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기사
문재인 대통령 식민지역사박물관 개관 축사
“오직 국민의 힘으로 세워졌습니다. 정부가 하지 못한 일을 먼저 나서서 해 주셨습니다.”
“남기지 못한, 그러나 남겨야 하는 이야기”… 식민지역사박물관과 나, 김승은 학예실장 인터뷰
시민들의 기부·기증으로 건립된 ‘시민의 박물관’ 식민지역사박물관 김승은 “단순한 전시품 아닌 하나하나가 다 사연있는 역사의 증거” “강제징용·위안부 피해자 한 맺힌 소송을 재판거래 대상으로… 황망” [법률방송뉴스] 경술국치일인 그제(29일) 민족문제연구소가 서울 용산에 식민지역사박물관을 개관했다는 소식 전해드렸는데요. 박물관 설립에 실무적으로 산파 역할을 한 김승은 민족문제연구소 학예실장을 만나 이런저런 세상 얘기들을 들어 봤습니다. ‘LAW 투데이 인터뷰’, 신새아 기자입니다. [리포트] 지난 2011년 박물관 건립위원회가 성립되고 그동안 1만명 넘는 시민들이 보내준 성금. 그리고 시민들의 자료 기부와 기증으로 건립된 식민지역사박물관. 어느 하나 사연 없는 자료, 의미 없는 전시물은 없다는 게 김승은 민족문제연구소 학예실장의 말입니다. [김승은 학예실장 / 민족문제연구소] “강제동원 피해자가 자신한테는 한 장 밖에는 남지 않은 사진, 유일하게 남겨진 엽서 한 장, 이런 것들도 기증을 해주셨고 이렇게 하나하나 이 자료 안에 너무 많은 역사가…“ 일본 제국주의 식민지라는 엄혹한 시절, 친일과 항일. 같은 시대, 서로 다른 길을 살다 간 삶들을 그대로 보여주고 싶었다는 김승은 학예실장. [김승은 학예실장 / 민족문제연구소] “식민지역사박물관은 우리가 일제 강점기에 겪었던 다양한 삶 속에서 친일과 항일이라고 하는 두 삶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그런…” 사연 없는 전시품이 없다고 했는데 헤지고 낡아 별 거 아닌 것처럼 보이는 이 깃발도 임신 8개월에 남편이 전장에 끌려나간 식민지 조선 여인의 한이 켜켜이 서린 깃발입니다. [김승은 학예실장 / 민족문제연구소] “저 깃발을 ‘청춘만장’이라고 불렀대요.
[법정르포] 역사가 법정 위에 섰다··· 배심원들이 외면한 이승만의 ‘명예’
역사가 법정에 섰다. 처음부터 성립되지 않는 재판이었다. 역사의 문법과 법의 문법은 다르기 때문이다. 김민철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김민철 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는 일례로 2004년 반민족처벌법 제정 당시를 설명한다. “역사학자들은 처벌 대상을 ‘한일병합의 공으로 작위를 받은 자’로 정하며, 작위 자체가 병합의 공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법률가들은 병합이 되면서 그들이 무슨 공을 세웠는지 증명하라고 하더라.” 역사와 법의 영역은 엄연히 다르다. 그럼에도 역사를 법 앞에 세운 이는 다름 아닌 정치였다. 이승만 명예훼손 혐의로 다큐멘터리 ‘백년전쟁’의 제작진 김지영 감독과 최진아 PD는 법정에 섰다. 2012년에 나온 ‘백년전쟁’은 한국 근현대사 100년을 독립운동가, 친일파와 그 후손들의 전쟁으로 보고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의 어두운 과오를 다뤘다. ‘백년전쟁’은 뉴라이트의 역사왜곡에 대응하기 위해 제작됐다. 1995년경부터 시작된 이승만 바로세우기 운동에 이어 2000년 뉴라이트가 친일 인사 찬양 운동을 시작했다. 그 중심에 이승만이 있었다. ‘백년전쟁’은 건국의 아버지, 독립운동가로 알려진 이승만의 친일행적과 비위행위를 드러냄으로써 그를 역사의 법정에 세웠다. 해당 영상은 유튜브 합계 200만 조회 수를 기록하며 뜨거운 반응을 얻었다. 