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장자료 톺아보기
『전지사진첩 : 압록강전투』(1)
[소장자료 톺아보기 54] 러일전쟁 초기 대규모 육상전투인 압록강전투 『전지사진첩(戰地寫眞帖) : 압록강전투』(1) 러일전쟁은 1904~1905년 한국과 만주의 지배권을 두고 러시아와 일본이 벌인 제국주의 전쟁이다. 러시아의 만주 장악을 우려한 영국과 미국의 재정적 지원에 힘입어 일본이 벌인 전쟁이어서 제국주의 열강의 대리전이라고도 평가한다. 우리 입장에서는 러일 간의 전투가 함경도와 평안도에서 전개되어 전쟁으로 인한 막대한 인적·물적 피해를 입었다. 더구나 러일전쟁 초기인 2월 서울에 입성한 일본군의 무력 시위 속에 한일 양국 간에 「한일의정서」가 강압적으로 체결되어 한국 식민지화의 첫발을 떼 게 되었다. 러일전쟁의 개전은 1904년 2월 8일 밤 여순(旅順)에 대한 일본군의 기습으로 시작되었다. 아울러 일본군은 2월 9일 인천 앞바다에 정박한 2척의 러시아군함을 전격적으로 격침시켰다. 그리고는 이튿날인 2월 10일에야 러시아에 선전 포고를 하였다. 여순 봉쇄에 성공한 도고(東鄕平八郞) 함대는 5월 5일 요동반도에 상륙하였고, 육군 제1부대는 4월 말 인천에 상륙해 평양과 의주를 거쳐 압록강에서 격전을 치른 끝에 도하하여 구련성(九連城)과 봉황성(鳳凰城)을 차례로 함락시키고 만주로 진입하였다. 6월 일본군은 15개 사단으로 편성된 만주군총사령부를 설치하고 그해 9월에 요양(遼陽)을 점령하였다. 노기(乃木希典) 대장이 지휘하는 제3군은 1905년 1월 1일 여순을 함락하였다. 일본군은 3월에 봉천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육상전투를 마무리지었다. 이번 달에 소개하는 『전지사진첩(戰地寫眞帖) : 압록강전투』는 개전 초기인 2월 우지나항(宇品港)에서의 군대 승선부터 5월 초 구련성(九連城) 함락에 이르기까지 근위사단(近衛師団)과 제2·12사단의 진군과 전투 장면을 찍은 사진 화보집이다. 이 사진첩은 1904년 7월 10일
『다이쇼대진화재지(大正大震火災誌)』(1925)
[소장자료 톺아보기 53] 일본 경찰의 조선인 학살 책임을 철저히 은폐한 『다이쇼대진화재지(大正大震火災誌)』(1925) 『다이쇼대진화재지(大正大震火災誌)』는 1923년 9월 1일 관동대지진이 일어난 지 1년 10개월이 지난 1925년 7월 31일에 경시청이 발간한 화보 140쪽, 본문 1500여 쪽으로 구성된 방대한 분량의 경찰 백서이다. 1925년 당시 경시총감이었던 오타 마사히로(太田政弘)는 서문에서 이 책의 발간 목적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하나는 본청 당시의 노력을 기념하고 영구히 기억을 환기시키며 나아가 훗날의 발분(發奮)에 이바지하고자 하고, 하나는 미증유의 체험을 기술하여 광범한 실상을 전달하여 후대에 참조키 위해서다. 본청 문서과의 관례에 따라 당시 자료를 수집하고 사진 화도와 함께 정리 보철하는데 1년을 소비하여 본청 사관(史官)의 임무에 부응하려는 까닭이다. 이 책의 발간 경위는 일러두기에 상세히 나와 있어 그대로 싣는다. 1. 본서는 대정 12년(1923년) 9월 1일 이후 경시청이 진재(震災) 이후의 사회상태에 대응하고 질서 유지상 실시하여 특수활동의 개요를 기록하여 이를 기념하고, 또한 장래의 참고에 이바지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1. 본서의 자료는 본청 각 부(部), 과(課), 계(係) 각 경찰서와 파출소에서 수집하고 전편을 본청 및 각서 활동의 2편으로 대별하고 나아가 장절로 분류하여 재해 후에 있어서의 활동 경과를 검토하고 그간의 법칙을 발견하려고 힘쓴다. 1. 화보와 사진판은 본청 형사부 감식과, 보안부 건축과 및 위생부 의무과, 위생과 및 자경회가 촬영한 700여 장 및 동경시역소와 관련한 300장을 수집하고 이 중에서 선택 분류하고 지진·화재의 피해
