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장자료 톺아보기
민족의 수난에 분노하는 신여성의 일기
이번에 소개할 자료는 일제강점기 대구에 살았던 스무 살 여성의 일기다. 여자고등보통학교 5년생 이상으로 추측되는 주인공의 일기에는 주로 하루의 일과나 감상, 독서에 대한 소감과 자신의 습작 시나 소설이 담겨 있어 일기 자체가 하나의 문학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빼앗긴 조국에 대한 안타까움과 분노를 일기를 통해 토로한다. 1936년 8월 베를린 올림픽에서 손기정 선수가 금메달을 목에 걸어 모두 기뻐할 때도 그녀는 전국이 엄청난 수해로 인해 고통 받고 있는 시기에 같은 민족의 올림픽 1등을 자랑스러워하기보다 일장기를 가슴에 단 ‘식민지 조선인’의 설움에 울분을 토한다. 손기정이 올림픽에서 일등을 했지만 수해로서 이재민이 막심한 이때 그렇게 떠들 것이 무엇이냐. 하지만 우리의 마라토너의 등 뒤에 일본기가 휘날린다 하니 망국 백성의 비애를 더욱 느끼게 하는구나. 일본의 식민지인 것을 세계 각국에 재인식시키는 것이 그리도 좋으냐 이무리들아! 하늘을 우러러 목이 터지도록 호소라도 하여 볼까. 전날의 영광이 이 날의 치욕이 되니 억울함이여. 그리고 폭우로 생긴 수재로 고통 받는 조선인을 안타까워하며, “온갖 쓰라린 낙인을 약소민족의 가슴에 무수히 찍어놓고도 무엇이 부족하여 인제 통틀어 이무리들을 삼키려 하느냐”라며 무심한 하늘을 보며 비에다 호통을 친다. 이처럼 그녀의 민족적 감수성은 예리함을 잃지 않고 있다. 그러나 손기정, 남승룡 선수의 올림픽 입상은 수많은 식민지 조선인들에게 민족의 자긍심을 불러 일으켰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심훈은 이 소식을 듣자마자 두 선수의 입상을 보도한 당시 조선중앙일보
일본공사관원의 눈에 비친 근대 조선의 모습, 『조선국진경』
돈의문(敦義門)을 들어서서 우측으로 꺾으면 오른쪽에 이태호(怡泰號)의 각색점(各色店)이 있고 남쪽으로 붙어서 러시아 건축사 사바친 씨의 우소(寓所)이며 이어서 법국이사관(法國理事官)의 공서(公署)가 된다. 왼쪽에 아라사와 미국 양국의 공사관이 있으며 또한 좌우로 미합중국 전도사 여러 사람의 거택, 부인병원(婦人病院), 여학교 및 육영공원(育英公院) 등이 이곳에 있는데, 모두 합중국 전도사의 감독에 관계된다. 독일상(獨逸商) 세창양행(世昌洋行)의 지점과 아울러 경성구락부(京城俱樂部)도 역시 이곳에 있다. 미공사관의 남린(南隣)은 총세무사서(總稅務司署)이며, 그 안쪽에 영국총영사관이 있다. 거기에 상림원(上林苑)의 뒤편 작은 언덕에서 시가를 내려 보면 조망이 아름답다. 독일제국영사관은 왕성(王城)의 동방 안동(安洞)에 있으며 우리 공관(일본공사관을 말함)의 정북면에 해당한다. 이것은 1891년에 발행된 『조선안내(朝鮮案內)』라는 소책자에 수록된 내용이다. 이제 막 서양인들로 넘쳐나기 시작한 정동 일대의 거리 풍경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를 통해 각국 공사관의 위치는 물론이고 최초의 여성전용병원이던 보구여관(普救女館)이나 근대식 공립학교의 효시로 일컫는 육영공원 등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이 글을 남긴 이는 일본공사관의 관원이던 하야시 부이치(林武一, 1858~1892)로, 이 책 말고도 『조선국진경(朝鮮國眞景)』이라는 사진첩을 남긴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해군소주계(海軍少主計, 경리장교) 출신으로 1888년 7월 교제관시보(交際官試補)로 서임되는 동시에 조선주재 일본공사관에 발령받아 그해 8월부터 1891년 10월까지 서울에서 근무한 인물이었다. 