이에 이승만의 양자 이인수 박사 등 유족들은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2013년 제작진을 검찰에 고소했다. 검찰은 이승만의 미국 박사학위 취득 과정, 친일 활동과 독립성금 전용 의혹 등에 대해서는 불기소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영상에서 이승만이 1920년 샌프란시스코에서 ‘맨 법(Mann Act·성매매, 음란행위 기타 부도덕한 목적으로 가족이 아닌 여성과 주 경계를 넘는 행위를 처벌하던
식민지역사박물관 개관 축하영상
<박원순 서울특별시 시장> “역사정의실현의 길에 기꺼이 동참해 주신 시민 여러분께 경의를 표합니다.” <조희연 서울특별시 교육감> “시민과 학생들이 함께 참여하고, 인권과 평화를 실현해가는 박물관이 되길”
시민과 독립운동가 후손이 만든 ‘아픈 역사를 배우는 박물관’ 식민지역사박물관 용산에 개관
국내에서 처음으로 일제강점기 역사에만 초점을 맞춘 식민지역사박물관이 경술국치 108주년인 29일 서울 용산에서 문을 열었다. 2011년 2월 박물관 건립위원회가 출범한 지 약 8년 만의 개관으로,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기부와 시민들의 모금으로 건립된 민간 박물관이다. 박물관은 민족문제연구소와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등 시민단체와 학계 등이 중심이 돼 민간 차원에서 추진돼 왔다. 송기인 초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장이 재직 2년간 받은 급여 2억원을 전액 기탁한 것을 계기로 본격적인 건립이 추진됐다. 이후 초등학생들부터 학계, 시민사회 인사들까지 1만여명의 시민이 건립운동에 참여해 16억5000만원의 건립 기금을 조성했다. 독립운동가 후손과 강제동원 피해자 유족들도 자료와 기금을 보내는 등 건립운동에 동참했다. 일본의 과거사 관련 시민단체들과 학계 인사들 역시 1억원이 넘는 기금을 보냈다. 박물관에 전시된 상당수 자료들은 독립운동가 후손 등 시민들이 기증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지낸 조경한 선생의 외손 심정섭 선생이 68차례에 걸쳐 6000점이 넘는 자료를 보내 왔고, 강제동원 피해자 유족들도 희생자들의 한이 서려있는 유품을 박물관에 보냈다. 박물관에는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인명사전’ 편찬 과정에서 축적한 자료 등을 포함해 총 7만여점의 자료와 5만여권의 도서가 수집됐다. 이 중 엄선한 일부가 박물관에 전시되고 나머지는 보관해 관리한다. 박물관의 상설 전시관은 일제의 한반도 침략부터 식민 통치와 수탈, 친일파와 항일 운동, 해방에 이르기까지 일제강점기 역사를 담은 총 4부의 전시로 구성됐다. 강제병합 당시 순종의 칙유와 데라우치 통감의 유고, 3·1독립선언서 초판본, 을사오적 등 친일파의 훈장과 유품 등
‘이승만 명예훼손’ 다큐 감독·프로듀서, 국민참여재판서 무죄
배심원단, 무죄 판단…재판장 “배심원단 3시간 가까이 열띤 토론” (서울=연합뉴스) 송진원 기자 = 이승만 전 대통령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기소된 다큐멘터리 ‘백년전쟁’의 감독과 프로듀서가 국민참여재판으로 진행된 1심에서 모두 무죄를 받았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3부(김태업 부장판사)는 29일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된 김모씨와 최모씨 등 2명에게 각각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장은 “배심원의 평결 결과를 바탕으로 이같이 선고한다”고 설명했다. 