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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사랑

융문당과 융무당은 왜 아직도 제자리를 찾지 못하나? – 일본인 사찰 용광사의 덫에 갇힌 문화재 수난사 90년의 내력

2018년 9월 27일 7163

식민지 비망록 39 이순우 책임연구원   4·19민주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면서 당시의 대통령 관저인 ‘경무대(景武臺)’가 청와대(靑瓦臺, 1960년 12월 30일 변경)로 이름을 바꾼 지도 벌써 60년에 가까운 세월이 흐르고 있다. 이곳은 워낙 독재정권의 아성(牙城)이라는 오명이 점철된 탓인지 아직도 경무대라고 하면 이승만 대통령의 관저로만 여기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경무대는 일찍이 고종 때 경복궁이 중건되면서 신무문(神武門) 너머에 있는 후원(後苑) 지역을 일컫는 표현으로 정착된 ‘유서 깊은’ 명칭이다. 일제강점기로 접어든 이후에도 이 이름이 그대로 통용된 탓에 운동회와 주일학교 집회와 기념연회와 같은 갖가지 행사나 모임 장소로 이곳이 거론된 자료를 흔히 접할 수 있고, 특히 1939년 8월 남산에 있던 총독관저가 이 지역에 새집을 지어 옮겨왔을 때도 이곳은 ‘경무대 총독관저’로 호칭된 바 있었다. 1926년 순종 국장 당시 순화방 사재감계(順化坊 司宰監契) 계원들이 대여(大輿) 운반 예행연습을 위해 경무대 마당에 모여든 광경이다. 왼쪽 뒤로 월대 위에 보이는 건물이 융문당이다. (<순종국장기념사진첩>,1926)   근대시기에 포착된 옛 사진자료를 살펴보면, 이곳에는 연병장 같은 너른 마당이 있고 그곳의 북쪽과 동쪽 가장자리에 각각 융문당(隆文堂)과 융무당(隆武堂)이라는 이름의 누각이 월대(月臺) 위에 배치되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고종실록>과 같은 기록에 따르면, 이곳에서는 열무(閱武, 임금이 몸소 군대를 사열하는 것), 연조(演操, 군사를 조련하는 일), 호궤(犒饋, 군사들에게 음식을 베풀어 위로하는 것) 등의 일이 벌어졌고, 특히 식년문무과전시(式年文武科殿試), 정시(庭試), 알성시(謁聖試)와 같은 여러 종류의 과거시험이

이 풍진 세상(風塵世上) – 강장제를 상복(常服)하는 인간들

2018년 9월 27일 1925

[자료소개] 박광종 선임연구원 이번 호에 소개하는 글은 <신천지>권2호(1947년2월) ‘거리의정보실’ 코너에 실린 고원섭(高元燮)의「이풍진세상(風塵世上)-강장제를 상복(常服)하는 인간들-」(발췌)이다. 이 글은 해방된 지 2년 후인 1947년초 박흥식을 비롯한 친일파들이 다시 발호하고 모리배들이 서민들을 등치는 현실세태를 풍자한 글이다. 현행 한글맞춤법에 따라 일부 철자를 수정했고, 검게 칠해진 인명은 각주를 달아 이름을 밝혔다. 필자인 고원섭은 일제 말기 친일잡지 <조광> 에국제정세를 비롯한 정치·사회분야의 글을 실어 일제의침략전쟁을 미화하고 조선인의 전쟁협력을 강조하여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인물이다. 해방 후 <신천지>, <개벽>등의 잡지에 글을발표했으며,1949년에는 <반민자죄상기(反民者罪狀記)>를 저술했다.   요즘 해방이란 어떻게 해석해야 좋을지 생각할수록 머리만 어지럽다. 그래 “동해물과 백두산”을 부르고 태극기를 간혹 내걸고 하니 이것이 해방이란 말인가! 모두가 서글프기만 하다. 데시근(시들하거나 미적지근한) 해방 바람에 세상은 서글프고 달밤 술 취한 행인이 오줌을 누다가도 덧없이 울음이 터지게끔 이렇게까지 모든 것이 딱한 일이요 기막힌 일이요 서글픈 일뿐이다. “일제 때만 못하다”는 소리를 들을 적마다 가슴이 멘다고 탄식하는 우국지사, 그래도 세상을 올바로 내다보는 우국지사가, 묻노니 이 땅에 얼마나 있는가! 일제시대의 연장인 듯 모든 친일파들이 활갯짓을 하며 호령하고 이 반면에 해방 후 오늘날도 여전히 애국투사는 거리에서 지하에서 기한(飢寒)에 떨며 방황하고 설익는 해방으로 뼈가 저리도록 고마운 덕을 보는 자들이 있으니 은행 창고를 제 집 창고 쓰듯 하며 외국인을 끼고 법망을 코웃음 치는 모리배들이요, 하나는 천하가 다 아는 친일파와 민족반역자의 자유해방이다! 8·15 직후에는

