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우리에게 민족문제연구소는 필요하다
[돌려보기] 우리에게 민족문제연구소는 필요하다 ― 서울·경기·강원지역 수련회를 다녀와서 김해규 후원회원 민족의식(民族意識)이 대두된 것은 백년전쟁 때부터라고 하지만 ‘민족(民族)’이라는 개념이 중요시된 것은 19세기 후반부터다. 상품시장과 자원 수탈에 혈안이 된 열강은 소위 ‘민족주의’를 내세우며 자국의 이익만 우선시하는 식민지침략을 자행했다. 분열된 민족, 열강의 침략과 지배를 받던 민족들도 ‘민족주의’를 내세워 통일운동과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근대 이전 우리는 민족보다 ‘국가(國家)’를 중요시했다. 봉건사회에서의 ‘충(忠)’은 국가와 임금에 대한 충성이었다. 을사늑약을 전후하여 전개된 구국운동도 ‘충(忠)’에 기반한 운동이었다. 대한제국시기의 의병전쟁과 ‘복벽주의(復辟主義)’도 왕조회복을 목표로 했던 독립운동이었다. 하지만 경술국치로 ‘국권’을 상실하면서 국가보다는 ‘민족의 독립’, ‘민족해방’이라는 개념이 중요시됐다. 해방 후 분단상황에서는 ‘통일된 국토와 국가’를 지향하는 개념이었으며, 친일잔재청산이 미진하면서 ‘친일파를 청산하고 민족정기를 되살리려는 개념’으로도 자리 잡았다. 민족문제연구소는 ‘민족(民族)’을 기치로 활 동하는 대표적인 시민단체다. 민족문제연구소의 사업은 통일운동보다 독립운동사의 복원과 독립운동가 선양, 친일파 청산에 방점이 찍혀 있다. 시민들의 힘을 모아 ‘친일인명사전 편찬’,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만주의 신흥무관학교 유적답사를 비롯한 독립운동사적지 답사와 같은 굵직한 사업을 추진했고, 최근에는 뉴라이트 인사 독립기념관장 임명 반대 운동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다. 연구소의 철학과 방향성에 동의하여 모여든 회원들은 1만여 명이 넘는다. 회원들 각자의 의식과 삶은 다양하고 최근에는 회원확보에 어려움을 겪지만 ‘민족정기 회복’이나 ‘친일파 청산’ 앞에서는 일치된 생각과 행동을 가져왔다. 연구소에서는 매년 전국수련회를 개최했다. 수백 명의 회원이 전북 김제, 대구, 부산에 모여 단결력을 과시하고 민족의식을 공유했다.
쓰레기 냉장고에 새끼 삵 3마리가… 그곳에서 벌어진 비극
[돌려보기] 쓰레기 냉장고에 새끼 삵 3마리가… 그곳에서 벌어진 비극 장항습지 유실 지뢰 폭파 피해자 시민운동가 김철기 편 차상덕 시민기자 그가 잠에서 깬다. 오른쪽 무릎 아래가 허전하다. 3년 전, 지뢰 사고로 한쪽 다리를 잃은 그는 한동안 악몽에 시달렸다. 말이 통하지 않는 낯선 세계에 홀로 뚝 떨어진 꿈이었다. ‘왜 하필 나였을까?’ 답 없는 질문에 좌절했던 시간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무던히 재활의 시간을 버텨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나쁜 꿈을 꾸지 않는다. 아침 해가 오른다. 그가 출근 준비를 한다. 두 발에 운동화 끈을 조인다. 오른쪽 무릎을 대신한 의족은 그와 한 몸처럼 움직인다. 차에 오른 그가 시동을 켠다. 왼발로 능숙하게 액셀과 브레이크를 밟는다. 그가 운전하는 차는 부드럽게 도로를 달려 자유로에 진입한다. 차창 너머를 굽어보는 그의 시선이 한강 변을 따라 굽이굽이 뻗은 드넓은 녹색 지대에 가닿는다. 장항습지다. 그의 오른쪽 다리를 앗아간 지뢰가 있던 곳, 동시에 매일 보아도 좋았던 아름다운 장항습지다. 한반도 분단으로 보존된 장항습지 생태계 경기도 고양시에 자리한 장항습지는 김포대교부터 일산대교 사이 약 7.6㎞, 여의도와 비등한 면적으로 경남 창녕군 우포늪에 이어 국내 두 번째로 큰 규모다. 이곳엔 멸종 위기종 33종, 천연기념물 24종을 비롯하여 한반도 토종 돌고래인 상괭이 등 해양 보호 생물 5종을 포함 1066종에 달하는 주요 생물종이 서식한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최대 버드나무 군락지이자 겨울 철새들의
