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나는 무엇이라 답할 것인가
[후원회원마당] 나는 무엇이라 답할 것인가 민족문제연구소를 다녀와서 전여주 더불어민주당 관악을 청년위원회 간사 10월 26일은 역사적인 사건들이 겹치는 날로 1909년에 안중근 장군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1920년의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대첩이 모두 10월 26일에 일어난 역사적 사건이다. 두 사건 모두 일제 식민지에 대항하고자 했던 우리 민족의 저항이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있기에 청년위원회는 이런 정신을 기념하고자 민족문제연구소를 찾았다. 민족문제연구소는 기업이나 정부의 지원을 전혀 받지 않고 순수하게 시민들의 자발적 후원으로 운영되는 곳으로 국내에서 유일하게 식민지의 역사적 사실들에 대한 기록들을 전시하고 있는 곳이다. 우리는 특별히 국세현 기획팀장님의 친절한 맞이를 받았고 이어 방학진 기획실장님의 세세한 가이드로 처절했던 35년의 시간여행을 시작했다. 그중 나의 발길과 마음에 유난히 깊이 남은 곳은 독립운동을 하다 잡혀 온 사람들을 심문하고 가두었던 곳을 재현해 놓은 곳이었다. 독립운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온 사람들을 심문한 기록들이 남아있고 이를 토대로 하여 실제 음성으로 그 내용을 들어볼 수 있도록 하였고 그 장소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나무로 된 책상과 의자에 앉아볼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목소리로 옮겨져 있는 분들은 모두 학생이었고 질문은 모두 같았는데 이름과 나이, 독립운동에 찬성하는 이유, 독립운동에 참가한 이유, 독립운동을 하면 독립이 된다고 생각하는 이유, 앞으로도 독립운동을 할 것인지 등을 물었다고 한다. 나는 그 딱딱하고 차가운 의자에 앉아 질문과 답변을 들으며 ‘나라면 이렇게 답할 수 있었을까? 나라면
신채호 선생 추도사와 순국한 조선혁명군 동지 약력
[자료소개] 신채호 선생 추도사와 순국한 조선혁명군 동지 약력 편집자주 – 이 달에 소개하는 자료는 조선민족혁명당 기관지 『민족혁명』 제2호(1936.4.15)에 실린 것이다. [출전]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37: 조선민족혁명당 및 기타 정당』, 국사편찬위원회, 2009 고 단재 신채호 선생을 추도함 진인(震人) 고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은 근세 조선민족에서 발견할 수 있는 최초의 정치적 선각자의 하나며, 진정 열렬한 혁명가의 하나이며, 단연 인류를 초월한 천재적 사학가이며, 그리고 망인국종(亡人國種)의 가련한 비고(悲苦)를 철두철미하게 비상(備嘗)한 망국 조선민족의 대표적 표본이었다. ‘단재 신채호’의 명칭이 처음으로 조선 전국에 알려지기는 선생이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의 신문기자 시대로부터이었다. 왜적의 침략으로 인하여 4천여 년 조국이 조석에 경복(傾覆)되고 있고, 노예의 철강이 민족의 두상에 박근(迫近)하고 있거늘 부패한 정부와 우매한 민중은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봉건적 심몽(深夢)에 방첨(方甛)하고 있던 당시 한말의 정세에 있어서 오직 선각한 선생은 1개의 빈곤한 청년학생으로서 서안(書案)을 일척(一擲)하고 신문기자가 되어서 전국적 궐기에 의한 국가의 구망(救亡)을 절규하였던 것이다. 그 열렬한 애국사상, 명확한 논리, 그리고 사람의 가슴을 짜개고 붇는 듯한 그의 독특한 필치에서 짜서 나오는 신문사설과 논문은 보통의 신문이 아니고 이는 곧 군중을 격동하는 애국의 혈화(血火)이었으며, 간적(奸賊)을 참수하는 정의의 상검(霜劍)이었다. 그러므로 선생의 언론이 기재된 신문이 전국에 전파될 때마다 전국의 방방곡곡에서는 기천기만의 애국지사가 용출하고, 의병이 궐기하고, 광범한 군중이 정치적 사상에 각성되었다. 이 얼마나 위대한 신문기자이냐? 선생 이전에 이같은 위대한 신문기자를 조선에서 볼 수 없었던 것이고,
