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사진첩으로 보는 간도와 만주국 실경(1)
미리보는 ‘식민지 역사박물관’ 전시자료 17 사진첩으로 보는 간도와 만주국 실경(1) 박광종 선임연구원 일제는 일찍부터 간도지역을 대륙침략의 교두보로 상정, 1909년 9월 청국과 간도협약을 체결하고 일본영사관 개설과 길림과 회령을 잇는 철도 부설권을 손에 넣는다. 이후 일제는 간도를 포함한 남만주지역에 경제 진출을 꾀하고 국제적으로 배타적 이권을 승인받기 위해 힘썼다. 1931년 9월 일제는 관동군의 주도하에 만주사변을 일으켜 중국 북부지역을 장악하고 1932년 3월 동삼성(요동성, 길림성, 흑룡강성) 일대를 관할하는 만주국을 세운다. 만주국은 청나라 계승을 명분으로 마지막 황제 부의溥儀를 집정으로 앉히고 ‘왕도낙토王道樂土와 오족협화五族協和’를 건국이념으로 내세웠지만 관동군의 조종하에 움직이던 꼭두각시 정부에 지나지 않았다. 일제가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등을 일으키며 파국을 향해 치닫자 만주국 또한 일제의 패망과 더불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이번에 소개하는 자료는 1910~1940년대 간도와 만주국 상황을 담은 사진첩과 거기에서 가려 뽑은 사진들이다. 자료실에 소장된 사진첩을 시대순으로 나열하면 <남만주사진첩>(滿洲日日新聞社, 1917), <봉천명승사진첩奉天名勝寫眞帖>(奉天山陽堂書店, 1921), <간도사진첩>(간도 尾崎寫眞舘, 1927년 추정), <만주국승인기념사진첩>(大阪朝日新聞社, 1932.10.5), <간도임시파견대기념사진첩>(1933), <대만주국사진첩>(東京堂, 1936), <강덕8년 3월 제4회 졸업기념(앨범)>(國立新京 醫科大學, 1941.12)이다. 이 중 특기할 만한 사진첩은 먼저 <오사카아사히신문> 1932년 10월 5일자 특집호로 낸 <만주국승인기념사진첩>이다. 만주국이 수립된 것은 1932년 3월 1일이지만 그간 리튼보고서를 둘러싼 부정적인 국제여론과 일본 내부 사정으로 인해 만주국 승인이 미뤄지다가 그해 9월 15일 관동군 사령관이자 주만전권대사인 무토 노부요시武藤信義가 신경新京(지금의 장춘)을 방문해 만주국 국무총리 정효서鄭孝胥와 「일만의정서」를 조인하고 만주국을 승인한다. 아사히신문사가 전
애국부인회
미리보는 ‘식민지 역사박물관’ 전시자료 16 애국부인회 김혜영 연구원 1937년 중일전쟁을 도발한 일제는 1938년에 들어 ‘국가총동원’과 ‘육군특별지원병령’ 등을 공포해 모든 인적·물적 자원을 효과적으로 전쟁에 동원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했다. 일제의 수탈과 동원정책은 여성에게도 예외 없이 적용되었다. 조선 민중의 생활 전반에 대한 통제력을 보다 원활하게 하기 위해 여러 여성단체들을 조직하였고, 조선여성들은 각종 관제 단체에 소속되어 ‘총후보국(銃後報國)’이란 명목으로 다양한 활동을 강요당했다. 애국부인회 조선본부는 1911년 2월 군사원호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단체이다. 1906년 설립된 일본애국부인회 한국위원본부가 이 단체의 전신으로, 일본애국부인회 한국위원본부의 설립목적은 “황실을 중심으로 전 일본 부인의 결속된 힘으로 군사후원을 하는 것”이었다. 