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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사랑

항일무장투쟁 유적지 간도(間島)를 가다

2023년 9월 22일 446

[답사기] 항일무장투쟁 유적지 간도(間島)를 가다 김재광 경기 북부 후원회원 DMZ 녹슨 철조망 앞에서 대륙으로 달리는 꿈을 꾸다 지난 4월 29일 민족문제연구소 경기북부지역위원회에서 주최하고 연천지회에서 주관한 ‘정전협정 70주년기념 연천평화기행’이 진행되었다. 허리 잘린 한반도 DMZ를 사이에 두고 7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남북의 청년들이 총부리를 겨누고 대치하고 있는 이 비극의 현장 연천군 태풍전망대를 견학하고 분단된 조국의 뼈아픈 현실 앞에 가슴이 조여드는 심정은 평화를 사랑하는 국민이면 누구나 느끼는 감회일 것이다. 말없이 남북을 흐르는 임진강은 알아주려나… 무거운 짐을 가슴에 안고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동행한 이진선이 본인 소개 시간에 홍보한 ‘항일무장투쟁유적지 간도를 가다’ 역사탐방 프로그램을 듣고 “북녘땅이 아니면 어떠랴! 북중 국경을 가보고 싶다”는 꿈을 품게 되었다. 5박 6일 역사탐방에 참여하려면 여러 가지 난관이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아내의 허락을 받는 것이 최우선이었다. 역사탐방에 동행한 동지 박충식이 함께 가자는 강력한 권유에 이끌 려 용기를 내서 아내에게 허락을 받고 결정하니 준비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이번 역사탐방을 통해서 보고 느끼고 싶었던 것이 있었다. 첫째, 윤석열 보수정부가 취임한 후 1년 남짓한 기간 동안 북중러 관계가 노태우 정권에서 추진한 북방외교의 성과인 한중·한소 수교 전보다 더 분위기가 냉각되어서 북중러 국경을 맞대고 있는 ‘옌벤조선족자치주’를 중심으로 살고있는 조선족의 감상을 알고 싶었다. 둘째, 북중러 삼국 접경지 훈춘시 방천풍경구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두만강의 현재 모습과 동해를 친견하고 싶은 꿈과 단둥에서 바라보는

‘녹두장군’ 전봉준은 왜 좌감옥(左監獄)에서 최후를 맞이했을까?

2023년 9월 21일 786

[식민지 비망록 94] ‘녹두장군’ 전봉준은 왜 좌감옥(左監獄)에서 최후를 맞이했을까? 근대시기 이후 사형제도의 변경과 처형장의 공간 변천사 이순우 책임연구원 이번 호를 끝으로 ‘식민지 비망록’은 막을 내립니다. 2015년 5월 「위문대의 시초는 일본군 위문용」을 시작으로 8년여 동안 94회를 연재해왔습니다. ‘식민지 비망록’은 이순우 책임연구원의 제안으로 글감을 다양화하고자 10월호부터 ‘이 땅에 남아있는 저들의 기념물’이란 코너로 바뀝니다.(필자는 그대로입니다) 일제 강점기 일본인이 만든 건축물이나 기념비 등에 얽힌 사연을 소개할 예정입니다. 이제껏 한 호도 거르지 않고 좋은 글을 집필해준 이순우 책임연구원의 노고에 고마움을 표하고 새 코너에 대한 후원회원들의 꾸준한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 편집자 주 군기시 앞길(軍器寺前路, 무교), 철물전로(鐵物前路, 종로 철물전교 앞길), 서소문 밖 큰길(西小門外 通衢), 모화관 앞(慕華館前), 당현(堂峴, 당고개), 청파 앞길(靑坡前路), 노량사장(露梁沙場, 새남터), 만천평(蔓川坪), 양화진 나루터(楊花津頭) ……. 여기에 나열한 곳은 조선시대를 통틀어 효수(梟首)를 하거나 처형장(참형 또는 교형)으로 사용된 대표적인 공간들이다. 가만히 살펴보면 이러한 처형장은 대개 서울 도성의 서쪽 일대에 몰려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와 관련하여 우선 『서경(書經)』, 하서편(夏書篇) 감서(甘誓)에 “명을 따르면 ‘조’에서 상을내릴 것이고, 명을 따르지 아니하면 ‘사’에서 죽이며 내 너희를 노륙(孥戮; 처자식까지 함께 처형하는 것)할 것이니라[用命 賞于祖 不用命 戮于社 予則孥戮汝]”라고 한 구절에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여기에서 ‘조(祖)’는 종묘(宗廟)를 말하며 ‘사(社)’는 사직(社稷)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그리고 『주례(周禮)』 고공기(考工記)에 일컫기를 “좌조우사 전조후시(左祖右社 前朝後市; 왼쪽에 종묘, 오른쪽에 사직, 앞쪽에

