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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자료 톺아보기

식민통치의 화려한 선전장이 된 경복궁(2) – 조선박람회 조감도와 박람회장 엽서

2023년 5월 31일 521

[소장자료 톺아보기 49] 식민통치의 화려한 선전장이 된 경복궁(2) – 조선박람회 조감도와 박람회장 엽서 조선박람회의 가장 큰 특징은 당시 조선의 각 도(道)의 특설관(特設館)들이 독립적으로 세워진 것 외에 내지관(內地館-일본관), 오사카관, 도쿄관, 교토관, 규슈관, 나고야관 등 일본의 지방관과 훗카이도관, 타이완관, 만몽참고관, 화태(樺太-사할린)관 등 당시 일본세력 하에 있던 식민지의 특설관이 세워졌다는 점이다. 특히 각 도의 특설관은 지방의 특색을 반영한 건축양식을 보여주었다. 충청남도관은 논산 관촉사의 석조미륵보살입상의 이미지를 입구에 조성하였고 평안남도관은 평양의 현무문 이미지로 만들었다. 이와 함께 일본의 주요 도시 10개의 특설관이 설치되었는데 도쿄, 교토, 오사카 등 일본의 선진 도시 모델을 보여주고자 하였다. 경회루 뒤편에는 타이완총독부가 운영하는 타이완관과 만몽관(滿蒙館) 있었는데 중국측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강행하여 설치하였다. 조선박람회가 ‘20년동안의 실적을 천명’하기 위해서라고 선전하였지만 일제의 대륙 침략을 미화하는 정치적 의도를 드러낸 것이었다. 일제가 개최한 박람회는 실제로 경제적인 측면보다 정치적인 목적이 있었다. 1923년에 열린‘조선부업품공진회’는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에 대한 들끓는 조선의 민심을 잠재우기 위한 방편으로, ‘신흥만몽박람회’는 만주사변을 일으킨 후 만주국에 대한 실질적 지배권을 주장하기 위해, ‘조선대박람회’는 중일전쟁 이후 대동아공영권의 결성을 위해 개최되었다. 박람회의 성격이 점차 정치적·군사적 목적으로 변화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 강동민 자료실장

식민통치의 화려한 선전장이 된 경복궁(1) – 조선박람회 사진엽서

2023년 4월 21일 702

[소장자료 톺아보기 48] 식민통치의 화려한 선전장이 된 경복궁(1) – 조선박람회 사진엽서 • 강동민 자료실장 조선박람회 홍보엽서 조선총독부 주최로 경복궁에서 열린 조선박람회의 홍보엽서로 경성협찬회(京城協贊會)가 발행하였다. 조선박람회를 후원하고 보조하는 관변단체인 경성협찬회가 그림엽서와 안내도서 등의 제작 판매를 책임지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박람회 관련 기념엽서는 대다수가 이곳에서 배포한 것으로 보인다. 엽서의 도안은 박람회 회장의 주요 건물 모습과 벼, 곡괭이, 공구, 생선, 뱀 등 전시된 생산물품이 상징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조선박람회 정문 박람회장의 매표소 기능을 한 정문. 입장료는 성인 30전, 아동 15전, 군인 20전 등 싼 가격은 아니었다. 조선총독부는 통치 2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조선박람회 경성협찬회를 조직하고 1929년 9월 12일부터 10월 31일까지 ‘조선박람회’를 개최하였다. 일제강점기를 통틀어 조선총독부가 직접 박람회를 주최한 경우는 딱 두 번뿐인데 1915년의 조선물산공진회가 첫 사례이고, 다른 하나는 1929년에 열린 ‘조선박람회’였다. 개최 장소는 모두 경복궁이었고 개최 기간도 거의 같다. 두 박람회의 관람객이 각각 100만 명을 넘었는데 조선총독부의 위세에 각 지역에서 동원된 인원도 많았을 것으로 보인다. 조선물산공진회의 개최 명목은 대한제국을 강점한 후 5년 동안 조선을 통치한 실적을 대내외에 선전하기 위한 것이었다. 조선박람회도 ‘20년 동안 관민이 일치하여 힘들여 쌓아 올린 실적을 내외에 천명’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개최 취지 역시 조선물산공진회와 다르지 않다. 굳이 찾자면 일본의 조선통치 기간만 늘어났을 뿐이다. 경복궁의 전각과 수목들은 조선총독부가 조선물산공진회 개최 때 이미 훼손하기

