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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사랑

시민특강 “여성스스로가 쓰고 남긴 ‘허스토리’”

2024년 3월 26일 220

[초점] 시민특강 <여성스스로가 쓰고 남긴 ‘허스토리’> 식민지역사박물관은 일반인 대상으로 여성사 특강을 실시하고 있다. <여성 스스로가 쓰고 남긴 ‘허스토리’>라는 주제로 3월 한 달 동안 매주 목요일 저녁 7시부터 2시간 가량 ZOOM을 통해 진행되는 시민강좌는 원래 교원 대상 연수 프로그램이었다. 박물관 관람객들이 여성사를 다루었으면 하는 바람을 전달하였고 교원연수의 반응도 뜨거웠기에 이번에 민족문제연구소 회원과 일반 시민을 대상으로 진행하게 되었다. 수강료는 20,000원이며, 민족문제연구소(식민지역사박물관) 회원의 경우 무료이다. 자료집은 사전 신청자에게 별도로 배송하고 있다. 3월 7일 첫 번째 강의는 이지원 대림대 교수의 “여성이 남긴 기록으로 밝힌 여성 독립운동 이야기”였다. 특히 연구소가 회고록을 펴낸 독립운동가 허은‧한도신‧지복영 선생 등 여성들의 수기‧일기를 중심으로 그들의 삶을 복원했다. 이뿐 아니라 기존 ‘남성 중심의 역사 쓰기’가 밝혀내지 못한 ‘이름 없는 여성 독립운동가’의 삶을 이해하는 실마리를 제공하였다. 3월 14일 두 번째 강의는 이상의 인천대 교수의 “여성 피해자의 목소리로 밝힌 강제동원 이야기”였다. 여성 강제동원 피해자의 구술자료를 통해 일제 강제동원의 피해를 다면적으로 조명했다. 국외 피해자보다 덜 주목받았던 국내에서 동원된 피해자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 더욱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이상의 교수는 국내 동원 피해자들이 정부 지원을 별로 받지 못하는 안타까운 현실을 짚어 주었다. 수강생의 강의평으로 “알려지지 않았던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감춰진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여성 독립운동가 발굴의 취지와 관점에 대해 새롭게 알 수 있었다. 용감한 여성 선조들에 대해

경기도 일제강점기 기념비 탁본전시회

2024년 3월 26일 177

[초점] 경기도 일제강점기 기념비 탁본전시회 경기도청 1층 로비에서 민족문제연구소 부천지부가 주최하고 경기문화재단과 식민지역사박물관이 후원하는 일제강점기 기념비 탁본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전시기간은 3월 11일부터 22일까지로 평일에만 관람할 수 있다. 친일파로 이름난 ‘송병준’, ‘송종헌’, ‘윤덕영’의 이름과 ‘팔굉일우’의 제국주의 구호가 새겨진 탁본 등 40여 점의 탁본을 Ⅰ부와 Ⅱ부로 나누어 전시하고 있다. Ⅰ부는 일제강점기 친일행적으로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이 오른 사람들. 그들을 칭송하고 고마워하며 찬양하는 화려한 미사여구의 글귀를 검은 먹바탕에 새하얗게 돋아올렸다. 이들에 대한 칭찬이 4·4조의 대구를 이루며 비면 가득히 채워져 있다. ‘선정’, ‘영세기념’, ‘치적’, ‘시혜불망’, ‘애민불망’, ‘청덕불망’ 등의 수식어들이 비석의 주인공 이름 뒤에 이어지며 그들의 추악한 이면을 감추고 있다. 한편 뭉개져서 판독할 수 없는 글자들이 듬성듬성 있다. 이름자 앞 성씨이거나 연도 앞 연호들인데, 창씨명과 쇼와(昭和)·다이쇼(大正) 같은 일왕의 연호가 여지없이 지워진 것이다. 비석에 새겨진 큰 글자와는 대조적으로 오른쪽 한켠에는 작은 글씨로 주인공의 행적을 소개한다. 『친일인명사전』에 실려 있는 일제강점기 그들의 삶의 발자취를 요약한 것이다. 군수, 도평의원, 조합장, 면장뿐만 아니라 조선귀족, 중추원 의원, 국방금품헌납자, 일본제국 수훈자를 두루 거친 이들이 많다. 화려한 미사여구 이면의 어두운 흑역사를 분명하게 알 수 있게 해준다. Ⅱ부의 탁본은 식민통치 관련 기념비를 대상으로 한 것이어서 대체로 비의 면적이 크고 비석 네 면에 글자가 빼곡히 채워져 있다. ‘권업모범장’, ‘치산치수’, ‘수룡수리조합’, ‘기동보린사’ 비에는 식민통치의 기간산업인 농업과 관련된 내용이

