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SBS 스페셜 ‘요한, 씨돌, 용현’ 편 방송
[초점] <SBS 스페셜> ‘요한, 씨돌, 용현’ 편 방송 6월 9일과 16일 2부작으로 <SBS 스페셜> ‘요한, 씨돌, 용현’ 편이 방송됐다. 1953년생인 김용현 씨는 요한(세례명)으로 살다가 자연인이 되어서는 ‘씨돌’로 살았다. 그가 처음 방송에 소개된 것은 2012년 SBS <순간포착 세상에 이런 일이>에서 ‘자연인 김씨돌’로 나오면서 부터이다. 하지만 이번 <SBS 스페셜>에서는 뜻밖의 그의 과거와 가슴 아픈 현재를 보여주었다. 과거의 그는 자신의 이름과 업적을 내세우지 않는 민주시민이었다. 6월 민주항쟁 때 그는 거리에서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쳤다. 그 과정에서 그는 87년 대선 부재자 투표에서 야당대표를 지지했다가 구타당해 숨진 정연관 상병의 억울한 죽음의 진실을 밝히는데 노력했다. 1995년에는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현장에 가장 먼저 달려와 구조를 돕기도 했다. 하지만, 사건이 해결되면 늘 홀연히 사라졌다. 1990년대 말에는 영월 동강댐 반대 운동에 앞장섰다. 2013년엔 삼척 핵발전소 반대 운동에도 참여하는 등 그의 흔적은 “너무 많아서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프로그램을 제작한 이큰별 PD는 말한다. 게다가 그는 방송 출연료 뿐 아니라 자신이 가진 돈도 전부 기부했고, 정선에서 손수 농사를 지은 수확물을 시민단체에 보내기도 했다. 김용현 씨는 자신의 시집 <오! 도라지꽃>도 연구소에 보내주었으며, 2005년 가을에는 무, 당근 그리고 노란 들꽃 한무더기와 함께 연구소를 격려하는 편지를 보내주었다. ※ 신한은행 100-033-687880 김씨돌후원회, 문의 : 리토피아 출판사 032-883-5356 • 방학진 기획실장
예외는 없다. 국가의 명령에 복종하라 – 조선징용문답朝鮮徵用問答
[소장자료 톺아보기 6] 예외는 없다. 국가의 명령에 복종하라 조선징용문답朝鮮徵用問答 <조선징용문답>표지 와 <조선징용문답> 본장 상단에 일본어를, 하단에 조선어를 번역하여 구성하였다. 이번에 소개할 자료는 1944년 2월 10일 매일신보사에서 발행한 <조선징용문답>으로 조선인의 징용에 대한 문답식 해설서다. 저자는 조선총독부 기사(技師) 미야 코이치(宮孝一)이고, 친일논리를 이론적으로 연구하여 일본정신의 구현과 내선일체의 생활화를 주장한 조선노무협회 촉탁 이영근(친일인명사전 수록자, 창씨명:上田龍男)이 번역하였다.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1938년 ‘국가총동원법’을 제정한 이후 곧바로 1939년 ‘ 국민징용령’을 공포했다. 이는 모든 인적·물적 자원을 효과적으로 전쟁에 동원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였다. 본 책자는 이러한 ‘국민징용령’의 실시에 따라 발행된 것이다. <조선징용문답>에서는 먼저 학도선등(學徒先登)이라 하여 ‘천황’을 위해 영광스럽게 징용에 임하고 생산에 힘쓸 것을 다짐하는 글부터 시작한다. 다음 내용으로 징용의 정의, 실행이유, 징용대상자와 징용방식 그리고 징용된 자의 태도에 이르기까지 징용에 관한 다양한 내용을 문답형식을 통해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징용이라는 것이 대체 무슨 소리요.”라는 첫 질문에 대해, “천황폐하를 위해서 일하는 것이며 국가의 명령에 따라서 나라에서 하라는 일을 하는 것이 징용의 근본이다”고 정의하고 있다. 또한 징용은 징벌을 당하는 것이 아닌 전시에 국민이 다해야 될 중요한 의무이니 “즐겁게 국가의 명령에 복종하라”고 제시되어 있다. 이러한 명령에 예외는 없으며 징용에 관련된 법규를 어길 경우 엄벌에 처하며 이에 대한 근거로 국민징용령관계법령을 부록으로 제시했다. “가정의 사정에 따라 징용을 받기 원하지 않는 사람의 경우”에 대한
용산 서룡사, 일진회의 배후인 일본인 승려 다케다의 활동근거지 을미사변의 대역죄인 이주회의 묘지가 이곳이 만들어진 까닭은?
