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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경향] 고양어울림누리 어울림 미술관에서 2월 28일 부터 3월 5일까지
역사와 사회를 기록하는 18명의 작가 전시에 관심 집중 전시 비용, 전국 투어 비용 마련을 위한 펀딩 시작 하루 만에 3,059,450원 넘겨 2025년 광복 80주년을 맞이하여 역사와 사회를 기록하는 작가 18명이 모여 전시를 기획해, 관심이 집중 되고 있다. 광복 80주년 기념 전시회 ‘3.1 운동에서 빛의 혁명으로’는 오는 2월 28일(금)부터 3월 5일(수)까지 고양어울림누리 어울림 미술관에서 개최된다. 고양시민회와 민족문제연구소 고양파주지부가 주최하고 ‘역사를 기록하는 작가모임’이 주관한 전시회로 고경일, 김사리, 김서경, 김수빈, 김영미, 김운성, 김화순, 레오다브, 민정진, 박서연, 박성완, 백영욱, 이구영, 이정헌, 이하, 임대니, 조아진, 황은관 18명의 작가가 함께하고 있다. 사회 변화를 꿈꾸며 예술로 실천하고 연구하는 작가들이다. 전시에 참가하는 작가들은 모두 ‘역사를 기록하는 작가모임’에서 활동을 해오고 있으며 2023년에는 대일항쟁기에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100주년을 맞이하여 일본작가들과 연대하는 작업을 진행한 바 있다. 현재, 철거 위기에 있는 베를린 평화의 소녀상을 지키고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알리는 작업을 꾸준히 하고 있다. 지난 2024년 8월 28일(수)에는 고양시민단체가 주관하여 ‘광복 80주년 기념 전시 기금 마련’을 위한 후원의 밤 행사를 개최하였다. 이 행사는 평화의 소녀상과 강제징용 노동자상을 제작한 김운성·김서경 조각가 부부가 이우연 낙성대경제연구소 연구위원(‘반일종족주의’ 공동저자)을 상대로 낸 명예훼손 패소 결정에 대한 대응의 의미도 담고 있었다. 지난 2023년 11월 대법원이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노동자상이 일본인을 모델로 만들어졌다’는 발언에 대해 명예훼손죄가 성립할 수 없다는 판단을 내놓은
[경향신문] 피 토한 고종, 통곡한 총리, 폭발한 민심…‘을씨년스러웠던’ 1905년 을사년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피 토한 고종, 통곡한 총리, 폭발한 민심…‘을씨년스러웠던’ 1905년 을사년 겨울 ‘을씨년스럽다’는 ‘2025년 을사년’을 맞아 더욱 인구에 회자되는 표현이다. <표준국어대사전>은 ‘날씨나 분위기 따위가 몹시 스산하고 쓸쓸한 데가 있다’고 풀이하고 있다. 이 말은 을사늑약이 체결된 ‘1905년 을사년’에서 비롯됐다는 게 정설처럼 떠돌고 있다. ———— <중략> ———— ■이토의 안하무인 …<중략>… 15일 고종을 알현한 이토는 안하무인이었다. 예컨대 “한국이 누구 덕분에 독립을 유지하며 살아갔느냐…이제 동양의 평화를 위하려면 한국의 외교를 일본이 대신 행하는 것만 유일한 방책이니 즉시 동의해주기 바란다”고 겁박했다. 이토는 이날 4시간 동안 이뤄진 대화내용을 제멋대로 정리했다. “한국 황제는…이번 제안에 동의할 수밖에 없는 까닭(同意セラルルノ止ムヲ得ザル所以), 그리고 이 제안에 동의하는 것이 오히려 한국의 장래에 맞는다는 것을 깨달은 듯 본사(本使·이토)에게 ‘당국자에게 명하여 일본 정부의 제안에 기초하여 타협을 이루도록 노력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이것은 명백한 조작으로 드러났다. 일본 국회도서관 헌정자료실에 소장된 보고서의 초안(1905년 12월8일 작성)에는 ‘(한국 황제는 이번 제안에) 동의하는 것이 아니고~’(同意セラルルニアラザレバ)라 한 부분을 지워버리고 ‘동의할 수밖에 없는 까닭(同意セラルルノ止ムヲ得ザル所以)~’으로 둔갑시킨 흔적이 남아있다.(강성은 도쿄 조선대 교수) ———— <중략> ———— ■탈취된 외무장관의 도장 이후 자리를 박차고 나간 참정대신 한규설을 제외한 대신들은 이른바 협약안의 자구 수정을 위한 논의에 들어갔다. 결국 ‘한국이 실제로 부강해졌다고 인정할 때까지~’라는 허울좋은 전제조건을 넣고, ‘일본 정부가 한국 황실의 안녕과 존엄을 유지할 것을 보증한다(5조)’는 조항을 추가하는 선에서 조약문이
[동영상] 내란세력=친일파 모조리 뿌리 뽑읍시다!
