나는 걸 보고 놀랐는데 우리나라 돈으로 1,000원 남짓인데 이걸 주겠다고 합니다. 배상 문제에 대한 해법 논의하기 위해서 정부가 민관협의체를 만들었는데 지금 강제징용 피해자를 대리하는 분들이 더 이상 외교부를 신뢰하기 어렵다고 하면서 앞으로 협의체에 참석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는데요. 어떻게 된 사연인지 김영환 민족문제연구소 대외협력실장님 모셨습니다. 김영환 실장은 피해자 대리인의 역할을 하는 분입니다. ▷어서 오십시오. ▶안녕하세요? ▷민족문제연구소는 어떤 단체인가요? ▶저희가 1991년에 만들어졌는데 아마 친일인명사전으로 잘 아실 겁니다. 고 임종국 선생님께서 친일파 연구를 하셔서 유지를 받아서 2009년에 친일인명사전을 만들었고 지금은 식민지 역사박물관을 운영하고 있고 저희가 20여 년 전부터 독립운동가, 친일파뿐만 아니라 일제 강제동원 문제에 관해서 진상규명, 소송 투쟁 이런 것들을 계속 진행했습니다. 그래서 일본 시민사회와 연대해서 저희들의 큰 활동 축으로 강제동원 문제 해결하기 위해서 활동을 계속 해오고 있습니다. ▷1945년 8.15 해방을 맞았지만 진정한 해방은 아니었다. 분단도 있었지만. 특히 과거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고 대한민국이 앞으로 가기 위해서는 과거문제를 제대로 해결하고 또 제대로 기억하는 게 중요하다는 걸 사명으로 갖고 있는 시민단체 이렇게 말씀드리면 대충 맞는 겁니까? 식민지역사박물관에 학생들이 견학오고
[뉴스엔뷰] 친일인명사전이 우리 사회에 갖는 의미
지난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파 4,389명의 이름과 그들의 행적을 낱낱이 기록한 ‘친일인명사전’을 발표했다. ‘친일인명사전’은 친일문제 연구에 평생을 바친 재야사학자 임종국의 뜻을 이어 1991년에 설립된 민족문제연구소가 출판했다 [뉴스엔뷰] 지난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파 4,389명의 이름과 그들의 행적을 낱낱이 기록한 ‘친일인명사전’을 발표했다. ‘친일인명사전’은 친일문제 연구에 평생을 바친 재야사학자 임종국의 뜻을 이어 1991년에 설립된 민족문제연구소가 사전 준비작업을 2001년부터 진행, 120여 명의 학자들로 구성된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를 발족하면서 본격적인 사전 제작에 착수했다. 8년에 걸친 제작기간 동안 친일인명사전은 많은 우여곡절이 많았다. 특히 정치적으로 이요되기도 했는데, 국회에서는 민족문제연구소의 예산이 삭감된 적도 있었다. 2008년 4월 29일에는 발간에 앞서 친일인명사전의 수록대상자 명단을 발표하고 기자회견을 가졌다. 발표된 명단은 큰 논란을 야기했고, 편찬위원회는 5월부터 7월까지 2달간 이의신청을 접수하고, 이후 지속적인 논의 끝에 최종명단을 확정하고, 2009년 11월 8일에 완성된 사전을 공개했다. 숙명여대에서 발간 국민보고대회가 개최될 예정이었으나 대관이 취소되어 대신 서울특별시 용산구 효창동 백범기념관에서 개최됐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인명사전’과 관련해 “이 사전은 일본제국주의의 불법적 국권침탈과 강압적 식민통치, 반인류적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 인물의 행적을 조사하고 정리함으로써 역사를 공정하게 기록하고 평가하는 데 기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면서 “아울러 이 사전은 특정 개인을 비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민족공동체의 아픈 상처를 확인하고 드러내어 역사의 교훈을 얻기 위한 자료로 활용하고자 하는 취지에서 발간이 추진되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객관적 사실에 기초한 엄정한 반성이 있어야만 과거의
