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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사랑

황제를 꿈꾸는 수인(2) – 마키아벨리와 사마천, 그리고 이병주

2020년 5월 26일 1410

[돌려보기] 황제를 꿈꾸는 수인(2) – 마키아벨리와 사마천, 그리고 이병주 임헌영 소장・문학평론가 3. 사마천으로서의 이병주 이병주를 작가가 되도록 만든 건 투옥인데, 감방에서 사마천을 만난 계기는 다케다 다이준(武田泰淳)의 <사마천-사기의 세계>라고 밝힌다. 필시 일본평론사(1943)나 문예춘추사(1959) 판본 중 하나일 것이다. 이 사연은 너무나 널리 알려져 있기에 생략한다. 두 번째로 이병주가 역사와 만난 건 2차대전 중 일본 군속으로 끌려가 전몰한 동포들의 명단이 발표되던 시기인 1966년 7월, 마르크 블로크를 통해서였다. 작가는 이 인물에 감동받아 「변명」에서 이렇게 소개한다. 1939년 2차대전이 발발하자 여섯 아이의 아버지며 나이가 이미 53세를 넘은 블로크는 소르본 대학의 교수인 신분으로 일개 대위로서 자진 군에 입대했다. 불란서가 항복한 뒤 곧 항독운동에 참가, 리옹 지방 레지스탕스의 지도자로서 활약했다. 그러다가 게슈타포에 체포되어 1944년 6월 16일 나치스의 흉탄을 맞고 생을 마쳤다.((<마술사>, 한길사, 81) 이 작품도 너무나 널리 알려져 있기에 그냥 넘어가기로 하자. 그러나 정작 이병주에게 작가로서의 소명의식을 심어준 것은 역시 사마천이지만, 누가 봐도 사마천이 되기에 그는 체질적으로 너무나 세속적이고 속물적이며 현실적인 데다 두뇌회전이 지나치게 빨랐다. 그래서 초기에 그는 역사 대하소설을 쓰면서 정치사적으로는 이미 권력을 쥔 세력을 거스르지 않도록 정치사적인 기득권 세력을 인정하면서 이를 논증해 나가는 형식의 글쓰기를 시도했으며, 그 일련의 작품들은 마키아벨리즘적인 관점을 취하고 있다. 이 계열의 작품은 냉전체제의 반공의식을 그대로 드러내면서 집권층 지향적인 성향을 지닌 지식인들을 즐겨

‘반일 종족주의’론자들의 역사부정과 진실, 정의의 문제

2020년 5월 26일 1382

[돌려보기] ‘반일 종족주의’론자들의 역사부정과 진실, 정의의 문제 조시현 연구위원 이 글은 2019년 9월 25일 민족문제연구소와 일본군‘위안부’연구회가 공동 주최한 <<반일종족주의> 긴급진단 ­‘역사부정’을 논박한다> 토론회에서 발표한 토론문을 약간 수정한 것이다.   1. <반일 종족주의>에는 역사도 없고 인간에 대한 존중도 없다 이영훈 등이 낸 <반일 종족주의>라는 책은 주류적 역사해석에 대한 도발, 상식의 해체, 단언적 서술 등을 통해 명쾌하고 매력적이라는 인상과 느낌을 주는데 어느 정도 성공한 모양이다. 현재 한국의 정치지형 속에서 일정한 지지를 얻고 있는 것처럼 보이니 말이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 대부분은 그들이 약속한 실증이 아니라 불합리한 추론(non sequitur)과 논리적 비약으로 점철되어 있다. 겉으로는 전문서적으로 보일지 몰라도 학술적 뒷받침이 없는 ‘가짜’ 학문에 불과하다. 결국 대중을 겨냥한 또 하나의 역사를 부정하는 선동에 그치고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그들의 주장 가운데 상당 부분은 강제동원과 전시 성노예로서의 ‘위안부’의 부정에 할애되어 있다. 이들은 피해자의 증언을 모두 거짓말로 등치시키고 예외에 속할 일부 사례를 들어 전체의 것으로 일반화하는 오류 등을 범하고 있다. 또한 구술이 역사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은 물론 피해자의 관점과 그들의 인권에 대한 어떠한 고려도 없다. 이 책은 피해자들에게 가해진 범죄를 역사적으로 규명하고 알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은폐하고 용인하는 반역사적 시도라고 할 수 있다. 더욱이 이들의 주장은 “선진국”이라는 가치를 설정한 것 말고는 다른 모든 가치들을 부정하는 반윤리적 성격을 가진다. 이는

