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독립군가 복원 프로젝트 : 100년의 소리
[초점] 독립군가 복원 프로젝트 : 100년의 소리 연구소는 2017년 <항일음악 330곡집>(노동은 편저) 발행을 시작으로 항일음악회 개최(2011년, 2017년, 2018년) 등 독립군가 복원과 보급에 힘쓰고 있는 가운데 YTN 라디오가 경기도 후원으로 진행 중인 <독립군가 복원 프로젝트 : 100년의 소리>를 자문하고 있다. 올해 10편을 시작으로 내년까지 꾸준히 제작·방송할 예정으로 특히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직접 노래를 부르고 선친을 회상하여 더욱 의미를 더하고 있다. 독립군가 복원 프로젝트는 연구소 후원회원이기도 한 이은지 YTN PD가 담당하고 있다. 노래는 연구소 누리집에서 들을 수 있으며 현재까지 제작된 노래는 아래와 같다. 1편 : 국치추념가(이준식 독립기념관장), 2편 : 안중근 옥중가(함세웅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이사장), 3편 : 신흥무관학교 교가(이항증 석주 이상룡 선생 증손자), 4편 : 압록강 행진곡(김영관 한국광복군동지회 회장), 5편 : 격검가(차영조 동암 차리석 선생 아들), 6편 : 새야새야 파랑새야(정남기 동학농민군 정백현 선생 손자), 7편 : 광복군 아리랑(장병화 광복군 장이호 선생 아들) • 방학진 기획실장
독립민주시민학교 시민강좌 Ⅱ <위대한 희생, 빛나는 투쟁> 진행
[초점] 독립민주시민학교 시민강좌 Ⅱ <위대한 희생, 빛나는 투쟁> 진행 근현대사기념관은 봉오동·청산리전투 100주년을 맞아 <위대한 희생, 빛나는 투쟁>이라는 주제로 독립민주시민학교 시민강좌를 진행하였다. 이번 강좌는 독립운동가들의 인생 여정을 통해 의열투쟁의 의의를 다시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었다. 강좌는 11월 28일에서 12월 13일까지 매주 토, 일요일에 현장과 온라인 수강을 병행할 계획이었지만 1강과 2강 진행 이후 코로나19의 재확산으로 3강에서 6강은 온라인 수강만으로 변경되었다. 강의는 촬영 후 편집 영상을 홈페이지에 게시함으로써 많은 시민들이 온라인으로 쉽게 수강할 수 있도록 진행하였다. 첫 번째 강의는 대전대학교 한성민 교수의 <3개의 총탄이 만든 역사, 안중근>이란 주제로 ‘왜 이토 히로부미를 쏘았나?’라는 물음과 함께 당시 이토의 ‘만주시찰 목적’을 알 수 있는 강의였다. 2강은 <끝나지 않은 3·1운동의 전율, 강우규> 주제로 춘천교육대학의 김정인 교수가 강의하였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3·1운동의 연장선상에서 강우규의사의 의거와 함께 3·1운동의 흐름을 다시 되짚어줌으로써 우리 역사에서 3·1운동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는 강의였다. 첫 주 강의는 방역지침을 준수하기 위해 강사와 현장참여자 모두가 마스크를 쓰고 거리두기를 한 상황에서 강의를 진행하였다. 3강에서 6강은 수강생 없이 온라인 수강을 위한 강의 촬영으로 진행되었다. 3강 <위대한희생 빛나는 투쟁, 의열단>은 조한성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이 강의하였다. 의열단은 어떤 단체인가 알아보고, 특히 1923년 ‘제2차 대암살파괴계획(황옥경부폭탄사건)’의 중심에 있었던 의열단원 김시현과 밀정 황옥을 통해 의열단의 활동과 조선총독부의
한일공동기획 강제동원 문제 온라인 연속강좌 열려
