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시민방송에 내린 방송통신위원회의 제재는 위법, 대법원 판결
[초점] 시민방송에 내린 방송통신위원회의 제재는 위법, 대법원 판결 2019년 11월 21일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역사다큐 <백년전쟁>을 방영한 시민방송(RTV)에 대해 방송통신위원회가 내린 제재가 위법하다고 판결했다. 시민방송(RTV)은 2013년 1~3월 <백년전쟁>을 방송하여 방송통신위원회로부터 ‘관계자 징계 및 경고, 이 사실에 대한 고지방송’의 제재를 받았다. 이유는 객관성과 공정성, 그리고 사자 명예존중에 관한 의무를 위반했다는 것이다. <백년전쟁>이 공개된 후 벌어진 박근혜 정권에 의한 일련의 정치 공세의 유탄을 맞은 것이다. 시민방송은 방통위의 제재에 불복, 행정소송을 시작했다. 2014년 1심, 2015년 2심에서 시민방송은 패소했다. 행정소송을 다루는 판사가 다큐 내용의 명예훼손 여부까지 판단했고, 게다가 공식 문서인 판결문에 5.16 군사쿠데타를 ‘5.16 혁명’이라고 적기까지 했다. 판사의 정치적 입장, 역사의식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고, 그런 점이 재판에 영향을 미쳤음이 분명했다. 시민방송은 대법원에 상고했다. 대법원의 판단은 오래 걸렸다. 몇 해를 그냥 넘기다가 2019년 1월에야 전원합의체에서 판단하겠다고 나서더니 이번에 결론을 내렸다. 대법원은 원심 판결이 잘못이라고 결정했다. 대법원은 방송통신위원회는 방송 매체, 채널, 프로그램별 특성을 고려하여 심의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시민방송을 KBS나 MBC와 같은 대형 미디어와 같은 기준으로 심의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시민방송은 퍼블릭액세스(Public Access) 채널이다. 시민이 만든 프로그램을 방송하여, 시민이 수동적인 미디어 소비자가 아닌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주체로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는 것을 추구한다. 대법원은 시청자가 제작한 방송프로그램의 객관성, 공정성, 균형성을 심사할 때는 대형 미디어가 제작한 프로그램에 비해 심사기준을 완화해야 한다고 보았다.
광주·인천의 독립운동 상징 광주일고, 인천창영초 친일작곡가 교가를 바꾸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의 발원지인 광주일고는 11월 19일 오전 교내 강당에서 친일작곡가 이흥렬이 만든 교가(1953년 제작)를 대신할 새 교가 발표회를 열었다. 경과보고에 이어 교내 합창단과 동문 관현악단의 연주로 열리는 발표회에는 동창회 임원과 학생, 학부모, 교직원 등이 참석했다. 새 교가는 민중가요 ‘임을 위한 행진곡’ 작곡한 김종률 씨와 교내 공모를 통해 선정된 재학생 4명이 공동으로 작사 작곡에 참여했다. 김종률 씨는 이 학교 졸업생이다. 이승오 교장은 인사말에서 “우리 학생들이 주옥같고 의미심장한 가사를 빚어냈고, 김종률 작곡가가 힘찬 기백과 진취성을 담아 새 교가를 창작하였다. 새 교가를 부르며 새로운 100년 광주일고의 비상을 기약하자. ”고 말했다. 광주서중일고총동창회 김상곤 회장은 축사에서 “우리 후배들은 친일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한국현대사의 불행을 단호히 배격하고, 새 교가를 만드는 모든 과정에 혼연일체가 되어, 마침내 흠결 없고 자랑스러운 교가를 부르게 되었다. 일고 공동체 99년 역사의 쾌거가 아닐 수 없다.”고 치하했다. 인천에서 최초로 3·1운동이 일어난 곳으로도 알려진 창영초등학교는 11월 25일 학교 체육관에서 ‘친일 잔재 청산 새로운 교가 선포식’을 진행했다. 창영초등학교가 주최하고 창영초등학교 전교어린이회가 주관한 이번 행사에는 교직원·학생·학부모·동문회 등 240여 명이 참석했다. 창영초교는 지난 3월 교가를 개정하기 위해 교사·학부모·동문회·육군사관학교·학생대표 등 9명으로 태스크포스(TF)팀을 구성했다. 이후 4월부터 설문조사 등으로 학교 구성원들의 의견을 수렴했으며, 10월 31일 학교운영위원회에서 교가의 작곡만 개정하기로 합의했다. 이후 창영초교는 ‘그리운 금강산’을 만든 33회 졸업생 최영섭 작곡가를 섭외해 새로운 교가
