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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기사

민족사랑 2024년 3월호

2024년 3월 22일 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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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TN 탐사보고서 기록] 나카가와와 다카하시

2024년 3월 19일 470

#일제강제동원 #제3자변제안 #전범기업 #역사정의 2024년 1월 25일. 대법원에 4년 넘게 계류 중이던 ‘후지코시 강제동원 손해배상’ 소송이 마무리됐습니다. 일본 도야마에서 후지코시 강제동원 피해자 소송을 지원해 온 나카가와 미유키도 할머니들과 함께 대법원 판결을 지켜봤습니다. 한국과 일본을 오간 지 30여 년. 나카가와 미유키 호쿠리쿠 연락회 사무국장의 투쟁은 대법원 승소 판결 이후에도 끝이 나지 않습니다. 일본 정부와 전범기업이 사죄와 배상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나카가와는 왜 이 투쟁을 끝낼 수 없는 걸까요? 나카가와의 도야마 집은 호쿠리쿠 연락회 사무실이자 후지코시 강제동원의 역사 자료가 있는 작은 역사관이기도 합니다. 1990년대 후지코시 강제동원 피해자 문제 해결 운동에 나선 나카가와. 그때부터 모아온 자료와 피해 할머니들의 사진엔 나카가와의 청춘이 고스란히 담겨있습니다. 대법원 판결 이후 도야마에서 만난 나카가와와 호쿠리쿠 연락회 회원들을 통해 가해국민으로서 강제동원 피해를 지원하한 이유를 들어봤습니다. 2024년 2월 24일 광주 빛고을시민문화관. 나고야에서 온 일본인들이 ‘나고야 미쓰비시 조선여자근로정신대’ 문제를 조명한 연극 ‘봉선화’ 공연을 위해 분주히 움직입니다. 이 연극을 기획하고 제작한 사람은 일본 ‘나고야 미쓰비시 조선여자근로정신대 소송을 지원하는 회’의 다카하시 마코토 공동대표입니다. 평범한 고등학교 역사 교사였던 다카하시가 일제 강제동원 문제 해결에 나선 이유는 무엇일까요? 나고야에서 다카하시를 만나 2018년 대법원 판결 이후에도 피해자 지원을 지속하는 이유와 연극 ‘봉선화’를 제작한 이유에 대해 물었습니다. 광복 후 80년 가까이 지났지만 일제강제동원 피해자 문제는 아직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오마이뉴스] 독립운동가 묘역 앞 엉뚱한 운동장

2024년 3월 19일 301

문재인 정부의 효창공원 재구조화는 왜 성공하지 못했나 김구(38.0%), 안중근(33.4%), 윤봉길(26.3%) 2019년 2월 문화체육관광부는 ‘3·1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국민인식 조사’ 결과를 발표한다. 국민 1,004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항일독립운동가 하면 떠오르는 인물”을 묻는 질문의 1, 2, 3순위 응답을 합한 결과, 응답자들은 위 세 명의 독립운동가를 가장 많이 언급했다. (4위 유관순 22.8%, 5위 안창호 12.5%) 공교롭게도 가장 앞서 언급된 3인의 묘역이 모두 용산구 효창공원에 자리해 있다. 해방 후 조성한 첫 순국선열 묘역 효창공원에 독립운동가 묘역을 조성한 역사는 1946년 7월 6일로 거슬러 오른다. 지금의 삼의사(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묘역이 이 날 조성됐고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모실 자리도 함께 마련해 두었다. 해방 후 환국한 독립운동가들이 직접 조성한 첫 번째 순국선열 묘역이었다. 관련 내용을 보도한 1946년 7월 7일 자 <동아일보> 기사 “祖國光復(조국광복)에 바친 세血祭(혈제)”는 당시를 이렇게 기록해 두었다. 삼(三)열사의 국민장은 서울의 성지 효창원에서 이승만 박사, 김구 주석, 오세창·이시영·여운형 제씨(諸氏)와 한국민주당·조선공산당·한국독립당·민전·대한독립촉성국민회·전평·부총·애국부인회·여자국민당 등 각 정당·단체 대표자와 각 정회, 각 학교의 대표자들 5만여 명이 참예하여 하오 1시부터 엄숙히 거행되었다. 해방 후 처음으로 조성한 순국선열 묘역인 만큼 당대 유력인사, 제 정당과 사회단체가 대거 참여한 가운데 국민장이 치러졌음을 알 수 있다. 이어서 1948년 9월 임시정부요인 묘역이 조성되어 이동녕, 차리석, 조성환 3인이 자리했고 1949년 7월에는 효창원 조성을 주도했던 백범 김구의 묘역도 이곳에

