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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기사

민족사랑 2020년 03월호

2020년 3월 25일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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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화 선생님의 역사 정신, 우리 가슴에 살아 있습니다

2020년 3월 21일 1873

선생님을 보내며 역사학자 이이화 선생님! 지난 40년 동안 선생님과 함께 우리 민족사의 현장을 탐험하면서, 빛나는 우리 민족사를 책으로 펴낼 수 있어서 저는 행복했습니다. 저 고단한 1980년대에, 선생님은 우리들에게 역사란 어떻게 전개되는가를 가르쳐주셨습니다. 역사 정신이란 무엇인가를 우리들 가슴에 심어주셨습니다. 선생님의 역사 이야기는 오늘의 현실을 어떻게 살 것인가를 성찰하는 지혜였습니다. 1980년대에 진행된 선생님의 ‘역사강좌’를 통해 이 땅의 젊은이들은 힘찬 우리 민족사를 만났습니다. ‘한국근대민중운동사’를 통해 역사의 동력이 되는 민중과 민중 운동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들의 역사 보는 눈을 활짝 뜨게 만들었습니다. 우리 국토와 산하에서 펼쳐진 ‘역사기행’의 현장 강의를 통해 선생님은 온몸으로 온정신으로 민족사를 체험하게 했습니다. 역사의 진실은 역사의 현장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역사 정신은 삶의 현장에서 체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했습니다. 선생님과 함께 우리는 동학농민혁명의 현장에서, 그 민중의 함성을 들었습니다. 전봉준 장군과 김개남 장군을 만났습니다. 김개남 장군의 집터에 ‘김개남 장군 생가터’라는 푯말을 선생님의 글씨로 세우기도 했지요. 지리산을 오르고, 지리산 깊은 계곡에서 밤을 지새우면서 ‘지리산의 정신사와 저항사’를 들었습니다. 의병장 신돌석 장군과 의병들을 찾아 나서 ‘이 시대의 의병은 누구인가’라는 주제로 영덕의 농가에서 토론했지요. 아름다운 국토의 산하에서 펼친 우리들의 역사기행은 한판의 역사축제였습니다. 선생님은 당대의 사관이었습니다. 1994년부터 2004년 10년에 걸쳐 완성되는 <이이화·한국사 이야기>는 그 누구도 엄두도 내지 못할 경이로운 작업이었습니다. 저는 선생님의 이 책을 펴내게 된 것을 한

[보도자료] 이이화 선생 조문 마지막 날…각계 애도 잇따라

2020년 3월 20일 3590

【다운로드】【보도자료】 이이화 선생 조문 마지막 날…각계 애도 잇따라 지난 18일(수) 별세한 역사학자 이이화 선생의 빈소에 각계 인사들과 시민들의 애도 행렬이 잇따르고 있다. 장례는 민족사 정립과 역사 대중화에 헌신해온 선생의 의지를 기려 시민사회장으로 치러지고 있으며 빈소는 서울대 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다. 조문 첫날에는 문재인 대통령, 정세균 국무총리, 문희상 국회의장 등 정계 인사들의 조화와 박원순 서울시장, 조희연 서울시 교육감, 이재명 경기도 지사 등의 근조기가 빈소에 도착해 유족을 위로했다. 고인을 기리기 위한 본격적인 조문행렬이 이어진 것은 이튿날(19일)부터였다. 이날 오후 1시경, 김거성 청와대 시민사회수석비서관이 빈소를 찾아 유족을 위로한 데 이어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 이준식 독립기념관장 등의 정·관계 인사들이 조문했다. 오후 7시경에는 이낙연 전 국무총리가 빈소를 찾아 유족 및 조문객들을 인사를 나누며 고인을 애도했다. 무엇보다 학계와 시민사회의 애도가 끊이지 않았다. 빈소를 가장 먼저 찾은 이들은 고인이 생전에 헌신하며 몸담아 오신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역사문제연구소와 민족문제연구소의 동료와 후학들이었다.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과 윤경로 전 한성대총장, 정남기 동학농민혁명유족회장은 일찍부터 빈소를 찾아 유족들을 돕고 조문객을 맞았다. 이어 함세웅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과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 이용기 역사문제연구소장 등도 조문했다. 그 밖에 선생이 관여한 단체와 기관의 동료들과 지인, 전국 각지의 한국전쟁민간인학살 유족들과 동학농민군의 후손, 일반 시민들의 조문 행렬이 이어졌다. 조문 마지막 날인 20일 오전 11시 30분경에는 박양우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정부로부터 추서된 ‘국민훈장 무궁화장(1등급)’을 고인 영전에