근현대사기념관 <한국영화에 대한 8개의 질문> 시민강좌 진행
[초점] 근현대사기념관 <한국영화에 대한 8개의 질문> 시민강좌 진행 근현대사기념관은 한국영화 100년을 기념하여 <한국영화에 대한 8개의 질문>이란 주제로 하반기 독립민주시민학교 시민강좌를 진행하였다. 강좌는 2019년 11월 16일부터 12월 8일까지 매주 토, 일 오전 10시에 진행되었고, 강북구와 민족문제연구소의 적극적인 홍보로 강의마다 많은 시민들이 참여하여 한국영화 100년의 역사에 큰 관심을 보였다. ‘일제 강점기에 나운규와 카프는 어떻게 영화로 저항했는가?’를 시작으로 친일영화, 해방의 혼란기 영화인들, 현대 한국영화의 모습까지 다양한 주제로 한상언(한상언영화연구소 소장), 강성률(광운대학교 교수), 정영권(동국대학교 강사), 변재란(순천향대학교 교수) 등 전문성을 갖춘 강사들이 시민들에게 친숙한 영화를 주제로 강의하였다. 이번 강좌(총 8회)에서도 출석률이 높은 11명의 수강생들에게 수료증과 기념품(도서)을 전달하였다. 강좌 종료 후 강사와 수강생들이 함께 식사를 하며 <한국영화에 대한 8개의 질문> 강의 전반과 현재 영화에 대한 의견들을 교환하는 시간도 가졌다. 근현대사기념관은 2020년에도 독립민주시민학교 시민강좌를 계획하여 강북구민들과 역사와 문화에 관심 있는 일반시민에게 양질의 교육 기회를 제공할 예정이다. • 근현대사기념관 홍정희 학예연구원
한 뼘의 땅도 남김없이 철저히 파악하라 –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 자료
[소장자료 톺아보기 10] 한 뼘의 땅도 남김없이 철저히 파악하라 –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 자료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 공시 제9호, 54.2×38.8, 1915.8.10 고사告辭, 38.8×26.4, 1916.10 일제가 식민지 경영의 재정기반을 확충하기 위해 벌인 첫 과제인 토지조사사업은 강제병합 이전부터 시작되었다. 1905년 12월 통감부 설치 이후부터 토지조사사업을 위해 한국의 토지제도와 토지소유관습 등에 대한 조사와 연구를 시작했다. 1910년 1월 그 결과물인 <한국토지조사계획서>를 대한제국 탁지부에 제출했다. 이 계획서는 토지조사국 설립과 토지조사 계획에 관한 전반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를 토대로 1910년 3월 14일 「토지조사국관제」(한국칙령 23호)가 공포되고 토지조사국이 설치되었다. 명의만 대한제국 기구였지 실제는 일제가 주도한 기구였다. 토지조사국에는 총재, 부총재, 부장, 서기관, 사무관, 기사, 주사, 기수 등을 두었으며 총재는 탁지부대신이 맡았다. 또 대구·평양·전주·함흥 4곳에 출장소를 설치하고 1910년 8월 「토지조사법」을 제정하였다. 사업 실행을 위한 제도적 기틀이 마련될 무렵 강제병합이 일어나면서 토지조사사업은 자연스럽게 조선총독부로 넘어갔다. 임시토지조사국은 강제병합 직후인 1910년 9월 30일 공포된 「조선총독부임시토지조사국관제」(칙령 361호, 10월 1일 시행)에 따라 설치되었다. 이후 임시토지조사국은 1918년 사업이 종료될 때까지 토지의 조사·측량 등 토지조사사업과 관련한 일체의 사무를 총괄했다.(임시토지조사국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일제식민통치기구사전-통감부·조선총독부 편>에서 확인할 수 있다.) 토지조사사업의 핵심은 토지소유권과 경계를 조사하여 등기제도를 위한 장부를 제작하고 땅값을 조사하여 토지세를 부과하며 지형을 조사하여 전국 지형도를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각 지역별로 토지조사가 완료되면 이를 확인할 수 있게 공시한다. 연구소가