독일, 귀화 시험에 ‘홀로코스트’ 문항 추가
[돌려보기] “과거사에 대한 책임은 국가 정체성의 일부” 독일, 귀화 시험에 ‘홀로코스트’ 문항 추가 정혁 진화위 대외협력담당관 위원회팀장(정치학 박사) 독일은 흔히 과거청산의 모범국으로 불린다. 국가 기념일이면 총리는 부끄러운 과거사를 구체적으로 열거하고 피해자와 피해국에 진심으로 사죄한다. 천문학적 액수(약 120조 원, 2022년 말 기준)의 배상정책을 지금도 시행하고 있고, 국내외에 재단을 설립해 피해자를 지원하고 과거를 기억한다. 그러나 독일이 처음부터 이랬던 것은 아니다. 다음 연설을 들어보자. 우리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하였고 모든 증거를 빠짐없이 제출하였으며, 극복이 불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만행이 있었던 시기를 이겨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 과거에 맡겨야 합니다. 1966년 이스라엘을 국빈 방문한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의 말이다. 과거사를 부인하거나 회피하는 이른바 ‘망각모델’에 가까운 발언이다. 이러한 인식이 가능했던 것은 초기 독일의 과거청산이 내부 반성이 아닌 타의에 의해 진행된 탓이 크다.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으로 상징되는 연합군 주도의 ‘탈나치화’ 작업은 사법적 혹은 인적 청산 위주로 진행되었고, 그조차도 충분하지 못했다. 나치의 만행을 독일 전체의 문제로 받아들이기보다는 ‘히틀러에게 속았다’는 자기 합리화에 빠지기 좋은 환경이 만들어진 것이다. 더구나 동서냉전이라는 국제정세의 변화는 독일의 과거를 더 이상 추궁하기 어려운 외부 요인으로 작용했다. 자유 진영의 입장에서는 독일(서독)이 그들 편에 서서 소련의 위협을 차단하는 것이 더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60년대 이후 본격화된 성찰적 과거청산 독일의 수동적 과거청산은 유럽을 휩쓴 68혁명을 계기로 변화를
사도광산, 조선인 강제동원 그리고 윤석열 정부 굴욕외교의 민낯
[돌려보기] 사도광산, 조선인 강제동원 그리고 윤석열 정부 굴욕외교의 민낯 김영환 대외협력실장 2024년 7월 27일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WHC: World Heritage Committee)는 일본 니가타(新潟)현에 있는 사도(佐渡)광산(공식 명칭은 ‘佐渡島の金山’ 사도섬의 금산)의 세계유산 등재를 결정했다. 일본 정부는 사도광산에 대해 ‘에도(江戸)시대에 전통 수공업으로 도달한 최고의 금 생산 시스템’이라며 세계유산의 가치를 내세웠지만, 그곳은 일제강점기 조선인 강제노동의 역사가 고스란히 새겨진 아픔의 땅이기도 하다. 1940년 2월부터 논산, 부여, 공주, 연기, 청양, 청주, 익산, 정읍, 울진, 진도, 장흥, 담양, 나주, 울진 등지에서 1,500명이 넘는 식민지 조선인들이 사도광산으로 강제동원되어 일본의 침략전쟁에 필요한 구리를 채굴하는 강제노동을 당했다. 등재 결정 직후 한국 정부는 “사도광산 세계문화유산 등재 결정-일본, 전체 역사 및 한국인 노동자 관련 전시물 기 설치 및 추도식 약속”이라는 제목의 보도자료를 통해 “전체 역사를 반영하라는 국제기념물유적협의(ICOMOS) 의 권고와 세계유산위원회의 결정을 일본이 성실히 이행할 것과 이를 위한 선제적 조치를 취할 것을 전제로 등재 결정에 동의하였다.”라고 밝혔다. 이는 마치 일본 정부가 사도광산의 ‘조선인 강제동원을 포함한 전체 역사’를 기록하기로 약속한 것처럼 착각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또한, 한국 정부는 “이는 ‘전체 역사’를 반영하라는 ICOMOS의 권고와 우리 입장을 토대로 정부가 지난 수개월 간 일본 정부와 가진 진지한 협상의 결과물”이라며 자신들의 외교적 성과로 내세웠다. 일본 정부는 2015년 ‘군함도’로 잘 알려진 ‘메이지(明治) 일본의 산업혁명 유산 제철·철강, 조선, 석탄산업’(이하 메이지 산업유산)의 세계유산
