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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기사

“강제로 전쟁터 끌려가 죽은 아버지, 왜 야스쿠니에 가두나”

2019년 1월 23일 1179

도쿄 야스쿠니 합사 철회소송서 유족 유수예씨 최후진술도쿄지방재판소, 2차 야스쿠니 소송 내달 중순 선고 예정 (도쿄=연합뉴스) 김병규 특파원 = “아들이 보고 싶다. 사진이라도 찍어서 보내달라. 며칠만 늦게 왔어도 아들 얼굴이라도 보고 왔을 텐데….” 22일 오후 도쿄(東京) 지요다(千代田)구의 도쿄지방재판소(지방법원) 103호 법정. 증인석에 서서 아버지가 보낸 편지를 읽으며 야스쿠니신사(靖國神社)에 합사된 아버지의 명부를 빼라고 요구하는 유수예(74)씨의 목소리는 떨렸지만 한마디 한마디 힘이 실렸다. 유 씨는 야스쿠니신사에 무단으로 합사(合祀)된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유족이다. 유씨를 비롯한 유족 27명은 일본 정부와 야스쿠니신사를 상대로 무단합사의 철회와 사죄, 유골 봉환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이날 열린 결심 공판에서 유씨는 원고측 최후 진술자로 나섰다. 그는 전장에서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보냈다는 편지의 내용을 통해 자신의 기구한 운명을 소개하면서 사죄해야 할 일본이 아버지를 멋대로 야스쿠니신사에 합사했다고 성토했다. 유 씨의 아버지 유봉학 씨는 태평양 전쟁 막바지인 1945년 1월 아들 수예 씨가 태어나기 하루 전에 일제에 의해 전쟁터에 끌려갔다. 포탄이 쏟아지는 전장에서 아버지는 만삭 때 헤어진 아내에게 편지를 보내 아들의 사진이라도 보내달라고 부탁했지만, 끝내 사진으로라도 아들의 얼굴을 보지 못한 채 세상과 작별했다. 아버지는 해방을 겨우 보름여 앞둔 그해 7월 28일 일본 남부 가고시마(鹿兒島)에서 비참하게 숨을 거뒀다. 일본 정부는 전장에서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를 죽어서도 괴롭혔다. 멋대로 ‘일본과 천왕(일왕)을 지킨 신(神)’이라고 ‘추앙’하며 일제의 전쟁범죄자들과 함께 그를 야스쿠니신사에 합사한 것이다.

[팟캐스트] ‘내역사’ 시즌 3: 친일파 1편 “이종형” 의열단 행세하며 독립군 때려잡은 악명 높은 밀정

2019년 1월 28일 1127

[바로듣기] ☞ (1.22) ‘내역사’ 시즌 3: 친일파 1편 “이종형” 의열단 행세하며 독립군 때려잡은 악명 높은 밀정 ☞ (1.15) ‘내역사’ 시즌 3: “일제 강제동원” 대법원 판결이후 우리의 과제는?_1편 ☞ (1.08) ‘내역사’ 시즌 3: 프롤로그 – 70년만에 부활하는 반민특위 친일파 그들은 누구인가? [팟캐스트] 내일을 여는 역사 시즌 3 “우리 역사의 뿌리가 친일독재 세력에 의해 흔들리고 훼손되었습니다. 우리가 지난 겨울 촛불을 들고 싸운 상대는 과연 누구였을까요. 역사적폐의 주범들의 실체와 이들이 저지른 역사범죄의 동기를 파헤쳐보고자 합니다.”

[팟캐스트] ‘내역사’ 시즌 3 – 친일파 1편 “이종형” 의열단 행세하며 독립군 때려잡은 악명높은 밀정

2019년 1월 23일 1654

[바로듣기] ☞ (1.22) ‘내역사’ 시즌 3: 친일파 1편 “이종형” 의열단 행세하며 독립군 때려잡은 악명높은 밀정 ☞ (1.15) ‘내역사’ 시즌 3: “일제 강제동원” 대법원 판결이후 우리의 과제는?_1편 ☞ (1.08) ‘내역사’ 시즌 3: 프롤로그 – 70년만에 부활하는 반민특위 친일파 그들은 누구인가? [팟캐스트] 내일을 여는 역사 시즌 3 “우리 역사의 뿌리가 친일독재 세력에 의해 흔들리고 훼손되었습니다. 우리가 지난 겨울 촛불을 들고 싸운 상대는 과연 누구였을까요. 역사적폐의 주범들의 실체와 이들이 저지른 역사범죄의 동기를 파헤쳐보고자 합니다.”