반역을 중단하라
[회원마당] 반역을 중단하라 서정주 문학제 철폐 촉구 동학농민 민중해방혁명 125년 기미3·1독립혁명 100년 8·15민족해방 광복 74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못난 짓 하고 잘난 체하던 배신자를 찬양하고 기리는 나라 이것은 시대의 반역이다 부끄럽다! 강도에게 강탈당한 나라 나라잃은 백성 자유를 빼앗기고 미래를 뺏겼으니 희망도 빼앗기고 강제로 끌려가 목숨까지 빼앗겼다 힘없어 못 끌려간 노약자들 뼛골 빠지게 지은 농사 소출은 빼앗기고 주리를 틀렸다 2천만 민중은 죄다 노예되고 3천리 강토는 통째로 감옥통 아-아! 어찌 잊으랴 압박과 설움 피울음 우는 동포 냉정하게 외면하고 개처럼 기어가며 일신은 영달했다 인도를 배신했던 이기의 달인 서정주 광복은 됐지만 일제부역 사죄않고 양심도 없었는지 반성도 없었다 침략자 앞잡이 반민족 대역죄인 처벌은 못할망정 찬양이 웬말이냐 아직도 끝나지 않은 반역 중단하라 서정주 문학제 지금 당장 철폐하라 2019.11.2. 여럿이 함께 손잡고 ‘평화의 길’ 김판수
통칭호(通稱號), 침략군대의 정체를 감추기 위한 암호명 조선주둔 일본군은 어떠한 통칭호를 사용했을까?
식민지역사박물관의 2층 진열공간에는 구겨지고 빛바랜 한 장의 일장기(日章旗)가 전시유물로 걸려 있다. 가운데 히노마루(日の丸, 붉은 원) 안에는 기(祈)라고 하였고, 호신용 부적과 같은 의미로 네 귀퉁이에 한 글자씩 무운장구(武運長久)라고 쓴 이 일장기에는 ‘지나사변출동경력(支那事變出動經歷)’이라고하여 참전일지와 같은 내역이 순서대로 빼곡히 정리되어 있는 것이 눈에 띈다. 여기에는 이 깃발의 주인인 보병군조(步兵軍曹 : 지금의 중사에 해당하는 계급) 후지모토 쇼조(藤元正三)가 중일전쟁(中日戰爭)이 터지자 1937년 8월초에 일본 미야자키현 미야코노죠시(宮崎縣 都城市 : 제23연대 부대주둔지)를 출발하여 부산과 안동현, 산해관, 북평 등지를 거치고 마침내 그해 12월초 남경(南京)을 공략하고 입성하기까지의 과정이 죽 나열되어 있다. 그 이후 시기에는 1938년 말에 이르기까지 그가 경비 또는 전투에 참여했던 각종 작전지역에 관한 내역들이 길게 이어진다. 그런데 이 깃발의 가장자리에는 그의 소속이 특이하게도 ‘稻葉部隊(舊谷部隊) 佐野部隊(岡本「鎭」部隊) 松崎隊(河喜多隊) 肥後隊’라 고 표시되어 있다. 알기 쉽게 몇 사단, 몇 연대, 몇 대대 …… 이런 식으로 소속편제의 고유명칭을 직접 표시하지 않고 지휘관의 명자(名字, 성)만 따서 무슨무슨 부대라고 부르는 것은 무슨까닭일까? 이는 전쟁상황에서 적(敵)에게 자신들의 부대에 관한 세부사항이 노출되지 않도록 방첩(防諜) 차원에서 고안된 방편이라고 알려진다. 대개는 성만 따오는 것이 원칙이지만, 동일한 성을 가진 지휘관이 복수로 존재한다면 그 다음의 이름을 더 넣어 이를 구분하기도 한다. 가령 위에서 ‘岡本「鎭」’이라고 한 것은 오카모토 연대장이 두 사람이었던 탓에, 원래의 이름 오카모토 시즈오미(岡本鎭臣)에서 한 글자를 더 취하여 이를 표시한 경우에 해당한다. 아무튼
민족문제연구소 군산·김제 답사기
