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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기사

[오마이뉴스] 일본군 총칼에 죽은 모자, 102년 뒤 세워진 추모비

2021년 4월 2일 1069

[현장] 충남천안 ‘독립운동’ 주도하다 죽은 김구응 열사, 그의 모 최정철 열사 ‘추모비 제막식’ 지난 1일 찾은 충남 천안시 병천면 가전리의 모자(母子) 무덤에서는 102년 전, 아우내장터의 만세 함성이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천안 아우내장터 독립만세운동 주동자인 최정철·김구응 열사 무덤이었다. 뜻깊은 날을 기려, 무덤 주변에서는 과거 천안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최정철(1995, 애국장), 김구응(1991, 애국장) 열사 모자의 추모비 제막식이 있었다. 흔히 아우내 만세운동이라고 하면 유관순 열사를 떠올리지만, 102년 전 4월 1일, 아우내장터 만세시위를 주도하다 일제 순사의 총검에 의해 현장에서 순국의 길을 걸은 모자(母子)가 있다. 바로 어머니(최정철, 당시 66세)와 아들(김구응, 당시 32세)이 그분들이다. 한날한시에 목숨을 잃은 모자는 가전리 산 8-6번지에 묻힌 채, 지난 100여 년간 침묵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과거 어떤 일 벌어졌나 보니… ‘독립선언’ 하려 모인 6400명, 일본군과 맞서다 “천안군 병천시장에서 의사(義士) 김구응이 남녀 6400명을 소집하여 독립선언을 할 때 일본헌병(일경)이 조선인의 기수(旗手, 행사 때 대열의 앞에 서서 기를 드는 일을 맡은 사람, 곧 조선인들)를 해치고자 했다. 조선인들은 맨손으로 이를 막느라 피가 낭자했다. 그러자 일본 헌병은 이들의 복부를 칼로 찔러 죽음에 이르게 하는지라, 김구응이 일본 헌병의 잔인무도함을 꾸짖자 돌연 총구를 김구응에게 돌려 그 자리에서 즉사케 했다. 김구응은 머리를 맞아 순국했으나 일본 헌병은 사지(四肢)를 칼로 난도질했다. 이때 김구응의 노모(최정철 지사)가 일본 헌병을 향해 크게 질책하자 노모마저 찔러

[오마이뉴스] [주장] 전봉준·최시형, 독립유공 서훈해야

2021년 4월 2일 712

‘독립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독립유공자법)에는 “일제의 국권침탈에 항거하다가 순국한 자는 순국선열에 해당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순국선열에 해당하는 자는 독립유공자로 서훈된다. 그런데 국가보훈처의 독립유공 심사위원들은 이 법률에 의거하여 독립유공자를 심사하지 않고 있다. 을미년(1895년)에 경복궁을 점령한 일본군을 몰아내기 위해 싸운 인사는 독립유공자로 인정하고 있다. 반면에 갑오년(1894년)에 경복궁을 점령한 일본군을 제거하기 위해 거병한 인사는 아직까지 독립유공자로 포상하지 않고 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다. 필자가 확인한 바에 의하면, 을미의병 참여자는 1962년부터 독립유공 서훈을 시작하여 2020년까지 총 120명을 포상하였다. 대한민국 정부가 너무도 잘한 일이었다. 1962년 안승우(1865∼1896)에게 독립장을, 1963년에 이춘영(1868∼1896)·서상렬(1856∼1896)·홍사구(1888∼1896)에게 각각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2018년에 김진림(1838∼1900, 63세)·윤병의(1822∼1899, 78세)·이강하(1873∼1940, 68세)에게 각각 대통령표창을, 2020년에 이면수(1833∼1898, 66세)·류인목(1839∼1900, 62세)에게 각각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이상의 총 120명은 을미의병 참여만으로 서훈을 받은 분들이다. 을미의병 참여와 이후의 의병 참여로 서훈을 받은 분은 58명으로 확인되었다. 이로써 1962년에 이병도와 신석호(둘 다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됨)가 정한 독립유공 내규 즉 ‘독립운동의 기점은 을미의병이다’라는 내규에 의거하여 심사하고 있음이 분명히 확인됐다. 일본군을 몰아내기 위해 거병한 2차 동학농민혁명은 나라를 지키기 위한 애국적인 행동이었다. 항일 독립운동인 2차 동학농민혁명을 이끈 항일 투쟁의 총사령관이 전봉준이었고, 최고 지도자가 최시형이었다. 전봉준·최시형과 함께 1894년과 1895년에 걸쳐 일본군을 몰아내기 위해 일어나 싸운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도 일제의 국권침탈을 반대·항거하였고, 그 반대와 항거로 인하여 순국하였다. 같은 시기 일본군을 몰아내다가 순국한 을미의병(1895)·을사의병(1905)·병오의병(1906)·정미의병(1907)

