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국세조사, 효율적인 식민통치와 전쟁수행을 위한 기초설계
[소장자료 톺아보기 36] 국세조사, 효율적인 식민통치와 전쟁수행을 위한 기초설계 전시체제기에는 병역법 실시와 배급통제를 위한 인구조사도 빈발 이순우 책임연구원 일본제국은 때때로 일반 관공리(官公吏)들의 충군애국(忠君愛國)을 이끌어내는 수단의 하나로 국가적인 축전이나 큰 행정사업을 치른 다음에는 이와 관련된 기념장(記念章)을 제정하여 이를 수행했거나 관여했던 모든 이들에게 수여하곤 했다. 이러한 종류의 기념장 발행 연혁표를 살피다 보면, 이른바 ‘국세조사(國勢調査; 인구총조사, 詮察斯, census)’라는 것이 눈에 띈다. 여기에 포함된 것으로 1921년 6월 16일에 제정된 ‘제1회 국세조사기념장(대정 9년 10월 1일)’과 1932년 7월 16일에 제정된 ‘조선 소화 5년 국세조사기념장(소화 5년 10월 1일)’, 이렇게 두 가지가 있다. 거의 10년의 격차를 두고 두 가지 다른 종류의 기념장이 존재하는 것은 무슨 까닭이었을까? 그것도 식민지 조선(朝鮮)만을 대상으로 한 별도의 기념장은 왜 만들어졌던 것일까? 1885년에 설립된 국제통계협회(國際統計協會, ISI)는 일찍이 구미 각국에서 근대적인 인구총조사가 확산되고 있는 추세를 반영하여 이에 대한 국제표준화가 필요하다는 취지에서 1900년의 같은 날을 정하여 일제히 총조사를 실시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를 계기로 대부분의 ‘문명국(文明國)’에서는 끝자리가 ‘0’인 해에 10년 주기로 국세조사를 벌이는 방식이 서서히 정착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흐름에 따라 일본제국에서도 1902년 12월 1일에 법률 제49호 「국세조사(國勢調査)에 관(關)한 법률(法律)」을 제정하였는데, 여기에는 “10개년에 매1회 국세조사를 시행하며, 제1회 국세조사는 1905년에 실시하고, 다만 제2회에 한하여 만 5개년에 해당하는 때에, 다시 그 이후에는 10년마다 시행”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최초 국세조사
소개공지(疎開空地), 미군 공습에 기겁한 일제의 방어수단 결국 패망 직전 서울의 도시공간을 할퀴어 놓다
[식민지 비망록] 소개공지(疎開空地), 미군 공습에 기겁한 일제의 방어수단 결국 패망 직전 서울의 도시공간을 할퀴어 놓다 이순우 책임연구원 벌써 40년도 더 넘은 시절의 얘기지만 시골촌놈이 어찌어찌 대학에 붙어 난생 처음 상경하면서 서울 큰고모댁에 신세를 지게 되었는데, 그때 어리숙한 친정조카의 도회지 생활이 많이 걱정되셨는지 신학기 초에 큰고모께서 이런 말씀을 귀띔해주신 기억이 또렷하다. “야야, 서울에서 길을 익힐라카믄 일단 종로가 한가운데 있고, 그 아래로 청계천로―을지로―충무로―퇴계로의 순서대로 있으니까 그것만 잘 기억해도 길찾기에 많이 도움이 될끼다. 그라고 서쪽부터 1가, 2가, 3가, 이렇게 나간데이 ―.” 아니나 다를까 큰고모님의 ‘꿀팁’은 그 이후 서울살이의 실전에 많은 보탬이 되었다. 더구나 세월이 흐르고 흘러 본디 서울내기 근처도 못가는 그 시골촌놈이 되려 서울의 옛길이나 역사공간에 대해 이런저런 글도 곧잘 쓰고 더러 현지답사의 길잡이노릇을 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모든 것이 기초 오리엔테이션을 잘 받은 덕분이 아닌가도 싶다. 그런데 여기에 등장하는 서울도심의 ‘씨줄’을 이루는 동서방향의 대로에 대해서는 일제 때 ‘소화통(昭和通)’으로 뚫린 ‘퇴계로’ 정도를 제외하면 대개 조선시대부터 존재했던 옛길이 확장 개편된 것이므로 그 유래를 확인하는 일이 어렵지는 않는 편이다. 그러나 이와는 대조적으로 ‘날줄’을 이루며 남북방향으로 놓인 간선도로의 경우에는 언제 그 길이 생겨났는지를 확인하는 일조차 그리 간단치가 않다. 예를 들어, 조선시대의 고지도를 살펴보면 서울 도성 안쪽으로 광통교를 넘나드는 남대문로의 경우라든가 육조앞길이나 동구내(洞口內, 동구안)처럼 각 궁궐 대문
“진짜 독립운동은 반제민족해방투쟁” (2) – 『문학의 길 역사의 광장』 펴낸 임헌영 소장
