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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뉴스] 역사의 공백 ‘일제하 재일조선인’, 조직활동으로 조명
[화제의책] 한일공동편찬위 『재일조선인단체사전 1895~1945』 “일본 사람들은 우리를 바퀴벌레라고 불렀지. 땅 속에 다시 처박아야 된다면서.” 최근 인기리에 ‘애플TV’에 방영되고 있는 드라마 <파칭코> 속 대사 한 대목이다. 일본땅에서 일제 암흑기를 견디며 살아가는 조선인들의 처지를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일본군성노예(‘위안부’)나 강제징용자들의 한맺힌 일대기들이 더러 소개되기도 했지만 식민본국 일본땅에서 일제시기를 살아낸 ‘재일조선인’들의 삶은 드라마 <파친코>가 그러하듯 이제야 우리 곁으로 조금씩 다가서고 있다. 1945년 해방 당시 2,500만 조선인 중에 재일조선인이 200만에 달했던 사정에 비추어 보면 그들에 대한 역사적 조명이 너무 소홀했고, 늦었다 할 것이다. 『친일인명사전』을 출간해낸 민족문제연구소가 10년간 공을 들여 『재일조선인단체사전 1895~1945』(이하 사전)을 올해 3.1절을 맞아 세상에 내놓았다. 재일조선인들의 삶을 그들이 몸담았던 ‘조직’을 통해 조명한 1,263쪽에 달하는 역작이다. 재일조선인이 주로 모여살았던 ‘집중 거주지’ 중심으로 동향(同鄕) 조직, 상호부조 조직, 민족단체, 노동단체, 학생 조직, 예술‧연극 단체, 종교 단체 등 다양한 ‘조직’이 만들어졌고, “일본사회에서 차별과 억압을 받았던 재일조선인”들은 이러한 ‘조직’에 참여해 ‘자주적 운동’을 펼쳐나갔다. 1934년에 재일조선인 단체는 1,000개가 넘었고, 1937년 재일조선인은 73만 5,685명 중 조직인원이 15만 6,842명에 달했다. 성인 남성 중심으로 계산할 경우 매우 높은 조직률인 셈이다. 그러나 가만히 보고 둘 일본 정부가 아니었다. “1937년 중일전쟁이 전면화된 이후에는 재일조선인들의 자주적 단체를 해산시키고 통제하는 것이 치안 당국에게 매우 중요한 과제로 떠올랐”고, 좌익 단체들은 사실상 탄압 속에 사라져갔다. 도쿄에서 조직된 대표적
우리 연구소, 2022년도 민간통일운동 유공 대통령 표창 수상
[수상] 우리 연구소, 2022년도 민간통일운동 유공 대통령 표창 수상 우리 연구소가 민간차원에서 통일운동 활성화와 통일교육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이 포상제도는 2020년도부터 시행되었으며 평화통일 기반 구축과 통일역량 확충을 위해 제정되었다. 올해 ‘민간통일운동 유공 정부포상 전수식은 4월 25일 오후 3시 정부서울청사 통일부 대회의실에서 열렸다. 시상은 이인영 통일부 장관이 주관하였으며 방학진 기획실장이 연구소를 대표해 수상했다. 통일관련 시민강좌 개최와 〈일맥상통 백두대간〉 사진전의 전국 순회전시 등을 통해 통일에 대한 대중적 관심을 고양시키기 위해 꾸준히 노력해왔다는 점이 이번 심사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민간통일운동 유공 대통령 표창장과 수치(綬幟)
[서울뉴스통신] 경기문화재단 경기도박물관, 특별전 ‘항일과 친일, 백 년전 그들의 선택’ 개막
