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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TN] “더 늦기 전에”…생존 독립운동가 손발까지 영원히 남긴다
[앵커] 광복 이후 많은 시간이 흐르면서 독립을 위해 싸웠던 이들도 하나둘 세상을 떠나고 있는데요. 광복 80주년까지 4년 남은 지금, 더 늦기 전에 생존 애국지사의 모습을 남기는 작업을 시작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김철희 기자가 만났습니다. [기자] 광복군으로 활동하며 독립을 위해 싸웠던 김영관 애국지사. 어느덧 올해 98살이지만 또렷한 말투에선 자긍심이 넘칩니다. 1944년, 만 20살에 경성사범대를 다니다 일본군에 징집돼 중국 저장성으로 끌려갔습니다. 일본을 위해 싸울 수 없다는 마음으로 목숨 걸고 부대를 탈출해 가까스로 광복군에 합류했습니다. [김영관 / 애국지사 : 태극기를 앞세우고 우리를 마중을 왔더라고요. 저는 그 태극기를 보고 하염없이 그냥 눈물 흘리고 감격을 느꼈습니다. ‘아, 내가 저 태극기를 위해서 여기까지 목숨 걸고 왔구나.’] 그로부터 2년 뒤 수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고 한국에 돌아왔습니다. 여생은 후대에 올곧은 저항 정신을 남기는 데 쏟자고 다짐하고 기념사업회를 세워 일하고 있지만, 갈수록 독립의 정신이 흐려지는 사회가 안타깝습니다. 지사로서의 삶 역시 쓸쓸히 잊히는 건 아닐까 생각도 듭니다. [김영관 / 애국지사 : 역사를 잊은 민족이나 국가에는 미래가 없다. 또 역사적 사실, 역사적 팩트를 잊어버리면, 외면하면 똑같은 일이 또 되풀이된다. 이런 엄혹한 현실을 잊지 말고….] 김 지사와 같은 독립운동가들을 위해 발 벗고 나선 이들이 있습니다. 평화의 소녀상으로 유명한 김운성, 김서경 작가가 민족문제연구소와 함께 생존한 독립운동가들의 모습을 남기는 프로젝트를 기획했습니다. 3D 프린터 등을 이용해
[오마이뉴스] ‘조선’은 어떻게 ‘2조 5천억’ 부동산 부자가 되었나
[김종성의 히,스토리] 조선일보의 성장 비결 열린민주당 김의겸 의원이 <조선일보> 사주 일가의 부동산 규모를 16일 공개했다. 서울 여의도 면적 45%에 해당하는 40만여 평으로, 공시지가로는 4800억 정도, 시가로는 2조 5천억 원에 달한다고 한다. 속초·양양·의정부·인천·서울·화성·대전·부산 등에 부동산이 산재해 있다는 것이 김 의원의 설명이다. 앞으로 언론사 및 사주의 재산을 공개하는 법안을 발의하겠다고 그는 예고했다. <조선일보>는 초창기에도 재산 문제로 주목을 받았다. 방상훈 현 대표이사의 증조부인 방응모가 1933년 인수한 뒤에 이 신문사는 금(金) 문제로 주목을 받았다. 방응모가 평안북도 삭주군에서 금광 사업으로 큰돈을 번 뒤였을 뿐 아니라 그의 경영 방식이 언론기관보다는 일반 기업에 훨씬 가까웠기 때문이다. 방응모의 경영방식 김옥균의 갑신정변이 일어난 1884년에 평안북도 서부인 정주군에서 태어나 10대 중반까지 한학을 공부한 방응모는 국권 침탈(경술국치) 1년 뒤인 1911년(만 27세)에 잠시 교편을 잡았다가 변호사 사무소에서 대서업을 경영했다. 3년 뒤 그만둔 그는 31세 때인 1915년부터는 자택을 이용해 여관사업을 경영했다. 그가 신문 사업에 손댄 것은 38세 때인 1922년이다. 이때는 <조선일보>가 아니라 <동아일보>였다. <동아일보> 정주분국을 인수했던 것이다. 뒤이어 정주지국장이 됐고, 1924년부터는 삭주군의 교동광업소를 겸영하면서 굴지의 광산업자로 떠올랐다. 그는 식민지배에 참여할 의향도 있었다. 1927년 정주지국장에서 정주지국 고문으로 물러난 그는 46세 때인 1930년에 광역의원 선거인 도평의회(도회) 의원 선거에 출마했다가 낙선했다. <조선일보>와의 인연은 그로부터 얼마 뒤 맺어졌다. 48세 때인 1932년에 <조선일보> 영업국장이 됐다가 1933년에 아예 인수했다.