설립 초기에는 일제 뿐 아니라 구 한국황실이나 왕족들의 금전적 후원도 있었다. 1910년 9월에는 애국부인회 조선위원본부로 개칭되었다가 1911년 2월 다시 애국부인회 조선본부로 고쳤다. 처음에는 일본 여성이 중심이었으나 조선인 여성 들도 가입시켰다. 애국부인회의 활동은 군사후원활동(총후인식강화운동, 군인송영접대, 위문금품 갹출醵出 수집), 군인유가족 후원(애국료愛國寮 운영, 전병사자戰病死者 조위弔慰와 위문, 국경 경비 후원), 사회사업(유유아乳幼兒 보호, 임산부 보호, 영세민교화 보호), 사회교육산업(부인애국운동, 애국자녀단, 경신敬神시설 헌납), 수양시설 운영(애국부인회 조선본부회관 건축) 등으로 크게 구별되어 나뉜다. “미성년자녀에 대한 부인보국정신의 함양과 실천에 노력”하기 위해 애국자녀단을 만들기도 했다. 애국부인회 활동을 선전하는 봉함엽서. 방공연습, 전승기원, 병기헌납, 국기운동, 유가족위문, 농번기탁아소 등의 일을 독려하고 있다. 회원들은 지방행정단위인 부·읍에 설치된 분회를 중심으로 활동했으며, 각 분회는 재원을 확보하기 위해 농산·축산·가공제조 판매,
제국 홍보의 소품, 시정기념엽서 시리즈
미리보는 ‘식민지 역사박물관’ 전시자료 14 제국 홍보의 소품, 시정기념엽서 시리즈 박한용 교육홍보실장 조선총독부는 1910년 이래 매년 10월 1일이면 이른바 시정기념엽서(始政記念葉書, 1920년부터는 5주년 단위)를 발행했다. 조선총독부가 출범하여 식민지 조선에 대한 통치를 처음 펼친 날이 바로 10월 1일이었으므로 이를 기념하려는 목적이었다. 화려한 색채와 다양한 디자인이 어우러진 이 고급 엽서들은 조선의 문화 유산이나 자연풍광을 비롯해 조선 각 지방의 산업 발달 또는 중요한 역사적 사건 등을 디자인 소재로 삼았다. ‘시정기념’이란 말에 걸맞게 이 엽서들은 식민지 지배의 정당화를 넘어 총독부의 선정(善政)에 의해 미개한 조선이 비약적으로 문명개화했다고 내외에 선전하는 홍보수단 노릇을 톡톡히 했다. 실제 매년 발행된 기념엽서는 대부분 조선 전 분야가 일제에 의해 비약적으로 발달한 것처럼 묘사 하거나, 낙후된 과거 모습과 일제에 의해 ‘근대화된’ 모습의 사진을 나란히 배열하여 한눈에 비교하기 쉽게 디자인되었다. 일제의 대한제국 병탄을 한국인들이 기뻐하고 환영한 것처럼 디자인한 후안무치한 엽서들도 있다. 의도적인 상징 조작과 합성을 통해 그들은 조선인의 실상과 관련이 없는 허구의 ‘낙토(樂土) 식민지’를 이미지로 창출한 것이다. 통신우편수단으로 각광을 받던 이 엽서를 상용하면서 조선인들은 알게 모르게 일제의 지배이데올로기에 익숙해질 수밖에 없었다. 시정기념엽서는 통신수단이라는 본연의 기능보다는 제국의 홍보수단이자 민족적 자각과 저항을 잠재우려는 ‘움직이는 마취제’로서 기능했다고 할 수 있다. 1 조선총독부시정기념 : 삼한을 정벌했다고 주장하는 신공황후 그림 2 조선총독부시정기념 : 일장기를 든 소녀를 둘러싸고 일본인과 조선인
대일본제국 훈장과 기장(2) 침략과 식민지배의 이력서인 각종 기념장
미리보는 ‘식민지 역사박물관’ 전시자료 13 대일본제국 훈장과 기장(2) 침략과 식민지배의 이력서인 각종 기념장 박한용 교육홍보실장 ▪ 기념장(記念章) 국가적 행사 참가자나 관계자를 대상으로 상훈국이 발행하며, 중요한 것으로 다음 몇 가지를 들 수 있다. 1) 제국헌법발포기념장(帝國憲法發布記念章) : 1889년 8월 3일자 칙령에 의해 일본제국헌법 발 포식에 관련된 친왕(親王) 이하 주임관(奏任官) 이상에게 수여했다. 2) 대혼25년축전지장(大婚25年祝典之章) : 1894년 