[초점] 한일공동기획 강제동원 문제 온라인 연속강좌 열려 2018년 10월 30일, 한국 대법원은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일본기업에 강제동원되어 강제노동을 당한 피해자들에게 역사적인 승소판결을 내렸다. 1997년부터 일본과 한국의 법정에서 자신들의 인권회복을 위해 싸워온 피해자들이 30년에 가까운 기나긴 소송 투쟁 끝에 마침내 승리한 것이다. 연구소는 일본제철을 상대로 한 이 소송의 사무국을 맡아 강제동원 피해자들과 함께 싸워왔다. 대법원 판결은 국제인권법의 성과를 반영하여 일본제국주의의 조선에 대한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명확히 하고, 식민지배와 직결된 강제동원·강제노동이 반인도적인 불법행위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는 점에서 식민주의의 극복을 향한 첫 걸음을 내디딘 세계사적인 판결이라 할 수 있다. 아울러 냉전과 분단체제 아래에서 피해자 개인의 인권을 무시하고 박정희 군사독재가 강요한 이른바 ‘65년 체제’를 한국과 일본의 시민들이 함께 극복한 역사적인 연대투쟁의 성과이기도 하다. 이러한 2018년 대법원 판결의 역사적인 승리를 쟁취하기까지 강제동원 피해자들과 손잡고 역사정의의 실현을 위해 함께 싸워온 일본 시민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소중한 자리가 마련되었다. 연구소는 지난 10월부터 강제동원 문제에 대한 온라인 연속강좌 “강제동원의 현장에서 전후보상을 생각하다”를 진행하고 있다. 이번 강좌는 연구소와 일본의 시민단체 ‘나시노키(梨の木) 피스아카데미’가 공동으로 기획했는데, 12월까지 네 차례 진행된 강좌를 통해 한국과 일본의 참가자들은 일본에서 소송을 지원해온 일본 시민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직접 듣고 강제동원 문제의 해결을 위해 열띤 토론을 이어가고 있다. 강좌에서는 일본제철 소송, 미쓰비시 나고야 여자근로정신대 소송, 후지코시 소송이 다루어졌으며, 내년
명치신궁 성덕기념 회화관에 걸린 ‘한국병합’ 벽화그림
[소장자료 톺아보기•22] 명치신궁 성덕기념 회화관에 걸린 ‘한국병합’ 벽화그림 경술국치와 관련한 전시도록에 곧잘 등장하는 것으로 ‘경성 남대문’의 모습을 그려놓은 한장의 그림엽서가 있다. 여기에는 석축(石築)에 담쟁이덩굴이 제법 달라붙어 있는 남대문의 전경과 그 뒤로 흘러내리는 남산 자락을 배경으로 하여 집집마다 일장기가 걸린 가운데 내지인(內地人, 일본인)과 조선인이 함께 천황의 은덕이 가져다 준 평화를 기뻐하고 있는 양 거리풍경이 묘사되어 있다. 이 엽서의 위쪽에는 “명치신궁 외원 성덕기념회화관 벽화(明治神宮 外苑 聖德記念繪畫館壁畫)”라는 표시가 있고, 아래쪽에는 다시 “[77] 일한합방(日韓合邦), 츠지 히사시 필(辻永 筆), 조선각도 봉납(朝鮮各道 奉納), 명치(明治) 43년 8월 29일, 경성 남대문”이라는 구절이 기재되어 있다. 이러한 제목으로만 본다면 필시 1910년 8월 29일의 상황인 듯이 오해하기 십상이나 그 시절에는 담쟁이덩굴의 모습이 보이질 않아야 맞고, 실제로 이 그림의 초안이 그려진 것은 1925년의 일로 확인된다. 성덕기념회화관(1919.3.5일 착공, 1926.10.22일 준공)은 1912년 명치천황의 장례가 치러진 일본 도쿄 아오야마연병장(靑山練兵場) 장장전(葬場殿)이 있던 자리에 건설된 미술관으로, 죽은 천황과 황후의 유덕(遺德)을 연대순으로 묘사한 그림 80점(일본화 40점, 서양화 40점)이 이곳에 전시되었다. 그림의 제작은 당시의 화족(華族), 국가기관, 지방공공단체, 민간기업 등이 봉납하는 형태로 이뤄졌으며, 이 가운데 야마모토 카나에(山本鼎, 1882~1946)가 그린 ‘66번 서양화’ 「일영동맹(日英同盟, 1932년 완성)」은 조선은행(朝鮮銀行)이, 츠지 히사시(辻永, 1884~1974)가 그린 ‘77번 서양화’ 「일한합방(日韓合邦, 1927년 완성)」은 조선총독부가 각각 헌납한 것이었다. <경성일보> 1925년 5월 2일자에 수록된 「일한병합(日韓倂合)의 대벽화(大壁畫)를 그리다, 총독부(總督府)로부터의 위촉(委囑)으로 츠지
용산 보병 제78연대, 조선의 수부 경성을 수비하는 주력부대