[식민지 대중가요 시리즈] 3편, 스스로 삶을 개척해 나간최고의 가수 ‘이난영’
[식민지 대중가요 시리즈 3편] (2022년 4월 19일 방송) 스스로 삶을 개척해 나간 최고의 가수 ‘이난영‘ 이준희, 이영미와 함께합니다. 00:15:53 목포의 눈물 ‘목포의 눈물’로 한국 대중음악 역사에 불멸의 존재가 된 가수 그런데 그가 목포에서 살았던 기간은 49년 인생 중 13~14년에 불과 00:31:34 강윤복 구술 뮤지컬 ‘로미오와 줄리엣’ 주연을 맡기 위한 과감한 단발, 무대 연출을 위한 피아노 한 곡 마스터 등 다양한 일화들이 회자 00:37:55 다방의 푸른 꿈 가창에 있어서도 ‘트로트’의 전범이 되었지만 신민요에서 재즈송에 이르기까지 폭 넓은 표현력을 가진 가수 00:44:55 아리랑 당시 인기를 바탕으로 일본에서도 음반을 발표. ‘목포의 눈물’ 같은 본인 히트곡은 물론 ‘아리랑’ 같은 민요, 그리고 일본 작곡가들이 만든 신곡도 녹음 00:57:31 캐리오카 가족 또한 대중음악 역사에서 빠뜨릴 수 없는 인물들. 남편 김해송, 오빠 이봉룡, 자녀들과 조카로 구성된 김시스터즈와 김보이즈. 그리고 사실혼 관계였던 남인수까지 01:13:12 Michael, Row the Boat Ashore 1959년 미국으로 건너간 김시스터즈가 놀라운 성공을 거두고, 1962년 6월에 남인수가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연말 김시스터즈의 초청으로 미국행. 약 여덟 달 정도 체류하며 김시스터즈와 함께 무대에 서기도 했다 01:27:09 목포의 눈물 라이브 한국 대중가요 가수로서는 처음으로 일본, 중국, 미국 무대를 섭렵하며 화려한 조명을 받았지만 개인적인 이난영의 삶은 전쟁 이후 황폐함 그 자체 ▶민족문제연구소 https://www.minjok.or.kr ※ 지난 에피소드 다시보기 ☞식민지 대중가요
[프레시안] 강제동원 피해자 측, 윤석열 정부와 “신뢰관계 깨졌다” 민관협의회 불참
피해자에게 정부 의견서 제출 설명했다는 외교부에 피해자 측 “설명이 아니라 통지”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 측이 외교부가 주도하고 있는 문제 해결을 위한 민관협의회에 더 이상 참여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외교부가 피해자들의 권리 시행을 늦추기 위해 대법원에 의견서를 제출했고, 는 과정에서 피해자 측에 사전 통보도, 사후 설명도 없어 신뢰관계가 깨졌다는 것이 이들의 설명이다. 3일 일본제철, 미쓰비시중공업, 후지코시 상대 강제동원 소송 피해자 지원단(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및 피해자 대리인(법무법인 해마루 장완익·임재성·김세은 변호사)은 서울 도렴동 정부서울청사 별관 외교부 청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외교부의 대법원 의견서 제출 및 전후 사정을 고려할 때, 외교부와 피해자 측 사이에 신뢰관계가 파탄났다고 판단한다”며 “이에 피해자 지원단·대리인단은 이후 민관협의회 불참을 통보한다”고 밝혔다. 앞서 외교부는 7월 26일 근로정신대 피해자인 양금덕·김성주 할머니가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낸 특별 현금화 명령 재항고심에 대해 민사소송규칙에 근거해 대법원에 의견서를 제출했다. 외교부 당국자는 2일 이 의견서에 “한일 양국의 이익에 부합하는 합리적인 해결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각계각층의 의견을 수렴 중이다”라며 “민관협의회는 이러한 노력을 경주하는 차원”이라는 내용을 담았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이 당국자는 “외교부는 대법원에 의견서를 제출했고 이후 원고 및 피해자 측에 내용을 설명드렸다”며 “피해자 분들에게도 의견서 제출 사실 및 내용을 전했다”고 말했다. 외교부는 해당 의견서 제출을 사전에 피해자들에게 통지하지 않았다. 정부 입장을 확인하고 공개한다는 중요한 의미가 있는 의견서 제출에 대해 민관협의회에서 전혀 언급이 없었다는