민족사랑 2019년 01월호

2019년 1월 23일 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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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과 임정 수립 100돌, 안익태의 ‘애국가’를 어찌할 것인가

2019년 1월 23일 2173

에키타이 안, 일제에 이어 나치 파시즘에도 협력한 사실 확인 최근 이해영 한신대 교수(57·국제관계학부)가 (삼인)라는 책을 펴내면서 새삼 지난 10여 년 동안 논란이 되어 온 친일 음악가 안익태가 재소환되고 있다. 안익태는 우리 ‘애국가’의 작곡자이기 전에 일본의 침략전쟁을 선전하고 ‘일본 정신’이 담긴 음악을 만드는 등 일본 제국주의에 협력한 친일 부역자로 에 오른 이다. 새롭게 소환되고 있는 안익태 우리 세대가 안익태(安益泰, 1906~1965)를 ‘애국가’의 작곡자로서 의식하기 시작한 것은 고교 시절이었던 듯하다. 어떤 노래를 즐겨 부르면서도 그 작사·작곡자가 궁금해지는 일은 좀체 없다. 그러나 그 시절, 애국가를 만든 이가 안익태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그가 산 스페인의 어느 도시에 그의 이름을 딴 거리가 있다는 점과 함께였다. 자세한 내용은 알지 못했지만, 그 소식은 더벅머리 고교생들을 얼마간 고무한 것 같다. 글쎄, 애국가라면 여느 대중가요와 다르지 않은가 말이다. 그런 애국가를 만든 이가 유럽에서 꽤 활발하게 활동했던 음악가였고, 스페인 여성과 결혼하여 스페인에서 여생을 마쳤다. 그런데 그가 살았던 마요르카섬엔 ‘안익태 거리’가 있다… 어쨌든 그건 국가의 정체성을 새삼 확인하게 하는 그럴 듯한 ‘서사’가 아닐 수 없었던 거다. 안익태의 친일 전력이 드러난 것은 2006년, 독일에서 음악을 공부하고 있던 유학생에 의해, 2000년에 발굴된 안익태의 베를린필 지휘 영상이 만주국 축전 음악회의 실황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다. 이 발표는 국내 음악계를 이른바 ‘멘붕’ 상태로 만들었다. 문제의 영상은 1942년

[신년기획]다·만·세 100년,“빨갱이란 비난까지 받았지만, 역사 바로잡기 멈출 수 없어”

2019년 1월 19일 1350

준비 과정부터 18년 걸친 대장정 시민들 자발적 모금이 큰 원동력 친일파에 대한 엄격한 기준 정하고 편찬위원들 지인까지 수록했는데 편파적이라는 비판에 동의 못해 특정한 사람 매도할 의도 없어 지도층 사람들이 행동을 할 때 훗날 받을 평가 신경쓰도록 영향 해외와 지방의 친일파 조사 미비 여건 좋지 않지만 개정판 준비 중 역사학자인 윤경로 전 한성대 총장(71)은 2002년부터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장을 맡고 있다. 그는 편찬작업이 한창이던 2005년 어느 날 교회에 예배를 보러 갔다가 깜짝 놀랐다. 자신을 비난하는 신문 형식의 전단이 대량 살포돼 있었던 것이다. 한 강연회에서 한·미 공조와 더불어 민족공조의 필요성을 언급한 것이 ‘친북적’이라는 억지 주장이었다. “거기에 도표가 나오는데 강만길 선생-한완상 전 부총리-나 이런 식으로 무슨 간첩단 사건처럼 만들어 놓았더라고요.” 당시는 편찬위원장을 맡아 일부 보수세력으로부터 집중적인 비난을 받고 있던 시기였다. “일부 교회 사람들이 연세가 아흔이 넘은 장모님에게 ‘당신 사위 빨갱이’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러나 <친일인명사전> 편찬 작업은 멈출 수 없었다. “1949년 친일 경찰의 습격으로 와해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를 잇는 작업”이자 “역사정의를 위해 반드시 정리하고 가야 하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보수세력의 음해와 소송전을 극복하고 2009년 11월8일 친일파 4389명이 담긴 <친일인명사전>이 발간됐다. 정보기관의 압력으로 발간기념식장 대관마저 취소되자,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는 효창원 애국선열 묘역으로 행사장을 옮겨 백범 김구 선생 영전에 사전을 헌정했다. <친일인명사전>이 세상에 나온 지 올해 10주년이 됐다. 윤 위원장을 지난달 20일 서울 용산구