[오마이뉴스] 광복군 창립일, 광복군 창설 이끈 남산 김구 동상 직접 가보니
[현장] 친일파 김경승이 조각, 만주군 출신 박정희 대통령 건립기념글 그대로 있어 ‘조각 김경승 민복진 / 1969년 8월 23일 /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세움’ 서울 남산공원에 세워진 백범 김구 선생의 동상 뒤쪽에 붙은 머릿돌 내용 중 일부다. 친일인명사전에 올라 있는 대표적 친일 작가 김경승이 조각했다고 새겨졌다. 그리고 백범 동상 우측 하단부에는 김경승과 마찬가지로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만주군 출신 박정희 전 대통령의 건립기념글도 새겨져 있다. 박 전 대통령의 친필로 새겨진 건립기념글에는 “위국성충은 일월과 같이 천추만대에 기리 빛나리”라는 글과 함께 “서울 백범김구선생동상건립에 즈음하여 일천구백육십구년 팔월 대통령 박정희”라고 적혔다. 잘 알려졌듯 백범 김구는 일제강점기 당시 일제에 항거한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이자, 1919년 3.1운동 후 만들어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이끈 인물이다. 무엇보다 1940년 오늘(9월 17일), 중국 충칭에서 한국광복군이 창설될 수 있도록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이자 한국광복군창설위원회 위원장으로서 주도적인 역할했다. 실제로 1940년 9월 15일 백범은 자신의 명의로 한국광복군선언문을 발표하는데, 선언문에는 “중화민국 영토 내에서 광복군은 중화민국 국민과 합작하여 우리 두 나라의 독립을 회복하고자 공동의 적인 일본 제국주의자들을 타도하기 위하여 연합국의 일원으로 항전을 계속한다”라고 적혔다. 그리고 이틀 뒤인 1940년 9월 17일 한국광복군 창군행사가 중국 충칭 가릉빈관에서 열린다. 남산 백범 동상 뒤쪽 우측에 새겨진 백범 김구 선생 약전에도 “1940년에 임시정부를 중경(충칭)으로 옮기고 한국광복군을 조직해 (1941년) 일본에 선전포고를 했으며 (1943년 11월) 카이로회담에서도 독립보장을 받았다”라고 강조됐다. 한 마디로
[오마이뉴스] ‘최재형 캠프’ 조해진 “민족문제연구소가 국가 공인 ‘친일감별사’냐”
[대정부질문-정치] 독립유공자 후손 논란 관련 질의로 풀이… 전해철 “친일 문제에 상당히 기여” 조해진 국민의힘 의원이 13일 오후 국회 정치 분야 대정부질문에서 친일인명사전을 펴낸 민족문제연구소를 문제 삼았다. 특히 민족문제연구소의 ‘공적 권위’를 정부에서 만들어주고 있다고 비판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지난 8월 최재형 국민의힘 대선경선 후보의 증조부·조부의 독립유공자 논란 때 “최 후보 조부와 증조부의 행적은 독립운동가의 삶으로 볼 수 없다”는 입장을 낸 바 있다. 이에 대해 최 후보 측은 “일개 시민단체에 불과한 민족문제연구소가 아니라고 하면 독립운동이 아닌 건가. 100년 전 있었던 일에 대해 민족문제연구소는 무엇을 근거로 그렇게 판단하는 건가”라고 반박했다. 참고로, 조 의원은 최재형 캠프의 기획총괄본부장을 맡고 있다. 그는 이날 전해철 행정안전부 장관을 상대로 “민족문제연구소가 국가기관인가, 정부가 친일문제에 대해 유권해석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한 적 있느냐”고 물었다. 전 장관은 “(국가기관이) 아닌 걸로 안다. (유권해석 권한을) 정부가 부여한 건 아니지만 사회적으로 (민족문제연구소가) 중요한 역할을 하는 걸로 안다”고 답했다. 그러나 조 의원은 재차 “국가기관도 아니고, 유권해석 권한을 부여받은 적도 없는데 정부 기관들이 친일파 판정 관련해서 민족문제연구소의 판단을 금과옥조로 받들고 있나”며 “왜 정부가 민족문제연구소를 국가가 공인한 ‘친일감별사’처럼 대하나”라고 물었다. “정부 기관이 연구소 판단 받들어”… “친일 문제에 상당히 기여한 것은 사실” 이에 전 장관은 “(조 의원이) 어떤 사안으로 질문하시는지 모르겠는데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 문제에 대해 상당한 사회적 합의 내지, 사회적
[팟캐스트] ‘내역사’ 시즌6. 13화 “쌀로 보는 근현대사 2부”
