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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전두환 등 전직 대통령 흉상 설치한다는 마포구… “화합 아닌 분란의 거리” 우려도
[기사원문] <2024-07-23> 한국일보☞ 전두환 등 전직 대통령 흉상 설치한다는 마포구… “화합 아닌 분란의 거리” 우려도 마포구, 서거 대통령 9명 조각상 검토 엇갈린 평가 박정희·전두환 등도 포함 “정치적 공간 변질 우려” “구시대적 발상” 구 “주민설문·전문가 의견 수렴해 결정” 서울시 마포구가 관내에 전직 대통령 조각상을 세운 ‘화합의 거리’ 조성 계획을 검토하겠다고 밝혀 논란이 일고 있다. 역대 대통령 기념시설이 밀집한 지역적 특성을 살려 전직 대통령 업적을 기념하는 문화관광자원을 만들겠다는 취지지만, 역사적 평가가 엇갈리는 전두환 박정희 전 대통령 등도 포함돼 의도와 달리 정치적 논란과 갈등만 부추길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 마포구, 전직 대통령 조각상 세워 ‘화합’ 도모 마포구는 전직 대통령들의 조각상과 안내판 등을 조성하는 내용의 ‘화합의 거리’ 조성사업에 대한 타당성 검토 용역(예산 4,000만 원)을 추진한다고 22일 밝혔다. 설치 대상은 이승만 윤보선 박정희 최규하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등 서거한 전직 대통령 9명이다. 사업 부지로는 당초 가좌역 부근부터 홍대입구역 등을 지나는 ‘경의선 숲길’ 공원이 거론됐지만 구내 유휴부지 등을 포함해 재검토할 방침이다. 마포구에는 최규하 대통령 가옥과 박정희 대통령 기념관, 김대중 대통령 도서관 등 전직 대통령과 연관된 다양한 시설들이 자리 잡고 있다. 2009년 서거한 김대중 전 대통령과 2021년 사망한 전두환 전 대통령은 생애 대부분을 각각 관내 동교동과 연희동 자택에서 머물렀을 만큼 전직 대통령들과 인연이 깊다. 이에 ‘마포구
[오마이뉴스] 명성황후 유체 소각에 관여한 조선인이 이후 벌인 일
[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구연수 일본 니가타현 사도광산에서 강제징용 피해자들만 배출된 것은 아니다. 적은 숫자이기는 하지만, 일제의 한국 침략에 협조한 인물들도 배출됐다. 행정안전부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보고서인 <일본 지역 탄광·광산 조선인 강제동원 실태>는 일본 궁내성이 1889년 1월에 설립한 사도광산 학교와 관련해 “1892년 4월 제1회 졸업생을 배출했는데, 졸업생 가운데에는 조선인 박창규·구연수·박치운이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 뒤 이렇게 기술한다. “이들 3인은 이후에 일본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박창규는 1905년 3월 러일전쟁 일본전승축하특파대사의 수행원으로 일본을 방문했고, 박치운은 1894년 일본군이 동학군 토벌할 당시 통역으로 일했다. 3인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인물은 구연수이다. 구연수는 1894년 9월 광무국 주사를 거쳐 1895년 10월 명성황후 시해사건 당시 유체 소각에 관여해 일본으로 망명한 인물이다.” 명성황후 유체소각에 관여한 사도광산 졸업생 이종각 주오대학 강사가 2009년 9월호 <신동아>에 기고한 ‘자객 고영근의 명성황후 복수기’에 따르면, 일본 사노시향토박물관에 소장된 <스기무라 군일기>는 구연수가 조선 훈련군 제2대대장 우범선의 지휘하에 이런 일을 했다고 알려준다. “우범선은 구연수와 하사관에게 명해 왕비의 시체를 이불 위에 얹고 그 위에 다시 이불을 덮어 새끼줄로 묶어 옆 창고에 넣었다. 곧 시체를 동산 기슭으로 옮겨 석유를 끼얹어 태웠다. 타다 남은 뼈는 하사관이 못에 갖다 버렸다.” 우범선은 ‘씨 없는 수박’ 우장춘 박사의 아버지다. 구연수의 역할은 우범선의 지시하에 위와 같은 시신 소각에 관여하는 정도로 끝나지 않았다. 그는 실직 무사인
[뉴스타파] 고단한 시대에 희망을 말했던 대기자, 송건호
