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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언론 민들레] 심원정에는 심원정이 없었다
[기사원문] <2024-07-10> 시민언론 민들레☞ 심원정에는 심원정이 없었다 강점기 소유자 이노우에 사진첩에서 확인 현재 복원된 심원정 본래 이름은 망악정 1919년 이웃한 매국노 이지용 별장도 구입 용산문화원 자리에 있었던 심원정의 전모를 알 수 있는 사진첩이 공개됐다. 시민언론 민들레가 서울역사박물관에 요청해 입수한 ‘宜文前期事業紀念寫眞 附 人事紀念寫眞’에 실린 사진을 꼼꼼히 들여다 본 결과 심원정은 단순한 정자가 아니라 본채와 부속건물로 구성된 대저택을 지칭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와 함께 ‘심원정’으로 복원된 육각정의 실제 명칭은 ‘망악정’인 것으로 드러나 수정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宜文前期事業紀念寫眞 附 人事紀念寫眞’은 강점기 한국에서 활동한 일본인 기업가 이노우에 요시후미(井上宜文, 1868~?)가 자신의 업적을 사진과 캡션으로 구성한 사진첩으로 이 가운데 ‘심원정 시대’로 분류된 22개 쪽에 심원정 관련 81장의 사진이 실려있다. 이노우에는 1902년 심원정을 구입하여 1945년 일본으로 철수하기까지 별장 또는 거주지로 삼아 애용하였다. 사진첩 속 사진은 1902~1932년에 걸쳐 촬영한 흑백사진들로, 심원정의 전모와 인테리어는 물론, 이웃 이지용의 양관별장과 함께 한강 홍수실태를 엿볼 수 있다. ·········<중략>········· ·········<중략>········· 이노우에는 육각정과 가까운 곳의 양관건물 전경과 그 앞에서 찍은 기념사진에 1919년 이왕가 별저를 구입하고 양관 뒤편에 있던 신사를 느티나무 아래로 옮겨왔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 128번지에 소재한 왕족 이지용의 땅과 건물 일체를 구입한 것이 틀림없다. 민족문제연구소 이순우 책임연구원 조사에 따르면 경성부관내지적목록(1917)에 이지용 소유로 표기돼 있던 원정 4정목 128번지, 86번지, 산수정 77번지가 1927년 지적목록에 모두
[박물관은 뭐하니] 한림대 학생들의 방문에 펭PD가 감동했어요ㅠㅠ
안녕하세요 펭PD입니다. 지난 6월 27일,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학생들이 축제 때 크로플과 에이드를 판매한 수익금을 식민지역사박물관에 후원해주었습니다.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는 후원금 전달식과 함께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이희자 대표님의 강의를 진행하였는데요. 역사정의실천을 위해 행동하는 한림대 학생들 너무 멋있지 않나요? 펭PD는 행동하는 여러분을 앞으로도 응원하겠습니다.
[오마이뉴스] 동상은 철거됐지만 그의 흔적은 철거되지 않았다
[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정춘수 대북전단이 아닌 대일전단이 1919년 3월 1일 새벽부터 살포됐다. 3·1운동은 기습적인 시위가 아니라 예고된 시위의 형태로 시작됐다. 원호처(국가보훈부) 소속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가 펴낸 <삼일운동사>는 “이날 새벽 이미 독립선언식을 예고하는 비라가 집집마다 뿌려졌고, 시내 주요한 곳에는 벽보가 나붙었으며 국민을 격려하는 조선독립신문 창간호가 독립선언서와 함께 배달되었다”고 기술한다. 이날 오후 2시 무렵, 서울 파고다공원에서는 학생들 중심으로 독립선언식이 거행됐다. 2시 정각에는 서울 인사동 태화관(명월관 지점)에서 민족대표들이 독립선언식을 거행했다. “불교 측 민족대표의 한 분인 한용운이 일어나 한국 및 한국인이 독립국임과 자주민임을 선언하고 그의 선창으로 일동이 대한독립만세를 일제히 불렀다”고 위 책은 묘사한다. 선언식을 마친 민족대표들은 태화관 사장 안순환을 통해 조선총독부 경무총감부에 자수했다. 전화를 받고 일본 헌병과 경찰 80여 명이 출동했고, 민족대표들은 오후 4시경 자동차에 실려 남산으로 끌려갔다. 남산 중턱 왜성대(서울애니메이션센터 일대)의 경무총감부가 이들을 맞이했다. 이날 일제 헌병과 경찰은 민족대표 33인 전원을 다 체포하지 못했다. 거리가 멀어 참석하지 못한 4명이 있었다. 기독교 측 민족대표인 길선주·김병조·유여대와 더불어 훗날 국회 반민특위에 끌려갈 정춘수가 그 넷이다. 강원도 원산에서 감리교 목사로 활동하던 46세의 정춘수는 독립선언식에 지각한 데 이어 자수도 지각으로 했다. <친일인명사전> 제3권 정춘수 편의 설명이다. “그날 열차편으로 서울에 올라왔으나 이미 선언식은 끝나고 시위가 시작된 후였다. 선언서 서명자들이 모두 체포되자 서울에 머물면서 상황을 살피다가 3월 7일 종로경찰서에 자수해
