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독립운동의 흔적을 사진으로 담는 김동우 작가님의 강연을 듣고
[후원회원 마당] 독립운동의 흔적을 사진으로 담는 김동우 작가님의 강연을 듣고 남경록 후원회원 갑작스레 폭우가 쏟아졌다. 지붕이 뚫어질것 같은 엄청난 빗소리. 왜 하필 민족문제연구소에 강의를 들으러 가는 날에?? 솔직히 5초 정도 망설였다. 갈까말까 하지만 그런 비를 이겨내고 남영역으로 향했다. 오늘은 사진작가 김동우 님의 “사진으로 보는 독립운동” 강의가 있는 날이다. 오랫동안 외국생활을 한 나는 그분이 출연하셨다던 ‘기아자동차 K9 CF’는 물론, ‘유키즈’라는 방송을 본 적도없다. 그래서 생소한 이름의 작가였다. 우리가 식민지배를 당하고 있을 당시 세계각지에서 독립운동이 펼쳐지고 있었다는 것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아직까지 지구 반대편인 멕시코, 쿠바 등지에 그 후손분들이 살아계신다는 것은 잘 몰랐었다. 김동우 작가님은 다니던 언론사를 그만두고 사비를 털어 멕시코, 쿠바, 인도, 중국, 미국, 일본 등에 가서 독립운동과 그 후손들의 흔적을 사진으로 담아왔다. 멕시코에서는 식당을 운영하여 독립운동에 거액을 기부한 김익주 선생, 지금은 엘 메르카도 시장이 되어버린 독립군을 훈련시켰던 숭무학교 터, 우리에게 낯선 나라인 쿠바에서는 독립운동을 하신 유명한 임천택 선생과 1929년 광주학생운동을 응원하셨던 이윤상 선생. 미국에서 만난 안창호 선생에 대한 기억이 없다는 막내 아드님 이야기. 유관순 열사의 영어 선생인 프랭크 윌리엄 선생이 한국광복군과 멀고 먼 인도에서 만난 이야기. 중국의 독립군은신처인 동굴에 새겨져 있던 태극기와 4명의 독립군 이름. 그리고 안중근 의사가 ‘악의 축’을 저격한 하얼빈역의 1번 플랫폼 이야기. 일본에서 윤봉길 의사의 흔적을 촬영하기
나의 8·15 회고
3천만이 한결같이 느낀 8·15의 감격은 또한 3천만이 제각기 별다르게 느낀 감격이기도 하다. 수만 리 이역에서 열혈의 전선에서 이날을 맞이한 이도 있으며 지옥의 철창 속에서 징용 일터에서 그 순간을 맞이한 이도 있고 온세상의 행복을 독차지한 듯한 기쁨과 용기와 정열로 맞이한 혁명기도 있는가 하면 눈앞이 캄캄하여 정신을 잃은 민족 반역자도 있다. 이제 세월은 흘러 만 1주년! 무지개 같은 희망도 아침이슬같이 사라져 차디찬 현실에 몸서리치는 사람, 천길만길의 몰락을 각오했었으나 두고 보니 그렇지 않다고 웃음 짓는 친일 반역배. 8·15 돌맞이의 기분도 역시 각인각색이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조선민족 전체가 가장 양심적이었던 순간이 곧 1년 전 그날이 아니었던가? 성스럽기까지도 하던 8·15 그날의 회고를 오늘에 더듬어 보는 것도 의미 없는 일이 아닐 것이다. – <자유신문> 편집자 드디어 옥문은 열리고 혁명동지들과 근로인 위한 새 설계 나의 8 ·15 회고(1) 전평(全評) 허성택(許成澤) 씨 나는 청주에 있는 사상범예방구금소에 있었기 때문에 역사적인 일제 항복의 방송은 듣지도 못했다. 간수들이 모여서 수군거리는 중에 ‘항복했다’는 말을 듣고 이제는 살았구나 했다. 왜적이 항복하되 9월이나 10월경 일이라고 생각했었고 그렇게 빨리 항복하리라고는 뜻하지 않았다. 우리들은 8월 17일 새벽 형무소 문앞에 몰려온 청주 시민들의 열광적 환호와 따뜻한 위로를 받으며 철창문을 나서던 그때의 광경이 지금도 눈앞에 훤하다. 일제의 강압에서 놓여 자유를 얻는다는 느낌, 자유를 얻는다는 느낌을 몸으로 직접적으로 체험한 것은
국외독립운동사진전 <空의 지금-뭉우리돌을 찾아서> 은평순회전 개최