[보도자료] 역사학계의 ‘녹두장군’ 이이화 선생 별세

2020년 3월 19일 3608

[다운로드] [보도자료] [연보] 역사학계의 ‘녹두장군’ 이이화 선생 별세 민족사 정립과 우리 역사의 대중화에 헌신해온 역사학자 이이화 선생이 3월 18일 오전 11시경 향년 84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이이화 선생은 최근까지도 전봉준장군동상건립위원회 이사장, 식민지역사박물관건립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목표를 달성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벌여왔으나, 담낭암 진단에 따른 두 차례의 수술 후유증을 이기지 못하고 영면에 들었다. 이이화 선생은 1970년대부터 민족문화추진회, 서울대 규장각, 역사문제연구소, 민족문제연구소 등 학술단체와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한국전쟁전후민간인학살진상규명과명예회복을위한범국민위원회 등 역사관련 시민단체에서 학술연구와 실천운동에 매진해 100여권의 역저를 출간하는 등 수많은 연구 성과를 내놓는 한편으로 역사정의의 실현에도 크게 기여해왔다. 선생은 1973년 유신정권에 대한 저항의식을 표출한 「허균과 개혁사상」을 발표하며 역사학자로서의 의미 있는 첫걸음을 내디뎠다. 이후 1980년대 초반까지 《뿌리깊은나무》 《월간중앙》등에 한국사 관련 글을 연재하고 꾸준히 논문과 저서를 집필하며 연구의 지평을 넓혀 나갔다. ‘이이화’ 특유의 역동성과 활달함이 돋보이는 대외 학술 활동이 전개된 것은 1980년대부터라고 할 수 있다. 선생은 1986년 설립된 역사문제연구소의 운영위원 소장을 역임하였으며, 1988년에는 발기인으로 〈한겨레신문〉 창간에도 참여했다. 나아가 1993년부터는 우리 역사에서 주목받지 못했던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연구와 관련 사업을 주도적으로 추진했는데 이는 동학농민혁명백주년기념사업단체협의회(1993), 동학농민혁명유족회(1994),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2004) 설립 등의 성과로 이어졌다. 당시 선생이 이끌어낸 연구업적으로 1996년 발간된 『동학농민전쟁사료총서』 30권은 동학농민혁명 연구에 관한 굴지의 바이블로서 자리 매김, 현재도 중요한 연구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2000년대는 오랜 연찬이 활짝 꽃피운 시기로, 평생의 역작으로 손꼽히는 『한국사 이야기』(총 22권)가

‘친근한 역사학’ 기틀 마련한 ‘재야 사학계의 별’…역사학자 이이화 별세

2020년 3월 18일 1999

한국의 ‘역사 대중화’를 이끈 원로 역사학자 이이화(李離和) 선생이 18일 오전 별세했다. 향년 84세. 고인은 대학에서 사학을 공부하지 않았지만, 철저한 고증 작업을 바탕으로 일반인 눈높이에 맞춰 쉽고 재미있는 이야기 형식으로 역사를 서술했다. 이를 통해 역사학의 높은 장벽을 허물어 ‘재야 사학계의 별’로 불렸다. 대학 중심의 ‘강단 사학’에 대비해 부른 말이지만, 그가 일군 학문적 업적은 역사학계를 비롯해 사회문화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1936년 대구에서 주역 대가인 야산 이달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부친은 주역 팔괘에 따라 고른 ‘떠날 리(離)’에 돌림자 화(和)를 붙여 아들의 이름을 지었다. 주역에서 ‘리’는 무언가를 녹여 새롭게 만드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다른 사람에게선 찾아보기 어려운 이름자를 갖게된 그는 이름처럼 남다른 삶을 살았다. 대학을 나오지 않고도 유명 역사학자가 된 것이다. 그는 어린 시절 부친을 따라 전북 익산으로 이주했고, 부친이 학교를 보내지 않아 대둔산에서 한문 공부를 하며 사서(四書)를 배웠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 가출해 각지를 돌며 고학을 하다 광주고를 졸업하고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중앙대 문예창작과의 전신)를 다녔다. 어려운 형편 탓에 대학을 중퇴한 그는 아이스케키·빈대약 장수, 술집 웨이터, 가정교사, 불교시보 기자 등 20여가지 직업을 거쳤다. 1967년 동아일보 출판부에 임시직으로 입사해 원고를 다듬고 수정하거나, 기사 색인 작업을 맡아보며 근현대사에 눈을 떴다. 그는 이 시절을 두고 ‘학사과정을 마쳤다’고 말했다. 그는 ‘허균과 개혁사상’, ‘척사위정론의 비판적 검토’ 같은 한국사 관련