<반일 종족주의>라는, 직함은 허위이고 폭력이 일상화된 대표저자와 그들의 시대착오적인 배설물로 인해 지난여름부터 심기가 불편했다. 무슨 짓을 했길래 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었는가. 그것도 아베의 경제 도발로 일본상품 불매운동이 탄력을 받는 이 시기에. 무시가 상책이지 하고 모른척했지만 불편함은 그대로 남아있었다. 조모씨가 ‘구역질나는 책’이라 하든, 홍모씨가 ‘보수 우파의 상식과 어긋나는 책’이라 하든, 그런 표현은 이 책에는 과분하게 고상했다. 자기정체성을 깨닫지 못한 채 정확하지 않은 통계수치에 수상한 목적성을 가지고 접근하는 저 곡학아세파에 대해 나는 그저 한 가지가 궁금할 따름이었다. 지금의 이 독립된 나라에서조차 자발적으로 습득한 식민사관이 저다지도 투철한 저들은, ‘일제강점기에 태어났었다면 과연 어떤 지경까지 친일을 했을까?’ 가을 초입 그들의 오류를 바로잡아 주는데 힘써 오신 허수열 교수님이 인솔하는 군산·김제 답사가 있다는 소식을 문자로 받았을 때, 기회를 놓칠세라 당장 신청했다. 살아가면서 교통사고처럼 일상공간에서 돌발적으로 만나는 사람들이 가진 태극기부대스러운 사고들. 이에 대처할 무기가 절실했는데 그들의 논리적 오류를 학문적으로 따져볼 기회를 꼭 잡아야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답사대상자로 선택받아 안내 문자가 왔을 때는 감격과 함께 뒤늦게 걱정이 시작되었다. 왜 혼자 신청했을까. 좋은 것은 혼자 보는 게 아니라고 그래서 여행만큼은 절대 혼자는 안 가던 나는 버스에 올라타기까지 용기를 내야 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여행은 시쳇말로 ‘취저’(취향저격)였다. 죄다 모르는 사람들이었지만 모두 진지하게 학습하는 분위기여서 혼자인 것이 오히려 조용히 설명에 집중할 수 있었고
‘동포가 읽을 만한 역사’를 위하여
내가 처음으로 투옥된 것은 1930년이다. 그런데 당시 내가 알았던 조선에 대한 지식이란 실로 미미하였다. […] 그러기에 예심법정에서 조선총독정치에 대해 말해보라고 판사가 권하여도 그걸 구체적으로 말할 수가 없는 지경이었다. 나는 이건 아니다고 느꼈다. 그리고 자신의 무식함이 부끄러워졌다. […] 그래서 나는 1934년 출옥과 동시에 바로 조선에 관한 공부를 시작하였다.(김두용,<조선근대사회사화>, 향토서방, 1947년, 1쪽) 일제 강점기 일본에서 노동운동과 프롤레타리아 예술운동에 투신한 김두용은 해방 직후에 출간한 책 첫머리에 이렇게 적어 놓았습니다. 이 글을 처음 접한 것은 2002년, 제가 졸업논문을 준비하는 중이었습니다. 그때는 스쳐 지나간 구절이었는데 다시 읽어보니 일본에 살아야 했던 조선인들이 ‘역사’를 갈망하게 될 동기는 이 김두용의 경우와 여전히 대동소이한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체포와 투옥이란 극단적인 경험은 누구나가 겪는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일본인 친구나 동료들의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식민지배를 변명하려는 언행에 당황하면서도 제대로 된 반론 하나 못한 경험은 이 글이 씌어져서 70년 이상이 지난 현재도 재일조선인들에게 여전히 평범한 일상입니다. 역사를 배우는 즐거움이 북돋는 지적 호기심이 아니라 자기를 부정하는 질문에 맞서기 위한 지식으로서의 ‘역사’. 재일조선인들이 우리말과 우리 역사를 대하는 태도는 어떻게 보면 한국 분들 눈에는 지나치게 비장하게 비쳐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비장할 수밖에 없는 역사에 대한 절심함이 재일조선인에게는 있는 것입니다. ‘동포가 읽을 만한 책을 쓰고 싶다.’ <해방 공간의 재일조선인사> 한국어판 서문 첫마디를 이런 문장으로 시작했던
공영방송의 책무를 잊지 않을 것