조선 사람으로 일본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군인이 되어 군대생활을 하는 사람은 도합 40명이나 되지 못하는데 그 중의 한 사람인 장기형(張璣衡, 26) 씨는 지금 보병소위로 금택(金澤, 카나자와) 제9사단 제35연대 제1중대부(附)로 현금 용산주차군 안에 있더라. 씨는 경기도 김포(金浦) 사람으로 처음에 경성무관학교를 다니었으며 그 후에 일본 동경에 들어가 중앙유년학교(中央幼年學校)를 졸업하고 인하여 사관학교를 졸업한 후에 금택 제9사단에 입대하였으며 동시에 주차군의 장교로 작년 6월에 조선으로 건너왔는데 35연대에 장 소위 한 사람밖에 조선 사람이라고는 없으나 제27기에 같이 사관학교를 졸업한 사람이 17명과 전기에 졸업한 17명의 졸업생은 다 각 연대에 배치되어 입대케 하였더라. (하략) 이것은 <매일신보> 1916년 1월 14일자에 수록된 「용산연대(龍山聯隊)의 장소위(張少尉), 그의 당당한 풍채, 그의 유쾌한 생활」 제하의 기사에 등장하는 내용이다. 여기에 나오는 장기형 보병소위는 원래 일본 카나자와에 근거를 둔 제9사단 제35연대에 배속되었는데, 이 부대가 때마침 ‘조선수비(朝鮮守備, 1914.4~1916.4)’를 위해 조선주차군의 교대병력으로 파견된 상태였으므로 그 역시 덩달아 1915년 6월 이후 1년가량 용산에서 근무하는 기회를 얻게 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용산 지역 일본군 병영지의 보병연대(步兵聯隊) 주둔 연혁 장기형 소위가 근무처로 삼았던 보병 제35연대가 있던 자리는 1916년 4월에 조선주둔 2개 상주사단의 하나로 제19사단이 먼저 창설되면서 이때 예하부대로 함께 만들어진 보병 제78연대의 주둔지로 전환된다. 이곳은 1906년 이후 본격적으로 건설된 용산지역의 일본군 병영지 안에서 나중에 보병 제79연대가 추가 배치되기 직전까지는 단 하나의 보병영(步兵營)으로 존재했던
심판대에 선 안두희
이번 호에 소개하는 자료는 <신천지> 1949년 9월호에 실린 「심판대에 선 안두희」라는 글이다. 1949년 6월 26일 정오 경교장을 찾아가 백범 김구 선생을 저격한 암살범 안두희은 사건 현장에서 붙잡혀 특무대로 압송되었다. 그로부터 39일 만인 8월 3일부터 8월 6일까지 일제시대 만주국 군의(軍醫)였던 원용덕 준장을 주심(主審)으로 한 군사재판이 열려 안두희에게 종신형을 선고한다. 당시 사회부 기자였던 오소백은 참관인으로서 군사재판의 전 과정을 지켜보고 그 상황을 사실 그대로 기술하였다. 이 군사재판은 이승만 정권의 의도대로 암살범 안두희의 배후를 밝히기는커녕 오히려 안두희의 입을 빌려 백범과 한독당의 반정부적 노선을 비난하는 성토장이 되었다. 변호인은 “(김구) 선생은 5•10 선거를 반대하고 단정을 반대하고 임시정부 주석이라 하며 대한민국을 반대했다”면서 피고를 애국자로 규정하여 대한민국에서 표창하고 동시에 무죄석방을 할 것을 주장하기까지 하였다. 이에 반해 검사는 한독당이 합법적인 정당이고 백범과 한독당의 노선이 반국가적이 아님을 수세적으로 입증해야만 했다. 안두희는 재판 후 3달이 지나 특무대장 김창룡의 비호 하에 종신형에서 15년으로 감형되고 6·25가 발발하자 잔형 집행정지 처분을 받고 포병장교로 복귀하고 1953년 육군중령으로 예편한다. 반면에 당시 한독당 조직부장으로 있던 김학규는 안두희를 김구에게 소개해서 이승만 암살을 도우려 했다는 혐의로 군사재판에 넘겨져 징역 15년형을 언도받아 이승만 정권 내내 징역살이를 하게 된다. ― 편집자주 온 겨레가 다 같이 숭배했고 자기 몸처럼 아껴오던 노혁명가 백범 김구 선생이 불의의 흉탄에 쓰러지신 지 39일 만인 8월 3일부터 동 살해범
과학도의 꿈을 접고 평화통일과 인권운동에 매진하고 있는 임재근 후원회원