[성명] 진실화해위는 피해자들과 유족들의 눈물과 한을 매순간 기억하라!

2021년 3월 25일 1432

[다운로드][공동성명] 2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첫 번째 위원회 개최에 부쳐 진실화해위는 피해자들과 유족들의 눈물과 한을 매순간 기억하라! 지난해, 12월 10일 출범한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가 국회의 위원 추천이 지연되어 출범 100일을 넘겨서야 첫 번째 위원회를 개최하게 된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하루하루 잊히지 않는 과거의 고통과 상처를 기억하며 살아가고 있는 피해자들과 유족들, 대한민국의 올바른 과거사정리와 진실규명을 기다리는 국민들께 머리 숙여 사과하고 남은 시간 최선을 다해 진실규명에 매진할 것을 다짐하는 마음으로 첫 번째 위원회를 시작해야 할 것이다. 2기 진실화해위가 출범한 지 넉 달 만에 형제복지원과 선감학원, 서산개척단 피해자들,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학살 유족들, 강제징집 녹화‧선도공작 피해자들, 군의문사 유족들, 권두영, 김두황, 문승필, 박창수, 박태순, 안치웅, 이내창, 이덕인, 이윤성, 이재문, 이진래, 이철규, 장준하, 정경식, 정성희, 김용권, 최우혁, 한영현, 한희철 등 의문사 유족들을 비롯하여 2,774건, 5,180명에 이르는 진실규명신청이 접수되었고 앞으로도 수천 건, 수만 명의 진실규명신청이 이어질 것이 예상된다. 피해자들과 유족들에게 진실화해위의 활동기한 3년은 충분한 시간이 아니다. 피해자들과 유족들 중에는 고령의 어르신들도 많으시고, 여러 후유증으로 건강이 상한 분들도 많다. 피해자들과 유족들에게 진실규명 없는 날은 하루하루가 고통일 뿐이다. 진실화해위의 위원들과 조사관들이 그분들의 아픔을 조금이라도 헤아리고 있다면 앞으로는 진실화해위의 단 하루도 허투루 사라지게 해서는 안 된다. 진실화해위의 모든 구성원은 피해자들과 유족들의 피와 눈물을 어깨 위에 짊어지고 있다는 생각으로 위원회 활동에 임해야