3월 6일자 칙령에 의해 제정되었으며, 메이 지(明治) 천황과 쇼켄(昭憲) 황태후의 대혼 25년 축전에 초대되어 입궐한 자에게 수여했다. 3) 황태자도한기념장(皇太子渡韓記念章) : 1907년 10월 16일부터 20일까지의 요시히토(嘉仁: 뒷날의 다이쇼大正) 황태자 대한제국 방문 기념. 1909년 3월 29일자 칙령에 의해 이와 관련된 한일 양국의 황족 및 주임관 이상에게 수여했다. 4) 한국병합기념장(韓國倂合記念章) : 1912년 3월 29일 칙령에 의해 8월 1일 한국을 병탄한 후 1912년 8월 1일 한국 병합 사업에 직접 및 수반한 중요 업무에 관여한 자(제3조 1호), 병합 당 시 조선에서 근무하던 관리 및 관리 대우자 및 한국 정부의 관리 및 관리 대우자(2호), 종전 한일 관계에 공적이 있는 자(3호)에게 수여했다. 5) 대정대례기념장(大正大禮記念章) : 대정4년(1915) 11월 다이쇼 천황 즉위식에 참석한 이들 에게 수여했다. 6) 소화대례기념장(昭和大禮記念章) : 소화3년(1928년) 11월 쇼와 천황 즉위식에 참석한 이들 에게 수여했다. 7) 제1회국세조사기념장(第一回國勢調査記念章) : 1920년 일제가 일본 본토와 식민지 조선 등 지에 최초로 시행한 국세조사를 기념해 관계자들에게 수여했다. 8)
물망국치(勿忘國恥)!
미리보는 ‘식민지역사박물관’ 전시자료 물망국치(勿忘國恥)! 박한용 교육홍보실장 러일전쟁 승리로 조선에 대한 독점적 지배를 인정받은 일제는 이후 무력을 앞세워 1905년 11월 제2차 한일협약(을사늑약), 1907년 7월 한일신협약(정미칠조약) 등을 체결하며 단계적으로 식민지화 계획을 추진해 나갔다. 이미 러시아와 영국, 미국 등 서구열강으로부터 조선 병합에 대한 암묵적 승인을 받고 있던 일제는 1909년 7월 ‘한국 병합에 관한 건’과 ‘대한시설대강(對韓施設大綱)’을 결정해 대한제국을 완전한 식민지로 만든다는 방침을 확정했다. 이러한 결정에 맞춰 친일단체 일진회는 이른바 ‘합방촉진성명’을 발표하면서 여론을 조작하고 일본의 대한제국 병탄의 구실을 마련해주고자 했다. 일제 또한 전국 곳곳에서 전개되고 있는 의병항쟁을 가혹하게 탄압하면서 저항의 불씨마저 없애고자 했다. 1910년 6월 일제는 내각회의를 통해 ‘병합 후의 조선에 대한 시정방침’을 결정하고 병합을 위한 막바지 준비를 끝냈다. 8월 22일 일본군의 삼엄한 경비가 펼쳐진 가운데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는 ‘한국병합에 관한 조약’을 비밀리에 조인했다. 병합조약은 일주일이 지난 8월 29일 순종의 칙유를 통해 국민에게 공포되었고, 이로써 대한제국은 국권을 완전히 상실하고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되었다. 일제는 강제병합을 전후해 각종 기념행사를 개최하고 다양한 기념엽서와 홍보자료들을 대대적으로 배포했다. 대개 그 내용은 조선인들의 자발적인 병합 요청에 따라 일본 ‘천황’이 조선인들의 처지를 딱하게 여겨 이를 허락했으며, 이 조치에 대해 조선인들이 열렬하게 환영했다는 황당한 내용들이었다. 곳곳에서 해방 70년이라고 경축하지만, 박근령과 같은 역사의 정신질환자마저 퍼져나가는 현실을 보면서, 차라리 8월 15일 광복절보다
대일본제국 훈장과 기장 (1)