식민지 조선을 장악한 헌병경찰

2023년 3월 27일 1052

[소장자료 톺아보기 47] 식민지 조선을 장악한 헌병경찰 – ‘병합기념 조선의 경무기관’ 속의 전국 경찰서 지난 민족사랑 2월호 ‘소장자료 톺아보기’에 소개된 사진 중 「반도의 명사」는 강제병합 당시 조선인 주요 관료들과 ‘영향력 있는 인물들’로 구성된 부분으로 친일 인사들뿐만 아니라 독립운동가도 포함되어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저기 순사 온다”라는 말에 우는 아이의 울음도 뚝 그치게 만들었던 무단통치의 핵심인 일제의 헌병경찰. ‘순사’가 식민지 조선인들에게 악랄하고 무서운 이미지로 각인된 것은 칼 찬 제복 차림으로 민중들의 사소한 일상까지 감시, 탄압함으로써 가장 직접적이고 광범위하게 해를 입혔기 때문이다. <병합기념 조선의 경무기관>은 무단통치를 실행한 식민지 조선의 경찰서 현황을 담은 사진첩이다. 항일 의병을 가혹하게 탄압했던 헌병사령관 겸 경무총장 아카시 모토지로를 필두로 하여 본부의 직원과 경성, 광주, 대구, 평양, 신의주 등 13개 권역의 지방 경찰서와 그 직원들의 사진을 볼 수 있는데 마지막에는 조선의 경찰 연혁과 직원명단이 기록되어 있다.(민족사랑 2019년 6월호 참조) 1907년 고종 강제퇴위와 군대해산 후 전국적으로 항일 의병투쟁이 일어나자 일본은 한국주차군헌병대로 편성되어 있던 헌병을 증강하고 조선인 4천여 명을 헌병보조원으로 모집해 병력 규모가 2배 이상 확대되었다. 주차군헌병사령관, 즉 군대의 수장은 경찰 수장인 경무총장을 겸하도록하여 민간인까지 탄압할 수 있었다. 이러한 겸직은 1910년 9월 조선총독부가 설치되면서 그대로 이어져 악명 높은 헌병경찰제도가 탄생한 것이다. 각 지방도 사정은 마찬가지로 경무부와 경찰서가 설치되어 도(道) 헌병대장이 경무부장을 겸직했다. 경찰서장은 재판절차

병합기념 조선사진첩 속 이미지(3)

2023년 2월 27일 774

[소장자료 톺아보기 46] 병합기념 조선사진첩 속 이미지(3) – 강제병합의 주역들, 침략자와 친일파 • 강동민 자료팀장 <병합기념 조선사진첩>에 수록된 약 400컷의 사진 중 인물사진은 단체사진을 포함해 약 200컷으로 절반을 차지한다. 대부분 대한제국을 강제병합한 주역들로 일본의 ‘천황가’와 군부를 비롯한 관료들, 이에 협력한 친일 조선 관료들이다. 대한제국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여 제작된 <병합기념조선사진첩>에 등장하는 첫 인물은 메이지(明治) ‘천황’ 부부다. 이와 함께 ‘천황가’ 일족을 수록하고 ‘이왕가’로 전락한 대한제국 황실일가는 다음 순서로 밀려났다. 이어서 ‘한국의 통치권을 일본에 양여’한다는 순종의 칙유와 병합조약체결의 정당성을 알리는 데라우치 통감의 유고를 수록하였다. 조선의 병합은 ‘원만하고 평화롭게’ 진행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후로는 일본의 내각대신, 역대 조선통감, 조선주차군사령관 등 일본의 인물들부터 대한제국 내각 대신과 중추원 의장, 이완용·박제순·민병석·고영희·조중응·김윤식 등 ‘병합’에 결정적인 이바지를 하였던 친일 인사들의 사진이 줄지어 나온다. 특히 ‘왕비사건 당시의 공사, 자작 미우라 고로’, ‘강화도사건 당시의 함장, 이노우에 요시카’, ‘제물포조약 당시의 전권대사, 구로다 기요타카’ 등과 같이 한국병합에 결정적인 사건의 주요 인물들이 사건 당시 직위와 함께 소개되어 있다. 사진첩에 수록된 주요 인물들은 다양한 책자와 화보에 지속적으로 소개되는데 연구소의 소장자료인 <한국병합기념화보>에도 실려 있다. 식민지역사박물관 상설전시장을 방문하면 강제병합의 일본 주역들을 비롯해 친일파들의 상세한 이력을 살펴볼 수 있다.  「반도의 명사」는 강제병합 당시 조선인 주요 관료들과 ‘영향력 있는 인물들’로 구성된 부분으로 친일 인사들뿐만 아니라 독립운동가도 포함되어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식민지로 전락한 도시 풍경

