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을 통한 자료 기증 잇달아
일본에서 수화 통역자로 활동하고 있는 기타무라 메구미 씨가 교류하고 있는 청각장애우들의 소장자료를 전달받아 4월 11일 연구소에 기증했다. 지난 11월에도 장애우들의 소장자료를 전달한 메구미씨는 지속적인 교류활동을 통해 적극적인 자료기증을 유도하고 있다(민족사랑 2016년 11월호 참조). 이번 기증자료는 교과서, 지도, 엽서 등 문서류로서 특히 1944년 문부성에서 발행한 <중등문법>에는 패전 후 전쟁과 관련된 예문을 검은 색으로 칠한 흔적도 남아있다. 한편 기타무라 메구미 씨의 연구소 방문은 4・16 세월호 참사 추모를 위해 방한하면서 이루어졌다. 야노 히데키 씨, <계간 삼천리> 등 도서 기증 4월 16일, 야노 히데키 씨(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잇는 모임 사무국장)가 <日本歷史の圖鑑>(1957), <季刊 三千里> 등 총 40권을 기증했다. 특히 <季刊三千里>는 강재언, 김달수, 이진희 등 재일 조선인 학자들이 1975년부터 1987년까지 총 50호를 발행한 진보적인 일본어판 종합잡지다. 김지하 오적필화사건, 김대중납치사건 등 한국의 정치문제와 강화도사건 100년, 3・1운동 60주년 특집 등 한국의 역사, 문화를 주요 내용으로 다루고 있다. 4월 16일 히다 유이치 씨(일본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 공동대표)가 <現場を歩く, 現場を綴る: 日本·コリア·キリスト教>(2016) 등 도서 3권을 기증했다. 문응상 회원(강원지부), 전교조 활동 자료와 도서 기증 4월 12일, 문응상 회원이 교무수첩, 월급명세서, 40년간 들고 다닌 가방, 학생들의 편지, 신문스크랩, 도서 등 귀중한 자료를 연구소에 기증했다. 1981년 교사생활을 시작한 문응상 회원은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창립 이전 ‘교사협의회’ 시절부터 지금까지 전교조 활동에 참여해 왔다. 문 회원은 방안 가득 채웠던 자료와 도서를 모두 기증하고
[기고] 영화 〈나는 부정한다〉를 좀 더 잘 보려면
* 이 글은 <프레시안> 4월 28일자에 ‘영화 〈나는 부정한다〉의 모든 것 – 영국 명예훼손 재판의 이해’라는 제목으로 실렸다. 진실이 법정에 서게 된 파라독스 이 영화는 실제 재판(어빙사건)에 기초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 독일이 저지른 홀로코스트 또는 쇼아라고 이름 붙여진 유대인대학살을 부정하는 역사학자와 이를 규탄하는 역사학자 사이의 대결을 극화하고 있다. 어빙사건은 유럽 곳곳에서 신나치 등 극우세력들이 등장하고 역사적 진실을 부정하려는 움직임이 점차 거세지고 있는 가운데 일어났다. 미국의 립스타트 교수는 용기 있게 이러한 흐름을 고발하는 책을 썼다. 이에 대해 홀로코스트 부정론자인 영국학자 어빙은 영국법원에 명예훼손으로 민사소송을 걸었다(영국의 High Court라는 법원은 대개의 영한사전에는 고등법원이라고 번역되고 있고 영화의 번역도 이에 따른 것 같다. 하지만 한국의 사법제도에서 말하는 항소법원으로서의 고등법원이라는 의미는 아니고 제1심 법원 역할을 한다). 립스타트는 졸지에 미국이 아닌 영국에서 피고의 자리에 서야만 했다. 다른 나라에서라면 어빙이 민사이든 형사이든 피고석에 앉았어야 했을 터이다. 부정론자가 아니라 역사적 진실을 지키려는 사람이 법정에 서게 된 이 역설은 어빙과 그의 지지자들이 자신들이 이길 가능성이 높은 나라에서 재판하려고 했기 때문에 생겨났다(재판이 끝난 뒤 립스타트는 과연 2005년에 ‘법정에 선 역사(History on Trial)’이라는 책을 쓰기도 했다). 소송이 제기된 1996년의 시점에는 유럽의 많은 나라에서 홀로코스트는 물론 전쟁범죄와 반인도적 범죄를 부정하는 것도 범죄로 처벌하고 있었다. 어빙은 전략적으로 그렇지 않은 영국을 선택한 것이다(영국에서는
20개월 ‘야탑투쟁’, 적폐청산 투쟁으로 승화시켜야