후지코시 근로정신대 피해 2심도 승소…”일본이 기망·협박”(종합)

2019년 1월 19일 857

4년만의 항소심서 “피해자에 8천만∼1억원 배상” 1심 판결 유지 (서울=연합뉴스) 고동욱 기자 = 1940년대 일본 군수기업인 후지코시에 강제동원됐던 근로정신대 피해자들이 2심에서도 회사로부터 손해배상을 받을 수 있다는 판단을 받았다. 서울고법 민사12부(임성근 부장판사)는 18일 근로정신대·강제징용 피해자와 유족 등 27명이 후지코시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피해자 1인당 8천만∼1억원을 배상하라”는 1심 판결을 유지했다. 재판부는 “근로정신대원으로 지원한 원고들은 당시 대부분 10대 초반이었으나 위험한 작업에 종사했고, 70년이 넘도록 보상이나 배상이 이뤄지지 않았다”고 밝혔다. 또 “후지코시와 일본이 나이 어린 원고 등이 믿고 따를 수 있는 교사 등 연장자를 동원하거나,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겠다는 등 기망·회유·협박 등 수단을 동원해 근로정신대에 지원하게 했다”고 지적했다. 재판부는 앞서 일본 법원이 후지코시의 불법행위를 인정하면서도 “1965년 한일청구권 협정으로 한국인 개인의 청구권은 포기됐다”며 배상책임을 인정하지 않은 판결이 국내에서까지 기판력(효력)을 갖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일본 법원은 일본의 식민지배가 합법적이라는 인식 하에 당시 시행된 메이지헌법 등에 근거해 후지코시의 책임을 판단했다”며 “이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대한민국의 헌법과 선량한 풍속이나 사회질서에 위반된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한일청구권 협정에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청구권이 포함돼 있다는 후지코시 측의 주장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또 2003년 일본에서 소송을 제기해 패소했다는 것만으로 손해배상청구권을 행사할 수 없도록 하는 장애사유가 소멸했다고 볼 수 없다며, 소멸시효도 지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1928년 설립된 후지코시는 태평양전쟁 당시 12∼18세 한국인 소녀 1천여명을 일본 도야마 공장에