2023년 1월 31일 761

<병합기념 조선사진첩>에는 ‘청일전쟁 전의 경성日淸戰役前の京城’의 모습을 시작으로 조선총독부, 총독관저, 경성시가, 남대문, 경복궁 등 경성의 모습 44장과 인천, 개성, 평양, 압록강, 부산, 수원, 목포, 군산 등 지방 명소와 고적 사진 86장이 실려 있다. 이 사진들은 강제병합 직전에 촬영된 이미지가 아니라 한반도 곳곳의 모습을 길게는 20여 년에 걸쳐 담은 것이다. 일제의 조선 ‘보호국화’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조선에 대한 체계적인 사진기록이 필요하게 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한국병합기념첩>, <일한병합기념 대일본제국조선사진첩> 등 여러 종류의 ‘병합’을 ‘기념’하는 사진첩이 만들어졌다. 이러한 사진첩에는 ‘대한제국’은 ‘조선’으로, 황도皇都 ‘한성’은 ‘경성’으로 전락한 식민지 조선의 모습을 침략자의 시선으로 담아내었다.  • 강동민 자료팀장

병합기념 조선사진첩 속 이미지(1)

2022년 12월 26일 818

                      땔감용 솔잎과 그릇을 파는 지게꾼들 풍속사진 중에는 물동이, 항아리, 땔감 등을 지게 같은 도구를 이용하여 운반하는 짐꾼들의 사진이 많다. 자기 키보다 더 큰 짐을 짊어지고 있는 하층 육체노동자들을 이미지화하여 ‘전근대적’인 조선인의 모습을 각인하는 효과를 볼 수 있다. 길가에서 낮잠을 자는 사람 사진이나 엽서 등 조선인의 이미지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장면 중의 하나이다. ‘풍속’이라는 이름으로 이색적이라기보다 나태하고 아무 곳에서나 자는 조선인의 모습은 미개한 상태로 치부되었다. 하층민의 터전 진흙과 새끼줄로 지은 집은 근대 석조 건축물과 대비하며 원시성을 강조했다. <사진첩>의 ‘평양의 농가平壤の田舍’와 <사진첩조선>(1921)에 실린 같은 사진 한번 촬영한 이미지는 다른 사진첩이나 엽서, 그림 등 다양한 형태로 끊임없이 사용되었다. 같은 모습을 반복적으로 오랜 시간 동안 이용한 것은 일본의 지배로 ‘발전된 조선’의 비교 대상이 되었다. 박물관에 전시된 사진첩이나 화보 자료를 보면 주로 표지나 특정한 내용이 수록된 면을 펼쳐 놓는 것이 일반적이다. 세부내용을 살펴보고 싶은 욕구가 있어도 접근이 쉽지 않은 경우가 허다하다. 요즘은 디지털 패널을 이용한 자료관람도 이루어지고 있으나 원자료의 느낌을 오롯이 살리기는 어렵다. 식민지역사박물관에 전시된 자료 역시 공간상의 제약으로 많은 자료를 배치하기 어려워 일부는 복제물을 제작하는 방식을 택했다. 관람객의 궁금증을 조금이나마 해소하기 위한 방법이다. 이와 함께 부족한 부분은 『민족사랑』을 통해 꾸준하게 자료를 소개하고 있는데