독립신문에 기록된 봉오동·청산리 전투

2023년 9월 21일 758

[자료소개] 독립신문에 기록된 봉오동·청산리 전투 올해는 봉오동·청산리 전투가 일어난 지 103주년이 되는 해다. 일제 강점기 우리 독립군이 일본군에 직접 맞붙어 대승한 3대 대첩으로 1920년 6월의 봉오동 전투, 10월의 청산리 전투, 1933년 대전자령 전투가 있다.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에 모두 참전하여 대승을 이끈 주역은 바로 홍범도 장군이다. 최근 육군사관학교에 있는, 홍범도 장군을 비롯한 다섯 분의 흉상을 철거한다는 육군사관학교의 발표가 있었는데 이는 명백히 반민족적 처사이므로 마땅히 철회되어야 한다. 이번 호에는 독립신문에 기록된 봉오동 · 청산리 전투 기사를 전재한다. 『독립신문』 제88호(1920.12.25.) 4면의 「북간도(北墾島)에 재(在)한 아독립군(我獨立軍)의 전투정보(戰鬪情報)」와 『독립신문』 제95호(1921.2.25.) 3면의 「대한군정서 보고」이다. 원문이 국한문 혼용체여서 이를 읽기 쉽게 요즘 어법으로 풀어썼다. 끝으로 ○○는 원문의 ○○를 그대로 두었고, ●●는 원문 중 판독되지 않는 글자임을 밝혀둔다. ― 편집자주 북간도에 있는 우리 독립군의 전투정보 1920년 11월 12일 군무부(軍務部) 발표 삼둔자 부근의 전투 (1) 전투 전 피아(彼我)의 형세 적은 아군의 도강 습격을 방어하기 위하여 두만강 연안에 방어(경계)선을 배열하다. 아군은 현재 전투를 목적하지 않고 전쟁 준비를 목적함으로써 중국 길림성 연길, 화룡, 왕청, 혼춘 각 지방에서 모집 훈련중이었으나 우리나라 안에서 활동할 필요가 있으므로 아군의 기습부대와 전령부대는 끊임없이 강 건너 왕래함으로 적의 경찰대를 격파케 되다. (2) 전투경과의 상황 대한민국 2년(1920년) 3월 1일 이래로 6월 초까지 32회의 작은 전투를 하였는데 아군의 기습대와

도산서원 철폐운동

2023년 9월 20일 480

[연구실 글방 – 7] 도산서원 철폐운동 권시용 선임연구원 한때 조선시대 서원을 공부했습니다. 오래전 일이지만 미련이 있어선지 가끔 연구 논문을 흘깃거리곤 합니다. 최근 옛 동학의 논문에서 눈길이 가는 사건을 봤습니다. 이름하여 ‘도산서원 철폐운동’입니다. 도산서원이라면 한국의 서원을 대표하는 곳인데다 그곳에 모셔진 분이 퇴계 이황이니, 그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듯합니다. 퇴계는 학문은 물론 그의 삶 자체가 오랫동안 공경의 대상입니다. 특히 그는 서원제도에 관심을 두고 제자들과 함께 서원건립운동을 펴나갔습니다. 이를 통해 유학을 공부하고 동시에 본받을 만한 유학자를 제사하는 공간이라는 한국 서원의 정체성이 마련됐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그런 퇴계가 돌아간 후 마련된 것이 도산서원입니다. 이후 도산서원은 영남 유학의 총본산이란 권위를 인정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도산서원을 없애버리자는 운동이 벌어진 겁니다. 이런 놈들은 버르장머리를 가르쳐야 한다 1925년 10월 초, 경상북도 안동 도산서원에서 일이 났습니다. 서원 마당에 소작인 세 사람이 잡혀 왔습니다. 조수철 황원돌 이은석이란 사람이었습니다. 소작인을 잡아온 사람은 도산서원 재임(齋任)으로 있던 이동흠(李棟欽)과 이원각(李源慤)이었습니다. 재임은 서원 원장을 도와 교육과 제사 등 서원 운영을 담당하는 사람입니다. 다른 말로 유사(有司)라고 합니다. ‘양반이 부르는데 즉시 오지도 않고, 게다가 도조(賭租)는 왜 이때까지 바치지 않느냐.’ 소작인들을 잡아온 이유는 도조, 즉 한 해 동안 서원이 소유한 농지를 부친 세를 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이런 놈들은 버르장머리를 가르쳐야 한다’며 소작인들을 형틀에 붙잡아 매고 매질했습니다. 끝이 아니었습니다.