【경기·남부 = 서울뉴스통신】 김인종 기자 = 경기문화재단 경기도박물관(관장 김기섭)은 오는 27일 특별전 ‘항일과 친일, 백 년 전 그들의 선택’을 개막한다. 이 전시는 경기도 31개 시군의 항일독립운동과 친일파(親日派)에 대해서 조명하는 특별전으로, 한말~일제강점기에 경기도에서 펼쳐진 의병활동과 3·1만세운동의 장소 및 인물을 기리고, 나라를 팔아 부귀영화를 얻은 친일파 및 일제잔재에 대한 기억을 환기시킴으로써 역사의 엄중함과 국가·공동체의 중요성을 재인식하고자 기획한 것이다. 19세기 말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된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을 받아 1910년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일본의 침략과 국권 강탈은 조약 형식을 띠었으므로 이에 협조하는 친일파들이 있었고, 시간이 흘러 일본 제국주의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더욱 늘어났다. 그렇지만 일제의 침략과 식민지배에 저항하는 사람은 더 많았다. 19세기 말부터 시작된 의병전쟁과 계몽운동은 사람들의 가슴을 뜨겁게 하였고, 3·1만세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이후 국내외의 항일운동과 무장 독립전쟁이 본격화하였다. 근대 이후 한국은 수십 년간 식민지라는 암울한 터널을 지났지만, 치열한 독립운동이 있었기에 그 역사가 초라하지 않고 부끄럽지 않다는 것이 전시 담당자의 설명이다. 한국인에게 일제강점기는 잊을 수 없는 아픔이며 지울 수 없는 상처이다. 1백 년 전 깊은 절망에 빠졌던 사람들, 그래도 희망을 잃지 않고 스스로 가시밭길을 걸었던 사람들은 과연 지금의 대한민국을 예측했을까? 1백 년 전 우리는, 나라면 과연 어떤 선택을 했을까? 전시실에는 겉으로 드러내지 않은 물음표가 가득하다. 이 전시는 경기도의회가 지난해 5월 20일 제정한 ‘경기도 일제
[오마이뉴스] 흔적도 없이 사라진 독립운동가의 집… 황망했다
고 임우철 애국지사가 70여년 거주한 곳… ‘독립운동 기념공간’으로 사용할 순 없었을까 며칠 전 동작구 향토사학자인 동작역사문화연구소 김학규 소장의 페이스북을 통해 서울 상도동에 있던 독립운동가 고 임우철(1920~2021) 애국지사의 집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소식을 접했다. “임 지사의 집이 철거됐다, 허탈하다”는 게 주 내용이었다. 임우철 지사는 1941년 6월부터 1942년 12월 사이 일본 도쿄의 공옥사고등학교(攻玉社高等學校) 토목과에 재학 중 동급생들과 함께 내선일체(內鮮一體)의 허구성과 궁성요배(宮城遙拜: 일본 천황이 사는 궁궐을 향해 절하는 행위)를 비판하는 등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활동을 하던 중 피체됐다. 붙잡힌 임 지사는 치안유지법 위반 및 불경죄 등으로 징역 2년 6월을 선고 받았다. 이러한 항일운동 공로가 인정되어 2001년 독립유공자로 서훈된 바 있다. 철거된 현장에 직접 가보니 공교롭게도 나 역시 상도동 주민으로서 지사께서 생전에 머물던 집이 근방에 있다는 사실을 듣고 언젠가 한 번 찾아가보기 위해 벼르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러던 차에 철거 소식을 접하니 황망할 따름이었다. 지사의 집이 있던 주소를 찍어보니 중앙대학교 근처 주택가로, 내가 사는 곳과도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주택가 골목을 샅샅이 뒤진 끝에 마침내 황량하게 비어있는 임우철 지사의 집터를 발견했다. ‘송두리째’ 사라졌다는 표현이 적확할 정도로 현장엔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여름이면 시원한 그늘을 제공해줬을 아름드리 나무 역시 잘려나간 채 밑동만이 휑뎅그렁하게 남아있었다. 철거된 집터 위에는 물건과 편지, 그릇 등등이 굴러다니며 방치되어 있었다. 현장을 둘러보고