통제와 규율로 가득한 교실

2022년 12월 16일 502

[소장자료 톺아보기 43] 통제와 규율로 가득한 교실 – 식민지 학교 잿빛 색깔의 단단한 벽으로 지어진 건물. 옥상보다 더 높은 곳에서 펄럭이는 일장기. 흙먼지 날리는 황량한 공터. 굳게 닫은 철문과 이어진 차가운 울타리. 마치 감옥을 연상하게 하는 풍경. 이번에 소개할 자료는 바로 ‘학교’다. 지식을 습득하고 동무들과 함께 뛰어노는 희망과 설렘의 공간을 왜 이렇게 두렵고 공포스럽게 지었을까? 일본이 대한제국을 강제병합하면서 그들의 교육목표는 ‘내선일체’, ‘황국신민’ 따위의 슬로건을 내걸고 교육을 통해 학생들을 ‘일본화’시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학교 건물도 학생들을 관리하고 통제하기 쉬운 공간으로 만들었다. 건물 입구에 들어서면 곧은 일직선 형태의 복도를 따라 교실이 이어져 배치되었다. 복도 한쪽 끝에 서 있으면 반대쪽 끝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통제기능을 담당하는 교장실과 교무실은 건물의 가장 중간에 배치된다. 교실의 벽면은 완전히 가리지 않는다. 허리 높이까지 벽돌로 쌓아 올리고 복도에서 항시 교실 내부를 관찰할 수 있게 눈높이 정도는 유리로 된 창으로 만든다. 밀폐된 곳은 학교의 최고 통제권자가 머무르는 교장실밖에 없다. 학교가 복층인 경우는 상층 중앙에 교장실을 배치하여 운동장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구조로 지어졌다. 마치 군대의 막사같이 위압적이고 권위를 상징하는 공간이 된 것이다. 교실 내부는 어떠한가. 교실 전면에는 벽면을 가득 채운 칠판이 부착되어 있다. 교사가 학생들을 내려다 볼 수 있는 교단과 교탁이 중앙에 자리 잡는다. 칠판의 중앙 상단에는 일장기, 좌우에는

어린이까지 예비 전사로 키우는 전시 교육

2022년 11월 3일 691

침략전쟁의 파고는 한창 학교에서 친구들과 어울려 뛰어다니고 새로운 지식을 배워 한 단계씩 성장해 가는 어린 학생들까지도 덮쳐버렸다. 일제의 전시체제로 학교 교육은 오로지 ‘천황’과 국가에 충성하는 ‘신민’을 기르고 전쟁을 합리화하는 데 목적을 두게 되었다. 조선총독부는 1911년 9월 ‘천황제’와 전체주의를 합리화하는 「교육칙어」를 식민지 교육의 기본 이념으로 활용하는 제1차 「조선교육령」을 시행하였다. 3·1운동을 계기로 문화통치를 표방하면서 제2차 「조선교육령」이 공포되었으나, 중일전쟁으로 일제의 대륙침략이 본격화되자 1938년 3월 제3차 「조선교육령」을 공포하고 국체명징國體明徵·내선일체內鮮一體·인고단련忍苦鍛鍊을 앞세워 황국신민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1941년 3월에는 초등학교령을 통해 소학교의 명칭을 아예 황국신민皇國臣民을 지칭하는 ‘국민학교國民學校’로 교체해 버렸다. 학교는 이러한 전쟁의 광기 속에서 마치 종교집단이 되어 갔다. 학교에 ‘천황’을 위해 기도하는 제단으로 가미다나神棚를 만들고 황국신민서사를 비치하여 국가와 ‘천황’에 대한 충성을 맹세했다. 애국일, 신사참배일, 메이지절 등 온갖 기념일이 되면 조선의 어린 학생들을 예비 소년전사로 육성하고자 오로지 한 사람, ‘천황’에게 기도하며 싸우러 나갈 것을 교육했다. 그리고 중등학교의 수업 연한을 5년에서 4년으로 단축하여 조금이라도 일찍 군인이 될 수 있게 제도화하였다.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교육활동의 목표는 강건한 병사양성이었고, 이를 위해 학생의 체력 단련과 군사훈련이 강제되었다. 1944년 이른바 ‘결전교육 실시’라는 명목으로 전시교육비상조치로 학생들에게 군사훈련과 강제노동을 실시했다. 지금의 초등학교 4학년 이상이면 군사교육을 받게 해 유사시 한반도 내에서 조선 학생들을 최후의 총알받이로 동원하려 했다. 학교가 ‘전쟁’에서 가장 멀리 있어야 할 어린이들을 ‘천황’을 위한 ‘예비 전사’로

