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이육사 시의 실증적 고찰
서울에서 안동까지의 길은 멀었다. 이육사문학관을 찾아가는 길이다. 서울에서 3시간 넘게 경부고속도로를 달리고 이제 대구~안동간의 중앙고속도로로 갈아타고 다시 반시간 넘게 달리면 안동에 도착한다. 시내를 벗어나면 이제 퇴계의 본향답게 고택들이 눈에 띄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낙동강과 안동호가 보이고 다시 꼬불꼬불한 길을 산을 끼고 달리다 보면 어느덧 원촌마을에 도착한다. 길의 오른편에 ‘청포도 농원’이라는 표지판이 보이면 거의 다 온 것이다. 시계를 보았다. 아침 9시에 출발을 하였는데 벌써 3시가 다 되어있다. 이옥비 여사는 많이도 기다렸을 것이다. 여사는 나에게 그동안 가지고 있던 의문, 1927년에 광저우에 갔던 사람은 이육사가 아닌 내무부장관을 지낸 이호의 형, 무역협회장과 고려대학교의 이사장을 지낸 ‘목당 이활’ 임을 확인하여 주었다. 그는 광저우에 가서기남(曁南)대학을 나오고 다시 일본과 영국에 유학, 와세다(早稻田)대학과 런던대학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단정하고 깨끗하게 일생을 살다간 사람, 나는 이육사를 생각하면 글과 생각, 행동이 일치하는 시인이자 지사임을 느낀다. 그는 나이 마흔에 생을 마감하였는데 그 짧은 사이에 일제에 열 일곱 번이나 투옥되었었다. 사실 시인의 문학적 성취는 그가 살았던 시대의 역사적 배경과는 무관하지는 않으나 시인으로서의 평가는 그 작품에 먼저 두며 역사적 배경은 작품을 쓰게 되는 마이너한 요소로 고려될 것이다. 이육사가 저항시인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뜻깊고 서정적인 많은 수의 그의 시들이 단순히 저항시의 대명사로 분류되어 버리고 마는 데서 아쉬움을 느끼곤 한다. 알다시피 이육사는 이퇴계의 후손으로 1904년 경북 안동에서 태어나 1944년 북경감옥에서
환국한 임시정부요인들의 일생
[자료소개] 환국한 임시정부요인들의 일생(1) 호담강직(豪膽剛直)으로 일관, 유명한 인천탈옥기(상), 김구(金九)씨편 우리의 지도자 김구 선생을 수반으로 한 대한임시정부의 요인들은 해방의 환호소리가 3천리 금수강산에 차고 넘친 가운데 고국으로 23일 환국하였다. 기미년 만세 전후 피가 뛰는 젊은 혁명가들은 조국의 해방과 자주독립을 부르짖으며 해외와 해내에서 피로 엉킨 투쟁을 오늘까지 거듭해왔다. 처자와 가정과 형제를 버리고 오직 민족해방을 위하여 피를 뿌려 싸워왔다. 잡힌 목이 되면 악착한 극형도 달게 받았고 철창 속에서 쓰라린 고초도 견디고 참았으며 큰 뜻을 이루기 위하여는 파옥(破獄) 혹은 살상도 감행하였다. 천신만고 역경 속에서 사선(死線)을 헤매기도 하였다. 자기 한몸의 목숨과 고생을 돌보지 않고 민족을 위하여 살고 죽었다. 이 모든 희생과 고통은 오늘의 광명을 찾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이제 우리는 역경과 가시덤불 속에서 청춘을 짓밟고 반생을 바쳐 싸워온 선생의 거대한 발자국에 방울방울 엉킨 혈루(血淚)의 기록을 더듬으려 한다. ◇ ◇ 우리민족의 지도자 김구 선생의 풍모와 성격을 먼저 말하다 (판독불가) 젊어서부터 기운이 장사이라 금년이 71세인데 (판독불가) 오셨다. 그러나 원래가 건장하기 때문에 지금도 40세 (판독불가) 과묵한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반생의 혁명운동의 역사를 볼 때 의(義)를 위하여는 칼날처럼 날카롭고 강파로우며 그 생활은 청렴강직하고 검소함을 위주로 하시었다. 자기 한 몸의 이로움을 위하여서는 아무 생각도 일도 안하는 것으로서 선생의 성격 전부를 대변할 수 있다. 선생은 해주 태생이시다. 극히 빈한한 농가에서 나셨다. 어려서부터 넉넉지