일본 천황이 애용했던 헌상담배 ‘충미엽(忠米葉)’의 전래 내력
[이 땅에 남아있는 저들의 기념물 12] 우가키 총독의 글씨로 판명 난 ‘황색종 연초경작 25주년 기념비(1936년)’ 일본 천황이 애용했던 헌상담배 ‘충미엽(忠米葉)’의 전래 내력 이순우 특임연구원 작고한 테라우치 총독 때부터 조선 소산의 연초를 근제하여 가끔 천폐에 헌상하여 왔으며 거번 사이토 총독이 동상시에도 조선산의 연초로 양절연초를 근제하여 천폐에 헌상하였거니와 이번에는 특히 천황폐하께옵서 조선 소산의 연초는 향미가 극히 우량하다 하시와 또 제조하여 들이라는 황송한 처분이 계옵셔 사이토 총독은 즉시 총독부 전매과에 부탁하여 양절금구연초 3천 본을 근제하라 하였으므로 그간 계원들은 목욕재계하고 정성을 다하여 3천 본의 연초를 삼가히 만들어서 5일 9시 50분 제1번 열거로 이등실의 자리 한 편을 치우고 총독부 속 코타니 나오조(小谷直造) 씨가 받들어 가지고 궁내성을 향하여 동상하였는데 코타니 씨의 말들 듣건대, “천황폐하께옵서 어애용하시는 연초는 거위 조선 소산을 어애용하시는 줄로 배찰하는 터인데 이와 같이 천폐에 헌상연초는 충주군(忠州郡) 소산이 많았었는데 이번에는 역시 충주 소산의 제일품 가는 연초와 또는 토이기(土耳其) 소산의 연초 종자를 이종배양하는 태전(太田, 대전) 부근에서 소산되는 양연으로 3천 본의 연초를 근제하여 가지고 궁내성으로 출발하는 길인데, 여하간 조선양연으로 제일 영광을 많이 입기는 충주 소산의 일품양연이라”고 말하더라. 이것은 『매일신보』 1920년 3월 7일자에 수록된 「사이토 총독(齋藤總督)이 천폐(天陛, 천황폐하)에 헌상(獻上)하는 양절금구연초(兩切金口煙草), 3천 본(本)을 봉지(捧持)하고 동상(東上)한 총독부 속(屬) 코타니 나오조(小谷直造) 씨」 제하의 기사에 등장하는 내용이다. 여기에 나오는 ‘양절금구연초’는 양끝을 자른
일본의 일상 속 우경화와 역사수정주의(1)
[연구소 글방 16] 일본의 일상 속 우경화와 역사수정주의(1) – 일본 애니메이션을 중심으로 – 김덕영 책임연구원 1. 일본의 우경화와 역사수정주의 일본의 우경화는 겉과 속이 다른 모순된 형태로 발전해 왔다. 정치 외교적으로는 북한과 중국 위협론의 확대 재생산을 통해 친미, 반중, 반북을 기반으로 한 외교노선을 유지하고 한국에 대해서는 식민지 시기 과거사 문제의 부정과 역사교과서 왜곡, ‘혐한’ 정서의 조성 등으로 끊임없는 정치적 갈등을 유발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의도된 갈등을 해소하기 위한 해법으로 대규모 군비 증강과 이를 위한 평화헌법의 개헌을 주장한다. 즉, 일본 우익의 소망인 전쟁 가능한 보통국가와 군사국가화의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주변국과 정치적 갈등을 계속 유발하는 것이다. 그런데 경제적으로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한중일은 역동적인 경제적 교류와 협력을 하고 있다. 이른바 아시아 패러독스의 대표적인 모습이다. 하지만 2019년 예외적인 상황이 발생했는데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판결에 대한 보복조치로 일본은 한국에 대한 반도체 장비의 수출을 규제한 것이다. 정치적 갈등을 경제적 갈등으로까지 확장한 이 조치는 한국에 거의 피해를 주지 못하고 오히려 일본 반도체 장비의 점유율 하락이라는 결과만 남긴채 2023년 해제됐다. 그리고 수출규제는 일본 내부에서도 일본정부의 오판으로 비판을 받았다. 일본이 노골적으로 우경화의 길을 걷기 시작하는 시기는 대체적으로 2000년대 이후 강경 우익 혹은 극우 성향의 인물들이 자민당을 장악하면서부터라고 분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노골적’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일본의
