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나치 할머니’와 홀로코스트 부정론
[기고] ‘나치 할머니’와 홀로코스트 부정론 나종석 독일사 연구자 1 우르줄라 헤드비히 하퍼베크Ursula He dwig Haverweck라는 독일 사람이 있다. 이 이름은 최근 국내 언론에서 간혹 언급되었고 해외 언론에서는 좀 더 자주 언급되었으며 그의 조국 독일에서는 제법 유명하다. 하지만 그 유명세는 그다지 명예로운 것이 아니다. 그는 소위 ‘나치 할머니Nazi-grandma’다. 1928년 독일 헤센주에서 태어난 이 노부인은 그간 독일 극우파의 확신에 찬 선전가로 활동해 왔으며 이제는 독일 극우 진영의 명망가 중 한 명이다. 그가 특히 주력해온 분야는 나치 정권의 역사적 범죄행위에 대한 부정이다. 유대인 대량 학살, 즉 홀로코스트는 존재하지 않았던 “신화”이며 아우슈비츠는 노동수용소였을 뿐 대량 가스 학살을 저지를 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게 그 주장의 요체다. 나치 할머니는 직접 우익 단체를 운영했고(독일 연방정부에 의해 2008년에 해 산되었다) 여러 극우 단체 및 인사들과 연계하며 활동하는 가운데 다양한 매체를 통해 ‘홀로코스트 부정론’을 거듭 설파해왔다. 2018년에는 극우파 군소정당인 ‘우파당Die Rechte’의 2019년 유럽의회 선거 후보로 선출되며 정치 무대로의 진출을 시도하기도 했다. 이랬으니 좋건 나쁘건 간에 사회의 주목을 받으며 나름의 명성을 얻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대가가 따르게 마련이다. 독일에서는 홀로코스트라는 역사적 사실을 부정하여 ‘공공의 평안’을 교란할 경우 형법 제130조 3항에 의거하여 ‘국민선동죄’로 처벌받을 수 있다. 법은 만인에게 평등하게 적용되기에 나치 할머니도 예외가 되지 못했다. 우르즐라 하퍼베크는 2004년 6월 바트
재한군인군속재판의 요구실현을 지원하는 모임 활동가를 만나다
[인터뷰 2] 재한군인군속재판의 요구실현을 지원하는 모임 활동가를 만나다 김선영 학예연구사 2024년 7월 6일 강제동원 피해자운동 기록사진전의 연계행사인 자료기증교류회가 개최되었다. 기증자는 재한군인군속재판의 요구실현을 지원하는 모임(2001년 결성, 이하 군군재판지원모임)의 후루카와 마사키(古川雅基) 님, 기무라 아야코(木村章子) 님, 쓰카모토 미쓰노리(塚本光則) 님이다. 강제동원 피해자 유족과 함께 꾸준히 활동 중인 세 분을 만나 군군재판 지원 계기와 그 의미에 대해 알아보았다. •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오늘 일본 간사이(關西) 지역에서 활동하시는 세 분께서 함께 민족문제연구소를 방문해 주셨는데, 한 분씩 본인 소개 부탁드립니다. 후루카와 저는 후루카와 마사키라고 합니다. 군군재판지원모임의 초기부터 사무국장을 맡았습니다. 쓰카모토 저는 쓰카모토 미쓰노리입니다. 저도 군군재판 초기부터 ‘서포터(supporter)’ 중 한 명으로 함께 하고 있습니다. 기무라 오사카에서 온 기무라 아야코라고 합니다. 저도 재판이 시작될 때부터 스스로 ‘서포터’라고 부르며 활동에 참가하고 있습니다. 어느덧 25년이 되었네요. • 군군재판지원모임에 대해서 소개해 주시겠어요? 후루카와 네. 이 모임의 목적은 군군재판에서 이기는 것입니다. 2001년 6월에 제기한 1차 소송만 해도 원고가 252명이나 되는 대규모 재판이었습니다. 야스쿠니신사 합사, 시베리아 억류, BC급 전범 등 수많은 피해자 재판이 있습니다. 재판에서 어떠한 요구를 해야 할 지 저희가 먼저 공부했습니다. 추가 제소 때는 시베리아 억류 피해자들이 많이 들어가서 총 414명이 되었습니다. 재판 결과는 굉장히 안타깝습니다만, 재판은 끝났어도 피해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으니 계속해서 원고를 지원하고 활동하자는 취지로 이 모임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 세