조선총독부 통계엽서

2022년 9월 28일 949

[소장자료 톺아보기 41] 식민통치의 시각적 선전 – 조선총독부 통계엽서 조선총독부는 식민지배의 치적을 드러내기 위해 매년 사회 전 분야를 조사하여 <통계연보> 를 발행했다. 통치 주체인 일본은 식민지 지배로 조선에 도로, 전기, 철도 등 근대적 시설이 마련되었고 토지조사사업, 임야조사사업 등을 실시하여 근대적 등기제도를 통한 토지 소유권 제도가 확립되었다고 하였다. 숫자로 작성한 통계는 이러한 근대화 정책에 힘입어 식민지 조선의 경제성장을 이루었다는 지표인 셈이다. 조선총독부는 <통계연보> 작성에 그치지 않고 성장지표를 그래프를 통해 대중에게 선전하기 위해 통계엽서를 제작, 배포하였다. 시정을 기념하기 위해 매년 발행한 시정기념엽서 총 38매 중 7매가 농수산물의 증산과 기반시설 등의 통계를 비교한 근대화 관련 관제엽서로 조선의 산업화를 선전하고 있고, 이와 함께 ‘조선의 통계 朝鮮之統計’를 따로 제작하여 조선의 호구戶口, 무역, 재정, 농업, 광산, 수산, 교통, 교육, 토지의 증가를 그래프로 이미지화하여 발행하였다. 일제는 각종 시각 매체를 통해 통치정책을 홍보하였는데 식민지 정부인 조선총독부가 대량 생산한 엽서는 일반 대중들이 손쉽게 접할 수 있다는 특성상 선전 효과가 컸으며 엽서라는 실용적 용도에 힘입어 보다 은밀하게 제국의 정책을 선전할 수 있는 도구였다. 엽서에 새겨진 성장지표는 지배의 정당성을 확보해 조선인의 저항을 무마하기 위한 논리였던 근대화 관련 이미지였다. 즉 근대화를 환상이 아닌 실제로서 증명하기 위해 사용한 것이었다. 이를 통해 일제는 식민지배의 합리화, 조선 근대화의 선전 및 자원 수탈의 정당성을 굳혀나갔다. 일제

쌀 대신 빵을 먹고 나라를 지켜라

2022년 8월 31일 633

[소장자료 톺아보기 40] 쌀 대신 빵을 먹고 나라를 지켜라 – 대용식 빵 배급 홍보물 카페에서 빵 한 조각과 커피 한 잔, 혹은 패스트푸드점에서 햄버거와 콜라로 식사하는 모습은 현대인의 생활에서 그리 낯설지 않은 풍경이다. 다양한 먹거리가 넘쳐나는 지금, 오히려 빵을 주식主食으로 하는 가정도 많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밥’이라고 하면 주로 쌀과 국, 그리고 밑반찬으로 차려진 ‘밥상’을 연상한다. 먹거리가 풍부하지 않았던 시절, ‘밥이 보약’이라는 말에서 보듯 쌀은 몸을 건강하게 유지하는 약으로 여겨 제때 밥을 챙겨 먹는 생활을 강조했다. 뿐만 아니라 단지에 넣어 신神으로 모시기도 했고, 심지어 흩뿌려 점卜을 보기도 하는 등 쌀은 우리 삶의 가장 중요하고 귀한 식량이었다. 쌀이 이토록 중요한 식량이었지만, 봉건시대에는 생산량이 충분하지 않은데다가 지배 계급의 수탈로 인하여 일반 백성들이 날마다 먹기는 힘든 양곡이었다. 일제는 대한제국을 강제병합하자마자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하여 동양척식주식회사를 통해 많은 땅을 차지하였고, 그 땅을 일본인 지주로 하여금 경영하도록 했다. 일본의 쌀 공급 기지로 전락한 조선은 수확량에 비해 엄청난 양의 쌀이 일본으로 이출되었다. 특히 중일전쟁 이후 만주, 북중국 등의 식량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책으로 조선의 식량수탈은 걷잡을 수 없이 심각해졌다. 식민지조선의 백성에게 ‘쌀밥’은 그야말로 먹기 힘든 ‘귀한 식량’이 되었다. 조선총독부는 전쟁에 필요한 식량을 확보하기 위해 증산과 함께 공출에 심혈을 기울이다 전황이 악화되자, 양곡뿐만 아니라 주요 식료품의 수급도 원활하지 못해 소비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