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기사
[오마이뉴스] 동상은 철거됐지만 그의 흔적은 철거되지 않았다
[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정춘수 대북전단이 아닌 대일전단이 1919년 3월 1일 새벽부터 살포됐다. 3·1운동은 기습적인 시위가 아니라 예고된 시위의 형태로 시작됐다. 원호처(국가보훈부) 소속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가 펴낸 <삼일운동사>는 “이날 새벽 이미 독립선언식을 예고하는 비라가 집집마다 뿌려졌고, 시내 주요한 곳에는 벽보가 나붙었으며 국민을 격려하는 조선독립신문 창간호가 독립선언서와 함께 배달되었다”고 기술한다. 이날 오후 2시 무렵, 서울 파고다공원에서는 학생들 중심으로 독립선언식이 거행됐다. 2시 정각에는 서울 인사동 태화관(명월관 지점)에서 민족대표들이 독립선언식을 거행했다. “불교 측 민족대표의 한 분인 한용운이 일어나 한국 및 한국인이 독립국임과 자주민임을 선언하고 그의 선창으로 일동이 대한독립만세를 일제히 불렀다”고 위 책은 묘사한다. 선언식을 마친 민족대표들은 태화관 사장 안순환을 통해 조선총독부 경무총감부에 자수했다. 전화를 받고 일본 헌병과 경찰 80여 명이 출동했고, 민족대표들은 오후 4시경 자동차에 실려 남산으로 끌려갔다. 남산 중턱 왜성대(서울애니메이션센터 일대)의 경무총감부가 이들을 맞이했다. 이날 일제 헌병과 경찰은 민족대표 33인 전원을 다 체포하지 못했다. 거리가 멀어 참석하지 못한 4명이 있었다. 기독교 측 민족대표인 길선주·김병조·유여대와 더불어 훗날 국회 반민특위에 끌려갈 정춘수가 그 넷이다. 강원도 원산에서 감리교 목사로 활동하던 46세의 정춘수는 독립선언식에 지각한 데 이어 자수도 지각으로 했다. <친일인명사전> 제3권 정춘수 편의 설명이다. “그날 열차편으로 서울에 올라왔으나 이미 선언식은 끝나고 시위가 시작된 후였다. 선언서 서명자들이 모두 체포되자 서울에 머물면서 상황을 살피다가 3월 7일 종로경찰서에 자수해
[오마이뉴스] 최연장자 친일파의 수상한 행각… 이순신 있었다면 어땠을까
[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정낙용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4389명 중의 최연장자는 1827년 생으로 알려진 정낙용(鄭洛鎔)이다. 정조의 아들인 순조 때 한성부에서 출생하고, 무과시험 장원급제를 거쳐 전라도좌수사와 삼도수군통제사를 역임한 인물이다. 충무공 이순신을 연상시키는 이런 관직을 거친 뒤에는 형조판서와 공조판서를 거쳐 고종황제를 보좌하는 궁내부 특진관과 시종원경 등을 지냈다. <친일인명사전>에 실린 친일파 중에서 최연장자라는 점을 빼면, 정낙용은 외형상 특이점이 별로 없어 보인다. 구체적으로 어떤 친일행위를 했는지가 이 사전에 나타나지 않는다. 국권침탈 2개월 뒤인 1910년 10월에 남작 작위를 받고, 1911년에 한국 멸망 포상금으로 은사공채 2만 5천 원을 받고, 1912년에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은 사실 정도만 언급돼 있다.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제4-16권 정낙용 편도 마찬가지다. 그가 무엇 때문에 일본 작위를 받았는지가 설명돼 있지 않다. 남작 작위와 은사공채와 병합기념장을 받은 사실을 근거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결정한다는 내용만 적혀 있다. 정낙용이 조선 백성들에게 한 짓 한국 병합 3년 전에 발행된 1907년 3월 15일 자 <황성신문> 기사 ‘국채보상금 모집 취지서’는 대일 차관을 갚고 주권을 회복하기 위한 이 캠페인에 참여한 인물 중 하나로 정낙용을 거명한다. <친일인명사전> 제3권 정낙용 편은 이 기사에 나온 정낙용이 친일파 정낙용임을 확인한다. 정낙용의 구체적인 친일행위는 드러나지 않은 반면, 그의 구체적인 애국행위는 이처럼 명확히 드러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 일제는 남작 작위를 주고 거액의 친일재산을 안겼다. 국권침탈 직후에 귀족