일제 독립운동 수형인 5323명 광주·전남 1985명 전국 최다

2019년 1월 19일 8996

보훈처, 전국 시·군·읍·면 전수조사 독립운동 중심지 광주·전남 727명 유공자 지정 안 돼피해자에 최대 1억 배상’ 타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활발하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진 광주·전남의 3·1운동 등 독립운동을 새로운 시각에서 재조명할 수 있는 조사결과가 나왔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으로 처벌을 받은 지역민 수형자를 분석한 결과, 광주·전남지역 수형자가 전국에서 가장 많은 것으로 확인된 것이다. 특히 대구·경북, 부산·경남 보다는 각각 5배, 10배나 많았다. 국가보훈처는 “지난해 3월부터 11월까지 ‘일제강점기 수형인명부’에 대한 전국 시(군)·읍·면 전수조사를 통해 독립운동 관련 수형자 5323명을 확인했다”고 17일 밝혔다. 전수조사 분석 결과, 독립운동 관련 죄명(보안법·소요·대정8년 제령7호·치안유지법 등)의 수형자는 광주·전남지역이 1985명으로 가장 많았다. 대전·충남 1205명, 인천·경기 456명, 대구·경북 404명, 제주 214명, 부산·경남 198명 등이 뒤를 이었다. 또 광주지방재판소 자료(광주·전남·제주· 북한 등 기타 지역)에서 확인된 2626명 중 2282명(86.9%, 사형 66명·종신형9명 포함)은 징역형 이상으로, 대부분 호남의병과 3·1운동 참여자였다. 이번 조사에서 확인된 수형자 가운데 독립유공자로 지정되지 않은 사람은 모두 2487명이었다. 광주·전남 727명, 대전·충남 719명, 인천·경기 389명, 대구·경북 167명, 부산·울산·경남 120명 등 순이었다. 광주·전남 727명 중 징역형 이상을 받은 사람은 457명으로 전국 최다였고, 몽둥이로 볼기를 때리는 태형 90대를 맞은 사람도 67명이나 됐다. 보훈처는 독립유공자로 지정되지 않은 수형자는 3·1운동 100주년인 올해 독립유공자 포상에 적극 활용하기로 했다. 이번 전수조사는 전국 1621개 읍·면 문서고 등을 보훈처 직원들이 직접 방문해 이뤄졌다. 광주·전남·제주지역은

[팟캐스트] ‘내역사’ 시즌 3: “일제 강제동원” 대법원 판결이후 우리의 과제는? 1편

2019년 1월 16일 967

[바로듣기] ☞ (1.15) ‘내역사’ 시즌 3: “일제 강제동원” 대법원 판결이후 우리의 과제는?_1편 ☞ (1.08) ‘내역사’ 시즌 3: 프롤로그 – 70년만에 부활하는 반민특위 친일파 그들은 누구인가? [팟캐스트] 내일을 여는 역사 시즌 3 “우리 역사의 뿌리가 친일독재 세력에 의해 흔들리고 훼손되었습니다. 우리가 지난 겨울 촛불을 들고 싸운 상대는 과연 누구였을까요. 역사적폐의 주범들의 실체와 이들이 저지른 역사범죄의 동기를 파헤쳐보고자 합니다.”

[권성우의 청파동 통신] 식민지역사박물관 생각

2019년 1월 15일 2326

서울 용산구 청파동이나 남영동, 후암동, 원효로 일대를 걷다 보면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일본식 주택이나 적산(敵産)가옥을 자주 만난다. 용산고 건너편 후암동 언덕길에는 이곳이 마치 일본의 어느 마을이 아닌가 느껴질 정도로 주변에 십여 채의 일식 주택이 늘어서 있다. 숙대입구역 동편 먹자골목에는 오래된 일본식 가옥과 50년의 전통을 지닌 부대찌개 집들이 여전히 공존한다. 주변에 오랜 세월 동안 존재했던 일본군 사령부와 주한 미군이 남긴 이중 식민의 흔적이리라. 이제 한 해, 한 해가 다르다고 느낄 만큼 이런 적산가옥이 점점 사라져 간다. 숙명여대 올라가는 길의 청파동 골목 한 귀퉁이에는 ‘식민지역사박물관’이 있다. 서울에서도 전통적인 골목이 많기로 유명한 청파동 골목 안에 있는 이 박물관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아직 그다지 없는 듯하다. 지난해 여름 개관식을 한 신생 박물관이다. 이곳은 ‘기억과 성찰’을 주제로 식민의 상흔과 항일투쟁의 역사를 되짚는다. 건물 2층 86평의 면적이 일제 침략사, 독립운동사를 아우르는 전시 공간으로 채워졌다. 한국 근대문학 공부를 하면 할수록 이 땅의 문학과 역사, 제도에 촘촘히 스며든 일본(문화)의 영향을 새삼 생생하게 절감한다. 어찌 문학 연구에 한정되는 일이겠는가. 정치, 경제, 건축, 교통, 법률, 교육, 더 나아가 이 땅의 근현대 자체가 일본의 그림자와 이식(移植)에서 전혀 자유롭지 않다. 생각해 보면 일본에 대한 극복과 저항 역시도 ‘네 칼로 너를 치리라’는 문제의식 아래 일본에서 배운 지식과 무관하다고 할 수 없겠다. 이른바 ‘식민지 근대화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