한강리(漢江里)가 느닷없이 한남정(漢南町, 한남동)으로 둔갑한 까닭
“청량리동(淸涼里洞), 상왕십리동(上往十里洞), 하왕십리동(下十里洞), 답십리동(踏十里洞), 염리동(鹽里洞) …….” 언젠가 서울 지역의 지명유래에 대한 공부도 할 겸 법정동(法定洞) 명단을 쭉 살펴보다가 조금은 이색적인 이름을 지닌 동네 몇 군데를 골라본 적이 있다. 여기에 나열한 것들은 끝자리가 모두 “무슨 무슨 리동”인 경우에 속하는데, 이를 테면, 그냥 ‘청량동’이 아니고 구태여 ‘청량리동’이라고 하여 마을이라는 뜻글자가 두 번씩이나 겹쳐 있다. 그러자니 약간 시골 냄새가 나는 ‘리(里)’라는 이름을 지금껏 그대로 꿰차고 있는 이유가 뭔지 궁금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이에 관한 흔적을 찾아서 관련 자료를 거슬러 올라가며 훑어보았더니, <조선총독부관보> 1936년 3월 30일자에 수록된 조선총독부 경기도 고시 제32호 「정동리(町洞里)의 명칭 및 구역(개정)」의 ‘경성부(京城府)’ 항목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남아 있는 것이 눈에 띈다. ‘리(里)’의 흔적을 품고 있는 정동(町洞) 명칭 개정 내역(1936년 4월 1일 시행) 이들 가운데 ‘염리’가 ‘염정(鹽町, 염동)’으로 되지 않고 ‘염리정’으로 바뀐 것은 ‘정동(貞洞)’이 ‘정동정(貞洞町)’이 된 것처럼 세 글자로 맞추는 방식을 따라 만들어진 것으로 풀이된다. 그리고 ‘청량리정’이니 ‘왕십리정’이니 ‘답십리정’이니 하는 이름이 생겨난 것도 모두 이 시기의 일이었는데, 아쉽게도 구태여 ‘리(里)’라는 것을 남겨둔 까닭에 대해서는 별다른 설명자료를 찾을 수가 없다. 하지만 경원선 철도의 개통 이래로 많은 사람들이 이미 ‘청량리정거장’과 ‘왕십리정거장’이라는 이름을 익숙하게 사용하던 상태이다 보니, 짐작컨대 아마도 이런 이유로 ‘청량리’와 ‘왕십리’라는 지명을 그냥 살려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리고 ‘답십리정’의 경우에는 기차역의 소재지와는
신흥무관학교의 노래 (1) : 신흥무관학교 교가
2017년 연구소에서 발간한 노동은 선생님의 유작 <항일음악 330곡집>은 올해로 발간 5주년을 맞았다. <항일음악330곡집>에 다 담지 못했던 항일노래 이야기를 이번 달 <민족사랑>부터 싣는다. 노래가 만들어지고 불리던 시기의 역사적 사실, 관련 사건이나 단체·인물 등에 관한 내용과 함께 노래가 가진 음악적 특징 등을 소개하려 한다. 노동은선생님과 편찬 작업을 함께 했던 이명숙 선임연구원과 강태구 근대음악 연구가가 원고 집필을 맡았다. 