[연합뉴스] 24개 시민단체 임진각 모여 ‘대북전단 살포 즉각 중단하라’
(파주=연합뉴스) 임병식 기자 = 민족문제연구소와 민주노총 등 24개 시민단체와 접경지역 주민들이 26일 경기 파주시 임진각에서 대북전단 살포 중단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시민단체 등 대표 25명은 이날 오전 11시 임진각 망배단 앞에서 ‘한반도 평화를 염원하는 범시민’이라는 이름 아래 기자회견을 열고 “풍선을 이용한 대북전단 살포는 남북 간 불필요한 긴장을 조장하고 전쟁 위기를 가속화하는 일에 다름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이어 “특히 경기도 접경지역 주민들은 새벽마다 대형 풍선으로 수면 장애를 겪고 불안감에 시달리며 일상생활에서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경기도는 대북전단 살포 행위를 철저히 단속하고 수사당국은 항공안전법 위반 행위를 신속히 수사해 국민 안전에 만전을 기해 달라”고 당부했다. 이들은 대북전단 살포를 규탄하고 중단을 촉구하는 구호를 외친 뒤 기자회견을 마쳤다. 북한은 탈북민단체의 대북전단 살포에 반발해 지난달 28일부터 여섯 차례 오물 풍선을 남쪽으로 살포했다. 이에 우리 군은 판문점 선언에 따라 철거했던 대북 방송 확성기를 지난 9일 비무장지대(DMZ)와 접경지 일대에 다시 설치하고 맞대응에 나서면서 한반도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임병식 기자 andphotodo@yna.co.kr <2024-06-26> 연합뉴스 ☞기사원문: 24개 시민단체 임진각 모여 ‘대북전단 살포 즉각 중단하라’
[역발상 시즌3] 청일전쟁 130년,러일전쟁 120년 특별 시리즈 4부 “조선은 어떤 과정으로 식민지가 되었나?”
☞ (06.25) ‘역발상’ 시즌 3: 청일전쟁 130년,러일전쟁 120년 특별 시리즈 4부 “조선은 어떤 과정으로 식민지가 되었나?” 오늘의 이야기 : 청일전쟁 후 10년 동안 무슨 일들이 있었나? 초대손님 : 서민교 교수 Q.러일 전쟁 이후 대한제국은 사실상 강점되었는데요?. 일본의 침략은 어떻게 되나요? -1900년 이후 일본은 한국 보호국화를 국제법상 합법으로 만들기 위해 한국을 둘러싼 열강과 한반도 문제를 치밀하게 조율했다. 대표적인 협정으로는 1902년 영국과 일본 사이의 제1차 영일동맹(英日同盟), 1905년 미국과 일본이 한국 문제를 협의한 가쓰라-태프트 밀약, 제2차 영일동맹, 러시아와 일본이 러일전쟁 후처리 문제를 협상했던 포츠머스 조약 Q.을사보호조약의 체결은 어떻게 이뤄졌나요?그 내용은? -외교권 박탈 -일본의 보호국화 Q.정미7조약 -행정권과 인사권 박탈 >대한제국 정부 기능을 마비 -군대 해산 Q.조선 민중은 어떤 저항을 했나요? 의병운동 등 -일본의 의병섬멸 작전_남한대토벌 등 -13도창의대진소의 결성과 서울진공작전 Q.1910년 강제병합 Q.일본 정부는 지금까지도 불법이 아닌 조약을 통한 합법을 주장하고 이젠 한국의 뉴라이트까지도 이런 주장을 펼치고 있습니다. 이 문제를 짚어주시죠? ※지난 방송 – 팟캐스트 역발상 시즌3 ☞ (06.18) ‘역발상’ 시즌 3: 청일전쟁 130년,러일전쟁 120년 특별 시리즈 3부 “러일전쟁의 결과들” ☞ (06.11) ‘역발상’ 시즌 3: 청일전쟁 130년,러일전쟁 120년 특별 시리즈 2부 “청일전쟁 후 10년 동안 무슨 일들이 있었나?” ☞ (06.04) ‘역발상’ 시즌 3: 청일전쟁 130년,러일전쟁 120년 특별 시리즈 1부 “청일전쟁은 왜 일어났을까?” ☞ (05.28) ‘역발상’ 시즌 3: 영화 주제가로 보는
[한겨레] 인하대에 ‘이승만 조형물’ 또 논란…왜 자꾸 시도?