민족사랑 2023년 9월호

2023년 9월 19일 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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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경찰서(鍾路警察署), 다른 경찰서에 비해 빈번하게 청사의 위치를 옮긴 까닭은?

2023년 8월 22일 713

[식민지 비망록 93] 종로경찰서(鍾路警察署), 반도 민심의 근원을 차단하는 억압기구 다른 경찰서에 비해 빈번하게 청사의 위치를 옮긴 까닭은? 이순우 책임연구원 1945년 8월 15일, 일제 패망 당시의 시점에서 서울 전역에는 창덕궁경찰서(昌德宮警察署), 본정경찰서(本町警察署), 종로경찰서(鍾路警察署), 동대문경찰서(東大門警察署), 서대문경찰서(西大門警察署), 용산경찰서(龍山警察署), 영등포경찰서(永登浦警察署), 성동경찰서(城東警察署), 성북경찰서(城北警察署), 마포경찰서(麻浦警察署) 등 도합 10개의 경찰관서가 촘촘하게 포진하고 있었다. 이들 경찰서의 연혁을 정리하다 보니 한 가지 퍼뜩 눈에 띄는 것이 본정(‘남부’로 개칭), 서대문, 성동, 성북, 마포 등과 같이 해방 이후 한 번도 청사를 옮기지 않고 지금도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 있는 경찰서가 많다는 사실이다. 나머지의 경우도 기껏해야 한두 번 정도 위치 이전이 있었던 것이 확인되지만, 이와는 다르게 좀 예외적인 것이 종로경찰서의 사례이다. 간략하게만 살펴보더라도 종로경찰서는 처음에 탑골공원에 인접한 옛 북부경찰서 청사(1915년 6월)에서 시작하여 일한와사전기회사 사옥(옛 한성전기회사 사옥, 1915년 9월), 공평동의 경성복심법원 청사(1929년 9월)를 거쳐 인사동의 태화여자관(1943년 10월) 자리로 거듭 옮겨 다녔고, 해방 이후 시기에는 공평동 청사(1949년 1월)로 되돌아갔다가 다시 경운동 신축 청사(1957년 3월)로 이전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렇다면 이처럼 빈번한 청사 이동에는 어떤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일까? ‘악명 높은’ 종로경찰서가 처음 세상에 등장한 것은 헌병경찰제도(憲兵警察制度)로 상징되는 이른바 ‘무단통치(武斷統治)’가 한창 정점을 치닫고 있던 1915년 6월 1일의 일이었다. 이때 북부경찰서는 물론이고 여기에 속한 동대문분서(東大門分署)와 서대문분서(西大門分署)가 한꺼번에 통폐합되면서 종로경찰서가 생겨났고, 이와 함께 기존의 남부경찰서는 본정경찰서로 개칭되는 한편 용산경찰서가