※관련 기사 <2025-02-09>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촛불집회 나온 박은정 의원 “헌재에서 윤석열, 궤변 늘어놔”
[오마이뉴스] 하루 만에 친일파가 됐다? 이 사람이 벌인 끔찍한 일
[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강병일 단 하루 동안의 일로 인해 친일파로 규정되고 목숨까지 잃은 흔치 않은 사례가 있다. 헌병보조원 강병일의 이야기다. 1905년 을사늑약(을사보호조약)으로 한국을 보호국으로 전락시킨 이토 히로부미는 일반 경찰력만으로는 한국 민중과 의병들을 억누를 수 없다는 생각에 일본 헌병대를 한국 치안에 투입하는 방안을 고안했다. 하지만 얼마 안 가 일본 제국의회의 반발을 샀다. 일본 인력과 일본 재정으로 대한제국 현지의 헌병대를 운영하는 것에 대한 반발이었다. 그래서 이토 히로부미가 다시 생각해 낸 것은 대한제국 인력과 재정으로 한국인 ‘폭도'(특히 의병)를 진압하는 헌병보조원 제도다. 일제는 대한제국이 1908년 6월 11일 칙령 제31호 ‘헌병보조원 모집에 관한 건’을 공포하도록 만들었다. 이는 “폭도의 진압”을 위한 한국인 헌병보조원을 일본헌병대에 위탁하는 법령이었다. 이것이 일제강점기 헌병보조원 제도의 기원이다. 일본 돈이 아닌 한국 돈으로 한국을 억압한다는 제국주의다운 발상이었다. 그렇게 해서 생겨난 헌병보조원들은 일본제국주의의 최일선에서 한국인들을 억압했다. 이들은 한국인들의 피눈물을 짜내는 역할을 했다. 하지만 이들은 헌병보조원이었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친일파로 규정되지는 않는다. 한국인들은 이들에게 말 못 할 시달림을 당하고 이들 전체를 증오하면서도, 그 지위만을 근거로 반민족행위자로 단죄하지는 않는다. 정부수립 직후의 친일파들을 긴장시킨 1948년 9월 22일의 반민족행위처벌법(반민법) 제4조 제6호는 “군·경찰의 관리로서 악질적인 행위로 민족에게 해를 가한 자”를 반민족행위자(반민자)로 규정했다. 일제 군인이나 경찰이었을 뿐 아니라 악질적인 행위도 해야 하고 그로 인해 민족에 해를 끼쳤어야 한다는
[한겨레] 대법 승소 ‘감격의 눈물’에도 전범기업 사과 못 받고 떠나
[가신이의 발자취]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이춘식 할아버지를 추모하며 지난달 27일 101살 나이로 별세 1943년 가마이시 제철소로 동원 2년 고된 노역에도 임금 못 받아 2005년 신일본제철 상대 소송 내 13년 만에 대법 승소 판결 받아내 “역사의 봄은 반드시 옵니다”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인 이춘식 할아버지가 전범 기업의 사죄를 받지 못한 채 영면에 들었다. 고인은 건강 악화로 지난해 하반기부터 지역의 한 요양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다가 지난달 27일 101살 나이로 별세했다. 101년 전 태어난 그날 돌아가신 것이다. 아직 오지 않은 ‘해방’과 함께 애절하면서도 비통한 가운데 먼 하늘나라로 여행을 떠났다. 필자와의 만남은 2018년부터이다.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자문위원으로 있을 때부터 할아버지를 알게 되었다. 고향이 전남 나주군 평동면 용동리 538번지인 고인은 외갓집에 살면서 나주 공립보통학교를 다녔다. 17살에 졸업한 뒤 바로 서울 용산구의 한 상업학교를 다녔다. 