[오마이뉴스] ‘백마 타고 온 초인’을 기리다
항일명장 허형식 장군 80주기 추모제 열려 지난 3일 늦은 오후 6시, 경북 구미시 임은동 왕산 허위 선생 기념공원에서 허형식 장군 제 80주기 추모제가 유족 및 구미 시민 등 50여 명의 참배객이 참석한 가운데 조촐하고도 장엄하게 열렸다. 이번 추모제는 민족문제연구소 구미지회가 주최하고, 광복회 경북지부가 후원했다. 이날 추모제는 식순에 따른 국민의례와 분향, 헌화에 이어 김영덕 민문연 구미지회장의 행사 의의, 이재섭 고문의 공적보고, 허형식 장군의 조카 허창수 옹의 유족 인사에 이어 <허형식 장군>을 쓴 필자의 작품 배경 이야기가 있었다. 필자는 구미 출신으로 선산 구미는 충절의 고장이라는 얘기를 듣고 자랐다. 하지만 현대사에서 그런 인물을 발견치 못하던 중, 1999년 여름 항일유적 답사 길에 북만주 하얼빈 동북열사기념관에서 허형식 장군을 만나자 암흑 속에서 한 줄기 빛을 본 감동을 느꼈다. 그리하여 이듬해 홀로 북만주 벌판의 허형식 장군 희생지에 들꽃을 헌화한 뒤 귀국하여, 10여 년 도 닦듯이 오대산 월정사 등지에서 작 이 작품을 집필하여 마침내 세상에 내놓았다. 장엄한 허형식 장군의 생애 장세윤 박사(전, 동북아 역사재단 수석 연구위원)는 허형식 장군의 장엄한 생애에 대해 ‘자유와 정의, 평등과 해방을 위한 최후의 전사’라는 추모사를 했다. 장 박사는 일찍이 <허형식 연구>라는 논문을 국내 처음으로 발표한 바 있다. 장군께서 북만주 경성현(현, 경안현) 청송령 소릉하 기슭에서 순국하신 지 어느덧 80년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잊힌 장군님의 고귀한 희생과
[오마이뉴스] 구청장 바뀌고 ‘민주’ 쏙 빠져, 12년 역사 축제명 칼질 논란
서대문구, 독립민주축제→독립페스타 변경, 추진위원들 잇달아 사퇴… 서대문구 “광복에 중점” 구청장이 바뀐 서울 서대문구가 12년 간 진행해 온 ‘서대문독립민주축제’의 축제명에서 ‘민주’란 단어를 뺐을 뿐만 아니라 그 과정에서 축제 추진위원(자문위원)회를 ‘패싱’ 했다는 논란이 일고 있다. 또 바뀐 축제의 내용에도 문제가 있다고 비판하고 나선 일부 추진위원들은 사퇴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서대문구청장은 더불어민주당 소속 문석진 전 구청장이 지난 2010년부터 3번 연임하다가 지난 6월 지방선거에서 국민의힘 소속 이성헌 구청장이 당선해 지난 7월 1일 취임했다. 국민의힘 소속 구청장으로 바뀌자 축제명에서 ‘민주’ 빠져 서대문독립민주축제는 지난 2010년부터 광복절(8월 15일)에 맞춰 서대문형무소를 중심으로 진행돼 온 서대문구의 대표 축제다. 조례에 근거한 서대문구 축제위원회의 지난해 4월 회의록을 보면, “서대문독립민주축제는 서대문구뿐 아니라 서울시에서도 일부 지원받는 축제다. 평가점수도 비교적 우수한 점수를 받았다”라는 내용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지난 7월 18일 서대문구 축제 관련 SNS에 이 축제 이름이 ‘서대문독립페스타’로 바뀌어 있는 홍보 포스터가 올라왔다. ‘민주’를 삭제하고 ‘축제’를 ‘페스타’로 바꾼 이름이었다. 이를 확인한 일부 추진위원들은 ‘축제명 교체 과정에 추진위원회의 의견을 묻지 않았다’며 서대문구에 문제를 제기했다. 추진위원들의 문제 제기에 서대문구 측은 ‘광복절 전후로 축제를 진행해야 하니 급히 홍보 포스터부터 올렸다. 사전에 알리지 못한 점 사과드린다’라고 답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그 뒤에 별다른 논의는 없었고, 서대문구는 지난 7월 29일 추진위원들에게 축제명 변경 등이 포함된 계획안을 이메일로 전달했다.
