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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기사

[한겨레] 금송아지를 섬기는 이들에게 묻는다

2022년 8월 18일 461

[함세웅의 붓으로 쓰는 역사 기도] (45) 금송아지를 부수어야 사람 아닌 자본을 좇는 현대사회 일그러진 사회·경제·정치의 모습 “모세는 진영에 가까이와 사람들이 춤추는 모습과 수송아지를 보자 화가 나서 손에 들었던 돌판들을 산 밑에 내던져 깨버렸다. 그는 그들이 만든 수송아지를 가져다 불에 태우고 가루가 될 때까지 빻아 물에 뿌리고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마시게 하였다.” (탈출기32, 19-20) “예로보암은 마음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였다. ‘어쩌면 나라가 다윗 집안으로 돌아갈지도 모른다. 이 백성이 예루살렘에 있는 주님의 집에 희생 제물을 바치러 올라갔다가 자기들의 주군인 유다임금 르하브암에게 마음이 돌아가면 나를 죽이고 유다임금 르하브암에게 돌아갈 것이다.’ 그래서 임금은 궁리 끝에 금송아지 둘을 만들었다. …… 그러고 나서 금송아지 하나는 베텔에 놓고 다른 하나는 단에 놓았다. 그런데 이 일이 죄가 되었다. 백성은 금송아지 앞에서 예배하러 베텔과 단까지 갔다.” (1열왕12, 26-30) 2011년 12월, 제가 청구 성당에서 은퇴하기 직전에 손석춘 교수와 두 차례의 대담을 가졌습니다. 은퇴를 기념해 이를 정리해 책으로 엮기로 한 것입니다. 대담을 하고 며칠 뒤 정리된 내용을 이메일로 받았는데 상당히 원색적이고 거친 표현이 많았습니다, 저는 이틀 밤을 꼬박 새워 많은 부분을 교정하고 종합했습니다. 그리고 책 제목은 ‘금송아지를 부수어야’로 하자고 제안했습니다. 손 교수는 좋다고 동의했습니다. 그런데 한 달여 뒤에 출판사 대표 등이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청년 100여 명에게 의견을 물었더니 ‘금송아지를 부순다’라는 것에 부정적인 의견이

[오마이뉴스] 재심 끝에… ‘백마 탄 여장군’ 김명시 독립유공 서훈

2022년 8월 13일 960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결정… “당연한 일, 가슴 벅차게 반가우면서도 안타까워” 드디어, 아니 이제야 ‘백마 탄 여장군’ 김명시(金命時, 1907~1949) 장군이 우리 정부로부터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았다. 국가보훈처가 광복절을 맞아 김명시 장군에게 ‘국민훈장 애국장’을 추서하기로 했다고 12일 밝혔다. 경남 창원마산 출신인 김명시 장군은 일제강점기 중국 화복지역에서 조선독립동맹 조선의용군의 여성부대를 이끌고 일본군과 직접 전투를 벌여 ‘조선의 잔다르크’ 내지 ‘백마 탄 여장군’으로 불렸다. 김명시 장군은 1925년(18세) 모스크바 공산대학에 입학했고, 1927년 재학 중 상하이로 파견돼 ‘동방피압박민족반제자동맹’을 조직했으며, 1930년 하얼빈 일본영사관 공격을 주도했다. 장군은 신의주에서 일경에 체포돼 7년간 복역했고, 1939년 출옥한 뒤 중국으로 탈출해 ‘팔로군’에 들어가 천진, 제남, 북경, 태원 등지에서 항일투쟁을 벌였다. 광복 후 장군은 1945년 12월 ‘조선부녀총동맹’ 선전부 위원, 1946년 2월 ‘민주주의민족전선’ 중앙위원과 4월 서울지부 의장단에 이어, 1947년 6월 29일 ‘민주여성동맹’ 대표로 군정청을 방문해 하지 중장에게 ‘반탁시위 항의서’를 제출했다. 이후 1949년 10월 10일 부천경찰서에서 사망했다. 김명시 장군은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을 해왔고, 해방 이후에는 ‘신탁 통치 반대’ 활동을 벌였지만 오랫동안 잊혀진 인물이었다. 독립유공 서훈도 쉽지 않았다. 공적심사 탈락… 시민단체가 자료 찾은 끝에 재심 2000년대 들어 시민사회단체가 나서면서 김명시 장군이 새롭게 조명되기 시작했다. 열린사회희망연대가 흉상 건립과 생가터 표지판 제작에 이어 독립유공자 포상신청에 나선 것이다. 이 단체는 2018년 12월 ‘김명시 장군 흉상 건립’을 제안한 데 이어 ‘김명시 장군 친인척 찾기