동상 철거에 재건 시도 무산됐는데 총동창회 “대학 설립 주도 역할” 주장 교내 반대 여론에 일단 기공식 취소 이승만 전 대통령을 기리는 조형물의 교내 설치를 두고 인하대에서 논란이 일며 기공식이 취소됐다. 22일 인하대 총동창회에 따르면 동창회는 인하대 캠퍼스 내에 조성 중인 ‘하와이-인하공원’에 개교 70주년 및 총동창회 창립 65주년을 맞아 학교 설립에 기여한 이 전 대통령의 사진이 포함된 조형물 설치를 추진하고 있다. 가로 18m, 세로 3~6m 크기의 ㄴ자 형태 조형물에는 이 전 대통령이 인하대 전신인 인하공과대학의 이원철 초대 학장에게 교기를 전달하는 사진이 지름 3m 크기로 담길 예정이다. 이 전 대통령은 6.25 한국전쟁 중이던 1952년 12월 피난 중이던 부산에서 김법린 당시 문교부 장관에게 인천에 공과대학 설립을 지시했다. 이후 기부금과 정부 보조금을 지원하는 등 이 대학 건립에 주도적 역할을 했다. 총동창회는 이 전 대통령뿐 아니라 인하대에 개교 자금을 보태준 미국 하와이 교민들 사진도 각각 가로·세로 1.5m 크기 조형물에 담는다는 계획이다. 하와이 교민들은 하와이 사탕수수밭에서 노동하며 모은 돈을 학교 설립에 보탰고, 학교 측은 이에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 학교 이름을 인천과 하와이 앞 글자를 따서 지었다. 그러나 이 같은 조형물 설립 추진 계획이 알려지자 교내에서 반대 여론이 일었다. 서준석 인하대 총학생회 동문회 회장은 “특정인을 부각해 우상화하기보다는 국가와 민족을 사랑했던 하와이 이민자들의 동포애를 부각해야 한다”며 이 전
[쇼츠] 영화 ‘서울의 봄’ 현장을 가다 – 장태완 편
[영화 ‘서울의 봄’ 현장을 가다] – 장태완 편 전두환 세력들은 쿠데타를 준비하며 나름 사람을 분류하기 시작했습니다.그 과정에서 이건영, 정병주, 정승화는 사전 제거 핵심으로 분류하고, 장태완은 때에 따라 자기들이 구슬릴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그런데 쿠데타 당일 최규하 전 대통령이 사인을 바로 하지 않으면서 전두환 세력들의 계획과는 다르게 흘러가게 되었습니다. 12.12 쿠데타 이후 장태완 장군은 신군부와 타협하게 됩니다.신군부 측에서 제안한 한국 증권 전산 사장 자리를 승낙한 것입니다.그렇다면 왜 반란군 세력이 내민 손을 잡은 것일까요?그 이유는 가족이었습니다.1982년 대학생이던 아들이 한 달간 실종되었다가 할아버지의 산소 근처 낙동강 변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기 때문입니다.남은 가족의 목숨마저 위험해지지 않을까 생각한 장태완 장군은 가족회의를 통해 자리를 승낙하게 됩니다. 제안을 거절한 다른 이들과 비교되는 선택이지만, 장태완 장군은 신군부 세력을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1993년 전두환과 노태우 등 34명을 반란 및 내란죄 혐의로 고소했습니다.