국립묘지의 영예성 확립을 위한 시민사회와 국회의 노력
[기고] 국립묘지의 영예성 확립을 위한 시민사회와 국회의 노력 방학진 기획실장 1. 국립묘지의 시작 1945년 11월 환국한 백범 김구는 1946년 안중근 의사 허묘를 포함해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등 삼의사 묘역을, 1948년에는 이동녕, 조성환, 차리석 등 임정요인 묘역을 효창원에 조성했다. 식민지해방투쟁을 벌인 나라가 독립을 맞이하고 당연히 가장 먼저 했어야 할 과업이었다. “나는 즉시로 일본에 체류하고 있던 박렬(朴烈) 동지에게 부탁하여 조국 광복에 몸을 바쳐 무도한 왜적에게 각각 학살을 당한 윤봉길·이봉창·백정기 3열사의 유골을 환국시키게 하고 국내에서 장례 준비를 진행하였다. (중략) 장례에 임하여 봉장위원회(奉葬委員會) 책임자들이 장지를 널리 구하였으나 여의치 못하여, 결국 내가 직접 잡아놓은 용산 효창원 안에 매장하였다. 그것은 서울 역사 이래 처음 보는 장례식이었다. (중략) (임시로 영구를 모신-필자 주) 태고사로부터 효창원까지 인산인해를 이루어, (중략) 옛날 국왕 인산(因山) 때 이상으로 공전의 대성황을 이루었다.”(『백범일지』에서) 그러나 백범 자신이 1949년 암살당하여 효창원에 묻힌 이후 효창원은 반이승만의 성지가 되면서 시민들은 경찰의 감시를 피해 몰래 ‘도둑 참배’를 해야만 했다. 이러한 ‘참배와 감시’의 역사는 광주 망월동묘지에서도 재현되어, 전두환 정권은 5·18 추모식에 참석했다는 이유만으로도 가차없이 탄압을 가했다. 이승만 정권은 독립운동가를 모신 효창원을 금단의 영역으로 묶어둔 것에 그치지 않고 1956년과 1959년 두차례나 선열들의 묘소를 강제 이장하려 했다. 효창공원선열묘소보존회를 조직해 강제 이장을 앞장서 막아낸 이는 독립운동가 심산 김창숙이었다. 통곡 효창원 효창원에 쓰라린 바람 일고
이육사, 광야에서 자유를 노래하다
[초점] 이육사, 광야에서 자유를 노래하다 올해 성북구와 성북문화재단이 주최하고 재단법인 역사와 책임이 주관하는 ‘슬기로운 독립투어’가 네 차례에 걸쳐 진행 중이다. 10월 12일과 13일, 안동을 방문하는 ‘이육사, 광야에서 자유를 노래하다’ 답사가 열렸다. 이미 지난 7월과 8월에는 신익희와 조소앙을 주제로 두 차례의 답사가 진행된 바 있다. 12일 오전 9시, 답사 참가자들은 월곡역에서 출발하여 안동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으로 이동하였다.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은 2007년 ‘안동독립기념관’으로 개관했으나, 2017년에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으로 승격되었다. 하지만 올해, 뉴라이트 출신 기념관장이 임명된 후 ‘경상북도호국보훈재단’으로 명칭이 변경되면서 독립운동의 역사를 희석하려는 시도가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도착 후 기념관 강의실에서 방학진 기획실장의 강연이 약 40분간 진행되었고, 이어 기념관 전시를 관람했다. 1894년 갑오의병부터 국채보상운동, 신흥무관학교, 6·10 만세운동, 의열투쟁 등 경북 지역 독립운동의 유물들을 둘러보았다. 이러한 역사적인 장소에 ‘호국보훈’이라는 명칭을 부여해 왜곡하려는 시도가 아쉽고, 현 정권의 역사 왜곡 시도가 엿보여 아쉬웠다. 이후 독립운동가 김동삼의 생가인 의성김씨 종택을 둘러보고 임청각으로 이동했다. 임청각은 안동 고성이씨의 종택으로, 500년 이상 된 고택이다. 이 집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살림집으로, 보물 182호이자 현충시설로 지정되어 있다. 군자정이라는 대청에는 퇴계 이황의 글씨로 된 ‘임청각’ 현판이 걸려 있으며,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 선생의 생가이기도 하다. 답사 참가자들은 독립운동가의 정신과 고택의 아름다움이 살아 있는 임청각에서의 1박에 큰 만족감을 표했다. 다음날, 참가자들은 임청각을 떠나 이육사문학관으로 이동해 이육사의
