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사도광산 ‘반도 노무자 명부’ 공개 요청 서명운동 후기
[초점] 사도광산 ‘반도 노무자 명부’ 공개 요청 서명운동 후기 사도광산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과정에서 한국 정부의 대일 굴욕 외교 실상이 명확히 드러났다. 이 과정에서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가 사도광산 노동자 추도식 개최를 약속했다며 이르면 9월에 추도식을 개최할 예정이라고 했다. 그러나 추도식을 개최하겠다고 하는 정부는 누가 어디서 어떻게 희생당했는지 해방을 맞아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어떻게 돌아왔고 그 후에 어떻게 살았는지 제대로 알고 있지도, 알려고 노력하고 있지도 않다. 사도광산 강제동원 피해자의 존재를 증명하는 명백한 증거가 니가타현립문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반도 노무자 명부’가 바로 그것이다. 이 명부는 니가타현 지역 역사 편찬 과정에서 미쓰비시가 니가타현립문서관에 제공한 자료이다. 이 명부가 강제동원 피해자의 존재를 증명하는 명백한 증거임에도 니가타현과 사도광산 측은 “원본의 행방을 알 수 없으므로 공개할 수 없다”는 궤변을 늘어놓고 있으며,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에 “수차례 요구하였지만, 답변을 받지 못했다”는 무책임한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이에 민족문제연구소는 한국 정부를 대상으로 8월 중순부터 9월 초까지 ‘반도 노무자 명부’ 공개를 요청하라는 서명운동을 벌였다. 식민지역사박물관 앞에는 사도광산 강제동원 문제를 알려내는 패널을 설치하여 박물관을 찾는 시민들이 이 문제에 더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하였다. 9월에는 이틀 동안 연구소 인근에서 직접 시민들을 만나 서명을 받았다. 9월 12일. 2,404명의 서명을 모아 외교부에 전달하였지만 돌아온 답변은 ‘업무에 잘 참고하겠다’는 단 한 줄의 형식적인 내용뿐이었다. 언제, 어디에,
조선총독부 시정기념엽서 시리즈(1)
[소장자료 톺아보기 63] 시정기념일과 시정기념엽서 조선총독부 시정기념엽서 시리즈(1) 1910년 8월 22일 일제에 의해 ‘한국병합조약’이 강제 체결되고 8월 29일 공포, 발효되면서 대한제국은 식민지 조선이 되었다. 그해 9월 30일 공포된 「조선총독부관제」에 의해 10월 1일부터 조선총독부가 실질적으로 기능했다. 조선총독부는 식민지 조선의 통치가 시작되었다는 의미에서 10월 1일을 시정기념일(始政紀念日)이라 명명하고 국가기념일의 하나로 삼았다. 하지만 일제가 실제로 기념축하행사를 벌인 것은 병합기념일인 8월 29일이었다. 이날 경성신사 등 전국 각지에서 기념식과 기념행사를 대대적으로 벌였고 은행 등은 임시휴업일로 지정할 정도였다. 그러던 중 1915년에 이르러서 시정기념일이 공식화되고, 이날을 총독부와 소속관서의 휴무일로 지정했다. 이러한 결정을 내린 취지는 조선총독부 고시(告示) 제151호(1915.6.26) 「시정기념일의 건」에서 잘 드러난다. 명치 43년(1910년) 10월 1일은 조선총독부의 설치와 더불어 신정(新政)을 개시했던 날이다. 병합조약의 체결 및 그 실시에 있어서 추호(秋毫)의 분요(紛擾)를 보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기정의 방침 및 계획에 따라 전부 원활히 제반의 정무(政務)를 정리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성명(聖名)의 위덕(威德)과 시운(時運)의 추세에서 기인하지 않으면 안된다. 총독부 개시 이래 자(玆)에 5주년 질서의 회복, 제도의 정리는 물론 식산흥업(殖産興業)에 관한 백반(百般)의 시설 경영도 또한 점차 그 서(緖)에 들었으며, 홍택(洪澤)의 점윤(漸潤)하는 바 상하만상 각기 안도하고 치평(治平)의 경(慶)에 욕(浴)하여 조선통치의 기초는 이미 확립되어 시정의 방침은 오래도록 넘쳐나는 것이 될 것인즉, 이제 자금(自今) 매년 10월 1일로써 ‘시정기념일’로 정하여 영구히 이러한 성사(盛事)를 명심하고 일층 여정노력(勵精努力)하여 제국의