[식민지비망록 48] 용산 서룡사, 일진회의 배후인 일본인 승려 다케다의 활동근거지 을미사변의 대역죄인 이주회의 묘지가 이곳이 만들어진 까닭은? 이순우 책임연구원 비록 제도의 개혁이 있었다손 치더라도 그것이 실행력을 갖고 하나의 관행으로 정착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는 것이 보통이다. 예를 들어 1895년 9월 9일에 이뤄진 태양력(太陽曆)의 도입 때도 그러했다. 이른바 ‘을미개혁’에 따라 개국 504년(1895년) 11월 16일(음력)의 다음날이 건양 원년(1896년) 1월 1일(양력)로 전환된 것이다. 이러한 변화에 맞춰 1895년 11월 3일에는 종래에 음력으로 지내던 각전궁(各殿宮; 대군주, 왕태후, 왕태자, 왕태자비)의 탄신월일(誕辰月日)을 양력에 따라 개정하였다. 그러나 아관파천 이후 김홍집 내각(金弘集 內閣)이 붕괴하고 이들의 불충(不忠)에 대한 국왕의 반감으로 이 조치는 미처 1년도 넘기지 못하고 1896년 8월 22일 다시 ‘음력’으로 환원되고 말았다. 그 이후의 기록을 살펴보았더니, 탄신경절(誕辰慶節)에 양력을 적용하는 방식을 부활한 것은 무려 12년 가량의 세월이 더 흐른 1908년 7월 22일의 일로 드러난다. <대한제국 관보> 1908년 7월 27일자에 수록된 ‘궁내부 포달(宮內府 布達) 제178호’에는 탄신경절과 기념경절의 월일이 나열되어 있는데, 그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대한제국 시기의 탄신경절 및 기념경절 (1908년 7월 제정) 이보다 약간 앞서 <대한제국 관보> 1908년 7월 4일자에 공포된 각령(閣令) 제6호 ‘관청 집무시한 개정건’에 따르면, 탄신경절과 기념경절 가운데 황제의 생일인 건원절을 비롯하여 개국기원절, 즉위예식일, 계천기원절, 묘사서고일은 공휴일로도 지정된 바 있다. 여기에 나오는 국경일 중에서 다른 것들은 그럭저럭 그 뜻을
독립운동가 이관술, 그리고 조선정판사 위조지폐사건
[기고] 독립운동가 이관술, 그리고 조선정판사 ‘위조지폐’사건 임성욱 한국외국어대학 박사 필자 임성욱 이관술을 아십니까? “나 밀양 사람 김원봉이오.” 2015년 개봉된 영화 <암살>에서 김원봉 역을 맡은 조승우의 이 대사 한 마디가 가져온 파장은 컸다. 그동안 역사학계에서만 언급되던 약산 김원봉(金元鳳, 1898~1958)에 대한 대중적 관심이 높아짐에 따라 이를 계기로 사회주의 독립운동가에 대한 재조명 및 서훈 문제가 화두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지난 6월 6일 현충일 추념식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좌우합작을 이뤄 광복군을 창설했음을 역설하고 “애국 앞에 보수와 진보가 없습니다.”라고 말하며 사회 통 합을 강조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조선의용대 대장인 김원봉을 언급하기도 했다. 사회주의 계열에 몸을 담았다는 이유로 혹은 월북했다는 이유로 그동안 한국독립운동사에서 잊히고 저평가된 김원봉과 같은 독립운동가를 재조명한다는 것은 반쪽짜리에 불과했던 민족해방운동의 역사를 온전히 회복하는 계기가 된다는 점에서 매우 환영할 일이다. 그런데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중에서 해방 직후에 김원봉보다도 더 인기가 많은 인물이 있었다. 바로 ‘울산 사람’ 이관술(李觀述, 1902~1950)이다. 이관술은 경성콤그룹 출신의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로서 일제 경찰의 검거, 고문, 투옥 등 가혹한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전국 각지를 돌아 도피, 탈출, 위장, 피신 생활을 해 가며 일제에 맞서 끝까지 투쟁을 벌이다가 해방을 맞은 몇 안 되는 인물 중 한 명이다. 1945년 8월 해방이 되자 이관술은 박헌영의 재건파 조선공산당의 핵심 인물로서 총무부장겸 재정부장으로 선출되는