[한겨레] ‘전범이 된 조선청년’ 한맺힌 65년 투쟁 빈손으로 떠나다

2021년 3월 30일 1213

[가신이의 발자취] ‘마지막 비시급 전범’ 이학래 회장 별세 17살 때 ‘콰이강의 다리’ 포로감시원 일제 패망뒤 연합군 재판 ‘사형선고’ 전후 일본 국적 박탈해 보훈도 제외 55년 70여명 동진회 결성 ‘보상’ 요구 65년 ‘한·일협정’ 구실로 ‘창구’ 닫아 91년부터 법정 투쟁 99년 최종 패소 지난해까지 의회 상대로 ‘입법’ 촉구 “슬픈 소식을 전해야겠습니다.” ‘마지막 조선인 비·시(B·C)급 전범’ 이학래 동진회 회장의 죽음을 알리는 부고는 짤막한 문장으로 시작하고 있었다. 자이니치(재일동포)들이 집단 거주하는 오사카 이카이노에서 ‘샛바람 문고’를 운영하는 후지이 고노스케는 28일 페이스북을 통해 이 회장이 이날 오후 숨졌다고 밝혔다. 향년 96. “이학래상이 지난 26일 자택에서 넘어져 머리를 부딪히고 다리가 부러져 병원으로 이송됐지만, 치료의 보람도 없이 28일 오후 2시10분 숨졌습니다. 학래상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먼저 숨진 동료들을 생각하고 (비시급 전범들을 구제하기 위한) 입법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아베 신조 정권이 힘으로 입법화를 가로막았습니다.” 후지이의 설명대로, 조선인 비시급 전범 이학래의 일생은 부당한 일본 국가권력을 상대로 한 투쟁으로 점철된 삶이었다. 1925년 전라남도 보성에서 3남매의 첫째로 태어난 그는 1942년 봄 면장에게서 갑작스런 호출을 받았다. “‘남방 포로감시원’을 모집하는데, 자네가 가소!” 근무 기간은 2년, 한 달 월급은 50원이라고 했다. 17살 소년은 2년만 고생하면 징용과 머잖아 시행될 징집을 면할 수 있다는 생각에 지원서를 제출했다. 1942년 8월19일 부산에서 동남아시아로 향하는 배에 올랐다. 그로부터 3년 뒤 일제가 패망하면서 연합국

민족사랑 2021년 03월호

2021년 3월 26일 12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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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민족문제연구소 출범 30년을 돌아본다

2021년 2월 23일 1651

[전문] [다운로드] 민족문제연구소 출범30년을 돌아본다 상임이사 조세열 친일문제 연구의 선구자 임종국 선생의 유지와 반민특위의 정신을 이어받은 민족문제연구소가 2월 27일(일제침략이 시작된 강화도조약 체결일)로 창립 30주년을 맞는다. 그간 연구소는 숱한 고난과 역경을 뚫고 역동하는 조직으로 성장했다. 짧지 않은 세월인 만큼 괄목할만한 성과도 거두었지만 역량이 따라주지 않아 미처 주목하지 못한 아쉬운 부분도 적지 않았다.    자화자찬이 될까 조심스러운 면이 없지 않지만 지난 30년간 연구소가 이루어낸 주요성과들을 정리해본다.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의 업적은 물론 2009년 11월 8일 『친일인명사전』 발간이다. 연구소 창립부터 치면 18년, 편찬위원회가 발족한 뒤로도 8년의 시간과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 끝에, 전3권 2,882쪽 4,389명의 친일파를 수록한 대사전이 빛을 보게 되었다. 여기에 이르기까지 각계각층의 성원과 헌신이 있었다. 대학교수 1만2천여 명의 편찬 지지선언, 단 11일만에 5억여 원의 성금을 모아주고 후원회원으로 가입한 어린이 청소년 대학생 시민들, 진보언론의 대대적인 보도, 아무런 대가 없이 작업에 참여한 편찬위원들과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열정을 바친 상근자들. 그야말로 전 국민적 여망과 시대정신이 만들어 낸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기적의 산물이었다. 오랜 기간 소송과 협박에 시달렸으나 『친일인명사전』은 이제 정부기관과 사법부까지 잣대로 삼는 역사의 이정표로 굳건히 자리 잡았다. 2008년 집권한 이명박 정권은 실용주의를 택할 것이라는 일반적 예상과 달리 철저하게 퇴행의 길을 걸으며 극우세력과 손을 잡았다. 정권인수위원회의 일성이 과거사청산 중단이었던 데서 드러나듯, 뉴라이트의 역사인식을 고스란히 수용해 정책에