[연합뉴스] 16일 국회서 일본군 위안부 등 한일관계 현안 토론회

2022년 8월 12일 548

강제동원 피해 해결 방안 등 모색 (서울=연합뉴스) 강성철 기자 = 시민단체 연대인 ‘역사정의 실현과 평화로운 한일관계를 위한 공동행동(이하 공동행동)’은 16일 국회 의원회관 제1 세미나실에서 ‘한일관계 현안 긴급 토론회’를 개최한다고 11일 밝혔다. 공동행동에는 겨레하나, 민족문제연구소, 일본군 성노예 문제 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연대, 한국진보연대, 지구촌동포연대, 전국여성연대, 재일동포 인권단체 등이 참여하고 있다. 홍익표·이탄희·이수진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배진교 정의당 의원이 함께하는 행사로 ‘역사정의 실현과 평화로운 한일관계, 과제와 실천’을 주제로 열린다. 일본군 위안부와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군사 안보 문제와 시민사회 제언 등 3개의 패널로 나눠서 시민단체·법률 \단체·학계 관계자의 발표와 토론이 이어진다. 공동행동 관계자는 “일본군 위안부와 강제동원 피해 문제 해결 없이 양국 간 진정한 평화 관계 구축이 어렵다는 것을 밝히고 바람직한 대안을 모색해 보려고 마련한 토론회”라고 말했다. wakaru@yna.co.kr <2022-08-12> 연합뉴스 ☞기사원문: 16일 국회서 일본군 위안부 등 한일관계 현안 토론회

[오마이뉴스] 교회 재산 일본에 바친 목사… 한국 정부는 상 줬다

2022년 8월 9일 742

[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김응순 부처님을 팔아 친일한 승려도 있었다. 지금의 서울 강남구 봉은사에서 범종 등을 수집해 일본군에 헌납한 봉은사 주지 홍태욱이 그중 하나였다. 종교만 다를 뿐, 홍태욱과 별반 다를 바 없는 기독교 목사들도 있었다. 교회 재산을 마치 자기 재산처럼 일본에 바친 인천 보합교회 김응순 목사가 그중 1인이다. 기독교 내부 친일 세력은 교인 1인당 1원씩 일왕(천황)에게 헌금하는 운동을 벌였을 뿐 아니라 교회 시설을 뜯어 일본에 바치기까지 했다. 류대영 한동대 교수가 저술한 <한 권으로 읽는 한국 기독교의 역사>는 “1941년 총회 보고에 의하면 한 해 동안 놋그릇 2165점과 교회종 1540개를 헌납했다”라며 “그해 장로교 교회 총수가 2543곳이었으므로 60% 이상의 교회가 일본의 전쟁 수행을 위해 종을 제공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장로교만 그랬던 것은 당연히 아니다. 감리교를 비롯한 여타 교단도 사정이 다르지 않았다. 위 책은 “국민총력감리회연맹은 예배당과 교회시설을 비상시국 관련 집회·피난소·특별작업장으로 제공하고 철문과 철책을 헌납하기로 결정했다”고 말한다. “통리자 정춘수는 1942년 2월 각 교구장에게 공문을 보내 성전(聖戰) 완수를 위해 교회종도 헌납할 것을 요구”했다고도 말한다. 단순히 전쟁 헌금을 갖다 바치는 정도가 아니었다. 교회 철문과 철책을 뜯고 교회종도 떼어다 바쳤다. 그것도 단순한 국가가 아니라, 이교를 숭배하는 국가를 위해 그렇게 했다. 일왕을 신으로 모시는 일제를 위해 교회종까지 뜯어다 바쳤다는 것은 기독교 친일 세력이 최소한의 금기사항마저 지키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이런