[초점] 국외독립운동사진전 <空의 지금-뭉우리돌을 찾아서> 은평순회전 개최 • 김무성 회원사업부팀장 8월 2일(화)부터 15일(월)까지 2주간 은평 한옥마을 너나들이센터 1층 기획전시실에서 김동우 작가의 국외독립운동 사진전 <空의 지금-뭉우리돌을 찾아서>가 열렸다. 이번 전시는 은평구의 후원으로 총 3회에 걸쳐 은평구에서 열리는 순회전시다. 1차 너나들이센터(8.2~15), 2차 은평한옥마을 갤러리이오 (8.24~ 9.8), 3차 은평문화예술회관 전시실(11.25~12.8)에서 열린다. 김동우 작가는 2017년부터 국외독립운동사적지와 해외에 있는 독립운동가 후손을 인터뷰하며 사진으로 기록을 남기는 일을 “뭉우리돌을 찾아서”란 이름의 프로젝트로 진행중이다. ‘뭉우리돌’이란 둥글둥글한 큰 돌을 뜻하는 말이다. ‘백범일지’에서 서대문 형무소에 투옥된 김구에게 일본 순사는 ‘지주가 전답의 뭉우리돌을 골라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냐!’며 큰소리를 치자 백범은 이 말을 되받아치면서 ‘나는 죽어도 뭉우리돌 정신을 품고 죽겠고, 살아도 뭉우리돌의 책무를 다하리라’고 말했다고 한다. 김동우 작가는 독립운동 정신을 상징하는 단어로 사용하고 있다. 이번 <空의 지금-뭉우리돌을 찾아서> 전시는 은평구와 인연이 깊은 규운 윤기섭 선생이 교장을 역임한 신흥무관학교의 전신 신흥강습소 터를 사진으로 만나볼 수 있다. 지금은 옥수수밭으로 방치되고 있는 비어있는 공간(空)을 직접 눈으로 보고 느낄 수 있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 한편 연구소 8월 7일 ‘회원 초대의 날’ 행사로 서울서부 후원회원들이 방학진 기획실장의 안내로 국외독립운동 사진전을 관람하기도 했다.
77주년 ‘부민관 폭파 의거’ 기념식
[초점] 77주년 ‘부민관 폭파 의거’ 기념식 • 김무성 회원사업부팀장 7월 23일 오후 2시, 서울시의회 로비에서 77주년 ‘부민관 폭파 의거’ 기념식이 열렸다. 이번 기념식은 지난 2년간 코로나19로 진행하지 못하다가 사회적 거리두기가 완화되어 2년 만에 열린 기념식이다. 연구소에서 주최하고 서울특별시의회, 광복회 화성시지회가 후원하였다. 국민의례를 시작으로 부민관폭파의거 소개 영상 시청, 애국지사 후손(차영조, 이호헌, 김성진, 김태욱) 소개, 기념사(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축사(윤대성 광복회 화성시지회장), 축하 연주(지휘 유세종), 격려사(윤경로 식민 지역사박물관 관장) 그리고 기념촬영 순으로 행사가 진행되었다. 임헌영 소장은 기념사에서 의로운 거사를 기념하는 기념식에 대한 서울시의회의 무관심를 질타하면서 무엇보다 정치인은 순국선열과 애국지사의 애국심과 희생정신을 본받아야 한다고 전하며 또한 “친일파를 옹호하고 대변하는 사람은 대한민국의 국민이 아니다”라고 기념사를 했다. 축하공연으로 부민관 폭파의거의 주역 중 하나인 유만수 애국지사의 아들 유세종 지휘자와 성북청소년오케스트라(단장 정경화), 화성필하모닉오케스트라(단장 최명란)가 협주했다. 처음 만난 두 오케스트라가 유세종 지휘자의 지휘로 독립군가, 핀란디아, 압록강행진곡 세곡을 연달아 연주했고, 참석자들의 열화와 같은 호응과 앵콜을 받았다. 끝으로 윤경로 관장은 매년 독립운동사에 빛나는 부민관폭파의거 기념식을 준비하고 개최하고 있는 민족문제연구소 등 관계자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세상이 변하는 것 같지만 쉽게 변하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 변하지 않아야 하는 것은 애국지사의 독립과 해방을 위한 불굴의 의지와 용기다.”라고 마무 리 발언을 했다. 부민관 폭파의거란, 1945년 7월 24일 오후 9시경 경성부민관(현 서울특별시의회)에 서 개최한 아시아민족분격대회에서
강제동원 피해자에 대한 한국정부의 2차 가해
