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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사랑

1년간의 ‘부천 역사 바로세우기’가 남긴 것

2024년 7월 2일 80

[후원회원마당] 1년간의 ‘부천 역사 바로세우기’가 남긴 것 박종선 부천지역위원장 경기문화재단 조사연구팀은 지난 5월 21일 오후 1시부터 3시까지 2시간가량의 작업을 통해 2018년 경기문화재단 문화유산과가 2018년 말에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여 부천역 남부 경원여객 앞에 설치했던 ‘계남면사무소 3.1운동 만세 시위지’ 안내판과 표지판을 철거하였다. 이 철거에는 경기문화재단 관계자 2명과 양경직 계남역사문화연구소 소장, 민족문제연구소 부천지부장인 나, 총 4명이 참여하였다. 이러한 철거가 진행될 수 있었던 계기는 작년 5월 12일 민족문제연구소 부천지부(이하 부천지부) 주최로 부천시의회에서 진행되었던 부천시 항일독립운동 기념 학술토론회에서 양경직 계남역사문화연구소 소장이 ‘계남면사무소 습격항쟁! 사실인가? 오류인가?’란 발제를 통해 해당 사건이 인천 계양의 장기리에서 일어난 황어장터 만세운동 일환으로 벌어진 계양면사무소 습격사건의 일부로, 4번의 보고 과정 중 세 번째 보고서에서 ‘계양면’을 ‘계남면’으로 잘못 표기하여 발생한 오류라는 것을 밝혀냈기 때문이다. 부천지부는 학술토론회 후 양경직 소장과 협의하여 발표된 내용들이 사장되지 않고 시민들이 알 수 있도록 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기 위한 자료로 활용하기 위해 발제 내용을 책으로 만들었다. 부천지부는 이 책들을 먼저 경기문화재단과 독립기념관 관계 부서 담당자에게 보냈다. 또한 부천시 행정을 책임지고 있는 부천시장을 비롯해 부천시의장, 부천시의원, 시민단체, 담당부서에 배포하였다. 그리고 미래의 주역인 학생들이 볼 수 있도록 부천 관내 130여 개 초중고 학교 내 도서관을 비롯해 16개 시립도서관에도 무료로 배포하였다. 그렇다면 ‘계남면사무소 습격항쟁’의 역사적 오류를 잘못 설명하고 있는

외교 실패가 부른 국권 피탈과 망국의 교훈

2024년 7월 2일 104

[후원회원마당] 외교 실패가 부른 국권 피탈과 망국의 교훈 130년 전 한반도에서 벌어진 청일전쟁 현장에서 보는 오늘 박진우 수원지역위원장 청나라와 일본이 조선을 자국의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 한반도에서 전쟁을 치른 지 130년. 첫 전투가 있었던 서해안에 있는 작은 섬 풍도(안산시)를 민족문제연구소가 주최하고 은평구청이 후원하는 1박 2일 답사를 다녀왔다. 영국에서 수상(11년), 외무장관과 전쟁(국방)장관 등을 역임하면서 중국과 아편전쟁까지 강행한 보수주의자 팔머스톤 경 헨리 존 템플(Viscount Palmerston, Henry John Temple)은 “우리에겐 영원한 적도 영원한 친구도 없다, 다만 영원한 것은 국가의 이익일 뿐”이라는 외교 동맹의 의미를 통해 외교의 본질을 설명했다. 일반적으로 동맹은 현재와 미래의 적의 위협을 억제하고 국가의 방위 능력을 높이기 위해 결성한다. 동맹에 참여한 국가는 동맹의 대가로 부담해야 하는 비용보다 이익이 클 때 동맹을 맺는다. 미국과 영국, 프랑스 등 12개 국가가 결성한 북대서양 조약기구(NATO, 1949)는 현재 32개 국가가 참여하고 있는데 소비에트연합을 중심으로 결성된 바르샤바조약기구(우호협력상호원조조약, 1955)에 참여했던 체코, 폴란드, 헝가리, 루마니아와 불가리아 등도 북대서양조약기구에 가입하면서 어제의 우방이 오늘의 적국이 되는 현실이다. 130년 전 풍도(안산시) 앞 바다에서 청일 양국의 함대가 격돌했고 성환(천안시)에서 육상 전투가 치열했던 청일전쟁 당시 조선의 외교는 어떻게 진행되었을까? 1882년(임오년)에 훈련도감 소속 구식 병사들이 부당한 대우(급료 미지급, 모래 섞인 쌀 지급 등)에 항의하며 봉기를 일으키자 고종은 청나라를 끌어들여 이들을 진압했다. 군란을 진압한 청나라는 조선의 내정을