국제학술회의 “식민지시기 재조일본인과 전후 ‘재외재산’ 처리 문제” 개최

2024년 3월 26일 160

[초점] 국제학술회의 <식민지시기 재조일본인과 전후 ‘재외재산’ 처리 문제> 개최 민족문제연구소는 2월 22일 서울글로벌센터 9층 국제회의장에서 “식민지시기 재조일본인과 전후 ‘재외재산’ 처리 문제”라는 주제로 국제학술회의를 개최하였다. 이번 국제학술회의는 연구소가 수행하고 있는 한국연구재단 인문사회연구소지원사업 “재조일본인의 사회경제자료 통합DB 구축” 사업의 일환으로 열렸다. 연구소는 일제 식민지배의 구체적 실상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조선으로 이주한 일본인들의 사회경제적 상황에 대하여 체계적으로 파악해야 한다는 문제의식 아래, 이에 관한 조사·분석 및 DB구축 사업을 수행하고 있다. 이러한 사업수행의 성과를 점검하고 연구의 확대 심화를 도모하기 위하여 이번 국제학술회의 개최를 준비한 것이었다. 국제학술회의는 제1부 “일본인의 식민지 이주와 귀환” 및 제2부 “일본인 ‘재외재산’ 처리문제와 『재외사유재산실태조사표』”로 나누어 진행되었다. 제1부에서는 “일본인의 식민지 이주와 귀환”이라는 주제로 식민지기 조선 및 타이완 거주 일본인의 현황과 재조일본인의 조선 통치 인식등을 살펴보았다. 발표는 최영호(국제생활연구소), 중수민(鍾淑敏, 타이완 중앙연구원 타이완사연구소), 기무라 겐지(木村健二, 시모노세키시립대학 명예교수) 등이 담당하였다. 최영호는 발표문 「통계자료로 본 식민지시기 재조일본인의 현황과 추이」를 통해 해방을 전후한 시기 재조일본인의 인구통계에 집중하여 재조일본인 통계의 부정확, 상대적으로 안전했던 당시의 한반도, 재조일본인 여성인구의 의미, 출생률 및 사망률 분석, 재조일본인의 출신지 등에 대하여 검토해보았다. 중수민은 「통계자료로 본 식민지시기 대만 거주 일본인 현황」에서 일본의 타이완 지배정책의 변화, 타이완 거주 일본인사회의 형성, 일본인 인구의 변화 및 지역 분포, 직업 등을 살 펴보았다. 대만 거주 일본인 현황뿐만 아니라 최근

『풍속화보 임시증간 : 일청전쟁도회·정청도회』(1)

2024년 3월 26일 367

[소장자료 톺아보기 56] 표지화로 보는 청일전쟁의 실상 『풍속화보 임시증간 : 일청전쟁도회·정청도회』(1) ➊ 『풍속화보 임시증간 제78호 일청전쟁도회 제1회』(1894.9.25.) 청일전쟁 관련 기사를 다룬 첫 번째 풍속화보지. 아산만 풍도해전(豊島海戰, 7.25)과 성환에서의 육지전투(7.29)를 상세히 다루었다. 표지화는 풍도 앞바다에서 일본 함대가 청국 순양함 ‘제원’과 ‘광을’을 격침시키는 장면이다. ➋ 『풍속화보 임시증간 제82호 일청전쟁도회 제4회』(1894.12.20.) 7월 개전 후 일본군은 평양, 의주를 거쳐 북진을 계속해 11월 이후 구련성, 금주성, 대련, 여순을 함락시켜 압도적 우위에 섰다. 표지화에서 보듯이 일본군 장군이 청국군 지휘관을 군기로 깔아뭉갤 정도로 일본군은 승전 분위기에 젖어 있었다. ➌ 『풍속화보 임시증간 제84호 정청도회』 제5편』(1895.1.25.) 제5편에서는 이토 히로부미, 야마가타 아리토모와 더불어 조슈(長州) 3걸로 일컬어지는 이노우에 가오루(井上角五郞. 1836~1915)의 조선 체류 기록인 『한성내잔몽(漢城廼殘夢)』(1891.10)을 전재하였다. 이노우에는 임오군란 직후인 1882년말 조선에 건너와 조선의 외교고문에 임명되었고 『한성순보』를 발행했다. 김옥균 등 개화파 인사와 교류하며 갑신정변에 깊이 관여하였고 거사가 실패하자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 후에도 여러 차례 조선과 일본을 왕래했으며 1894년 직후 조선공사로 부임했다가 이듬해 귀국했다. 『한성내잔몽』은 갑신정변 당시의 조선 정세와 외교관계를 상세히 다루고 있다. 표지화는 갑신정변 실패 후 다케조에 이치로(竹添進一郞) 공사와 개화파가 일본으로 도주하자 이에 격분한 조선 민중들이 일본공사관을 불태우는 모습을 담았다. ➍ 『풍속화보 임시증간 제86호 정청도회』 제6편』(1895.2.25.) 1894년 12월초 일본군 제1군사령부는 혹독한 추위 속에서도 육상교통로의 요충지인 해성(海城) 공략에 전력을 기울였다. 12월 13일 해성을 점령했으나