재일동포들, 조선통신사와 함께 타임머신을 타다

2020년 5월 26일 717

[후원회원마당] 재일동포들, 조선통신사와 함께 타임머신을 타다 조영숙 도쿄지회 총무 2019년 11월 10일 오오타(大田)민단 주최의 역사탐방 여행으로 시즈오카의 淸見寺를 찾았다. 날씨가 너무 화창해 후지산도 멋지게 보였고, 마침 이날이 일본의 새 천황 즉위 퍼레이드가 있는 날이라 여러 가지를 생각하며 여행했다. 올해는 무오독립선, 2·8독립선언, 3·1혁명,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의 뜻깊은 해이다. 그야말로 선열님들의 해이다. 선열님들의 뜻을 이어받아 동북아 평화를 만들어 나가야 할 뜻깊은 올해에 불행하게도 한일관계는 최악이라는 말을 듣고 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일어났던 그 옛날, 양국은 원한과 불신의 상처를 딛고 조선통신사를 통해 평화와 교류의 역사를 200여 년간 이어왔다. 한일관계의 틈새에 끼어 살고있는 우리 재일동포들이 어찌 그 조선통신사의 역사를 그리워하고 다시 새겨보고 싶지 않겠는가?(조선통신사와 관련한 여러 유물들이 한일 두 나라의 시민사회의 노력에 의해 2018년 유네스코의‘세계기억유산’에 등록되었다.) 淸見寺에 도착하여 안내 설명을 듣다가 우리 일행 모두가 깜짝 놀랐다. 2019년 7월 7일자 동경신문 기사의 복사본을 배부받았는데, 그 기사 내용에 한국의 문재인 대통령이 2018년 가을에 일본을 방문하여 淸見寺에서 아베 수상을 만날 계획이 있었다는 것이다.(2018년은 양국의 문화교류를 강조한 김대중 대통령과 오부치 수상이 함께 발표한 ‘한일관계 파트너십 선언’ 20주년이 되던 해이다) 그러나 그 계획은 실행되지 않았고, 이후 강제징용문제, 수출규제 강화문제, 지소미아문제 등으로 한일관계는 악화일로로 치달았다. 동경신문은 이 어려운 한일관계에 국민들의 대립감정을 진정시키고 대화를 통해 길을 찾기 바란다며 꿈으로 끝난 淸見寺에서의 한일 정상의

