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장자료 톺아보기
용상龍床에 오른 순직경찰의 영혼들
미리보는 ‘식민지역사박물관’ 30 이번에 소개할 자료는 일제강점기 순직경찰과 소방관들의 초혼제(혼령을 위로하는 제사) 명부인 <순직경찰·소방직원초혼향사록殉職警察·消防職員招魂享祀錄<(이하<향사록>)이다. 순직경찰 중 일부는 지난 호의 소개자료 서울종로경찰서 사진첩의 「순직자의 늠름한 모습」에서 소개된 바 있다. 의열단원 김상옥이 쏜 총에 맞고 즉사한 순사부장 다무라와 보합단원에게 죽은 곤도와 이정선인데 이들도 <향사록>명단에 포함되어 있다. ‘순직자’를 단순히 기념사진첩에 수록하여 ‘귀감’으로 삼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매년 ‘순직경찰관초혼제’를 열고 성대한 제사를 지내어 그들을 기리고 조선인들로 하여금 제물을 바치게 함으로써 체제에 순응시키고자 했다. 1937년 5월 1일자로 작성된 <향사록>에 수록된 순직경찰과 소방직원은 총 315명으로 경찰은 1910년 8월 10일부터 1937년 2월 3일까지 281명, 소방원은 1919년 9월 5일부터 1936년 8월 28일까지 34명이 기재되어 있다. 내용은 다음과 같이 순직연월일, 관직·씨명, 출신지·생년월일, 순직 이유와 장소로 구성되어 있다. 순직연월일 : 대정8년(1919년) 3월 28일, 관직씨명 : 순사부장 노구치野口廣三 순직 이유 : 경기도 수원경찰서 관내에서 소요사건이 있을 때 폭동진압 중 돌에 맞아 중상을 입고 사망 이처럼 ‘순직경찰관초혼제’의 향사 대상은 불령선인이나 소요사건의 폭도에게 죽은 자, 이른바 ‘비적匪賊’에게 죽은 자들인데 뒤집어 말하면 항일 투사들에게 죽은 순사들이다. 그런데 충격적인 사실은 제사를 지낸 장소가 하필이면 조선왕조의 정전(正殿 : 국왕이 공식적인 업무를 보는 공간으로 국가적인 행사가 치러지던 곳)인 경복궁 근정전이고, 순직경찰을 위한 제단을 임금의 자리 즉 용상에다 설치했다는 것이다. 제1회 순직경찰관초혼제는 1921년 4월 26일 남산공원 앞의
독립운동 탄압의 대명사, 종로경찰서
1923년 1월 12일 밤. 종로경찰서 건물 외벽에 엄청난 폭발이 일어났다. 누군가 건물을 향해 폭탄을 던진 것이다. 건물 유리창이 산산조각 나고 게시판과 벽 일부가 파손되었다. 또한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사원 5명이 병원에 실려 가고 지나가던 민간인 2명이 경미한 부상을 입었다. 피해도 피해지만 총독부의 대표적 통치기구 그것도 서울 한복판에 위치한 경찰서가 폭탄 공격을 받았다는 사실은 일제에 큰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사건이 일어나자마자 경성 시내에는 비상이 걸려 범인을 검거하기 위해 곳곳에 경찰이 배치되고 삼엄한 검문검색이 실시되었다. 민심의 동요를 두려워 한 총독부는 사건을 취재하거나 보도하지 못하도록 통제하고 병력을 총동원하여 범인 색출에 돌입했다. 그리고 하루라도 빨리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조선 제일’의 고등계 주임 미와 와사부로(三輪和三郞) 경부를 선봉에 내세웠다. 그는 추적 끝에 폭탄투척을 했거나 적어도 그 배후에서 조종했을 것으로 보이는 자를 김상옥(金相玉)으로 지목하고 은신처를 알아내는데 주력하였다. 매부의 집에서 은신하던 김상옥은 주변인의 밀고로 미와에게 탐지되자 총격전을 벌이면서 도주를 시도했다. 이 와중에도 경찰 몇 명에게 중상을 입히고 포위망을 여러 차례씩 뚫으면서 일본경찰에 많은 피해를 주게 되자 일본은 군대까지 동원하였다. 1923년 1월 22일 김상옥은 수백 명의 경찰에게 포위당해 마지막 순간까지 손에 총을 꽉 쥔 채 저항하다 순국하였다. <경성종로경찰서 사진첩>은 최근 폭발적인 관심을 모은 〈암살〉 등 일제강점기를 소재로 한 영화나 드라마에 자주 등장하는 종로경찰서의 활동상과 소속 경찰의 모습을 담고 있는 희귀