[후원회원 마당] 강제동원 피해자에 대한 한국정부의 2차 가해 김순흥 광주지부장 한국 외교부가 일제 강제동원피해자들의 배상을 위해 일본기업의 국내 자산을 우리나라 법원이 강제 매각할 경우 ‘외교적 마찰이 불가피할 전망’이라고 걱정(?)하면서 해결방안을 찾는다는 구실로 ‘민관협의회’를 구성한 뒤 ‘대위변제’ 방안을 유력하게 논의하고 있다고 한다. 미쓰비시를 비롯한 피고기업들은 배상은커녕 사죄도 않고 사실관계조차 인정하지 않는 상태에서 가해자들은 나 몰라라 하고 있는데 한국정부가 나서서 (일본의 참여 없이) 우리국민들의 기부금으로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돈’을 주고 문제를 덮으려고 한다. 이미 외교적 마찰을 넘어 경제전쟁중인데 생뚱맞은 소리다. 이 건을 빌미로 아베정권은 2019년 무역전쟁을 시작했고 우리는 그 전쟁을 이겨내고 있다. 그런데, 이 정권이 굽히고 들어가니 일본정부는 한술 더 뜬다. 만약에 한국에 있는 일본기업 자산의 일부라도 손실이 있게 되면 2019년 수출규제와는 비교할수 없을 만큼 보복조치를 취하겠다는 태도다. 뒤집으면, 일본정부가 속으로는 그만큼 다급해하고 있다는 말이다. 상표권과 특허권의 금액을 떠나 강제매각이라는 ‘법적 단죄의 현실화’로 입게 될 일본정부나 기업의 명예실추는 물론이고 일본정부가 그토록 부정해온 ‘역사적 죄악에 대한 정의의 평가’가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크기 때문이다. 동냥은 못줄망정 쪽박은 깨지 마라 정부의 민관협의회에 미쓰비시 근로정신대소송 지원단체인 (사)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과 소송 대리인단은 참가하지 않는다. 시민모임은 지난 7월 13일 강제동원 피해당사자인 양금덕·김성주 할머니의 의견을 들은 뒤, 14일 소송 대리인단과 긴급 좌담회를 열어 이같이 결정했다. 피해자측에서는 정부의 입장이 ‘법원의 배상판결을 이행하자는 것이 아니라
쌀 대신 빵을 먹고 나라를 지켜라
[소장자료 톺아보기 40] 쌀 대신 빵을 먹고 나라를 지켜라 – 대용식 빵 배급 홍보물 카페에서 빵 한 조각과 커피 한 잔, 혹은 패스트푸드점에서 햄버거와 콜라로 식사하는 모습은 현대인의 생활에서 그리 낯설지 않은 풍경이다. 다양한 먹거리가 넘쳐나는 지금, 오히려 빵을 주식主食으로 하는 가정도 많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밥’이라고 하면 주로 쌀과 국, 그리고 밑반찬으로 차려진 ‘밥상’을 연상한다. 먹거리가 풍부하지 않았던 시절, ‘밥이 보약’이라는 말에서 보듯 쌀은 몸을 건강하게 유지하는 약으로 여겨 제때 밥을 챙겨 먹는 생활을 강조했다. 뿐만 아니라 단지에 넣어 신神으로 모시기도 했고, 심지어 흩뿌려 점卜을 보기도 하는 등 쌀은 우리 삶의 가장 중요하고 귀한 식량이었다. 쌀이 이토록 중요한 식량이었지만, 봉건시대에는 생산량이 충분하지 않은데다가 지배 계급의 수탈로 인하여 일반 백성들이 날마다 먹기는 힘든 양곡이었다. 일제는 대한제국을 강제병합하자마자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하여 동양척식주식회사를 통해 많은 땅을 차지하였고, 그 땅을 일본인 지주로 하여금 경영하도록 했다. 일본의 쌀 공급 기지로 전락한 조선은 수확량에 비해 엄청난 양의 쌀이 일본으로 이출되었다. 특히 중일전쟁 이후 만주, 북중국 등의 식량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책으로 조선의 식량수탈은 걷잡을 수 없이 심각해졌다. 식민지조선의 백성에게 ‘쌀밥’은 그야말로 먹기 힘든 ‘귀한 식량’이 되었다. 조선총독부는 전쟁에 필요한 식량을 확보하기 위해 증산과 함께 공출에 심혈을 기울이다 전황이 악화되자, 양곡뿐만 아니라 주요 식료품의 수급도 원활하지 못해 소비를
조선혁명군, 서세명 그리고 양세봉