혁명성지 순례: 간도 신흥학교 회억(回憶) ②

2024년 7월 2일 68

[자료소개] 혁명성지 순례: 간도 신흥학교 회억(回憶) ② 이번에 소개하는 자료는 조선민족혁명당의 선전 주간지 『앞길』에 실린 「혁명성지 순례: 간도 신흥학교 회억」이다. 이 글은 1937년 3월~5월 사이 제4호부터 제14호까지 총 11편이 연재되었으나 현재 4편의 결락본(4호, 8호, 9호, 12호)이 있어 여기서는 7편만 수록하였다. 일부 한자투는 현대어로 풀어 썼고 판독되지 않는 글자는 □로 표시하였다.―편집자 주 간도 신흥학교 회억-열혈건아 둔전제로 군산추월(羣山秋月)에 독병서(讀兵書)(10) 1919년 기미 3월초에 각 단체 대표 회의를 유하현 고산자에서 개최하던 중에서 3·1운동의 보도와 독립선언문이 내도하매 대표 전체는 환희와 흥분 속에서 성대한 축하식을 거행하고 회의를 급속 진행하여 각 단체를 일체 해소하고 한족회로 개조하며 자치행정을 전력케 하고 일방으로는 군사에 관한 최고기관으로 서간도군정부를 조직하고 군령(軍令)과 군정(軍政)을 통할하여 군사활동의 준비에 전력케 하였다. 이때야말로 실로 10년간 각고 견인하면서 분투 양성하여 오던 수천 건아의 영용한 위력을 한번 시험할 시기에 임하였다. 그리하여 비록 군비와 무기는 결핍하나 오직 적성과 열혈로 전간도의 주민들은 군사활동 준비에 일치 노력하매 그 진행은 가위 하루 천리지세(千里之勢)로 진전되었다. 3·1운동은 5천년 역사를 계승하여 오던 조국을 이족 일본에게 강탈당한 후 10년간 절치통한(切齒痛恨)하며 설욕 광복하고자 밤낮 고심하던 조선민족의 획기적 운동이라. 그리하여 내지동포의 맨손으로 적에 대항함이 장렬한 운동에 응하여 만주와 러시아의 수백만 교포들은 병력으로써 적을 섬멸하고자 무장대오 의 편성 훈련에 전력하였다. 이에 신흥학교는 간도사회의 중심이 되어 10년간 세력 양성한 천여의 군인을