그 후 3년 만기 근무의 대가로 휴가를 얻어 귀국하였다가 1892년 1월에 재차 임시파견의 명을 받아 조선 각도의 순시를 마치고 돌아가던 차에 그가 승선한 이즈모마루(出雲丸)가 그해 4월 5일 전라남도 소안도 앞바다에서 좌초되는 바람에 사망했다. 이에 일찍이 사진기술을 익힌
일제가 전세계를 대상으로 제작 배포한 영문판 식민통치보고서, 애뉴얼 리포트
강원도 삼척군(三陟郡)에서 상치(尙齒)의 은전(恩典)에 욕(浴)한 최동욱(崔東昱) 외 37명의 양반유생(兩班儒生)은 성은(聖恩)의 우악(優渥)하심을 감격하여 성덕(聖德)을 만세에 전하기로 거월(去月) 3일 천장가절(天長佳節)에 복(卜)하여 동군(同郡) 읍내 서단 죽서루(竹西樓)의 측(側)에 고(高) 8척(尺) 5촌(寸), 폭(幅) 2척 4촌, 후(厚) 8촌의 기념비를 건립하고 기(其) 기석(基石)은 융기한 천연의 대반석(大盤石)을 이용하였다는데, 전면에는 ‘天長地久’ 후면에는 ‘明治 四十四年 十一月 三日 立 天皇在上 葛人西蜀 命我總督 召化南國 恤窮褒節 耆老兩班 勸業省稅 臣民一體 江原道 三陟郡 兩班耆老 崔東昱 金炯國 外 三十六人’이라 서(書)하고, 건립위치는 풍광이 명미(明媚)하고 조망이 절가(絶佳)한 강원도 팔경(八景) 중 유명한 처(處)이라더라. 이것은 <매일신보>1911년12월6일자에수록된「천장지구(天長地久)」제하의기사이다.여기에는 삼척에 사는 ‘얼빠진’ 양반유생들이 천황의 은사금 하사에 감읍한 나머지 그 공덕을 길이 기리고자 삼척 죽서루 옆에 ‘천장지구’라고 새긴 비석을 세웠다는 소식을 담고 있다. 일제는 한국을 강제 병합한 직후, 원활한 식민통치를 위한 회유책의 하나로 친일귀족들이 아닌 사람들에게도 은사금을 광범위하게 살포하였다. 이때 양반유생의 기로(耆老)로서 은사금을 받은 자가 12,115명이오, 효자절부(孝子節婦)로서 포상은사금의 대상자가 3,209명이며, 환과고독(鰥寡孤獨; 홀아비, 과부, 고아, 독거노인)으로서 구휼은사금을 받은 이가 무려 70,902명에 달하였다. 위에 나오는 삼척지역의 양반유생들도 여기에 포함되어 있는데, 흥미롭게도 이들이 은사금 사령서(辭令書)를 수여받는 장면이 담긴 사진자료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일장기를 내건 삼척수비대 앞에서 이들이 양쪽에 차례대로 도열한 광경이 포착된 이 사진의 출처는 조선총독부가 1911년 12월에 펴낸 <애뉴얼리포트(1910~11년판)>이다. 이 책자는 원래 1908년 12월에 통감부에 의해 ‘1907년판’이 처음 나온 이래로 글자 그대로 해마다 간행된 ‘연차보고서’이다. 이러한
이른바 ‘을사조약 기념사진’에 등장하는 일본인 면면의 정체
러시아제국정부는 일본국이 한국에 있어서 정사상(政事上), 군사상 및 경제상의 탁절(卓絶: 견줄 데 없음)한 이익을 가진 것을 승인하며 일본제국정부가 한국에서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지도(指導), 보호(保護) 및 감리(監理)의 조치를 취하는 것에 대해 이를 조애(阻礙: 저해)하거나 이에 간섭하지 않을 것을 약속함. 이것은 1905년 9월 5일에 체결된 포츠머스조약 제2조의 내용이다. 러일전쟁의 전승국인 일본이 패전국 러시아로부터 한국에 대한 지배권을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대목인 셈이다. 