[인터뷰] “진짜 독립운동은 반제민족해방투쟁” (2) – 『문학의 길 역사의 광장』 펴낸 임헌영 소장 지난 1월 17일 연구소 회의실에서 임헌영 소장의 신년 인터뷰가 진행됐다. 이 자리에 <통일 뉴스> 이계환 기자와 이승현 기자가 배석하였다. 1월 25일 <통일뉴스>에 게재된 임헌영 소장 인터뷰를 두 차례에 걸쳐 전재한다. 이 자리를 빌려 전재를 허락해준 <통일뉴스>에 감사드린 다. – 편집자주 한반도 종전 평화 캠페인 공동대표들은 2020년 9월 참여연대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한반도 종전 평화 집중행동 계획을 발표하면서 한반도 평화선언 서명운동에 동참해 줄 것을 호소했다. 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한반도 종전 평화 캠페인 공동대표인 임헌영 소장. [자료사진-통일뉴스] ● 아쉽긴 하지만 선생님의 문학평론가로서의 부분은 일단 이걸 마무리하고 이제 사회활동가로서의 부분으로 넘어가고자 합니다. 이 책을 보니까 선생님께서 혁명가들을 얼마나 존경했는지 작가들 사이에서 그런 별명이 나오는데. 구중서는 구중서와 레닌의 합성어인 ‘구닌’, 백승철은 ‘백게바라’, 그리고 선생님은 ‘임스트로’. 아마 카스트로를 연상시키는 것 같아요. 선생님께서 카스트로라고 불릴 만한 이유 같은 게 있었나요. ◦ 뭐 그렇지는 않은데, 좋아했죠. 왜냐하면 바로 미국의 턱 밑에서 혁명을 일으킨다는 거는 굉장히 어렵습니다. 그걸 성공했잖아요. 그건 놀라운 세계사적인 사건입니다. 그 혁명이 일어난 게 1959년 아닙니까. 우리는 1960년대 4.19 뒤에 대학을 다니면서 제3세계에 대해 공부를 하면서 낫세르 같은 혁명도 있고 여러 가지 유형이 있는데 카스트로의 경우에는 그중 호지명과 쌍벽을 이루는, 우리
역사에서 무엇을 발견할 것인가?
[기획] 역사에서 무엇을 발견할 것인가? 팟캐스트 <역사를 발견하고 상상하라 미래를> 리뷰 최우현 대외협력실 주임연구원 보통은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나 현상을 찾아내는 것에 ‘발견’이라는 단어를 붙인다. 그렇다면 역사를 발견한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약간 생경한 느낌을 떨칠 수 없다. 역사라는 거대한 개념을 ‘발견의 대상’으로 두는 것 자체가 적절치 않아 보이기도 한다. 차라리 “역사 속에서 ‘○○’을 발견하라”고 썼다면 이견이 없었을 텐데 말이다. 지난 3월 15일 새로운 닻을 띄운 팟캐스트, <역사를 발견하고 상상하라 미래를>(이하 역발상)은 바로 이런 물음들에 착안했다. 역사는 하나로 규정될 수 없는 총체(總體) ‘역발상’은 첫 에피소드로 식민지 조선의 대중예술인 남인수(南仁樹, 1918〜1962)의 생애를 다룬다. 남인수는 1936년 19세의 나이로 데뷔, 타고난 미성(美聲)과 물 흐르는 듯한 창법, 뛰어난 외모로 대중적인 인기를 끌어 모은 식민지 조선 최고의 슈퍼스타였다. 그가 남긴 히트곡은 <애수의 소야곡>, <울며 헤어진 부산항>, <낙화유수> 등 일일이 거론하기 힘들 정도로 많으며 1962년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발표한 곡들은 250여곡(확인된 작품 기준)에 이른다. 가왕(歌王)을 넘어 ‘가황(歌皇)’이라는 칭호가 따라붙는 인물인 것이다. ‘역발상’ 또한 이 지점에 먼저 주목하며 이야기를 풀어간다. 식민지 조선에서도 “길거리를 걸어 다니기 힘들만큼”의 인기를 구가하는 스타, 남인수라는 인물이 존재했었다는 것. ‘역발상’은 남인수에 대한 민중들의 사랑, 뛰어난 실력, 문화예술인으로서의 존재사적 의의 등에 대한 설명들을 충실하게 이어간다.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으로 이어지는 전시총동원체제의 억압 속에서도 민중의 문화적 욕구와 감성이 생동하고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삼일절 행사 <103년 전 그해 우리는> 개최