[성명] 피해자의 권리를 무시하는 윤덕민 주일대사의 발언을 강력히 규탄한다
책무를 망각한 윤덕민 대사는 즉시 사퇴하라

2022년 8월 8일 993

[다운로드] [성명] 피해자의 권리를 무시하는 윤덕민 주일대사의 발언을 강력히 규탄한다 책무를 망각한 윤덕민 대사는 즉시 사퇴하라 오늘 윤덕민 주일대사는 “피해자들이 요구하는 안(일본 기업의 배상 참여와 사과 등)을 100% (일본이) 받아들였다면 현재의 한일관계가 이렇게 되지 않았겠지만, 일본은 이를 다 수용하기에는 거의 불가능하다는 수준”이라며 대법원판결의 현금화를 막아야 한다고 발언했다. 이는 강제동원 대법원판결을 이행을 가로막고 대한민국의 사법 주권을 무시하는 일본 정부와 가해 기업의 태도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며, 피해자들의 인권 회복을 위해 일본 정부를 설득하고 대법원판결의 실현을 위해 외교적인 노력에 앞장서야 할 주일대사의 책무를 망각한 대단히 위험한 발언이다. 우리는 피해자의 인권을 무시하고 심지어 권리 실현을 가로막는 윤덕민 대사의 발언을 강력히 규탄한다. 또한, 윤 대사는 “현금화가 이뤄지면 한일관계가 어떻게 될지 상상하고 싶지 않지만, 아마도 우리 기업과 일본 기업 (사이에) 수십조 원, 수백조 원에 달하는 비즈니스 기회가 날아갈 가능성이 있다.”며 현금화는 피해자 단체에 “도덕적 차원의 승리”일지는 몰라도 “승자는 없을 것”이라며 피해자는 물론 한일 국민, 기업이 모두 큰 피해를 보게 된다는 논리를 폈다. 이는 1965년 한일청구권 협정,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 당시와 마찬가지로 국익을 위해 피해자 개인의 권리를 희생해야 한다는 논리와 그대로 맞닿아 있다. 윤 대사는 피해자들이 요구하는 사죄와 배상이 도덕적 차원의 승리에 지나지 않는다며, 피해자들이 수십 년 동안 호소해 온 정당한 요구의 의미를 폄훼하고 지원단체와 피해자의 분열과

[cpbc]日, 강제징용 피해자에 지급한 돈 ’99엔’

2022년 8월 4일 837

 ○ 방송 : cpbc 가톨릭평화방송 라디오 <오창익의 뉴스공감> ○ 진행 : 오창익 앵커 ○ 출연 : 김영환 민족문제연구소 대외협력실장 주목해야 할 뉴스를 꼽아서 청취자 분들에게 들려드리고 있습니다.일본 정부가 일제강점기에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99엔, 처음에 보도를 보고 99엔으로 끝나는 걸 보고 놀랐는데 우리나라 돈으로 1,000원 남짓인데 이걸 주겠다고 합니다. 배상 문제에 대한 해법 논의하기 위해서 정부가 민관협의체를 만들었는데 지금 강제징용 피해자를 대리하는 분들이 더 이상 외교부를 신뢰하기 어렵다고 하면서 앞으로 협의체에 참석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는데요. 어떻게 된 사연인지 김영환 민족문제연구소 대외협력실장님 모셨습니다. 김영환 실장은 피해자 대리인의 역할을 하는 분입니다. ▷어서 오십시오. ▶안녕하세요? ▷민족문제연구소는 어떤 단체인가요? ▶저희가 1991년에 만들어졌는데 아마 친일인명사전으로 잘 아실 겁니다. 고 임종국 선생님께서 친일파 연구를 하셔서 유지를 받아서 2009년에 친일인명사전을 만들었고 지금은 식민지 역사박물관을 운영하고 있고 저희가 20여 년 전부터 독립운동가, 친일파뿐만 아니라 일제 강제동원 문제에 관해서 진상규명, 소송 투쟁 이런 것들을 계속 진행했습니다. 그래서 일본 시민사회와 연대해서 저희들의 큰 활동 축으로 강제동원 문제 해결하기 위해서 활동을 계속 해오고 있습니다. ▷1945년 8.15 해방을 맞았지만 진정한 해방은 아니었다. 분단도 있었지만. 특히 과거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고 대한민국이 앞으로 가기 위해서는 과거문제를 제대로 해결하고 또 제대로 기억하는 게 중요하다는 걸 사명으로 갖고 있는 시민단체 이렇게 말씀드리면 대충 맞는 겁니까? 식민지역사박물관에 학생들이 견학오고

