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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부활동

7일 임종국 선생 26주기 추모식

2015년 11월 3일 1050

민족문제연구소 충남지부(지부장 최종진)와 천안아산지회(지회장 최미경)는 오는 11월 7일 오전 11시 천안공원묘원 무학지구 철쭉 4-1에서 친일문제 연구의 선구자인 임종국 선생 26주기 추모식을 연다. 추모식에는 민족문제연구소 회원과 유족을 비롯해 지역의 시민, 교사, 학생들 약 100여 명이 참가할 예정이며 김지철 충남교육감와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등이 추모사를 할 예정이다. 묘소에서 추모식을 마친 후에는 천안공원묘원 구내식당으로 자리를 옮겨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의 역사 강연과 정소진 전 천안 YMCA 이사의 임종국 선생에 대한 회고사를 들을 예정이다. ↑↑ 故 임종국 선생 ⓒ 온양신문 1965년 국민적 반대 속에 굴욕적인 한일협정이 체결되자, 임종국 선생(1929∼1989)은 우리 근현대사 왜곡의 근본 원인이 과거사 청산의 부재에 있음을 직시하고, 반민특위 와해 이후 금기시되고 있던 친일문제 연구에 착수했다. 그는 1966년 ‘친일문학론’을 발표해 지식인 사회에 충격을 던졌으며, 그 외에도 문학과 역사를 아우르는 방대한 역작들을 남겨 한국지성사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 임종국 선생은 1980년대 초반, 친일문제 연구에 집중하기 위해서 서울에서 천안으로 내려와 천안과 인연을 맺은 이후 삼룡동의 외딴 산속에 거처를 옮겨 ‘요산재’(樂山齋)라고 이름 짓고 돌아가실 때까지 친일문제연구에 매진했다. 임종국 선생은 후학들과 함께 방대한 규모의 ‘친일파총사’ 집필에 착수했지만 폐기종으로 건강이 악화돼 한 걸음 떼고 숨을 한번 쉬어야만 할 정도로 건강이 악화돼 끝내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1989년 11월 12일 만 60세로 서거했다. 임종국 선생은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남긴 정신과 저서, 방대한

충남대 학생들, 황우여에게 “국정화 중단하라”

2015년 11월 2일 767

[현장] ‘공교육 정상화 정책설명회’ 찾은 황 부총리 맞아 학생들 ‘피켓시위’ ▲  황우여 부총리 겸 교육부장관이 2일 오후 충남대를 방문하자 학생들이 ‘교과서 국정화’에 항의하는 피켓시위를 벌였다. ⓒ 오마이뉴스 장재완 관련사진보기 ▲  황우여 부총리 겸 교육부장관이 2일 오후 충남대를 방문하자 학생들이 ‘교과서 국정화’에 항의하는 피켓시위를 벌였다. 사진 중앙 왼쪽이 황우여 장관, 오른쪽은 항의하고 있는 홍경표 민족문제연구소 대전지부 사무국장. ⓒ 오마이뉴스 장재완 관련사진보기 황우여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장관이 충남대학교를 방문하자, 학생들이 피켓 시위를 벌이며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중단을 촉구했다. 황 부총리는 2일 오후 대전 유성구 충남대학교 정심화홀에서 열린 ‘공교육 정상화를 위한 권역별 교육정책 설명회’에 참석했다. 이날 정책설명회는 대전과 세종, 충청, 강원지역 교장들을 상대로 한 행사로 황 부총리도 강연을 했다.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를 주도하는 교육부 수장이 학교를 방문한다는 소식을 들은 충남대 학생들은 행사 시작에 앞서 정심화홀 앞에서 피켓시위를 벌였다. 처음에는 4, 5명의 학생들이 피켓을 들고 서 있었다. 하지만, 황 부총리가 도착하기 직전에는 SNS 등을 통해 소식을 들은 20여 명의 학생들이 몰려와 행사장에 들어서는 황 부총리를 맞았다. 황 부총리가 타고 온 차에서 내려 30여 미터를 걸어 행사장 입구로 들어가는 동안 학생들은 황 부총리를 둘러싼 채 “국정화 중단하십시오”, “역사왜곡 친일미화 교과서 반대합니다”, “교과서 국정화 중단하라는데 대체 뭐하시는 겁니까”라고 소리를 질렀다. 또한 이날 학생들과 함께 1인 피켓시위를 벌이던 홍경표 민족문제연구소

