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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사랑

식민자의 시선으로 담아낸 식민지 조선의 풍경(1) 『제1회 조선시찰기념사진첩』(1924)

2023년 6월 21일 562

[소장자료 톺아보기 50] 식민자의 시선으로 담아낸 식민지 조선의 풍경(1) – 『제1회 조선시찰기념사진첩』(1924) 이번 호에 소개할 소장자료는 1924년 6월 니자형제사진관(尼子兄弟寫眞館)이 발간한 『제1회조선시찰기념사진첩』이다. 이 사진첩은 판매용이 아니라 조선시찰단이 자비 출판한 것으로 총 30여 쪽에 100여 장의 기념사진을 수록하였다. 부산에 위치한 니자형제사진관의 대표 겸 사진사인니자복송(尼子福松)은 시찰단과 여정을 함께하며 출장 촬영을 해주었다. 나가사키현(長崎縣) 이키군(壹崎郡) 출신 실업가 청년으로 구성된 조선시찰단 단원은 조기청길(蓧崎淸吉), 원전겸조(原田謙造), 복전매차랑(福田梅次郞), 원전원우위문(原田元右衛門), 장도원구랑(長嶋源九郞) 5명이었다. 이들은 출발 직전 이키군으로부터 ‘산업시찰원’에 위촉된 점이 특기할 만하다. 이키군 조선시찰단은 4월 20일 시모노세키를 출발해 6박 7일의 촉박한 일정으로 부산, 서울, 인천, 평양, 신의주(4.26)를 시찰하였다. 차편으로는 주로 경부선, 경인선, 경의선 등 간선 철도를 이용했고 국경지대인 신의주에서는 자동차를 이용해 중국 안동현(安東縣)까지 다녀왔다. 일본인 대상 신문인 『부산일보』, 『조선시보』, 『조선신문』 등은 이들을 ‘이키시찰단’ ‘이키실업단’ ‘실업청년시찰단’이라 일컬으며 부산 입항 때부터 이들의 여정을 간략히 보도하였다. 조선총독부는 강제병합 직후부터 식민지 동화정책(同化政策)의 하나로 조선인의 일본 시찰과 일본인의 조선 시찰을 적극 장려하였다. 특히 일본인의 조선 시찰에 있어서는 조선총독부의 식민정책의 정당성을 적극 홍보, 조선 내의 일본 유적이나 일본 신사 답사를 통한 국민성 함양, 관광 산업의 활성화에 따른 재정 수입 등을 노렸던 것이 보인다. (다음호에 계속) • 박광종 특임연구원

‘김복동의 희망’과 함께하는 영화 ‘차별’을 보고 나서

2023년 6월 1일 290

[후원회원마당] ‘김복동의 희망’과 함께하는 영화 ‘차별’을 보고 나서 남경록 후원회원 일본에 10년 이상 살면서 느낀 점은 ‘일본 사람들은 참 예의가 바르다, 친절하다, 질서 정연하다, 좀처럼 속내를 보이지 않는다’. 반면에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역사를 잘 모른다’, ‘일본의 민주주의 수준은 한국보다 낮다’, ‘일본인은 문제의 해결 방안을 밖에서 찾는다’는 등의 말도 심심치 않게 자주 들었다. 그렇다. 먼저 관광지나 상점 등에서 만난 일본인들은 정말 착하다. 미안할 정도로 착한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론 특정 국가(한국)의 국민을 폄훼하는 책과 방송들이 공공 연하게 인기를 얻고 있다. “한국인은 자기 나라로 돌아가라”라는 헤이트 스피치(혐오발언)도 시내에서 버젓이 행해지고 있다. 일본 방송에선 우익들이 전문가 대접을 받으며 “과거 식민지 시절의 보상으로 한국에 대해서 할 일을 다했는데, 한국은 너무도 뻔뻔하게 계속 돈을 뜯으려는 건달 같은 짓을 한다”고 열변을 토하고 있다. 필자도 많은 지인들을 만나며 수없이 그런 류의 말들을 들었다. 참 답답하고 당황스럽다. 그래서 필자가 그런 주장을 하는 일본인들에게 한마디 건넸다. “그럼 식민지 시절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느냐?”, “일본이 한반도에서 얼마나 나쁜 짓을 한 걸 모르느냐?”라고 되묻는다. 일본인들은 모른다. 그 시절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방송에서 1965년 한일회담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고 하니 끝난 걸로 알고 있다. 일본의 과거 행적에 대해 비판하면 모두 ‘반일’로 매도당한다. 필자가 아주 많이 들은 얘기 중 하나가 “왜 한국은 어릴 때부터 반일교육을