역사적으로, 음악적으로 더 풍부해진 항일노래를 만나보길 기대한다. – 편집자 주 첫 주제는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많은 독립군을 배출한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다. 1911년 6월 중국 길림성(吉林省) 유하현(柳河縣) 삼원포(三源浦)에서 신흥강습소로 출발한 신흥무관학교는 1920년 학교가 폐쇄될 때까지 무려 3,500여 명의 독립군을 양성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청산리전투 등 독립군 전투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을 뿐 아니라 주요 무장독립운동 단체의 주축으로 활약했다. 앞으로 신흥무관학교에서 만든 노래, 부른 노래, 신흥관련 인물들이 학교 폐교 후 만든 노래 등을 <민족사랑> 지면에 소개하겠다. 내용은 본인이 쓴 「신흥무관학교의 노래로 본 항일노래의 창작·공유·전승」(<역사와 현실> 124, 2022)을 위주로 할 것이며, 곡조에 대한 해설은 강태구 선생님이 맡아 주기로 했다. 신흥무관학교에서 만든 노래는 교가와 두 개의 신흥학우단가가 있으며, 최근에 한 곡을 추가로 발굴 「실락원」)해 총 4개가 되었다. 항일노래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가 작사가와 작곡가를 알 수 없는 것이듯이 신흥무관학교의 노래들도 창작자 대부분을 알 수 없다. 일제의 탄압을 피하기 위해서도 그랬겠지만, 전파과정이
어린이까지 예비 전사로 키우는 전시 교육
침략전쟁의 파고는 한창 학교에서 친구들과 어울려 뛰어다니고 새로운 지식을 배워 한 단계씩 성장해 가는 어린 학생들까지도 덮쳐버렸다. 일제의 전시체제로 학교 교육은 오로지 ‘천황’과 국가에 충성하는 ‘신민’을 기르고 전쟁을 합리화하는 데 목적을 두게 되었다. 조선총독부는 1911년 9월 ‘천황제’와 전체주의를 합리화하는 「교육칙어」를 식민지 교육의 기본 이념으로 활용하는 제1차 「조선교육령」을 시행하였다. 3·1운동을 계기로 문화통치를 표방하면서 제2차 「조선교육령」이 공포되었으나, 중일전쟁으로 일제의 대륙침략이 본격화되자 1938년 3월 제3차 「조선교육령」을 공포하고 국체명징國體明徵·내선일체內鮮一體·인고단련忍苦鍛鍊을 앞세워 황국신민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1941년 3월에는 초등학교령을 통해 소학교의 명칭을 아예 황국신민皇國臣民을 지칭하는 ‘국민학교國民學校’로 교체해 버렸다. 학교는 이러한 전쟁의 광기 속에서 마치 종교집단이 되어 갔다. 학교에 ‘천황’을 위해 기도하는 제단으로 가미다나神棚를 만들고 황국신민서사를 비치하여 국가와 ‘천황’에 대한 충성을 맹세했다. 애국일, 신사참배일, 메이지절 등 온갖 기념일이 되면 조선의 어린 학생들을 예비 소년전사로 육성하고자 오로지 한 사람, ‘천황’에게 기도하며 싸우러 나갈 것을 교육했다. 그리고 중등학교의 수업 연한을 5년에서 4년으로 단축하여 조금이라도 일찍 군인이 될 수 있게 제도화하였다.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교육활동의 목표는 강건한 병사양성이었고, 이를 위해 학생의 체력 단련과 군사훈련이 강제되었다. 1944년 이른바 ‘결전교육 실시’라는 명목으로 전시교육비상조치로 학생들에게 군사훈련과 강제노동을 실시했다. 지금의 초등학교 4학년 이상이면 군사교육을 받게 해 유사시 한반도 내에서 조선 학생들을 최후의 총알받이로 동원하려 했다. 학교가 ‘전쟁’에서 가장 멀리 있어야 할 어린이들을 ‘천황’을 위한 ‘예비 전사’로
‘돌모루 동네배움터’ 5개월의 대장정 마쳐