독립기념관 홍난파 기념비 앞에 ‘단죄문’ 세웠다

2015년 9월 21일 1068

민족문제연구소 천안아산지회 “독립운동가에 모독… 친일 행적 널리 알리고자” ▲ 민족문제연구소 천안아산지회가 20일, 독립기념관 입구에 있는 홍난파 기념비 앞에 홍난파 단죄문을 설치했다. ⓒ 장명진 20일 오전 민족문제연구소 천안아산지회가 독립기념관 입구에 있는 홍난파 기념비 앞에 홍난파 단죄문을 설치했다. 천안시는 1987년 독립기념관(천안시 목천면) ‘광복의 동산’에 독립운동가를 기리는 나무와 비석을 세웠다. 광복의 동산은 독립기념관 진입로 좌측에 꾸며진 숲이다. 유관순 열사, 윤봉길 의사, 한용운 선생 등의 독립운동가를 기리는 나무와 비석이 들어서 있다. 홍난파를 기리는 나무와 비도 서 있다. 홍난파 비에는 ‘홍난파 선생과 감나무’ 제목 아래 “‘봉선화’, ‘고향의 봄’을 비롯한 수많은 겨레의 노래로 나라 잃은 슬픔을 달래주면서 희망과 용기를 북돋워 준 작곡가 난파 홍영후(홍난파의 본명, 기자 주)로 선생의 고향인 경기도 화성군 남양면 활초리 옛 동산에 자라던 감나무, 상수리나무 가지를 따다가 여기 심어 선생의 높은 뜻을 기린다”고 썼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지난 2009년 일제 강점기에 친일·반민족 행위를 자행한 친일파 목록을 정리해 발표했다. 여기에는 홍난파가 포함됐다. 하지만 천안시와 독립기념관 어디에서도 홍난파 비를 철거하지 않았다. 홍난파의 노골적인 친일행각 민족문제연구소가 밝힌 친일 행위는 노골적이다. – 1937년 미국 유학 중 흥사단에 가입한 일로 검거되자 경성지방법원에 <사상전향에 관한 논문> 제출했다. 이 논문에는 “부끄러움을 금할 수 없다. 금후는 일본제국의 신민으로서 본분을 다하고, 온건한 사상과 정당한 시대관찰로써 국가에 충성을 꾀하며, 민중에 대해서는 훌륭한 지도자가 될 것을

광복 70년 기념 학교로 찾아가는 독립운동 이야기 순항!!

2015년 9월 10일 793

-오는 12월 21일까지 도내 중·고등학교 직접 방문 전시 – 제주특별자치도교육청(교육감 이석문)은 지난 9월 7일(월)부터 도내 중·고등학교를 직접 방문하여 ‘광복 70년 기념 학교로 찾아가는 독립운동 자료 전시회’를 진행하고 있다. 이번 전시회는 도교육청이 주최하고 민족문제연구소 제주지부와 노무현재단 제주위원회 주관으로 광복 70주년을 맞아 독립운동가들의 독립 정신과 애국애족정신을 계승하고 세계화 속에 학생들의 약해지는 민족 공동체 의식을 높이고 역사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하여 오는 12월 21일(월)까지 개최될 예정이다. 광복 70년 기념 학교로 찾아가는 독립운동 이야기 특별전에 전시되는 자료는 세 가지 종류로 구성되었는데 첫째는 동학농민운동, 을사늑약과 독립운동부터 광복까지의 자료이고, 둘째는 백범 김구의 일대기 자료이며, 셋째는 제주 항일투쟁의 역사 자료이다. 이 외에도 이회영 등 독립운동가들의 사진과 명언, 독립운동 당시 불려졌던 노래 가사 등이 전시되고 있다. 도교육청은 이번 행사를 통하여 학생들이 광복 70년의 의미를 되새기고 민족과 독립을 위해 희생한 독립운동가들의 정신을 기리며 독립운동사를 배워 애국심을 기르고 민주시민으로서의 공동체 의식을 갖출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2015-09-10> 제주투데이 ☞기사원문: 광복 70년 기념 학교로 찾아가는 독립운동 이야기 순항!!