☞ (9.14) ‘내역사’ 시즌 6: 13화: “쌀로 보는 근현대사 2부” ☞ (9.07) ‘내역사’ 시즌 6: 13화: “쌀로 보는 근현대사 1부” ☞ (8.11) ‘내역사’ 시즌 6: 12화: “민족문제연구소 30주년 특별기획_만화 친일파 열전_박시백 화백과 함께” ☞ (8.11) ‘내역사’ 시즌 6: 11화: “광복회 총사령 박상진의사 순국100주기 특집 _이루지 못한 혁명의 꿈 2부” ☞ (8.10) ‘내역사’ 시즌 6: 11화: “광복회 총사령 박상진의사 순국100주기 특집 _이루지 못한 혁명의 꿈 1부” ☞ (7.06) ‘내역사’ 시즌 6: 10화: “민족문제연구소 30주년 특집_대전지부 후원회원들과 함께” ☞ (6.29) ‘내역사’ 시즌 6: 9화: “한반도 평화, 새로운 시작을 위한 조건” ☞ (6.22) ‘내역사’ 시즌 6: 8화: “비핵화 프레임을 넘어 종전선언으로(2) ☞ (6.15) ‘내역사’ 시즌 6: 8화: “비핵화 프레임을 넘어 종전선언으로(1) ☞ (6.14) ‘내역사’ 시즌 6: 7화: 긴급편성 “역사부정주의 논리를 담고 있는 6월 7일 강제동원 판결”에 대해 말하다 ☞ (6.08) ‘내역사’ 시즌 6: 6화: ‘사랑도 발명이 되나요?”의 저자 김형민피디와 함께 ☞ (6.01) ‘내역사’ 시즌 6: 5화: 민족문제연구소 30주년 특집_광주지부 후원회원들과 함께 ☞ (5.25) ‘내역사’ 시즌 6: 4화: “91년 5월투쟁 30주년 특집_기억을 넘어 실천으로” ☞ (5.18) ‘내역사’ 시즌 6: 3화: “5.18을 기억하는 또 다른 방식” 영화 김군의 강상우 감독과 함께 ☞ (5.11) ‘내역사’ 시즌 6: 2화: “미얀마 민주화 투쟁과 연대하다” ☞ (5.04) ‘내역사’ 시즌 6: 1화: 새로운 시즌을 시작합니다 “민족문제연구소 30주년 특집 준비”
[YTN라디오] 독립군가 복원 프로젝트 : 100년의 소리 – 신흥무관학교 제2편 망명로드
민족문제연구소는 2017년 『항일음악 330곡집』을 발간한 이후 <항일음악회> 개최 등 항일음악 보급을 통한 독립정신 선양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YTN 라디오는 민족문제연구소의 자문을 받아 2020년 11월 ‘국치추념가’를 시작으로 <독립군가 복원 프로젝트 : 100년의 소리>를 방송 중입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독립군가 복원 프로젝트 : 100년의 소리> ☞ 신흥무관학교 제2편 : 망명로드 ☞ 신흥무관학교 제1편 : 신민회 ☞ 25편 :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기억하라 ☞ 24편 : 광복군 제3지대가 _ 김일진(광복군 제3지대장 김학규 장군, 광복군 오광심 지사 아들) ☞ 23편 : 추도가 _ 원형재(원심창 선생 아들) ☞ 22편 : 한반도가 _ 나중화(나창헌 선생 아들) ☞ 21편 : 독립군행진곡 _ 김완태(전 육군사관학교장) ☞ 20편 : 영웅추도가 _ 김성태(오석 김혁 장군 증손자) ☞ 19편 : 선봉대가 _ 권현(권기옥 선생 후손) ☞ 18편 : 대한혼가 _ 김재홍 함경북도지사(규암 김약연 선생 증손자) ☞ 17편 : 희망가 _ 김수옥(우사 김규식 선생 손녀) ☞ 16편 : 목동가 _ 김정륙(독립운동가 김상덕 반민특위 위원장 아들) ☞ 15편 : 고려인 홀로아리랑 _ 안톤 강(독립운동가 유상돈 선생 증손자) ☞ 14편 : 여옥사_8호감방의노래 _ 김정애(유관순 열사 조카 며느리) ☞ 3·1절특집: 끝나지않은 노래’독립운동歌’ ☞ 13편 : 기전사가 _ 정철승(독립운동가 규운 윤기섭 장손) ☞ 12편 : 최후의결전 _ 우원식 국회의원(임시정부 법무국 비서국장 김한 외손자) ☞ 11편 : 올드랭사인애국가 _
[MBC] 한국인 희생자 1만 명 ‘억울한 죽음’..日, 유골도 차별
앵커 1945년 일본의 패전 직전, 마지막 격전지였던 오키나와에서 20만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당시 희생된 한국인들도 1만 명 이상으로 추정되고 있죠. 일본 정부가 뒤늦게 유족들에게 유골을 돌려주는 작업을 시작했는데, 한국인 희생자들은 신청조차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도쿄에서 고현승 특파원이 취재했습니다. 리포트 태평양전쟁 막바지인 1945년 4월, 미군은 오키나와 상륙작전을 감행합니다. 치열한 전투가 몇 달간 이어졌고, 군인과 민간인 등 20만 명 넘게 숨졌습니다. 