민족문제연구소 광주지부의 나주의병 답사기

2023년 6월 1일 409

[후원회원마당] 민족문제연구소 광주지부의 나주의병 답사기 김남철 전교조 전남지부 연대사업국장 오월. 그리고 노동절. 늘 오월은 무겁게 다가옵니다. 다행히 오월을 의미있게 시작합니다. 진즉부터 요청이 들어와 세계노동절기념 5·1 노동자대회가 있었지만 나주의병 답사에 참가 했습니다. 민족문제연구소 답사는 늘 알찹니다. 참여하는 회원들의 자세와 태도가 좋습니다. 세상에 관심을 갖고 개선하려는 노력은 매우 큽니다. 깨어있는 시민들이죠. 그들이 희망입니다. 함평 임정 청사 앞에서 대형 태극기를 걸고 일강(一江 金澈) 선생의 삶과 정신을 기르는 것은 자주독립과 민주세상을 만들기 위한 마음을 새기는 기회였습니다. 영산강 줄기 따라 나주의 임진의병과 한말의병 그리고 항일독립운동을 실천했던 나주인들의 저항과 투쟁 정신을 기억하고 실천하고자 하는 다짐의 시간이었습니다. 미처 알려지지 않았고 기억하지 못한 많고 많은 의병들, 이름없는 의병들을 기억하고 이어가고자 하는 답사였습니다. 역사는 교과서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현대사를 비틀어버린 이승만의 백년전쟁을 꼭 재평가해야 합니다. 있을 수 없는 폐정을 둔갑하여 건국의 주역을 만들고 있습니다. 팩트와 진실의 왜곡이자 비정상입니다. 역사전쟁이라 합니다. 정신 바짝 차려야 합니다. 백척간두 풍전등화 나라 앞에서 도망가지 않고 나라를 지킨 자는 의병입니다. 의병은 거창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자기 자리를 지키고, 누구는 총을 들고, 누구는 군량미를 대고 마지막에 죽음으로 자리를 지켰습니다. 사생취의(捨生取義) 그래서 승리했습니다. 부자, 부부, 가족, 동네 사람들이 같이했습니다. 지지 않았기에 이겼습니다. 그것이 당당함과 의로움을 다한 의병들의 정신입니다. 부끄러운 역사의 불편한 진실들을 대하는 참가자들의 소감은 다시 희망을 확인합니다.

식민지의 번화가를 밝히던 영란등(鈴蘭燈), 금속물 공출로 사라지다

2023년 6월 1일 831

[식민지 비망록] 아흔 번째 식민지의 번화가를 밝히던 영란등(鈴蘭燈), 금속물 공출로 사라지다 파고다공원의 철대문과 조선총독부 청사의 철책도 그 대열에 포함 이순우 책임연구원 별들~이 소근~대~는 홍콩의 밤~거~~리 나는야 꿈을 꾸며 꽃~파는 아가~~씨 이것은 가수 금사향(琴絲響; 1929~2018)의 빅히트곡인 「홍콩(香港) 아가씨」 노래의 첫 소절이다. 그렇다면 이 홍콩 아가씨가 파는 꽃의 이름은 무엇일까? 이 노래의 뒷부분을 조금만 더 흥얼거리면 그 정답이 “영란꽃”이라는 사실을 누구라도 저절로 알 수 있다. 백합과(百合科)에 속하는 식물인 영란(鈴蘭, 스즈란)은 필시 그 꽃의 생김새가 글자 그대로 방울을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일 테고, 그러한 탓인지 지금은 대개 ‘은방울꽃’으로 통용되고있다. 『동아일보』 1933년 4월 3일자에 수록된 「꽃도 보고 약으로도 쓰는 약초에 대한 상식 몇가지, 가정주부들의 유의할 일」 제하의 기사에는 경성약학전문학교(京城藥學專門學校)에서 열린 ‘약용식물전시회(藥用植物展示會)’와 관련한 내용을 소개하는 가운데 이 꽃의 특성과 별칭(別稱)이 이렇게 소개되어 있다. (1) 비비추 : 영란(鈴蘭), 군영초(群影草)라고도 부릅니다. 그러나 화초 좋아하는 이는 항용 ‘방울꽃’이라 하거나 혹은 일본말로 ‘스즈랑’이라면 더 잘 압니다. 이것은 북한산(北漢山)에 자연생이 많고 또 여학생의 책상 우에도 많습니다. 일반으로 이 꽃은 관상용(觀賞用)으로만 알지마는 달여 먹으면 지금 의학계에서 유일한 심장병 특효약으로 치는 ‘지기다리스’ 엽침제(葉浸劑)에 다음가는 강심제(强心劑)입니다. 더구나 이 꽃은 일찍이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淑明女子高等普通學校)의 교가(校歌)와 교표(校標)에 나란히 등장하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예를 들어 『동아일보』 1935년 2월 14일자에 실린 「[교문(校門)을 나서는 재원(才媛)을 찾아서, 중등편 (1)] 숙명여고보(淑明女高普), 단아하고 향내