대일본제국 훈장과 기장 (1) 대일본제국과 천황에 대한 충성 확인서 박한용 교육홍보실장 근대 일본의 훈장(勳章)·포장(襃章)·기장(記章) 등 각종 서훈(敍勳)과 영전(榮典) 제도는 1871년부터 시작되었다. 서훈과 영전 제도는 ‘천황대권’의 하나로 근대 일본 국민국가 형성 과정의 산물이며 근대 천황제의 근간을 이루어 온 장치이다. 또한 일제가 대외침략전쟁을 수행하면서 남발한 각종 서훈과 영전은 ‘신민’의 충성심을 동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 민족 지배의 통합장치로서 매우 큰 역할을 하였다. 일제강점기 조선인 관리나 친일파들이 주로 받은 훈장은 욱일장(旭日章)과 서보장(瑞寶章) 이었다. 일제의 대외침략과 관련해서는 러일전쟁·만주사변·중일전쟁 관련 종군기장(從軍記章)을 받은 친일파들이 많았다. 그 중에서도 일제가 가장 대량으로 수여한 훈장은 이른바 ‘병합의 공로’로 수여한 한국병합기념장(韓國倂合記念章)이었다. 한편 만주국에서 활동한 친일파들의 경우 주국장(柱國章) 또는 경운장(景雲章)을 많이 받았다. 특급 친일파들의 경우 대한제국 황족이 아님에도 최고위의 훈장인 대훈위국화대수장(大勳位菊花大綬章)을 받은 경우도 있으며(이완용), 십 수개 이상의 훈장을 줄줄이 받은 인물도 적지 않다. 대표적인 인물을 들자면 다음과 같다. 고희경 : 서보장, 욱일중광장, 한국병합기념장, 대례기념장, 욱일대수장 등 15개 민병석 : 한국병합기념장, 유공장(有功章), 대례기념장(大禮記念章) 등 18개 이범익 : 한국병합기념장, 훈4등서보장, 대례기념장, 훈2등서보장, 만주국황제방일기념장, 만주국 국경사변 종군기장 등 14개 일제의 서훈과 영전 제도는 일제가 태평양전쟁에서 패전한 후 잠시 폐지되었다가 천황의 이름으로 부활해 다시 시행되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일제 강점기의 다양한 종류의 훈장·기장·포장과 단체 휘장 그리고 각종 관련 증서 등을 소장하고 있다.
호랑이보다 더 무서웠던 식민지 순사들
호랑이보다 더 무서웠던 식민지 순사들 자료실 소장 식민지 경찰관련 자료들 박한용 교육홍보실장 헌병경찰, 그 공포와 폭력상이 담긴 『병합기념 조선의 경무기관(倂合記念朝鮮之警務機關)』 식민지 공포정치는 헌병경찰제와 함께 시작됐다. 병합 전에 이미 일제는 조선주차군헌병사령관이 경찰의 총수인 경무총감을, 지방 각 도의 헌병대장이 각 도의 경무부장과 경찰서장을 겸하도록 했다. 1910년 9월 조선총독부가 정식 설치되면서 이 제도는 그대로 이어졌다. 악명높은 헌병경찰제도가 탄생한 것이다. 『병합기념 조선의 경무기관 倂合記念朝鮮之警務機關』 37X25. 2, 1910. 8. 29 아카시 모토지로(明石元二郞)는 통감부 시기에는 헌병대장, 총독부 시기에는 초대조선군 헌병사령관 겸 경무총장을 맡은 인물이다. 아카시는 1907년 10월 조선에서 헌병대장으로 이토 통감을 도와 전국에 끓어오르는 항일의병 투쟁을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1913년 조선주차군사령부가 간행한 <조선폭도토벌지>에 의하면 1906년부터 1911년까지 6년간 조선의 의병 1만 7779명을 학살했다고 나온다. 그 학살을 아카시 등은 조선 병합의 ‘공로’로서 당당하게 포장해 1910년 8월 29일자로 기념화보집을 발행했다. 이름하여 <병합기념 조선의 경무기관(倂合記念朝鮮之警務機關)>이다. 식민지 일상의 감시와 탄압을 보여주는 자료들 식민지 병탄 후 일제는 불과 1년 동안 헌병과 경찰 인원을 2배 이상 증원해 총 1만 4천여명에 이르렀다. 헌병경찰의 권한은 ‘급속한 처분이 필요하다고 인정’되면 재판절차 없이 경찰서장이나 헌병대장이 즉결할 수 있는 사법권에까지 미쳤다. 이런 막강한 권한은 무엇보다도 조선인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고 나아가 항일독립운동을 할 경우 가혹하고 신속하게 처벌하기 위해 주어졌다. 1 조선총독부 초대 경무국장 겸 헌병사령관 아카시 모토지로(明石元二郞, 1864~1919). 2 경성헌병대본부와