『관동대진재사진첩』(1923)
[소장자료 톺아보기 52] 지진 피해의 참상과 일본정부의 대처를 적극 선전하는 ‘관동대지진 백서’ – 『관동대진재사진첩(關東大震災寫眞帖)』(1923) 관동대지진 100주년을 맞이해 시의적절하게 소개할 연구소 소장자료는 『관동대진재사진첩(關東大震災寫眞帖)』이다. 이 사진첩은 일본연합통신사(日本聯合通信社) 출판부가 1923년 9월 1 일 대지진이 일어난 지 90여 일이 지난 11월 28일에 간행한, 사진과 글이 50: 50으로 실린 300여 쪽 분량의 사진첩이다. 이 책에는 일본에서 일어난 지진의 역사, 지진 관측을 비롯해서 각 지역의 피해 상황과 구호 대책을 상세히 기술해 놓았다. 피해 현장을 기록하기 위해 관공서와 시가지, 민가의 잔해뿐 만 아니라 도로, 철도 등 사회기반시설의 잔해를 수백 장의 사진을 촬영하였으며 아울러 피해 규모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경비행기를 이용한 항공사진도 찍어 수록하였다. 하지만 『관동대진재사진첩』에서 조선인과 관련한 사진은 센쥬경찰서와 메구로경마장에 수용된 조선인 사진과 친일단체 상애회(相愛會)의 노력봉사 장면(시체와 잔해 처리) 단 3장뿐이고 조선인 피해자와 관련한 언급도 별로 없다. 특히 관동대지진 직후 일본 경찰과 자경단에 의해 벌어진 조선인 살육 만행에 대해서 단 한 줄의 글이나 단 한 장의 사진이 실리지 않은 채 철저히 은폐되었던 것이다. • 박광종 특임연구원
식민자의 시선으로 담아낸 식민지 조선의 풍경(2)
[소장자료 톺아보기 51] 식민자의 시선으로 담아낸 식민지 조선의 풍경(2) – 『제1회 조선시찰기념사진첩』(1924) 『제1회 조선시찰기념사진첩』에 실린 사진으로 추정해 볼 때 이키군 조선시찰단이 방문한 곳은 크게 4가지로 대별된다. 첫째 신사나 충혼비: 부산 용두산신사, 평양신사, 안동현 진강산 표충비 둘째 주요 관공서: 용산총독관저, 서울 전화국, 부산상업회의소 셋째 명승고적: 서울 광화문, 남대문, 창경원, 평양 을밀대와 시가지 넷째 주요 시찰지: 동대문소학교, 한강 수원지, 한강 인도교, 인천 축항, 인천 역무정미소, 압록강 철교 일본인 시찰단은 조선총독부의 관광 방침에 따라 신사나 충혼비 참배로 애국심을 고취하고, 인천 축항과 압록강 철교에서 보듯이 일본의 과학기술로 제작된 근대문물을 견학하고 일본인으로서의 자긍심을 고양했던 것이다. 한편 스치듯 지나가며 찍은 듯한 조선인 가옥이나 시가지, 혹은 배경으로 찍힌 조선인들이 아주 초라하고 낙후된 모습을 띠고 있는데 여기서 식민지 조선을 전근대적으로만 바라보는 편협한 ‘식민자의 시선’을 인식할 수 있다. 박광종 특임연구원
식민자의 시선으로 담아낸 식민지 조선의 풍경(1) 『제1회 조선시찰기념사진첩』(1924)