[오마이뉴스] “일본 지원 받은 인물, 왜 소녀상과 노동자상을 공격할까”

2021년 3월 24일 5040

<김운성 작가의 탄원서 바로가기> [인터뷰] 반일종족주의 저자에게 손해배상 청구소송 제기한 김운성 작가 “정말로 우리 사회가 역사정의를 온전히 실천하고 제대로 된 친일청산을 바란다면 일본제국주의를 미화하는 사람들에 대한 확실한 처벌이 이뤄져야 한다. 사법부가 이번 소송에서 역사정의에 입각한 판단을 내려주기를 기대한다.” ‘강제징용 노동자상’을 만든 김운성씨가 <오마이뉴스>를 만나 한 말이다. 강제징용 노동자상은 2017년 8월 서울 용산역 광장에 세워졌다. 일본에 끌려가 노역을 살다 쓰러진 조선인 노동자를 기리기 위해 민주노동과 한국노총이 기금을 모아 건립했다. 제작은 ‘평화의 소녀상’ 작가로 알려진 김운성·김서경 부부가 맡았다. 문제는 <반일종족주의>의 공동저자로 알려진 이우연 낙성대경제연구소 연구위원이 인터넷 언론 ‘제3의길’과 자신의 SNS를 활용해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인은 일본인과 동일한 대우를 받았다. 강제징용노동자상은 역사왜곡”이라면서 “강제징용노동자상의 모델은 1926년 일본인”이라는 주장을 펼치면서 벌어졌다. 최덕효 한국인권뉴스 대표, 김소연 전 광역시의원 등 역시 SNS와 인터넷뉴스, 보도자료 등을 통해 비슷한 주장을 펼쳤다. 이 때문에 김 작가는 부인 김서경 작가와 함께 이우연 낙성대경제연구소 연구위원과 주동식 제3의 길 대표, 최덕효 한국인권뉴스 대표, 김소연 전 광역시의원 등 4인에 대해 손해배상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나 민사소송 결과가 결코 낙관적이지만은 않다. 이미 김 작가 부부는 2019년 말 이 연구위원 등 4인을 상대로 허위사실 등에 의한 명예훼손 혐의로 형사 고소했다. 하지만 검찰은 지난해 10월 이들에 대해 증거불충분을 이유로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 지난 11일 오후 <오마이뉴스>는 강제징용 노동자상이 설치된

[한겨레] “박정희 등 ‘일제 빛낸 사람들’ 92명 수갑 채워 심판했죠”

2021년 3월 30일 2033

[짬] 민중미술가 이상호 화가 서대문형무소에 갇혔을 때였다. 감옥 안 마룻바닥에서 글을 새긴 흔적을 발견했다. ‘대한독립만세’라는 글씨였다. 독립운동가들의 삶이 떠올라 눈물이 났다. “친일파 후손들은 떵떵거리며 살고, 목숨바쳐 나라를 구한 독립지사들의 후손은 가난조차 벗어나지 못하는 현실”에 분노했다. 친일 청산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광주비엔날레 초대작가 이상호(61) 화가는 화폭에 친일파 92명을 그려 일일이 손에 포승줄로 묶고 수갑을 채웠다. 이 작가는 30일 “70여년 전 ‘반민특위’ 해체로 심판받지 못했던 자들을 그림으로 심판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번 광주비엔날레(4월1~5월9일)에 그는 7점의 작품을 선보인다. ‘일제를 빛낸 사람들’(417㎝×245㎝)에서 그는 친일 인사 92명을 소환했다. 그는 민족문제연구소와 함께 ‘친일인명사전’(2009) 수록 인물 중 군인·경찰·관료·언론·문화예술 부문에서 92명을 간추렸다. 박정희·노덕술·방응모·김성수·김기창·김은호·최남선·이광수·서정주·안익태·김활란 등이다. 세계적인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의 아버지 백낙승, 소설가 전혜린의 아버지 전봉덕, 우장춘 박사의 아버지로 민비 시해사건 주동자 우범선도 포함됐다. 인물 옆엔 그의 행적을 기록했다. 이 작가는 “반복해서 색을 칠해가며 그들의 비열한 내면세계를 드러내는 데 중점을 뒀다”고 말했다. 지난해 1월부터 작업을 시작한 그는 “친일파들의 얼굴을 그리면서 메스꺼움이 가슴에서 튀어나와 고통스러웠다”고 말했다. 그럴때마다 “김구·장준하 선생의 얼굴이나 내가 그린 ‘통일열차 타고 베를린까지’라는 그림을 보며 붓을 곧추 세웠다”고 했다. 친일파들의 기록과 사진 등을 찾는 것은 이지훈 민족문제연구소 광주지부 사무국장이 도맡아 큰 힘이 됐다. 그의 이번 작품은 최근 <뉴욕타임스>에 소개되기도 했다. ‘일제를 빛낸 사람들’은 광주비엔날레가 끝나면 서울 민족문제연구소 식민지역사박물관에