10·24 자유언론실천선언이 올해로 50주년을 맞습니다. 이 선언으로 당시 동아일보에서 130여 명, 조선일보에서 33명의 언론인이 강제 해직당했습니다. 일터를 잃은 언론인들은 출판, 문화, 정치 등 여러 분야로 흩어져야 했습니다. 각자의 영역에서 성과를 내기도 했지만, 언론 현장을 떠난 그들 개개인의 삶은 남모를 설움과 고달픔에 시달렸습니다. 뉴스타파는 자유언론실천선언 50주년을 맞아 이들 해직 언론인들의 글을 연재합니다. 지난 50년에 대한 소회와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 해직 이후의 생활 등을 담습니다. 이 릴레이 회고록은 기자협회보와 동시에 게재됩니다. 열여덜 번째 글은 김언호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위원(한길사 대표)이 썼습니다. – 편집자 주 ※ 자유언론실천선언 50년 연재 1~17 바로가기 * * * 송건호 선생 댁은 서울 은평구 역촌동이었고 우리 집은 불광동의 산동네 독바위골이었다. 나는 시내에 나갔다가 집으로 가는 길이면 으레 댁으로 가서 선생을 뵙곤 했다. 1978년 추석 전날이었다. 선생은 그날 대문을 나서는 나의 손에 5만 원을 쥐여 주셨다. 그땐 한길사가 펴낸 리영희 선생의 『 우상과 이성』, 박현채 선생의 『민족경제론』 등이 잇따라 판금 되면서 신간을 내는 것은 물론이고 생활을 꾸려나가는 것도 힘든 시절이었다. 시내에 조그만 사무실을 운영하기가 힘들어서 그걸 철수하고 우리 집 작은 거실을 편집실로 쓰던 때였다. 그날 선생은 아이들에게 과자라도 사주라는 말씀으로 나의 등을 밀었다. 그땐 선생의 생활도 퍽 어려운 시절이었다. 선생은 나를 늘 ‘김형’이라고 불렀다. 다른 그 무엇보다도 책 만드는 일이 중요하다는
[뉴스1] 일제강제동원 피해자 나이 100세…”대법관 퇴임 전 선고해야”
2018년 대법원 원고 승소 확정…미쓰비시 등 배상 불이행 특별현금화명령 등 계류…”대일 저자세 기조 무관치 않아” (광주=뉴스1) 최성국 기자 = 시민사회단체들이 이동원·노정희 대법관의 8월 1일자 퇴임으로 인한 재판 지연을 우려하며 대법원에 계류 중인 일제강제동원 사건에 대한 조속한 판결을 촉구했다. 한일역사정의평화행동,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 민족문제연구소, 일본군성노예문제해결을위한 정의기억연대는 18일 “일제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수십년째 법원만 바라보고 있다”며 이같이 밝혔다. 이동원 대법관은 대법원의 계류 중인 미쓰비시중공업 상표권 2건에 대한 특별현금화명령 상고심 사건의 주심을 맡고 있다. 노정희 대법관은 일본제철 피엔알 주식 특별현금화명령 상고심 사건을 맡은 민사 3부의 대법관이다. 두 대법관은 8월 1일 퇴임 예정이다. 이 사건들은 2018년 대법원에서 최종 원고 승소 판결을 받았으나 피고 기업이 법원의 배상 명령을 거부, 강제집행을 통한 피해자 채권 확보를 주장하는 재판들이다. 미쓰비시중공업 상표권 현금화 소송의 당사자인 양금덕 할머니는 올해 94세로 12년째, 일본제철 관련 사건의 원고인 이춘식 할아버지는 올해 100세로 19년째 법원 판결을 기다리고 있다. 시민단체들은 “채무자들은 피해자들의 처지는 아랑곳 않고 고의로 채무를 불이행하고 있다”며 “이런 피해를 방지하기 위한 것이 강제집행 제도인데 대법원에 계류된 지 2년 넘도록 판결이 나오지 않고 있다”고 호소했다. 그러면서 “대법원의 이례적 행보는 외교부가 ‘일본과의 외교적 시간을 달라’는 취지의 의견서를 대법원에 제출하는 등 정부의 대일 저자세 기조와 무관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시민단체들은 “퇴임을 앞둔 대법관들은 이제 답을 해야 한다. 병마와 힘겨운 사투를 벌이는
민족사랑 2024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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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요청] 대법관 퇴임, 강제동원 일본전범기업 배상촉구 기자회견