삼청동 세균검사실 시절에 총독부 경무국장의 글씨로 새긴 비석
[이 땅에 남아있는 저들의 기념물 11] 저 멀리 청주 오송으로 옮겨진 ‘동물공양지비(1929년)’의 조성 경위 삼청동 세균검사실 시절에 총독부 경무국장의 글씨로 새긴 비석 이순우 특임연구원 절차적 민주주의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대통령선거의 개표 결과가 나올 때마다 유달리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곤 하는 하나의 공간이 있다. 이른바 ‘정권인수위원회’의 사무실 용도로 곧잘 사용되는 ‘한국금융연수원(삼청동 28-1번지)’이 바로 그곳이다. 그러고 보니 일찍이 1987년 노태우 당선인 시절에는 ‘대통령취임준비위원회’가, 그 이후 2007년 이명박 당선인과 2013년 박근혜 당선인에 이어 2022년 윤석열 당선인 시절에도 각각 이곳에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잇달아 터를 잡은 적이 있었다. 이 구역 안에는 벽돌로 구성된 ‘번사창(飜沙廠, 1884년 6월 준공)’이라는 이름의 특이한 근대문화유산 한 채가 잔존하는데, 이것은 통리군국사무아문(統理軍國事務衙門)의 계청(啓請)에 따라 1883년 5월 23일에 설치된 기기국(機器局; 중국 천진에서 들여온 기계와 기술로 근대식 군기 제조와 수리 및 수매를 담당하던 관아)에 속한 기구의 하나였다. 옛 선혜청 북창(宣惠廳 北倉) 자리에 들어선 기기국 안에는 번사창과 더불어 기기창(機器廠), 목양창(木樣廠), 숙철창(熟鐵廠), 동모창(銅冒廠), 고방(庫房) 등의 시설이 함께 만들어졌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세월을 죽 거슬러 올라가면 이 자리는 무척이나 역사적 유래가 깊은 공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일찍이 이곳에는 5군영(五軍營)의 하나인 총융청(總戎廳)과 수어청(守禦廳)의 본영(本營)이 한때나마 자리했던 곳이며, 영조 24년(1748년) 이후로는 선혜청 북창(宣惠廳 北倉)이 터를 잡은 장소였다. 이곳 바로 앞 삼청동천(三淸洞川)에 걸쳐 있는 다리의 이름이 ‘북창교(北倉橋)’인 것은 바로 여기에서 유래된 명칭이다.
일본제철 강제동원 소송과 인권의 발견
[연구소 글방 15] 일본제철 강제동원 소송과 인권의 발견 김진영 선임연구원 최근 윤석열 정부의 외교정책, 인사정책을 둘러싸고 ‘뉴라이트’ 논쟁이 한창이다. 이 논쟁은 결국 대통령의 역사관에 대한 질문으로 연결되고 있다. 돌이켜 보면 대통령은 집권 초기부터 ‘한일·한미일 공조’를 강조했다. 정부가 국가관계를 조정하면서 과거사를 지렛대로 사용할 수도 있다. 하지만 상호주의 원칙에 따르는 외교에서 윤석열 대통령은 일본 측에 일방적으로 모든 것을 내어주고 있다. 혹시 대통령에게 국가운영에 필요한 철학은 없고 그 빈자리에는 무지와 독선이 가득 들어찬 것은 아닐까? 정말 측근에 밀정이 있는 것일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2022년 7월, 정부는 강제동원소송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당사자와 각계각층의 의견을 경청하겠다”고 하며 민관협의체를 구성했다. 2018년 대법원판결 후 일본정부가 반도체 소재 수출을 규제하고 레이다 갈등이 벌어지는 등 강제동원소송 문제는 당시 한일간의 대표적인 외교현안이었다. 하지만 민관협의체에서 정부는 일본이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전제하고 있었다. 한일 간의 과거사 문제에서 국가의 역할을 고민하는 공간은 처음부터 없었다. 결국 2023년 3월 정부는 느닷없이 승소한 원고들에게 제3자인 한국정부가 기금을 모아서 대신 배상금을 지급하는 방식의 ‘정부해법’을 발표했다. “소송에서 이겼으니 누구 돈이든 받으면 되는 것 아니냐”는 논리였다. 하지만 지금까지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고 정부가 마련한 ‘해법’은 피해자들과 시민들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다. 일본제철의 성립과 강제동원 1894년 한반도에서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났다. 농민군의 기세에 몰린 조정은 청에 지원군을 요청했다. 청군 3,000명이 아산만으로 들어오자 일본도 7,000명의 군인을