[임종국상 수상소감] 공영방송의 책무를 잊지 않을 것 KBS 밀정 제작팀 언론상 수상자 면구스러운 이야기부터 하자면, <밀정> 2부작이 여기저기서 좋은 평가를 잇달아 받고 있는 건 사실입니다. 5분짜리 영상조차도 ‘길어서’ 시청하기 힘들다는 초고속 세상이 되어버렸지만, 많은 열정을 쏟아 만든 진지한 다큐멘 터리는 그 분량에 상관없이 여전히 시청자들에게 소구력을 갖는다는 사실을 다행스럽게도 재확인했다고 할까요. 그러나 <임종국상>은 여타 평가들과는 차원을 달리한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습니다. 과연 우리가 이 묵직한 상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것인가. 계속 되뇌게 됩니다. ‘과공비례’가 되지 않기 위해 겸손하면서도 당당하게 상을 받긴 합니다만, 아무래도 이번 상은 젊은 저널리스트들이 보여준 성취에 대한 축하임과 동시에 앞으로의 행보에 대한 응원도 함께 포함된 게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힘이 나고 가슴이 따뜻해집니다. 책장에 꽂힌 <친일문학론>을 다시 꺼내보다가 임종국 선생님이 (지난해 작고한) 김윤식 선생님과 각별한 교우를 가졌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거장은, 다른 거장을 알아보는 안목을 청년시절부터 갖추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치열하게 살다 가신 두 분의 업적을 어떻게 한 두 마디로 요약할 수 있겠냐마는, 어쩌면 이들은 ‘우리의 일그러진 근대’를 탐구하는 것을 한평생 업으로 삼은 게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 스치듯 들었습니다. 저희들의 밀정 추적도 100주년이라는 축제기간에 걸맞지 않은 ‘우리의 일그러진 모습’의 일단을 가감 없이 들춰내는 일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어둡고 불편한 이야기였습니다. 그러나 역사의 엄정함이란 ‘빛과 그늘’을 모두 직시하는 데에서 출발하고,
시대를 넘어 함께한 동지의 길
[임종국상 수상소감] 시대를 넘어 함께한 동지의 길 노관우 특별상 수상자 노동은 교수의 아들 먼저 이런 뜻깊은 상을 받게 되어 아들인 저를 비롯한 온 가족들과 아버지의 제자 분들의 기쁜 마음을 담아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임종국 선생님이 남겨주신 소중한 발자취와 아버지께서 평생 근현대음악을 연구하시며 우리 민족의 뿌리를 찾고 알려 오시고자 했던 걸음걸음이 그 모양은 달라도 한 방향으로 나아가셨다고 직감합니다. 시대를 뛰어넘어 함께 손을 맞잡고 걸어오셨음을 느낍니다. 또한 일본의 경제도발에 대한 작금의 국민적 분노 속에서 그동안은 없었던 특별상을 받게 되니 더욱 각별한 감회를 느끼게 됩니다. 아버지께서 임종국상을 수상하신 다고 하니 많은 분들에게 그 타이밍이 절묘하다며 특별한 축하를 많이 받았습니다. 쌀쌀했던 날들을 촛불집회로 뜨겁게 녹여대던 3년 전 11월.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직전에 병상에서 뉴스를 보시며 하시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국민들이 들고 일어난 촛불을 보시면서 제게 ‘촛불집회에는 가봤느냐’며 당신도 몸만 괜찮으면 가보고 싶다고 아쉬워하시던 얼굴과 목소리가 더욱 생각나는 요즘입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이런 뜻깊은 상을 직접 받으셨으면 얼마나 좋았을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고 그런 아버지를 대신하는 자리가 늘 조심스럽고 어렵게만 느껴집니다. 아버지께서는 <민족음악현단계> <민족음악론> 등을 저술하시는 한편으로 대학에서 많은 학생들을 가르치시며 민족음악연구의 선구자적인 역할을 해오셨고, <노동은의 음악상자> 시리즈, <한국근대음악사> <한국음악론> 등을 통해 애국가문제, 친일음악, 뽕짝 등 우리 근대음악사의 문제점을 고발하고 알리시는데 늘 앞장서셨습니다. 임종 직전까지도 오랜 기간 작업하셨던 <항일음악 330곡집>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