[오마이뉴스] 최연장자 친일파의 수상한 행각… 이순신 있었다면 어땠을까
[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정낙용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4389명 중의 최연장자는 1827년 생으로 알려진 정낙용(鄭洛鎔)이다. 정조의 아들인 순조 때 한성부에서 출생하고, 무과시험 장원급제를 거쳐 전라도좌수사와 삼도수군통제사를 역임한 인물이다. 충무공 이순신을 연상시키는 이런 관직을 거친 뒤에는 형조판서와 공조판서를 거쳐 고종황제를 보좌하는 궁내부 특진관과 시종원경 등을 지냈다. <친일인명사전>에 실린 친일파 중에서 최연장자라는 점을 빼면, 정낙용은 외형상 특이점이 별로 없어 보인다. 구체적으로 어떤 친일행위를 했는지가 이 사전에 나타나지 않는다. 국권침탈 2개월 뒤인 1910년 10월에 남작 작위를 받고, 1911년에 한국 멸망 포상금으로 은사공채 2만 5천 원을 받고, 1912년에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은 사실 정도만 언급돼 있다.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제4-16권 정낙용 편도 마찬가지다. 그가 무엇 때문에 일본 작위를 받았는지가 설명돼 있지 않다. 남작 작위와 은사공채와 병합기념장을 받은 사실을 근거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결정한다는 내용만 적혀 있다. 정낙용이 조선 백성들에게 한 짓 한국 병합 3년 전에 발행된 1907년 3월 15일 자 <황성신문> 기사 ‘국채보상금 모집 취지서’는 대일 차관을 갚고 주권을 회복하기 위한 이 캠페인에 참여한 인물 중 하나로 정낙용을 거명한다. <친일인명사전> 제3권 정낙용 편은 이 기사에 나온 정낙용이 친일파 정낙용임을 확인한다. 정낙용의 구체적인 친일행위는 드러나지 않은 반면, 그의 구체적인 애국행위는 이처럼 명확히 드러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 일제는 남작 작위를 주고 거액의 친일재산을 안겼다. 국권침탈 직후에 귀족
[연합뉴스] 24개 시민단체 임진각 모여 ‘대북전단 살포 즉각 중단하라’
(파주=연합뉴스) 임병식 기자 = 민족문제연구소와 민주노총 등 24개 시민단체와 접경지역 주민들이 26일 경기 파주시 임진각에서 대북전단 살포 중단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시민단체 등 대표 25명은 이날 오전 11시 임진각 망배단 앞에서 ‘한반도 평화를 염원하는 범시민’이라는 이름 아래 기자회견을 열고 “풍선을 이용한 대북전단 살포는 남북 간 불필요한 긴장을 조장하고 전쟁 위기를 가속화하는 일에 다름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이어 “특히 경기도 접경지역 주민들은 새벽마다 대형 풍선으로 수면 장애를 겪고 불안감에 시달리며 일상생활에서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경기도는 대북전단 살포 행위를 철저히 단속하고 수사당국은 항공안전법 위반 행위를 신속히 수사해 국민 안전에 만전을 기해 달라”고 당부했다. 이들은 대북전단 살포를 규탄하고 중단을 촉구하는 구호를 외친 뒤 기자회견을 마쳤다. 북한은 탈북민단체의 대북전단 살포에 반발해 지난달 28일부터 여섯 차례 오물 풍선을 남쪽으로 살포했다. 이에 우리 군은 판문점 선언에 따라 철거했던 대북 방송 확성기를 지난 9일 비무장지대(DMZ)와 접경지 일대에 다시 설치하고 맞대응에 나서면서 한반도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임병식 기자 andphotodo@yna.co.kr <2024-06-26> 연합뉴스 ☞기사원문: 24개 시민단체 임진각 모여 ‘대북전단 살포 즉각 중단하라’
[역발상 시즌3] 청일전쟁 130년,러일전쟁 120년 특별 시리즈 4부 “조선은 어떤 과정으로 식민지가 되었나?”