망우리공원에 ‘이태원묘지 무연분묘 합장비(1936년)’가 남아있는 사연

2024년 7월 2일 61

[이 땅에 남아있는 저들의 기념물 9] 망우리공원에 ‘이태원묘지 무연분묘 합장비(1936년)’가 남아있는 사연 이른바 ‘문화주택지’의 등장으로 흔적 없이 사라진 서울 주변 공동묘지들 이순우 특임연구원 예로부터 서울의 경계가 어디까지인지를 구분 지을 때 사용하는 용어의 하나로 ‘성저십리(城底十里)’라는 표현이 있었다. 이를 달리 ‘경성십리(京城十里)’라거나 ‘도성십리(都城十里)’ 또는 ‘성외십리(城外十里)’라고 적기도 한다. 일찍이 『세종실록』 「지리지(地理志)」의 ‘경도한성부(京都漢城府)’ 대목에도 ‘성저십리’ 항목이 등장하는데, 여기에는 그 범주를 “동쪽으로 양주 송계원(楊州 松溪院, 지금의 묵동) 및 대현(大峴)에 이르며, 서쪽으로 양화도(楊花渡, 양화나루) 및 고양 덕수원(高陽 德水院)에 이르고, 남쪽으로 한강(漢江) 및 노도(露渡, 노량진)에 이른다”고 정의하고 있다. 이곳은 사산금표(四山禁標)가 적용되는 구간이며, 무엇보다도 금장(禁葬)과 금송(禁松) 등의 규칙이 엄격하게 집행되는 공간이었다. 조선 철종 때의 문헌자료인 『경조부지(京兆府誌)』에는 이에 관해 다음과 같이 정리한 구절이 포함되어 있다. 一, 도성십리(都城十里) 안에서는 투장(偸葬, 몰래 묘를 쓰는 것)을 금단(禁斷)한다. 一, 경성십리(京城十里) 내에 입장(入葬; 죽은 이의 장사를 지내는 일)을 하면 원릉(園陵)의 수목(樹木)을 훔치는 율(律)에 의해 논죄(論罪)하며, 기한을 정해 억지로 파서 옮기도록 한다. 본부(本府)에서는 송사(訟事)로 인해 발각된 것과 특교(特敎)로 적간(摘奸)하여 옮기도록 한 것 이외에 투장(偸葬) 등의 일은 군문(軍門)과 사도(四道)에 이속(移屬)하여 이를 거행토록 한다. 이러한 원칙은 조선시대를 통틀어 일관되게 유지되었고, 특히 대한제국 시기에도 도성 주변에다 밤에 몰래 묫자리를 쓰는 행위에 대한 단속이 이뤄진 흔적은 어렵잖게 확인된다. 예를 들어, 『대한매일신보』 1904년 11월 21일자에 수록된 「투장가중」 제하의 기사에는 이러한 내용이

피해자 중심주의, 인간미 넘치는 활동, 다음 세대로 잇다

2024년 7월 2일 50

[기고] 피해자 중심주의, 인간미 넘치는 활동, 다음 세대로 잇다 – 강제동원 피해자운동 기록사진전 개막행사 ‘그날을 기억해’에 다녀와서 야스다 치세 保田千世, 야스쿠니 한국인 무단합사철폐소송 지원회 식민지역사박물관 기획전시실 벽면의 강제동원피해 소송 원고 가운데 300여 명의 얼굴 사진. 1945년부터 현재까지의 운동 연표에 이어 기획전시실 가득히 설명이 달린 기록 사진 패널. 그 공간에서 갤러리 토크가 열렸다. 이희자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이하 ‘보추협’) 공동대표가 이전 사무소에서 쫓겨나 종로의 오피스텔에 사무소를 빌려 운동을 시작할 당시 가장 힘들었을 때 낙원동 길 위에서 나눈 대화를 잊을 수 없다. 1990년대부터 교류를 계속해 오고 있어, 그 어려움을 알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사과하는 나에게 희자 씨가 건넨 말. “인간은 운동만으로 살아가는 게 아니에요. 사람과 사람으로 교류를 계속하고 있는 거예요.” 그로부터 이 십수 년 “포기하지 마라. 포기하면 지는 것이다”라는 이희자 씨의 말대로 참으로 많은 운동을 해내온 것이리라. 희자 씨의 말에 의지하여 그저 옆에 있기만 했던 것을 후회하며 새삼스럽지만 곱씹으며 기록사진을 보고, 이야기를 듣고, 포기하지 않고 줄곧 싸워오게 한 원동력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다. 이번 사진전의 주역은 강제동원 피해자와 그 유족. 피해자와 유족들이 선두에 서서 운동을 전개하고, 변호사, 연구자, 민족문제연구소의 활동가들이 뒷받침하고 있다. 그리고 인간미 넘치는 활동. 낙원동 길 위에서 희자 씨가 건넨 말 그대로이다. 연구소를 찾을 때마다 많은 젊은 활동가들과 자원봉사자들의 모습을 보아 왔다. 고령의 피해자와