[기자회견] [다운로드] 8월 1일, 강제동원 배상 관련 일본기업 자산매각(현금화) 판결 맡은 이동원·노정희 대법관 퇴임 강제동원 피해자 호소에도 대법관들 이유없이 판결 지체시켜, 일본 눈치보나 퇴임 전 신속하게 판결하고 일본기업이 배상하도록 해야 다가오는 8월 1일, 대법관 세 명(김선수·이동원·노정희)이 퇴임합니다. 이 중 이동원(2부) 대법관은 2018년 대법원의 강제동원 배상판결과 관련해 대법원에 계류 중인 ▲미쓰비시중공업 상표권 2건(양금덕, 2022마5815), 일본 피고 기업 국내 자산에 대한 특별현금화명령 상고심 사건 주심을 맡고 있고, 노정희(3부) 대법관은 ▲일본제철 피엔알(PNR) 주식(이춘식, 2023마5044) 특별현금화명령 상고심 사건(주심 오석준)을 맡고 있는 민사 3부 담당 재판부 대법관입니다. 대법원에 계류된 지 2년 넘는 사건 선고를 방치한 채 대법관이 퇴임하게 되면 피해자들의 권리회복은 더욱 지연됩니다. 대법관이 이렇게 맡은 사건을 매듭을 짓지 않고 무책임하게 퇴임하는 것은 직무유기와 다름 없습니다. 이에 한일역사정의평화행동은 퇴임하는 대법관들에게 매각명령 판결을 책임지고 내릴 것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아래와 같이 개최합니다. 기자회견에는 박상운 강제동원 피해자 양금덕 할머니 아드님, 이고운 이춘식 할아버지 따님이 직접 참석해 발언할 예정입니다. 기자님들의 많은 관심과 취재 바랍니다. 대법관 세 명(김선수/대법원 1부 주심·이동원/대법원 2부 주심·노정희/대법원 3부 주심)이 8월 1일 퇴임합니다. 대법관이 교체되면 강제동원 배상은 더욱 지연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대법관들에게 퇴임 전에 매각명령 판결을 책임지고 내릴 것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개최합니다. ❍ 일시: 2024년 7월 18일(목) 14:00 ❍ 장소: 대법원 후문앞(서초역 6번 출구) ※ 우천시에도
[역발상 시즌3] 동아시아 유행가 시대 1914~1945 3부 “일본과 중국 대중음악의 성장기 : 고가 마사오 그리고 런광과 네얼”
☞ (07.16) ‘역발상’ 시즌 3: 동아시아 유행가 시대 1914~1945 3부 “일본과 중국 대중음악의 성장기 : 고가 마사오 그리고 런광과 네얼” 오늘의 이야기 : 일본과 중국 대중음악의 성장기 : 고가 마사오 그리고 런광과 네얼 초대손님 : 신현준(성공회대 교수) 이준희(옛가요 전문가) 고가 마사오(古賀政男. 1904~1978)와 런광(任光. 1900~1941)/녜얼(聶耳. 1912~1935) <酒は淚か溜息か>(후지야마 이치로(藤山一郞). 1931년 음반): 앞서 발표한 <影を慕いて>와 함께 작곡가 고가 마사오의 입지를 다진 히트작. 노래를 소재로 영화까지 만들어져 같은 해 12월에 개봉됐고, 조선과 대만에서도 번안곡으로 유행. 형식적인 면에서 엔카의 전범과도 같은 작품. 후지야마 이치로는 음악학교에서 성악을 전공 <ああそれなのに>(미치 얏코(美ち奴). 1936년 음반): 조선에서 성장하고 음악학교 경력이 없다는 점에서 일본 대중음악 작곡계에 매우 예외적인 존재였던 고가 마사오. 그의 다양하면서도 독특한 스타일, 이른바 ‘고가 멜로디’의 일면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 미치 얏코는 게이샤 출신 가수. 가사 중 의미 없이 어감을 위해 사용된 ‘네’가 ‘에로’ 분위기를 연출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검열의 집중 대상이 된 에로 유행가들 중 몇몇은 금지곡이 되기도 <東京ラプソディ>(후지야마 이치로. 1936년 음반) 역시 고가 마사오의 다양한 스타일을 확인할 수 있는 예. 고가-후지야마 콤비의 인기 절정과 전전 ‘모던 도쿄’의 번영을 보여 주는 작품. 이 곡 역시 영화로 만들어져 같은 해 12월에 개봉했고, 가수 후지야마 이치로는 주연으로 출연 <新妻鏡>(기리시마 노보루(霧島昇)·후타바 아키코(二葉あき子). 1940년 음반) 조선에서 성장한 배경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3박자가
[오마이뉴스] 하와이 교민들은 왜 한국 야구대표팀 투수를 무릎 꿇렸나