1918년 ‘태평양’으로 간 조선인 노동자들

2023년 8월 22일 424

[연구실 글방 – 6] 1918년 ‘태평양’으로 간 조선인 노동자들 김명환 선임연구원 근대 이후 우리가 태평양을 가로질러 나아간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잘 알려져 있듯이 1902년 12월 인천을 떠난 100여 명의 조선인들이 이듬해 1월 태평양 한가운데 떠 있는 하와이에 도착하였다. 1905년에는 1,000여 명의 노동자들이 태평양을 가로질러 멕시코에 닿았다. 그리고 이즈음 뜻을 지닌 선각자들이 태평양을 건너 미국으로 갔다. 근대 이후 우리와 태평양의 대면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렇다면 태평양의 내부, 이를테면 사이판 같은 중부 태평양, 혹은 적도 가까이 있는 팔라우 같은 태평양의 한가운데와 인연을 맺은 것은 언제였을까? 이글은 이 물음에 대한 답을 구하는 중에 확인한 일부 사실을 정리해본 것이다. 1918년, 태평양으로 가는 길이 열리다 1918년 6월 28일자 『매일신보』에 「태평양 중의 신천지, 남양군도로 일 가는 조선사람들」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이 기사는 약 1,100글자로 작성되었고, 3면 1단에 게재되었다. 꽤 비중을 가진 기사였다는 의미이다. 기사의 앞부분은 다음과 같다. 북으로는 만주 노령은 말할 것도 없고 고향과는 낮과 밤이 서로 바뀌는 남북 미주에서 다수의 동포가 활동하는 것은 오래인 사실이거니와, 수년 내로 내지의 공업이 발전됨으로 인하여 노동을 가는 사람이 근자에 많더니, 이번에는 멀리 망망무제한 태평양 중의 남양군도에도 새로이 동포의 활동할 문호가 열렸더라. 19세기 후반 이래로 수많은 조선인들이 고향을 떠나 이역에 터전을 잡았다. 고향은 모두 달랐겠으나 그들이 떠난 이유는 비슷했을 것이다. 1910년대에 접어들면 만주와

1970, 80년대 엄혹한 시절, 독일 동포들의 민주화를 향한 외침 : 민주사회건설협의회 창립과 활약

2023년 8월 22일 408

[기고] 1970, 80년대 엄혹한 시절, 독일 동포들의 민주화를 향한 외침 : 민주사회건설협의회 창립과 활약 김귀옥 한성대 교수 지금은 사라진 1980년대 소위 ‘운동권 서적’이 있었다. 책 제목은 잊었다. 그 책에 한반도 사회변혁과 통일과 평화의 전망을 실현하는 데에는 남, 북, 해외동포들의 연대가 필요하다는 대목이 있었다. 단순한 문구였지만, 해외동포에 대해 새롭게 생각하는 코드를 형성하게 하는 힘이 있는 구절이었다. 19세기 말로부터 현재 이르기까지 일제 강점기, 분단과 전쟁, 냉전과 독재체제로 얼룩진 한반도 현대사에서 해외동포들의 고통에 찬 역할은 빼놓을 수 없다. 중국의 임시정부 요원들이나 만주(현재의 중국 동북지역)의 동포들은 말할 것도 없고, 일본, 하와이와 미국 본토, 러시아, 멕시코 등지의 해외동포들은 바람막이가 되어줄 국가도 없는 환경에서도 농사짓고, 공장 일을 하여 항일조직들에 독립자금이나 필요시 인명까지도 기꺼이 제공했다. 그들의 희망은 해방되면 조국도 찾고, 민주화된 독립 국가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8·15 해방은 남북 분단으로 이어져 해외동포사회도 분단과 냉전이 지배했다. 냉전에 의한 해외동포들이 국가폭력을 당했던 사건 중 하나가 1967년 7월 중앙정보부가 발표한 ‘동백림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독일을 포함한 유럽으로 갔던 유학생과 해외동포, 국내 인사 194명이 간첩 혐의로 구속되어 고문을 당했다. 정규명 박사와 임석훈, 정하룡 등이 사형 선고를 받았고 윤이상 교수와 이응로 화백 등이 유기징역을 받았다. 결국 윤이상과 정규명을 포함한 동백림 관련 해외 인사들 전원은 추방되듯이 한국에서 쫓겨나야 했다. 윤이상은 2018년 유해로나마 귀국했으나 정규명은

