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장자료 톺아보기
집단처형 장면마저 풍속사진엽서로 제작 배포한 일본인들의 고약한 상술
[소장자료 톺아보기•3] 집단처형 장면마저 풍속사진엽서로 제작 배포한 일본인들의 고약한 상술 ‘한국풍속’ 교죄처분(絞罪處分)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는 집단처형 사진엽서이다. 오른쪽 아래에 ‘1909.8.8’로 표시된 소인이 남아 있어서 제작연대를 가늠할 수 있다. 연구소 소장자료 ‘조선풍속’ 교죄(絞罪)라는 제목을 달고 반복 유통된 집단처형 사진엽서이다. ‘조선’이라는 표현은 이 엽서가 경술국치 이후의 시기에 제작된 것임을 말해준다. 연구소 소장자료 1994년에 펴낸 『한국독립운동의 진상』이라는 소책자에 수록된 참고도판은 집단처형지에서 포착된 또 다른 사진자료가 남아있을 가능성을 제시해주고 있다. 특히 사진아래에 남아있는 ‘글씨 흔적’은 이 사진의 정체를 밝혀줄 새로운 단서가 될 수도 있다. ⓒ국가보훈처 여느 사람들이라면 똑바로 응시하기도 힘든 처참한 광경을 담아낸 두 장의 사진엽서가 여기에 있다. 열 명 남짓한 죄수들이 집단적으로 교수대에 걸려 최후를 맞이한 모습이 자못 섬뜩하면서도 애처로운 느낌을 자아내게 한다. 가만히 살펴보면 여러 개의 지게들이 주변 바닥에 흩어져 있는 것이 보이는데, 이는 교수형 집행을 위해 발판용 도구로 사용한 것인 듯하다. 이들 엽서는 동일한 내용을 담고 있으면서도 아래쪽에 각각 ‘한국풍속’과 ‘조선풍속’이라고 시리즈명칭을 다르게 달고 있는 것이 눈에 띈다. ‘한국’이냐 ‘조선’이냐 하는 표현은 해당엽서의 제작시점이 1910년 경술국치의 이전인지 이후인지를 구분하는 잣대가 된다. 실제로 ‘한국풍속’으로 표시된 엽서에는 ‘SEOUL, COREA, 1909년 8월 8일자’의 통신일부인(通信日附印)이 붙어있는 것이 이를 잘 입증해주고 있다. 도저히 풍속이라는 범주에 넣기 어려운 집단처형장면까지 거듭 사진엽서로 제작하여 버젓이 유통시키는
이토 특파대사가 탄 열차를 향해 돌을 던진 한국인의 항거 장면
일본인 화가가 그린 원태우 지사의 투석 장면이 묘사된 삽화 자료이다. 여기에는 그의 행위를 “우매한 농민이 술에 취해 무의미하게 돌을 던진 것”으로 치부하고 있다.(『일로전쟁 사진화보』 제39권, 1905년 12월 8일자) 원태우 지사의 항거에 대한 삽화와 단신 기사가 수록되어 있는 『일로전쟁 사진화보』 제39권(1905년 12월 8일자)의 표지이다. 의거터 표석 자리에서 보이는 경부선 철길의 모습 안양 관악역 인접지(승강장 북단에서 250미터 지점)에 설치되어 있는 ‘원태우 지사 의거지’ 표석의 모습이다. ‘을사조약’의 억지 체결을 강요한 후 5일째가 되는 1905년 11월 22일 아침, 특파대사 이토 히로부미(特派大使 伊藤博文)는 짐짓 승자의 여유를 과시하려고 했던 것인지 그의 숙소였던 대관정(大觀亭, 소공동 하세가와 사령관 관저)을 나서 수원 방면으로 한가로이 사냥을 떠났다. 이날 많은 사냥감을 포획한 채로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오후 6시 30분에 열차가 안양역(安養驛)을 출발하여 속도를 올리던 차에 오래지 않아 돌멩이 하나가 차창 밖에서 날아들면서 유리가 산산조각 나는 일이 발생했다. 이때 이토 특파대사는 유리파편에 의해 그의 뺨에 세 곳, 왼쪽 눈 위에 한 곳, 왼쪽 귀 아래에 한 곳을 합쳐 도합 다섯 군데에 상처가 나면서 약간의 피를 흘렸으나 경미한 부상을 입는 것에 그쳤다. 그럼에도 사건 발생 직후 열차가 다음 정거장에 도착하자마자 이토를 호위하던 헌병조장 1인과 헌병 2인이 즉각 하차하여 범인 체포에 나섰고,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 오후 9시 반에 이르러
‘지원병’이란 미명 아래 침략전쟁에 내몰린 조선인 청년들의 운명