[경향신문] 한승헌 변호사님 영전에 [추도사]
우리 스스로 메시아가 되어야 할 시대의 유머리스트 연약한 사슴, 붓으로 검에 맞서다. 존경하는 한승헌 변호사님, 구순을 기어이 못 맞으시고 이렇게 황망히 우주 삼라만상의 순회에 드셨습니까. 작년 9월, 산민 한승헌 변호사 기념문집 <산민의 이름으로>(이지출판)를 펴내시면서 생의 마지막 잔치로 출판기념회를 고대하셨지만 코로나로 무산되면서 전화로 인사를 대신하셨지요. 건강 문제로 뵈올 기회가 드물어져 안타까웠지만 ‘두뇌와 입’은 지장이 없다시기에 전화로라도 “제발 그 재담 계속 들을 수 있기를 간절히 빈다”고 저는 썼지요. 문안 전화 때마다 유머를 날리시기에 버나드 쇼를 능가하는 재담으로 이 세상 더 즐겁게 만들다가 가시겠다면 저승사자도 양해할 거라니까, “그 잡귀가 혼자 돌아가기 심심해 꼭 나를 데려갈 거요.” 하신 게 저와의 마지막 통화였습니다. 55킬로그램 밴텀급 육신으로 그 많은 직함에 팔방미인으로 우리 시대의 모든 과업에 투신했지만 ‘한변’이란 애칭으로 통했던 분, 어떤 장중한 모임에서도 반드시 웃음의 명 펀치를 날려 좌중을 즐겁게 해주신 해학가에 휴머니스트, 율사란 본업 못지않게 온갖 잡사에 능하셨던 한승헌 변호사님. 무진장 3개 군 중간인 고향 진안을 ‘무주 구천동 옆 팔천동’으로 소개하시며, 아호 산민이 행여 빨치산이냐면, “변호사라서 운동이라면 석방운동”만 했다며, 한국의 헌법을 어긴다는 본명 때문에 두 번이나 옥고를 치르셨다던 분. 한국전쟁이 일어난 해에 고교생으로 시 창작을 하다가 대학생 때는 신석정 시인에게 격려까지 받았으나 약관 23세에 고시 8회 합격으로 서울지검에 근무 중 1965년부터 변호사를 본업 삼고 민주화에
[SBS꼬꼬무] 분노와 슬픔의 역사 ‘군함도’…”강제노역 없었다”는 일본의 두 얼굴
[SBS연예뉴스 | 강선애 기자]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역사 속 ‘그날’의 이야기를, ‘장트리오’ 장현성-장성규-장도연이 들려주는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 본방송을 놓친 분들을 위해, 혹은 방송을 봤지만 다시 그 내용을 곱씹고 싶은 분들을 위해 SBS연예뉴스가 한 방에 정리해 드립니다. 이번에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그날’의 이야기는, 지난 21일 방송된 ‘꼬꼬무-1943 지옥의 문, 콩깻묵과 검은 다이아몬드’ 편입니다. 이야기 친구로는 배우 송영규, 이이경, 개그우먼 이은형이 출연했습니다.(리뷰는 ‘꼬꼬무’의 특성에 맞게, 반말 모드로 진행됩니다.) ▲ 전국에서 일어난 연쇄 소년 실종사건 때는 1943년 1월, 전라북도 익산에 살던 15세 최장섭 군. 가난한 농부의 막내아들이었는데, 공부를 열심히 해서 우등상을 놓친 적이 없는 소년이야. 장섭이가 집에 있던 어느 날, 마을 면사무소 직원 윤씨가 찾아왔어. 다짜고짜 따라오라 하는 윤씨의 말에 장섭이는 영문도 모르고 일단 따라나섰어. 장섭이가 군청에서 만난 군수는 장섭이를 훑어보더니 “얘는 너무 어린 거 아닌가?”