☞ (06.25) ‘역발상’ 시즌 3: 청일전쟁 130년,러일전쟁 120년 특별 시리즈 4부 “조선은 어떤 과정으로 식민지가 되었나?” 오늘의 이야기 : 청일전쟁 후 10년 동안 무슨 일들이 있었나? 초대손님 : 서민교 교수 Q.러일 전쟁 이후 대한제국은 사실상 강점되었는데요?. 일본의 침략은 어떻게 되나요? -1900년 이후 일본은 한국 보호국화를 국제법상 합법으로 만들기 위해 한국을 둘러싼 열강과 한반도 문제를 치밀하게 조율했다. 대표적인 협정으로는 1902년 영국과 일본 사이의 제1차 영일동맹(英日同盟), 1905년 미국과 일본이 한국 문제를 협의한 가쓰라-태프트 밀약, 제2차 영일동맹, 러시아와 일본이 러일전쟁 후처리 문제를 협상했던 포츠머스 조약 Q.을사보호조약의 체결은 어떻게 이뤄졌나요?그 내용은? -외교권 박탈 -일본의 보호국화 Q.정미7조약 -행정권과 인사권 박탈 >대한제국 정부 기능을 마비 -군대 해산 Q.조선 민중은 어떤 저항을 했나요? 의병운동 등 -일본의 의병섬멸 작전_남한대토벌 등 -13도창의대진소의 결성과 서울진공작전 Q.1910년 강제병합 Q.일본 정부는 지금까지도 불법이 아닌 조약을 통한 합법을 주장하고 이젠 한국의 뉴라이트까지도 이런 주장을 펼치고 있습니다. 이 문제를 짚어주시죠? ※지난 방송 – 팟캐스트 역발상 시즌3 ☞ (06.18) ‘역발상’ 시즌 3: 청일전쟁 130년,러일전쟁 120년 특별 시리즈 3부 “러일전쟁의 결과들” ☞ (06.11) ‘역발상’ 시즌 3: 청일전쟁 130년,러일전쟁 120년 특별 시리즈 2부 “청일전쟁 후 10년 동안 무슨 일들이 있었나?” ☞ (06.04) ‘역발상’ 시즌 3: 청일전쟁 130년,러일전쟁 120년 특별 시리즈 1부 “청일전쟁은 왜 일어났을까?” ☞ (05.28) ‘역발상’ 시즌 3: 영화 주제가로 보는
[한겨레] 인하대에 ‘이승만 조형물’ 또 논란…왜 자꾸 시도?
동상 철거에 재건 시도 무산됐는데 총동창회 “대학 설립 주도 역할” 주장 교내 반대 여론에 일단 기공식 취소 이승만 전 대통령을 기리는 조형물의 교내 설치를 두고 인하대에서 논란이 일며 기공식이 취소됐다. 22일 인하대 총동창회에 따르면 동창회는 인하대 캠퍼스 내에 조성 중인 ‘하와이-인하공원’에 개교 70주년 및 총동창회 창립 65주년을 맞아 학교 설립에 기여한 이 전 대통령의 사진이 포함된 조형물 설치를 추진하고 있다. 가로 18m, 세로 3~6m 크기의 ㄴ자 형태 조형물에는 이 전 대통령이 인하대 전신인 인하공과대학의 이원철 초대 학장에게 교기를 전달하는 사진이 지름 3m 크기로 담길 예정이다. 이 전 대통령은 6.25 한국전쟁 중이던 1952년 12월 피난 중이던 부산에서 김법린 당시 문교부 장관에게 인천에 공과대학 설립을 지시했다. 이후 기부금과 정부 보조금을 지원하는 등 이 대학 건립에 주도적 역할을 했다. 총동창회는 이 전 대통령뿐 아니라 인하대에 개교 자금을 보태준 미국 하와이 교민들 사진도 각각 가로·세로 1.5m 크기 조형물에 담는다는 계획이다. 하와이 교민들은 하와이 사탕수수밭에서 노동하며 모은 돈을 학교 설립에 보탰고, 학교 측은 이에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 학교 이름을 인천과 하와이 앞 글자를 따서 지었다. 그러나 이 같은 조형물 설립 추진 계획이 알려지자 교내에서 반대 여론이 일었다. 서준석 인하대 총학생회 동문회 회장은 “특정인을 부각해 우상화하기보다는 국가와 민족을 사랑했던 하와이 이민자들의 동포애를 부각해야 한다”며 이 전
[쇼츠] 영화 ‘서울의 봄’ 현장을 가다 – 장태완 편