이로부터 두 달이 지난 1905년 11월 9일, 이 구절을 근거로 삼아 겉으로는 한국황실을 위문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특파대사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서울로 왔다. 경부선을 타고 남대문정거장에 도착한 그는 첫날과 이튿날만 공식 숙소인 손탁호텔에 머문 것을 제외하고 그달 29일 서울을 떠날 때까지 줄곧 한국주차군사령관인 육군대장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의 관저에 머물며 이곳에서 을사조약의 체결을 강요하기 위한 배후공작을 벌였다. 이윽고 11월 17일 경운궁 수옥헌에서 억지 조약을 성사시킨 이토 히로부미는 1주일이 지난 그달 25일에 필동에 있는 주차군사령부의 구내 호도원(好道園)에서 성대한 야유회를 거행하였다. 이때 이곳에 있는 큰 바위에 ‘보조지륭여천양무궁(寶祚之隆與天壤無窮: 천황의 융성함이 하늘땅이 무궁한 것과 같아라)’이라는 기념휘호를 새겨 남기기도 했다. 그리고 서울을 떠나기 하루 전날, 그는 일제침탈사와 관련한 여러 책자에 단골처럼 등장하는 한 장의 기념사진을 남기게 된다. 이 사진의 촬영경위에 대해서는 <주한일본공사관기록(駐韓日本公使館記錄)> 25권(국사편찬위원회, 1998)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남아 있다. (1905년) 11월 28일 화요일, 대사는 여전히 하세가와 대장 관저에 머물렀다. 본일 오후 2시 하세가와대장 관저에서
빼앗긴 들, 빼앗긴 나랏말쌈
10월 9일은 ‘훈민정음訓民正音’을 창제하여 세상에 펴낸 것을 기념하고 한글의 우수성을 기리기 위한 날, 바로 한글날이다. 올해는 훈민정음을 반포한(세종 28년, 1446년) 지 571년이 되는 해이다. 이번에 소개할 자료는 태극기가 아닌 일장기를 ‘국기’로, 그것도 ‘국어’의 지위를 빼앗긴 ‘한글’로 배우는 참담한 시대를 보여주는, 1915년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제1학년용 『보통학교조선어와한문독본普通學校朝鮮語及漢文讀本』교과서이다.교과서는한사회의교육이념을반영할뿐아니라그 사회의 구조 및 지식 발전 정도를 반영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교과서는 1895년 학부에서 편찬한 『국민소학독본』으로알려져있다.이 시기한성사범학교령,소학교령을공포하고한성사범학교 규칙과 소학교 규칙을 만들었다. 일제는 1908년에 ‘교과용도서 검정규정’을 공포하여 우리의 민족정신이 담긴 교과서들을 판매 금지시키는 한편, 1911년 「조선교육령」을 공포하여 ‘국어’라는 명칭 대신에 ‘조선어’를 사용하게 하고, 대부분의 교과서를 일본어로 기술하게 했다. 이로써 ‘조선어’와 ‘한문’ 과목 이외의 대부분의 교과서는 일본어로 편찬되었다. 「조선교육령」은 조선인을 일제의 충성스러운 제국신민으로 양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일제강점기 조선인의 교육은 바로 이 「조선교육령」에 의거하여 이루어졌고, 조선총독이 모든 사항을 관할했다. 1911년 9월부터 시행된 제1차 조선교육령에서 우리말이 ‘조선어’로 일본어가 ‘국어’로 바뀌었으며, 일장기를 ‘국기’로 가르치게 되었다. 또한 일제는 조선을 식민통치하면서 이른바 ‘교육칙어’를 근거로 식민화 교육을 본격화하였다. 그 과정에서 총독부가 편찬한 『조선어독본』과 『국어[일어]독본』은 식민정책을 알리고 시행하는 교본과 같은 역할을 수행했다. 교과서의 내용은 ‘철자, 어휘, 절과 문장 학습, 글 읽기’ 등으로 이전 시기에 비해 좀 더 체계적인 모습을 띠게 되나, 「보통학교 조선어와 한문 독본」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 민족의 주체성이나 애국적인 내용은 모두