∷ 인터뷰 – 경기동부지부장 허남해 / 정리 : 방학진 기획실장 5·18의 도시 광주가 우리사회의 민주화를 비롯해 진보적 발전에 견인차 역할을 해왔다면 청년배당, 무상교복, 산후조리비, 시립병원 건립 등 최근 몇 년 동안에는 그 역할의 상당 부분을 성남시가 주도해 왔음을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바야흐로 성남이 진보의 중심 도시로 부상하고 있다. 이곳 성남의 번화가 중 한 곳인 지하철 야탑역 광장에서 허남해 경기동부지부장을 비롯한 많은 회원들이 만 20개월 동안 이른바 ‘야탑투쟁’을 벌여 왔다. 5월 12일 저녁 7시에 성남동 복지회관에서 허남해 지부장을 비롯해 야탑투쟁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회원들 몇몇과 함께 뒷이야기를 들었다. 마침 이날 문재인 대통령이 교육부 첫 업무지시로 국정 역사교과서 정책을 전면 폐지한다고 발표했다. 문 : 야탑투쟁은 어떻게 시작했나요? 답 : 2015년 9월경 사드(THAAD) 배치가 예견되자 연구소 회원이면서 평화와통일을여는사람들 회원이신 서덕석 목사와 김종국 회원 두 분이 야탑역, 모란역, 수내역 등 성남 시내에 있는 거의 모든 지하철 역사를 순회하면서 주로 퇴근 시간에 맞춰 피켓 시위를 하셨어요. 그러면서 차차 서명대도 설치하고 작은 앰프도 마련하여 진행하던 차에 10월 12일 국정교과서 국정화고시가 발표되자 분위기가 심각해졌지요. 광복회 성남지회장이었던 이용위 회원, 이순선 회원, 박종완 부지부장, 성백만 회원, 신승학 회원 등 여러 회원들이 점점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문 : 야탑역 광장에 천막까지 설치하셨군요. 천막 설치 비용이 만만치 않았을 텐데요. 답 : 국정화고시를 강행한
식민지 관료의 민족차별
이번에 소개할 자료는 조선총독부 관리임용에 관한 문서이다. 먼저 이원국의 승서장은 1914년 2월 28일 조선총독부 군수 정7위 이원국을 고등관 5등으로 승서陞敍(벼슬을 올려줌)한다는 내용과 함께 일본의 내각총리대신 ‘야마모토 곤노효에山本權兵衛’의 직인이 찍혀 있다. 반면에 1917년 12월 15일자 박준호의 판임관견습 임명장으로 보이는 문서에는 월봉 15원을 지급한다는 내용과 함께 직인 없이 ‘조선총독부’ 기관명만 명시되어 있다. 관직의 지위에 따라 임명기관이 다르다. 이는 주임문관奏任文官 이상의 진퇴는 내각총리대신을 거쳐 이를 일왕에 상주上奏하고, 판임문관判任文官 이하는 조선총독이 전행專行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조선총독부관제 칙령 제354호) 조선총독부 관리는 크게 고등관과 판임관(1~4등)으로 구분된다. 고등관은 임명의 형식에 따라 친임관親任官, 칙임관勅任官(1·2등), 주임관奏任官(3~9등)으로 구분된다. 주임관 아래에는 하급관료인 판임관이 있다. 판임관 이상을 관리라 통칭했다. 정규직제 외의 보조인력으로 고원雇員, 용인庸人, 촉탁囑託 등을 두었다. 고원은 공무를 수행하기는 하지만 관리의 신분을 얻지 못한 준공무원이고, 용인은 국가에 고용되어 있는 하급종사자거나 일용노동자다. 촉탁은 임시직으로 보수는 관리의 대우를 받는 자부터 고원의 대우를 받는 자까지 다양하다. 총독부의 관리임용정책은 기본적으로 민족차별을 전제로 하고 있었다. 식민통치기구의 조선인 임용은 소수에 그쳤으며 말단 직위에 임용된 경우라도 신분·보수·진급 등에서 차별 대우를 받았다. 전체 고등관 관료 중 조선인의 비율은 20% 내외이고 그 중 절반은 군수를 비롯한 지방직이었다. 고등관 중에서도 핵심인 총독부 본부 관료의 4%정도만 조선인이었으며 식민지 기간 동안 단 2명의 조선인이 학무국장(차관급)에 기용됐다. 중앙정책의 대민집행관으로서 일본의 식민통치를 선전·관철시키고 조선인들에 대한 통제와
[특집] 새 정부, 역사 적폐 청산해야 – 더 이상 ‘외교참사’를 되풀이하지 말라