[오마이뉴스] ‘기생충’ 같은 소설, 왜 없을까? 평론가의 답은

2020년 3월 12일 1182

한국정치 신랄하게 꾸짖은 근현대 소설 평론집 ‘한국소설, 정치를 통매하다’ 정치를 ‘크게 꾸짖는(통매· 痛罵)’ 문학을 평론하는 책이 나왔다. 원로 문학평론가인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 소장(79)의 평론집 <한국소설, 정치를 통매하다>다. 임 소장은 <친일인명사전>을 세상에 내놓는 데 기여한 주역 중 한 사람이자 54년 간 비평 활동을 해 온 평론가다. 그가 정치를 꾸짖는 근현대 소설을 한 데 모은 이유는 무엇일까. “오늘날 문학이 거대담론이 사라지고 미세담론에 안주하는 상황에서 전후 문학부터 오늘날까지 가장 정치적이고 역사의식을 가진 작가들을 독자들에게 소개했다. 문학에서 역사와 정치, 사회를 다룬 거대담론이 사라지는 게 아쉬워 평론집을 냈다.” (2월 24일 기자간담회 중) 책은 최인훈, 박완서, 이병주, 남정현, 조정래, 장용학 등 정치를 통렬하게 꼬집는 문학을 쓴 11명의 작가와 그들의 작품을 다뤘다. 책은 총 4부로 이뤄졌다. 최인훈 작가의 <광장>, <화두>에 이어 이병주 작가의 <‘그’를 버린 여인>, <그해 5월>, 남정현 작가의 <엄마, 아 우리 엄마>, 황석영 작가의 <손님>, 손석춘 작가의 <아름다운 집>, <유령의 사랑>, 조정래 작가의 <아리랑>, 박화성 작가의 <북국의 여명> 등이 실려 있다. 1부에 등장하는 최인훈 작가의 <광장>은 올해로 발표된 지 60주년을 맞았다. 최 작가의 작품은 우리나라의 분단 현실에 초점을 맞춰왔다. 임 소장은 “1부는 민족사에 대해 지식인으로서의 부채가 느껴지는 작가들을 다뤘다”라고 밝혔다. 2부는 이병주 작가의 작품만을 다뤘다. 임 소장은 “박정희에 관한 한 어떤 역사학자나 정치평론가도 이룩하지 못했던 실체를