[기자회견] 강제동원 관련 민관협의회 피해자 측 입장
[다운로드] [입장문] 강제동원 관련 민관협의회 피해자 측 입장 2022. 8. 3. 일본제철, 미쓰비시중공업, 후지코시 상대 강제동원 소송 피해자 지원단(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피해자 대리인(법무법인 해마루 장완익·임재성·김세은 변호사) 현재 민관협의회에 참여하고 있는 피해자 지원단·대리인단은, · 현재 2회까지 진행된 민관협의회에서 피해자 지원단·대리인단이 전달할 의견은 대부분 전달하였다고 판단합니다. · 또한 외교부의 대법원 의견서 제출 및 전후 사정을 고려할 때, 외교부와 피해자 측 사이에 신뢰관계가 파탄났다고 판단합니다. · 이에 피해자 지원단·대리인단은 이후 민관협의회 불참을 통보합니다. 1. – 피해자 지원단·대리인단 지난 두 차례 민관협의회에 참여하면서 전달할 내용들을 전달하였습니다. 민관협의회가 의결(결정)기구가 아닌 의견수렴 기구라는 점은 외교부 측이 수차례 밝혀왔는바, 피해자 측 의견전달은 충분히 이루어졌다고 판단합니다. 2. – 피해자 지원단·대리인단은, 외교부가 2022. 7. 26. 대법원에 미쓰비시 중공업의 국내 자산을 대상으로 진행되고 있는 매각명령결정 재항고 사건 2건에 대한 의견서를 제출한 행위(이하 ‘외교부 의견서 제출’)에 대해 심각한 유감을 표명합니다. 재판거래 또는 사법농단이라는 범죄를 배경으로 만들어진 민사소송규칙을, 그 범죄의 공범이었던 외교부가 과거에 대한 아무런 반성없이 그 규칙을 다시 활용해서 강제동원 집행절차를 지연시키려는 모습은 재판거래의 피해자들인 강제동원 소송 원고들에게는 매우 충격적인 모습입니다. – 외교부 의견서 제출행위는 절차적으로 피해자 측의 신뢰관계를 완전히 저버리는 행위였습니다. 민관협의회라는 공개적인 절차가 진행되고 있음에도, 그 절차에서 전혀 논의되지 않음은 물론 피해자 측에 사전에 어떠한 논의나 통지도 없이 의견서가 제출되었습니다. 피해자 측이
[보도자료] 6월민주항쟁이 낳은 작가 ‘이상호’ 초대전 열려
[보도자료] [다운로드] 6월민주항쟁이 낳은 작가 ‘이상호’ 초대전 열려 6월민주항쟁 35주년을 기념해, 민족문제연구소 주최 식민지역사박물관 주관으로 6월민주항쟁이 낳은 작가 이상호 초대전이 열린다. 8월 4일부터 10월 2일까지 식민지역사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이상호, 역사를 해부하다》란 제목으로 개최되는 이번 초청전시는, 1987년 걸개그림 「백두의 산자락 아래 밝아오는 통일의 새날이여」 제작에 참여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된 이후 펼쳐진 35년간에 걸친 작가의 인생역정과 창작세계를 오롯이 담아냈다. 전시는 이상호 작가의 대표작 중 53점을 엄선하여 〈1987년 광주의 길 위에서〉 〈나주정신병원의 환우들〉 〈병실에서 아버지〉 〈자화상-나, 이상호〉 〈우리 역사, 우리 기억〉 〈해결되지 않는 이 세상〉 〈5·18 광주정신〉 〈세상을 향해 외치다!〉 등의 소주제로 재구성하였으며, 작가의 삶과 작품 활동을 연대기적으로 추적 그의 의식세계의 변화를 조명한다. 