‘더위 사냥’은 전시총동원으로
“찌는 듯이 무더운 남방에서는 아귀 같은 미국과 영국을 쳐물리기 위한 싸움이 매일같이 계속되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조선의 더위쯤은 문제도 아닙니다.” 이번에 소개할 자료는 1943년 8월 1일, 국민 총력조선연맹에서 발간한 제32호 애국반 회보 다. 애국반 회보는 1941년 9월 인가를 받아 매 월 1일에 발행되던 간행물로 내용은 전시상황 에서 후방은 어떻게 생활할 것인가에 맞춰져 있다. 특히 32호는 더위가 한창 기승을 부리던 8월에 발행한 것으로 주요 기사의 내용도 여름 철 후방의 전시준비태세에 관한 것이다. 내용을 살펴보면 먼저 ‘더위에 지지 말고 몸 을 튼튼히 해서 근로보국에 힘씁시다’에서 한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 더 덥게 느껴지니 더위를 잊기 위해 열심히 일해야 하며, 전투 중 인 병정들을 생각하면 덥다는 생각조차도 하 면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래도 몸이 약하면 더 위에 지게 되니 몸을 튼튼하게 하기 위한 방법 으로 ‘신사나 절, 공원을 청소’, ‘개천이나 하수 도, 농촌이나 공장에 근로봉사’, ‘5리쯤 되는 데 는 걸어 다닐 것’ 등을 소개한다. ‘전시살림은 이러케!’에서는 전쟁은 제일선의 병사들만 싸우는 것이 아니라 가정, 일터, 거리 등 싸움터가 아닌 곳이 없으며 특히 부엌에서 밥 지어 먹는 것도 ‘전쟁의 일부분’이라는 생각으로 생 활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따라서 싸움터에서 살아남기 위해 생활전선에서는 일찍 자고 일찍 일 어나고 지각과 결근하지 말라고 선동한다. 저금은 나라의 힘이며 시중에 돈이 돌지
이 조약은 강제로 체결된 불법조약이다!
이번 호에 소개할 자료는 1907년 4월 20일 고종이 헤이그 특사에게 준 위임장이라고 알려진 문서이다. 1905년 11월 17일, 대한제국은 일제의 강압으로 체결된 ‘을사조약’으로 실질적인 주권을 잃게 되었다. ‘을사조약’ 체결 소식이 전해지자 전국에서는 의병들이 들불처럼 일어났으며, 나라의 자주 독립을 호소하며 자결하거나 친일 매국노의 처단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거세졌다. 고종은 1907년 6월 15일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제2차 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국권회복의 염원을 국제사회에 호소하고자 회의 참가를 요청하였다. 또한 프랑스・벨기에 주재공사 민영찬에게 이 문제를 협의하라는 훈령을 내렸고, 러일전쟁 이후 불어학교 교사로 활동하던 마르텔을 비밀리에 베이징에 파견하여 베이징 주재 러시아 공사를 만나 만국평화회의에 대한제국 대표를 초청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결국 네덜란드로부터 초청장을 받은 대한제국은 12번째 초청국으로 만국평화회의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일본은 만국평화회의에 외교권을 상실한 국가가 회의에 참가한 전례가 없다는 이유로 한국 참가를 반대했다. 