마산정수장 터에 남아있는 사이토 총독의 휘호석판 ‘산명수청(1930년)’
[이 땅에 남아있는 저들의 기념물 13] 마산정수장 터에 남아있는 사이토 총독의 휘호석판 ‘산명수청(1930년)’ 뇌물사건을 일으킨 야마나시 총독의 ‘피운결수(披雲決水)’ 휘호는 폐기 이순우 특임연구원 마산(馬山), 진해(鎭海), 충무(忠武), 장승포(長承浦), 삼천포(三千浦) ……. 이들은 한때 시(市) 단위의 행정구역으로 존재했으나 도농복합시의 탄생과 통합창원시의 출범과 더불어 지금은 전면에서 사라진 — 우연찮게도 전부 항구도시이기도 한 — 지역들의 이름이다. 이들 가운데 1899년 5월 1일 이래 개항장이었던 마산은 조선총독부가 공식 출범하던 1910년 10월 1일에 맞춰 ‘종래의 창원부 일원(昌原府 一圓)’을 관할구역으로 하는 ‘마산부(馬山府)’의 이름으로 처음 전면에 등장하였다가 1914년 3월 1일에 이르러서는 각국거류지(各國居留地)와 그 주변을 ‘마산부’로 따로 떼어내고 잔여 지역은 창원군(昌原郡)으로 개편되는 변화가 있었다. 일찍이 일제는 개항과 함께 이곳에 ‘부산영사관 마산분관’을 두었다가 그 이듬해인 1900년 4월 19일에 ‘마산영사관(馬山領事館)’을 정식으로 개설한 바 있었다. 그 이후 국권침탈과정에서 1906년 2월 1일에는 「통감부 및 이사청 관제」에 따라 “종전 일본영사관이 담당했던 사무와 관할구역 내 경찰, 재판, 감옥사무 등을 관장하는 통감부의 소속기구”로서 ‘마산이사청(馬山理事廳, 경상도 서남부 일대를 관할)’이 이를 대체하였다. 이와 거의 동일한 시기에 진해항(鎭海港)에 군항(軍港)을 설치한다는 결정이 구체화하면서 진해만(鎭海灣) 일대에서 군용지 수용절차가 착착 진행되었고, 그 결과로 1911년 1월 1일에는 제5해군구(第五海軍區; 경상남도 창원군 진해)가 창설되어 대마(對馬, 쓰시마) 및 조선(朝鮮)의 해안해면(海岸海面) 일체가 이곳의 관할로 귀속되기에 이른다. 그리고 새로 구축되는 진해만의 요새를 방어하기 위해 저도와 가덕도에 배치되어 있던 포병대(砲兵隊)는 1909년 7월 31일에
일본의 일상 속 우경화와 역사수정주의(2)
[연구소 글방 17] 일본의 일상 속 우경화와 역사수정주의(2) – 일본 애니메이션을 중심으로 – 김덕영 책임연구원 3. 일본 애니메이션이 과거를 말할 때 (1) 곤조(根性)의 문제 일본 애니메이션이 과거를 말하는 방식은 반드시 지난 역사를 주제로 했을 경우에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그 작품에서 말하는 주된 메시지가 낡은 사고방식일 경우도 또한 과거를 다른 방식으로 말하고 있다고 본다. 배구만화 <Attack NO.1> 야구만화 <거인의 별> 등 스포츠 만화에서 시작되었다고 보는 일본 애니메이션의 곤조는 지금도 일본 애니메이션의 주된 정신적 기둥 중 하나이다. 대표적인 경우가 TV시리즈물로 방영된 코시타 테츠히로의 <불꽃의 투구아 돗지 탄페이(炎の鬪球兒ドッジ彈平)>(국내명 <피구왕 통키>)다. 이런 류의 애니메이션에는 주인공이 이른바 ‘지옥훈련’이라 불리는 온갖 특훈을 이겨내고 끝내 승리하여 패자를 자기 앞에 무릎 꿇게 만든다. 패자는 용서를 빌거나 패배를 자인하며 승자는 넓은 아량으로 이를 받아주는 일관된 스토리를 갖고 있다. 지옥훈련의 과정은 가혹하다. 집체 만한 바위를 굴러 떨어뜨리고, 절벽에서 떨어지고, 맨손으로 땅을 파며 때론 훈련을 위해 목숨을 걸기도 한다. 훈련에 게으른 자에게 혹독한 체벌이 가해진다. 그런 훈련을 받는 선수들은 초등학생이다. 그들에게 더 이상 스포츠는 체력단련이나 유희의 의미가 없다. 반드시 승리만이 의미가 있다. 스포츠가 체력단련과 유희의 의미를 잃기 시작한 것은 일제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1936년 총독에 부임한 미나미 지로(南次郞)는 1938년 ‘국체명징(國體明徵)’, ‘내선일체(內鮮一體)’, ‘인고단련(忍苦鍛鍊)’의 3대 교육방침으로 조선 학생의 황국신민화를 꾀하고 조선교육령을 개정하여 학교의