“일본군 위안부, 단순히 개인 피해 문제 아냐”

2015년 9월 10일 759

평화나비대전행동, 매월 둘째 주 수요일 대전평화의 소녀상 앞에서 개최 ▲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대전지역 첫 수요집회가 9일 밤 대전시청 앞 보라매공원 대전평화의소녀상 앞에서 열렸다. ⓒ 오마이뉴스 장재완 관련사진보기 ▲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대전지역 첫 수요집회가 9일 밤 대전시청 앞 보라매공원 대전평화의소녀상 앞에서 열렸다. ⓒ 오마이뉴스 장재완 관련사진보기 “일본은 군 위안부 문제를 비롯한 전쟁범죄에 대해 진정으로 사과하고 반성하라.”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촉구하고 한반도 평화를 염원하는 첫 대전시민 수요문화제가 9일 밤 대전시청 앞 보라매공원 대전평화의소녀상 앞에서 열렸다. 이번 수요문화제는 지난 3월 1일 대전평화 소녀상을 세운 ‘평화나비대전행동’이 평화의 소녀상을 세웠던 그 뜻을 지속적으로 이어가자는 뜻으로 주최한 것으로, 앞으로 매달 둘째 주 수요일밤에 같은 장소에서 계속 열릴 예정이다. 이날 수요문화제는 50여명의 시민들이 참여한 가운데 촛불을 들고 먼저 가신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을 추모하는 묵념으로 시작됐으며, 이어 시민발언과 문화공연, 합창, 구호제창 등의 프로그램이 진행됐다. 첫 발언에 나선 최영민 대전평화여성회 대표는 “오늘 이 자리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과 한반도 평화를 바라는 대전시민들의 마음을 한데 모아가는 첫걸음의 자리로 매우 귀한 자리”라며 “일본이 군위안부 문제에 대해 진심어린 사죄와 반성을 할 수 있도록 더 많은 시민들의 마음을 모아나가자”고 말했다. 이어 발언에 나선 민족문제연구소대전지부 홍경표 사무국장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일제가 저지른 가장 반인륜적이고 반인권적인 범죄행위”라면서 “그런데 이 문제해결에

갈 곳 없던 청주 ‘평화의 소녀상’…중앙동 주민들이 다시 보듬었다

2015년 9월 8일 988

ㆍ청소년단체 반대로 이전 결정 ㆍ주민들이 설득 조건부 수용 ㆍ‘청소년광장’에 그대로 두기로 설치 장소를 두고 논란이 있었던 충북 청주의 ‘평화의 소녀상’이 자리를 찾았다. 청주시 중앙동 주민자치위원회는 7일 청소년단체, 관계기관과 간담회를 갖고 임시 전시장소인 청소년광장에 ‘평화의 소녀상’을 그대로 두기로 합의했다고 밝혔다. 광복회 충북지부, 민족문제연구소 충북지부, 문화사랑모임 등으로 이뤄진 ‘충북 평화의 소녀상·기림비 시민추진위원회’는 지난 5월부터 시민 2000여명에게 5000만원을 모금해 평화의 소녀상을 만들었다. 이들은 청주시 상당구 중앙동 청소년광장에 소녀상을 설치하기로 하고 청주시에 건립 허가를 요청했다. 하지만 청주시는 소녀상이 추모 성격을 가졌기 때문에 청소년활동진흥법상 청소년광장에 설치할 수 없다며 허가를 해주지 않았다. ▲ 7일 청주 중앙동 주민들의 도움으로 충북 청주시 상당구 중앙동 청소년광장에 자리를 잡은 ‘평화의 소녀상’. 일부 청소년단체들도 “소녀상이 누군가에게 훼손되면 청소년들이 그랬다는 오해를 살 수 있어 평화의 소녀상 설치를 반대한다”는 입장을 보였다. 이 때문에 시민추진위원회는 오는 10월까지 청소년광장에 소녀상을 임시로 전시한 뒤 다른 곳으로 옮기기로 하고 지난달 14일 소녀상을 설치했다. 하지만 추진위는 전시 장소를 확정짓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소녀상의 거처가 정해지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중앙동 주민들이 나섰다. 중앙동 주민자치위는 3일 ‘평화의 소녀상 설치 요청서’를 청주시장과 청주시의회 의장에게 보냈다. 중앙동 새마을부녀회뿐 아니라 청주시주민자치협의회장 등 청주지역 주민자치위원장 20여명도 소녀상을 청소년광장에 그대로 둘 것을 건의했다. 진창수 중앙동 주민자치위원장은 “소녀상이 설치된 뒤 학생들이 찾아와 사진을 찍고 있으며 20여일이