러시아는 러일전쟁 이후에도 한국 독립에 대한 국제사회의 승인을 얻어내 한국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하고자 대한제국을 만국평화회의에 초청하려고 하였으나 결국 일본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한다는 방침을 정하고 대한제국을 초청하는 것을 포기했다. 한편 1905년 9월 고종의 밀사인 이용익이 러시아로 건너가 국내와 비밀접촉을 하면서 만국평화회의를 준비하고 있었다. 국내에서는 상동청년회와 연결되어 이동녕, 이시영, 안창호, 김구 등이 이준과 이상설을 특사로 보내기로 의견을 모아 고종에게 특사 파견을 요청하였다. 이를 받아들여 고종은 이상설, 이준, 이위종 세 명의 특사를 헤이그 평화회의에
식민지 관료의 민족차별
이번에 소개할 자료는 조선총독부 관리임용에 관한 문서이다. 먼저 이원국의 승서장은 1914년 2월 28일 조선총독부 군수 정7위 이원국을 고등관 5등으로 승서陞敍(벼슬을 올려줌)한다는 내용과 함께 일본의 내각총리대신 ‘야마모토 곤노효에山本權兵衛’의 직인이 찍혀 있다. 반면에 1917년 12월 15일자 박준호의 판임관견습 임명장으로 보이는 문서에는 월봉 15원을 지급한다는 내용과 함께 직인 없이 ‘조선총독부’ 기관명만 명시되어 있다. 관직의 지위에 따라 임명기관이 다르다. 이는 주임문관奏任文官 이상의 진퇴는 내각총리대신을 거쳐 이를 일왕에 상주上奏하고, 판임문관判任文官 이하는 조선총독이 전행專行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조선총독부관제 칙령 제354호) 조선총독부 관리는 크게 고등관과 판임관(1~4등)으로 구분된다. 고등관은 임명의 형식에 따라 친임관親任官, 칙임관勅任官(1·2등), 주임관奏任官(3~9등)으로 구분된다. 주임관 아래에는 하급관료인 판임관이 있다. 판임관 이상을 관리라 통칭했다. 정규직제 외의 보조인력으로 고원雇員, 용인庸人, 촉탁囑託 등을 두었다. 고원은 공무를 수행하기는 하지만 관리의 신분을 얻지 못한 준공무원이고, 용인은 국가에 고용되어 있는 하급종사자거나 일용노동자다. 촉탁은 임시직으로 보수는 관리의 대우를 받는 자부터 고원의 대우를 받는 자까지 다양하다. 총독부의 관리임용정책은 기본적으로 민족차별을 전제로 하고 있었다. 식민통치기구의 조선인 임용은 소수에 그쳤으며 말단 직위에 임용된 경우라도 신분·보수·진급 등에서 차별 대우를 받았다. 전체 고등관 관료 중 조선인의 비율은 20% 내외이고 그 중 절반은 군수를 비롯한 지방직이었다. 고등관 중에서도 핵심인 총독부 본부 관료의 4%정도만 조선인이었으며 식민지 기간 동안 단 2명의 조선인이 학무국장(차관급)에 기용됐다. 중앙정책의 대민집행관으로서 일본의 식민통치를 선전·관철시키고 조선인들에 대한 통제와
제국의 시선 – 입체경과 입체사진
우리나라에 사진이 처음 소개된 때는 개항을 전후한 시기였다. 통상을 강요하던 서구열강과의 접촉이 잦아지면서 종군사진가와 선교사들이 다수의 풍경·인물 사진을 남기게 되었다. 이후 조선을 방문한 서양인들이 외교․선교․학술․취미․언론보도 등 다양한 목적으로 많은 사진을 촬영했다. 특히 이 시기 유럽과 미국에서는 인물·풍경 스테레오 사진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었다. 