[소장자료 톺아보기 50] 식민자의 시선으로 담아낸 식민지 조선의 풍경(1) – 『제1회 조선시찰기념사진첩』(1924) 이번 호에 소개할 소장자료는 1924년 6월 니자형제사진관(尼子兄弟寫眞館)이 발간한 『제1회조선시찰기념사진첩』이다. 이 사진첩은 판매용이 아니라 조선시찰단이 자비 출판한 것으로 총 30여 쪽에 100여 장의 기념사진을 수록하였다. 부산에 위치한 니자형제사진관의 대표 겸 사진사인니자복송(尼子福松)은 시찰단과 여정을 함께하며 출장 촬영을 해주었다. 나가사키현(長崎縣) 이키군(壹崎郡) 출신 실업가 청년으로 구성된 조선시찰단 단원은 조기청길(蓧崎淸吉), 원전겸조(原田謙造), 복전매차랑(福田梅次郞), 원전원우위문(原田元右衛門), 장도원구랑(長嶋源九郞) 5명이었다. 이들은 출발 직전 이키군으로부터 ‘산업시찰원’에 위촉된 점이 특기할 만하다. 이키군 조선시찰단은 4월 20일 시모노세키를 출발해 6박 7일의 촉박한 일정으로 부산, 서울, 인천, 평양, 신의주(4.26)를 시찰하였다. 차편으로는 주로 경부선, 경인선, 경의선 등 간선 철도를 이용했고 국경지대인 신의주에서는 자동차를 이용해 중국 안동현(安東縣)까지 다녀왔다. 일본인 대상 신문인 『부산일보』, 『조선시보』, 『조선신문』 등은 이들을 ‘이키시찰단’ ‘이키실업단’ ‘실업청년시찰단’이라 일컬으며 부산 입항 때부터 이들의 여정을 간략히 보도하였다. 조선총독부는 강제병합 직후부터 식민지 동화정책(同化政策)의 하나로 조선인의 일본 시찰과 일본인의 조선 시찰을 적극 장려하였다. 특히 일본인의 조선 시찰에 있어서는 조선총독부의 식민정책의 정당성을 적극 홍보, 조선 내의 일본 유적이나 일본 신사 답사를 통한 국민성 함양, 관광 산업의 활성화에 따른 재정 수입 등을 노렸던 것이 보인다. (다음호에 계속) • 박광종 특임연구원
식민통치의 화려한 선전장이 된 경복궁(2) – 조선박람회 조감도와 박람회장 엽서
[소장자료 톺아보기 49] 식민통치의 화려한 선전장이 된 경복궁(2) – 조선박람회 조감도와 박람회장 엽서 조선박람회의 가장 큰 특징은 당시 조선의 각 도(道)의 특설관(特設館)들이 독립적으로 세워진 것 외에 내지관(內地館-일본관), 오사카관, 도쿄관, 교토관, 규슈관, 나고야관 등 일본의 지방관과 훗카이도관, 타이완관, 만몽참고관, 화태(樺太-사할린)관 등 당시 일본세력 하에 있던 식민지의 특설관이 세워졌다는 점이다. 특히 각 도의 특설관은 지방의 특색을 반영한 건축양식을 보여주었다. 충청남도관은 논산 관촉사의 석조미륵보살입상의 이미지를 입구에 조성하였고 평안남도관은 평양의 현무문 이미지로 만들었다. 이와 함께 일본의 주요 도시 10개의 특설관이 설치되었는데 도쿄, 교토, 오사카 등 일본의 선진 도시 모델을 보여주고자 하였다. 경회루 뒤편에는 타이완총독부가 운영하는 타이완관과 만몽관(滿蒙館) 있었는데 중국측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강행하여 설치하였다. 조선박람회가 ‘20년동안의 실적을 천명’하기 위해서라고 선전하였지만 일제의 대륙 침략을 미화하는 정치적 의도를 드러낸 것이었다. 일제가 개최한 박람회는 실제로 경제적인 측면보다 정치적인 목적이 있었다. 1923년에 열린‘조선부업품공진회’는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에 대한 들끓는 조선의 민심을 잠재우기 위한 방편으로, ‘신흥만몽박람회’는 만주사변을 일으킨 후 만주국에 대한 실질적 지배권을 주장하기 위해, ‘조선대박람회’는 중일전쟁 이후 대동아공영권의 결성을 위해 개최되었다. 박람회의 성격이 점차 정치적·군사적 목적으로 변화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 강동민 자료실장
식민통치의 화려한 선전장이 된 경복궁(1) – 조선박람회 사진엽서