친일파의 역습을 막아내다 ‘친일’ 소송의 종결자 김경현 회원 ②

2018년 9월 27일 2608

[인터뷰] 인터뷰 조세열 상임이사 / 정리 박광종 선임연구원   김경현 선생은 연구소 초창기부터 각별한 인연을 맺어온 열성회원이자 친일문제 연구자이다. <친일인명사전>편찬에 참여하였으며, 역저 <일제강점기인명록Ⅰ-진주지역관공리・유력자>로 2005년 임종국선생기념사업회가 제정한 ‘임종국상’ 초대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서 조사관으로 활동하였으며, 위원회가 종료된 뒤에는 행정안전부 과거사관련업무지원단 전문위원으로 위원회 관련 소송업무를 전담했다. 최근 후작 이해승 후손이 제기한 위헌소송이 합헌으로 결정남에 따라 29건의 친일 관련 소송에서 전승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인터뷰는 7월 25일 연구소 법인 사무실에서 진행했다. 문 : 부부 회원이고 가족이 식민지역사박물관 발기인에 참여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답 : 아내와 함께 회원에 가입한 것은 2001년 8월입니다. 저와 아내, 작은딸(대학교 3년)은 식민지역사박물관 발기인 모금에도 참여했는데 남에게 강요받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하는 큰딸(대학교 4년)은 아직 결심이 서지 않은 모양입니다. 일단 “지켜보겠다”고 했으니, 아마 큰딸도 민족문제연구소의 가치와 역사박물관 설립취지에 동감한다면 조만간 참여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문 : 연구소를 언제부터 알게 되었습니까? 답 : 1992년부터 자료 조사 때문에 연구소에 가끔 연락하여 도움을 받았습니다. 1993년 경희대 부근 세탁소 2층에 위치한 연구소 사무실에 찾아갔습니다. 당시 김봉우 소장을 비롯해 상근자 서너 명이 반갑게 맞아주었습니다. 임종국 선생이 기록한 1만3천여 장의 친일파 행적을 손수 기록한 인명카드를 비롯해 총독부 관보와 일제시기 신문 영인본 등 소장 자료를 그때 처음 보고 매우 감격스러웠습니다. 점심시간이 되자 상근자들이 직접 식사 준비를 했습니다. 밥을 짓고 국과 반찬을 만들어 함께 식사했습니다. 비록 차린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의 바람소리가> 허은 여사 건국훈장 추서

2018년 9월 27일 2136

정부는 의병장 허위 선생의 후손이자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 선생의 손자며느리인 허은 여사(1907∼1997)의 독립운동을 인정해 8월 15일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허 여사는 일본 경찰의 감시를 받던 중 만 6세가 되던 1915년에 일가족과 함께 서간도로 망명, 이후 1932년 귀국할 때까지 서로군정서 대원들의 군복을 만들어 배급하고 군정서 회의 때 식사를 조달하는 등 공적을 세워 서훈을 받게 됐다. 당시 이상룡 선생은 경학사, 한족회, 신흥무관학교, 서로군정서 등 항일 투쟁 단체를 조직·운영하는데 앞장서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이상룡 선생의 집은 항상 독립운동가들의 회의 장소로 쓰였다. 따라서 의식주 해결 등 독립투사들의 뒷바라지에 허은 여사의 공은 남달랐다. 광복 후 독립투쟁의 후유증이 남아 위로 4남 1여를 저세상으로 먼저 보내야 했고, 아들과 외동딸을 고아원에 보내야 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꿋꿋하게 생활고를 이겨가며 자녀와 손자·손녀들을 돌보며 임청각을 지켰다. 말년에는 독립운동 회고록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의 바람소리가〉(1995년 초간, 2010년 개정판 발간)라는 수기를 출판해 독립투쟁 때 의식주에 대한 생활사를 담아내기도 했다. 이 수기는 〈서간도 시종기〉 〈장강일기〉와 더불어 여성의 시각에서 독립운동의 뒷모습을 사실적으로 기록해 독립운동사를 입체적으로 이해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8월 14일 문재인 대통령과 만난 허은 여사 아들인 이항증 선생(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공동대표)은 “여성들의 의식주 해결 덕에 독립운동이 가능했다”고 말하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정부는 올해 광복절부터 독립유공자 포상 기준을 개선한 결과 177명 중 여성이 65명(36.7%)에