기증자료

2020년 5월 26일 762

[기증자료] 도쿄지회 조영숙 총무가 4월 22일 ‘승리의 무후 선열님 추모와 미래세대를 위한 기도’ 펼침막(길이 390cm)과 사진첩 6권 등을 연구소로 우송해 식민지역사박물관에 기증했다.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 정부 100년이 되는 2019년에 도쿄지회는 이를 기념하여 의미있는 기념물을 만들기로 결의했다. 그래서 서울 국립현충원 무후선열제단(無後先烈祭壇)에 모셔진, 유해를 찾지 못하고 후손이 없는 선열 130여 분을 기리는 펼침막을 제작하기로 하고 작년 한해 동안 꾸준히 작업하여 11월 17일 무후선열님들의 존함을 새겨 이 펼침막을 완성했다. ‘승리의 무후 선열님 추모와 미래세대를 위한 기도’의 글씨는 조영숙 총무를 비롯한 도쿄지회 후원회원들의 의미 있는 옷가지들을 잘라 만들었고 무후선열 130여 분의 성함은 후원회원들이 일일이 자수로 새기는 등 펼침막을 제작하는 데 온갖 정성과 노력을 기울였다. 뜻깊은 기념물을 식민지역사박물관에 기증해준 조영숙 총무와 도쿄지회 후원회원들에게 이자리를 빌어 감사드린다. • 4월 16일 wam(여성들의 전쟁과 평화 자료관)이 회보와 자체 제작한 「일본군 ‘위안소’ 지도」 등 총 10점을 기증했다. 「일본군 ‘위안소’ 지도」는 광범위한 지역에 수많은 ‘위안소’가 설치되었던 사실과 일본군의 범죄상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지도로, wam의 웹 사이트(https://wam-peace.org/ianjo/)에서도 공개하고 있다. • 4월 20일 사노 미치오(佐野通夫) 씨가 대학원 시절부터 42년 동안 연구 활동을 하면서 모은 한국 근현대사, 식민지 교육, 재일조선인, 대만에 관한 도서 및 자료 총 3186점을 기증했다. 2017년부터 4번째 기증이다. • 4월 23일 다니구치 요코(谷口洋子) 씨가 3월에 이어 강제동원, 한일교류 등의

연구소, 경기도 친일문화잔재 조사 연구용역 사업 종료

2020년 5월 26일 1186

[초점] 연구소, 경기도 친일문화잔재 조사 연구용역 사업 종료 연구소는 경기도의 친일문화잔재 조사 연구용역 사업을 2019년 10월부터 6개월 동안 진행하여 올 4월 17일에 종료하였다. 객원연구자로 참가한 조재곤 교수, 김도훈 교수와 소내 조세열 상임이사와 이순우 책임연구원 등 9명의 연구자가 참여하였다. 작년은 3·1운동 및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맞이하는 해로 경기도에서 현재까지 향유되고 있는 무·유형의 문화 속 친일잔재를 체계적으로 수집, 기록, 관리하여 지속적인 연구 교육의 콘텐츠로 개발하려는 의도하에 과업을 수행하였다. 그간 조사연구용역 사업은 착수보고 후 중간보고회, 자문회의 등을 거쳐 2020년 4월 최종보고서를 제출하였다. 문헌조사와 현장조사를 병행하며 일제잔재를 조사, 수집하였으며 기존의 잔재를 찾아 체계적으로 정리하였을 뿐만 아니라 수원, 안성의 일제식 지명 존속이나 각급 학교 교표에 남아있는 일제잔재를 찾아내는 등 새로운 성과도 일궈냈다. 1905년 러·일전쟁기부터 1945년 해방 전후기를 시간적 범위로 설정하고, 공간적 범위는 일제강점기 당시의 경기도 한정하여 유·무형의 친일문화잔재를 조사 연구하였다. 연구 보고서는 친일문화잔재 이상의 카테고리로 “일제잔재”의 개념 정리, 친일 인물과 문화계에 남겨진 그들의 행적으로 시작된다. 다음으로는 기념비, 송덕비, 기념탑, 동상 등의 기념물 및 건축물을 다루고 있다. 그 뒤로 친일인물이 작사·작곡한 교가와 교표에 남겨진 일제 잔재 등을 알리고 있다. 또한 일본식으로 변경된 지명과 특히 “영동(榮洞: 일제지명 榮町)”이라는 이름으로 현재까지도 그 잔재가 뚜렷하게 남아있는 수원과 안성의 사례를 집중적으로 조명하고 있다. 해외의 친일청산 사례를 소개하고 마지막으로 일제잔재의 청산 전망과 과제를

