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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광복절에 ‘테러리스트 김구’ 출간…“이승만 미화 위해 역사 왜곡”
뉴라이트 인사 정안기씨 집필 친일적 역사 인식으로 논란을 빚는 뉴라이트 인사들이 윤석열 정부의 학술·보훈기관 요직에 잇따라 중용되고 있는 가운데, 뉴라이트 핵심 인사 중 한명인 정안기 낙성대경제연구소 연구위원이 쓴 책 ‘테러리스트 김구’가 오는 15일 광복절에 맞춰 출간될 예정이다. 학문적 영역에 머물러 있던 뉴라이트 인사들의 주장이 정부 영역으로까지 침투하고, 왜곡된 역사 인식이 버젓이 책으로 출간돼 역사학계의 우려가 커지고 있다. 9일 온라인 서점 교보문고를 보면, 정안기씨가 쓴 ‘테러리스트 김구’가 예약 판매 중이다. 정씨는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한 책 ‘반일 종족주의’의 공동 저자 중 한명이다. 온라인 서점에 게재된 출판사 서평 내용을 보면 “김구는 전 생애에 걸쳐 수십 건의 테러를 자행하고 다수의 인명을 살상한 ‘세계적으로 유명한 정치적 암살자’이다. 하지만 ‘세계적인 테러리스트’ 혹은 ‘테러의 수괴’라는 동시대 역사인들의 비난과 조롱을 애써 부정하거나 부끄러워한 적이 없다”며 독립운동가 김구 선생을 테러리스트로 규정한다. 그러면서 김구 선생에 대해 한국인들이 잘 바라보지 않으려 하는 어둠의 면모 ‘테러리스트 김구’를 본격적으로 파헤쳤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김구 선생의 업적와 공로를 철저하게 부정하고 폄훼한다. 정씨는 책에서 “오늘날 한국인들이 환상하는 김구는 종북 주사파가 만들어낸 역사적 허상에 불과하다”며 “그런 김구를 두고 ‘민족의 구원자’ 혹은 ‘자유와 통일의 메시아’라 환상하고 성인화하는 것은 지독한 정신분열이자 끔찍한 위선”이라고 주장한다. 역사학계에서는 뉴라이트 계열 인사들의 정부 기관 진출과 함께 이런 책의 출간이 더 큰 역사 왜곡으로
[MBC뉴스] 독립기념관장 첫 일성이‥”친일인명사전 손본다”
앵커 1945년 8월 15일이 광복절이 아니라고 주장한 김형석 신임 독립기념관장이 어제 취임했습니다. 독립유공자 후손들의 격한 항의 속에서도 취임하자마자, 친일파로 매도된 인사들 명예 회복에 힘쓰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조희형 기자입니다. 리포트 태극기를 들고, 굳은 표정으로 독립기념관 입구 앞을 막아선 사람들. [광복회원] “친일 관장 웬말이냐 역사 앞에 사죄하라!” 독립유공자 후손들이 김형석 독립기념관장을 용납할 수 없다며 취임식장을 막아선 겁니다. 40분 넘게 입장하지 못하다가 간신히 취임식을 치른 김형석 관장, 행사 후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김형석/독립기념관장] “친일인명사전의 내용들이 사실상 오류들이 있더라. 잘못된 기술에 의해서 억울하게 친일 인사로 매도되는 분들이 있어서도 안되겠다…” 독립기념관장이 취임 첫날부터 친일파 명예 회복을 언급한 셈입니다. 김 관장은 안익태, 백선엽 등 친일 행적이 드러난 역사 인물들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보여왔습니다. 작곡가 안익태를 두고 “친일을 뛰어넘어 음악을 통해 세계평화를 이루려고 했다”며 “항일과 친일이라는 이분법적 잣대로 재단할 수 없다”고 했고, 백선엽 장군에 대해선 “간도특설대에 근무한 사실만으로 진실을 오해한 것 아니냐”며 “친일파라는 불명예를 쓰고 별세했다”고 밝혔습니다. 신임 독립기념관장이 보여주는 이런 역사인식에 광복회뿐 아니라 관련 시민단체들도 일제히 반발하고 있습니다. [방학진/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 “이분이 평소 지론대로 ‘안익태에 대한 독립운동을 연구해라’ 지시할 가능성이 높죠. 독립기념관장으로 앉아서 친일파들을 다시 복권해내는…” 광복회는 대통령실의 광복절 기념 오찬 초청을 거절하기로 했습니다. 대신 시민단체들과 함께 김 관장이 물러날 때까지 집회를 이어가겠다는 입장입니다. MBC뉴스 조희형입니다.
