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림
[해피빈모금] 일제가 ‘간호부들의 독립만세 주동자’로 지목한 박자혜
※ 해피빈 모금 참여 영화 ‘파묘’에 등장한 박자혜 천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파묘’는 김상덕, 이화림, 고영근, 윤봉길 등 독립운동가를 극중 인물의 이름으로 등장시키며 청산하지 못한 친일 역사를 되새겨 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역시 영화에서 어린 무당의 이름으로 재조명된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독립운동가 박자혜입니다. 1895년 12월 11일 지금의 서울시 강북구 수유동에서 태어나 일찍이 어머니를 여의고 어린 나이에 입궁하여 10여 년 동안 궁중생활을 하다 1910년 대한제국이 망하자 궁궐을 나왔습니다. 이후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다시 조선총독부의원 부속 의학강습소 간호부과를 졸업해 조산원으로 근무하던 중 1919년 3·1운동을 맞이합니다. 박자혜는 비밀리에 조산원과 간호원들로 간우회를 조직해 만세운동을 주도합니다. 그러나 “평소 과격한 언동을 하는 언변이 능한 자”, “조선총독부 의원 간호부를 대상으로 독립만세를 외치게 한 주동자”로 명시하며 일제의 감시가 강화되자 박자혜는 중국으로 망명하였습니다. 단재 신채호와 부부이자 동지로 박자혜는 1919년 북경대학 의예과에 입학했고 그곳에서 독립운동을 도모하고 있던 우당 이회영의 부인 이은숙의 중매로 단재 신채호와 결혼하며 부부이자 동지로 연을 맺었습니다. “검푸르던 북경의 하늘 빛도 나날이 옅어져 가고 만화방초가 음산한 북국의 산과 들을 장식해주는 봄4월이었습니다.나는 연경대학에 재학 중이고 당신은 무슨 일로 상해에서 북경으로 오셨는지 모르나 어쨌든 나와 당신은 한평생을 같이 하자는 약속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가신 임 단재의 영전에’ 중) 1921년 첫째 수범을 낳은 후 경제적 궁핍으로 박자혜는 1922년 둘째를 임신한 상태로 귀국하지만 둘째는 일찍
[특강] 학교 교육과 일본 경제의 쇠퇴 (11.5)
※특강 신청하기
[알림] 2024 민족문제연구소 호남권 후원회원 수련회 (11.2~3)
※ 회원수련회 참가신청 (여순항쟁 답사 진행 – 지역구분없이 모든 회원 참여 가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