[후원회원 마당] 조선혁명군, 서세명 그리고 양세봉 김유 광동지부장 1931년 연말을 며칠 앞둔 12월 16일이었다. 일본 관동군이 동북 3성을 침략하고 그로부터 꼭 석 달이 지났으니 투쟁의 방향 및 목표를 다시 짜야 하겠는 것은 충분히 이해한다. 그래서 모인 서세명의 집은 무순 교외 흥경현에 있었다. 여기에서 행정부와 같은 ‘국민부’ 그리고 정치의 중심인 ‘조선혁명당’, 군 대표인 ‘조선혁명군’ 그러니까 당, 정, 군의 대표들이 모여 앞일을 논의하였다. 그러나 누가 알았으랴? 사람들 중에는 밀정이 있었으며 그들로 인하여 회의 사실이 누출, 일본군의 습격으로 참석하였던 중요 간부 모두는 봉천에 있는 일본 헌병대에 잡혀갔다. 그러나 대표들은 굴하지 아니하고 비상대책회의를 열어 공석이 된 ‘국민부’의 위원장으로 양기하를, ‘조선혁명군’의 총사령관으로 양세봉을 다시 뽑았다. 이것은 ‘흥경사건’이라고 하는 역사적 진실이다. 그것은 먼저 서세명이라는 애국자가 있었으며, 1930년대 무장운동이 봉오동 전투나 청산리 전투처럼 일회성 투쟁이 아니고 면면히 내려오는 독립운동의 일환이었다는 것, 양세봉은 전투에 승리하였을 뿐 아니라 영릉가와 통화까지 점령하고 관리하였다는 점이며, 그리고 또한 조선인으로서 나아가 ‘중국공산당’과의 최초 합작을 이루었다는 점이다. 서세명의 집은 모든 것을 말해주는 상징적 장소가 된다. 이 소용돌이의 중심에는 양세봉이 있었다. 나는 지난여름에 서울에 있는 양세봉의 무덤을 찾았었다. 그러나 ‘조선혁명군’이라는 그의 활동무대는 찾을 길이 없었다. 그저 단출하게 ‘순국선열 양세봉의 묘’라고 되어 있을 뿐이다. 평양에 있는 애국열사능에 있는 북한의 묘비에도 ‘독립군 사령’이라고만 적혀있지 ‘조선혁명군’이라는 원래 그의 소속은
병합기념일을 제치고 시정기념일이 그 자리를 차지한 까닭
일제에 의한 식민통치상황이 지속되는 동안에 자못 신성하고 남다른 의미를 지닌 것으로 취급된 어휘의 하나를 굳이 꼽자면, 그건 바로 ‘천장지구(天長地久)’의 몫이 아닐까 싶다. 이는 “하늘과 땅이 영원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표현이며, 노자(老子) <도덕경(道德經)> 제7장에 나오는“하늘은 길고 땅은 오래며, 하늘땅이 능히 길고도 오랜 것인 까닭은 스스로 살려하지 않음으로써 그런고로 능히 장생할 수 있다(天長地久 天地所以能長且久者 以其不自生 故能長生)”는 구절이 그 출전(出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 쪽에서 이 말이 특별한 대접을 받는 것은 거의 전적으로 이른바 ‘천황(天皇)’이라는 존재를 떠받들고 칭송하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는 탓이다. 이것과 흡사한 표현으로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등장하는 ‘천양무궁(天壤無窮)’이라는 것이 있으며, 이 또한 천황의 위상이 영구 불멸한 존재라는 것을 나타낼 때 곧잘 애용되고 있다. 아닌 게 아니라 일본천황의 탄생일을 지칭하는 용어가 곧 ‘천장절(天長節)’이며, 여기에는 성수무궁(聖壽無窮)을 기원하는 뜻을 담았다. 한편, 이것과 짝을 맞춰 황후의 탄생일은 ‘지구절(地久節)’로 불렀다. 명치 시기 이후 ‘천장절’과 ‘지구절’의 변천 연혁 일본에 있어서 천장절의 유래는 일찍이 광인천황(光仁天皇) 시절인 보구(寶龜) 6년(775년)에 처음 제정되었으나 그 이후에 폐지되었다가, 왕정복고(王政復古, 1867년 11월)와 더불어 명치 원년(1868년) 9월 22일(음력)로 정하여 이것이 부활되었다고 알려진다. 그리고 명치6년(1873년)부터는 태음력(太陰曆)이 폐지되고 태양력(太陽曆)이 채택됨에 따라 이를 ‘11월 3일’로 환산하여 봉축행사를 벌이게 되었다. <매일신보> 1911년 12월 6일자에는 강원도 삼척에 사는 ‘얼빠진’ 양반유생들이 천황의 은사금 하사에 감읍한 나머지 그 공덕을 길이 기리고자 삼척 죽서루 옆에 ‘천장지구’라고
우리는 어떻게 전쟁을 기억하고 과거를 청산해야 하는가