[오마이뉴스] 이승만에게 고급 저택 제공한 사람의 정체

2024년 3월 18일 644

[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장덕수 이승만은 친일파 정당인 한국민주당(한민당)의 지원으로 대통령이 됐다. 한민당은 국회 간선제로 치러진 1948년 대통령선거 때 그에게 표를 몰아주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그의 호주머니에 돈을 찔러준 것도 한민당이다. 김학준 서울대 교수의 기고문인 1985년 2월 22일 자 <조선일보> 기사 ‘보호자 없는 한민당, 이승만 손잡아’는 해방 2개월 뒤에 있은 이승만의 귀국을 언급하면서 이렇게 설명한다. “이승만은 우선 도오꾜에 도착했다. 여기서 그는 나흘 밤을 묵으며 맥아더 및 하지와 만난 다음, 10월 16일 맥아더가 내어준 미 군용기 편으로 만 32년 만의 해외망명 생활을 청산하면서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이때 그는 만 70세의 노령이었다. 그는 하지가 마련해놓은 숙소인 조선호텔에 여장을 풀었는데, 한민당은 즉각 그의 정치 활동을 위한 자금을 제공했다.” 귀국해서 여장을 풀자마자 한민당은 돈부터 내밀었다. 그러고 나서 3년 뒤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만들었다. 이승만의 배신으로 사이가 틀어지기는 했지만, 이승만과 친일세력은 분명히 동맹자 관계였다. 이승만은 한민당을 배신한 뒤에도 친일세력에 대한 답례만큼은 톡톡히 했다. 국회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를 경찰력을 동원해 탄압함으로써 친일청산을 무력화시켰다. 이를 통해 친일세력이 기득권을 유지하게 됐으니, 이승만의 행위는 이완용의 친일에 못지않았다고 볼 수 있다. 한때 독립운동가였던 청년, 친일파로 전향하다 이승만을 그런 방향으로 이끈 대표적 인물은 한민당 지도자이자 호남 재벌인 인촌 김성수다. 김성수만큼은 아니지만 이승만에게 큰 도움이 되어준 또 다른 한민당 지도자는 장덕수다. ‘이승만 자택’ 혹은 ‘이승만

[오마이뉴스] “송현광장에 이승만기념관? 광주 금남로에 전두환기념관 짓는 것”

2024년 3월 15일 646

[현장] 15개 역사단체 송현광장앞 기자회견… 서울시는 “공식제안한 바 없다” 진화나서 최근 오세훈 서울시장이 이승만기념관 부지로 거론한 서울 송현광장에 시민단체들이 모여 기념관 건립을 일제히 반대하고 나섰다. 이들은 4.19를 촉발한 이승만 전 대통령에 대한 비판과 함께 송현광장을 시민의 공간으로 지키겠다던 약속을 1년 새 뒤엎은 오세훈 서울시장을 직격했다. 민족문제연구소, 국가폭력피해범국민연대, 김주열열사기념사업회 등 15개 단체는 15일 오전 서울 종로구 열린송현 녹지광장 입구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오세훈 서울시장과 윤석열 정부는 헌법을 부정하고 국격을 훼손하는 이승만기념관 건립을 즉각 중단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날은 이승만 하야를 끌어낸 4·19혁명의 도화선이 된 3·15의거 64주년이었다. 이날 기자회견은 오 시장이 지난해 송현광장에 ‘이건희 미술관’ 외에 다른 시설물을 짓지 않겠다고 한 발언을 뒤집은 데 따른 것이다. 오 시장은 지난달 23일 서울시의회 시정질문에서 “(이승만기념관 부지로) 현재 가능성이 제일 높게 논의되는 데가 송현동 공원”이라고 밝혔다. 오 시장은 또 “이승만 다큐멘터리 영화가 상영되고 있는 것이 공론화 혹은 공감대 형성 과정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에 최근 영화 <건국전쟁>이 흥행하자 서울시가 기념관 건립을 추진하기로 말을 바꾼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건국전쟁>은 이승만이 독재를 하지 않았고 단지 장기집권을 했을 뿐이라고 주장해 논란을 빚고 있다. “피의 독재자 기념하냐”… “오세훈 시장 발언 거둬들여야” 기자회견 발언자로 나선 강현우 신부(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서울대교구 총무)는 “역사적 평가가 끝난 이승만을 재평가하겠다며 공만 내세우고 과를 숨기며 심지어 과를 공으로