3대 이사장 김병상 필립보 몬시뇰 선종

2020년 5월 26일 754

[초점]  3대 이사장 김병상 필립보 몬시뇰 선종   연구소 3대 이사장을 지낸 김병상 필립보 몬시뇰이 4월 25일 오전 0시 5분 향년 88세를 일기로 선 종했다. 몬시뇰은 주교품을 받지 않은 가톨릭 고위성직자에게 부여하는 칭호다. 고인은 2003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로부터 몬시뇰 칭호를 받았다. 고인은 1977년 유신헌법 철폐를 요구하는 기도회를 주도하여 옥고를 치르는 등 반독재투쟁에 앞장섰으며, 인천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초대 위원장,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 공동대표, 동일방직사건대책위원회 위원장, 인천 굴업도 핵폐기물처리장반대대책위원회 상임대표 등을 역임하면서 한국사회의 민주화와 인권 증진에 크게 기여하였다. 1932년 충남 공주군 유구리에서 태어난 고인은 1969년 사제로 서품했다. 1948년 신학교에 입학했으나 한국전쟁과 폐결핵 투병으로 학업을 중단했고, 1963년 뒤늦게 가톨릭신학대에 들어갔다. 2008년 2월 별세한 조문기 이사장을 이어 2008년 7월부터 2013년 1월까지 연구소 이사장을 지내며 2009년 <친일인명사전> 발간과 이후 친일수구세력의 준동과 공격을 막아내는 등 역사정의 실천운동에 앞장섰다. 김 몬시뇰은 2018년 12월 회고록 ‘따뜻한 동행’을 펴냈다. 사제가 되기까지 과정을 비롯해 한국현대사 한복판에서 겪은 역정(歷程)을 담았다. 정부는 ‘대한민국 민주화와 사회적 약자 보호에 대한 공적’을 기려 국민훈장 모란장을 추서했으며 문재인 대통령도 SNS를 통해 “유신시기부터 길고 긴 민주화의 여정 내내 길잡이가 되어준 민주화운동의 대부였다”며 고인을 추모했다. 고인은 인천 서구 당하동 ‘하늘의 문 묘원’ 성직자 묘역에 잠들었다. • 방학진 기획실장

건물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식민통치의 심장, 조선총독부> 기념엽서

2020년 5월 26일 5421

[소장자료 톺아보기•15] 건물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식민통치의 심장, 조선총독부> 기념엽서 남산에 위치한 구 조선총독부 청사 남산에 위치한 구 조선총독부 청사   경복궁 근정전 앞을 가로막은 형태로 지어진 조선총독부 신청사 경복궁 근정전 앞을 가로막은 형태로 지어진 조선총독부 신청사   경성의 명소로 소개하며 유통된 조선총독부 엽서들 경성의 명소로 소개하며 유통된 조선총독부 엽서들   경복궁 앞에 공사 중인 조선총독부 신청사, 조선총독부청사신영지, ⓒ 국립중앙도서관   1910년 8월 29일, 일제는 식민통치 기관 설립을 위해 「조선총독부 설치에 관한 건(朝鮮総督府設置ニ関スル件)」을 공포, 최고 통치기구이자 수탈기구인 조선총독부를 설치하였다. 식민지 조선의 입법·사법·행정기구는 모두 조선총독에 직속되었고, 1910년 9월 30일에 칙령 354호로 「조선총독부관제」가 공포됨으로써 조선총독부의 중앙 조직이 1관방 5부제로 구성되었다. 조선총독부의 행정조직이 새롭게 구성하게 되자 총독부와 중앙기관의 청사가 필요하게 되었다. 처음에 총독부는 남산 왜성대에 위치하였던 기존의 통감부 건물을, 중앙기관의 청사는 기존의 중앙관아나 관찰부, 일본이사청 등의 건물을 사용하였다. 필요에 따라 지속적으로 청사를 증축하였는데 ‘청사의 산재(散在)로 인한 집무 불편 및 노화’를 이유로 조선총독부 신청사 건립이 추진되어 1916년 6월 26일 지진제(地鎭祭)와 함께 신청사가 착공되었다. 조선총독부 신청사는 일제 식민통치의 상징적인 건물이었기 때문에 조선 내 최고기관으로서 권위를 나타내기 위해 입지 선정부터 심혈을 기울였다. 위압적인 식민통치를 위해 조선의 중심부인 경복궁, 그것도 경복궁의 중심이자 조선왕실을 상징하는 건축물인 근정전 앞에 대규모의 건축물로 계획하여 영구적인 청사로 사용하고자 했다. 또한 도시의 중심축인