간토대학살 100년 기획전 관람하기 전에 간토대학살을 이해하기 위한 여덟 개의 열쇳말

2023년 8월 22일 304

[전시회 소개] 간토대학살 100년 <은폐된 학살, 기억하는 시민들> 기획전 관람하기 전에 간토대학살을 이해하기 위한 여덟 개의 열쇳말 김승은 학예실장 지난 8월 1일부터 식민지역사박물관 1층 기획전시실에서 간토대학살 100년 기획전이 열리고 있다. 전시 소식을 듣고 많은 관람객이 전시장을 찾고 있다. 이번 전시는 일본 고려박물관과 연계한 전시로 한일 시민들이 간토대학살을 어떻게 기억하고, 진정어린 추모를 이어갈 것인가를 실천하기 위한 새로운 시도이다. 특히 한국 식민지역사박물관은 간토대학살을 역사적으로 조명하는 데 초점을 두고 시민의 진상규명과 추도 노력, 새로운 연구 성과를 반영하여 전시를 구성했다. 전시 이해를 돕기 위해 여덟 개의 열쇳말로 <은폐된 학살, 기억하는 시민들>을 소개한다. 하나. 소방수의 쇠갈고리, 도비구치鳶口 일제강점기 일본인 소방수는 경찰의 지휘를 받았다. 소방수는 불만 끈 것이 아니라 조선 민중의 뜨거운 항일투쟁을 진압하는 데도 가담했다. 일본군과 경찰이 평화로운 만세시위 군중을 닥치는 대로 잡아끌고, 죽기 직전까지 짓밟는 현장에 일본인 소방수도 있었다. 소방수들은 ‘도비구치’를 들고 군중을 향해 돌진했다. 끝에 갈고리를 단 긴 막대를 휘두르는 소방수들의 모습이 마치 악마와 같았다고 선교사들은 기록했다. 그 악마의 모습은 1923년 일본에서 다시 목격된다. 그들은 자경단이란 이름으로 피란길에 오른 조선인에게 쇠갈고리를 휘둘러 학살했다. 둘. 1922년 나카쓰가와 조선인 노동자 학살사건 이 사건은 1922년 7월 일본인 주민 신고로 세상에 드러났다. 강 하류로 시신이 자꾸 떠내려 왔다. 그들은 강 상류 수력발전소 건설 현장의 조선인 노동자들이었다. 일제

윤석열 정부에 맞선 시민들이 만든 기적, 역사정의를 위한 시민모금

2023년 8월 21일 232

[초점] 윤석열 정부에 맞선 시민들이 만든 기적, 역사정의를 위한 시민모금 2018년 강제동원 대법원판결을 무력화하기 위한 윤석열 정부의 ‘제3자 변제’를 거부하며 싸우고 있는 피해자들과 연대하고 역사정의를 바로 세우고자 하는 시민들의 뜨거운 마음이 기적을 만들어냈다. 600여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한일역사정의평화행동은 6월 29일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고통을 나누고, 인권과 역사정의를 함께 지키고, 윤석열 정부의 강제동원 굴욕해법에 맞서 일본이 사죄배상하는 그날까지 함께 싸웁시다!”라는 구호를 내걸고 ‘역사정의를 위한 시민모금’을 시작했다. 제3자 변제를 거부한 이춘식(일본제철), 양금덕(미쓰비시중공업 나고야 근로정신대) 두 분의 생존자와 고인이 되신 정창희(미쓰비시중공업 히로시마), 박해옥(미쓰비시중공업 나고야 근로정신대) 두 분의 유족들과 함께 싸우고자 하는 시민들의 간절한 마음이 모여 지난 8월 11일 시민모금을 시작한 지 40여 일 만에 목표액 10억 원의 절반인 5억 원을 돌파한 것이다. 제3자 변제를 거부하는 피해자들과 연대하기 위한 시민들의 성원이 쏟아지자 한국 정부는 당황한 듯 7월 3일 피해자들의 채권을 소멸시키기 위한 공탁을 발표했다. 피해자의 인권회복을 위해 힘써야 할 한국 정부가 오히려 이들의 권리를 짓밟으려는 공탁을 강행하자 피해자들은 “법원에 돈 맡겨 놓았으니 찾아가라는 것은 피해자를 두 번 죽이는 것과 다름없다”라며 강력히 반발했다. 전범기업의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며 인간 존엄의 회복을 위해 싸우고 있는 피해자들의 마지막 호소마저 무시하고 공탁을 강행한 윤석열 정부의 파렴치한 행태에 분노한 시민들은 오히려 역사정의를 위한 시민모금으로 적극화답했다. 안진걸 민생경제연구소 소장의 홍보 방송을 들은 익명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