민족사랑 2024년 6월호
[바로보기] * 왼쪽 바로보기로 들어가셔서 표지의 각 목차를 클릭하시면 해당페이지로 이동합니다.
[오마이뉴스] 한국사로 장난질을 한 역사학자
[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이병도 이병도와 조선사편수회로 상징되는 일제 식민사관은 한국인의 역사 인식을 좁은 반도 안에 가뒀다. 이병도가 몸담은 조선사편수회의 원래 명칭이 조선반도사편찬위원회였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국사를 반도의 틀에 가두려 했던 일제의 의도가 이 명칭에서도 드러난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전신인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의 박성수 교수는 1986년 9월 17일 자 <경향신문> 기고문에서 “일제는 조선총독부에다 소위 조선반도사편찬위원회라는 기구를 설치하여 구로이타를 고문으로 앉혔다”라며 구로이타 가쓰미(黒板勝美), 미우라 히로유키(三浦周行), 이마니시 류(今西龍) 세 학자를 거명한 뒤 이렇게 지적한다. “구로이타를 비롯한 위의 왜곡 3역은 ‘조선반도사 편찬 요지’에서 식민지 백성의 역사는 이를 근원적으로 말살하여 그들의 국민의식과 독립사상을 발본색원하는 무자비한 방법이 하나 있고, 또 하나는 그들의 역사를 볼품 없는 초라한 모습으로 왜곡·날조하여 기를 죽여버리는 차선의 방법이 있는데, 앞의 한국사 절멸책은 사실상 불가능하니 차라리 왜곡하는 방향을 택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주장하였다.” 이병도는 ‘차선의 방법’으로 한국사의 기를 꺾는 일을 조선사편수회와 함께 수행했다. <친일인명사전> 제2권 이병도 편은 “1925년 8월 조선사편수회 수사관보(修史官補)에 임명되었다”라며 “1927년 5월 수사관보를 그만두고 촉탁을 맡아 1938년 6월경까지 활동했다”고 한 뒤 이렇게 설명한다. “조선사편수회 촉탁으로 활동하면서 이마니시와 함께 <조선사> 제1편 ‘신라통일 이전’, 제2편 ‘신라통일시대’, 제3편 ‘고려시대’의 편찬을 담당했다. 수사관보로 재직하던 1926년 1월 조선사편수회 소속 학자들의 공동 연구기관인 조선사학동고회의 편찬을 맡았다.” 이마니시 류 경성대학제국 교수는 한국사를 한반도 안에 구겨 넣는 데 앞장섰다. 2022년에 <선사와
[오마이뉴스] 친일파 파묘, 이번엔 성공할까
김용만 의원의 ‘친일파 이장법’ 발의에 부쳐 국민 세금으로 친일파들의 묘지를 관리한다? 이런 현실에 동의하지 못하는 국민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정확히 2000년 6월 6일 민족문제연구소 대전지부 회원들을 중심으로 국립대전현충원에서 백범 암살 배후 김창룡 묘를 이장하라는 집회를 시작하면서부터다. 연구소 회원들은 한 해도 거르지 않고 현충일 집회를 이어오고 있다. 여론은 언제나 이장 쪽이었고 결국 공은 국회로 넘어갔다. 국립묘지에서 친일파를 이장하려면 ‘국립묘지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약칭 국립묘지법)을 개정해야 한다. 하지만 국립묘지법 개정안은 번번이 국회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임기만료 폐기’라는 꼬리표를 달고 사라졌다. 