[초점]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삼일절 행사 <103년 전 그해 우리는> 개최 • 김슬기 학예실 연구원 3·1운동 103년을 맞은 올해 3월 1일,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는 특별한 행사가 개최되었다. 메타버스 플랫폼 ‘게더타운’을 이용한 메타버스 식민지역사박물관 <103년 전 그해 우리는>이다. 이 행사는 코로나로 외부활동이 부담스러운 가운데서도, 3·1절의 역사적 의의를 되새기고 3·1운동의 현장과 열기를 간접 체험할 수 있도록 한다는 목적에서 마련되었다. 메타버스 식민지역사박물관은 7개의 공간으로 구성하였는데 「강의실」 “103년 전 그해 우리는”에서는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한적십자회에서 발행한 The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화보집에 게재된 3·1운동 당시 사진들을 해설과 함께 소개하였다. 참여자와의 소통을 위해 녹화가 아닌 실시간으로 4회 진행하였으며, 참여자들과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는 시간을 가지기도 했다. 「영상실」 “우리가 몰랐던 3·1운동의 진실” 에서는 민족문제연구소와 뉴스타파가 공동 제작한 ‘잊혀진 이름, 여성독립운동가’ 영상을 시청하였다. 가상공간 속 책상에 삼삼오오 모여 권기옥, 박차정, 김마리아 등 여성독립운동가에 대한 의견을 나누는 모습이 보이기도 했다. 또한 지난 2019년 식민지역사박물관이 3·1 운동 100주년을 맞아 개최한 특별전 <1919, 가만히 있으라? 3·1혁명의 주역과 탄압자들> 일부가 재공개되어 참여자들의 많은 관심을 끌었다. 박물관과 주변 시설의 실제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콘텐츠도 마련되었다. 식민지역사박물관 전시실을 가상현실로 돌아볼 수 있는 “VR전시관”, 독립운동가 묘역을 도상으로 구현한 “효창공원” 공간이 그러했다. 아울러 3·1운동에 관한 10가지 퀴즈를 모두 맞혀야 방을 탈출할 수 있는 체험형 콘텐츠 “3·1운동 퀴즈방”도 마련되었다. 이날 전체 신청자는 293명, 동시
사진엽서에 새겨진 친일파와 대한제국의 몰락
[소장자료 톺아보기] 사진엽서에 새겨진 친일파와 대한제국의 몰락 • 강동민 자료팀장 일본 황태자 한국방문기념엽서 東宮殿下御渡韓紀念 1907년 10월 16일부터 10월 20일까지 일본 황태자(후일다이쇼)가 한국 ‘시찰’을 목적으로 대한제국을 방문하자이를 기념해 발행한 엽서. 이 ‘시찰’은 통감 이토가 한국내의 반일 정서를 완화시키고 황태자 이은李垠의 일본유학을 성사시켜 볼모로 데려가기 위해 기획되었다. 일장기와 태극기를 배경으로 한국통감 이토히로부미와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의 사진이 대각으로 배치되어 있다. ‘을사늑약’, ‘정미조약’ 체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의 위세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일한합방기념’엽서, 이완용과 역대 통감 ‘한국병합’을 기념하기 위해 일제가 발행한 사진엽서. ‘욱일旭日’을 상징하는 배경 그림에 역대 한국통감과 ‘병합’의 일등 공신인 이완용의 사진이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이완용은 ‘을사늑약’부터 ‘병합조약’ 체결까지 적극 가담하여 대한제국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특히 ‘병합조약’은 총리대신 이완용이 조약안을 순종에게 보이고 각 조항을 설명한 후 이의를 제기하는 자가 없이 가결되는 형식이었는데, 이 조약안은 3대 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이미 7월 말부터 이완용을 앞세워 내각 전원의 동의를 얻도록 공작을 벌인 결과물이었다. ‘일한합방기념’엽서, 송병준과 데라우치 마사타케 통감 송병준은 친일단체 일진회가 조직될 때 핵심 인물로 총재를 지냈다. 일진회는 대한제국기 대표적인 친일단체로 일본의 조선통치를 적극 지지하고 친일 여론을 환기시키며 나아가 친일정부를 구성하여 일제의 조선지배 정책 수행에 협조할 목적으로 결성되었다. 송병준은 이완용 내각에서 농상공부대신을 지내면서 헤이그특사 사건과 관련하여 고종에게 일본에 사죄하도록 강요하는 한편 고종의 강제 퇴위에 앞장섰다. 또한 1907년 정미조약에