[뉴스엔뷰] 친일인명사전이 우리 사회에 갖는 의미

2022년 8월 5일 1078

지난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파 4,389명의 이름과 그들의 행적을 낱낱이 기록한 ‘친일인명사전’을 발표했다. ‘친일인명사전’은 친일문제 연구에 평생을 바친 재야사학자 임종국의 뜻을 이어 1991년에 설립된 민족문제연구소가 출판했다 [뉴스엔뷰] 지난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파 4,389명의 이름과 그들의 행적을 낱낱이 기록한 ‘친일인명사전’을 발표했다. ‘친일인명사전’은 친일문제 연구에 평생을 바친 재야사학자 임종국의 뜻을 이어 1991년에 설립된 민족문제연구소가 사전 준비작업을 2001년부터 진행, 120여 명의 학자들로 구성된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를 발족하면서 본격적인 사전 제작에 착수했다. 8년에 걸친 제작기간 동안 친일인명사전은 많은 우여곡절이 많았다. 특히 정치적으로 이요되기도 했는데, 국회에서는 민족문제연구소의 예산이 삭감된 적도 있었다. 2008년 4월 29일에는 발간에 앞서 친일인명사전의 수록대상자 명단을 발표하고 기자회견을 가졌다. 발표된 명단은 큰 논란을 야기했고, 편찬위원회는 5월부터 7월까지 2달간 이의신청을 접수하고, 이후 지속적인 논의 끝에 최종명단을 확정하고, 2009년 11월 8일에 완성된 사전을 공개했다. 숙명여대에서 발간 국민보고대회가 개최될 예정이었으나 대관이 취소되어 대신 서울특별시 용산구 효창동 백범기념관에서 개최됐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인명사전’과 관련해 “이 사전은 일본제국주의의 불법적 국권침탈과 강압적 식민통치, 반인류적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 인물의 행적을 조사하고 정리함으로써 역사를 공정하게 기록하고 평가하는 데 기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면서 “아울러 이 사전은 특정 개인을 비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민족공동체의 아픈 상처를 확인하고 드러내어 역사의 교훈을 얻기 위한 자료로 활용하고자 하는 취지에서 발간이 추진되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객관적 사실에 기초한 엄정한 반성이 있어야만 과거의

[식민지 대중가요 시리즈] 3편, 스스로 삶을 개척해 나간최고의 가수 ‘이난영’

2022년 8월 18일 585

[식민지 대중가요 시리즈 3편] (2022년 4월 19일 방송) 스스로 삶을 개척해 나간 최고의 가수 ‘이난영‘ 이준희, 이영미와 함께합니다. 00:15:53 목포의 눈물 ‘목포의 눈물’로 한국 대중음악 역사에 불멸의 존재가 된 가수 그런데 그가 목포에서 살았던 기간은 49년 인생 중 13~14년에 불과 00:31:34 강윤복 구술 뮤지컬 ‘로미오와 줄리엣’ 주연을 맡기 위한 과감한 단발, 무대 연출을 위한 피아노 한 곡 마스터 등 다양한 일화들이 회자 00:37:55 다방의 푸른 꿈 가창에 있어서도 ‘트로트’의 전범이 되었지만 신민요에서 재즈송에 이르기까지 폭 넓은 표현력을 가진 가수 00:44:55 아리랑 당시 인기를 바탕으로 일본에서도 음반을 발표. ‘목포의 눈물’ 같은 본인 히트곡은 물론 ‘아리랑’ 같은 민요, 그리고 일본 작곡가들이 만든 신곡도 녹음 00:57:31 캐리오카 가족 또한 대중음악 역사에서 빠뜨릴 수 없는 인물들. 남편 김해송, 오빠 이봉룡, 자녀들과 조카로 구성된 김시스터즈와 김보이즈. 그리고 사실혼 관계였던 남인수까지 01:13:12 Michael, Row the Boat Ashore 1959년 미국으로 건너간 김시스터즈가 놀라운 성공을 거두고, 1962년 6월에 남인수가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연말 김시스터즈의 초청으로 미국행. 약 여덟 달 정도 체류하며 김시스터즈와 함께 무대에 서기도 했다 01:27:09 목포의 눈물 라이브 한국 대중가요 가수로서는 처음으로 일본, 중국, 미국 무대를 섭렵하며 화려한 조명을 받았지만 개인적인 이난영의 삶은 전쟁 이후 황폐함 그 자체 ▶민족문제연구소 https://www.minjok.or.kr ※ 지난 에피소드 다시보기 ☞식민지 대중가요