[소장자료 톺아보기 48] 식민통치의 화려한 선전장이 된 경복궁(1) – 조선박람회 사진엽서 • 강동민 자료실장 조선박람회 홍보엽서 조선총독부 주최로 경복궁에서 열린 조선박람회의 홍보엽서로 경성협찬회(京城協贊會)가 발행하였다. 조선박람회를 후원하고 보조하는 관변단체인 경성협찬회가 그림엽서와 안내도서 등의 제작 판매를 책임지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박람회 관련 기념엽서는 대다수가 이곳에서 배포한 것으로 보인다. 엽서의 도안은 박람회 회장의 주요 건물 모습과 벼, 곡괭이, 공구, 생선, 뱀 등 전시된 생산물품이 상징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조선박람회 정문 박람회장의 매표소 기능을 한 정문. 입장료는 성인 30전, 아동 15전, 군인 20전 등 싼 가격은 아니었다. 조선총독부는 통치 2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조선박람회 경성협찬회를 조직하고 1929년 9월 12일부터 10월 31일까지 ‘조선박람회’를 개최하였다. 일제강점기를 통틀어 조선총독부가 직접 박람회를 주최한 경우는 딱 두 번뿐인데 1915년의 조선물산공진회가 첫 사례이고, 다른 하나는 1929년에 열린 ‘조선박람회’였다. 개최 장소는 모두 경복궁이었고 개최 기간도 거의 같다. 두 박람회의 관람객이 각각 100만 명을 넘었는데 조선총독부의 위세에 각 지역에서 동원된 인원도 많았을 것으로 보인다. 조선물산공진회의 개최 명목은 대한제국을 강점한 후 5년 동안 조선을 통치한 실적을 대내외에 선전하기 위한 것이었다. 조선박람회도 ‘20년 동안 관민이 일치하여 힘들여 쌓아 올린 실적을 내외에 천명’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개최 취지 역시 조선물산공진회와 다르지 않다. 굳이 찾자면 일본의 조선통치 기간만 늘어났을 뿐이다. 경복궁의 전각과 수목들은 조선총독부가 조선물산공진회 개최 때 이미 훼손하기
식민지 조선을 장악한 헌병경찰
[소장자료 톺아보기 47] 식민지 조선을 장악한 헌병경찰 – ‘병합기념 조선의 경무기관’ 속의 전국 경찰서 지난 민족사랑 2월호 ‘소장자료 톺아보기’에 소개된 사진 중 「반도의 명사」는 강제병합 당시 조선인 주요 관료들과 ‘영향력 있는 인물들’로 구성된 부분으로 친일 인사들뿐만 아니라 독립운동가도 포함되어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저기 순사 온다”라는 말에 우는 아이의 울음도 뚝 그치게 만들었던 무단통치의 핵심인 일제의 헌병경찰. ‘순사’가 식민지 조선인들에게 악랄하고 무서운 이미지로 각인된 것은 칼 찬 제복 차림으로 민중들의 사소한 일상까지 감시, 탄압함으로써 가장 직접적이고 광범위하게 해를 입혔기 때문이다. <병합기념 조선의 경무기관>은 무단통치를 실행한 식민지 조선의 경찰서 현황을 담은 사진첩이다. 항일 의병을 가혹하게 탄압했던 헌병사령관 겸 경무총장 아카시 모토지로를 필두로 하여 본부의 직원과 경성, 광주, 대구, 평양, 신의주 등 13개 권역의 지방 경찰서와 그 직원들의 사진을 볼 수 있는데 마지막에는 조선의 경찰 연혁과 직원명단이 기록되어 있다.(민족사랑 2019년 6월호 참조) 1907년 고종 강제퇴위와 군대해산 후 전국적으로 항일 의병투쟁이 일어나자 일본은 한국주차군헌병대로 편성되어 있던 헌병을 증강하고 조선인 4천여 명을 헌병보조원으로 모집해 병력 규모가 2배 이상 확대되었다. 주차군헌병사령관, 즉 군대의 수장은 경찰 수장인 경무총장을 겸하도록하여 민간인까지 탄압할 수 있었다. 이러한 겸직은 1910년 9월 조선총독부가 설치되면서 그대로 이어져 악명 높은 헌병경찰제도가 탄생한 것이다. 각 지방도 사정은 마찬가지로 경무부와 경찰서가 설치되어 도(道) 헌병대장이 경무부장을 겸직했다. 경찰서장은 재판절차