강제동원 피해자운동 기록사진전의 큐레이터로 참여한 야지마 츠카사 사진작가
[인터뷰 1] 강제동원 피해자운동 기록사진전의 큐레이터로 참여한 야지마 츠카사 사진작가 김혜영 학예부팀장 식민지역사박물관 1층 기획전시실에서는 7월 28일까지 <강제동원 피해자운동 기록사진전>이 열린다.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 등에 관한 특별법’ 제정 20년과 강제동원 대법원판결을 기념하고 피해자 운동을 기억하는 전시다. 전시를 준비한 사람들의 이름을 보면 낯익을 수도, 낯설 수도 있는 이름을 발견할 수 있다. 야지마 츠카사(矢嶋宰). 이번 전시에 큐레이터로 참여한 그를 만나 전시에 관한 이야기와 함께 일본인으로 한국과 독일에서 활동가 겸 사진작가로 살아온 이야기도 들어보았다. • 연구소와 박물관 후원회원분들에게 간단하게 자신에 대한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제일 어려운 질문이네요. (웃음). 제 이름이 야지마 츠카사라고 하고, 야지마(矢嶋)가 성이고, 츠카사(宰)가 이름입니다. 대학교에서는 역사를 공부했었고, 그 다음에 사진을 배워서 신문사에서 사진기자로도 있었습니다. 제가 다녔던 대학교에서는 한국을 비롯해 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온 유학생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하고 친구가 되면서 일제강점기 역사에 관심도 생겼고, 방학 때면 아시아 여러 나라를 혼자서 방문하고 일본이 그때 당시에 어떻게 했느냐? 그런 것을 찾는 답사라고 할까요? 그런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계속 역사를 테마로 하는 사진작가로 뭔가 하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그래서 2000년 8월 ‘동아시아 공동 워크숍’이라는 한일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역사 워크숍에 참가했고요. 참가자를 모집하는 광고가 일본 신문에 나왔는데 위안부 할머니들과 만날 수 있다고 되어 있어 꼭 참석하겠다고 다짐했고 그래서 처음으로 나눔의 집에 가서 할머니들하고 만났습니다. 그때는
강제동원 피해자운동 기록사진전 ‘이야기마당’
[초점] 기억을 잇는 다리 – 강제동원 피해자운동 기록사진전 ‘이야기마당’ 2024년 7월 6일, 강제동원 피해자운동 기록사진전 ‘이야기마당’이 식민지역사박물관 1층 돌모루홀에서 열렸다. 이날 행사는 ‘재한군인군속재판의 요구 실현을 지원하는 모임(아래 ‘군군재판 지원회’)이 지난 전시 개막행사에서 제안된 ‘아카이브 네트워크’에 첫 번째로 소장 자료를 기증하는 행사로 열렸다. ‘군군재판 지원회’는 2001년부터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이하 ‘보추협’)와 소중한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지원회 사무국장을 역임한 후루카와 마사키 님이 소장 관리하던 사진자료 930장과 영상 21편을 이번 기회에 기증한 것이다. 1부 행사는 김승은 식민지역사박물관 학예실장의 인사말을 시작으로 큐레이터로 참여한 야지마 츠카사 작가의 전시에 대한 소감 발표, 이희자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공동대표의 특별강연으로 진행되었다. 이희자 대표는 강제동원 피해자 운동의 역사를 기억하고 알리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참가자들에게 깊은 감동을 안겨주었다. 