황제를 꿈꾸는 수인(1)

2020년 4월 21일 1597

[둘러보기] 황제를 꿈꾸는 수인(1) 임헌영 소장・문학평론가 1. 유폐된 황제의 사상 영하 20도라고 한다. 감방은 영락없이 냉동고다. 천장만 덩실하게 높은 이 비좁은 감방에 세 사람이 웅크리고 앉았는데, 입김이 유리창에 서려 하늘로 통하는 유일한 창구는 하얗게 두툼하게 얼어붙었다. 조금 받아놓은 물도 돌덩이처럼 얼어붙었다. 방 한구석에 놓인 변기통도 얼어붙었다. 숨을 쉴 때마다 콧구멍이 따끔따끔하다. 콧속의 털이 얼었다가 녹았다가 하는 것이다. 자연은 그 모든 위세를 총동원해서 만상을 얼어 붙이려고 기를 쓰는 모양이다. 그러나 나는 기적처럼 얼지 않고 있다.(<소설, 알렉산드리아>, 한길사 판)   이병주(왼쪽)가 1963년 12월16일 2년7개월의 수감생활 후 특사를 받아 부산교도소에서 출소할 때 모습. 이권기 경성대 일문과 명예교수 제공   나림(那林) 이병주(李炳注 : 1921.3.16.~1992.4.3.)의 인문학기행은 영하 20도 이하의 겨울날 서대문구 현저동 101번지에서 출발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종로 3가나 청량리 588처럼 지번으로만 서울의 우울을 상정했던 이곳은 조선시대에 전옥서(典獄署)였다가 감옥서(監獄署)로 바뀐(1895) 뒤, 일제에 의하여 사실상 법 집행권을 약탈(1906, 조선통감부 설치)당한 후에 경성감옥(京城監獄)이란 명칭 아래 독립운동가들을 수감시킬 목적으로 지어진 곳(1908.10.21. 개소)이다. 민족사적 수난의 상징인 경성감옥은 서대문형무소(1920), 경성형무소(1946), 서울형무소(1950), 서울교도소(1961), 서울구치소(1967)로 화류계 여성 이름 바꾸듯이 변성명하다가 1987년 11월 15일 의왕으로 이전함으로써 대부분의 건물이 허물어지고 지금은 우아하게 서대문형무소역사관(1998.11.5. 개관)이란 명칭으로 몇 동만 남아있다. 이 시설을 원형 그대로 보관했다면 실로 세계적인 명물로 유네스코문화유산 목록에 오르고도 남을 아까운 유적이건만 이를