‘건국절’ 주장은 ‘반한 마름 종족주의’이다
[특별기고] ‘건국절’ 주장은 ‘반한 마름 종족주의’이다 윤경로 식민지역사박물관 관장(전 한성대 총장) 올해 광복절 행사는 두 쪽이 났다. 초유의 사태이다. 자격 미달자를 독립기념관장에 임명한 것이 발단이었다. 결국 이 사단으로 그간 수면 아래 있던 ‘건국절 논쟁’을 다시 소환했다. 이명박·박근혜 정부 때 정치·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켰던 ‘건국절’ 논쟁으로 시끄럽다. 그동안 잠복해 있던 ‘건국절’ 주장이 윤석열 정부 들어서 다시 머리를 치켜든 것은 왜일까? ‘건국절 논쟁’의 핵심 요지는 대한민국의 ‘건국일’을 1948년 8월 15일로 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후술하듯 헌법 정신에 위배될 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 옳지도 않다. 이러한 사실을 ‘뉴라이트’ 쪽도 익히 알면서 왜 이토록 집요하게 1948년 8월 15일을 굳이 ‘건국절’로 주장하려는 것일까. 먼저 이러한 주장을 하는 뉴라이트에 대해 알아보자. 뉴라이트(New Right)의 뜻은 신보수우파로 2000년대 초반 등장했다. 1990년대 접어들며 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권이 붕괴하면서 국내에서 사회주의적 이념에 경도되었던 일군의 지식인들 사이에 사상적, 이념적 전환이 일기 시작했다. 그 대표적 인물과 기관이 서울대 경제학과 안병직 교수와 그의 제자들로 결성된 낙성대경제연구소로 바로 뉴라이트의 진원지이었다. 여기에 마침 2001년 9월 11일 미국 뉴욕의 110층 세계무역센터(WTC) 쌍둥이 빌딩과 워싱턴의 국방부 건물에서 알카에다 자살 테러가 발생했다. 9.11 테러사건이 터지자, 당시 미국 부시 정권 때 이른바 신보수주의, 힘이 바로 정의라고 주창하는 네오콘의 강경한 외교 노선이 전면에 나섰다. 이때부터 북한과 이란 등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였다. 이즈음부터
경술국치 114년 기억 행사와 윤석열 정부 친일·매국 7대 죄악 선정
[초점] 경술국치 114년 기억 행사와 윤석열 정부 친일·매국 7대 죄악 선정 8월 29일, 민족문제연구소는 경술국치 114년을 맞아 ‘강제병합조약’이 체결된 서울 중구 남산 옛 통감관저 터에서 ‘경술국치 114년 기억 행사’를 개최했다. 이날 기억 행사는 임헌영 소장의 기념사에 이어 윤석열 정부 ‘친일·매국 7대 죄악’ 발표, 김준형, 정혜경 의원의 발언, 국치추념가 제창 등으로 진행되었으며, 독립운동가 후손과 시민 등 100여 명이 함께 했다. 임헌영 소장은 경술국치일을 맞아 “묵념하지 말고, 동쪽을 향해 이빨을 3번 부드득 갈자. 이는 이날을 잊지 말자는 것이다. 잊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우리는 이날을 잊은 것뿐만 아니라,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한 결과 오늘날 이 지경이 되었다”라고 말하며 아픔을 잊지 말고 윤석열 정부 퇴진까지 함께 나아갈 것을 호소했다. 국회에서는 2005년과 2013년 각각 ‘경술국치일의 국가기념(추념)일 지정 촉구 결의안’이 발의되었지만 폐기되었다. 지방자치단체의 경우 2013년 경기도를 시작으로 현재 17개 광역자치단체 전부, 2개 교육청, 25개 기초자치단체가 조례를 통해 경술국치일에 조기를 게양토록 명시하고 있다. 22대 국회에서는 8월 14일 ‘경술국치일의 국가추념일 지정 촉구결의안(김준형 의원 등 30인)’이 다시 발의되었다. ‘경술국치일의 국가추념일 지정 촉구 결의안’을 대표 발의한 조국혁신당 김준형 의원은 “저는 내년이 너무 두렵다. 이들이 표적으로 삼고 있는 것은 한일협약 60주년이다. 일본에 면죄부를 줄 준비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윤석열 정부를 끌어내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국치의, 침탈의 세계를 파묻는 것을 온몸으로 막아내야 할 것으로