강제 동원된 한국인도 1만 명 넘게 포함돼있습니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70년 넘도록 사망·실종자 조사도 제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오키나와 곳곳엔 유골이 방치돼있습니다. 정부 대신 유골을 찾아나선 건 오키나와의 시민단체. 1970년대 초부터 발굴 작업을 벌여 수백 명의 유골을 찾아냈습니다. [구시켄 타카마쓰/시민단체 ‘가마후야’ 대표] “처음에는 불쌍하다고만 생각했는데, 어떻게든 가족들에게 (유골을) 보내주자 해서 지금껏 해왔습니다.” 뒤늦게 일본 정부는 5년 전부터 유골과 유족들의 DNA 대조 신청을 받았는데, 신청 대상에서 한국인은 쏙 빠져있습니다. “한국과 미국, 타이완의 유족들도 고령화되고 있습니다. 함께 진행하지 않으면 늦습니다.” 이런 사실조차 몰랐던 한국인 희생자 유족들은 지난 6월에서야 DNA 감정을 요구하고 나섰습니다. [이희자/태평양전쟁피해자협의회 대표] “(일본 정부는) 어떻게 하면 빠른 시일 내 유골을 수습해 가족 품으로 돌려보낼까 고민하고, 이 희생자들이 어떤 분들이었나 (생각해 주십시오.)” 신청자는 이제까지 11명, 남아있는 유족들 대부분이 고령이라 시간이 많지 않은데, 일본 정부는 절차를 따지며 검토하겠단 답변만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일본 정부가
[보도자료] 강제동원 손해배상청구 사건, 김앤장 출신 판사에 대한 기피신청
[다운로드] [보도자료]ㅣ[다운로드][법관기피신청요약] 1. 민주언론을 위한 귀 언론사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2. ‘민족문제연구소’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공익인권변론센터’는 2019년 4월, 대리인단과 지원단을 구성하여 일본제철 주식회사 등 전범기업에 대한 강제동원 피해자와 유족들의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서울중앙지방법원은 일부 사건에서 지난 2018년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손해배상청구권을 인정한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에도 불구하고, 손해배상청구권을 인정하지 않거나 소멸시효가 도과되었다는 이유로 피해자들의 청구를 인정하지 않는 판결을 내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서울중앙지방법원의 판결로 강제동원 피해자와 유족들의 권리구제는 현저히 지연되고 있습니다. 3. 최근 대리인단은 진행중인 일부 하급심 사건에서 향후 재판의 공정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사정을 인지하였습니다. 대리인단이 확인한 바에 의하면, 해당 사건을 담당하는 법관(이하 ‘이 사건 법관’)이 법관으로 임용되기 이전 강제동원 가해 일본 기업(일본제철 주식회사, JX금속 주식회사 등)의 소송대리를 사실상 전담해온 김앤장 법률사무소(이하 ‘김앤장’)에서 2003년부터 2017년까지 장기간 근무하면서 현재 소송의 일본 기업측 소송대리인 변호사들과 장기간 동료로 함께 근무한 사실이 있습니다. 김앤장은 강제동원 소송과정에서 ‘징용사건 대응팀’을 만들고 사법부, 행정부와 긴밀한 협의를 하는 등 재판절차에 부당히 관여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습니다. 참고로 이 사건 법관이 진행하는 사건에서 피고 일본 기업측 소송대리인인 김앤장의 소속 변호사들 중 일부는 위 ‘징용사건 대응팀’의 일원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사건 법관이 김앤장에 근무한 기간 동안 바로 위 ‘징용사건 대응팀’이 구성·운영되었습니다. 이에 강제동원 소송 유족측 대리인단은 2021. 9. 14. 이 사건 법관에 대한
[오마이뉴스] “국정원 불법 해외공작, 매국이자 반역행위… 책임자 처벌해야”