[오마이뉴스] 3.15의거 기념일 맞아 ‘이승만기념관 반대’ 목소리

2024년 3월 15일 349

민주화운동기념계승단체전국협의회 성명, 민족문제연구소 등도 입장 발표 “이승만은 친일파를 등에 업은 독재자. 친일파 경찰 박종표에 의해 잔인하게 희생된 김주열 열사. 3‧15의거 정신으로 독재와 친일 잔재 심판할 것이다.” “이승만의 수많은 죄상을 일일이 열거할 겨를이 없지만, 무엇보다도 분명한 점은 이승만이 대한민국 헌법을 여러 차례 유린한 장본인이라는 사실이다.” 이승만정권을 무너뜨린 기폭제가 된 3‧15의거 64주년을 맞아 15일 민주화운동기념계승단체전국협의회와 김주열열사기념사업회·민족문제연구소 등 단체가 각각 낸 입장이다. “현대판 친일세력을 용납하지 않는다” 민주화운동기념계승단체전국협의회는 “1960년 3월 15일 정부통령 선거일, 영구집권의 탐욕을 이기지 못한 독재자 이승만은 온갖 비열한 술수를 동원해 부정선거를 획책했다”라며 “청년학생을 비롯한 압도적 다수의 시민이 부정부패로 가득한 이승만 독재정권을 무너뜨리는 위대한 항쟁을 시작했는데, 이것이 64년 전 마산에서 일어난 3.15의거”라고 설명했다. 이어 “이때 청년학생 김주열이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사망해 참혹한 그 시신이 유기되는 비극적 운명을 맞았다. 이런 일을 자행한 주범은 친일경찰 박종표”라며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가를 탄압했던 친일경찰이 해방 후 민주화운동에 앞장 선 청년학생을 잔인하게 살해했던 것이다. 이런 친일파가 이승만 독재정권의 기반이었다”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근래에 아무런 근거 없이 이승만을 미화한 <건국전쟁>이라는 영화가 개봉해 오랜 시간 극장 스크린을 차지하고 있고, ‘이토 히로부미 인재’의 황당한 주장이 현직 국회의원 입에서 거침없이 터져 나오기도 했다”라며 “이는 작년에 일어났던 홍범도 장군을 비롯한 독립투사 흉상을 훼손하려는 심각한 움직임과 잇닿아 있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런 현상은 뉴라이트라는 조직된 세력이

[서울의소리] “일제시대 살기 좋았다” 국민의힘 또 친일 논란..민주당 “정진석-성일종-정승연-조수연, 친일 적통 증명”