조선인의 참정권 및 병역의무에 대하여는 당국자 간에 숙의한 결과로 약 10개년 간 후에 부여하기로 정하였는데 특히 외국에 재주(在住)하는 조선인에게는 외무성의 주장으로 일본관민과 동일한 자격을 여(與)하기로 결(決)한 후 각국 정부에게 통첩하였다더라. 이것은 원래 <황성신문>이었다가 경술국치와 더불어 제호 변경을 강요당한 <한성신문>1910년 9월 6일자에 수록된 「조선인 권리 의무」 제하의 기사 내용이다. 여길 보면 막 식민지로 편입된 조선에 대해 병역의무의 부과를 10년간 유예한다는 구절이 포함되어 있다. 그 이유는 자세히 알려진 바 없으나 언어 차이로 지휘통솔이 쉽지 않은데다 함부로 무기를 소지할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겠다는 판단이 깔려 있었던 것이 아닌가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만주사변(1931년)을 거쳐 중일전쟁(1937년)에 이르러 소모적인 침략전쟁이 지속되면서 이러한 상황은 급변하기에 이른다. 신무천황제일(神武天皇祭日)인 1938년 4월 3일에 맞춰 시행된 ‘육군특별지원병령’은 부족해진 병력자원을 식민지 조선에서 긴급 조달하기 위한 응급조치의 하나였다. 겉으로는 ‘내지인(內地人)’과 신분취급상 아무런 차별이 없고 동등한 기회를 부여하겠다는 핑계를 내세웠지만, 본질은 역시 조선인들을 전쟁터로 내모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이에 따라 육군병지원자훈련소(陸軍兵志願者訓練所)가 양주 공덕리에 이어 평양 신양정과 시흥 독산리에 잇따라 설치되었고 1944년에 이르기까지 이곳을 통해 배출된 1만 7천여 명에 달하는 입소자들은 현역병 또는 제1보충역의 신분으로 일본군대에 편입되어 전선으로 끌려갔다. 이와 아울러 1943년에는 ‘해군특별지원병령’이 별도로 제정되어 해군병지원자훈련소(海軍兵志願者訓練所)가 경남 창원(진해)에 설치되었다. 육군에 이어 해군에까지 지원병제도가 확장된 것은 태평양전쟁(1941년)의 확전에 따라 해군병력의 조달이 시급한
일제의 병영으로 가득한 땅
이번에 소개하는 자료는 용산이 일제침략의 총본산이었음을 알려주는 1929년에 발행한 지도이다. 축적은 1:7,500이며 색인으로 행정구역(町, 洞, 里) 표기와 함께 관청과 회사, 학교를 표기하였는데 총독관저, 보병영步兵營, 병기지창兵器支廠, 군사령부, 군사령관 관저, 야포병영, 공병영工兵營, 기병영騎兵營, 사단사령부, 사단장관저 등 군사시설과 철도국, 철도원양성소, 철도공장, 철도병원 등 용산역을 중심으로 한 철도관계 시설, 용산소학교, 중학교, 효창보통학교, 삼판三坂소학교 등 학교 시설, 용산경찰서, 경성형무소, 형무소공장 등이 기재되어 있다. 지도는 모눈의 형식으로 표시되어 있는데 이것은 동일한 축적과 형식을 갖춘 시가도, 특히 경성시가도 같은 지도를 모눈에 이어서 맞춰볼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범례로 교량, 산악 등고선, 성벽, 철도, 전차선로, 행정구역 경계까지 표시하였는데 이렇게 상세한 범례와 모눈의 형식은 군사용 지도로 사용하기에도 손색이 없다. 시가지에는 지번과 함께 주요 건물들을 모양대로 그려 넣었으며 지도의 범위는 북쪽으로 서울역 아래, 동쪽으로 이태원, 서쪽으로 마포, 남쪽으로 용산역까지 보여준다. 서울시에서 운영하는 인터넷 <서울지도>의지도전시관에도“용산시가도”를볼 수 있는데1927년에 발행된 것이다. 연구소 소장 “용산시가도”(1929년판)와 다른 지형이 세 곳인데 이는 모두 을축년 대홍수(1925년)와 연관성이 있어 보인다. 먼저 1927년판에 보이던 용산역 하단의 이촌동 지역 마을이 1929년판에서 사라졌다. 해마다 비만 오면 침수문제로 이재민이 발생하던 이촌동이 을축년 대홍수로 마을 전체가 물에 잠기고 수많은 피해를 입게 되자 조선총독부는 이촌동 주민들을 노량진(500戶)과 공덕리(215戶)로 나누어 이전시켰다. 원래 이촌동 주민들이 지속적으로 요청한 이전지는 효창원이었는데 관철되지 못하였다. 대신 효창원 부지에는 용산역에 있던
일제의 폭압정치를 상징하는 총독부 관리의 패검