지난 이명박, 박근혜 정권 시기에 한일관계는 최악의 상황을 향해 치달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2012년 8월 이명박 대통령의 돌출적인 독도 방문으로 역사・영토문제가 불거졌고, ‘위안부’문제의 해결을 대화의 선결조건으로 내건 박근혜 대통령은 2015년 12월 28일 굴욕적인 ‘위안부’문제 합의라는 ‘외교참사’를 저질렀다. ‘합의’가 나온 이후 양국 간의 대화는 실질적으로 중단되었으며, ‘교육칙어’의 부활을 비롯하여 평화헌법의 개정까지 시도하고 있는 아베 정권의 군국주의화 행보는 그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가속도를 내고 있다. 그러나 일본군‘위안부’, 원폭피해자, 사할린동포, 시베리아억류자, BC급 전범, 근로정신대, 야스쿠니문제, 강제동원・강제노동 등 과거사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으며 피해자들은 하나 둘씩 세상을 뜨고 있다. 피해자들의 뜻을 철저하게 무시한 한국 정부의 ‘외교참사’가 불러온 재앙이 이 문제뿐만 아니라 다른 과거사 현안의 해결에도 걸림돌이 되고 있는 상황이다. 실질적으로 한국 사회에서는 ‘한일위안부 합의’는 이미 폐기되었다고 보아도 마땅할 것이다. 새 정부는 한일관계의 개선을 위해 필수적인 과거사 문제의 해결방안을 종합적으로 모색해야 할 것이다. 현재 꽉 막혀있는, 일본과 대화의 물꼬를 틀 수 있는 방안의 하나로 전사자 유골반환 문제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2016년 4월 일본 정부는 ‘전몰자유골수집추진법’을 제정하여 전사자 유골수집사업을 국가 차원에서 본격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이 법안은 아시아·태평양전쟁에서 사망한 전사자의 유골을 수집하여 유족들에게 돌려주는 것을 국가의 책무로 정하였다. 이에 따라 일본에서는 발굴된 유골을 유족에게 돌려주기 위해 유골의 DNA를 추출하여 데이터베이스로 만들고 유족들에게는 DNA
온 세상 아이들 얼굴에 환한 웃음꽃이 피는 세상을 만드는 것
회원마당 은종복 서울중부지부 회원, 책방 풀무질 대표 나는 서울 명륜동에서 작은 인문사회과학 책방 풀무질을 23년째 꾸리고 있다. 1985년 여름 처음 연 이 책방은 일꾼이 3번 바뀌었고 내가 4번째 일꾼이다. 그때는 전국에 있는 대학 앞에 내가 꾸리고 있는 풀무질 같은 인문사회과학 책방이 하나 둘씩 있었다. 지금은 모두 문을 닫고 손가락에 꼽을 정도만 남았다. 책방 이름이 왜 ‘풀무질’일까. 대장간에서 낫이나 칼을 만들 때 불을 피우고 센 바람이 일어나도록 푸푸 불어주는 기구가 ‘풀무’다. 그 풀무로 바람을 일으키는 행위가 바로 ‘풀무질’이다. 이 단어에는 1980년 5월 전두환 일당들이 광주에서 무고한 사람들을 무참히 죽이고 정권을 잡은 것에 불바람을 일으켜 맞서려는 저항의 뜻이 담겨 있다. 풀무질은 그 당시 성균관대학교 신문방송학과 학회지 명칭이었고 그것을 본따 책방 이름을 지은 것이다. 전에 일했던 사람들은 2, 3년씩 풀무질을 꾸렸다. 나도 딱 10년만 책방을 하려 했다. 2003년 4월 1일이 내가 책방을 꾸린 지 10년째 되는 날이었다. 책방은 다른 사람들에게 맡기고 농사꾼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내게는 책방을 그만 두지 못하게 만든 두 가지 큰 계기가 있었다. 하나는 내가 책방을 꾸리고 3년 뒤인 1997년 4월 15일에 국가보안법 이적표현물 판매죄로 남영동 대공분실로 끌려갔고 서울구치소로 옮겨 한 달을 갇혀 있었다. 그때 수사관들은 나를 국제사회주의자 조직원으로 몰려 했는데 아무런 혐의가 없자 이적표현물을 팔았다는 죄를
미영격멸을 구호 삼아 달린 부여신궁과 조선신궁 간 대역전경주