『대일본국방부인회기념사진첩』(1942)
[소장자료 톺아보기 62] 대표적인 관제 여성단체의 10년간 총후활동 기록 『대일본국방부인회기념사진첩』(1942) 이번 호에 소개하는 소장자료는 1942년 6월 대일본국방부인회총본부(大日本國防婦人會總本部)가 동회 결성 10주년을 기념해 간행한 『대일본국방부인회기념사진첩(大日本國防婦人會記念寫眞帖)』이다. 이 사진첩은 총 142쪽이며, 앞부분에 국방부인회를 지원하는 일본 황족, 육해군 장성, 국방부인회 임원 사진을 게재하고 본문에서 일본 도쿄사단관구(東京師團管區)부터 조선, 대만, 만주, 중국 관내 등 일본이 점령한 지역에 설치된 지방본부들의 총후활동 사진을 각 지방본부마다 한두 페이지씩 실었다. 맨 뒤에 대일본국방부인회 회세표(會勢表) 즉, 75개의 국방부인회 지방본부와 900만에 달하는 회원 수의 통계표를 첨부하여 1942년 2월 당시 국방부인회의 위세를 과시하고 있다(참고로 조선 지역본부 수는 6개, 회원 수는 약 204,000명). 조선지역 국방부인회의 총후활동 사진은 10페이지에 걸쳐 실려 있으며 조선군 제19사단이 관할한 나남사단관구(함북·함남)와 제20사단이 관할한 경성사단관구(경성·대구·광주·평양)의 지방본부 임원 사진과 주요 총후활동을 소개한다. 평양지방본부의 사례를 살펴보면 평양지방본부장 등 임원 사진을 싣고, 평양제조소분회의 탄환 도장(塗裝) 작업, 순천분회의 헌납 면화의 제1회 풀베기작업, 은율분회의 폐품회수, 평양지부의 모포 헌납(1938.8), 순안분회의 순안신사 조영공사, 성천분회의 헌납 목화 파종(1941.5.4), 평양지방본부대회 기념촬영 등 다양한 총후활동을 보여주고 있다. 대일본국방부인회는 1932년 10월 24일, 일본 군부의 총력전 체제 및 국방국가 체제 구축에 전면적으로 협력하는 취지로 설립된 일본 최초의 군국주의적 여성단체이다. 전신은 오사카 국방부인회였다. 이 단체는 군사 원호 사업뿐만 아니라 ‘전통적인 일본 부덕(婦德)의 고취’를 슬로건으로 내걸고 대중여성의 정신교화에 진력하였으며, 군부를 배경으로 가정주부와 노동여성을 주된 구성원으로 삼았다.
1945년 8월 15일 직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의 방송, 강연, 인터뷰
[자료소개] 1945년 8월 15일 직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의 방송, 강연, 인터뷰 호애의 정신으로 결합, 우리의 광명의 날 맞자 안재홍 8월 16일 조선건국준비위원회는 경성중앙방송국을 통하여 준비위원의 자격으로 안재홍 씨가 오후 3시 10분부터 약 20분 동안 마이크를 통해 해방된 우리 동포에게 제일성(第一聲)을 보내었다. – 『매일신보』 편집자 지금 해내 해외 3천만 우리 민족에게 고합니다. 오늘날 국제정세가 급격하게 변동되고 특히 조선을 핵심으로 한 전동아의 정세가 급박하게 변동되는 이때에 있어 우리 민족으로서의 대처할 방침도 매우 긴급 중대함을 요하는 터이므로 우리들 각계를 대표할 동지들은 여기에서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신생 조선의 재건설문제에 관하여 가장 구체적 실제적인 준비공작을 진행키로 합니다. 여러분, 묵은 정치와 새 정치가 바야흐로 교대되는 과정에 있어 걸핏하면 거취에 망설이고 진퇴를 그르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조선민족은 지금 새로 중대한 위경(危境)의 기로에 섰습니다. 이러한 민족 성패가 달린 비상한 위기에 임하여 만일 성실 과감하고도 총명 주밀한 지도로써 인민을 잘 파악 통제함이 없이는 최대의 광명에서 도리어 최악의 범과(犯過)를 저질러서 대중에게 막대한 해악을 끼칠 수가 있는 것이므로 오인(吾人)은 지금 가장 정신을 가다듬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고 또 뜀박질하여 나아감을 요합니다. 근본적인 정치운용의 최대 문제에 관하여는 금후 적당한 시기에 차례로 발표하려니와 우선 당면 긴급한 문제는 대중의 파악과 국면 수습으로서 첫째 민족 대중 자체의 일상생활에서 생명 자산의 안전을 도모함이오, 또 하나는 조일(朝日)