죽음의 휘파람을 불며 – ‘콰이강의 다리’
1941년 12월 8일 일요일, 일제는 선전포고도 없이 미국 태평양함대의 기지가 있는 하와이 진주만에 대한 공습을 감행했다. 태평양전쟁의 막이 오른 것이다. 중일전쟁이 장기화하면서 필수자원인 석유, 고무의 수급이 어려워진 일본은 이들 전략자원 확보를 위해 서구 열강의 식민지였던 동남아시아로 침략의 손길을 뻗었다. 동남아시아를 식민지로 장악하고 있던 유럽 제국주의 국가들은 1941년, 제2차 세계대전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있었다. 독일에 항복한 뒤 중부 휴양도시 비시에 새로운 정부를 세운 프랑스는 자국의 주권 유지에 급급한 상황이라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는 신경 쓸 여력조차 없었다. 네덜란드도 독일에 점령당한 상태였고, 버마와 말레이시아를 차지하고 있던 영국은 힘겹게 본토를 방어하면서 동시에 북아프리카에서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의 동남아시아 점령을 막을 유일한 군사적 대안은 미국의 태평양 함대뿐이었다. 그래서 일본군은 기습적으로 진주만 공습을 단행한 것이다. 일제의 침략전쟁이 동남아 일대까지 확산되던 즈음, 일본은 ‘고도국방국가’를 표방하면서 전쟁에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인적·물적 자원을 확보하려고 혈안이 되었다. 식민지 조선에서는 군인, 군속, 노동자, 일본군 ‘위안부’ 등으로 최소한 130만 명이 넘는 젊은이들이 전쟁터와 공장, 광산, 비행장 건설 현장 등으로 끌려갔다. 이들 중에는 군속 신분의 포로감시원도 있었다. 이들은 급속하게 늘어난 연합군 포로를 관리하기 위해 아시아 태평양 일대의 연합군 포로수용소에 배치되었다. 유명한 ‘콰이강의 다리 〈The Bridge on the River Kwai(1957)〉’는 태국 콰이강 철교 건설에 동원된 연합군 포로들을 소재로 한 영화이다. 연합군 포로를
식민지배의 서막이 열리다 – 통감부개청 기념 엽서
‘을사늑약’으로 조선을 보호국화한 일제는 침략정책의 지휘부인 통감부 개청을 서둘렀다. 「한국통감부개청기념」 엽서는 1906년 일제가 통감부를 새로 설치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제작했다. 엽서는 근대 통신 수단의 하나이지만 일제가 발행한 관제엽서는 식민지 지배정책을 미화하고 근대화 업적을 선전하는 수단으로 악용됐다. 도쿄의 미쓰코시 백화점에서 제작한 「한국통감부 개청 기념엽서」의 기본모양은 일본을 상징하는 벚꽃의 물결 속에 태극기의 4괘(건곤감리)가 초대 통감인 이토 히로부미를 휘감고 돌아 태극문양을 감싸고 있는 듯한 모습으로 만들어졌다. 