광복회, 경술국치 추념행사서 축하 태극기

2015년 9월 1일 826

조기 대신 태극기 흔들어 눈총… “일부 늦게 온 분들만” 해명 ▲  광복회 대전충남연합지부(지부장대행 오연우)는 한일병탄조약이 발효된 지 105주년이 되는 지난 28일 오전 11시 대전시청 앞 보라매공원에 ‘경술국치 추념식 및 일본아베정권규탄대회’를 열고 있다. ⓒ 민족문제연구소 대전지부 관련사진보기 광복회 대전충남연합지부가 한일병탄 조약(韓日倂呑條約) 발효일에 맞춰 경술국치 추념행사를 하면서 조기(弔旗)가 아닌 축하용 태극기를 흔들어 눈총을 받고 있다. 광복회 대전충남연합지부(지부장대행 오연우)는 한일병탄조약이 발효된 지 105주년이 되는  지난 28일 오전 11시 대전시청 앞 보라매공원에 ‘경술국치 추념식 및 일본아베정권규탄대회’를 열었다.일본에 의해 강제로 체결 발효된 한일병탄조약은 경술년인 1910년 8월 29일에 일어난 치욕스러운 사건으로 이 일로 대한제국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대한민국국기법’에는 현충일 등 슬픈 날에는 깃봉과 깃면의 사이를 깃면의 너비만큼 떼어 조기(弔旗)를 게양토록 법으로 정하고 있다. 전국 일부 시민단체에서는 일본에 나라 잃은 슬픈 날을 되새기기기 위해 경술국치일에 조기 게양을 하도록 독려하기도 했다. ▲  광복회 대전충남연합지부(지부장대행 오연우)가 ‘경술국치 추념식 ‘을 하면서 조기가 아닌 경축용 태극기를 흔들어 눈총을 받고 있다. ⓒ 민족문제연구소대전지부 관련사진보기 하지만 행사에 참여한 대전지방보훈청장과 기관장을 문론 단체 회원들이 조기가 아닌 ‘경축용’ 태극기를 손에 들었다. 행사장에도 곳곳에 경축용 태극기를 내걸었다. 참석자들은 ‘경축용’ 태극기를 들고 만세삼창을 하기도 했다. 민족문제연구소 대전지부 관계자는 “말로는 일본을 규탄하면서 경술국치를 적극 환영하는 모양새가 됐다”며 “행사를 주관한 광복회 대전충남연합지부는 물론 지방보훈청, 대전시 등의 허술한 준비와 자세를 보고 씁쓸했다”고 말했다.