세 차례의 노덕술 재판
[열전친일파 21] 세 차례의 노덕술 재판 권시용 선임연구원 1. 반민특위에 체포되다 노덕술(1899~1968)은 도망자였다. 5개월이 넘도록 지명수배를 받고 있었지만 행방은 묘연했다. 과연 경찰이 노덕술을 찾고 있는지조차 의심스러운 형편이었다. 그는 고문치사사건의 피의자였다. 사건은 이랬다. 1948년 1월 27일 장택상 수도경찰청장을 저격한 혐의로 박성근이 잡혔다. 박성근은 중부경찰서에서 물을 먹이는 등 잔악한 고문을 받다 사망했다. 경찰은 박성근이 조사를 받다 도주한 것처럼 가장하고, 사체를 자동차에 실어 1월 28일 새벽 2시경 한강 인도교와 철교 중간에 있는 얼음 구멍에 유기했다. 사건은 그렇게 묻히는 듯 했다. 6개월이 지나 사건이 드러났다. 1948년 7월 21일 수도경찰청 수사과장 노덕술, 사찰과장 최운하, 수사과 부과장 김재곤, 사찰과 부과장 박사일 등 일련의 경찰 간부들이 경무부 수사과에서 조사를 받기 시작했다. 7월 26일 경무부는 노덕술, 박사일, 김재곤, 김유하를 폭행, 능욕, 상해치사, 사체유기 등의 죄목으로 서울지방검찰청에 송치했다. 재판이 시작되었다. 문제는 가장 중요한 증거인 사체가 없다는 것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사체가 없는 살인은 입증하기가 어렵다. 이 사건도 그랬다.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증인들은 기존 증언을 번복했다. 허위 진술했다는 것이다. 현장검증에선 국방경비대가 한강을 지키고 있어 시체를 유기할 수 없고, 더구나 날씨가 추워 얼음구멍도 없었다는 증언도 나왔다. 게다가 박성근이 고문으로 죽었다는 시간에서 8시간이 지난 후에도 박성근을 감시했다는 증인이 나타나기도 했다. 사건의 실체를 흐리는 주장도 나왔다. 경무부와 수도청 사이의 알력에서 사건이 비롯되었다는, 요즘
조선병합을 담소로 해결한 능력자들, 헌병경찰 – 병합기념 조선의 경무기관
[소장자료 톺아보기 5 ] 조선병합을 담소로 해결한 능력자들, 헌병경찰 <병합기념 조선의 경무기관> 사진첩 <병합기념 조선의 경무기관>. 무단통치를 실행한 식민지 조선의 경무기관 현황과 헌병경찰들의 일상을 담은 사진첩 식민지 조선 민중을 공포에 떨게 했던 무단통치의 핵심은 칼 찬 제복 차림의 헌병경찰이었다. 1907년 고종 강제퇴위와 군대해산 후 전국적으로 항일 의병투쟁이 일어나자 이를 진압하기 위해 일제는 한국주차군헌병대로 편성되어 있던 헌병을 증강하기 위해 병력과 조선인 4천여 명을 헌병보조원으로 모집해 규모가 2배 이상 확대되었다. 주차군 헌병사령관이 경찰 수장인 경무총장을 겸하도록 하여 전체 헌병과 경찰을 통합 지휘, 의병과 민간인을 구분하지 않고 탄압할 수 있었다. 1910년 9월 조선총독부가 설치되면서 이 제도는 그대로 이어져 악명 높은 헌병경찰제도가 탄생한 것이다. 지방의 각도에도 경무부와 경찰서가 설치되어 각도 헌병대장이 도 경무부장을 겸직했다. 조선총독부가 설치된 뒤에도 헌병경찰제는 존속하여 입법·사법·행정의 모든 권력을 장악한 조선총독이 절대권력자로 군림할 수 있도록 뒷받침했다. 경찰서장이나 헌병대장은 재판절차 없이 즉결처분을 할 수 있었는데 이는 조선인들을 효과적으로 순응시키고, 항일독립운동을 가혹하고 신속하게 처벌하기 위해서였다. 경무총감부와 조선주차헌병대사령부 용산경찰서 헌병경찰 황해도경찰부의 이른바 ‘폭도토벌대’ 이들은 항일 의병을 무자비하게 탄압하였는데 1913년 조선주차군사령부가 간행한 <조선폭도토벌지>에 의하면 1906년부터 1911년까지 6년간 조선의병 1만 7천여 명을 학살했다고 나온다. 그러나 일제는 끔찍한 조선인 학살의 주역을 ‘조선병합의 공로자’로 기념하기 위해 사진첩을 발행한다. 그것이 바로 1911년 12월 30일 발행한
5월 광주의 또 다른 얼굴