‘용문달양(龍門達陽)’은 태양의 나라 일본(日本)을 가리키는 표현
[이 땅에 남아있는 저들의 기념물 10] ‘용문달양(龍門達陽)’은 태양의 나라 일본(日本)을 가리키는 표현 통영해저터널 입구에 걸린 저 편액은 와타나베 경남도지사의 글씨 이순우 특임연구원 광복 60주년을 며칠 앞둔 지난 2005년 8월 10일 바로 그날, 문화재위원회(근대분과)를 긴급 소 집한다는 소식과 함께 유홍준 문화재청장 명의로 된 한 장의 사과문이 느닷없이 배포된 일이 있었 다. 알고 보니 앞서 7월 12일자 『관보』를통해게시된‘문화재청공고제2005-127호(경남지역 근 대문화유산 24건에 대한 문화재등록 예고)’에 ‘통영 태합굴 해저도로’라는 명칭이 버젓이 그 목록 에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 문제의 발단이었다. 여기에 나오는 ‘태합굴’에서 ‘태합(太閤, 타이코)’은 임진왜란의 원흉인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6~1598)의 관명(官名)이며, ‘굴(堀, 호리)’은 “땅을 파서 만든 수로(水路, 물길)”을 가리키는 일본식 표현이다. 따라서 ‘태합굴(太閤堀; 토요토미의 이름을 따서 붙인 인공수로)’은 그 자체가 전형적인 ‘왜색지명’의 하나였던 것이다. 이러한 분란은 결국 『관보』 2005년 9월 14일자에 수록된 ‘문화재청 고시 제2005-63호’를 통해 등록문화재 제201호 ‘통영해저터널’이라는 이름으로 정정되면서 마무리되었다. 예로부터 통영에는 좁은 해협을 이루는 특이한 지형이 있었고 이곳을 일컬어 ‘착포량(鑿浦梁)’ 또는 ‘착량(鑿梁, 판데목, 판뎃목, 판뎃목이)’이라고 하였는데, 근대개항기 이후 일본인들이 밀려들면서 그들의 언어습성에 따라 이내 이곳을 ‘태합굴’로 고쳐 부르기 시작했던 사실이 드러난다. 예를 들어 대한제국 농상공부 수산국에서 편찬한 『한국수산지(韓國水産誌)』 제2집(1910년 5월발행)을 보면, ‘경상남도 용남군 서면(慶尙南道 龍南郡 西面)’ 관련항목(652~653쪽)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정리되어 있다. [서당동(西堂洞)] 미륵도(彌勒島)와의 사이에 형성된 해협(海峽)의 최협부(最狹部, 가장 좁은 위치)에 있다.
다시는 “남의 자식 놀이터로 내어 맡기”지 않기 위해
[청일·러일전쟁 답사기] 다시는 “남의 자식 놀이터로 내어 맡기”지 않기 위해 방학진 기획실장 우리 연구소는 청일전쟁 130년, 러일전쟁 120년을 맞아 7월 25일부터 30일까지 5박 6일 동안 중국 다롄, 뤼순, 옌타이, 칭다오 등을 답사했다. 이번 답사는 『전쟁과 인간 그리고 평화: 러일전쟁과 한국사회』와 『조선인들의 청일전쟁: 전쟁과 휴머니즘』의 저자인 조재곤 박사(지도교수)를 필두로 모두 24명이 참여했다. 첫째 날은 ‘다롄 진저우 남산 소련군 열사능원’(大連 金州 南山 蘇軍烈士陵園)을 찾았다. 이곳은 1904년 5월 러시아군이 강력한 요새를 구축한 탓에 가까스로 일본군이 요새를 점령했으나 당시 일본군 3군 사령관 노기 마레스케의 장남 노기 가츠노리가 전사하는 등 일본군이 고전을 면치 못한 곳이다. 현재는 일반인의 출입을 막고 있어 능원 입구에 있는 당시 러시아군을 기리는 탑만을 살펴볼 수 있었다. 현지 가이드의 설명에 의하면 이곳을 찾는 중국인은 거의 없으며 자신도 이곳은 처음 방문한다고 한다. 다롄에는 러일전쟁 유적지가 대체로 잘 보존되어 있지만 이곳만은 예외인 듯싶다. 이어서 방문한 포대산공원(炮台山公园)은 청국 정부가 북양해군 설립에 발맞추어 1887년 다롄만 일대에 해안 방어시설로 만든 것이다. 원래 해발 약 90m였던 쉬자산을 20m나 깎아내어 평지로 만들고, 당시 세계 최고 성능의 독일 크루프사에서 구입한 상하좌우 회전하는 대포 16문을 설치하였다. 숙소에 도착한 답사단은 ‘청일전쟁·러일전쟁과 여순·대련의 전투’를 주제로 한 조재곤 박사의 특강으로 첫날 일정을 마무리했다. 종일 비가 내렸던 답사 둘째 날에는 러일전쟁의 격전상을 가장 잘 보여주는 다롄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