[초점] ‘돌모루 동네배움터’ 5개월의 대장정 마쳐 민족문제연구소와 식민지역사박물관은 6월 13일부터 10월 24일까지 16주에 걸쳐 매주 월요일마다 돌모루 동네배움터를 진행하였다. 돌모루 동네배움터는 연구소와 박물관이 주민 참여와 소통을 이끌기 위해 마련한 강좌와 답사이다. ‘우리 동네 박물관 둘러보기’와 ‘독립운동을 활용한 문화 콘텐츠 제작사례’, ‘우리 동네 역사 문화 자원 활용하기’,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의 목소리를 들어라’ 등 다양한 주제의 행사를 진행했는데 일반 주민들과 후원회원들이 꾸준히 참여해주었다. 1강은 ‘우리 동네 박물관 둘러보기-마을역사해설사 양성’으로 강동민, 안미정, 김슬기 연구원의 강의로 박물관 상설전시실의 유물과 기증 자료들을 직접 보면서 진행되었다. 유물 하나하나의 사연 속에 우리 민중의 애환이 깃들어 있었는데, 일제강점기의 본질을 체득하게 한 ‘대한독립쌍륙 체험실습’은 참가자들의 열띤 호응을 이끌어낸 주요한 사례 중 하나였다. 2, 3강은 ‘독립운동을 활용한 문화 콘텐츠제작 사례’로 각 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강사들이 이끌었다. 최성욱 그라피티 작가, 김은총 위세임 대표(피규어 제작), 강효숙 디자인가안채 대표, 김동우 다큐사진 작가, 노관우 음악교사, 박찬우 일러스트레이터 등이다. 강사들은 구체적이고 상세한 문화콘텐츠 제작 과정을 상세히 설명하고 질의응답 시간을 통해 참석자들과 적극 소통하였다. 친일청산과 독립운동이 과거에만 머물지 않고 새롭게 거듭나고 있는 문화콘텐츠의 사례들을 보며 참석자들은 친일청산의 의지를 한층 더 심화시켰다. 4강 ‘우리 동네 역사 문화 자원 활용하기’는 실내 강의와 답사로 구성되었고, 방학진 기획실장이 맡았다. 답사 코스는 효창원에서 이봉창의사 집터, 옛 국군 보안사 서빙고 분실터,
근로정신대 피해자 김옥순 할머니 별세
[초점] 근로정신대 피해자 김옥순 할머니 별세 10월 16일 새벽 근로정신대 피해자 김옥순 할머니가 향년 93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고인은 1929년 7월 24일 전라북도 군산에서 태어나 해망동에서 자랐다. 부친을 일찍 여읜 후 어머니, 오빠, 세 식구가 살던 중 군산국민학교 6학년 때 후지코시 근로정신대로 동원되었다. 당시 상황에 대한 할머니의 증언에 따르면 ‘6학년 때였는데 남자반과 여자반이 있었고, 한 반에 60명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한 반에서 50명을 뽑아 일본에 일하러 가야 한다는 지시가 내려와 제비뽑기를 해서 자신이 뽑혔다. 그 길로 부산으로 내려가 연락선을 타고 시모노세키에 내려 다시 기차로 도야마에 있는 후지코시공장에 갔다’고 한다. 그 후 할머니는 후지코시 사업장 내 기숙사에서 생활하면서 항공기 부품과 탄피를 만드는 일을 했다. 성인용 공작기계로 작업했기 때문에 고되고 위험한 일이었다. 해방을 맞은 후에 회사에서 마련한 배편을 타고 귀국했다. 김옥순 할머니는 2015년 4월 7일 가해자인 주식회사 후지코시를 상대로 소를 제기했다. 이 사건은 2019년 1월 18일 서울고등법원에서 원고가 승소했으나 2019년 2월 1일 피고 후지코시가 상고하여 3년 8개월째 대법원에 계류중이다. 최종 판결을 보지 못한 채 타계한 김옥순 할머니의 명복을 간절히 빈다. 현재 후지코시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1차, 2차, 3차 소송의 원고(피해 당사자) 총 23명 중에 13명이 사망하였다.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와 민족문제연구소는 앞으로도 일제강제동원 문제의 정의로운 해결을 위해 힘쓸 것을 다짐한다. • 김진영 대외협력실 선임연구원