[영화 ‘서울의 봄’ 현장을 가다] – 장태완 편 전두환 세력들은 쿠데타를 준비하며 나름 사람을 분류하기 시작했습니다.그 과정에서 이건영, 정병주, 정승화는 사전 제거 핵심으로 분류하고, 장태완은 때에 따라 자기들이 구슬릴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그런데 쿠데타 당일 최규하 전 대통령이 사인을 바로 하지 않으면서 전두환 세력들의 계획과는 다르게 흘러가게 되었습니다. 12.12 쿠데타 이후 장태완 장군은 신군부와 타협하게 됩니다.신군부 측에서 제안한 한국 증권 전산 사장 자리를 승낙한 것입니다.그렇다면 왜 반란군 세력이 내민 손을 잡은 것일까요?그 이유는 가족이었습니다.1982년 대학생이던 아들이 한 달간 실종되었다가 할아버지의 산소 근처 낙동강 변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기 때문입니다.남은 가족의 목숨마저 위험해지지 않을까 생각한 장태완 장군은 가족회의를 통해 자리를 승낙하게 됩니다. 제안을 거절한 다른 이들과 비교되는 선택이지만, 장태완 장군은 신군부 세력을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1993년 전두환과 노태우 등 34명을 반란 및 내란죄 혐의로 고소했습니다.
민족사랑 2024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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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한국사로 장난질을 한 역사학자
[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이병도 이병도와 조선사편수회로 상징되는 일제 식민사관은 한국인의 역사 인식을 좁은 반도 안에 가뒀다. 이병도가 몸담은 조선사편수회의 원래 명칭이 조선반도사편찬위원회였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국사를 반도의 틀에 가두려 했던 일제의 의도가 이 명칭에서도 드러난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전신인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의 박성수 교수는 1986년 9월 17일 자 <경향신문> 기고문에서 “일제는 조선총독부에다 소위 조선반도사편찬위원회라는 기구를 설치하여 구로이타를 고문으로 앉혔다”라며 구로이타 가쓰미(黒板勝美), 미우라 히로유키(三浦周行), 이마니시 류(今西龍) 세 학자를 거명한 뒤 이렇게 지적한다. “구로이타를 비롯한 위의 왜곡 3역은 ‘조선반도사 편찬 요지’에서 식민지 백성의 역사는 이를 근원적으로 말살하여 그들의 국민의식과 독립사상을 발본색원하는 무자비한 방법이 하나 있고, 또 하나는 그들의 역사를 볼품 없는 초라한 모습으로 왜곡·날조하여 기를 죽여버리는 차선의 방법이 있는데, 앞의 한국사 절멸책은 사실상 불가능하니 차라리 왜곡하는 방향을 택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주장하였다.” 이병도는 ‘차선의 방법’으로 한국사의 기를 꺾는 일을 조선사편수회와 함께 수행했다. <친일인명사전> 제2권 이병도 편은 “1925년 8월 조선사편수회 수사관보(修史官補)에 임명되었다”라며 “1927년 5월 수사관보를 그만두고 촉탁을 맡아 1938년 6월경까지 활동했다”고 한 뒤 이렇게 설명한다. “조선사편수회 촉탁으로 활동하면서 이마니시와 함께 <조선사> 제1편 ‘신라통일 이전’, 제2편 ‘신라통일시대’, 제3편 ‘고려시대’의 편찬을 담당했다. 수사관보로 재직하던 1926년 1월 조선사편수회 소속 학자들의 공동 연구기관인 조선사학동고회의 편찬을 맡았다.” 이마니시 류 경성대학제국 교수는 한국사를 한반도 안에 구겨 넣는 데 앞장섰다. 2022년에 <선사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