그해 겨울 그는 왜 맨발로 남산성벽을 넘어야 했나? 고봉근 집터, 일본인 순사를 사살한 김상옥 의사의 항거지

2020년 4월 21일 2686

[식민지비망록 57] 그해 겨울 그는 왜 맨발로 남산성벽을 넘어야 했나? 고봉근 집터, 일본인 순사를 사살한 김상옥 의사의 항거지 이순우 책임연구원 서울 용산구에 있는 후암시장 삼거리에서 영락보린원(永樂保隣院, 후암동 370번지) 방향으로 이어지는 ‘후암로 28길’을 따라 260미터 남짓 걷다보면 약간 언덕길을 이루는 지형이 나타나는데, 그곳에서 옆으로 비스듬히 갈라지는 골목길(후암로 28바길)을 만날 수 있다. 이 길의 초입에는 한울연립주택이 서 있고, 이곳과 남쪽으로 등진 자리에 2층짜리 단독주택 한 채가 다소곳이 자리하고 있다. 이 집 앞에 덩그러니 서 있는 ‘김상옥 의사 항거 터’ 안내표지판은 이곳이 결코 예사롭지 않은 역사적 사건의 현장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이 자리는 ‘옛 삼판통(三坂通, 지금의 후암동) 304번지’에 해당하며, 고봉근(高奉根, 1896~1961)의 집으로 알려진 곳이다. 그 당시 돼지고기 행상을 했던 고봉근은 다름 아닌 1923년 정초에 서울은 물론 조선 천지를 들썩이게 했던 의열투쟁의 주인공 김상옥(金相玉, 1890~1923) 의사와 처남 매제(妻男 妹弟)가 되는 사이였다. 지금은 이 일대가 온통 주택가 밀집지역으로 변한 통에 어떠한 주변 지형이 둘러싸고 있는지 가늠하기가 쉽지 않지만, 일제강점기의 경성시가지도를 살펴보면 고봉근의 집은 조선은행 사택지(朝鮮銀行 舍宅地)가 넓게 포진한 지역의 외곽선에 간신히 터를 잡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더구나 이곳은 삼판통 대로변에서 죽 이어지는 평지(平地)의 막바지에 자리하고 있었으며, 그 뒤쪽으로는 곧장 남산에서 흘러내린 비탈면이 높게 치솟아 있는 것이 지형상의 특징이었다. 일찍이 1920년 여름 미국의원단(美國議員團)이 경성을 방문하는

북한언론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은 김수한 기자

2020년 4월 21일 1806

3월 12일 오후 5시, 연구소 3층 회의실에서 헤럴드경제 기자인 김수한 후원회원을 인터뷰했다. 대학 재학 중이던 2001년부터 20년 가까이 연구소를 후원해 온 김수한 회원이 작년 8월 동국대학교 북한학 박사학위를 받았는데 연구 주제가 이례적으로 김정일·김정은 정권하의 북한 언론 현황에 관련된 것이었다.몇 년 전부터 ‘기레기’라는 말이 회자될 정도로 언론 개혁과 기자들의 자질 문제가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는 요즘, 현직 기자로서 여전히 금단의 영역이면서 조심스러운 북한문제, 그것도 우리에게는 생소한 북한언론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문 : 연구소는 언제 후원회원으로 가입했나요? 답 : 제가 95학번(고려대 노어노문학과)인데 2001년 2월 군대를 제대하고 복학을 앞둔 상태에서 방학진 당시 사무국장 권유로 가입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복학 후에 연구소에서 주최하는 강좌나 소모임에 가끔 나갔었고, 2002년 봄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 열린 ‘친일 예술인과 그들의 작품전’ 전시회 때 자원봉사도 했었죠. 그 무렵 누군가 고대 인촌(김성수) 동상에 페인트를 뿌린 사건이 발생했는데, 고려대 영자신문사 기자 출신으로서 ‘큰 사건’이라는 직감이 들어 방 국장께 전화해 사건을 알리기도 했었어요. 그때 방 국장이 전화통화 직후 즉시 고대로 와서 함께 현장을 둘러보기도 했었죠.ㅠ 문 : 1997년 창단된 한국축구 국가대표 서포터즈인 ‘붉은악마’로 활동했다고 들었는데 그와 관련한 에피소드도 말씀해 주세요. 제가 1997년 8월 고려대 영자신문사 편집국장 임기를 마치고 퇴임했어요. 그때가 3학년 1학기를 마친 상태인데, 막상 평범한 학생으로 돌아오니 ‘은퇴’라는 것이 어떤 건지 체감이 좀 됐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