제18회 임종국상 시상식
[초점] 제18회 임종국상 시상식 11월 12일 화요일 오후 6시 30분 서울글로벌센터 9층 국제회의장에서 회원 및 각계 인사 1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제18회 임종국상 시상식이 열렸다. 시상식은 장병화 임종국선생기념사업회장의 기념사를 시작으로, 정근식 서울시 교육감의 축사, 임종국 선생의 일대기 영상 상영, 박종선 연구소 운영위원장의 기념사업회 경과보고, 윤경로 심사위원장의 선정 경위 설명, 시상과 수상자들의 수상연설,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의 인사말 순서로 진행됐다. 올해 수상자 후보 공모에는 학술·문화 부문 10건, 사회·언론 부문 5건 등 총 15건이 올라왔으며, 지난 9월 27일의 예심을 거쳐 10월 16일 열린 심사위원회 본심에서 열띤 토론 과정을 거쳐 학술부문에 김동춘 성공회대 명예교수를, 사회부문에는 민병래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를 제18회 임종국상 수상자로 최종 선정하였다. 심사위원장인 윤경로 전 한성대 총장을 비롯 도면회 대전대 교수, 이지원 대림대 교수, 장완익 변호사, 조재곤 서강대 연구교수가 심 사위원으로 참여했다. 학술부문 수상자인 김동춘 성공회대 명예교수는, 이데올로기적 억압과 국가폭력 등 한국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관한 깊이 있는 연구로 주목을 받아온 중견 사회학자이다. 수상 저작인 『권력과 사상통제』는 2000년에 출간한 『전쟁과 사회』의 제2부에해당하는 책으로, 냉전과 분단 체제가 어떻게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저해해 왔는지 규명한 노작이다. 김 교수는 이러한 학문적인 성과 외에 사회개혁을 위한 현실 문제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실천적 지식인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해 왔다. 심사위원회는 한국 사회의 불평등과 부정의에 맞서 오랜 기간 노고를 아끼지 않은
‘약산 김원봉과 함께’ 2024년도 정기총회 및 학술회의
[초점] ‘약산 김원봉과 함께’ 2024년도 정기총회 및 학술회의 ‘약산 김원봉과 함께’ 2024년도 정기총회 및 학술회의가 11월 8일(금) 서울 글로벌센터 9층 국제회의장에서 열렸다. 이날 윤경로 식민지역사박물관 관장을 비롯하여 회원 약 70여 명이 참석하여 좌우를 뛰어넘는 민족 통합의 한 상징인 김원봉의 독립 정신을 되새겼다. ‘약산 김원봉과 함께’는 독립운동의 역사를 부정하면서 노골적으로 친일 성향을 드러내는 윤석열 정권의 출범 이후 창립의 기치를 올렸고, 올해로 3년차를 맞이했다. 2024년은 조선의열단기념사업회와의 연대를 진전시켰고, 김지섭 투탄의거 100주년 기념특강, 김원봉 루트를 가다Ⅱ, 의열단 국내의거지 답사 등 다양한 사업을 진행하였다. 이번 총회를 기점으로 정기총회 개최시기를 연초로 변경하기로 하였으며, 2025년부터 문화사업과 교육사업 등 사업을 다양하게 전개하기로 하였다. 그 첫 시작점을 이번 학술회의로 삼았다. 학술회의는 ‘약산 김원봉을 다시 본다’를 주제로 진행됐다. 서중석 성균관대학교 명예교수가 사회와 토론좌장을 맡았고 주제 발표는 염인호 서울시립대학교 교수, 최필숙 밀양독립운동사연구소 부소장, 이지원 대림대학교 교수가 맡았다. 종합 토론은 장세윤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역사연구소 수석연구원, 김영범 대구대학교 명예교수, 이준식 전 독립기념관 관장이 토론자로 참석하여 의견을 나눴다. 첫 번째 주제는 염인호 교수가 ‘김원봉과 대한민국임시정부 및 한국광복군’을 주제로 발표했다. 염인호 교수는 김원봉의 외국인 동지인 중국인 쓰말루(司馬璐)의 저서와 글을 통해 김원봉의 중경시절(1940~1945) 활동을 더 상세히 밝히고자 하였다. 특히 조선의용대의 화북지역 북상이 불법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여 김원봉과 관련한 주요 쟁점을 잘 정리하였다. 토론자 장세윤 연구원은 조선의용대의