태평양전쟁에 휘말린 티니안의 한인들

2024년 7월 2일 63

[연구소 글방 14] 태평양전쟁에 휘말린 티니안의 한인들 김명환 선임연구원 32년 만의 귀향 1977년 5월 15일 오전 11시 40분 김포공항에 한인 유해를 실은 항공편이 도착하였다. 이들 유해는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때 강제동원되었다가 사망한 한인들이었다. 고향을 떠난지 32년 만의 귀향이었다. 유골이 수습된 곳은 북마리아나제도 티니안(Tinian). 유골은 김포공항 도착 3일 전인 5월 12일 티니안의 화장터에서 합동으로 화장되어 16개의 납골함에 수습되었다. 유골봉환 행렬은 티니안을 떠나 사이판, 오사카를 거쳐 김포공항에 닿았던 것이다. 공항에서 간단한 발인제를 지낸 후 유골은 한국사회사업대학(현 대구대학교) 학생 16명의 가슴에 안겨 충남 천안의 ‘망향의 동산’으로 옮겨졌다. 오후 2시 30분 위령제를 지낸 후 장미묘역에 마련된 무덤에 안장되었다. 티니안에서 한인유골이 발견된 경과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전하고 있다. 남태평양지역에서 원혼이 된 희생동포에 대한 실태가 처음으로 알려진 것은 지난 76년 봄. 한국사회사업대학 재단 이사장 李永植 목사(85)가 괌도에 들렀다가 사이판섬에 인접한 티니안섬에서 수많은 한국인이 희생되었다는 말을 듣고 직접 실태파악에 나서면서부터였다. 티니안섬은 미군이 B-29에 최초의 원자폭탄을 장전, 히로시마(廣島)와 나가사끼(長崎)로 발진했던 기지였다. 李목사는 티니안島에 들러 현주민인 알폰소 S 보와 씨(51)를 찾았다. 그가 단체사냥을 나갔다가 밀림 속에서 글자를 알 수 없는 묘비를 발견했다고 전해들었기 때문이다. 李목사는 그를 앞세워 「朝鮮人之墓」라고 쓴 묘역을 찾아냈다. 묘지에서 녹이 슨 드럼통과 뼛가루가 든 항아리를 발굴한 李목사는 참혹하게 숨져간 동포들의 고혼을 달래기 위해 이들을 고국으로 옮겨 봉안하기로

‘반민특위 강제해산 75년 기억행사’ … 반민특위 명예회복의 전기 마련

2024년 7월 2일 62

[초점] ‘반민특위 강제해산 75년 기억행사’ … 반민특위 명예회복의 전기 마련 우리 연구소는 “1949년 친일파에 의해 와해된 반민특위의 정신과 친일문제 연구에 평생을 바친 고 임종국 선생의 유지를 이어 1991년에 설립함”을 명토박았다. 따라서 반민특위의 명예회복은 우리 연구소의 숙원 중 하나이다. 반민특위에 대한 연구성과는 『반민특위의 조직과 활동』(허종, 2003) 『반민특위 연구』(이강수, 2003) 등이 있지만 여전히 부족한 편이고 반민특위에 대한 명예회복은 요원한 상태이다. 우리 연구소는 1999년 9월 20일 시민 성금으로 명동 반민특위 본부터(당시 국민은행 명동 본점)에 표석을 세웠다. 표석 제막식 당일에는 당시 국민은행 측을 설득하는 등 표석 설립에 도움을 준 장영달 국회의원과 이원용 반민특위 총무과장(2002년 별세)이 참석했다. 이후 우리 연구소는 기회 있을 때마다 반민특위를 알리려 노력했다. 2001년 1월 11일 조문기 이사장을 비롯해 김정륙(반민특위 김상덕 위원장 자제), 김준형(반민특위 김상돈 부위원장 차남) 선생 그리고 김영식(친일문학인파인 김동환 자제) 선생과의 회합을 반민특위 표석 앞에서 마련했다. 김동환은 1949년 2월 28일 반민특위에 자수했고 반민법 위반으로 공민권 5년을 선고받았다. 이 자리에서 김영식 선생은 반민특위 후손들에게 아버지의 친일행적을 사죄했다. 2004년 1월 19일 저녁에는 『친일인명사전』 편찬 성금 5억원 달성기념 행사도 반민특위 표석 앞에서 가졌다. 2004년 12월 29일 「일제강점하반민족행위진상규명에관한특별법」 제정, 2005년 12월 29일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귀속에 관한 특별법」 제정 등으로 친일청산이 국민적 관심사로 떠오르자 우리 연구소는 17대 국회 김원기 의장(2004년~2006년), 20대 국회 문희상 의장(2018년~2020년))에게 반민특위