[회원마당] 5월 광주의 또 다른 얼굴 김순흥 광주지부장 5·18 의인 안병하 치안감 위르겐 힌츠페터 기자 광주의 5월이 39번째 지나갔다. 암울하기만 했던 꺼풀들이 세월이 가면서 하나씩 둘씩 벗겨지기도 하고 새 꺼풀이 생겨나기도 하면서 지나가는 길목에 우리를 잠깐 돌아본다. 항쟁을 이끌다 희생된 시민군, 무고하게 희생된 수많은 사람들, 나눔의 광주라는 대동세상을 이루어 함께 했던 자랑스런 시민들과 함께 시민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애쓰다 고문을 받고 숨져간 안병하 치안감을 비롯한 수많은 민주경찰들, 목숨을 걸고 사선을 넘어와 광주의 실상을 취재해서 세계에 알린 외신기자 위르겐 힌츠페터, 그밖에도 수없이 많은 이름없는 별들, 모두 우리가 광주의 5월과 함께 기억해야 할 사람들이다. 5·18기념식에도 초청받지 못하는 안병하 치안감 5·18 당시 전남 지역의 치안총책 고 안병하 치안감(당시 경무관, 전남 경찰국장)은 학생 시위를 막는 기동대에게 특별지시를 내렸다. “공격 진압보다 방어진압을 우선하라” “시위진압 시 안전수칙을 잘 지켜라” “시위학생들에게 돌멩이를 던지지 말고 도망가는 학생들을 뒤쫓지 말라” “죄 없는 시민들이 다치지 않도록 각별히 유의하라”. 이처럼 언제나 시민의 안전을 최우선에 두었던 그는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라는 신군부의 부당한 명령을 거부하고 수많은 광주시민을 살렸다. 만약 그가 신군부의 발포명령을 거부하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더 많은 광주시민들이 죽고 다쳤을까? 신군부의 발포명령을 거부한 것 때문에 안 치안감은 신군부에 끌려가 고문을 받고 그 후유증으로 돌아가셨다. 고인이 당한 고통과 가장이 무너지면서
작은 영향력이라도 있는 사람은 사회에 바른 메시지를 표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 그래피티 작가 레오다브
[인터뷰] 작은 영향력이라도 있는 사람은 사회에 바른 메시지를 표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 그래피티 작가 레오다브 인터뷰 박광종 선임연구원 / 정리 기획실 김무성 레오다브 작가(왼쪽)와 매니저 킹아울 6월 13일 오후에 식민지역사박물관 1층 돌마루에서 독립운동가와 Love Camo Life 연작을 그리고 있는 그래피티 작가 레오다브(LEODAV.본명 : 최성욱)와 매니저 킹아울(본명 : 임진수)을 만나 인터뷰를 진행했다. 레오다브 작가는 2018년 식민지역사박물관 개관식에 참석해 임종국 선생 드로잉 작업을 했었다. 문 : 올해는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입니다. 작가님이 이번 삼일절에 김구 선생의 초상화를 그리는 동영상을 인상깊게 봤습니다. 어떻게 100주년 기념사업에 참여하게 되었나요 답 : 레오다브(이하 레오) | 제가 2013년도부터 독립운동가 시리즈를 계속하고 있었는데, 그동안 쌓아온 작품들을 보고 아무래도 100주년이다 보니까 광화문에서 아트웍을 라이브 페인팅으로 해달라는 제의가 들어왔어요. 김구 선생님 눈과 손가락만 이용해서 재미있게 100주년을 표현하면 어떨까하는 생각은 이전부터 계속하고 있었는데 제안이 들어와서 선뜻 응하게 되었습니다. 문 : 정부청사와 외교부 건물, 교보빌딩에도 작가님의 작품들이 걸렸는데? 답 : 레오 | 원래는 행사 때 함께 공개하려고 했었는데 일정이 바뀌어서 뒤늦게 전시되었어요. 광화문 주변 건물들에 랩핑하듯 독립운동가 초상화로 둘러쳤어요. 함께하는 크루들과 예전부터 해오던 작품들이라서 다행히 짧은 기간에 할 수 있었어요. 교보빌딩에 걸린 독립운동가 초상 그래피티 문 : 그동안 독립운동가의 모습을 그래피티 기법으로 꾸준히 표현했는데 어떤 계기가 있었나요. 답 : 레오 | 2013년부터