민족사랑 2024년 3월호

2024년 3월 22일 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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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파 방정환에 관한 교육적 단상(斷想) 1

2024년 3월 6일 231

[후원회원마당] 소파 방정환에 관한 교육적 단상(斷想) 1 – 수운 최제우 시천주(侍天主) 사상에 입각한 인간상 – 이정아 서울대학교 평생교육원 강사 ‘어린이 인권 선언’ 100주년을 맞아 작년 11월 9일부터 11월 12일까지 ‘방정환과 21세기 세계의 어린이들’이라는 주제로 2023 세계방정환학술대회가 성황리에 마무리되었다. 필자는 11월 11 숙명여대 르네상스 프라자에서 진행된 <제4부 연구발표> 중 ‘어린이에 관한 한국의 사상운동과 21세기 어린이운동’을 주제로 한 <제3분과>에 발표자로 참여하였다. 발표 제목은 「천도교를 바탕으로 한 방정환의 사상적 기반에 관한 서설」이었다. 감사하게도 박상진 서울대 교육연구소 객원연구원이 토론을 맡아 주셨다. 이날 발표된 글은 『신인간(834호)』에 실린 졸고 「소파 방정환의 사상적 기반」의 내용에서 ‘인내천 사상’을 ‘시천주 사상’으로 수정하고 발췌하여 핵심내용을 짧게 요약한 글이었다. 의암 손병희의 사상은 보통 ‘인내천(人乃天)’으로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본래 수운 최제우의 자각은 ‘인내천’이 아니라 ‘시천주’였다. ‘시천주’는 ‘모든 사람 안에 거룩한 한울님이 모셔져 있다’는 의미이다. 시(侍)는 ‘모심’을 의미하며, 천(天)은 한울이며, 주(主)는 존칭어이다. 이런 이유로 필자는 「소파 방정환의 사상적 기반」이 아닌 「천도교를 바탕으로 한 방정환의 사상적 기반에 관한 서설」로 제목을 바꾸어 발표하였다. 그리고 천도교를 바탕으로 한 방정환의 사상적 기반으로 첫째, 시천주 사상에 입각한 평등사상, 둘째, 동심천사주의와 대비되는 동심한울사상, 셋째, 보국안민을 위한 개벽정신을 들었다. 이번 <민족사랑>에 싣는 글은 방정환의 사상적 기반이 천도교에 있다는 점을 바탕으로 하여 소파 방정환에 관한 교육적 단상의 첫 번째 논의이다.