2부는 ‘군군재판 지원회’의 후루카와 마사키님, 기무라 아야코 님, 츠카모토 미쓰노리 님이 기증자료를 소개하며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었다. ‘군군재판 지원회’는 지난 시간 동안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한국의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인권회복을 위해 함께 싸워왔다. ‘군군재판 지원회’는 지난 활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현장에서도 자료를 기증해 주셨다. 쓰카모토 미쓰노리 님은 ‘안녕, 사요나라’ 공동체 상영회 감상 소감문과 뉴스레터 등 5점을, 기무라 아야코 님은 2010년 나카가와촌 교류사진과 영상, 집회에서 사용했던 강제동원 피해자와 유족 사진 등 63점의 소장 자료를 기증했다. ‘군군재판 지원회’가 이번에 기증한 자료는 일본과 한국에서의 만남, 김치 강습회, 다큐멘터리 ‘안녕, 사요나라’ 그리고
영남, 충청 등 권역별 회원 수련회 열어
[초점] 영남, 충청 등 권역별 회원 수련회 열어 매년 전국 단위로 진행했던 회원 수련회를 올해부터 권역별로 열고 있다. 6월 22일~23일에는 경북 김천, 성주, 고령에서 영남권 수련회를 7월 6일~7일에는 충남 천안에서 충청권 수련 회를 각각 진행했다. 영남권 수련회 첫날에서는 김천의 김단야 생가와 재령교회, 성주의 심산 김창숙 생가와 명성학교를 답사했다. 김천에서는 구자숙 후원회원이 성주에서는 김창숙 선생 손녀인 김주 여사가 각각 안내를 맡아주었다. 숙소인 가야호텔에서 친교 시간을 갖고 이튿날에는 고령군 저전리 반민특위 김상덕 위원장의 생가를 방문했다. 생가 마을의 한 어르신은 소년 김상덕과 문상직을 마을사람들이 대동계를 조직해 서울로 유학시킨 일화를 들려주었다. 수련회에 참석한 권시용 연구원은 현재 우리 연구소는 신흥무관학교 관련자 인물 DB작업을 하고 있고 그 가운데 미서훈 상태인 문상직 선생의 신흥무관학교를 비롯한 독립운동 행적의 일부를 찾았다고 밝히면서 향후 독립운동가 서훈도 적극 검토할 계획이라고 말해 참가자들의 큰 박수를 받았다. 영남권 답사는 고령읍내에 있는 김상덕 기념비와 의열단 창립 단원인 신철휴 선생의 기념비 주변을 정비하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충청권 수련회는 천안 병천에 있는 ‘1923 역사관’에서 시작했다. 이 역사관은 1923년 간토대학살의 진상규명을 위해 노력하는 김종수 목사가 운영하고 있다. 이곳 역사관에서 간토대학살의 역사와 향후 과제를 듣고 숙소인 관성리 3.1펜션에서 이용길 천안역사문화연구회장은 동학의 경전인 『동경대전』 천안 목천판 발굴 배경 그리고 동학과 천안의 연관에 대해 특강을 했다. 백범 증손자인 민주당 김용만 국회의원은
‘지나정벌개선쌍어육’ (1894.12)
[소장자료 톺아보기 60] 침략전쟁의 선전 도구로 이용된 쌍육 놀이 : 청일전쟁 ⌈지나정벌개선쌍어육⌋(1894.12) ‘쌍육(雙六. 스고로쿠)’은 주사위를 이용해 말을 움직여 승부를 가리는 일종의 보드게임이다. 한무제(漢武帝) 때 서역에서 중국으로 전해졌고 중국에서 한국과 일본으로 유입되어 백제에서도 유행했으며 일본에서는 전통놀이 ‘스고로쿠’가 되었다. 쌍육에는 바둑처럼 반상 위에 말을 배치해 승부하는 반(般)쌍육과 그림판에서 말을 움직여 제일 먼저 결승점에 도착하면 이기는 그림[繪]쌍육이 있다. 현재 반쌍육은 거의 자취를 감추고 스고로쿠라 하면 대체로 그림쌍육을 일컫는다. 쌍육은 에도 시대를 비롯해 메이지, 다이쇼, 쇼와 시대에 걸쳐 새해 첫날 온 가족이 즐기는 명절 놀이로 자리잡았다. 초기에는 불교, 출세, 가부키 등을 제재로 했고 메이지 유신 후에는 문명개화, 부국강병이 주된 테마가 되었다. 특히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등 일본의 대외 침략전쟁을 주제로 한 쌍육이 다수 만들어져 일본인의 애국심을 고취하고 전쟁 열기를 부추기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쌍육은 우리나라 윷놀이처럼 개인별, 팀별 플레이가 가능하다. 각 플레이어가 번갈아 가며 주사위를 던져 나오는 숫자만큼 말을 움직여 도착지점에 제일 먼저 도달하면 승리한다. 말 이동 방법은 위 그림처럼 시계방향으로 나선형으로 돈다. 다만 쌍육판 출발의 다음 칸처럼 ‘한 회 쉬기’ 또는 ‘나온 숫자만큼 뒤로 가기’ 등 함정 칸이 있어 게임의 묘미를 배가시킨다. 그림판은 총 33칸으로 구성되어 있고 각 칸에는 청일전쟁에 관련한 역사적 사실과 설명을 상세히 그려놓았다. 예를 들면 공사의 담판, 대원군