1922년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조선에 알린 황진남 지사

2023년 6월 1일 1297

[연구실 글방] 네 번째 1922년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조선에 알린 황진남 지사 박광종 특임연구원 1. 1922년 아인슈타인 열풍과 독일 유학생의 기고문 1922년 1월 1일 3면에 동아일보는 ‘세계에 큰 영향력을 미치는 10인’을 선별하여 그 사진을 큼지막하게 실었다. 적위군 총사령관 트로츠키, 비폭력운동의 상징인 인도 간디, 광동정부 대총통 손문, 미국 대통령 하딩 등과 아울러 상대성원리 주창자 아인슈타인이었다. 동아일보는 그에 대해 “뉴턴의 인력설을 부수고 과학계에 혁명을 일으키려 한다”고 소개했다. 객원기자였던 공민(公民) 나경석이 2월 23일부터 3월 3일까지 7회에 걸쳐 동아일보 1면에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를 연재했다. 나경석은 아인슈타인을 ‘세계의 3대 괴물’ 중 하나로 소개했고, 천문학의 혁명, 에테르 부인설, 철학상 의의, 최대속도, 시간과 공간의 관념 등 5개 영역을 나누어 그의 상대성이론을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쉽게 풀어냈다. 동아일보는 11월 4일 ‘아인슈타인 씨 일본 도착 기일’이라는 제목으로 아인슈타인이 순회강연을 위해 11월 중순경에 일본에 온다는 소식을 전했다. 아울러 11월 10일 스웨덴 왕립과학원이 그동안 연기되었던 1921년도 노벨상 수상자를 결정하여 물리학상에 독일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이 선정되었다고 발표하자, 그 내용은 3일 뒤인 11월 13일 동아일보에 게재됐다. 아인슈타인이 노벨상 수상 소식을 들은 것은 상하이에서였다. 아인슈타인이 일본을 방문하기 위해 1922년 10월 8일 기타노마루 호를 타고 프랑스 마르세이유항을 출발해 11월 10일경 상하이항에 기항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1월 13일 상하이를 거쳐 11월 17일 오후 4시 일본 고베항에 들어섰다. 이때 그에게는 ‘상대성 박사’라는

매헌 윤봉길 의사 상하이 의거 91주년 기념 특별 이동전시 <매헌의 꿈, 시에 담다>

2023년 6월 1일 292

[초점] 매헌 윤봉길 의사 상하이 의거 91주년 기념 특별 이동전시 <매헌의 꿈, 시에 담다> 매헌 윤봉길 의사 상하이 의거 91주년을 기념하여 근현대사기념관은 특별 이동전시 ‘매헌의 꿈, 시에 담다’를 4월 26일부터 7월 2일까지 진행한다. 매헌윤봉길의사기념관이 주관하는 이번 전시는 상하이 의거에 가려져 주목받지 못했던 ‘문학청년 윤봉길’의 모습을 재조명한다. 이번 전시에는 윤봉길 의사의 꿈이 담긴 아름다운 시들을 소개한다. 또한 민족의 실력 양성을 위해 집필한 농민독본,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으로 떠나며 남긴 친필 유묵 ‘장부출가생불환’ 등을 함께전시한다. 식민지 조선을 위해 농촌계몽운동에 앞장서고 상하이 의거에 이르기까지 독립의 꿈을 시로 표현한 문학청년 윤봉길 의사의 일생을 돌이켜 보며 그의 독립정신을 기리는 전시가 되길 바란다. • 정햇살 근현대사기념관 학예연구사