[박물관은 뭐하니] 인턴편 Ep.2 어서와 식민지역사박물관은 처음이지? ① 미션 답 찾기

2021년 3월 24일 530

[박물관은 뭐하니] Ep.2 어서와 식민지역사박물관은 처음이지? ① 미션찾기 ※관련영상  ☞유투브: [박물관은 뭐하니] 인턴편 Ep.1 인턴은 뭐하니 VLOG 

[오마이뉴스] 만주 장교가 ‘광복투쟁’? 현충원 속 기막힌 신분세탁

2021년 3월 23일 1553

장군 제1묘역의 문용채와 최석용이 독립운동가였다고? 최근 제주 4.3 사건 73주년을 앞두고 제주 4.3 사건 당시 체포돼 육지에서 수형생활을 하던 중 6.25 한국전쟁 발발 직후 실종된 335명에 대한 재심에서 법원이 무죄를 선고했다. 왜곡된 역사 하나를 바로잡는 순간이었다. 제주 4.3 사건의 역사는 서울 동작동에 있는 국립서울현충원에도 서려 있다. 기자는 이미 동작민주올레 시즌1에서 ‘4.3길’을 걸으며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제주 4.3 사건의 아픔을 되돌아본 바 있다. 이때 미처 다루지 못한 이야기가 있어 국립서울현충원 ‘4.3길’을 보충하는 뜻도 담아 두 명의 장군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국립서울현충원의 장군 제1묘역에는 제주 4·3 사건과 관련된 인사로 이미 동작민주올레 시즌1에서 소개한 ‘제주의 의인’ 김익열 장군(관련 기사: 제주와 대화한 군인, 민간인을 짓밟은 군인)말고도 사건 당시 경찰과 군인 간부로 가해에 깊숙이 관여한 인물 넷의 묘가 더 있다. 무덤의 주인공은 제주 4.3 사건 당시 제주경찰서 서장이었던 문용채(1916~1976, 제1장군-72)와 제주 4.3 사건 당시 미군정 경무부 공안국장이었던 김정호(1909~1970, 제1장군-39), 이승만 정부의 육군총참모장이었던 채병덕(1910~1950)과 2연대(연대장 함병선) 소속 대대장이었던 최석용(1903~1974, 제1장군-60)이다. 이들은 일제강점기 친일행위를 한 인물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런데 이들 중 경찰 간부로 제주 4.3 사건에 개입한 문용채와 군 간부로 제주 4.3 사건에 개입한 최석용의 묘비명엔 그동안 알려져 있지 않았던 충격적인 내용이 담겨 있다.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돼 있는 만주국군 출신의 문용채 문용채는 1937년 봉천군관학교를 제5기로 졸업했다. 김백일(김찬규), 김석범, 김홍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