1년간의 ‘부천 역사 바로세우기’가 남긴 것
[후원회원마당] 1년간의 ‘부천 역사 바로세우기’가 남긴 것 박종선 부천지역위원장 경기문화재단 조사연구팀은 지난 5월 21일 오후 1시부터 3시까지 2시간가량의 작업을 통해 2018년 경기문화재단 문화유산과가 2018년 말에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여 부천역 남부 경원여객 앞에 설치했던 ‘계남면사무소 3.1운동 만세 시위지’ 안내판과 표지판을 철거하였다. 이 철거에는 경기문화재단 관계자 2명과 양경직 계남역사문화연구소 소장, 민족문제연구소 부천지부장인 나, 총 4명이 참여하였다. 이러한 철거가 진행될 수 있었던 계기는 작년 5월 12일 민족문제연구소 부천지부(이하 부천지부) 주최로 부천시의회에서 진행되었던 부천시 항일독립운동 기념 학술토론회에서 양경직 계남역사문화연구소 소장이 ‘계남면사무소 습격항쟁! 사실인가? 오류인가?’란 발제를 통해 해당 사건이 인천 계양의 장기리에서 일어난 황어장터 만세운동 일환으로 벌어진 계양면사무소 습격사건의 일부로, 4번의 보고 과정 중 세 번째 보고서에서 ‘계양면’을 ‘계남면’으로 잘못 표기하여 발생한 오류라는 것을 밝혀냈기 때문이다. 부천지부는 학술토론회 후 양경직 소장과 협의하여 발표된 내용들이 사장되지 않고 시민들이 알 수 있도록 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기 위한 자료로 활용하기 위해 발제 내용을 책으로 만들었다. 부천지부는 이 책들을 먼저 경기문화재단과 독립기념관 관계 부서 담당자에게 보냈다. 또한 부천시 행정을 책임지고 있는 부천시장을 비롯해 부천시의장, 부천시의원, 시민단체, 담당부서에 배포하였다. 그리고 미래의 주역인 학생들이 볼 수 있도록 부천 관내 130여 개 초중고 학교 내 도서관을 비롯해 16개 시립도서관에도 무료로 배포하였다. 그렇다면 ‘계남면사무소 습격항쟁’의 역사적 오류를 잘못 설명하고 있는
외교 실패가 부른 국권 피탈과 망국의 교훈
[후원회원마당] 외교 실패가 부른 국권 피탈과 망국의 교훈 130년 전 한반도에서 벌어진 청일전쟁 현장에서 보는 오늘 박진우 수원지역위원장 청나라와 일본이 조선을 자국의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 한반도에서 전쟁을 치른 지 130년. 첫 전투가 있었던 서해안에 있는 작은 섬 풍도(안산시)를 민족문제연구소가 주최하고 은평구청이 후원하는 1박 2일 답사를 다녀왔다. 영국에서 수상(11년), 외무장관과 전쟁(국방)장관 등을 역임하면서 중국과 아편전쟁까지 강행한 보수주의자 팔머스톤 경 헨리 존 템플(Viscount Palmerston, Henry John Temple)은 “우리에겐 영원한 적도 영원한 친구도 없다, 다만 영원한 것은 국가의 이익일 뿐”이라는 외교 동맹의 의미를 통해 외교의 본질을 설명했다. 일반적으로 동맹은 현재와 미래의 적의 위협을 억제하고 국가의 방위 능력을 높이기 위해 결성한다. 동맹에 참여한 국가는 동맹의 대가로 부담해야 하는 비용보다 이익이 클 때 동맹을 맺는다. 미국과 영국, 프랑스 등 12개 국가가 결성한 북대서양 조약기구(NATO, 1949)는 현재 32개 국가가 참여하고 있는데 소비에트연합을 중심으로 결성된 바르샤바조약기구(우호협력상호원조조약, 1955)에 참여했던 체코, 폴란드, 헝가리, 루마니아와 불가리아 등도 북대서양조약기구에 가입하면서 어제의 우방이 오늘의 적국이 되는 현실이다. 130년 전 풍도(안산시) 앞 바다에서 청일 양국의 함대가 격돌했고 성환(천안시)에서 육상 전투가 치열했던 청일전쟁 당시 조선의 외교는 어떻게 진행되었을까? 1882년(임오년)에 훈련도감 소속 구식 병사들이 부당한 대우(급료 미지급, 모래 섞인 쌀 지급 등)에 항의하며 봉기를 일으키자 고종은 청나라를 끌어들여 이들을 진압했다. 군란을 진압한 청나라는 조선의 내정을