특이한 점은 이 엽서가 정부기관에서 제작된 것이 아니라 민간 백화점에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통감부 개청 시기에 공식적으로 제작된 관제엽서는 그 종류가 몇 점 되지 않고 통감의 초상이 삽입되어 있지 않다. 1905년 11월 17일, ‘일본국 정부가 대한제국 황실의 안녕과 존엄의 유지를 보증’하는 대신, 외교권을 박탈하고 통감부를 설치하는 이른바 ‘을사보호조약(제2차 한일협약)’이 조인되었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대한제국을 ‘보호국화’하는데 박차를 가했다. 1905년 11월 9일 이토 히로부미가 특파대사로 서울에 도착하였으며 다음 날 수옥헌(현 중명전)에서 고종 황제를 알현하고 일본 ‘천황’의 국서를 전달했다. 15일에 다시 하야시 공사와 함께 조약 초안을 제시하며 체결을 강요하고 각료들을 개별적으로 불러 이를 종용했다. 17일 어전회의가 열리자 하세가와 한국주차군 사령관이 완전무장한 일본군을 앞세워 경운궁을 포위했고, 서울 일대에도 무장한 군대가 배치되었다. 수옥헌 내 회담장에도 착검한 헌병경찰들이 들어가 황제와 대신들을 위협했다. 이토는 대한제국의 학부대신 이완용,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군부대신 이근택,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누구를 위한 개혁인가-침략을 위한 길 닦기
∷ 미리보는 ‘식민지 역사박물관’ 26 1894년 동학농민군이 봉기하고 이를 진압하기 위해 조선정부가 청나라에 출병을 요청하자 일본은 거류민 보호명목으로 인천에 군대를 상륙시켰다. 이어 그해 7월 23일 경복궁에 난입해 ‘국왕생포작전’을 벌였다. 왕궁 점령 이틀 후 일본은 아산만의 청군함대를 기습 공격해 청일전쟁을 도발하였다. 그러면서 일본은 김홍집, 박영효를 중심으로 한 친일내각을 구성하고 조선의 내정개혁에 적극 개입하였다.(제1차‧2차 갑오개혁) 그러나 1895년 5월 삼국간섭으로 인해 요동반도를 반환하면서 일본의 기세가 꺾이자 민씨 일족은 친러파인 이범진, 이완용 등을 기용해 일본에 대한 견제를 시도했다. 일본은 1895년 7월경 육군 중장 출신인 미우라 고로三浦梧樓를 주한일본공사로 임명하고 친러 정책을 펴는 명성황후를 제거하고자 ‘여우사냥’ 작전을 획책하였다. 1895년 10월 8일, 새벽 미우라는 흥선대원군을 앞세우고 일본 낭인들을 지휘해 경복궁에 난입하여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시체를 불태웠다. 그리고 고종을 위협해 유길준, 서광범 등을 중심으로 한 친일내각을 수립, 을미개혁(제3차 갑오개혁)을 추진했다. 일본은 명성황후 시해로 인한 국제적인 비난에 직면하자 미우라와 가담자들을 일본으로 데려가 히로시마 감옥에 가두고 재판했으나 증거불충분을 이유로 모두 석방하였다. 우리 연구소가 소장하고 있는 「조선정부대개혁도朝鮮政府大改革之圖」(69.2㎝×34.5㎝)는 1894년 일본의 강압으로 이루어진 갑오개혁을 소재로 한 니시키에錦絵다. 니시키에란 근대 일본의 목판화로 무로마치시대 말기부터 에도시대 초기에 걸쳐 그려진 우키요에浮世繪라는 풍속화를 근간으로 한 것이며 이것이 18세기 후반에 이르면 풍부한 색채를 사용하는 컬러판 니시키에로 발전하였다. 초기에는 미인화를 주로 그렸으나 19세기에 들어와서는 풍경화나 일본과 중국의 역사상의 인물을
친일파는 한국판 전범
∷ 미리보는 ‘식민지역사박물관’ 해방이 되자 제일의 민족적 과제가 친일파 숙정이라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미군정의 친일파 재등용은 이러한 민심을 철저히 외면하는 것이었다. 정부가 수립되자 친일파에 대한 단죄는 다시 전면화하게 된다. 1948년 9월 22일, 제헌국회는 반민족행위처벌법을 제정하고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를 설치하였다. 