현실적으로 친일파를 이장하기 어렵다면 친일파 묘소에 친일행적을 담은 조형물이나 안내판을 세우자는 온건한 개정안도 제출되었지만 역시 허사였다. 왜 친일파 이장을 위한 국립묘지법 개정이 매번 불발되었는지 알아보기 위해 국회 의안정보시스템(https://likms.assembly.go.kr)에서 회의록을 찾아보니 그 이유를 쉽게 알 수 있었다. 법안 발의 이후 소관 상임위원회인 정무위원회에서조차 거의 논의가 안 됐던 것이다. 법안만 발의해 놓고 손을 놓아버린 것이다. 그나마 잠시 논의가 있었던 경우에도 정부 측(국방부, 국가보훈처) 논리를 의원들이 돌파하지 못했다. 친일파 이장에 반대하는 정부 측 논리는 한마디로 ‘공과론'(功過論)으로 촛불혁명으로 집권한 문재인 정부의 국가보훈처는 공과론에 더해 법률 불소급 원칙까지 들고나왔다. “친일반민족행위자이자 동시에 국가유공자인 사람에 대하여 그동안의 공과를 따지지 않고 국립묘지 안장 대상에서 배제하자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고”(전문위원 정○○, 정무위원회 회의록, 법안심사 소위원회, 2017년 2월 23일)
[오마이뉴스] “한국 알짜배기 기업 일본에 바치는 현대판 조공, 국정조사 추진”
‘윤석열 정부 대일굴욕외교 극복을 위한 과제’ 주제로 정책토론회 개최 윤석열 정부의 강제동원 굴욕해법 ‘제3자변제’, 일본의 사도광산 유네스코 문화유산 등재 추진, 극우단체의 소녀상 테러와 위안부피해자보호법 개정 필요성, ‘라인야후’ 사태와 기술 주권 문제, 재일동포 교류와 조선학교 문제, 미국의 인도태평양전략과 한-일 군사협력 문제 등 한일관계 문제가 산적해 있다. 오는 6월 22일은 1965년 굴욕적 한일협정이 체결된 지 59년되는 날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기시다 일본 총리와 2025년 한일협정 60년을 맞아 ‘새로운 한일관계 선언’을 구상하고 있다는 사실이 관계자 인터뷰 등을 통해 확인되고 있다. 이에 야권과 시민단체들은 윤석열 정부의 굴욕외교를 규탄하고 역사정의를 바로 세우는 행동들을 진행하고 있다. 제22대 국회와 시민사회단체가 함께 올해 한일협정 59년을 계기로 윤석열 정부 대일외교와 한일관계를 진단하고, 한일관계 실천적 과제를 모색해나가는 정책토론회가 열렸다. 토론회는 더불어민주당 남인순, 박홍근, 이재정, 이수진, 이재강, 김용만, 김준혁 국회의원, 조국혁신당 조국 대표, 김준형 국회의원, 진보당 윤종오 원내대표, 전종덕, 정혜경 국회의원 등이 공동주최했다. 남기정 서울대 일본연구소 교수와 김창록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가 주제발표하고, 한일관계 주요 사안에 대해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 민족문제연구소, 정의기억연대, 민주노총, 지구촌동포연대, 겨레하나, 전국민중행동 등 시민사회 단체들이 토론에 나섰다. “현재 한일관계는 총체적 난국 상태” 남기정 교수는 ‘한일관계 현황으로 본 한일 협정과 ‘신한일관계선언’의 문제’라는 주제발표를 통해 최근 한일관계 현황을 진단하면서 “윤석열 정부의 강제동원 해법은 파탄상태이며 후쿠시마 오염수 방출 계속, 우익 교과서 검정 통과, 사도광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