라고 말했어. 그러자 윤씨는 “거기는 어릴수록 좋다”라며 알 수 없는 말을 했어. 장섭이 외에도, 어떤 아이는 동네 이장님이 불러서, 어떤 아이는 형사가 오라고 해서, 그렇게 아이들은 어른들의 부름에 잡혀 왔어. 아이들을 한 방에 가두고 밖에서 문을 잠갔어. 연쇄적인 소년 납치가 전국 각지에서 일어나고 있었던 거야. 아이들은 이 부름에 거부하면 부모가 괴롭힘을 당하거나, 가족에게 돌아갈 배급을 끊어버린다는 협박에 따라 나설 수밖에 없었어. 다음날, 장섭이는
[미디어투데이] 용산구, 5월 용산 역사 강좌 운영
용산역사 바로알리미 전문가 심화과정 6회 대면 주간 [미디어투데이=안상일 기자] 서울 용산구가 5월 평생교육 사업일환으로 용산 역사 강좌를 운영한다. 역사문화 일자리 창출과 올바른 역사인식 확립에 기여하기 위해서다. 운영강좌는 ▲용산역사 바로알리미 전문가 심화과정 ▲용산청년역사특강 2개다. 용산역사 바로알리미 전문가 심화과정은 용산역사문화 전파를 위한 자원봉사자(도슨트) 등 양성을 위해 개설됐으며 지역주민 20명을 대상으로 민족문제연구소 5층 강의실에서 운영된다. 강좌는 △정조와 효창원 △일본군 병영기지 △김상옥과 의열단의 작탄투쟁 △108계단으로 남은 일제신사의 흔적 △현장탐방 순으로 진행되며 기간은 5월 10일부터 26일까지(화·목 오후3∼5시) 총 6회다. 수강료는 1만원(탐방 실비 별도), 접수는 내달 3일까지로 용산역사바로알리미 1·2기, 용산역사박물관 자원봉사자 우선 선발하고 정원 미달 시 일반인도 수강 가능하다. 구 관계자는 “2020년, 2021년 용산구 역사·문화 전문 인력 양성 과정을 수료한 주민 9명이 현재 용산역사박물관 해설 자원봉사 중”이라며 “심화과정을 통해 봉사자들의 역량을 높일 것”이라고 자신했다. 이밖에 구는 용산청년역사특강을 실시간 온라인(ZOOM)으로 운영한다. 특강은 △용산 지역·공간 역사 △서울의 발전사와 용산 공간사 △용산과 한국 근현대사 △용산을 둘러싼 국제관계사 순, 심용환 역사N교육연구소 소장이 주강사로 나선다. 5월 17일부터 26일까지(화·목 저녁 7∼9시) 총 4회다. 수강료는 무료. 접수기간은 4월 25일부터 5월 11일까지다. 수강인원은 30명 내외로 지역 청년을 우선 선발한다. 심화과정 및 특강 참여를 원하는 주민은 용산구 교육종합포털로 신청하면 된다. 전화접수는 불가하다. 성장현 용산구청장은 “용산은 근현대 역사문화유산의 흔적이 가득한 곳으로 20여개가 넘는 박물관, 미술관이 즐비해
[오마이뉴스] 이 언론인을 잘 보십시오… 친일파 변신의 끝판왕
[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이원영 언론사의 존립이 위태해지는 경우, 소속 기자들은 다른 언론사를 찾거나 교육이나 집필 계통의 직업을 물색하거나 아니면 한동안 집에 머물기가 쉽다. 그 언론사가 세상의 지탄을 받던 곳이라면 한동안 집에 있을 확률이 더 높아진다. 그런 상황에 놓인 기자가 주식회사를 경영하게 되거나 대기업 임원이 되는 일은 그리 흔치 않다. 그런 기자가 있다면 ‘물려받은 돈이 많거나 후광이 있나 보다’라는 말이 나올 수 있다. 1945년 8·15 당시 만 35세였던 이원영(李元榮) 기자의 직장은 <매일신보>였다. 조선총독부 기관지를 발행하던 그의 직장은 그해 11월 10일 정간됐다가 13일 뒤 <서울신문>으로 제호를 바꿔 복간됐다. 이 같은 우여곡절이 있었으므로, 8·15 해방은 그를 움츠러 들게 할 수밖에 없었다. 열심히 친일 대한제국이 망한 다음날인 1910년 8월 30일, <매일신보>라는 이름이 식민지 한국에 처음 등장했다. 