거물면장(巨物面長), 말단행정을 옥죄는 전시체제의 비상수단
다들 비슷한 시절을 겪었으리라 생각되지만, 소싯적에 “면장질도 알아야 하지”라는 표현을 무시로 내뱉는 동네어른들의 대화를 참으로 많이 귀동냥했던 경험이 있다. 이런 말이 언제부터 통용 되었는지가 궁금하여 옛 자료를 확인해보았더니, 1960년대의 신문지상에 “알아야 면장(面長)”이라는 구절을 아예 속담(俗談)의 하나로 치부해놓은 기사들이 심심찮게 등장했던 것이 눈에 띈다. 한참 세월이 지나고 “알아야 면장”의 어원이 바로 그 시골 면장과는 전혀 무관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 순간 적잖이 당혹감과 허탈감을 감추지 못했던 기억도 새삼스럽다. 이는 <논어(論語)> 양화편(陽貨篇)에 “공자께서 아들 백어에게 이르기를 ‘너는 「시경(詩經)」의 주남과 소남을 배웠느냐? 사람으로서 주남과 소남을 배우지 않으면 담장을 바로 마주보고 선 것과 마찬가지니라’(子謂 伯魚曰 女爲周南召南矣乎 人而不爲周南召南 其猶正牆面而立也與)”고 한데서 나온 표현이라는 것이다. 이에 따라 고문헌 자료에 불학면장(不學面墻)이라거나 불면면장(不免面墻)이라거나 하는 구절도 곧잘 사용된 흔적이 발견되며, 특히 <중종실록(中宗實錄)> 중종 13년(1518년) 7월 2일 기사에는 평안도절도사 이장생(平安道節度使 李長生)의 서장(書狀)에 ‘면면장(免面墻)’이라는 용어가 직접 등장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에 나오는 ‘면면장’은 문맥에 따라 면장면(免墻面)이나 면장벽(免墻壁)이라는 표현으로 대체되기도 한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면장(面長)이라는 존재 자체가 이 땅에 등장한 것이 대략 120년 남짓한 세월이 흐르기 전의 일이었으므로, 근대시기 이후에나 생성된 신식용어(新式用語)가 금세 속담처럼 녹아들기도 쉽지 않았던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아무튼 면(面) 제도와 관련한 자료들을 찾아보니, ‘면장’이라는 표현이 공식적으로 드러난 것은 갑오개혁(甲午改革) 직후의 시점인 것으로 드러난다. 갑오개혁 전후 시기의 면(面)
“진짜 독립운동은 반제민족해방투쟁” (1)
지난 1월 17일 연구소 회의실에서 임헌영 소장의 신년 인터뷰가 진행됐다. 이 자리에 <통일뉴스> 이계환 기자와 이승현 기자가 배석하였다. 1월 25일 <통일뉴스>에 게재된 임헌영 소장 인터뷰를 두 차례에 걸쳐 전재한다. 이 자리를 빌려 전재를 허락해준 <통일뉴스>에 감사드린다.-편집자주 이계환 : 오늘 <통일뉴스> 신년 인터뷰에 문학평론가이자 사회활동가이신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임헌영 선생님을 모셨습니다. 반갑습니다. ◦ 임헌영 : 안녕하십니까. 임헌영입니다. 지난해 말에 선생님께서 자전적 기록이라고 할 수 있는 대화록 『문학의 길 역사의 광장』을 발간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이 책에 대해 ‘나는 문학으로 역사를 성찰하고 또 역사를 문학으로 조명한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저도 이 책을 봤는데 제소감은 문자 그대로 ‘문학의 길을 통해 갔더니 역사의 광경이 나섰다’고 쉽게 표현하고 싶습니다. ◦ 예. 멋집니다. 저자의 문학적 삶을 제가 쫓아갔더니 갑자기 정치, 사회, 국제, 정세 등이 어우러진 역사의 광장, 역사의 현실과 마주친 기분이었습니다. 전자가 문학평론가로서의 삶이라면 후자는 사회활동가로서의 삶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인터뷰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눠서, 하나는 선생님의 문학평론가로서의 부분, 그리고 다른 하나는 표현이 어떨지 모르지만 사회활동가로서의 부분 이렇게 나눠볼까 합니다. ◦ 예 좋습니다. 신간 『문학의 길 역사의 광장』 먼저 문학평론가로서의 부분을 여쭤보겠습니다. 선생님 연세가 여든이 넘은 걸로 알고 있거든요. 그런데 아직도 정정하십니다. ◦ 비교적 내 연배에서는 건강에 아무 이상이 없고 운전도 하고 그래요. 그렇습니까. 『문학의 길 역사의