‘조선의 수리왕’ 후지이 간타로와 불이농장
‘조선의 수리왕’ 후지이 간타로와 불이농장 일본인이 장악한 군산·김제, 식민지 농업수탈의 실상 김승은 자료실장 후지이 간타로가 1920년부터 3년간 조선 농민들을 동원해 간척한 군산 ‘불이농촌(不二農村)’은 현재 새만금 간척사업지의 절반가량 되는 어마어마한 크기였다. 바닷가 척박한 토지를 600만 평의 드넓은 농지로 일구고, 100만 평 규모의 옥구저수지를 만들어 놓았으니 총독부가 식민지 농업 발전의 대표적인 성과로 요란하게 선전할 만한 사례였다. 조선총독부 ‘시정기념’ 엽서를 장식한 불이농장과 수리조합 좌) 조선총독부 시정6주년 기념엽서. 1909년 후지이가 설립을 주도한 최초의 수리조합, 임익수리조합 우) 조선총독부 시정8주년 기념엽서. 평북 용천군 서선농장과 대정수리조합 오사카 상인이었던 후지이 간타로는 미곡무역으로 자본을 축적해 1901년 후지모토합자 회사를 설립했다. 그는 러일전쟁을 계기로 한국(대한제국)에 건너와 일본 면포와 생활필수품을 한국으로 들여오고, 쌀과 쇠가죽 등을 일본으로 반출하여 막대한 상업 이익을 올렸다. 한국으로 온 직후 후지이는 일본 간사이(關西)지방에 비해 땅값이 1/10에 불과한 조선토지에 눈을 돌렸다. 대규모 토지를 헐값에 사들여 농장을 경영하면 높은 수익률을 올릴 수 있었기 때문에 투자대상을 토지로 바꾸었다. 1906년 전라북도 옥구‧익산 일대에 전북농장을 설립하면서부터 후지이는 본격적으로 농업경영에 착수했다. 1914년 불이흥업주식회사를 설립한 이후 전국 각지에 이른바 불이농장(不二農場)으로 불리는 대규모 농장을 운영했다. 후지이는 총독부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 서선농장, 옥구농장, 철원농장 등을 연이어 설립하여 대규모 농업수탈의 기반을 확대해 나갔다. <불이농장의 사업>(불이흥업주식회사, 1917) 좌) 평북 용천군 서선농장 간척사업 경과와 성과를 소개한 책자. 중,우) 사람의 손으로 일일이 흙을 파서
일제가 인천항 부두에 세운 대륙침략의 ‘거룩한 자취’ 기념비
일제가 인천항 부두에 세운 대륙침략의 ‘거룩한 자취’ 기념비 경성보도연맹 기관지에 수록된 ‘성적기념지주(聖蹟記念之柱)’의 건립과정 한국전쟁의 와중에 벌어진 민간인 집단학살사건에 관한 얘기를 할 때마다 빠짐없이 등장하는 국민보도연맹(國民保導聯盟)은 1949년에 이른바 ‘반공검사(反共檢事)’ 오제도(吳制道)와 선우종원(鮮于宗源) 등이 주도해 결성한 ‘사상전향자’ 포섭기관이다. ‘보도’라는 말은 좌익사상에 물든 이들에 대해 전향과 자수를 통해 반공정신이 깃들도록 보호하고 이끌어낸다는 뜻을 담은 표현이다. 