뮤지컬 ‘신흥무관학교’

2018년 9월 27일 1359

비가 흩뿌리는 주말 오후 가슴 벅차고 감동이 넘치는 뮤지컬을 보았다. 사실 배우로 나오는 지창욱을 좋아해서 가벼운 마음으로 신났던 나는 그곳에서 내 이름을 남기지 않아도 나라의 독립만 이뤄진다면 목숨도 아낌없이 내놓은 독립운동가 팔도를 만났고, 밀정 동규와 죽은 군인들도 깨워서 독립을 이루겠다는 나팔을 만나게 된다. ‘죽어도 죽지 않는다’ 오프닝 곡은 지금도 입속에 맴돈다. 화려하고 역동적인 군무와 장면마다 표현되는 색조와 같은 듯 다른 모습으로 변하는 무대는 순간순간을 집중하게 만든다. 독립은 가난하고 무학의 사람이 하는 하찮은 일로 여기는 이완용의 대사에 분노했고, 독립을 위해 신분, 재산, 목숨까지 바쳤던 선조들은 동지를 위해 자신의 이름을 남기지 않고, 기록을 남기지 않아서 훗날 그들을 기억할 수 없는 아쉬움을 남겼으며, 다음날 나라를 위해 죽으러 가는 처연한 모습과 동지의 죽음을 알면서 다음은 내 차례라며 격려하고 안아주는 장면에서는 가슴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고맙습니다. 당신들이 있어 지금의 제가 있습니다.’ 1910년 그때는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고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닌 나라 잃은 백성의 치욕을 온몸으로 감당했을 선조들은 힘 있는 나라를 위해 무장하고 훈련하는 신흥무관학교를 통해 독립을 꿈꾸고 나라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모습은 오늘의 우리를 돌아보게 한다. 관람 내내 내가 팔도가 되기도 하고, 나팔이 되었다가, 반전 포인트 밀정 동규는 안타까움이고, 끝까지 친구로 남았던 팔도의 의리의리한 의리는 먹먹함으로 남는다. 젊음을 대한독립을 위해 바칠 수 있다니 나라면

반쪽짜리 우리 땅, 용산에 가다 – 식민지역사박물관 개관 기념 용산 답사기

2018년 9월 27일 1338

내게 용산은 무척 친근한 동네다. 이웃 동네인 동작구에 살고 있는 탓에, 도심으로 나갈 때면 늘 거쳐 가야만 하는 동네인 까닭이다. 주말이면 영화 보러, 쇼핑 하러 자주 들르는 동네이기도 하다. 이렇듯 용산에 대한 나의 이미지는 그저 놀고, 먹고 무언가를 소비하는 그런 공간이었다.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개관 기념으로 용산 답사를 진행한다는 소식을 듣고서도 ‘용산에 뭐가 남아있긴 할까’ 내심 의구심만 들었다. 그래도 내가 몰랐던 또 다른 역사적 흔적을 찾을 수 있겠다는 기대감과 호기심에 9월 1일과 8일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된 1·2차 답사에 동행했다. 두 차례에 걸친 답사는 모두 토요일 오후에 진행됐다. 황금주말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시민들이 자신의 휴일을 반납하고 용산에 모였다. 답사의 진행을 맡은 이순우 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은 “모든 것을 다 기억하려 애쓰지 마라”고 반복해서 강조했다. 답사란 원래 여러 번에 걸쳐서 천천히 기억하는 과정이고, 한 번 왔을 때 공간에 대한 인상을 가져가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의 말처럼 나는 마치 어린 손자가 할아버지로부터 옛날이야기를 듣는 마음으로 답사에 임했다. 일제강점기 당시 용산은 ‘군사기지’였다. 용산의 군사기지화는 1904년 일제가 러일전쟁을 준비하면서 시작됐다. 당시 일제는 이곳을 군용철도인 경의선의 분기점으로 설정한 뒤, 각종 군용시설물을 설치했다. 해방 후에도 달라진 것은 없었다. 한반도 남쪽에 상주한 미군은 일본군이 물러간 용산을 차지했다. 조선 주둔 일본군이 관병식을 통해 위용을 자랑했던 연병장은 미군기지로 옷만 바꿔 입었다. 그래서일까. 이순우