학교를 마치고 일제의 노동력 징발 수단이었던 ‘근로 보국대’에 동원돼 일본으로 끌려갔다. 일본에 가면 기술도 배울 수 있고 돈도 많이 벌 수 있다는 광고를 접하고 처음에는 기대를 했다고 한다. 부산에서 배를 타고 일본 야마구치현 서부 항구도시인 시모노세키에 도착해 일미광유회사 급사로 취직했다. 그러다 1943년 1월17일 일본 이와테현 도시인 가마이시의 제철소로 동원되었다. 거기서 1중대부터 6중대까지 10명에서 15명씩 조를 짜서 데리고 갔다. 군수물자를 만드는 제철소 일은 고됐다. 일본사람이 시키는 대로 철재를 나르다 넘어져 3개월 동안
[한겨레] 결국 뒷통수만 맞다 끝난 윤석열표 대일 외교
‘윤석열표 대일외교’의 최종적 실패가 다시 한번 입증됐다. 일본이 조선인 강제노역 현장인 하시마(군함도) 탄광을 포함한 ‘메이지 산업혁명 유산’을 2015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올리면서 했던 약속을 이행하는 데 여전히 성의를 보이지 않고 있는 것으로 거듭 확인되면서다. 윤 대통령은 임기 내내 일본에 양보했지만, 일본은 과거사 왜곡으로 양보에 화답하면서 한·일 관계를 기울어진 운동장으로 만들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이하 위원회)는 31일(현지시각) 일본이 제출한 메이지산업혁명 유산 관련 후속조치 보고서를 홈페이지에 공개했다. 보고서를 보면, 일본은 강제동원된 조선인의 증언 등을 전시해달라는 한국을 비롯한 회원국들의 요구사항을 전혀 반영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일본은 오히려 2020년 6월 도쿄 신주쿠에 문을 연 ‘산업유산정보센터’에 “‘한국병합 재검토 국제회의’에서 국제법의 귄위자인 구미의 법학자로부터 일한병합조약은 당시의 국제법 관행에 비춰 ‘무효’였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견해가 제시됐다”는 내용의 전시물을 설치해 운영해온 것으로 드러났다. 국권침탈의 합법성을 주장한 것이다. 우리 정부는 2023년 3월 한·일 관계 최대 쟁점이었던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문제와 관련해 제3자 변제를 중심으로 하는 일방적인 양보안을 발표하면서 일본의 ‘성의 있는 호응 조치’를 촉구했다. 이에 기시다 후미오 전 총리는 2023년 5월 방한 당시 한국 쪽 강제동원 해법을 언급하면서 “나 자신은 당시 혹독한 환경에서 많은 분이 매우 고통스럽고 슬픈 일을 겪으셨다는 것에 마음이 아프다”고 언급하는 등 최소한의 형식적인 측면이나마 성의를 보이려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일본은 지난해 8월 사도광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오마이뉴스] “야스쿠니에서 애비 찾아라”… 이 곡 부른 친일파 가수의 정체
[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최팔근 일본은 한국인 2만 1000여 명을 억류하고 있다. 징용이나 징병으로 강제동원됐다가 전사한 이 희생자들을 일제 침략전쟁의 공범이자 일왕의 충신으로 떠받들고 있다. 일본은 그들이 일왕을 위한 전쟁에서 전사했다며, 위패를 안치해 놓고 신(神)으로 추앙한다. 그들이 약 246만의 전체 전사자들과 더불어 하나의 신으로 승화됐다면서, 전체를 합쳐 제사 지내는 합사(合祀)의 대상에 포함시키고 있다. 