망향의 동산에서 맞이한 새해

2024년 3월 6일 237

[후원회원마당] 망향의 동산에서 맞이한 새해 전민창 인턴. 한양대학교 대학원 석사과정 2월 15일 민족문제연구소는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보추협)와 함께 특별한 2024년 새해를 맞이했다. 예년과 마찬가지로 천안에 소재한 망향의 동산에 가서 신년 차례를 올린 것이다. 이곳에는 강제동원 피해자를 비롯하여 일제에 의해 고향을 잃고 타국에서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이들이 잠들어 있다. 망향의 동산은 과거 일본의 제국주의 침략으로 고통받은 이들을 위한 안식처이자, 식민지배의 아픔을 성찰하는 의미 있는 장소라고 할 수 있다. 이번 15일 망향의 동산 차례(茶禮)에는 이희자 보추협 대표(이사현 님의 딸, 군속으로 동원돼중국에서 사망)를 비롯하여 박남순(박만수 님의 딸, 군속으로 동원돼 남양군도에서 사망), 박진부(박선봉 님의 아들, 노무자로 동원돼 북해도에서 사망), 신명옥(박헌태 님의 며느리, 군인으로 동원돼 중국에서 사망), 정윤현(박운석 님의 며느리, 노무자로 동원돼 일본에서 사망) 보추협 회원들이 참여했다. 이들은 아버지의 얼굴을 제대로 본 적이 없다. 이들의 아버지는 일본에 의해 강제동원되었고, 태평양전쟁 시기에 모두 사망했다. 어떤 이는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 아버지와 생이별하였고, 어떤 이는 시아버지의 얼굴도 모르고 결혼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아버지의 죽음에 좌절하지만은 않았다. 일본 정부를 향해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에 진정한 사죄를 요구하며 현재도 역사의 현장 위에 서있다. 이러한 투쟁을 지속한 지 30여 년이 지나, 이들의 나이는 벌써 산수(傘壽 80세)를 넘겼다. 어느덧 치열한 싸움을 이어가기에 힘에 부치는 고령이 되었지만 일본에 사죄를 받아내겠다는 의지만큼은 여전히 뜨겁다. 망향의 동산에 가는

조선신궁 탓에 외진 곳으로 떠밀려난 ‘한양공원 표지비석(1912년)’

2024년 3월 6일 565

[이 땅에 남아있는 저들의 기념물 5] 조선신궁 탓에 외진 곳으로 떠밀려난 ‘한양공원 표지비석(1912년)’ 왜성대공원, 경성공원, 한양공원, 그리고 결국에 남산공원 이순우 특임연구원 길을 가다가 어떤 이가 ‘남산공원’으로 찾아가는 행로를 물어온다면 퍼뜩 그 대답이 떠올려지지 않는 때가 있다. 목적지가 ‘남산서울타워’ 쪽인지, 옛 남산식물원과 분수대가 있던 ‘조선신궁 터’ 쪽인지, 충무로역에 인접한 ‘남산골한옥마을’ 쪽인지, 힐튼호텔이 자리한 남산성벽의 끝자락 쪽인지 ……, 뭐, 대략 이런 정도의 특정지점을 먼저 얘기해주지 않으면 도무지 어디를 알려달라는 것인지 잘 가늠이 되지 않을 만큼 남산공원의 범주 자체가 워낙 너르기 때문이다. 알고 보니 흔히 ‘장충단공원’으로 알려진 지역도 이미 1984년 9월 22일에 건설부 고시 제374호에 따라 “장충근린공원(297,500㎡)을 폐지하고 남산자연공원(2,971,546㎡)에 병합 처리”되었으므로 이곳 역시 일찍이 남산공원 영역에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남산공원’이라고 하면 남산의 동서남북 전체를 포괄하는 명칭이라고 보면 크게 틀리지 않는다. 그런데 이처럼 광대한 남산공원도 실상은 최초에 사방 1정(町; 1정=109.09미터) 정도의 작은 땅에서 시작되었다. 경기도(京畿道)에서 편찬한 『경기지방의 명승사적(京畿地方の名勝史蹟)』(조선지방행정학회, 1937), 35~36쪽 부분에는 ‘남산공원’의 기원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정리한 구절이 포함되어 있다. [남산공원(南山公園): 경성부 왜성대정(倭城臺町, 와죠타이쵸)에 있고, 원내(園內)에 경성신사(京城神社)를 봉사(奉祀)한다. 여기부터 조선신궁(朝鮮神宮)에 이르는 참도(參道)의 부근 일대를 한양공원(漢陽公園)이라 부른다.] 명치 30년(1897년)에 이르러 경성일본거류민(京城日本居留民) 사이에 숙제(宿題)로 있던 공원설치의 논의가 진전되어, 당시의 공사(公使) 카토 마스오(加藤增雄)는 한국정부(韓國政府)에 교섭하여 동년(同年) 3월 17일 현 갑오기념비(甲午記念碑)를 중심으로 한 약 1정사방(町四方)의 지역에