그런데 보도연맹의 발상은 이때가 처음이 아니라 일제강점기의 것이 고스란히 재현한 결과물이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제패망기에 존재했던 대화숙(大和孰)과 같은 전향자 사상교화단체도 그러하고, 세월을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면 1933년 7월에 결성한 — 그 이름까지도 그대로 닮은 — 경성보도연맹(京城保導聯盟)과 같은 존재를 어렵잖게 확인할 수 있다. <보도> 제94호(1941년 7월호)에 수록된 ‘성적기념비(聖蹟記念碑)’의 모습 경성보도연맹은 원래 경기도 학무과에서 주도하여 결성한 교외감독기관(校外監督機關)이자 학생선도기관(學生善導機關)으로, 여기에는 경성시내의 모든 중등학교와 초등학교, 그리고 인천 지역의 중등학교들이 망라하여 가맹되어 있었다. 겉으로는 각 학교의 생도들이 ‘유약한 음탕에 빠지지 않도록 보호선도하고 교외의 교육환경을 정화 향상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지만, 실제로는 1930년대의 비상시국 하에서 학생들이 ‘불순한 사상’에 노출되거나 물들지 않도록 감시하고 통제하는 것에 상당한 주안점이 있었다고 한다. 이곳에서는 1933년 12월 이후 매달 <보도월보(保導月報)>라는 이름의 기관지(1939년 3월부터는 <보도(保導)>로 명칭변경)를펴내자신들의활동성과와 기타 선전내용을 확산하는 매체로 활용하였다. 우리 연구소가 소장한 <보도>가운데 제94호(1941년 7월호, 8쪽 분량)에 수록된 내용을 골라 이달의 전시자료로 소개한다. 먼저 경성보도연맹의 소재지가 ‘경기도 학무과 내’로
사진첩으로 보는 일제강점기 금강산 수난사
사진첩으로 보는 일제강점기 금강산 수난사 친일귀족 민영휘 일가의 만폭동 바위글씨 여러 해 전 제3대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에 관한 자료를 뒤적이다가 우연히 그의 전기에서 참으로 만감이 교차하는 한 장의 사진을 마주한 적이 있다. 여기에는 다소 거만한 포즈를 취한 총독과 총독 부인이 등의자(藤椅子)로 만든 순여(筍輿, 대나무가마)에 나눠 타고 금강산 탐방에 오른 모습이 나란히 포착되어 있는데, 무엇보다도 그들의 비대한 몸집을 어깨와 팔뚝으로 지탱하며 서 있는 짚신 차림의 왜소한 조선인 가마꾼들이 묘한 대조를 이루며 애처로운 광경을 만들어내고 있다. 권세를 지닌 누구에게는 신선놀음과 같은 별천지의 세상이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그야말로 숨이 턱턱 막히는 험난한 계곡과 비탈면이 끝없이 이어진 고생길을 뜻하는 곳, 금강산(金剛山)은 바로 그러한 공간이기도 했던 모양이다. 금강산 관광에 나선 사이토 총독과 총독 부인 예로부터 금강산은 무수한 금강예찬(金剛禮讚)을 쏟아내게 만들 정도로 계절마다 그 모습이 달라지는 절경으로 소문난 곳이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 관한 한 그 풍경에만 주목한다면 금강의 속살을 제대로 살펴보기가 그만큼 더 어렵게 되고 만다. 금강산을 세계적인 명산으로 떠들썩하게 부각시키고 이를 적극 홍보하려 했던 주체가 바로 조선총독부였다는 점은 새삼 강조하지 않더라도, 금강산의 수난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점 또한 식민통치기와 고스란히 겹치니까 말이다. 금강산으로 이어지는 신작로와 철도가 개설되고 탐승회(探勝會)라는 이름의 여행단이나 아니면 개인단위의 탐방객들로 대규모 인파들이 골짜기마다 밀려들게 되자 이곳에 생업의 기반을 마련한 일본인들이 적지 않았다. 주로 음식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