학술회의 ‘김단야와 그의 시대’ … 사회주의 독립운동에 대한 정당한 평가 기대

2024년 7월 2일 34

[초점] 학술회의 ‘김단야와 그의 시대’ … 사회주의 독립운동에 대한 정당한 평가 기대 우리 연구소가 후원한 6·10만세운동 98주년 기념 학술회의 ‘김단야와 그의 시대’가 6월 10일 오후 2시 국회도서관 지하 1층 소회의실에서 열렸다. 소전재단, 김용만 국회의원실이 주최하고 6·10만세운동유족회, 시민모임독립, 김단야기념사업회(준)가 주관한 이번 학술회의는 이동섭 소전재단 이사장과 이만열 전 국사편찬위원장의 축사로 시작됐다. 본격적인 발표는 ‘고려공산청년회와 김단야’(이준식 전 독립기념관장), ‘6·10만세운동과 김단야’(박종린 한남대 교수), ‘12월 테제와 김단야’(임경석 성균관대 명예교수), ‘스탈린 숙청과 김단야’(윤상원 전북대 교수) 순으로 이어졌다. 이준식 전 관장은 “1920년을 전후한 시기에 사회주의를 바탕으로 조선혁명을 추구한 이들과 마찬가지로 김단야도 ‘3·1운동의 후예’로 개신교에서 사회주의로 인식전환”을 이뤘으며 “사회주의 혁명가로 전환한 시점은 광둥성에서 상하이로 돌아온 1920년 4월부터 고려공산청년단 상해회에 가입한 1921년 3월 사이일 것으로 추정”했다. 박종린 교수는 “6·10만세운동의 준비는 순종이 죽자 권오설 중심의 고려공산청년회의 6·10운동투쟁지도특별위원회와 김단야 중심의 상해임시특별연락부가 함께 진행”했으며 “5월 초 김단야와 권오설은 국내의 모처에서 회동했다”고 보았다. 또한 “권오설 중앙과 상해임시특별연락부의 관계는 일방적 지도-피지도 관계가 아닌 상호관계”라고 파악했다. 임경석 명예교수는 “1928년 12월 10일에 코민테른 정치비서부가 채택한 조선문제결정서인 12월 테제를 국제당을 좌우하는 소련 볼셰비키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이해하면서 조선인 사회주의자들은 국제당의 논의과정에 참여하지 못했고 단지 소련의 지시에 맹종하는 꼭두각시와 같은 역할을 했다는 입장이 학계의 주류적 시작”이었다면서 “하지만 조선인 각 대표자들의 문서는 12월 테제 작성의 모본이 됐고 국제당 조선 담당관들은