‘2018 평화의 촛불을! 야스쿠니의 어둠에’ 도쿄 촛불행동을 다녀와서

2018년 9월 27일 1059

지난 8월 11일, 일본 도쿄의 한국YMCA에서는 일본 야스쿠니신사에 반대하고 평화를 촉구하는 ‘2018 평화의 촛불을! 야스쿠니의 어둠에’라는 행사가 열렸다. 연구소가 ‘야스쿠니신사 반대공동행동’의 한국 사무국이고 올해로 13년째 열리는 행사인 만큼 연구소에서도 여러 상근자가 유족들을 모시고 참가했다. 먼저 다녀온 연구소 선배들의 경험담과 조언이 끊이질 않았는데, ‘하마터면 우익들이 휘두르는 흉기에 맞을 뻔 했다.’ ‘확 잡아 챌 수도 있으니 일행들과 꼭 붙어 있어야 한다.’ 등등 듣기만 해도 등골이 오싹해지는 이야기가 쏟아졌다. 출국할 시간이 다가올수록 점점 겁이 나기 시작했다. ‘가지말까’라는 부끄러운 생각도 잠시 들었지만 국제사회에서 논란의 중심이 되고 있는 야스쿠니신사를 직접 보고 싶었다.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함께 전달하고 싶은 마음도 컸다. 우리가 이렇게 간절히 외치고 있다고! 촛불행동에 참가하기 위해 8월 10일 오전 김포공항에 모였다. 강제동원 피해를 당한 유족분들을 직접 뵙고 이야기를 들어보니 야스쿠니신사의 무단합사를 취소시키고 한일 간의 잘못된 역사를 바로 잡고 싶다는 사명감이 불타올랐다. 걱정 안하려고 했으나 긴장한 모습이 보였는지 유족분들께서 별거 아니라며 오히려 나를 다독여주는 아이러니한 상황도 연출되었다.   1시간 조금 넘는 비행 후 도쿄 하네다공항에 도착했다. 물리적으로 이렇게 가까운 나라인데 심리적인 거리감이 너무나도 먼 일본이 낯설게 느껴졌다. 택시를 타고 호텔로 들어가는데 마침 택시기사분이 재일동포였다. 일본의 연휴 첫날이었기 때문에 고속도로에 차가 막히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재일동포들이 일본 내에서 어떤 핍박과 차별을 받고 힘들게 살고

기증자료

2018년 9월 27일 1478

도쿄지회 덴사키 회원, 재일조선인 사진 등 자료 기증 도쿄지회(총무 조영숙) 덴사키 회원이 식민지역사박물관에 자료를 기증했다. 주요 자료는 덴사키 회원의 아버지 사진과 인터뷰 영상(30분)인데 조영숙 회원이 자료의 이해를 도울 수 있는 메모를 첨부했다. 덴사키 회원은 일본인 속에서 혼자 ‘조선인’의 정체성을 알리지 않고 살아가는 아버지의 삶에 큰 연민을 가졌다고 회고했다. ‘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을 통한 기증 잇달아 2016년에 이어 지난 8월 11일에 오쿠무라 리쓰코(奥村律子)씨가 자료 5점을 기증했다. 오쿠무라 리쓰코 씨는 지난 6월 9일 ‘식민지역사박물관 기금전달식’에 참석하여 박물관에 기증할 자료를 찾아보겠다는 다짐을 하고 일본으로 돌아갔는데 주요자료는 「朝鮮大戰爭之圖」, 「朝鮮暴動記」 등 니시키에(다색판화) 2점과 대륙전진병참기지 조선의 사진이 실린 <興亞國策と朝鮮>(1941)등이다.앞으로도식민지역사박물관에 지속적인 지지를 보내겠다는 의사도 전달했다. 8월 4일 조노 도시유키(城野俊行) 씨가 ‘땅 속에서부터 인권의 평등을 말한다’ 리플렛과 ‘명치일본의 산업혁명유산 우표’ 총 5점을 기증했다. 8월 8일 오카모토 아사야(岡本朝也) 씨가 <ミレパガイドブック(미래를 위한 역사 패널전 가이드북) 2018>1권을 기증했다. 8월 16일 기타무라 메구미 씨가 히로시마 관련 도록 4권과 리프린트 지도 6점을 기증했다. 8월 16일 재일교포 박정화 씨가 소장자료를 기증했다. 山友會 회원 사진, 조선영화, 국제교류회 관련 자료 등이다. 8월 5일 최재호(경북동부지부) 회원이 소장자료를 기증했다. 일제강점기 부친이 사용했던 안경, 시계, 졸업증서, 상장 등 총 10점이다. 8월 22일 이건제 회원이 창작과 비평 등 소장 도서를 기증했다. 8월 29일 송영옥(충북지부) 회원이 1972년에 창립한 민학회 회보(34권)와 도록