극동민족대회 100주년 기념 학술회의
[초점] 극동민족대회 100주년 기념 학술회의 우사김규식연구회(회장 김수옥. 김규식 선생의 손녀)는 9월 30일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다목적실에서 ‘극동민족대회 100주년 기념 학술회의 – 우사 김규식과 극동민족대회’를 주최했다. 이날 학술회의는 우리 연구소와 국가보훈처, 청풍 김씨 대종회등이 후원했다. 극동민족대회는 코민테른의 주도로 1922년 1월 21일부터 2월 2일까지 모스크바와 페트로그라드에서 열린 반제국주의자대회로, 한인 독립운동가들은 파리강화회의에 이어 1921년 11월 워싱턴에서 열린 태평양회의(워싱턴회의)에서도 약소민족, 특히 한국문제가 논의되지 않은 것에 실망하고 극동민족대회에 대거 참여하였다. 대회에는 조선·중국·일본·몽골·자바·러시아의 대표 144명이 참가했는데 한인대표단은 23개 단체에서 이동휘·박진순·여운형·박헌영·김단야·임원근 등 52명이 참가하여 참가국중 최다수였고 김규식은 한인대표단의 단장이었다. 이날 학술회의에서는 ‘코민테른과 극동민족대회’(발표자 : 심지연 경남대 명예교수), ‘극동민족대회와 김규식’(발표자 : 임경석 성균관대 교수), ‘원동민족혁명단체대표회의와 홍범도’(발표자 : 반병률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가 각각 주제 발표를 했으며 서중석 성균관대 명예교수가 종합토론 좌장을 맡았다. 심지연 교수는 발표에서 ‘파리강화회의에 실망했던 독립운동가들과 조선의 젊은이들은 식민지와 약소국의 민족해방투쟁을 적극 지원했던 소비에트 러시아정부가 코민테른을 결성하자 이에 매력을 느끼고 호응’하였으며 ‘소비에트 러시아정부가 조선 등 피압박민족을 지원했던 이유는 제국주의의 간섭에서 자신의 이익과 안전을 확보하기 위한 것뿐만 아니라 세계혁명 추진이라는 공산주의 이념에 내포된 국제주의적 요소가 작용한 결과’라고 말했다. 임경석 교수는 ‘김규식은 파리강화회의와 구미위원부 경험을 통해 미국을 비롯한 서방에 더 이상 기대할 수 없다고 판단’했고 ‘동시대 다른 많은 조선 사람이 그랬듯이, 극동민족대회는 김규식에게 독립에 대한 열망과 더불어 그가 사회주의를 수용하게 하는 원동력이 됐다’고
2022 개정 교육과정 과목별 공청회(역사과)에서 수구우익단체들이 물의 일으켜
[초점] 2022 개정 교육과정 과목별 공청회(역사과)에서 수구우익단체들이 물의 일으켜 • 김종욱 기획위원 9월 30일 오후 3시, 청주 한국교원대학교 교육박물관 소강당에서 2022 개정 교육과정 과목별 공청회(역사과)가 진행됐다. 이미 이틀 전엔 9월 28일 같은 장소에서 진행된 도덕과목 공청회가 수구우익단체의 난동으로 엉망이 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후였고, 전국역사교사모임의 연대 요청에 따라 민족문제연구소에서 4명의 상근자들이 공청회에 참석하였다. 