‘대전 김태원’ 후손, 독립운동가 유족 아니었다

2015년 8월 10일 2101

보훈처 심사위원회 결론, 최근 5년 보훈연금 1억 원 환수하기로 ▲  ‘독립운동가 김태원 공훈 의혹 진실규명 시민 공동조사단'(공동대표 이순옥 민족문제연구소 대전지부장, 이하 공동조사단)가 지난 6월 24일 오후 2시 대전지방보훈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연 모습. ⓒ 심규상 관련사진보기 상영 중인 영화 ‘암살’에서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를 암살하던 인물이 광복 후 독립운동가로 행세한다. 광복 70주년을 앞두고 대전에서는 남의 독립운동 행적을 이용해 수십 년 동안 보훈혜택을 받아온 인물이 유족이 아닌 것으로 결론이 났다. 국가보훈처 보훈심사위원회는 지난 5일 오후 열린 회의에서 독립운동가 김태원(金泰源, 1902~1926)의 후손이라며 약 50년 가까이 보훈연금 등을 받아온 김아무개씨 등에 대해 “유족이 아닌 것으로 결론 내렸다”고 10일 밝혔다. 광복 이후 수십 년 동안 독립운동가로 알려진 인물이 후손에 의해 남의 공적을 가로채 만든 가짜 독립운동가로 공식 확인된 것이다. (관련 기사 : ‘훈장’까지 받은 독립운동가, 행적이 의심스럽다) 보훈심사위원회는 독립유공자 등의 유족 여부 등을 심의하는 보훈처 소속의 합의제 의결기관으로 모두 11명으로 구성돼 있다. 평양형무소에서 사형된 김태원 선생 – “천우신조로 탈옥해 독립운동” 조작 보훈심사위원회의 이 같은 결정은 시민 공동조사단이 내린 결론과 같다. 앞서 대전지역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독립운동가 김태원 공훈 의혹 진실규명 시민 공동조사단은 ‘독립운동가로 알려진 ‘대전 김태원'(金泰源, 1900~1951)이 ‘평북 김태원'(金泰源, 1902~1926)의 독립운동 행적을 가로챈 가짜라고 결론 내린 바 있다. 평북 출신인 김태원 선생(金泰源, 1902~1926)은 1919년(대정 8년) 중국 관전현에 건너가 그곳에 근거를

“제 증조부 김정필은 독립유공자가 아닙니다”

2015년 8월 4일 1521

‘독립유공자 김정필’의 증손자 주장… “만주에 간 적도, 독립운동 한 적도 없어”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 증조부는 독립운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독립유공자가 아닙니다.” 함께 있던 김영진 광복회대전충남지부 감사와 홍경석 민족문제연구소대전지부 사무국장의 눈이 커졌다. 예상을 하고 있던 ‘경주 김씨 송애공파 종친회’ 김찬경 총무도 의자에서 등을 떼며 자세를 다잡았다. “독립운동 하지 않았다”고 밝힌 독립유공자의 증손자 ▲  독립유공자 김정필(金正弼)의 증손자이자 집안의 장손인 김아무개(73, 대전시 거주)씨. 그가 기자에게 족보를 내보이며 자신의 증조부는 독립운동을 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다. ⓒ 심규상 관련사진보기 김아무개(73·대전시 거주)씨. 그는 독립유공자로 알려져 있는 김정필(金正弼)의 증손자이자 집안의 장손이다.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공훈록 등에 따르면 김정필(1846-1920)은 충남 대덕 사람으로 1907년 한봉수(한민구 현 국방장관의 조부)의 병진에 입진, 한봉수 의병장을 보좌하며 용인, 괴산, 여주 등지에서 격전을 치르는 등 활동했다. 그 후 1920년 만주로 망명해 무장 항일투쟁을 벌이다 같은 해 10월, 순국한 것으로 돼 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1968년 대통령 표창을 수여한 데 이어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그런데 고인의 장손이 증조부는 “독립운동을 하지 않았다”고 폭탄 발언을 한 것이다. 후손이 나서 자신의 조상에 대해 독립운동을 한 사실이 없다며 서훈 취소를 요청한 것 자체가 처음 있는 일이다. 다른 후손은 조상의 독립운동 행적을 부풀리거나 허위로 만들어내 기까지 하는데 자진해서 독립운동을 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나선 연유는 뭘까? – 왜 독립운동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