미리보는 ‘식민지역사박물관’ 44 일제의 폭압정치를 상징하는 총독부 관리의 패검 총독부 시절의 관리들이 제복과 함께 착용한 패검. 칼자루와 칼집에 ‘오동 문양’이 한 개씩 새겨진 것으로 보아 ‘주임관(奏任官)’이 사용한 패검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자료, 전체 길이는 84cm 정도) ‘총독부 및 소속관서 직원 복제’에 묘사된 패검의 손잡이 부분 세부 문양이다. 오동문양이 2개인 것은 친임관과 칙임관, 1개인 것은 주임관, 그리고 문양이 없는 것은 판임관 용도이다. 1910년 총독부 출범 당시 총독관저에서 촬영한 총독부 고위관료들의 기념촬영사진이다. 여기에서 보듯이 이들은 일제히 제복 차림에 칼 한 자루씩을 손에 쥐고 있다. 일제의 폭압적인 식민통치기를 언급하자면 결코 빼놓을 수 없는 풍경의 하나는 ‘칼 찬 제복 차림의 일본인 관리’ 모습이다. 이와 관련된 규정의 연원을 살펴보니, 통감부 출범 직후인 1906년 2월 2일에 제정된 ‘통감부 및 소속관서 직원 복제(服制)’에 이미 오동 문양이 새겨진 ‘패검(佩劍)’에 관한 규정이 포함된 사실이 눈에 띈다. 또 다른 일본의 식민지역에 해당하는 대만총독부와 관동도독부의 경우에는 각각 1899년 2월 17일과 1906년 8월 30일에 ‘문관복제’가 제정되는데, 여기에도 한결같이 관리의 제복에 패검을 함께 차는 규정이 포함된 것으로 확인된다. 일본 본국에는 ‘문관대례복제(文官大禮服制)’에 의해 함께 칼을 차는 제도가 없지는 않았으나, 일상적인 근무복에 패검을 착용하는 규정은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칼 찬 제복’은 그 자체가 매우 위압적이며 차별적인 규정이 아닐
식민통치의 화려한 선전장, 조선물산공진회
무력으로 조선을 강점한 일제는 식민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몽매한 조선을 근대화시켰다는 선전활동을 벌였다. 홍보영화나 가요, 라디오방송, 어용신문인 매일신보를 통해 조선총독부의 시정施政을 앞 다투어 홍보했는데, 박람회도 마찬가지로 조선의 발전상을 보여준다는 명목 아래 개최한 전시성 이벤트였다. 이러한 전시행사는 품평회, 물산회, 공진회, 박람회 등 다양한 명칭으로 수시로 개최되었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시정5년기념 조선물산공진회(1915), 조선부업품공진회(1923), 조선박람회(1929), 신흥만몽박람회(1932), 조선대박람회(1940) 등을 꼽을 수 있다. ‘조선물산공진회’는 최초의 공식 박람회로서 일제가 조선을 강제병합한 지 5년째 되는 해인 1915년 9월 11일부터 10월 31일까지 약 50일간 개최되었고, 전시장소는 조선왕조 통치의 핵심공간인 ‘경복궁’이었다. 조선총독부는 조선물산공진회를 빌미로 근정전을 비롯한 주요 전각 몇 군데만 남기고 무수한 건물들을 헐어냈다. 바로 그 자리에 1926년 조선총독부 신청사가 들어서게 되니 공진회장을 경복궁으로 선정한 의도가 무엇이었는지 명확하게 알 수 있다. 조선물산공진회는 각도의 물산품을 전시하여 시정 이래 발전한 조선의 모습을 대내외에 널리 알리는 목적과 아울러 앞으로 발전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조선을 일본에 홍보하여 일본 기업과 일본인들을 조선으로 유치하고자 하는 이른바 ‘식민植民’의 선전장이었다. 주요 전시관은 제1진열관, 제2진열관, 미술관, 기계관, 근정전 회곽廻廓, 철도국 별관 등이며 전시물로는 각종 산업에 관한 물품을 망라하고 외국품도 조선의 산업상 필요하다 인정하는 물품을 출품하는데 각 부류를 통틀어 4,665점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또한 공진회장으로 사용하는 건물이 무려 5,226평이며 경회루에 매점과 음식점을 만들고 야간에도 개장하여 관람객의 입장을 자유롭게 하여 ‘경복궁’을 유흥
‘천황’을 위해 조선 청년도 나서라