국정원 불법공작 네트워크 “국정원 서버에 불법 사항 다 있다, 폐기 전 확보해야” “있을 수 없는 매국행위이자 반역행위다. 국정원의 불법행위에 대한 진상규명과 피해자 명예회복, 재발방지 대책이 요구된다.” 9일 서울 중구 민주노총 사무실에서 열린 ‘국정원 불법 해외공작 규탄, 박지원 국정원장 면담 요구 시민사회 기자회견’에 참석한 박석운 한국진보연대 대표는 최근 일본 극우단체 지원 등의 의혹을 받는 국가정보원을 강하게 비판했다. 한국진보연대를 비롯해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민족문제연구소,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등으로 구성된 ‘국정원 불법공작 네트워크’는 “국정원 사찰 해외 공작 의혹에 대해 명백히 밝히고 책임자를 강력히 처벌할 것을 정부와 국정원에 엄중히 요구한다”라고 주장했다. 앞서 6월 1일과 8월 10일 MBC <PD수첩>은 ‘국정원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와 정의연 등 지원단체를 비난하고 최재익 독도수호연대 활동가를 위협하는 일본 극우단체를 지원하고 2015년 일본군 위안부 합의에 개입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보도에 따르면, 국정원은 이명박-박근혜 정권 당시 일본 공안 기관에 정보를 주고 일본 공안은 이 정보를 일본 내 극우세력에게 전달했다는 것. 이로 인해 최재익 독도수호연대 대표의장과 윤미향 당시 정의기억연대 대표가 일본을 찾을 때마다 일본 극우세력 수십여 명이 미리 대기하고 있다가 폭언과 망동을 일삼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발생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최 대표가 타고 있던 차량은 일장기로 뒤덮이는 조롱을 당했고, 윤미향 의원도 일본 공항에서 속옷까지 검사당하는 치욕스러운 상황을 마주해야만 했다. <PD수첩>은 해당 방송에서 국정원이 ▲일본 자민당의 극우정책을 뒷받침하는 극우단체인 ‘국가기본문제연구소’에
[입장문] 일제 강제동원피해자의 손해배상청구소송을 기각한 재판부의 각성을 촉구한다
[다운로드][입장문] 일제 강제동원피해자의 손해배상청구소송을 기각한 재판부의 각성을 촉구한다 오늘 서울중앙지방법원(판사 박성인)은 일제강점기 일본제철에 강제동원 당한 피해자의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 원고의 청구를 기각하는 판결을 내렸다. 일제 강제동원 피해 진상규명과 배상을 위해 오랫동안 노력해온 우리는, 이번 판결이 강제동원 문제가 갖는 역사성과 특수성을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판단하고,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는 점을 밝힌다. 전범기업 일본제철을 상대로 한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투쟁은 일본에서 시작되었다. 1997년 일본의 재판소는 일본제철이 파산한 후 다시 합병했기 때문에 지금의 일본제철은 다른 회사라는 등의 이유를 들며 피해자들의 청구를 기각했다. 이후 피해자들이 다시 한국법원에서 소송을 시작하여, 처음으로 강제동원으로 인한 인권피해를 인정받은 것이 2012년 5월 24일 대법원 판결이다. 파기환송 된 이 사건은 2018년 10월 30일 대법원 전원합의체에서 판결이 확정되었다. 오늘 재판부는 ‘원고들의 권리행사 장애사유’가 이 2012년 5월 24일 판결로 인해 해소되었다며, 시효가 지났다는 이유를 들어 원고들의 청구를 기각했다. 이 판단에는 크게 두 가지 잘못이 있다. 첫째, 재판부가 기준으로 삼은 2012년 5월 24일 판결은 2018년 10월에서야 확정되었다는 점이다. 2018년 10월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2012년 대법원 판결을 변경할 만한 사유가 없어 굳이 별도의 판단이 필요하지 않다는 소수 의견에도 불구하고, 6년이 넘게 시간을 끌다 결국 피고의 주장을 기각했다. 따라서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권리행사는 최소한 2018년 10월 30일 확정판결 후에나 가능하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둘째, 재판부는 이 사건의 사회적, 역사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