‘박물관에서 만나는 교과서 사료읽기 5 : 증언과 사료로 배우는 강제동원’ 진행

2023년 5월 31일 278

[초점] ‘박물관에서 만나는 교과서 사료읽기 5 : 증언과 사료로 배우는 강제동원’ 진행   4월 21(금)~29일(토) 2주에 걸쳐 학교에서 학생들을 지도하는 선생님들을 대상으로 한 교원연수가 진행됐다. 주제는 최근 윤석열 정권의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들에 대한 해법이 발표된 후 뜨거운 이슈로 부각된 일제강점기 강제동원에 대한 것이었다. 매년 상반기, 하반기 두 차례 진행되는 교원연수는 서울특별시교육청 교육연수원으로부터 교원연수 진행 기관으로 승인을 받아야만 진행할 수 있는데, 내일을여는역사재단은 2020년 상반기 교원연수 때부터 꾸준하게 승인을 얻어 진행하고 있다. 이번 교원연수에는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들이 대거 강사로 참여하였는데, 연구소의 풍부한 강제동원 피해자 증언 구술작업의 연구성과와 피해자 재판 지원 등 다양한 지원사업을 벌이며 얻은 현장성이 강연에 녹아들어 교원연수에 참여한 선생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아울러 강제동원 피해자 유족의 증언도 포함되었는데,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이희자 공동대표의 강의가 진행되어 좋은 평가를 받았다. 강제동원된 것도 억울한 일인데, 전쟁터로 끌려가 사망한 후 사망 소식을 전해 듣기는커녕 부친의 유해가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의 그 황망함, 또 이후 지루하게 진행되고 있는 야스쿠니 신사 합사자들의 유해 송환과 합사자 명단에서 부친의 이름을 빼 달라고 하는 청원 등이 여전히 일본 사법부로부터 기각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 등을 들었을 때 연수에 참여한 선생님들은 모두 분노했고, 눈물짓는 이들도 여럿 있었다. 한편 민족문제연구소에서는 교원연수 강의에 대한 호평에 힘입어 시민들을 대상으로 한 강제동원 특강을 준비 중이다. 줌(zoom)을 활용한

식민통치의 화려한 선전장이 된 경복궁(2) – 조선박람회 조감도와 박람회장 엽서

2023년 5월 31일 645

[소장자료 톺아보기 49] 식민통치의 화려한 선전장이 된 경복궁(2) – 조선박람회 조감도와 박람회장 엽서 조선박람회의 가장 큰 특징은 당시 조선의 각 도(道)의 특설관(特設館)들이 독립적으로 세워진 것 외에 내지관(內地館-일본관), 오사카관, 도쿄관, 교토관, 규슈관, 나고야관 등 일본의 지방관과 훗카이도관, 타이완관, 만몽참고관, 화태(樺太-사할린)관 등 당시 일본세력 하에 있던 식민지의 특설관이 세워졌다는 점이다. 특히 각 도의 특설관은 지방의 특색을 반영한 건축양식을 보여주었다. 충청남도관은 논산 관촉사의 석조미륵보살입상의 이미지를 입구에 조성하였고 평안남도관은 평양의 현무문 이미지로 만들었다. 이와 함께 일본의 주요 도시 10개의 특설관이 설치되었는데 도쿄, 교토, 오사카 등 일본의 선진 도시 모델을 보여주고자 하였다. 경회루 뒤편에는 타이완총독부가 운영하는 타이완관과 만몽관(滿蒙館) 있었는데 중국측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강행하여 설치하였다. 조선박람회가 ‘20년동안의 실적을 천명’하기 위해서라고 선전하였지만 일제의 대륙 침략을 미화하는 정치적 의도를 드러낸 것이었다. 일제가 개최한 박람회는 실제로 경제적인 측면보다 정치적인 목적이 있었다. 1923년에 열린‘조선부업품공진회’는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에 대한 들끓는 조선의 민심을 잠재우기 위한 방편으로, ‘신흥만몽박람회’는 만주사변을 일으킨 후 만주국에 대한 실질적 지배권을 주장하기 위해, ‘조선대박람회’는 중일전쟁 이후 대동아공영권의 결성을 위해 개최되었다. 박람회의 성격이 점차 정치적·군사적 목적으로 변화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 강동민 자료실장