2024년 3월 15일 444

[기사원문] <2024-03-13> 서울의소리☞  “일제시대 살기 좋았다” 국민의힘 또 친일 논란..민주당 “정진석-성일종-정승연-조수연, 친일 적통 증명” ‘與 조수연 대전 서구갑 후보 “조선 망국 책임은 이완용보다 고종 책임이 커” 등 친일발언 논란’, ‘민주당 “국힘 후보들에게는 총선이 친일 사관 인정받는 경쟁이냐?”‘ [국회=윤재식 기자] 성일종 국민의힘 의원 (충남 서산·태안)의 ‘이토 히로부미는 인재’ 정승연 국민의힘 후보 (인천 연수갑)의 ‘반일은 피해의식’ 등 계속되는 국민의힘 총선 후보들의 친일 발언이 논란이 되는 가운데 또 다시 국민의힘 총선 후보의 친일 관련한 논란이 터져 나왔다. 국민의힘 당내 경선을 통과하고 대전 서구갑 공천을 얻은 조수연 후보는 과거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조선 망국의 책임은 일본보다 조선에 있으며 이완용보다 군주인 고종의 책임이 컷다’면서 ‘조선백성들은 봉건적 조선 지배를 받는 것보다 일제강점기에 더 살기 좋았을지 모른다’라는 취지의 글을 남겼다. 해당 글은 지난 2017년 8월25일에 작성된 것이며 현재는 삭제된 상태다. 조 후보의 이런 식민사관적 발언이 뒤늦게 알려지며 논란이 되자 더불어민주당 박성준 대변인은 13일 오후 <국민의힘 후보들의 친일 발언, 언제까지 국민이 참아야 합니까?>라는 제하의 브리핑을 통해 이를 강하게 비판했다. ·········<중략>········· 계속해 “이토 히로부미를 뛰어난 인재로 칭송한 성일종 후보, 한국인이 일본에 피해의식과 강박관념 열등의식을 품고 있다고 주장한 정승연 후보까지 국민의 힘에는 친일 본색 후보가 넘쳐납니다”라며 “국민의힘 후보들은 총선이 친일 사관을 인정받기 위한 경쟁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까?”라고 일갈했다. 한편 이외에도 조수연

[머니투데이] ‘건국전쟁’ 대흥행에… 이승만 비판 ‘백년전쟁’, 11년만에 재조명

2024년 3월 13일 1166

대한민국 1~3대 대통령인 이승만을 다룬 영화 ‘건국전쟁’이 진영 갈등을 불러온 가운데 갈등 무대가 11년 전 제작된 이승만 비판 다큐멘터리 영화 ‘백년전쟁’으로까지 번졌다. 12일 민족문제연구소&식민지역사박물관 유튜브 채널에 따르면 지난 2012년 12월10일 게재된 ‘백년전쟁’ 다큐멘터리 영상은 최근 조회수가 271만회를 넘어섰다. ‘백년전쟁’은 일본이 우리나라를 강제 병합한 1910년부터 2011년까지 100년의 역사를 담은 4부작 독립 다큐멘터리 영화다. 윤봉길, 안중근 등 독립운동가 활동 시절 함께 활동한 친일파를 한 화면에서 보여주자는 의도로 만들어졌다. 미국 CIA(중앙정보국)가 이승만 전 대통령에 대해 “사적인 권력욕을 채우기 위해 독립운동을 했다”고 평가한 보고서 등을 인용하는 등 이승만의 두 얼굴을 집중적으로 다뤘다.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해서도 “해방 후 공산주의자로 활동하다가 체포됐는데, 동료들을 전부 밀고해서 죽게 만들고 자신만 목숨을 건졌다”는 미국 기밀보고서 내용을 소개했다. 이 같은 내용은 최근 이 전 대통령을 재평가한 ‘건국전쟁’과 완전히 반대되는 내용이다. 건국전쟁 때문에 이 다큐도 화제가 되면서 유튜브 해당 채널에는 댓글전쟁이 펼쳐지고 있다. 이승만 비판 위주 댓글이 많던 채널에 최근 들어 “여긴 공산주의자 집합소인가?”, “좌빨 조작”, “역사 왜곡과 날조” “이승만보다 더 위대한 인물은 없다”, “이승만이 있기에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다”, “북한으로 가라” 등 이승만을 지지하는 댓글이 부쩍 늘었다. 일부 지지자는 “일본도 우리 민족의 일부”라는 다소 황당한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이에 질세라 “재개봉해달라. 국민들이 무조건 봐야한다”, “추천받아 보러왔다”,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인데