신흥무관학교 의감(醫監)을 지낸 안사영과 그 형제들

2024년 3월 5일 392

[연구소 글방 10] 신흥무관학교 의감(醫監)을 지낸 안사영과 그 형제들 박광종 특임연구원 연구소는 오랫동안 신흥무관학교 출신 및 관련 인물에 대한 상세한 이력을 추적해왔다. 1911년 6월 개교부터 1920년 가을 폐교 때까지 10년 간 신흥무관학교를 수료한 졸업생 수를 최대 3,500여 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엄청난 졸업생 수에 비해 정작 구체적인 이름이 기록된 사람은 300여 명 안팎에 불과하다. 물론 신흥무관학교를 세우는데 크게 기여한 서울의 이회영·이시영 일가, 경북 안동의 이상룡·김대락 일가에서 배출한 졸업생들은 이름 뿐 아니라 그 족적이 남아있으나 대부분의 졸업자는 이름 석 자에 출신지 정도만 나와 있어 그 이력을 추적하기가 만만치 않다. 신흥무관학교 의감을 지낸 안사영(安思永, 1890~1967)도 그런 분들 중의 한 분이다. 신흥무관학교 교관이었던 원병상이 쓴 「신흥무관학교」(『신동아』 1969.6월호, 243쪽)에 “(신흥무관)학교가 이곳 (고산자) 대두자로 옮길 때의 교직원 부서…의감 안사영”이라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안사영에 대한 일제강점기 신문잡지, 각종 문헌과 문건뿐 아니라 온라인 정보를 뒤지던 중 어느 블로그에서 ‘음악가 안기영 인물 발표회’ 발표 : 안기영의 생질 이화옥, 「KBS 社友會」 라는글을 찾았다. 거기서 안사영의 이력뿐 아니라 그의 동생 안기영(安基永, 1900~1980)1이 신흥무관학교 졸업생인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안사영과 안기영을 비롯한 6남 3녀의 형제자매와 그들의 이름이 실린 안사영 일가의 기념사진을 찾은 것은 큰 수확이었다. 무슨 잔치인지 모를 이 가족사진(1944년)에서 부친 안석호(安奭鎬, 1874~1948)와 모친 이경애(李敬愛) 슬하의 형제자매가 부모님을 가운데 두고 여느 회갑

중국 대륙의 조선인 김성호를 아십니까?

2024년 3월 5일 272

[기고] 중국 대륙의 조선인 김성호를 아십니까? 원희복 민족일보기념사업회 이사장 북경 천안문 동쪽으로 17km 떨어진 곳에 통주(通州)라는 곳이 있다. 이곳은 현재 북경시 통주구지만 원래 통현(通縣)이라 불리는 별개 도시였다. 이곳은 조선에서 북경으로 가는 길목에 있어 『열하일기』에 나오는 팔리교(본명 영통교)가 있다. 북경 대운하의 종착지로 북경으로 들어가는 물자의 기착지이기도 했다. 1922년 중국 여행증명제도가 철폐되고, 1923년 조선인이 대거 학살된 관동대지진이 일어나고, 북경에 있는 중국 대학교 진학이 상대적으로 쉬워 교육에 유리했고, 또 상해처럼 일본의 경찰권 행사가 허용되지 않았다. 게다가 북경에 비해 땅값도 저렴하고, 조선에서 오는 소식도 빨랐기 때문에 일제 강점하 조선인 정착이 많았다. 1925년 일본 조사자료에 따르면 통현에 정착한 조선인은 세 가구, 22명이다. 이중 최초의 정착인은 1915년 평북 의주 출신의 기독교 장로로 1911년 105인 사건에 연루됐던 김기창(金基昌)이고 다음이 황해도 진남포 출신으로 역시 기독교 장로였던 김병순(金炳恂) 가족이 1921년 이주했다. 한편 강원 철원 출신으로 미국에서 군사학을 공부하고 이승만과 의형제 사이일 정도로 가까웠던 박용만(朴容萬)도 이주했다. 박용만은 이곳에 어머니가 먼저 이주해 있던 것으로 보아 박용만 가족은 이미 이전에 이주했을 것이다. 김병순은 큰아들 환(煥), 둘째아들 우경(又卿), 큰딸 일경(日卿), 막내아들 찬(燦), 막내딸 순경(順卿) 등 3남 2녀를 뒀다. 김병순은 김기창과도 교회 장로로 친했지만, 동향인 백범과 친했다. 그래서 백범이 북경에 오면 김병순 집에 묵었다고 한다. 김병순의 자식 중 김찬과 순경은 각각 중국인 여성 도개손(陶凱孫)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