불명예스럽고 모욕적인 합사에 맞서 한국인 후손들은 위패 철거를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이마저도 들어주지 않고 있다. 지난 1월 17일 일본 최고재판소는 한국인 합사자 유족 27명이 제기한 합사취소소송을 배상책임 기간인 20년의 제척기간이 지났다는 이유로 기각했다. 유족들이 가장 중시한 것은 합사 철회다. 이와 더불어 사과 및 유골 양도와 손해배상액 ‘1엔’도 청구했다. 최고재판소가 기각한 것은 1엔 배상이다. 합사가 정당한지는 판단하지 않았다. 합사가 옳지 못하다는 점은 이런 판결에서도 나타난다. 한국인들은 자기 조상이 제국주의 침략전쟁에 동원돼 희생된 것에도 억울해하지만, 그렇게 희생된 조상이 야스쿠니신사에서 신으로 추앙되는 것에도 억울해한다. 한국인들이 이런 한을 갖게 된 것은 ‘죽어서 야스쿠니신사에 묻힐 것’이라며 한국인들을 자신들의 전쟁터로 끌고 간 일본제국주의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런 일제를 돕겠다며 한국인들의 참전을 부추긴 친일파들 때문이기도 하다. 가수 최팔근도 그런 부역자 중 하나다. 최팔근의 나니와부시가 미친 악영향 최팔근은 일종의 J-팝 가수다. 판소리와 비슷하다는 평을 받는 나니와부시(浪花節)가 그의 장르다. 2017년도 <동아시아문화연구> 제69집에 수록된 박영산 일본 국제일본문화연구센터
[오마이뉴스] 김원봉과 함께 기억해야 할 ‘밀양사람’ 윤세주
최필숙 작가, 소설 <끝나지 않은 석정의 노래>로 석정 윤세주 조명한 까닭 “친일파가 아닌 이상 그 누구도 이 소설을 외면할 권리는 없다. 아니, 설령 친일파라 할지라도, 이 작품을 다 읽기도 전에 옷깃을 여미며 두 눈을 감게 될 것이다.” 김춘복 소설가가 최필숙 작가의 소설 <끝나지 않은 석정의 노래>(경상국립대 출판부 기획, 지앤유 간)를 읽고서 보낸 찬사다. ‘독립군 며느리’를 자처하는 최 작가가 펴낸 이번 소설을 읽으며 김 소설가의 말처럼, ‘그 시대에 살았다면 나는 어떻게 했을까’라는 질문을 계속 던지면서, 책을 손에 잡은 지 며칠만에 독파했다. 이 소설은 의열단, 조선혁명간부학교, 조선민족혁명당, 조선의용대로 활약했던 석정(石鼎) 윤세주(1900~1942, 1982년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의 출생과 성장, 항일투쟁, 그리고 죽음까지 그려놓았다. 영화 <암살>에서 “나 밀양사람 김원봉이요”라는 대사로 더 유명한 약산 김원봉(1898~1958) 장군 등과 함께 항일 무장투쟁의 주역인 윤세주의 치열한 독립투쟁기를 소설로 형상화했다. 최필숙 작가가 많은 밀양 독립운동가 가운데 오롯이 쫓은 윤세주는 가장 철저한 민족주의자로, 웅변가이며 이론가였고, 예리한 판단으로 편집‧방송을 맡았으며, 적극적인 항일운동으로 후진 양성에 힘썼던 인물이다. 훗날 존경 받는 인물이 된 윤세주는 1919년 밀양 3‧13 만세운동을 주도하고 그해 11월 만주에서 의열단 창립에 가담했고, 1920년에는 밀양 폭탄 의거로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최필숙 작가는 우리가 일제강점기 역사의 빈틈을 알지 못하는 속에, 윤세주의 행적을 통해 인물 간 대화를 복기해 놓았다. 석정과 의열단의 항일투쟁기는 그 어떤
[JTBC] 일제 강제동원 피해 승소 이끌어 낸 이춘식 옹 별세…”국민에게 고맙고 줄 게 없어 미안해”