이번 달에 인터뷰하는 대전지부의 임재근 후원회원은 통일뉴스와 오마이뉴스 기자로서 대전지역의 여러 현안에 대해 적극 발언해왔으며 현재는 평화통일교육문화센터에서 교육연구팀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2006년 김창룡 묘 이장 추진 시민연대를 구성할 때 민족문제연구소를 알게 되었고 2016년 연구소 후원회원으로 가입하고 지부활동에도 열심히 참여했으며 2019년 ‘대전현충원 친일반민족행위자 백서’ 작업을 함께 진행했다. 임재근 회원은 2016~17년 촛불항쟁 시 61차례 131일간의 대전촛불시위에 하루도 거르지 않고 참여하며 기록사진을 찍어 <대전대전(大田大戰) 봄으로 간 촛불>(대장간, 2017)을 펴냈다. 2019년 8월에는 한국전쟁이 대전지역에 남긴 상처들을 증거하는 사진 27점을 전시한 임재근 사진특별전 〈콘크리트 기억〉을 개최했고, 같은해 대전충남민주언론시민연합이 주는 제18회 민주언론상을 수상했다. 올해에는 <한국전쟁기 대전전투에 대한 전쟁기억 재현 연구>(북한대학원대학교, 2020)라는 논문으로 북한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지난 8월에 한국전쟁·대전전투 70년 기록전 〈전쟁기억, 그리고 사라진 사람들〉을 열어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문제를 사회 이슈로 부각시켰다. 서면으로 진행된 임재근 후원회원과의 인터뷰를 정리해 보았다. 문 :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답 : 안녕하세요. 저는 대전에 있는 비영리민간단체 평화통일교육문화센터에서 교육연구팀장으로 활동하면서, 대전지역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다양한 방식의 평화통일교육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평화의 소중함과 통일의 필요성을 실내 강연으로 진행하기도 하구요. 대전형무소 터, 산내 골령골 등 우리 주변에 전쟁의 상처가 남아 있는 곳들을 다니면서 평화기행을 안내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영상과 사진을 통해서도 평화통일과 인권, 역사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학창시절의 꿈은 과학도였습니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카이스트에 진학했는데, 지금은 그 꿈을 잠시 뒤로 미루고 통일교육을 통해 통일에
기증자료
• 10월 10일 제12회 임화문학예술상 시상식이 끝난 뒤 박성모 소명출판사 대표가 우리 연구소에 ‘무운장구武運長久’ 기원 일장기 1점을 기증했다. 소명출판사는 임헌영 소장의 수상저서 <한국소설, 정치를 통매하다>를 발간한 곳이다. 이 일장기는 박 대표가 일본에서 입수하였으며 재일조선인들이 일본군에 끌려가는 동료를 위해 써준 것으로 추정된다. ‘황군만세’ ‘보답군은’ 등의 문구가 당시 우리 민족의 처지를 실감하게 한다. 다른 것과 달리 정사각형 형태인 점이 특이하다. – 안미정 자료실 주임연구원 • 10월 5일 오랫동안 교류를 이어온 오키모토 후키코(沖本富貴子) 씨가 연구소의 자료를 제공받아 집필한 저서 <오키나와전(沖繩戰)에 동원된 조선인-군인・군속을 중심으로-> 3부를 연구소와 박물관에 기증했다. • 10월 6일 미노시마 마사루(箕島勝) 씨가 최신 <아사히신문>과 <기억의 등불 희망의 하늘로- 이시카와(石川)의 전쟁과 평화> 등 총 7점을 기증했다. <기억의 등불 희망의 하늘로-이시카 와의 전쟁과 평화>에는 1931년부터 오늘날까지의 이시카와 현에서 있었던 전쟁 관련 유적과 평화운동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다. 특히 현 내의 조선인 강제연행에 관한 유적들에 대해서도 위치를 알 수 있는 지도와 함께 소개되어 있다. • 오카베 토시오(岡部壽郞) 씨가 10월 한달 동안 <도쿄신문> 기사 등 총 12점을 스캔하여 데이터로 기증했다. 이번 기증받은 기사에는 한국인 전 징용공 소송 대법원판결 이후 2년간의 흐름에 관한 내용 등이 있다. – 김진희 학예실 연구원
제14회 임종국상 시상식