[뉴스타파] [조동(朝東)100년] ③ 조선일보 1면엔 일왕과 일장기가 얼마나 등장했나

2020년 3월 9일 2400

조선일보 사시(社是) 가운데 첫째가 ‘정의옹호(正義擁護)’다. 조선일보는 정의옹호를 사시로 삼은 이유에 대해 “민족지로서 민족의 정의를 으뜸가는 가치로서 정치적 정의, 경제적 정의, 사회적 정의를 옹호하겠다는 신념의 피력”이라고 설명한다. 민족지로서 민족의 정의를 으뜸가는 가치로 내세우는 조선일보가 과연 그 ‘사시’를 어떻게 구현해 왔는지 살펴보자. 1937년 1월 1일, 조선일보 1면 한가운데에 당시 일본왕 히로히토 부부의 사진이 대문짝만하게 실렸다. 일제강점기였지만 그래도 ‘민족지’를 내세우며 한글 발행을 하는 신문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나 시도할만한 지면 배치였다. 자칭 ‘민족지’ 조선일보, 1937년 1월 1일 1면에 일왕부부 대형 사진 올려 이날 자칭 ‘민족지’ 조선일보는 1면 제호 옆에 눈 쌓인 소나무 그림을 배치하고, 중앙에 일왕 부부 사진을 올렸다. 사진은 봉황 이미지와 일본 왕실을 상징하는 국화 문양으로 장식됐다. ‘원단(元旦)‧궁중(宮中)의 어의(御儀)’, 즉 ‘설날 아침 궁중의 의례’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일왕을 ‘천황폐하’로 칭했고, 임금의 손을 높여 부르는 ‘어수(御手)’, 임금의 옷을 높여 부르는 ‘어포(御袍)’ 같은 극존칭 단어를 동원해 일왕을 찬양했다. 일왕 부부 사진 왼쪽에는 당시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의 사진과 함께 그의 신년사를 빼놓지 않고 실었다. 동아일보는 이듬해인 1938년 1월 1일부터 일왕 부부 사진 1면 게재를 시작했다. 1면 제호 옆부터 일왕 부부의 사진을 대문짝만하게 배치했다. 조선일보와 마찬가지로 봉황과 국화 문양으로 일왕 부부를 돋보이게 만들었다. 동아일보 1938년 1월 1일부터 1면에 일왕부부 사진 등장 동아일보는 이날 1면 ‘대본영하(大本營下)에

[경향신문] [기억전쟁, 미래가 된 과거](5)겨레·헌신·일꾼…교가 속에 쟁쟁한 식민주의·국가주의 유산

2020년 3월 9일 1077

교가 – 식민주의 전승과 소리의 기억 긴 겨울을 뚫고 만물이 생동하는 3월이다. 매년 이맘때면 계절의 변화와 함께 새롭게 기지개를 켜는 곳이 있다. ‘학교’가 바로 그곳이다. 예상치 못한 사태로 인해 일선 학교에서는 학사일정의 혼선이 빚어진 상황이지만, 신입생들을 맞을 채비로 학교는 그 어느 곳보다 분주하다. 신입생의 신분으로 맞이하는 3월은 낯선 환경에 적응하는 시기이면서도, 무엇보다 새로운 학교의 역사와 학풍에 대해 익히는 시기이다. 학교의 전통을 상징하는 ‘교가’(校歌)를 처음 접하는 것도 바로 이 시점이다. 그런데 이 영구불변의 상징물인 교가를 둘러싸고 기억전쟁이 시작되고 있다면 어떻겠는가? 일본 식민지배 이후 만들어진 교가 제국주의 위한 획일적 인간상 담아 조국·민족 위해 충성·헌신 요구 해방 후 대부분 교가에 그대로 전승 군사정권·독재시대 거치며 심화 ‘교가’는 입학식이나 졸업식 등 각종 행사를 비롯해 매주 조회시간에 제창 형식으로 부르게 되는 교육용의 노래이다. 학창 시절의 일과와 그 시절에 대한 추억의 한구석을 차지하는 교가는 그만큼 우리의 일상 속에 알게 모르게 들어와 있다. 그러나 일상의 불가피한 속성인 ‘하찮음’은 교가가 담고 있는 한국 근현대사의 문제적인 지점들을 간단히 덮어버린다. 그 별것 아닌 노래 속에 제국주의와 개발독재라는 질곡의 시대가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이 생소하다면 그 이유는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근대적인 의미의 교가가 본격적으로 만들어지게 된 것은 일본의 식민지배 이후이다. 메이지 정부의 국시인 근대화 또는 국민화 작업은 공교육 기관을 중요한 거점으로 하여