식민지역사박물관 오늘을 걷는 답사 〈영화 ‘서울의 봄’ 현장을 가다〉

2024년 7월 2일 31

[초점] 식민지역사박물관 오늘을 걷는 답사 〈영화 ‘서울의 봄’ 현장을 가다〉, 두 차례 답사 진행 식민지역사박물관과 민족문제연구소의 “역사학자와 함께 걷는 쿠데타의 밤길”을 주제로 한 6월 8일 1차 답사에 노영기 조선대학교 교수가 인솔자로 나섰다. 시작 전부터 많은 비가 내렸지만 30명이 넘는 인원이 참석하여 이번 답사에 대한 관심과 열기를 짐작할 수 있었다. 답사는 1980년 10월 26일 쿠데타의 시작이었던 궁정동 안가 터 무궁화동산에서 시작하였다. 현재 공사중이어서 아쉽지만 길가에서 노영기 교수의 해설을 듣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다음은 12·12쿠데타 반란군 지휘부가 있었던 경복궁 태원전으로 향했다. 태원전은 경복궁 안에 있는 곳임에도 처음 와보았다는 참가자들이 많았다. 경복궁이 조선시대의 왕궁으로 시간이 멈춰진 곳이 아니라 현대사까지 역사의 흐름이 이어지는 곳이었다는 점에서 흥미로워했다. 옛 보안사령부였던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답사를 마쳤다. 12·12쿠데타 세력들이 기념사진을 찍었던 장소에서 답사 참가자 전원이 역사적 그날을 기억하기 위해 단체사진을 찍으며 마무리했다. 한편 답사 참가자 10명은 식민지역사박물관까지 관람하고, 답사 소감을 나누고 헤어졌다. 6월 15일에는 “마을 학자와 함께 걷는 현충원에 그 사람들”을 주제로 답사가 진행되었다. 안내는 동작역사문화연구소 김학규 소장이 맡아주었다. 채명신 장군, 정병주 특전사령관, 김오랑 중령 등 12·12와 관련된 인물을 중심으로 그들의 묘소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특히 군사 반란군과 반란군을 진압했던 사람들이 한 곳에 잠들어 있는 모습을 보면서 참가자들은 아직 해결되지 않은 역사의 현장을 마주하고 있다는 소감을 피력하기도 했다. 현충원 묘역

우리가 그날을 기억하는 강제동원 역사의 증인이 되자

2024년 7월 2일 34

[초점] 우리가 그날을 기억하는 강제동원 역사의 증인이 되자 – <강제동원 피해자운동 기록사진전> 개막식 “그날을 기억해” 갤러리 토크 현장 보고 5월 24일 〈강제동원 피해자운동 기록사진전〉이 식민지역사박물관 1층 돌모루홀에서 개최되었다.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와 민족문제연구소가 주최하고 식민지역사박물관이 주관하고 한일역사정의평화행동, 야스쿠니반대공동행동 한국위원회가 후원한 이번 기록사진전은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 등에 관한 특별법」 제정 20주년과 역사적인 2018년 ‘강제동원 대법원판결’을 기념하기 위해 마련되었다. 이 사진전은 특별법 제정과 대법원판결에 이르기까지 피해자들이 투쟁의 과정에서 직접 남긴 서투르지만 유일한 기록사진과 그 사진에 담긴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다. 사진을 통해 인권 회복과 역사 정의 실현을 위해 오랜 시간 온몸을 바쳐 투쟁한 피해자, 유족 그리고 활동가들의 눈물과 지난 투쟁의 시간을 조금이나마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날을 기억해” 갤러리 토크에서는 기록사진 속 강제동원 피해자 운동을 되돌아보고, 앞으로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이야기했다. 행사에는 피해자와 유족들 그리고 오랜 시간 피해자들과 함께한 한국과 일본의 활동가들이 자리했다. 주요 참석자로는 강제동원 소송 원고 당사자 김정주 님, 김명배 님(후지코시 근로정신대 소송) 이희자 님(야스쿠니 무단합사철폐 소송), 일본제철 소송 원고 이춘식 님의 자녀, 미쓰비시 히로시마 소송 원고 고 정창희님의 유족, 강제동원소송 변호인(장완익), 일본 활동가 야노 히데키 님(강제동원문제 해결과 과거청산을 위한 공동행동), 이치바 준코님(히로시마 미쓰비시 소송), 나카가와 미유키님(후지코시 근로정신대 소송), 나카타 미쓰노부 님(일본제철 소송), 야마모토 나오요시님(야스쿠니 무단합사 철폐 소송, 한일회담외교문서 정보공개청구 소송) 등이다. 갤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