[한겨레] [단독] 일본, 사도광산 ‘강제’ 표기 묵살…들통난 윤 정부 굴욕외교
외교부 ‘강제’ 표현은 협상 안 했다더니… 핵심요구 거부당하고도 세계유산 등재 동의 한국이 일본과 사도광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관련 협상을 하는 과정에서, 전시물 설치 예정지인 아이카와 향토박물관에 조선인 동원 과정의 억압성을 보여주는 ‘강제’라는 표현을 명시해달라고 요청했지만 일본 정부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우리 쪽의 핵심 요구사항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는데도 사도광산의 세계문화유산 등재에 동의해준 셈이어서 ‘저자세 협상’ 논란이 더욱 거세질 것으로 보인다. 외교부는 6일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소속 이재정 더불어민주당 의원에게 제출한 답변서에서 “사도광산 전시 내용을 협의하는 과정에서 ‘강제’라는 단어가 들어간 일본의 과거 사료 및 전시 문안을 일본 쪽에 요청했으나 최종적으로 일본은 수용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는 지금껏 한국 정부가 일본에 ‘강제성이 드러나는 표현’을 요구했고, 일본 정부가 이를 받아들였다는 설명과는 다른 내용이다. 앞서 지난달 30일 외교부 당국자는 “(아이카와 향토박물관) 실제 전시 내용을 한·일 두 나라가 협의해 구성할 때 우리 쪽은 강제성이 더 분명히 드러나는 많은 내용을 요구했으며 일본이 최종적으로 수용한 것이 현재 전시 내용”이라고 밝힌 바 있다. 외교부 설명대로 현재 아이카와 향토박물관에는 “초기에는 조선총독부의 관여하에 ‘모집’ ‘관 알선’이 순차적으로 시행됐고, 1944년 9월부터는 ‘징용’이 시행돼 노동자들에게 의무적으로 작업이 부여되고 위반자는 수감되거나 벌금을 부과받았다”는 내용이 적힌 사도광산 관련 전시물이 설치돼 있다. 하지만 전시물에 조선인이 강제로 동원됐다는 명시적 표현은 빠져있다. 논란이 커지자 정부는 일본과 사도광산 세계유산 등재
[한겨레] 윤석열 정부 ‘친일적 역사인식’…독립기념관까지 점령하다
뉴라이트 인사 중용 친일적 역사인식으로 논란을 빚는 뉴라이트 인사들이 윤석열 정부의 학술·보훈기관 요직에 잇따라 중용되고 있다. 지난달 말 식민지근대화론에 입각한 역사서술로 논란이 된 ‘반일 종족주의’의 공동 필자 김낙년 동국대 명예교수가 한국학중앙연구원장에 취임한 데 이어, 지난 6일엔 광복회가 뉴라이트로 지목한 김형석 대한민국역사와미래 이사장이 독립기념관장에 임명됐다. 윤석열 정부의 협소한 인재풀이 한계를 드러냈다는 평가와, 최근 일본 사도광산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과정에서 보여준 정권의 ‘대일관’이 가감 없이 반영된 인사라는 지적이 함께 나온다. 최근 ‘친일 인사 중용’ 논란의 중심에는 김형석 신임 독립기념관장이 있다. 최근 독립기념관장 후보자 공모에서 독립운동가 후손은 탈락하고 친일적 인사가 복수로 추천됐다고 주장한 이종찬 광복회장은 7일 라디오 인터뷰에서 “인사가 이런 식으로 가는 건 용산 어느 곳에 일제 때 밀정과 같은 존재의 그림자가 있는 것이 아닌가”라며 대통령실을 정면으로 겨냥했다. 강유정 더불어민주당 원내대변인은 브리핑에서 김 관장 임명에 대해 “독립기념관의 설립 목적과 존재 이유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행위”라며 임명 철회를 촉구했다. 광복회는 이사·지부장 긴급연석회의를 열어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의견을 수렴해 다양한 방법으로 역사정의가 바로 설 때까지 강력 대응”하기로 뜻을 모았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오는 10일 충남 천안 독립기념관에서 김 관장 임명을 규탄하는 집회를 열기로 했다. 독립운동 유관단체들이 김 관장 임명에 거세게 반발하는 것은 그를 ‘일제 강점기가 한국 근대화에 도움이 됐다’는 취지의 주장을 펴는 뉴라이트 계열로 보기 때문이다. 김 관장은 저서
[경향신문] 신임 독립기념관장에 광복회가 ‘뉴라이트’ 지목한 김형석 교수 임명