이런 현상은 조선의 서양인 사이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스테레오 사진은 똑같은 도판이 양옆으로 펼쳐져 있는 사진으로 입체 안경으로 보면 시점(視點)의 차이로 인해 입체적으로 보인다. 이 사진을 감상하기 위해서는 입체경(stereoscope)이 반드시 필요하다. 2009년 3D 영화 ‘아바타’의 폭발적인 인기에 힘입어 입체영화 제작이 봇물을 이루었듯이 낯선 이국 풍경이나 생활상이 담긴 입체사진은 유럽과 미주는 물론 아시아 아프리카에서까지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키스톤 뷰 컴퍼니(Keystone View Company)나 언더우드 앤 언더우드(Underwood & Underwood) 같은 회사들이 입체사진의 전성시대를 이끌었다. 조선에 첫발을 디딘 서양인들은 생소한 조선의 풍광을 스테레오 카메라에 담았다. 그리고 스테레오 사진의 뒷면에는 그들의 시선으로 조선의 이미지를 설명하였다. 그들은 조선을 과거에는 중국의 속국이었고 지금은 일본의 속국이라고 소개한다. 한반도는 영국이나 미국 미네소타 주와 같은 크기인데 인구는 7배가 많으며 마을은 구불구불한 길가에 작고 낮은 집들이 서로 붙어 있다고 했다. 또 집에 들어가면 마루는 지저분하고 일본풍의 대나무로 만든 단순한 가구들이 눈에 띄고 조선의 소녀들은 6~7살이 넘으면 집밖으로 나올 수도, 소년들과 어울릴 수도 없다. 그리고 사시사철 흰색 옷만 입는다고 전했다.
일제 삼림수탈의 척도 압록강 재감材鑑
러일전쟁 당시 일본군은 압록강 유역에서 ‘뜻하지 않은’ 전리품(戰利品)을 얻게 된다. 강 양쪽에 산더미처럼 버려져 있던 목재가 그것이다. 일제는 이들 목재를 수습하여 군사용으로 전용하고자 1905년 11월에 청국(淸國) 안동현(安東縣) 지역에 육군목재창(陸軍木材廠)을 신설하였다. 압록강과 두만강 일대의 삼림이 중요한 이원(利源)이 된다는 사실에 주목한 일제는 1906년 10월 19일 한국정부를 강박하여 「압록강 두만강 삼림경영협동약관」을 관철시켰다. 이 협약에 따라 1907년 4월 1일에는 통감부 영림창(統監府營林廠)이 개설되었고, 한국 측도 허울뿐인 서북영림창(西北營林廠)을 설치하였다. 이와는 별도로 1908년 9월 청국과 합동으로 압록강채목공사(鴨綠江採木公司)를 발족하였다. 이 기관은 압록강 우안지역(右岸地域; 북쪽 연안) 모아산(帽兒山)에서 이십사도구(二十四道溝) 간의 강면에서 64청리(淸里)에 달하는 지역을 대상으로 벌채사업을 담당하였다. 그 결과 압록강을 경계로 통감부 영림창과 압록강채목공사가 남북으로 포진하여 광범위한 지역의 삼림수탈을 가속화하는 주체로 떠올랐다. 육군목재창의 지휘관들이 그대로 통감부 영림창의 운영을 떠맡은 가운데, 해송과 낙엽송 위주로 벌채한 목재는 대부분 한국주차군의 병영지 건축, 관동도독부(關東都督府)와 통감부 통신관리국의 전신주 재료, 탁지부건축소의 건축자재 등으로 공급되었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조선총독부 영림창으로 전환된 이후에는 벌목을 통한 경제적 이득을 극대화하는 데에 몰두하였고, 그 결과 무분별한 벌채에 의한 삼림파괴가 가중되는 상황이 이어졌다. 영림창으로 전환된 이후에는 벌목을 통한 경제적 이득을 극대화하는 데에 몰두하였고, 그 결과 무분별한 벌채에 의한 삼림파괴가 가중되는 상황이 이어졌다. 압록강 재감(材鑑)은 이러한 삼림수탈의 실상을 엿볼 수 있는 유력한 증거물의 하나이다. 재감은 조선총독부 영림창에서 제작 배포한 부채모양의 목재 샘플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