현지보고 유혈의 제주도

2023년 4월 24일 506

[자료소개] 현지보고 유혈의 제주도 조덕송 조선통신 특파원 이번 호에 소개할 자료는 <신천지> 1948년 7월호에 실린 조덕송(趙德松, 1928~2000)의 「현지보고 유혈의 제주도」다. 올해 75주기를 맞이한 제주4·3항쟁에 대해 일부 정치세력들이 ‘김일성의 지시로 촉발되었다’는 등 제주4·3의 본질을 호도하고 있는 현 시점에서 4·3항쟁을 객관적으로 추적 보도한 글을 발굴 소개한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자못 크다. 4·3 당시 조선통신사 소속이었던 조덕송 기자는 이후 국제신문, 연합통신, 평화신문, 자유신문, 조선일보 간부를 역임했다. 조 기자는 제주4·3항쟁을 취재했을 뿐 아니라 반민특위 관련 필화사건으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고, 서울 수복 후 언론계에 복귀했다가 정국은 간첩사건에 연루돼 또다시 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 편집자 주 죽음의 거리화 하는 제주의 밤 오후 8시가 제주도의 서울 제주읍의 통행금지시간이다. 해가 짧은 남방의 여름이라 할지라도 오후 8시면 아직 황혼의 안개가 어둠을 기다리는 산책의 시간이련만 이곳 제주의 거리는 물을 끼얹은 듯 고요해진다. 동란을 모르고 옛날과 같이 우는 애상적인 물새소리가 처량하다가 점점 어둠이 칫수가 길어가면 이상한 흥분 가운데 살기가 창일(漲溢)하여가고 제주의 밤은 완전히 죽음의 장막에 뒤덮여 버린다. 4월 3일 미명(未明)에 돌발한 제주도 동란은 무척이나 치안당국을 괴롭힌 채 꺼질 줄을 모르고 요원의 불처럼 확대되어 기어코 제주 전도(全島)를 화중(禍中)에다 몰아넣고야 말았다. 이리하여 동란은 전쟁의 형태로 변하였고 평정하려는 경찰과 국방경비대 그리고 폭도들 사이에 총포는 끊임없이 교환되고 있다. 육로에서 상상하던 전장은 한라산이었고 폭도측의 습격으로 경찰지서 등이 가끔

황임성이 조선총독부 폭탄투척 사건의 범인이 된 이유

2023년 4월 24일 703

[연구실 글방] 황임성이 조선총독부 폭탄투척 사건의 범인이 된 이유 조한성 연구2팀장 사건이 벌어진 것은 1921년 9월 12일 오전 10시 10분경이었다. 아직도 한낮에는 30도에 육박할 정도로 무덥던 초가을날, 남산 중턱에 있던 조선총독부 본관 청사에서 요란한 폭발음이 터져 나왔다. 소리는 인근에 있는 총독관사에서도 들릴 정도로 컸다. 밖에서 총독부를 경비하던 순사들은 실수로 가스관이라도 잘못 건드렸나 했다. 당시 회계과에서 증축공사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상황이 위급하다는 것은 누군가가 “폭탄이다”를 연이어 외치면서 알았다. 총독부에 투척된 폭탄은 두 개였다. 하나는 비서과에 던져졌고, 다른 하나는 회계과에 던져졌다. 비서과의 폭탄은 스즈키라는 직원의 얼굴에 맞고 바닥에 떨어졌다. 얼굴을 정통으로 맞았기 때문에 상당히 아팠지만 터지지 않았기에 그게 뭔지 즉각 알 수 없었다. 잠시 후 회계과에서 폭발음이 들리고 누군가 ‘폭탄’이라고 했기에 그제야 폭탄인 줄 알았다. 불발탄이 아니었다면 스즈키를 비롯하여 비서과 직원들 중에 상당한 인명 피해가 발생했을 것이다. 반면 회계과의 폭탄은 상당한 폭발음과 함께 폭발했다. 건물 바닥에 15~20cm 정도의 구멍이 나고 파편이 사방으로 튀어 사무 집기가 부서지고 유리창이 깨졌다. 하지만 여기서도 인명 피해는 없었다. 회계과장과 직원들이 모두 업무차 방을 비웠기 때문이었다. 두 개의 폭탄이 시간차를 두고 던져졌지만, 누가 폭탄을 던졌는지 직접 목격한 사람은 없었다. 그럴 만한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몇몇 있었지만, 위험을 감지하는 순간 눈을 감거나 몸을 피하느라 보지 못했던 것이다. 폭발 직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