이들에 대한 국민참여재판 기일은 27일∼28일 이틀에 걸쳐 진행됐다. 배심원단의 평의가 길어져 이날 새벽에야 결과가 나왔다. 김씨에 대해선 배심원 9명 중 8명이, 최씨에 대해선 7명이 무죄 평결을 내렸다. 재판장은 “배심원단이 3시간 넘게 열띤 토론을 하신 것으로 알고 있다. 그만큼 치열한 의견 교환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백년전쟁’은 민족문제연구소가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 등을 비판적 관점에서 다룬 다큐멘터리다. 이승만 전 대통령에 대해선 기회주의자며 악질 친일파로 사적 권력을 채우려고 독립운동을 했다는 내용 등이 담겨 있다. 미국 지역 신문 보도나 중앙정보국(CIA) 문서 등을 근거로 삼았다. 2012년 말 시사회로 처음 다큐멘터리가 공개된 이후 보수성향 언론과 학계에서 내용을 강력히 비판했고, 진보진영이 반론을 펼치면서 격렬한 논쟁이 일어났다. 이 전 대통령의 아들 이인수 박사 등 유족들은 이듬해 5월 제작자들을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검찰에 고발했다. 4년 6개월 가까이 수사를 이어온 검찰은 이 전 대통령이 1920년 샌프란시스코에서 ‘맨법(Mann Act·성매매나 음란행위 등 부도덕한 목적으로 여성과 주 경계를 넘는 행위를 처벌하던 법)’을 위반해 체포·기소됐다는 부분이
[식민지역사박물관 개관 릴레이 응원영상] – 14. 서승 대표
식민지역사박물관 개관 릴레이 14번째! 서승 일본 건립후원회 공동대표 재일교포 2세인 서승 대표는 서울대 재학시설 ‘재일교포학생 학원침투 간첩단 사건’으로 1심에서 사형, 2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습니다. 당시 박정희 후보와 맞서던 김대중 후보에게 북한의 선거자금을 전하려 했다는 혐의가 씌워졌고 보안사(지금의 기무사)는 그에게 끔찍한 고문을 가했습니다. 허위자백으로 다른 친구들이 피해를 볼까봐 고문실에 있던 난로 기름을 몸에 끼얹어 분신자살을 기도해 전신 화상을 입었습니다. 일본 리쓰메이칸대학 교수인 서승 대표는 동아시아 평화·인권운동가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으며 현재 식민지역사박물관 일본 건립후원회 공동대표를 맡고 있습니다. ‘친일인명사전’ 발간의 기적을 이어 2018년 8월 29일, 다시 시민들의 힘으로 ‘식민지역사박물관’이 문을 엽니다.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모금 참여: https://www.minjok.or.kr/archives/97796 [식민지역사박물관 개관 릴레이 응원영상] ☞응원영상 – 1. 최태성 (역사강사) ☞응원영상 – 2. 청소년들 ☞응원영상 – 3. 김태곤 조이시티 CTO ☞응원영상 – 4. 박주민 의원과 김광진·정청래 전 의원 ☞응원영상 – 5. 장항준 영화감독 ☞응원영상 – 6. 전국역사교사모임 ☞응원영상 – 7. 김지영 영화감독 ☞응원영상 – 8. 독립운동가 후손 ☞응원영상 – 9. 최원정 아나운서 ☞응원영상 – 10. 배동록선생 ☞응원영상 – 11. 임순례 영화감독 ☞응원영상 – 12. 박원순 서울시장 ☞응원영상 – 13. 심정섭 선생
[보도자료] 국치 108주년 맞아 ‘식민지역사박물관’개관