병합기념 조선사진첩 속 이미지(3)
[소장자료 톺아보기 46] 병합기념 조선사진첩 속 이미지(3) – 강제병합의 주역들, 침략자와 친일파 • 강동민 자료팀장 <병합기념 조선사진첩>에 수록된 약 400컷의 사진 중 인물사진은 단체사진을 포함해 약 200컷으로 절반을 차지한다. 대부분 대한제국을 강제병합한 주역들로 일본의 ‘천황가’와 군부를 비롯한 관료들, 이에 협력한 친일 조선 관료들이다. 대한제국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여 제작된 <병합기념조선사진첩>에 등장하는 첫 인물은 메이지(明治) ‘천황’ 부부다. 이와 함께 ‘천황가’ 일족을 수록하고 ‘이왕가’로 전락한 대한제국 황실일가는 다음 순서로 밀려났다. 이어서 ‘한국의 통치권을 일본에 양여’한다는 순종의 칙유와 병합조약체결의 정당성을 알리는 데라우치 통감의 유고를 수록하였다. 조선의 병합은 ‘원만하고 평화롭게’ 진행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후로는 일본의 내각대신, 역대 조선통감, 조선주차군사령관 등 일본의 인물들부터 대한제국 내각 대신과 중추원 의장, 이완용·박제순·민병석·고영희·조중응·김윤식 등 ‘병합’에 결정적인 이바지를 하였던 친일 인사들의 사진이 줄지어 나온다. 특히 ‘왕비사건 당시의 공사, 자작 미우라 고로’, ‘강화도사건 당시의 함장, 이노우에 요시카’, ‘제물포조약 당시의 전권대사, 구로다 기요타카’ 등과 같이 한국병합에 결정적인 사건의 주요 인물들이 사건 당시 직위와 함께 소개되어 있다. 사진첩에 수록된 주요 인물들은 다양한 책자와 화보에 지속적으로 소개되는데 연구소의 소장자료인 <한국병합기념화보>에도 실려 있다. 식민지역사박물관 상설전시장을 방문하면 강제병합의 일본 주역들을 비롯해 친일파들의 상세한 이력을 살펴볼 수 있다. 「반도의 명사」는 강제병합 당시 조선인 주요 관료들과 ‘영향력 있는 인물들’로 구성된 부분으로 친일 인사들뿐만 아니라 독립운동가도 포함되어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식민지로 전락한 도시 풍경
<병합기념 조선사진첩>에는 ‘청일전쟁 전의 경성日淸戰役前の京城’의 모습을 시작으로 조선총독부, 총독관저, 경성시가, 남대문, 경복궁 등 경성의 모습 44장과 인천, 개성, 평양, 압록강, 부산, 수원, 목포, 군산 등 지방 명소와 고적 사진 86장이 실려 있다. 이 사진들은 강제병합 직전에 촬영된 이미지가 아니라 한반도 곳곳의 모습을 길게는 20여 년에 걸쳐 담은 것이다. 일제의 조선 ‘보호국화’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조선에 대한 체계적인 사진기록이 필요하게 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한국병합기념첩>, <일한병합기념 대일본제국조선사진첩> 등 여러 종류의 ‘병합’을 ‘기념’하는 사진첩이 만들어졌다. 이러한 사진첩에는 ‘대한제국’은 ‘조선’으로, 황도皇都 ‘한성’은 ‘경성’으로 전락한 식민지 조선의 모습을 침략자의 시선으로 담아내었다. • 강동민 자료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