지난 7월 9일, 청소년 국제교류 <부천-가와사키 청소년역사포럼 하나>가 제43차 정기교류회를 위하여 식민지역사박물관을 방문했다. ‘부천-가와사키 청소년역사포럼’이라는 단체명에서 알 수 있듯 한국 부천시와 일본 가와사키시의 청소년이 교류하는 국제역사포럼으로, 학생 주도아래 한일 역사에 대해 배우고 교류하는 단체이다. 이번 정기 교류회는 <우리는 어떻게 전쟁을 기억하고 과거를 청산해야 하는가?>라는 주제로 일본의 전쟁범죄, 과거청산, 한국전쟁, 베트남전쟁의 사례를 함께 알아보고 동아시아 평화를 위한 한일시민연대를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다. 특히 김영환 민족문제연구소 대외협력실장의 특강과 김슬기 학예실 연구원의 상설전시실 해설이 함께 이루어져 그 깊이를 더했다. 아래에서 행사 사진과 하나 회원들의 진솔한 소감 글을 소개한다. 송준미(12기) : 이런 거 생각하면 어렵다. 전쟁범죄, 역으로 생각했을 때 전범들이 처벌을 제대로 받았다면, 현재까지 이런 문제들이 없었을까? 국가적인 처벌이, 피해자들을 위로할 수 있는 걸까?를 매번 고민하게 된다. 당시 일제시대 때 다른사람들을 괴롭혔던 사람들, 현대를 살아가는 일본인들이 다른 사람들인데, 얘네들 조상이 우릴 괴롭혔고. 이게 있다. 이게 연좌제인가? 항상 마음속에서 되묻는 것 같다. 정답을 내릴 수없는 문제라서 고민을 많이하게 된다. 근데 오늘 우리가 배운 것들이 일제시대 때 극악무도한 짓을 했어! 라고 혐오하기 위해서 욕하기 위해서 ‘하나’ 활동을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정부끼리는 사이가 나빠도, 우리끼리 교류하는 이유가 있을것 같다. 그런 부분들을 여러분들이 찾아나가시면서, 45차 교류회 때 의미가 전해졌으면 좋겠다. 박유리(25기) : 왜 우리 역사 교과서에 대해서는 강제동원에 대한 이야기가 서술되어있지
용산지역 답사 두 차례 진행
[초점] 용산지역 답사 두 차례 진행 연구소는 이순우 선생의 저작 <용산, 빼앗긴 이방인들의 땅> 출간 기념으로 용산지역답사를 7월 2일과 9일 주말인 토요일에 두 차례에 걸쳐 진행하였다. 2일, 1차 답사. 식민지역사박물관에 집결한 참가자들에게 답사 코스에 대한 개략적인 안내 설명을 하면서 답사가 시작되었다. 효창원 진입도로, 연합군포로수용소(조선부로수용소), 갈월동 굴다리, 용산 연병장(남단터), 연병정(남영동), 경룡관(성남극장)으로 답사가 진행되었으며 최근 이순우 선생이 발견한 코바야카와교 돌기둥도 직접 확인해볼 수 기회를 가졌다. 일제 강점기 해당 시설물과 건축물 등이 형성된 연원과 기능 등을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 비추어 해설이 진행될 때마다 참가자들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무더위도 잊은듯 집중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마지막으로 전쟁기념관(용산 보병 제79연대) 나무 그늘진 너른 마당에서에서 1차 답사를 마무리 하였다. 더운 날씨에도 30명이 넘는 후원회원과 일반인이 참가하였으며, 진행스태프로 임무성, 국세현, 김혜영 상근자가 함께하였다. 9일, 2차 답사는 삼각지역에서 시작하는 코스로 용산총독관저 진입도로, 경성전기 용산출장소, 용광사 터(융문당 융무당), 하자마구미 경성영업소, 조선군사령부 진입도로, 용산역, 연복사탑중창비(철도회관)를 둘러보는 시간을 가졌다. 마무리는 용산철도병원 자리에 들어선 용산역사박물관에서 하였다. 특히 박물관 직원들의 배려로 시원한 실내 1층 로비에서 이열치열 더위를 이겨낸 힘겨웠지만 보람찬 역사답사를 종료하였다. 종료 후 인근 식당에서 7~8명의 참가자와 진행스태프는 답사에 대한 소회를 나누며 더위를 식히고 귀가하였다. 2차 답사도 30명의 참가자와 임무성, 김무성, 신다희 상근자가 함께하였다. 사족. 답사 와중에 뜻하지 않은 상황이 발생하였다. 검은색 셔츠 차림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