이로부터 7개월 전인 그해 1월 24일 지금의 경기도 광주에서 이원영이 출생했다. 친일파 민영휘(徽)가 세운 휘(徽)문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36년에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를 졸업한 그는 그해에 <경성일보>에 입사했다. 1906년에 이토 히로부미가 <한성신보>와 <대동신보>를 합병해 만든 언론사였다. <경성일보>는 <매일신보>와 자매지 관계였다. 이 관계는 1938년에 <매일신보>가 별도의 주식회사로 분리될 때까지 유지됐다. 바로 그 1938년에 이원영은 <매일신보>로 직장을 옮겼다. 그 뒤 도쿄 특파원과 정경부장을 거쳐 33세 때인 1943년에는 논설위원을 겸하게 됐다. 이원영이라는 이름이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것은 이런 프로필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일반적인 언론인이
[과거청산의빌런들] Ep.5 2️⃣편 ‘끝나지 않은 역사戰 ⚔︎ – 과거청산의 빌런들 마지막 이야기’
[민족문제연구소 30주년 특별기획] 백년전쟁 스핀오프 시리즈 《과거청산의 빌런들》 ▶5화 2️⃣편 ‘끝나지 않은 역사戰 ⚔︎ – 과거청산의 빌런들 마지막 이야기’ #백년전쟁 #민족문제연구소 #현대사시리즈 #민족문제연구소30주년 ▶민족문제연구소 https://www.minjok.or.kr 《과거청산의 빌런들》은 민족문제연구소 후원회원의 성금과 민족문제연구소 해피빈 모금으로 제작되었습니다 ※관련영상 Ep.1-1️⃣편 ‘안두희와 빌런추적단’ ☞ https://youtu.be/S7SfMFYejqk Ep.1-2️⃣편 ‘안두희의 입을 열게한 비밀무기는?’ ☞ https://youtu.be/1n9PAsZ-cfA Ep.2-1️⃣편 ‘미 CIA문서로 드러난 박정희의 한일협정 뒷거래’ ☞ https://youtu.be/wXj4v5py5X8 Ep.2-2️⃣편 ‘한일협정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 ☞ https://youtu.be/zLP3GkeX8jw Ep.3-1️⃣편 ‘친일파 후손들의 역습’ ☞ https://youtu.be/8gzE8T2YR08 Ep.3-2️⃣편 ‘친일파 후손 한판 붙자’ ☞ https://youtu.be/bizM8CVcrVE Ep.4 1️⃣편 ‘대한민국 훈장이 감춘 빌런들’ ☞ https://youtu.be/n9ZPQTVzxLA Ep.4 2️⃣편 ‘친일파가 받은 훈장이 무려 441건이라고요?’ ☞ https://youtu.be/gQwhgu8S1SI Ep.5 1️⃣편 ‘역사전쟁의 시작_국정화를 위한 빌런들의 앙상블’ ☞ https://youtu.be/evhTJISNQpw
[한국일보] 일본서 조선인이 만든 단체가 2700여개…”그것은 생존을 위한 투쟁”
“재일조선인단체사전은 나라를 잃은 조선인들이 일본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보여줍니다. 먹고살기 위해서 또는 강제로 동원돼 건너간 일본에서 어떻게 민족 차별을 버텼는지, 고국의 독립을 위해서 어떤 활동을 펼쳤는지 보여줍니다. 그것은 생존을 위한 투쟁이었습니다.” <2022-04-12> 한국일보 ☞기사원문: 일본서 조선인이 만든 단체가 2700여개…”그것은 생존을 위한 투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