이어 친일파 기소와 재판을 담당할 특별검찰부와 특별재판부를 구성하여 친일파 체포에 나섰다. 국민들은 반민특위의 활동을 적극 지지하며 반민특위에 친일파의 행적을 증언하거나 제보했다. 언론들의 취재 경쟁도 치열했는데 당시의 정황을 구체적으로 전해주는 자료 하나를 소개한다.특별재판부 재판정으로 들어가는 친일파의 모습이 실린 1949년 4월 4일자 <주간서울> 1면이 바로 그것이다. <주간서울>은 1948년 1월 창간되어 6·25전쟁 직전인 1950년 5월까지 간행된 해방이후 최초의 종합시사주간지이다. 1949년 3월 28일부터 반민족행위자특별재판이 개정하자 <주간서울>은 “한국판 <뉴른베르그> 피고들 궤변과 방청석의 공기”라는 제목으로 이 재판의 의의와 분위기를 상세하게 보도했다. 먼저 친일파 처단의 목소리는 해방과 동시에 일어났지만 미군정의 소극적인 태도로 4년이라는 긴 시간을 그대로 흘려보낸 점을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친일파 처단은 해방민족으로서의 절대 요청’으로 정부가 수립되자마자 반민족행위처벌법이 상정(1948년 8월 17일)되고 정식 공포(1948년 9월 22일)되어 법적 근거가 마련된 사실에 안도감을 표현하고 있다. 이어 1949년 1월 8일 친일파 박흥식의 수감을 시작으로 반민특위의 실질적 행동이 개시되어 3월 28일부터 개정된 8명의 피의자에 대한 반민족행위자특별재판에 대해 ‘도로 찾은 민족정기가 겨우 소생의 실마리’를 잡게 되었다고 평가하며 특급 친일파인 피의자들의 사진을 전면에
‘광복’과 함께 ‘국치’를 기억하자 – 병합기념 조선사진첩
‘광복’과 함께 ‘국치’를 기억하자 – 병합기념 조선사진첩 1910년 8월 22일 일본군의 삼엄한 경비가 펼쳐진 가운데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한국병합에 관한 조약’을 비밀리에 조인했다. 병합조약은 일주일이 지난 8월 29일 순종의 칙유를 통해 내외에 공포되었고, 이로써 대한제국은 국권을 완전히 상실하고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되었다. 이번에 소개할 자료는 1910년 12월 4일 신반도사에서 발행한 『병합기념 조선사진첩』이다. 사진첩을 발간한 신반도사는 서언에서 “조선의 병합은 동양평화의 기초를 공고히 하고 반도의 행복을 증진하는 것으로 특히 원만하고 평화롭게 이 대사 병합의 해결을 본 것은 진실로 주목할 만한 일로… (병합의) 성사를 영구히 기념”하기 위해 간행한다고 밝혀 ‘조선병합’을 ‘경축’하는 의미로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런 취지로 발행된 ‘병합기념 조선사진첩’은 총 100쪽에 걸쳐 다양한 사진 자료를 담고 있는데, 강제병합의 주역들인 일본과 조선의 인물 사진 170여 장, 특별한 행사의 인물단체 사진 20여 장, 경성의 모습 44장, 지방의 명소와 고적 사진 86장, 조선의 풍속 사진 42장 등 약 400장의 사진을 싣고 있다. ‘조선’ 사진첩임에도 불구하고 첫머리에 실린 사진은 메이지(明治) ‘천황’ 부부의 초상과 그 후 계자인 요시히토 ‘황태자’ 일가족이다. 황실에서 왕가로 전락한 조선왕실 일가는 다음 순서로 밀려났다. 또한, 조선총독부 최초 관보와 대한제국 최종 관보, 순종의 칙유와 데라우치 통감의 유고를 함께 실어 조선의 병합은 ‘원만하고 평화롭게’ 진행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사진첩에는 수많은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