기증자료
• 5월 13일 지속적으로 자료를 기증하고 있는 이치노헤 쇼코 씨가 1945년 8월 15 일 「東京新聞도쿄신문」을 기증했다. ‘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을 통한 기증 잇달아 • 5월 17일 일본의 ‘히로시마 강제연행을 조사하는 모임広島の強制連行を調査する会’에서 자료집 <広島の韓國·朝鮮を訪ねて>, <太田川電源開発事始>(1997) 등 총 4점을 기증했다. • 5월 17일 기타무라 메구미 씨가 러일전쟁에 관한 자료인 <일로전쟁실기>(1904), <일로전쟁사진화보>(1904) 등 총 5점을 기증했다. • 5월 29일 재일교포 박정화 씨가 책자 <조선은 하나朝鮮はひとつ>(1978)와 비디오테이프 <안아오 자 통일을!>, <동포대등산> 등 총 3점을 기증했다. • 히구치 유이치 씨(전 고려박물관장)는 5월 21일에 한일회담 관련 책자(반대재일본조선인투쟁위원회, 일본공산당중앙위원회 선전부 등 발행) 19권을, 5월 30일에 한국의 역사, 문화, 언어를 배우는 동아리에서 발행한 회보 「무궁화통신むくげ通信」 (1972년~1981년) 19점을 기증했다. • 5월 29일 아다치 요코 씨가 일본 교과서 <고교일본사>(2019), <동경의 역사교육>(2011) 등 총 9권을 기증했다. • 지난 2017년, 인천송현공립초등학교 제1회 졸업기념 정신대원 환송회 사진을 기증했던 와카타니 마 사키 씨가 5월 29일 학교 선생님이었던 어머니의 이력서, 졸업장, 신고서와 조부의 이력서 복사본 등 총 6점을 기증했다. • 5월 30일 사노 미찌오 씨가 조선교육회에서 발행한 <문교의 조선>(1940년대) 6권을 기증했다. • 5월 30일 wam(여성들의 전쟁과 평화 자료관)에서 회보 「wamだより」와 도록 3권을 기증했다. 귀중한 자료를 보내주신 분들께 감사드린다. • 자료실 안미정
서로군정서·의열단 결성 100주년 기념 학술회의 열려
[초점] 연구소가 사무국으로 있는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주최로 서로군정서·의열단 결성 100주년 기념 학술회의가 6월 13일 오후 3시 연구소 5층 강의실에서 열렸다. 윤경로 전 한성대 총장이 사회를 맡아 진행한 이번 학술회의에서는 서로군정서와 의열단에 관련된 세 가지 주제가 다뤄졌다. 첫 번째로 박환 수원대 교수가 ‘서로군정서와 신흥무관학교’라는 제목으로 발제하였다. 박환교수는 919년 3·1운동 이후 서간도에 세워진 군정부(총재 이상룡)가 서로군정서로 개편되는 과정을 서술하고 서로군정서의 주도세력과 무장활동 내용을 살피며 아울러 서로군정서의 독립군 양성소인 신흥무관학교의 역할을 면밀히 고찰하였다. 두 번째로 김영범 대구대학교 교수가 ‘조선혁명선언과 의열단’에 대해 발제하였다. 김영범 교수는, 의열단장 김원봉의 의뢰를 받아 신채호가 1923년 1월 발표한 조선혁명선언이 항일선언문 중 내용으로나 문장으로나 가장 뛰어나다고 평가하고, 이를 통해 명료한 현실인식과 예리한 통찰을 담아내며 조선혁명의 필요성과 당위성을 설파하고, 민족혁명이면서 사회혁명이고 주체로 보면 민중혁명인 조선혁명의 비전을 제시했다고 하였다. 아울러 의열단의 조선혁명선언 실천과 그 성과, 의열단운동의 역사적 의의를 명쾌하게 정리하였다. 세 번째 발제는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의 ‘의열단과 프랑스 레지스탕스 비교 검토’였다. 의열단과 관련한 수많은 논저가 있지만 외국 사례와의 비교는 이 연구가 최초라는 점에서 꽤나 신선한 연구라 할 수 있다. 김삼웅 관장은 의열단의 주요 목표가 일제 타도였던 것에 비해 프랑스 레지스탕스의 타도 대상은 독일 괴뢰정부인 페탱의 비시정권이었다고 하며 활동기간도 의열단이 27년, 레지스탕스가 4년으로 상당한 차이가 난다고 하였다. 아울러 양자의 구성원과 참여인원, 활동양상을 비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