이상호의 작품들은 판화, 데생, 크로키에서부터 기념우표, 포스터 등 다양한 기법과 양식을 보여주고 있는데, 특히 대작들에 차용된 탱화 기법은 작가 특유의 세계관을 잘 드러내고 있어 눈길을 끈다. 이상호 작가는 1960년 광주에서 태어나 1982년 조선대 회화과에 입학하였으며, 선전물을 제작하고 시민미술학교 강사로 활동하는 등 미술패 운동에 열정을 바쳤다. 이 와중에서 걸개그림 「백두의 산자락 아래 밝아오는 통일의 새날이여」 사건으로 미술인 최초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수사과정에서 악명 높은 남영동 대공분실의 극악한 고문수사를 당하였으며, 이로 인해 30여 년간에 걸쳐 정신병원 입퇴원을 반복하는 등 극심한 트라우마를 겪게 됐다. 이상호 작가는 “내 자신이 미술인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87년
[연합뉴스] “연대로 차별 이겨낸 日 우토로, 평화의 발신지로 거듭나야”
20년 우토로 취재기 펴낸 나카무라 일성 “허물도 가감 없이 기록” “한일 시민단체 협력해 우토로發 평화교육 프로그램 만들어야” (서울=연합뉴스) 강성철 기자 = “강제퇴거라는 최악의 상황에 몰리자 우토로의 재일동포는 하나로 뭉쳤습니다. 도움을 주는 일본인들이 함께했고, 한일 양국 시민단체도 힘을 더하면서 보금자리를 지켜냈습니다. 우토로는 이제 ‘연대’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상징이 됐습니다.” ‘우토로 여기 살아왔고 여기서 죽으리라’의 저자로 최근 방한해 부산, 인천, 광주 등에서 강연회를 연 재일동포 3세 저널리스트 나카무라 일성(中村一成·53)은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차별 없는 미래를 만들기 위해 ‘연대’의 경험을 살려 우토로가 평화의 발신지로 거듭나게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일본 교토부 우지(宇治)시 소재 우토로는 일제강점기 군사 비행장 건설에 동원된 재일조선인이 전쟁이 끝난 후 방치되면서 생겨난 조선인 마을이다. 이후 1980년대 후반 강제 퇴거 위기에 몰렸지만, 재일동포들은 물론 한일 시민단체의 도움과 양국 정부의 지원으로 2018년부터 시영주택에 입주하게 됐다. 지난 4월에는 평화기념관도 들어섰다. 기념관은 차별의 상징이던 우토로 마을이 한일 시민 화합의 상징으로 거듭난 것을 널리 알리고, 문화 교류의 거점이 되도록 돕고자 한국 정부의 지원으로 지어졌다. 양국 시민들도 힘을 보탰다. 나카무라 씨는 마이니치신문 기자로 일하다 독립해 2011년부터 재일조선인과 이주자, 난민, 사형 문제 등을 다루는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기자 시절을 포함해 20년간 우토로 마을을 취재해온 나카무라 씨는 “주민의 증언 등 구술을 모으고 녹음한 분량이 산처럼 쌓였는데, 1세들은 점점 세상을 떠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