[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박석윤 미국 프로야구선발팀과 대결한 친일 투수가 있었다. 조선대표팀과 미 프로선발팀의 시합이 열린 1922년 12월 8일 발행된 <조선일보>는 “북미합중국직업야구단”의 방한을 보도하는 2면 좌하단 기사에서 “작일 하오 7시 50분 남대문착(着) 열차로 입경하야 금일에 전조선군(全朝鮮軍)과 전투를 개시할 예정”이라고 한 뒤 “중앙체육단의 박석윤”을 거명했다. 조선 제일의 투수 마이너리그 트리플A 선수들이 주축인 미국 선발팀에는 메이저리그 선수도 3명 있었다. 만만치 않은 이 팀과 “전투를 개시할” 전조선군 투수는 24세의 친일파 박석윤이었다. 나중에 나이가 더 들어서 친일파가 된 게 아니라 이때 이미 친일파였던 인물이다. 근대 문헌들과 관련된 학술지인 <근대서지>의 2016년 제14호에 실린 홍윤표 OSEN 선임기자의 기고문 ‘납·월북 체육인들에 대하여’는 1922년판 한·미 올스타전의 결과를 이렇게 설명한다. “당시 조선대표팀은 미국선발팀과의 대결에서 3-23으로 완패했다. 비록 처참하게 지기는 했지만 그 경기에서 조선팀의 실책이 10개나 됐던 점을 감안한다면, 완투했던 박석윤이 나름대로 선전했다는 평가가 가능하다.” 박석윤은 조선 제일의 투수였다. 생업은 영어교사일 때도 있고 기자일 때도 있고 외교관일 때도 있었다. <친일인명사전> 제2권 박석윤 편은 “1923년 4월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취직해 영어교사 겸 야구부 코치로 근무했다”라며 “1924년 3월부터 6월까지 <시대일보> 정치부 기자를 지냈다”고 설명한다. 외교관 활동은 이 이후에 나타난다. 박석윤은 선수뿐 아니라 지도자로도 명성을 날렸다. 휘문고보 코치가 된 1923년에 그의 팀은 고시엔(갑자원)대회 조선 예선전에서 전원 일본인들로 구성된 팀들을 제치고 우승했다. 그런 뒤 일본에서
[시민언론 민들레] 심원정에는 심원정이 없었다
[기사원문] <2024-07-10> 시민언론 민들레☞ 심원정에는 심원정이 없었다 강점기 소유자 이노우에 사진첩에서 확인 현재 복원된 심원정 본래 이름은 망악정 1919년 이웃한 매국노 이지용 별장도 구입 용산문화원 자리에 있었던 심원정의 전모를 알 수 있는 사진첩이 공개됐다. 시민언론 민들레가 서울역사박물관에 요청해 입수한 ‘宜文前期事業紀念寫眞 附 人事紀念寫眞’에 실린 사진을 꼼꼼히 들여다 본 결과 심원정은 단순한 정자가 아니라 본채와 부속건물로 구성된 대저택을 지칭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와 함께 ‘심원정’으로 복원된 육각정의 실제 명칭은 ‘망악정’인 것으로 드러나 수정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宜文前期事業紀念寫眞 附 人事紀念寫眞’은 강점기 한국에서 활동한 일본인 기업가 이노우에 요시후미(井上宜文, 1868~?)가 자신의 업적을 사진과 캡션으로 구성한 사진첩으로 이 가운데 ‘심원정 시대’로 분류된 22개 쪽에 심원정 관련 81장의 사진이 실려있다. 이노우에는 1902년 심원정을 구입하여 1945년 일본으로 철수하기까지 별장 또는 거주지로 삼아 애용하였다. 사진첩 속 사진은 1902~1932년에 걸쳐 촬영한 흑백사진들로, 심원정의 전모와 인테리어는 물론, 이웃 이지용의 양관별장과 함께 한강 홍수실태를 엿볼 수 있다. ·········<중략>········· ·········<중략>········· 이노우에는 육각정과 가까운 곳의 양관건물 전경과 그 앞에서 찍은 기념사진에 1919년 이왕가 별저를 구입하고 양관 뒤편에 있던 신사를 느티나무 아래로 옮겨왔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 128번지에 소재한 왕족 이지용의 땅과 건물 일체를 구입한 것이 틀림없다. 민족문제연구소 이순우 책임연구원 조사에 따르면 경성부관내지적목록(1917)에 이지용 소유로 표기돼 있던 원정 4정목 128번지, 86번지, 산수정 77번지가 1927년 지적목록에 모두
[박물관은 뭐하니] 한림대 학생들의 방문에 펭PD가 감동했어요ㅠㅠ
안녕하세요 펭PD입니다. 지난 6월 27일,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학생들이 축제 때 크로플과 에이드를 판매한 수익금을 식민지역사박물관에 후원해주었습니다.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는 후원금 전달식과 함께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이희자 대표님의 강의를 진행하였는데요. 역사정의실천을 위해 행동하는 한림대 학생들 너무 멋있지 않나요? 펭PD는 행동하는 여러분을 앞으로도 응원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