혁명성지 순례: 간도 신흥학교 회억(回憶) ②
[자료소개] 혁명성지 순례: 간도 신흥학교 회억(回憶) ② 이번에 소개하는 자료는 조선민족혁명당의 선전 주간지 『앞길』에 실린 「혁명성지 순례: 간도 신흥학교 회억」이다. 이 글은 1937년 3월~5월 사이 제4호부터 제14호까지 총 11편이 연재되었으나 현재 4편의 결락본(4호, 8호, 9호, 12호)이 있어 여기서는 7편만 수록하였다. 일부 한자투는 현대어로 풀어 썼고 판독되지 않는 글자는 □로 표시하였다.―편집자 주 간도 신흥학교 회억-열혈건아 둔전제로 군산추월(羣山秋月)에 독병서(讀兵書)(10) 1919년 기미 3월초에 각 단체 대표 회의를 유하현 고산자에서 개최하던 중에서 3·1운동의 보도와 독립선언문이 내도하매 대표 전체는 환희와 흥분 속에서 성대한 축하식을 거행하고 회의를 급속 진행하여 각 단체를 일체 해소하고 한족회로 개조하며 자치행정을 전력케 하고 일방으로는 군사에 관한 최고기관으로 서간도군정부를 조직하고 군령(軍令)과 군정(軍政)을 통할하여 군사활동의 준비에 전력케 하였다. 이때야말로 실로 10년간 각고 견인하면서 분투 양성하여 오던 수천 건아의 영용한 위력을 한번 시험할 시기에 임하였다. 그리하여 비록 군비와 무기는 결핍하나 오직 적성과 열혈로 전간도의 주민들은 군사활동 준비에 일치 노력하매 그 진행은 가위 하루 천리지세(千里之勢)로 진전되었다. 3·1운동은 5천년 역사를 계승하여 오던 조국을 이족 일본에게 강탈당한 후 10년간 절치통한(切齒痛恨)하며 설욕 광복하고자 밤낮 고심하던 조선민족의 획기적 운동이라. 그리하여 내지동포의 맨손으로 적에 대항함이 장렬한 운동에 응하여 만주와 러시아의 수백만 교포들은 병력으로써 적을 섬멸하고자 무장대오 의 편성 훈련에 전력하였다. 이에 신흥학교는 간도사회의 중심이 되어 10년간 세력 양성한 천여의 군인을
망우리공원에 ‘이태원묘지 무연분묘 합장비(1936년)’가 남아있는 사연
[이 땅에 남아있는 저들의 기념물 9] 망우리공원에 ‘이태원묘지 무연분묘 합장비(1936년)’가 남아있는 사연 이른바 ‘문화주택지’의 등장으로 흔적 없이 사라진 서울 주변 공동묘지들 이순우 특임연구원 예로부터 서울의 경계가 어디까지인지를 구분 지을 때 사용하는 용어의 하나로 ‘성저십리(城底十里)’라는 표현이 있었다. 이를 달리 ‘경성십리(京城十里)’라거나 ‘도성십리(都城十里)’ 또는 ‘성외십리(城外十里)’라고 적기도 한다. 일찍이 『세종실록』 「지리지(地理志)」의 ‘경도한성부(京都漢城府)’ 대목에도 ‘성저십리’ 항목이 등장하는데, 여기에는 그 범주를 “동쪽으로 양주 송계원(楊州 松溪院, 지금의 묵동) 및 대현(大峴)에 이르며, 서쪽으로 양화도(楊花渡, 양화나루) 및 고양 덕수원(高陽 德水院)에 이르고, 남쪽으로 한강(漢江) 및 노도(露渡, 노량진)에 이른다”고 정의하고 있다. 이곳은 사산금표(四山禁標)가 적용되는 구간이며, 무엇보다도 금장(禁葬)과 금송(禁松) 등의 규칙이 엄격하게 집행되는 공간이었다. 조선 철종 때의 문헌자료인 『경조부지(京兆府誌)』에는 이에 관해 다음과 같이 정리한 구절이 포함되어 있다. 一, 도성십리(都城十里) 안에서는 투장(偸葬, 몰래 묘를 쓰는 것)을 금단(禁斷)한다. 一, 경성십리(京城十里) 내에 입장(入葬; 죽은 이의 장사를 지내는 일)을 하면 원릉(園陵)의 수목(樹木)을 훔치는 율(律)에 의해 논죄(論罪)하며, 기한을 정해 억지로 파서 옮기도록 한다. 본부(本府)에서는 송사(訟事)로 인해 발각된 것과 특교(特敎)로 적간(摘奸)하여 옮기도록 한 것 이외에 투장(偸葬) 등의 일은 군문(軍門)과 사도(四道)에 이속(移屬)하여 이를 거행토록 한다. 이러한 원칙은 조선시대를 통틀어 일관되게 유지되었고, 특히 대한제국 시기에도 도성 주변에다 밤에 몰래 묫자리를 쓰는 행위에 대한 단속이 이뤄진 흔적은 어렵잖게 확인된다. 예를 들어, 『대한매일신보』 1904년 11월 21일자에 수록된 「투장가중」 제하의 기사에는 이러한 내용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