강원도·수도권 후원회원 수련회
[초점] 강원도·수도권 후원회원 수련회 영남권과 충청권에 이어 강원도·수도권 지역 후원회원을 대상으로 한 2024년 민족문제연구소 수련회가 10월 5일과 6일 이틀간 강촌유스호스텔에서 열렸다. 64명의 회원, 회원의 지인들이 참석하였고 먼 길 마다않고 달려온 부산, 제천 회원들도 함께했다. 의암류인석기념관과 윤희순 의병장 생가터를 돌아보며 첫날 사전답사를 진행, 저녁 식사 후 수련회 본행사를 가졌다. 정세 강론에 해당하는 함세웅 이사장의 말씀으로 시작하여 강원 고성군수인 함명준 회원의 힘찬 인사가 이어졌고 춘천 대학생연합동아리 날갯짓 청년들의 율동과 이혜선 바이올리니스트 공연도 있었다. 민족문제연구소 회원배가 운동이 지금 시점에서 얼마나 중요한가를 2024년 회원현황보고를 토대로 하여 방학진 기획실장이 강조하였다. 책상별 7~8명씩 둘러앉아 지부장들의 진행으로 펼쳐진 이야기 마당에서는 회원가입 동기뿐 아니라 우리의 할일 등 폭넓고 깊은 이야기들이 오갔는데 강원지역 회원들은 지부건설준비위원회를 띄우자는 결의를 다지기도 했다. 박진우 수원지부장이 진행한 이야기마당에 이어 문화마당을 진행했다. 한명철, 김수환 부부 회원의 노래, 회원들이 준비한 율동, 철원 농민회 활동을 하고 있는 김용빈 회원의 발언 등이 있었다. 둘째날은 이범익 단죄비와 평화의 소녀상을 답사했다. 간도특설대를 제안한 친일파 이범익 단죄비 안내는 춘천역사문화연구소 오동철 선생님이 해주셨고 평화의 소녀상 작가 김서경, 김운성 회원과 춘천 지역에서 활동하는 김주묵 회원이 소녀상 건립 과정과 의미를 상세하게 이야기해 주었다. 답사 후 아침 식사를 끝으로 강원·수도권 회원수련회를 마쳤다. 이어서 11월 2~3일에는 호남권 수련회가 여수에서 진행될 예정이다. • 국세현 기획실 회원사업부팀장
친일반민족행위자 이장을 위한 국회 토론회 열려
[초점] 친일반민족행위자 이장을 위한 국회 토론회 열려 우리 연구소와 김용만 의원실 등이 9월 26일 국회의원회관 제9간담회실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 국립묘지 이장을 위한 국회 토론회’를 개최했다. 김용만 의원은 자신의 1호 법안으로 일명 ‘친일파 이장법’을 발의했는데 이번에 관련 토론회가 열린 것이다. 가장 먼저 발표에 나선 방학진 기획실장은 ‘국립묘지의 영예성 확립을 위한 시민사회와 국회의 노력’이라는 발표를 통해 우리나라 국립묘지의 시작이 독립운동가를 위한 공간이 아닌 군인을 위한 묘지로 시작된 태생적 한계를 지적했다. 또한 우리나라 현행 법률을 통틀어 ‘영예성’이라는 개념이 유일하게 등장하는 법률이 「국립묘지법」임을 상기하면서 국가에 대한 희생과 공헌이 있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반국가, 반사회적 행위가 있다면 국립묘지 자체의 존엄과 국립묘지에 안장된 국가유공자를 추모하는 일반 국민들의 입장을 고려할 때 안장을 허락할 수 없다는 것이 ‘영예성’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입장이라고 말했다. 두 번째 발표는 ‘국립묘지에 안장된 친일반민족행위자 이장의 법적 쟁점’으로 장완익 변호사가 맡았다. 장 변호사는 김용만 의원이 대표 발의한 법률개정안들은 진정소급입법으로 이는 아주 예외적인 경우가 아닌 한 위헌이라는 것이 헌법재판소 입장이지만 ‘친일재산귀속법’ 제3조 제1항 본문처럼 진정소급입법의 예외도 존재한다고 말했다. 세 번째 발표는 하상복 목표대 교수가 ‘국립묘지와 애국: 프랑스의 역사적 사례를 중심으로’였다. 하 교수는 프랑스 혁명과 프랑스의 국립묘지 격인 빵떼옹의 사례를 통해 혁명의 이념은 구체제의 이념과 섞일 수 없는 것이었고, 반동의 이념과 혁명의 이념은 서로 타협될 수 없는 것이라는 프랑스인들의 인식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