[오마이뉴스] 건국전쟁이 아니라 친일전쟁인 이유

2024년 3월 11일 342

[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노덕술 이승만이 1948년 전후에 벌인 것은 건국전쟁이 아니라 친일전쟁이었다. 이를 증명하는 것이 친일파 김성수 및 친일파 노덕술의 행적이다. 해방 직후의 보수세력은 독자적인 대권 후보를 배출하지 못했다. 1947년 7월 30일 자 <동아일보>에도 보도됐듯, 이들의 구심점인 한국민주당(한민당)은 ‘친일 원흉’이란 손가락질을 받았고 그래서 대통령 후보를 내세우기 힘들었다. 한민당 지도자 김성수가 독립운동권의 문제아인 이승만을 ‘1호 인재’로 영입한 것은 그 때문이다. 친일파들의 후원을 받아 대권을 향해 나아가던 이승만은 헌법 조문에도 깊숙이 관여했다. 자신에게 불리한 조문이 생기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제1대 총선 직후인 1948년 6월 8일 국회 헌법기초위원회가 내각책임제를 채택하려 하자, 그는 15일과 21일 위원회를 찾아가 대통령중심제로 바꿔 달라고 부탁했다. 6월 18일 자 <군산신문>에 ‘이 박사 헌위(憲委)에 임석, 대통령책임제 역설’이란 기사가 났을 정도로 그의 애착은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졌다. 자기에게 불리한 조문이 없는지를 구석구석 살핀 이승만은 헌법 맨 앞의 “우리들 대한국민은 기미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라는 대목을 문제 삼지 않았다. 1919년 3·1운동으로 대한민국이 건국됐다고 선언하고 그 정신으로 대한민국을 운영하겠다는 뜻에 이의를 달지 않았다. 2023년 현재의 극우세력이 내세우는 논리대로라면 3·1운동과 분리된 별도의 대한민국을 건국하는 데 골몰했어야 하지만, 1948년 전후의 이승만은 그런 데는 관심이 없었다. 그가 건국전쟁이 아닌 친일전쟁을 하고 있었다는 점은 김성수와 한민당의 지원을 받아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이 세력의 입지를 굳혀준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또

[프레시안] 일본 천황제와 신사 참배, 과거 문제만이 아니다

2024년 3월 11일 228

[파시즘의 어제와 오늘] 일본제국주의와 신사참배, 그 현재적 의미 1868년 초 메이지유신(明治維新)으로 출범한 일본 근대국가는 왕정복고(王政復古)와 제정일치(祭政一致)를 표방한 절대군주제 국가였다. 유신정부는 유신 초기부터 신기관(神祇官)을 설치하고, 선교사(宣敎使)를 두어 신도국교화정책(神道國敎化政策)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내외의 반발에 직면하자 1871년 7월 ‘신사는 모두 국가의 종사(宗祀)’라는 ‘신사비종교론’을 내세우고, 그후 신사행정과 종교행정을 분리하여 신사행정은 내무성에서, 종교행정은 문부성에서 관리하게 하였다. 그리고 1889년 2월 ‘대일본제국헌법’과 1890년 10월 ‘교육칙어(敎育勅語)’를 발포하여 초종교적인 국가신도 체제를 구축하였다. 이러한 국가신도는 이른바 ‘국체(國體)’를 교의로 한 사실상의 국교였으며, 일본은 자국 국민에게는 물론 그들의 식민지였던 조선인에게도 신사신앙과 참배를 강요하였다. 1910년대 식민지배 초기부터 조선총독부는 1911년 조선교육령을 발포하고, 1912년 교육칙어까지 발포하여, 적극적인 동화(=충량화=일본화) 정책을 폈다. 특히 국책과목인 수신, 역사, 일본어 교과서에서는 황실숭경(皇室崇敬)이라는 ‘천황제’ 이데올로기를 주입하는 내용으로 편성하여, 신도의 신화를 역사적 사실로 왜곡하여 가르쳤다. 교과 내용을 통해서 신도의 신화와 그 신화에 나오는 신들을 모시는 유명한 신사들을 가르칠뿐만 아니라, 신사참배, 동방요배 등 학교행사를 통하여 천황숭배와 신사숭경을 몸에 익히도록 하였다. 그리고 시학관까지 파견하여 아동들에게 그것이 얼마나 주입되었는지 조사하게 하였다. 1910~20년대 조선총독부는 관폐대사 조선신궁을 설립하고, 1915년 8월 「신사사원규칙(神社寺院規則)」과 1917년 3월 「신사(神祠)에 관한 건」을 발포하여 신사·신사(神社神祠)의 설립을 장려하고 그 관공립적인 성격을 강화하기는 하였지만, 그에 대한 반발에 부딪혀 소극적인 신사정책과 신사행정을 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1931년 9월 이른바 ‘만주사변’ 이후 ‘준전시체제’와 1937년 7월 중일전쟁 도발 이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