2024 민족문제연구소 호남권 후원회원 수련회
[초점] 2024 민족문제연구소 호남권 후원회원 수련회 2024년 민족문제연구소 호남권 권역별 회원 수련회가 11월 2일과 3일 전남 여수에서 42명의 회원, 지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6월 영남권, 7월 충청권, 10월 수도권·강원권에 이어 대미를 장식한 회원수련회였다. 호남권 수련회 첫날 행사로 여순항쟁 유적지 답사를 진행했는데 주철희 선생님이 답사 안내를 맡아 주었다. 14연대 주둔지와 일제잔재 벙커를 시작으로 14연대 주둔지에서 멀지 않은 동성학원 내 군용철도의 흔적, 철도가 이어진 마을 등을 둘러보았다. 주철희 선생님이 “시간이 빠듯하니 발걸음 서둘러 주시고 사진은 나중에 찍어도 되니 간격을 좁혀서 가자”고 요청할 만큼 알찬 일정으로 여수 돌산 앞바다를 끼고 도는 3시간에 걸친 답사였고 내내 참여자들 은 주철희 선생님의 열띤 해설을 진지한 자세로 경청하였다. 답사를 마치고 참가자들은 수련회 장소인 여수 YMCA 가사리 생태교육관에 모였다. 회원들 간에 정겨운 인사를 나눈 뒤 회원배가 운동을 위한 연구소 회원 현황에 대한 방학진 기획실장의 보고가 있었다. 이어 식민지역사박물관의 2024년 활동 영상과 매월 서울 시청역 촛불집회를 꾸준히 참석해온 25년 지기 삼총사 회원들의 활동영상도 보았다. 강당 행사 후 모든 참가자가 둘러앉아 저녁식사를 함께했다. 전남동부지역위원회에서는 회원들을 위해 국내산 홍어와 나로도에서 당일 직접 가져온 삼치회, 돌산 갓김치, 떡을 준비했고 전북지역위원회에서는 넉넉한 양의 솜리치킨를 정성껏 마련해 주었다. 식사 후 야외무대에서 펼쳐진 문화행사는 광주지역위원회가 주도했고 행사 내내 전남동부지역위원회는 술안주로 바비큐를 구워 주느라 노고를 아끼지
“전쟁 이후의 전쟁– 피해 회복을 위한 두 개의 긴 싸움” 학술회의 개최
[초점] “전쟁 이후의 전쟁– 피해 회복을 위한 두 개의 긴 싸움” 학술회의 개최 민족문제연구소는 ‘베트남전쟁 문제의 정의로운 해결을 위한 시민사회 네트워크’와 공동주관으로 10월 26일 서울대학교에서 “전쟁 이후의 전쟁–피해 회복을 위한 두 개의 긴 싸움”이라는 주제로 학술회의를 개최했다. 제67회 전국역사학대회에 자유패널 형식으로 참여한 것인데 “전쟁과 평화(The War and Peace)”라는 공동주제 아래, 전쟁 피해의 기억을 둘러싼 사회적 인식의 형성이 중요한 과제임을 제기하며 선정한 주제였다. 학술회의는 크게 강제동원과 베트남전쟁에 대한 피해 회복 운동으로 나누어 최근까지의 운동성과와 앞으로의 방향성을 되짚어보고 이에 대한 의견을 수렴하기 위한 종합토론으로 이어졌다. 첫 번째 발표는 김승은(민족문제연구소)이 “1990~2000년대 초반 강제동원 피해자 운동과 특별법 제정의 의미”에서 이 당시의 사회적, 역사적 배경과 피해자들의 노력, 운동의 성과와 한계를 분석하면서 강제동원 문제는 단순한 과거사 청산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현재진행형의 사회문제임을 강조했다. 토론을 맡은 남상구(동북아역사재단)는 강제동원의 범주는 원폭 피해, 사할린 강제동원, 야스쿠니 합사 철폐 등 유형별로 다양하게 포함되어야 하고, 문제 제기 방식이나 운동 방향도 다르게 접근해야 한다고 보았다. 두 번째 발표는 김명환(민족문제연구소)이 “한국 정부의 강제동원 피해조사 활동 고찰-상근인력(조사관) 개인의 경험을 중심으로-”에서 한국 정부의 강제동원 피해 진상조사와 진상규명 및 피해조사의 전 과정을 조망하고 강제동원 피해 조사의 현실적인 어려움과 개선 방안을 제시했다. 이에 대해 토론자 이상의(인천대학교)는 위원회의 활동에 대한 여러 가지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향후
청일전쟁 130년·러일전쟁 120년 기획 학술토론회 <위기의 동아시아, 어제와 오늘>