[초점] 제14회 임종국상 시상식 제14회 임종국상 시상식이 11월 9일 오후 6시 서울글로벌센터 9층 국제회의장에서 회원 및 각계인사 7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올해는 코로나-19라는 감염증의 유행으로 참석인원을 제한하고 대신 연구소 페이스북으로 시상식을 생중계하였다. 시상식은 장병화 임종국선생기념사업회장의 기념사를 시작으로 이준식 독립기념관장의 축사, 임종국 선생의 일대기 영상 상영, 이민우 연구소 운영위원장의 기념사업회 경과보고, 윤경로 심사위원장의 선정경위 설명, 시상과 수상자들의 수상연설, 임헌영 연구소장의 인사말 순서로 진행됐다. 올해 수상자 후보 공모에는 학술·문화부문 아홉, 사회·언론부문 셋 등 12건이 올라왔으며, 10월 12일 심사위원회 예심을 거쳐 19일 열린 본심에서 열띤 토론 과정을 거쳐 학술부문에 강성현 성공회대 교수를, 문화부문에 박시백 화백을 수상자로 최종 선정하였다. 심사에는 심사위원장인 윤경로 전 한성대 총장을 비롯해 박찬승 한양대 교수, 장완익 변호사, 정해구 전성공회대 교수, 조재곤 서강대 연구교수 등이 참여했다. 학술부문 수상자인 강성현 성공회대 교수는, 역사사회학자로서 한국과 동아시아의 사상통제와 공안, 국가폭력과 제노사이드, 냉전과 과거청산 등을 주제로 주목해야 할 성과들을 꾸준히 내놓은 연구자이자 맹목적 반공이데올로기와 국가주의, 여성과 소수자 혐오에 맞서 맹렬히 활동해온 실천적 지식인이다. 최근에는 미국과 영국 등 해외 기관에서 일본군‘위안부’와 한국전쟁 등 근현대사 관련 중요자료를 발굴 수집하여 연구의 지평을 넓히는 데도 기여했다. 수상 저서인 <탈진실의 시대, 역사부정을 묻는다>는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중심으로 <반일종족주의>를 비롯한 한일 극우연합세력의 역사부정론을 정면으로 논파함으로써 그 허구성을 명백하게 드러내었다는 평가를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주최 한국광복군 창설 80주년 기념 강화 드라이브스루 답사
[초점]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주최 한국광복군 창설 80주년 기념 강화 드라이브스루 답사 연구소가 사무국을 맡고 있는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가 주최하고, 연구소와 서울시의 후원으로 9월 26일(토), 10월 24일(토), 25일(일) 총 세 차례의 ‘한국광복군 창설 80주년 기념답사’를 강화도에서 진행했다. 이번 답사는 올해 코로나19로 인해 답사 장소와 일정이 몇 차례 변경된 끝에 드라이브스루 답사라는 방식으로 실시하게 되었다. 당초 올해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의 답사는 한국광복군 창설 80주년을 맞아 정미의병(강화), 신흥무관학교(안동), 조선의용대(밀양)를 차례로 살펴보며 한국광복군의 원류를 되돌아보고자 했는데 코로나19로 강화도에서만 답사를 진행하게 되어 아쉬운 마음이 컸다. 드라이브스루 답사는 참석자 각자가 자기 차를 타고 답사지로 이동하며 진행했다. 방역 수칙에 따라 참가자 전원이 항상 마스크를 썼고 각 차량에는 3명 이상 타지 않도록 제한을 뒀으며, 식사도 흩어져 도시락을 먹었다. 3차례의 답사에는 총 67명(1차 17명, 2차 18명, 3차 32명)의 참가자와 스태프 3명(방학진 기획실장, 신다희 총무 부팀장, 김무성 회원사업 부팀장)이 참여했다. 답사 안내는 1차 답사에 황평우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 소장이, 2차 답사에 한정우 산마을고등학교 선생님이, 3차에 방학진 기획실장이 맡아주었다. 답사는 강화 만남의 광장에 집결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통제영학당 옛터에서 성공회 강화성당, 합일초, 강화중앙교회를 차례대로 보고, 마지막으로 연미정으로 이동하며 진행되었다. 첫 답사지인 통제영학당은 대한제국에서 세운 최초의 근대식 해군사관학교이다. 이동 중 보수 공사 중인 진해루 외벽에 그려진 강화의 역사를 표현한 그림 앞에서 강화의 지리와 역사에 대해 듣고, 강화도에서 벌어진 수차례의 민간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