신임 독립기념관장에 김형석 고신대 석좌교수가 6일 임명됐다. 이종찬 광복회장이 뉴라이트 계열 인사로 지목해 국가보훈부에 후보 철회를 요구했던 인물이라 논란이 일 것으로 보인다. 보훈부는 이날 김 교수가 임기 3년의 독립기념관장으로 임명됐다고 밝혔다. 독립기념관장은 독립기념관 이사회가 구성한 임원추천위원회(임추위)에서 복수의 후보를 추천한 뒤 보훈부 장관의 제청을 거쳐 윤석열 대통령이 임명한다. 이종찬 광복회장은 전날 기자회견에서 김 관장을 겨냥해 “(독립기념관장 후보 중 한 명은) 이승만 대통령을 우파, 김구 주석을 좌파로 갈라치기하거나 임시정부 역사를 평가절하하며 대한민국은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건국된 것이 아니라 1948년에 건국되었다고 주장해왔다”면서 임추위를 새로 구성해 후보 선정 절차를 다시 거쳐야 한다고 말했다. 이 회장은 또 김 관장이 “급조한 관변 단체를 이끌면서 특정 정당과 업무협약을 맺어 역사연구에 정치를 끌어들(였다)”고도 비판했다. 김 관장이 재단법인 대한민국역사와미래 이사장으로 재직 중인 점을 언급한 것으로 해석된다. 이 재단법인은 지난 2022년 8월 국민의힘 싱크탱크인 여의도연구원과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김 관장은 2022년 10월 언론과 인터뷰에서 “‘국부 논쟁’을 끝내고 이승만과 김구를 모두 ‘건국의 아버지로 둬야 한다”며 “이승만과 김구의 지지자를 아울러야 국민 통합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김 관장은 2022년 8월 출간한 저서 <끝나야 할 역사전쟁 – 건국과 친일 논쟁에 관한 오해와 진실>에는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을 두고 “친일행위자의 ‘역사적 공과’를 따지지 않고 ‘친일 행위’와 ‘반민족 행위’를 동일시하는 우를 범했다”고 적었다. 그는 또 지난해 5월 한 역사
[한겨레] ‘사도광산 등재’ 시민사회가 홍보 기회로 역이용해야 [왜냐면]
강철구 | 배재대 일본학과 교수 유네스코 등재 대상 유산이란 ‘인류가 공동으로 보호해야 할 만큼 가치가 있는 곳’을 말한다. 만일 사도광산이 정말로 우리 인류가 공동으로 보호해야 할 만큼의 가치가 있는 곳이라면 그 인류에는 우리 한국인도 당연히 포함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조선에서 강제노동에 동원된 분들 중 아직 신원도 확인되지 않은 우리 선조들의 희생도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 따라서 한국은 이 부분의 기록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해 왔고, 특히 유네스코 자문기구인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에서도 지난 6월 사도광산과 관련해 전체 역사를 반영하라고 권고하며 보류를 결정해 양국 협상에서 한국이 우위를 잡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좋은 기회를 우리 정부와 외교부는 결과적으로 충분히 활용하지 못했다. 더군다나 우리나라 국회가 7월25일 본회의에서 ‘일본 정부의 사도광산 세계유산 등재 추진 철회 및 일본 근대산업시설 유네스코 권고 이행 촉구 결의안’까지 채택했는데도 ‘강제동원’이 빠진 채 합의했다는 것은 정부가 국민과 국회의 목소리를 듣고자 하지 않는다는 비판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물론 일본은 7월28일부터 아이카와 향토박물관에 조선인 출신 노동자들의 가혹한 노동환경의 역사 전시와 추도식도 하겠다고는 하지만, 일본 정부가 향후에도 지속적으로 약속 사항을 성의있게 이행해 나갈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제기된다. 왜냐하면 사도광산 내에 승용차 157대와 관광버스 3대가 주차할 수 있는 전체 면적 1000㎡(330평) 규모의 전시관이 아닌, 사도광산에서 약 2㎞나 떨어진 외곽지역에, 그것도 승용차 20대 정도의 주차공간밖에 없을 뿐만 아니라 유네스코 등재 범위에서조차
[보도자료] 소년 이봉창이 다닌 문창학교 위치 확인