[초점] 청일전쟁 130년·러일전쟁 120년 기획 학술토론회 <위기의 동아시아, 어제와 오늘> 근현대사기념관은 청일전쟁 130년·러일전쟁 120년을 맞아 <위기의 동아시아, 어제와 오늘>을 주제로 학술토론회를 10월 24일(목) 서울역사박물관 야주개홀에서 개최하였다. 이번 학술토론회는 민족문제연구소와 서울시 강북구가 주최하고, 근현대사기념관이 주관하였으며 식민지역사박물관이 후원하였다. 학술토론회는 총 3부로 구성하였다. 1부 ‘두 개의 전쟁과 한반도’, 2부 ‘불의 고리 동아시아’, 3부 종합토론 ‘위기의 동아시아 대토론회’로 진행하였다. 1부 ‘두 개의 전쟁과 한반도’는 세 가지 주제로 구성되었다. 첫 번째 주제는 ‘청일전쟁 초기 청·일 양국의 조선인 동원과 물자 징발(조재곤 서강대 연구교수)’을 다루었고, 두 번째 주제는 ‘러일전쟁기 일본군의 한국 강점(서민교 동국대 책임연구원)’에 관한 내용을, 세 번째 주제는 ‘청일·러일전쟁과 조선의 국제법적 지위 변화(유바다 고려대 교수)’를 다루었다. 2부 ‘불의 고리 동아시아’에서는 두 가지 주제를 살펴보았다. 첫 번째 주제 ‘한반도,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의 고리이자 충돌점: 고대 이후 한반도(정의길 한겨레 선임기자)’를 다루었으며, 두 번째 주제 ‘전후체제의 위기와 한반도의 선택-미·중 전략경쟁이 가져온 대전략의 변화를 중심으로(김희교 광운대 교수)’에 대한 발표가 이어졌다. 3부 ‘위기의 동아시아 대토론회’는 정해구 전 경제·인문사회연구회 이사장이 주재하였다. 자유토론에는 이영호(전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와 이삼성(한림대 명예교수)이 참여했고, 주제별 발표자와 배항섭(성균관대 교수), 조건(동국대 교수), 구선희(고려대 연구위원), 남기정(서울대 교수), 김지운(충남대 교수) 등 다양한 분야 전문가들이 참여해 깊이 있는 논의를 나누었다. 이번 학술토론회를 통해 동학농민혁명과 청일전쟁 130년, 러일전쟁 120년을 맞아 역사적 의미를 재조명하고,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의
조선총독부 시정기념엽서 시리즈(2)
[소장자료 톺아보기 64] 근대화 이미지로 포장한 식민지 조선의 자원 수탈의 실상 조선총독부 시정기념엽서 시리즈(2) 일반적으로 식민지 수탈 구조는 식민지의 농수산물과 각종 지하자원을 헐값으로 매수하고, 식민 본국에서 만든 제품을 들여와 비싼 값으로 팔아 이중으로 착취하는 것이다. 조선총독부는 이러한 수탈 구조를 공고화하여 일본의 이익에 철저히 복무하였다. 조선총독부는 우선 조선 농민으로부터 토지 소유권과 사용권을 빼앗는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한 이외에도 공업, 임업, 어업, 광업 전반에 걸쳐 철저한 수탈정책을 폈다. 조선총독부는 조선인 자본가 기업을 규제하기 위하여 회사령을 제정, 공포하여 조선인의 기업활동을 억압하고 민족산업의 성장을 막았다. 철도, 항만, 통신, 항공, 도로 대규모 기반시설 등은 일본의 대기업에 의해 독점되었고, 인삼, 소금, 담배 등을 조선총독부가 전매하여 조선경제의 균형적 발전이 막히게 되었다. 임업 부문에서 산림령에 따른 임야조사사업이 실시되어, 막대한 국·공유림과 소유주가 명확하지 않았던 임야가 조선총독부와 일본인에게 넘어가 전체 임야의 50% 이상을 차지할 정도였다. 어업 부문에서 총독부는 어업령을 공포하여 일본 어민의 성장을 지원하고 조선 어민의 활동을 억압하였다. 이로 인해 일본의 어획고가 한때 세계 제2위를 기록할 정도로 조선의 주요 어장을 독점 지배하였다. 끝으로 광업에서 조선총독부는 전국의 광산 자원을 광범위하게 조사하고, 한민족의 광업활동을 제약하는 광업령을 제정, 공포한 후 일본인 재벌에게 많은 광산을 넘겼고 지하자원의 대부분은 이들을 통해 일본으로 헐값에 반출되었다. 위에서 열거한, 시정기념엽서에서 보이는 근대화 이미지는 자원 수탈을 위한 기초산업과 이를 위한 가공산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