17살 때 “기술 배우러” 간 일본서 강제노동 2018년 대법원 ‘손해배상 승소’ 이끌어 내 일제 강점기 전범 기업에 강제 징용된 뒤 정당한 노동의 대가와 빼앗긴 시간에 대한 배상을 받는데 앞장 서왔던 이춘식 할아버지가 오늘(27일) 오전 10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노환으로 지난해부터 광주광역시의 한 요양병원에 입원하던 중이었습니다. 이춘식 할아버지와 함께 일본의 사죄와 배상을 요구해 온 시민단체들은 “우리들의 버팀목이자 역사의 산 증인으로 피해자의 존엄을 직접 보여주셨다”며 그를 추모했습니다. 일제 강점기인 1941년 ‘기술을 가르쳐 준다’는 말에 속아 일본으로 건너간 17살 소년 이춘식은 제철소에서 하루 12시간이 넘는 강도 높은 노동에 시달렸습니다. 기술을 배우긴 커녕 임금조차 주지 않는 노동착취가 3년 넘게 이어졌고 일제가 패망한 뒤 고향에 돌아온 그에겐 빈손과, 고된 노동으로 얻은 흉터만 남았습니다. 60년이 지나서야 이춘식은 포기했던 징용의 대가를 받기 위한 싸움을 시작했습니다. 지난 2005년 일본제철의 후신인 신일본제철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걸었습니다. 함께 고생한 동료 3명과 같이 시작했지만 13년 뒤인 2018년 대법원이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손을 들어 줄 때 살아서 그 소식을 들은 건 이춘식 혼자였습니다. 이춘식은 승소 판결을 들은 2018년 10월 30일 법원을 나오면서 “오늘 나 혼자 나와서 내가 마음이 슬프고 눈물이 많이 난다”, “같이 나와서 이렇게 판결받았으면 엄청 기뻤을 텐데 혼자 나와서 눈물이 나고 울음이 나오네”라고 말했습니다. 대법원 승소 판결 뒤에도 일본 정부와 가해
[YTN] 계엄 모의 ‘삼청동 안가’ 미스터리… 대통령의 은밀한 밀실, 사실은
YTN라디오(FM 94.5) [YTN 뉴스FM 슬기로운 라디오생활] □ 방송일시 : 2025년 1월 24일 (금)□ 진행 : 박귀빈 아나운서□ 출연자 : 민족문제연구소 방학진 기획실장 * 아래 텍스트는 실제 방송 내용과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 보다 정확한 내용은 방송으로 확인하시기를 바랍니다. ◆ 박귀빈 아나운서 (이하 박귀빈) : 2024년 12.3 계엄 회동은 롯데리아에서만 있었던 게 아닙니다. 지도에도 보이지 않는 미지의 공간, 바로 ‘삼청동 안가’가 그곳인데요. 이곳은 박근혜 국정농단에서도 등장하는 곳이죠. 탄핵 때마다 등장하는 ‘삼청동 안가’. 이 공간에는 숨겨진 또 다른 비밀이 있습니다. ‘삼청동 안가’의 미스터리 이분과 풀어보겠습니다.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 모셨습니다. 어서 오세요. ◇ 민족문제연구소 방학진 기획실장(이하 방학진) : 안녕하십니까? 방학진입니다. ◆ 박귀빈 : 네 일단 ‘삼청동 안가’ 이번에 비상계엄 사태 이후에 뉴스를 통해서 들은 말인 것 같습니다. 어디고 어떤 곳입니까? ◇ 방학진 : 지도에서 검색하시면 나오는데요. 지붕만 나오죠. 삼청동 145에 6번지 그다음에 19번지, 20번지, 32번지 이 4개 지번이 붙어 있거든요. 그래서 지도에서 보시면 이제 골목길 로드뷰까지는 안 나오고 왜냐하면 차가 못 들어가니까요. 지붕만 나오는 곳이고 거의 삼청동이 요즘에 핫플레이스가 돼가지고 외국인들이 주말만 되면 한복 입고 엄청나게 돌아다니는 곳이고 거기 맛있는 식당 카페도 있어서 그 앞길은 정말 많은 사람들이 일상생활의 공간인데 그 뒤쪽 골목으로 50m만 가면 갈 수가 없는 그런 곳이죠. ◆ 박귀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