오후 2시경, 공청회가 열릴 교육박물관 앞에 도착했을 때부터 공청회 장소인 교육박물관 주위는 후끈 달아올라 있었다. ‘민주주의’란 표현 대신 ‘자유민주주’로 기재하라고 요구하는 피켓을 든 수구단체 회원, 이에 반해 ‘역사교육 과정에 대한 교육부의 부당한 개입을 중단해 주십시오’라고 적힌 피켓을 든 전국역사교사모임의 한 교사가 나란히 옆에 섰다. 공청회가 시작되기 20분 전 입장을 시작한 소강당의 분위기가 험악했다. 실내에서 마스크도 쓰지 않은 노인 한 명은 ‘자유대한민국만세!’를 외치는 한편 ‘너희들이 보릿고개를 알아?’, ‘이 빨갱이 새끼들 죄다 고소할거야’ 하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기까지 했다. 이런 소동은 공청회가 진행되는 시간 내내 계속되었다. 교육과정 개정안을 설명하는 연구진에 대해 “왜 실명을 공개하지 않느냐?”, “우리들은 교육과정 개정안 내용에 대해 관심이 없다. 질문할 시간을 보장하라!”라는 무리한 요구로 소란을 피우기 일쑤였고, 이를 제지하기 위한 교육부 관계자에게도 “너도 한패냐 이 새끼야, 저리 꺼져” 등의 발언으로 공청회 장소를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2022 역사과목에 대한 교육과정 개정안에 대한 발제가 모두 끝난 후 질의응답 시간이 있었다. 질문을 준비해서
병참기지 조선반도를 관통해 달린 성화(聖火) 계주행렬의 정체는?
흔히 성화봉송(聖火奉送)이라고 하면 무엇보다도 올림픽 대회의 사전행사 또는 개막식의 한 장면이 퍼뜩 그려지는 것이 보통이다. 언젠가 이것의 영어식 표현이 궁금하여 뒤져보았더니, ‘Olympic flame’, ‘Olympic fire’, ‘Olympic torch relay’ 등으로 사용된다는 것이다. 근데 암만봐도 여기에 ‘성스럽다’거나 ‘신성하다’거나 하는 부가적인 뜻이 담긴 것 같지는 않고 이건 단지 화염(flame), 불꽃(fire), 횃불(torch)이라거나 하는 단어로 읽혀질 뿐인데 어쩐 일로 이것의 번역어는 애당초 ‘성화(聖火)’로 둔갑하여 정착된 것인지는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아무튼 올림픽 성화의 유래는 1928년 제9회 암스테르담 대회에서 마라톤 타워(Marathon Tower)를 설치하고 이곳에 불을 밝히기 시작한 데서 비롯되었으며, 그 이후 1932년 제10회 로스엔젤레스 대회에서도 동일한 방식의 점화가 이뤄졌다고 알려진다. 그러다가 1936년 제11회 베를린 대회 때 그리스에서 채화한 불꽃을 직접 계주방식으로 옮겨와 경기장 성화대를 밝히도록 한 것이 성화봉송 릴레이의 첫 사례가 되었다. 이에 따라 1940년으로 예정된 제12회 도쿄 올림픽 당시에도 성화봉송에 대한 논의가 제기되었는데, 이에 관해서는 <매일신보> 1937년 6월 9일자에 수록된 「동경(東京)의 오륜대회(五輪大會)에 성화계주(聖火繼走)를 제창(提唱), 해로는 일본군함이 옮기라고, 희랍측 위원(希臘側 委員)의 소론(所論)」 제하의 기사를 통해 다음과 같은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와루소 6일 발] 올림픽 백림대회에서 각국에 가장 감명을 준 성화(聖火) ‘리레-’는 동경대회에서는 거리 ‘코-스’의 문제로 일단 중지가 되었는데 그 전부터 성화 ‘리레-’의 거행을 열망하여 일본조직위원회에까지 그 안을 제시하고 있던 희랍 IOC ‘호라낫치’ 씨 등은 이 희망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