간혹 신사(神社)와 신궁(神宮)이 어떤 차이가 있는지 궁금한 때가 있다. 이 둘을 정확하게 구분하는 명문 규정은 찾을 수 없으나, 신궁은 대개 메이지시대 이후 ①천황, ②황실의 조선신(祖先神), ③일본평정에 공적이 있는 특정한 신을 제신(祭神)으로 삼는 신사를 일컫는 표현으로 정착된 개념이라고 알려진다. 그러니까 신궁은 ‘신사 중의 신사’를 가리키는 것이고, 여느 신사와는 격을 훨씬 달리하는 존재인 것은 분명하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는 동안 식민지 조선에서 창립된 신궁은 두 군데이다. 그 가운데 하나는 익히 알려진 대로 ‘조선신궁(朝鮮神宮)’으로 이 땅을 영구 통치하기 위한 그네들의 수호신이 사는 영역으로 간주되는 곳이다. 또 다른 하나는 백제의 옛 도읍지인 부여 땅에 세우려던 ‘부여신궁(扶餘神宮)’이며, 이곳은 이른바 ‘내선일체(內鮮一體)’의 정신적 고향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부여신궁의 창립과 관련하여 <통보(通報)> 제42호(1939년 4월 1일자)에 수록된 총독부의 발표문에는 그 취지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때마침 미증유(未曾有)의 비상시국을 맞이하여 반도의 사명은 점점 무거워져 가고, 혼연일체로 대륙전진기지로서의 중대사명달성에 매진할 때를 당하고 있으므로, 총독부로서는 시정(施政)의 전반에 걸쳐 거듭 일단의 비약적 진전을 도모하고자 전력을 경주해 나가겠습니다만, 이럴 경우 서정(庶政) 진전의 원동력이 되는 것은 숭고하고도 왕성한 정신력에 있다는 것은 말할 나위가 없는 바입니다. … 그리고 역사를 살펴보건대 상고시대에 우리나라(일본)와 삼국제국(三國諸國)과의 관계는 대단히 깊었고, 그중에 백제(百濟)와는 서로의 왕래가 빈번하여 정치, 경제 내지는 문화에 있어서 상호의 교섭이 실로 골육(骨肉)보다도 심상치 않았던 점이 있었으니, 그 사이 6대에 걸친 120여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최상남 회원,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자료 총 18점 기증
기증자료소개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최상남 회원,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자료 총 18점 기증 2월 9일과 3월 22일 2회에 걸쳐 최상남 님이 선친 최판용 씨의 사진과 전사자 유골전달에 관한 문서 등 총 18점을 기증했다. 최판용씨는 1941년 일제의 침략전쟁에 강제동원되어 1945년 7월 22일 버마(현재 미얀마)에서 전사, 1959년 4월 6일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 되었는데, 사진 뒷면에는 전사 날짜와 장소 성명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최상남 님은 아버지의 유품을 기증하면서 다시는 이런 슬픈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의미에서 기록이 중요하니 연구소에서 정성껏 보존해 달라고 당부했다. 심정섭 지도위원 제52차 자료기증, 도서류, 문서류 총 40점 보내와 2월 22일, 심정섭 지도위원 겸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이 52번째로 자료를 정리해 보내왔다. 이번 기증자료는 1950년~60년대에 강화도에 거주한 황OO가 받은 상장, 통지표와 <오천년민족문화사료전>(1993), <제5회대한민국서예대전도록>(1993)등문서와도서다. 이덕문 회원 미주 교포사회 민주화 운동 관련 자료 기증 재미동포 이덕문 회원이 3회에 걸쳐 미주 한인 민주화운동 관련 자료 등을 기증했다. 신간회 신의주지부에 참가한 선친 이윤근 선생과 1970년대 유신독재에 맞서 민주화운동을 전개한 모친 김복선 권사의 자료 등 총 38점이다. 미국 동부 오레곤 주에서 1980년대 민주단체가 설립되는 과정을 기록한 “오레곤주에 심은 민주화의 씨앗”, 김근태 씨의 고문 사실을 폭로하고 고문 중지 서명을 조직했던 선전물 등이 포함돼 있다. 1990년 평양에서 개최된 범민족대회 관련 자료들도 남북 민간 교류를 알려주는 소중한 사료이다. 윤무한 선생 유족, 유품·도서 기증 3월
박정희 혈서 관련 정미홍 형사재판 방청기