뮤지컬 <신흥무관학교> 흥행 행진

2018년 9월 27일 1222

육군본부가 창군 70주년을 기념해 기획안 창작 뮤지컬 〈신흥무관학교〉가 9월 9일 국립중앙박물관 극장 용에서 막을 올려 현재 흥행 중이다. 뮤지컬 〈신흥무관학교〉는 항일 독립 전쟁의 선봉에 섰던 신흥무관학교를 배경으로, 격변하는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치열한 삶을 담아낸 작품으로 제작단계부터 지창욱, 강하늘 등 인기 배우 출신 사병들이 캐스팅되어 큰 관심을 모았다. 실제로 지난 8월 진행된 티켓 오픈에서 예매율 1위를 석권하며 2018년 하반기 최고 화제작으로 주목받고 있다. 육군은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뮤지컬 제작을 위해 지난해 2월 전 장병을 대상으로 소재 공모를 거쳤고 그 결과 300여 편의 응모 소재 중에서 신흥무관학교를 최종 선정했다. 이 뮤지컬은 서울 공연 이후 연말까지 성남, 안동, 목포, 춘천, 울산, 전주, 대전, 강릉, 부산, 대구 등 13개 지역 전국투어가 진행된다. 윤경로 상임대표, 이항증 공동대표 등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임원진도 육군의 초대를 받아 9월 15일 뮤지컬을 관람했다. • 방학진 기획실장

‘2018 평화의 촛불을! 야스쿠니의 어둠에’ 야스쿠니반대촛불행동

2018년 9월 27일 837

8월 11일 도쿄의 한국YMCA에서는 ‘2018 평화의 촛불을! 야스쿠니의 어둠에’ 야스쿠니반대촛불행동이 진행되었다. 이 행사는 야스쿠니를 반대하고 동아시아의 평화를 염원하는 한국, 타이완, 오키나와, 일본의 시민들이 2006년 8월 도쿄에서 “야스쿠니 반대! 합사 철회!”의 촛불을 들기 시작하여 올해 13회를 맞이했다. 연구소는 야스쿠니반대공동행동한국위원회의 한국사무국을 맡아왔는데, 매년 도쿄의 중심가에서 야스쿠니 반대의 촛불을 밝혀온 이 행사는 일본 사회에서 오랫동안 금기시되어 왔던 야스쿠니의 문제를 한국과 일본 사회에 대중적으로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해 왔다. 올해의 심포지엄은 “‘메이지(明治) 150년’과 야스쿠니, 그리고 개헌”이라는 주제로 열렸다. 아베 정권은 메이지유신 150년을 맞이하여 강제노동의 역사를 숨긴 채 ‘메이지 산업혁명유산’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한 것을 비롯하여 메이지 영광의 부활을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이 근대화를 달성하였다며 선전하는 메이지 시대는 오키나와, 타이완, 조선 등 아시아 사람들에게는 일본에게 침략을 당한 시대이기도 하다. 이날 심포지엄에서는 이러한 역사를 바탕으로 메이지 시대의 영광에 가려진 일본의 침략사, 그리고 동아시아 평화를 위협하는 아베 정권의 평화헌법 개정 시도, 그리고 야스쿠니의 역할 등에 대한 논의들이 이루어졌다. 이어서 아버지가 야스쿠니에 합사되어 있는 강제동원 희생자 유족 이명구 씨는 일본의 침략전쟁에 동원되어 머나먼 남태평양의 팔라우에서 비참하게 죽어간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되어 버린 자신의 지난했던 삶을 증언하며 아버지의 이름을 야스쿠니에서 하루라도 빨리 빼내야 한다고 절절하게 호소하여 참가자들의 눈시울을 적셨다. 이어서 첫 해부터 촛불행동의 대미를 장식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