[보도자료] [다운로드] 소년 이봉창이 다닌 사립문창학교의 소재지 최초 확인 청파동 골목길 안쪽의 미용실 자리(청파동 2가 5번지)가 바로 그곳 1932년 1월 8일 일본 도쿄 경시청 앞에서 폭탄투척의거를 일으키고 순국한 이봉창 의사(李奉昌 義士, 1901~1932)가 소년시절에 다녔던 사립문창학교(私立文昌學校)의 정확한 소재지가 처음으로 확인됐다. 특히 이곳은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인 홍병기(洪秉箕, 1869~1949) 선생이 교장(校長)으로 있던 학교였으며, 애국지사 신숙(申肅, 1885~1967) 선생 역시 설립 초기에 학감과 교감으로 활동했다는 사실로도 주목이 된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최근 용산 주변에 흩어져 있는 독립운동가 활동유적지의 현황과 관련사료를 순차적으로 점검하는 과정에서 사립문창학교의 소재지가 구체적으로 언급된 내용을 새롭게 발굴하였다고 밝혔다. 『경성번창기(京城繁昌記)』(1915)에 수록된 「사립일반학교 일람표」에 따르면, 이 학교의 소재지 주소가 바로 ‘청엽정 2정목(靑葉町 二丁目, 지금의 청파동 2가) 5번지’로 기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1912년 9월에 작성된 『토지조사부(土地調査簿)』(국가기록원 소장자료)를 보더라도, 208평(坪) 규모에 달하는 이곳 대지의 소유자가 나중에 손병희에게서 천도교 교주의 직임을 물려받는 박인호(朴寅浩, 북부 가회방 재동)로 등재되어 있는 것으로 드러난다. 이러한 사실관계는 이 학교가 1910년대에 천도교에서 인계하여 운영했던 각종 학교의 한 곳이었다는 점과 그대로 일치하는 대목이다. 이 학교는 최초에 사립광성학교(私立廣成學校; 공덕리 소재)의 지교(支校)로 만들어졌다가 이내 이를 확장하여 1909년 2월 4일에 정식설립인가(설립자 이순하)를 받아 4년제 초등과정으로 개편 전환하는 과정을 거쳤다. 이 무렵에 나온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의 관련기사들에는 이 학교의 위치가 원래 청파 하마비동(靑坡 下馬碑洞, 지금의 효창동과 원효로 1가에 걸친 지역)에
[오마이뉴스] 파리 유학파 기자의 몰락… 이런 거짓말까지 퍼트렸다
[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이정섭 프랑스 파리는 2024년 제33회 대회까지 합쳐 올림픽을 세 번이나 개최했다. 1900년 제2회 대회에 이어 1924년 제8회 대회도 파리에서 열렸다. 1900년과 1924년 대회는 다른 도시에서 열릴 수 있었지만 결국 파리에서 개최됐다. 제1회 대회를 개최한 그리스는 제2회도 자국에서 열기를 희망했지만, 1896년에 제2대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장이 된 피에르 드 쿠베르탱의 주도하에 파리에서 두 번째 대회가 열리게 됐다. 제2회 대회로부터 불과 20년 만에 파리에서 또다시 열린 것은 후보 도시가 없었기 때문이 아니다. 파리 외에 로스앤젤레스·바르셀로나·암스테르담·프라하·로마 등도 개최를 희망했다. 파리가 쟁쟁한 후보들을 제친 데는 파리 출신인 쿠베르탱의 의지가 크게 작용했다. 1900년 대회가 만국박람회 부속행사처럼 열린 것이 안타까워 고향에서 제대로 치러보고자 했던 그의 의지가 영향을 줬다. 그는 1924년 파리 올림픽을 치른 그 이듬해에 위원장에서 퇴임했다. 정조 임금 때인 1789년에 혁명이 일어난 프랑스는 혜성처럼 등장한 나폴레옹의 혁명전쟁으로 한때는 유럽을 강타했지만, 그의 몰락과 함께 위축되어 갔다. 나폴레옹 전쟁이 진압된 뒤 오스트리아 정치가 클레멘스 메테르니히의 주도로 열린 1815년 빈 회의는 프랑스를 견제하는 전제하에 세력균형 시스템으로 유럽 국제질서를 재편했다. 빈 체제하에서도 프랑스는 강대국의 지위를 잃지는 않았지만, 종전보다 위축된 상태를 감내해야 했다. 1866년에 조선까지 와서 병인양요를 일으키기도 했지만, 1870년에 비스마르크 총리의 프로이센과 치른 보불전쟁에서 패했다. 영국과 러시아가 주도한 19세기 중후반 세계질서 하에서 프랑스는 2위 그룹 국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