이번에 소개할 자료는 국민총력경기도연맹에서 제작한 청년체력검사 실시에 관한 안내문이다. 침략전쟁이 장기화되자 일제는 조선 청년들도 전쟁에 직접 동원하기 위해 ‘육군특별지원병령’(1938), ‘해군특별지원병령’(1943), ‘학도특별지원병령’(1944) 등을 차례로 공포하였다. 그러나 이마저도 전세가 불리해지자 1944년 8월부터는 징병제를 실시하여 조선 청년들을 강제로 전장으로 내몰았다. 이와 함께 조선에도 청년체력검사를 실시하였는데 체력검사에 관한 내용을 문답형식으로 작성하여 애국반을 통해 회람하도록 만들었다. 국민총력조선연맹은 징병제 실시를 내선일체의 실현으로 미화하면서 대대적인 선전활동을 전개하여 징병을 독려하였는데 애국반은 국민총력조선연맹의 최말단 조직이었다. 전장으로 끌려가는 젊은이들이 줄을 이었으며, 마을마다 역마다 죽음의 환송식이 애국부인회, 국민총력조선연맹의 이름으로 성대하게 치러졌다. 애국반 회람 청년체력검사 전 조선 일제히 실시 질문> 조선청년체력검사는 무슨 까닭으로 합니까? 답변> 아시는 바와 같이 대동아전쟁은 빛나는 전과를 내고 있으나 미영(米英)을 철저히 정토(征討) 격멸하여 광대한 대동아를 개발하고 경영하는데 매우 많은 사람이 필요하게 될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이 경우에 일본 인구의 1/4을 가지고 있는 조선으로서는 모든 사람이 각자의 힘에 응하여 맡은 직업에 힘을 다하는 것이 이번의 전쟁 완수에 기여하는 가장 효과적인 일입니다. 그런데 그 실력이 어떠한 상황인지 알고자 이번의 체력검사를 행하는 바입니다. 질문> 검사의 범위는 답변> 조선인 남자로서 만 18세와 19세(대정11년(1922년) 3월 2일생에서 대정13년(1924년) 3월 1일생까지)의 전체 청년이올시다. 질문> 몇 시 어디에서 행합니까? 답변> 3월 상순에 각자가 거주하는 부군(府郡)에서 행합니다만 그 일시와 장소는 부읍면에서 애국반장의 손을 거쳐 2월 15일경
이토를 찬양한 ‘매국배족’의 무리들
미리보는 ‘식민지 역사박물관’ 23 이토를 찬양한 ‘매국배족’의 무리들 ❶ 조중응의 이토 히로부미 송별시 정미칠적 중 하나인 농상공부대신 조중응이 취운정 시회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찬양하기 위하여 지은 시 ❷ 취운아집翠雲雅集 취운정에서 창화했던 시를 모아 간행한 것으로, 시책인 <선린창화善隣唱和>제2집에 수록되어 있다. ❸ 경복궁후원원유회기념엽서 1909년 6월 15일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소네 아라스케에게 통감직을 넘겨주고 일본 추밀원 의장으로 취임했다. 이토가 일본으로 가기 전 7월 1일 경복궁 후원에서 열린 신구통감 송영회 기념엽서이다. 취운정翠雲亭. 종로구 가회동에서 삼청동으로 넘어가는 북촌길 고갯마루에 있던 정자다. 이곳은 갑신정변의 주요 인물인 김옥균, 홍영식, 서광범 등이 내외정세를 토론한 장소로 유명하다. 특히 갑신정변 관련 혐의로 유폐된 유길준이 1887년 이후 이곳에 머물면서 1892년 11월 민영익의 주선으로 유폐가 풀릴 때까지 <서유견문>을 저술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청일·러일전쟁이 끝난 후에는 많은 지사들이 우국의 심정을 토로하던 역사의 현장이다. 나철, 이기, 오기호 등은 1909년 2월 나라가 파괴되고 백성이 망하는 근본 원인을 사대주의에 기운 교육으로 민족의식이 가려진 데 있음을 통감하고 ‘단군교’ 포명서를 공포했다. 독립을 꿈꾸던 이들이 비밀리에 이곳에 모여 독립운동을 모의하였으며, 학생들이 동맹휴학을 계획하던 곳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1909년 7월 13일 오전 10시, 취운정에서 이와는 전혀 다른 성격의 모임이 있었다.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한 전현직 통감과 각부 대신, 조선의 고위 관민들이 모인 시회詩會가 열린 것이다. 일본 메이지 정부는 7월 6일 각의에서 ‘한국병합방침’을
수탈을 위한 토대 구축, 토지조사사업