[프레시안] 강제동원 피해자 측, 윤석열 정부와 “신뢰관계 깨졌다” 민관협의회 불참

2022년 8월 3일 812

피해자에게 정부 의견서 제출 설명했다는 외교부에 피해자 측 “설명이 아니라 통지”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 측이 외교부가 주도하고 있는 문제 해결을 위한 민관협의회에 더 이상 참여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외교부가 피해자들의 권리 시행을 늦추기 위해 대법원에 의견서를 제출했고, 는 과정에서 피해자 측에 사전 통보도, 사후 설명도 없어 신뢰관계가 깨졌다는 것이 이들의 설명이다. 3일 일본제철, 미쓰비시중공업, 후지코시 상대 강제동원 소송 피해자 지원단(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및 피해자 대리인(법무법인 해마루 장완익·임재성·김세은 변호사)은 서울 도렴동 정부서울청사 별관 외교부 청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외교부의 대법원 의견서 제출 및 전후 사정을 고려할 때, 외교부와 피해자 측 사이에 신뢰관계가 파탄났다고 판단한다”며 “이에 피해자 지원단·대리인단은 이후 민관협의회 불참을 통보한다”고 밝혔다. 앞서 외교부는 7월 26일 근로정신대 피해자인 양금덕·김성주 할머니가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낸 특별 현금화 명령 재항고심에 대해 민사소송규칙에 근거해 대법원에 의견서를 제출했다. 외교부 당국자는 2일 이 의견서에 “한일 양국의 이익에 부합하는 합리적인 해결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각계각층의 의견을 수렴 중이다”라며 “민관협의회는 이러한 노력을 경주하는 차원”이라는 내용을 담았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이 당국자는 “외교부는 대법원에 의견서를 제출했고 이후 원고 및 피해자 측에 내용을 설명드렸다”며 “피해자 분들에게도 의견서 제출 사실 및 내용을 전했다”고 말했다. 외교부는 해당 의견서 제출을 사전에 피해자들에게 통지하지 않았다. 정부 입장을 확인하고 공개한다는 중요한 의미가 있는 의견서 제출에 대해 민관협의회에서 전혀 언급이 없었다는

[오마이뉴스] ‘백마 타고 온 초인’을 기리다

2022년 8월 5일 950

항일명장 허형식 장군 80주기 추모제 열려 지난 3일 늦은 오후 6시, 경북 구미시 임은동 왕산 허위 선생 기념공원에서 허형식 장군 제 80주기 추모제가 유족 및 구미 시민 등 50여 명의 참배객이 참석한 가운데 조촐하고도 장엄하게 열렸다. 이번 추모제는 민족문제연구소 구미지회가 주최하고, 광복회 경북지부가 후원했다. 이날 추모제는 식순에 따른 국민의례와 분향, 헌화에 이어 김영덕 민문연 구미지회장의 행사 의의, 이재섭 고문의 공적보고, 허형식 장군의 조카 허창수 옹의 유족 인사에 이어 <허형식 장군>을 쓴 필자의 작품 배경 이야기가 있었다. 필자는 구미 출신으로 선산 구미는 충절의 고장이라는 얘기를 듣고 자랐다. 하지만 현대사에서 그런 인물을 발견치 못하던 중, 1999년 여름 항일유적 답사 길에 북만주 하얼빈 동북열사기념관에서 허형식 장군을 만나자 암흑 속에서 한 줄기 빛을 본 감동을 느꼈다. 그리하여 이듬해 홀로 북만주 벌판의 허형식 장군 희생지에 들꽃을 헌화한 뒤 귀국하여, 10여 년 도 닦듯이 오대산 월정사 등지에서 작 이 작품을 집필하여 마침내 세상에 내놓았다. 장엄한 허형식 장군의 생애 장세윤 박사(전, 동북아 역사재단 수석 연구위원)는 허형식 장군의 장엄한 생애에 대해 ‘자유와 정의, 평등과 해방을 위한 최후의 전사’라는 추모사를 했다. 장 박사는 일찍이 <허형식 연구>라는 논문을 국내 처음으로 발표한 바 있다. 장군께서 북만주 경성현(현, 경안현) 청송령 소릉하 기슭에서 순국하신 지 어느덧 80년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잊힌 장군님의 고귀한 희생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