[뉴스톱] ‘위안부 최초 보도’ 우에무라 다카시 기자, 패소했지만 지지 않았다

2020년 3월 4일 1374

[김언경 칼럼] 우에무라 다카시 기자의 명예훼손 소송 도쿄 2심 재판 결과에 부쳐 * 이 글은 위안부 존재를 처음으로 세상에 알린 우에무라 다카시 기자의 명예훼손 소송을 지지하는 활동을 해 온 김언경 민주언론시민연합 사무처장의 칼럼입니다. 지난해 10월, 저는 한겨레 전 부사장이신 원로 언론인 임재경 선생께 우에무라 다카시 기자에 대해 처음 들었습니다. 임 선생은 그가 일본에서 재판을 하고 있으며, 한국에서 그를 지지하기 위해 ‘우에무라 다카시를 생각하는 모임’(우생모)을 만들었는데 그들이 일본에 가니 “한국의 대표적 언론단체인 민언련 사무처장이 함께 가면 좋겠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일본의 무역보복으로 불매운동이 전개되는 와중에 3박4일이나 일본을 다녀온다는 것이 부담이었습니다. 하지만 선생님의 권유로 저는 우에무라 기자의 자서전 『나는 날조기자가 아니다』(푸른역사)를 읽었고, 결국 함께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올해 2월, 삿포로 재판소 판결을 지켜보기 위해서 저는 또 다시 우생모와 함께 일본에 다녀왔습니다. 오늘은 그의 도쿄 재판소의 2심에서 또 다시 패소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아직 판결문에 대한 상세한 분석은 전해 받지 못했지만, 아쉬운 마음이 매우 큽니다. 앞으로 이 문제를 더욱 공론화해야겠다는 생각에 제가 느낀 우에무라 기자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우에무라 다카시 기자는 누구이며, 어떤 재판인가? 우에무라 다카시 기자(62)는 <아사히신문> 기자로 재직 중이던 1991년 8월 11일 고 김학순 할머니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 사실을 보도했습니다(우에무라 다카시 “27년 전으로 돌아가도 다시 위안부 문제 보도하겠다” 뉴스톱 인터뷰 기사 참고). 그의 보도 사흘

[미디어오늘] 친일인명사전, 조선일보 방응모를 뭐라고 기록했을까?

2020년 3월 3일 2058

편집회의서 일제 입장 용어 강요, 조선일보 폐간되자 조광에 일제전쟁 미화…수차례 침략전쟁 옹호 강연도 2009년 11월 친일인명사전이 나왔다. 윤경로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장은 발간사에서 이를 “고백과 성찰을 위한 기록”이라 했고,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은 서문에서 “참회와 화해의 첫걸음이 되길” 바랐다. 이는 희망사항으로 끝났다. 조선일보 9대 사장 방응모(조광 발행인)가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이 오르고, 대통령 직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반민규명위)에서도 방응모를 친일파로 규정하자 조선일보 측은 반발했다. 2010년 1월 방응모의 양손자 방우영 전 조선일보 명예회장은 “방응모 전 사장이 친일행위를 한 적 없다”며 정부에 친일반민족행위결정처분 취소소송을 제기했다. 방우영 전 회장이 2016년 세상을 떠나자 방상훈 조선일보 사장 등이 다툼을 이어갔다. 법원에선 방응모를 끝내 친일파로 봤다. 다만 8년에 걸친 소송에서 친일행위의 범위가 줄었다. 원래 반민규명위에선 잡지 조광에 일제 동조 논설을 쓰고 일제 징병을 권유한 행위, 일제에 군사물품을 납품한 조선항공공업에서 발기인·감사를 지낸 행위, 조선총독부 관변단체인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활동 등 세 가지를 친일행위로 봤다. 대법원은 이 중 조광에 일제 동조 논설을 쓰고 일제 징병을 권유한 행위만을 인정했다. 여전히 조선일보가 ‘친일신문’이라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는 조선일보와 방 사장 일가가 방응모의 친일행적을 제대로 반성하지 않아서다. 방응모는 자신의 친형 방응곤의 둘째 아들 방재윤을 자신의 양자로 삼고, 방재윤의 아들은 조선일보 사주를 지낸 방일영과 방우영이다. 방상훈 현 조선일보 사장은 방일영의 첫째 아들이다. 이에 미디어오늘은 법원 판결취지와 방응모가 언론사 사주라는 점을 고려해 친일인명사전 내용 중 언론활동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