미리보는 ‘식민지 역사박물관’ 22 수탈을 위한 토대 구축, 토지조사사업 임시토지조사국 사무원 및 기술원 양성소 졸업생 사진, 1910년대 조선총독부는 토지조사사업을 효율적으로 진행하고자 행정·측량 분야의 전문인력을 체계적으로 양성했다. 전라남도 영암지역의 토지조사 관련 문서, 1911 1911년 작성된 전라남도 영암군 곤일종면 학송리의 토지조사 관련 문서이다. 토지소유자는 대부분 목포와 해남에 거주하는 일본인 대지주들을 비롯한 부재지주였다. 일제는 강제병합 직후 식민지 재정기반 확충과 수탈을 위한 토대 구축에 착수했다. 그 핵심 사업이 토지조사사업이었다. 일제는 개항 직후부터 지속적으로 지질 조사 등 사전준비를 해왔고, 1905년 을사늑약 체결 후에는 일본인 기사를 초빙해 측량기술을 가르치면서 전면적인 지적조사에 대비했다. 한편 일본인 지주·자본가에 의한 토지매수는 통감부의 묵인과 방조 아래 조직적으로 추진되었다. 1906년 「토지가옥증명규칙」과 「토지가옥전당집행규칙」, 1908년 「토지가옥소유권증명규칙」을 제정해 한국 내 일본인 토지소유를 법적으로 보장했다. 이어 1910년 3월 토지조사국을 개설했고 병합 후인 10월 조선총독부 내에 임시토지조사국을 설치해 본격적인 토지조사사업을 시작했다. 1910년 9월부터 1918년 11월까지 2,400여 만 원의 경비를 들여 전국적으로 시행된 토지조사사업의 핵심은 토지소유권·토지가격·지형지모(地形地貌) 조사였다. 토지소유권 조사는 각 필지별 토지소유권 및 경계를 사정(査定)하여 토지등기제도를 확립하기 위한 기초 장부를 만드는 것이고, 토지가격조사는 전국의 땅값을 조사하여 지세(地稅)부과를 위한 표준을 만드는 것이며, 지형·지모조사는 전국적으로 지형도를 작성하는 사업이었다. 그러나 토지소유권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까다롭고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했고 신고 기간도 매우 짧았다. 방법을 몰라 기한 내에 신고하지 못한 농민이 많았고
조선신궁 도리이(鳥居) 앞에 서서
미리보는 ‘식민지 역사박물관’ 21 조선신궁 도리이(鳥居) 앞에 서서 목도공립국민학교 학생들의 수학여행 기념사진 이번에 소개할 자료는 일제강점기 학생들의 ‘수학여행’ 기념사진이다. 수학여행은 근대 학교제도에서 발생한 개념으로 일본에서 시행되던 것이 19세기 말 근대학교의 설립과 함께 조선에도 전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의 수학여행은 동경사범학교 학생들이 지바현으로 ‘장도원족長途遠足’을 간 것이 그 시초로 알려져 있다. 당시 수학여행은 행군의 변형된 형태로 견학 견문과는 거리가 먼, 신체 단련을 위한 도보여행에서 출발한 것으로 부국강병이라는 국가의 목표와 연결된 것이었다. 특히 1890년 교육칙어의 공포로 ‘천황’을 중심으로 한 국가체제의 결속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 교육지침이 각 학교로 하달되자, 수학여행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후 만한滿韓을 경영할 인재양성을 목표로 활성화되기 시작하였다. 조선에서 ‘수학여행’이라는 용어가 최초로 기록된 사례는 <황성신문> 1901년 7월 26일에 실린 러시아의 만주수학여행 보도 기사이다. 이 자료로 미루어보아 이미 이 시기에 수학여행이라는 개념이 자리잡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조선의 수학여행은 조선인들의 피와 땀으로 건설한 경인선, 경부선, 경의선 등 철도의 개통에 따라 확대되었다. 수학여행을 간 학생들이 방문한 장소는 주로 근대시설, 자연경관 및 고적, 농업시설, 성지 등이었다. 인천항에 정박 중인 일본의 거대한 군함, 수원의 농림시험장, 함흥의 상품진열관, 전주의 잠업취체소, 춘천의 저수지, 경주의 고적, 금강산 등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고 다녔다. 또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전승지라는 의미를 강조하여 대련 여순 평양 등지의 전투지역과 군 관련 기념품진열관 등을 탐방하였다. 수학여행 기간은 1일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