『재일조선인단체사전 1895~1945』 출간
[초점] 『재일조선인단체사전 1895~1945』 출간 연구소가 10년여의 작업 끝에 <재일조선인단체사전 1895~1945>를 펴냈다. 연구소가 중점사업으로 추진하고 있는 ‘일제시기 사전 편찬사업’의 일환으로, 2004년의 <일제협력단체사전국내중앙편->, 2009년 <친일인명사전>, 2017년 <일제식민통치기구사전-통감부·조선총독부편->에 이어 네 번째로 내놓은 일제시기 전문분야 사전으로 재일조선인단체를 집대성한 최초의 사전이다. <사전>은 일제시기 일본에서 발족한 재일조선인단체 551개의 연혁과 활동을 수록하고 있다. 존립 기간이 불분명하거나 짧아도 1차 사료에서 관련 인물과 활동 내용이 확인되면 수록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사전>에는 실로 다양한 성격을 가진 단체가 망라되어 있다. 일제의 통치에 저항했던 독립운동 계열의 단체가 있는가 하면 일제의 통치에 적극 협력한 친일 성향의 단체도 수록되어 있다. 설립 목적에 따라 구분하면 정치·사회·경제·문화·종교·사상·교육·노동·친목·상조단체로 구분되는 단체들이 들어가 있고, 실행주체에 따라 구분하면 청년·학생, 노동자, 실업자, 임차인 단체 등으로 구분되는 단체들이 포함되어 있다. 특히 <사전>에는 일본의 관제조직 또는 어용단체였던 각종 융화·친일 단체, 협화회·교풍회 등과 전쟁협력 단체들도 수록되어 있다. 일본인들이 주도해서 조직한 일본의 관제조직이 포함된 이유는 무엇일까. 관제단체를 통해 당시 일본의 재일조선인정책을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며, 앞으로 본격적인 연구를 통해 이들 조직 안팎에서 전개된 조선인의 대응을 밝힐필요가 있기 때문에 이러한 관제단체도 수록대상에 포함해 주요 인물과 활동, 연혁 등 기본적인 정보를 제공하고자 했던 것이다. <사전>에 나오는 인물 중에는 조선과 일본은 오가며 활동한 사람들도 있기 때문에 잘 알려진 인물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일본에서만 활동한 경우가 많아 생소한 인물들이 대부분이다. 이렇듯 <사전>은
청년훈련소가 된 학교
[소장자료 톺아보기 34] 청년훈련소가 된 학교 • 강동민 자료팀장 1. 교육강령 3대 목표 앞에서 졸업기념 사진 촬영, <전주공립농업학교 졸업앨범>, 1941년 ‘내선일체를 통한 황국신민의 육성’을 교육의 최우선 과제로 삼은 일제는 교육강령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 국체명징國體明徵(‘천황’ 중심의 국가체제를 명확히 하는 것) 내선일체內鮮一體(조선은 일본 사상을 바탕으로 하나가 되는 것) 인고단련忍苦鍛鍊(어려움을 참고 이겨내도록 수양하는 것) 2. 나무로 만든 총을 들고 군사교육훈련을 하는 국민학생들, <싸우는 조선戰ふ朝鮮>, 1945 유사시 조선 학생들을 최후 3. <월간 소국민>, 1945년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경성일보>가 발행한 국민학생용 잡지. 1943년 12월에 창간되었으며 일본어로 제작하였다. 전시국가총동원체제에 따라 전시상황에 관련된 글, 사진, 삽화가 수록되어 있다. 4. 군복 차림인 교련 교사의 모습, <예산공립농업학교 졸업앨범>, 1938년 현역 장교가 학생들의 교련 수업을 담당하여 군대식 실전 훈련을 진행하였다. 5. <학교교련교과서>, 육군성 병무과, 1943년 각종 제식 훈련의 모습을 그림과 함께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중일전쟁 이후 식민지 조선인들에게 지속적으로 ‘천황’을 위한 삶을 강요시켰던 일제는 학생들에게 이른바 ‘결전교육 실시’라는 명목으로 군사훈련을 강제하는데 이르렀다. 지금의 초등학교 4학년 이상이면 무조건 학교에서 군사교육을 받게 한 것이었다. 울려 퍼지는 발소리는 轟く轟く足音は 나라를 위해 상처 입은 お国の為に傷ついた 용사를 지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