2014년 정미홍 씨가 “민족문제연구소가 박정희 혈서기사를 조작했다”는 취지의 글을 지속적으로 퍼트리자 연구소는 정미홍 씨를 상대로 민형사소송을 제기했다. 민사 손해배상소송은 1심과 2심에 이어 최종심까지 연구소가 승소하였다. 올해 1월 25일 대법원은 연구소에 대한 정미홍 씨의 명예훼손 사실이 인정된다며 300만 원을 배상하라는 원심판결을 확정한 것이다. 이렇게 민사소송은 연구소 승소로 마무리되었지만 형사소송은 현재 1심이 진행되고 있다. 3월 23일,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박한용 교육홍보실장을 증인으로 하는 두 번째 증인심문 공판이 317호 형사법정에서 열렸다. 오후 2시 30분, 법무책임자인 나는 박 실장을 교대역에서 만나 함께 서울중앙지방법원으로 올라갔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시끌벅적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317호 형사법정 앞은 이미 태극기와 성조기를 든 노인들로 가득차 복도를 지나다니기 어려울 정도였다. 증인심문을 마친 후 서울중앙지방법원 앞 광경. 오른쪽 태극기 바로 밑 빨간옷이 정미홍 “우리 뒤에 친박집회 관련 재판이 있나봐요.” 박 실장도 그런 것 같다며 “이런데서 태극기 부대를 만나다니 별일이 다 있네”라며 실소를 지었다. 10여 분쯤 지나 문이 열리자 대기하고 있던 사람들이 법정 안으로 들어갔다. 방청객이 너무 많아서 의자가 부족하여 뒤에 온 사람들은 바닥에 앉아야 했고 더 늦은 사람들은 앉을 자리도 없어서 서있어야 했다. 개정 시간이 임박하자 정미홍 씨와 변호인이 들어왔다. 앉아 있던 방청객들이 일제히 박수를 치며 환호성을 질렀다. 아까 그 노인들은 바로 우리 재판을 방청하러 온 사람들이었다. 정미홍 씨가 방청객을 향해 “와주셔서
이승만암살 미수사건의 진실
사진 속 노인 여기 한 장의 사진이 있다. 임시로 만들어진 듯 보이는 나무 단상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연설하는 사진이다. 단상 앞에는 태극기가 게양되어 있고 그 뒤에는 헌병 한 명이 단상을 엄중히 지키고 있다. 그런데 단상 뒤편에 한 노인이 보인다. 몸은 말랐지만 예전엔 힘깨나 쓴 듯 기골이 탄탄해 보이는 노인이다. 주변 풍경과 섞여 명확하지는 않지만 그는 머리 위로 한 팔을 들고 있다. 손끝에 뭔가를 쥐고 있다. 권총이었다. 1952년 6월 25일 임시수도 부산의 충무로광장에서 6・25 2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그런데 이날 기념식에서 이승만대통령암살미수사건이 벌어졌다. 범인은 당시 나이 62세였던 유시태. 그는 내빈석에 앉아 있다가 이승만 대통령이 연설을 시작하자 성큼성큼 단상으로 다가가 총을 겨눴다. 그는 대통령을 향해 2~3발을 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총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모두 불발되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을 처음 보도한 기사에는 유시태가 총을 쏘려고 할 때 주변을 경계하고 있던 헌병 중위 이범준과 치안국장 윤우경에게 발각되어 저지당하는 바람에 제대로 대통령을 향해 총을 쏠 수 없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다시 사진을 보자. 사진으로만 판단한다면 팔의 각도가 펴지는 순간 유시태는 방아쇠를 당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단상을 지키는 헌병 뒤에 한 남자가 유시태 쪽을 향해 서있다. 그리고 그와 유시태 사이에 앞머리가 벗겨진 한 남자의 얼굴이 반쯤 보인다. 그들이 유시태의 저격을 저지한 헌병 중위와 치안국장이었을까? 그것을 알 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