[다운로드] [보도자료] 국치 108주년 맞아 ‘식민지역사박물관’ 개관 -국내 최초의 일제강점기 전문 역사박물관- 오랜 준비 끝에 식민지역사박물관이 108주년 국치일인 8월 29일 드디어 문을 연다. 2011년 2월 건립위원회(위원장 이이화)가 출범한 지 8년만이다. 식민지역사박물관은 전시와 교육을 통해, 1875년 운요호 사건에서부터 해방에 이르기까지 70년간에 걸친 일제침탈과 그에 부역한 친일파의 죄상을 고발하는 한편, 세계사상 유례없이 치열하고 지속적이었던 항일투쟁의 빛나는 역사를 알려나가는 사업을 전개할 예정이다. 또 식민지배의 부정적 유산인 일제잔재와 분단독재체제의 폐해와 이를 극복하기 위한 과거사청산운동의 과정도 생동감 있게 전달할 계획이다.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은 민족문제연구소(이사장 함세웅)와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상임대표 이희자) 등 시민단체와 독립운동계 학계가 중심이 되어 순수하게 민간에서 추진되어 왔다. 송기인 초대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위원장이 2년간의 급여 2억 원 전액을 통장 째로 기탁한 것이 본격적으로 건립에 착수한 결정적 계기가 됐다. 이후 초등학생들의 개미모금에서 사회 지도층의 기부에 이르기까지 성금이 이어졌으며, 개관을 앞둔 현재 4,500여 명의 발기인을 비롯해 1만여 명이 건립운동에 참여해 약 16억 5천만 원의 기금이 조성됐다. 강만길 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장, 전기호 일제강점하강제동원진상규명위원장, 윤경로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장 등이 큰 액수의 성금을 기탁하였으며 고인이 된 김창국 전 친일재산조사위원장도 생전에 여러 차례 성금을 보내왔다. 한상권 덕성여대 총장직무대행과 양보경 성신여대 총장 부부는 1차 성금에 이어 첫 급여 전액을 “역사적폐 청산에 써 달라”며 전달해 왔다. 독립운동가 후손들과 강제동원피해자 유족들이 대거 건립운동에 동참하였으며, 미주와 중국 일본 각지의 동포사회도 모금에
친일부역·독재비호 사법부 수장들, ‘또 하나의 가족’
을사5적은 모두 판사 출신 오는 29일이면 일제(日帝)에 나라를 빼앗긴 ‘경술국치(庚戌國恥)’ 108주년이 된다. 나라를 ‘완전히’ 빼앗긴 것은 1910년 8월 29일이지만, 1905년 11월 17일 일제가 이른바 ‘보호’라는 단어를 삽입한 이름의 ‘을사(乙巳)조약’을 체결할 때부터 이미 국권을 상실했다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일제가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글자 그대로 ‘통치하고 감독’하는 통감(統監)을 파견함으로써 나라 안팎을 완벽하게 장악했기 때문이다. 1) 제국주의 일본에 나라를 팔아먹은 ‘을사5적’은 모두 판사 출신들이었다. 학부대신 이완용(李完用: 1858.07.17.-1926.02.12.)은 전라북도와 평안남도 재판소 판사 출신이었고, 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 1858.12.07.-1916.06.20.)은 평리원(平理院: 1899년 5월부터 1907년 12월까지 존치되었던 최고법원; 현재의 대법원) 재판장서리, 군부대신 이근택(李根澤: 1865.09.30.-1919.12.16.)은 평리원 재판장(현재의 대법원장), 내부대신 이지용(李址鎔: 1870.10.23.-1928.06.28.)은 평리원 재판장과 법부대신, 농상공부대신 권중현(權重顯: 1854.11.27.-1934.03.19.)도 평리원 재판장서리를 각각 지냈다. 을사5적 중 이완용을 제외한 나머지 네 명 모두가 요즘의 대법원격인 평리원의 재판장 혹은 재판장 서리를 지낸 것이다. 이들은 역시 판사 출신인 참정대신 한규설(韓圭卨: 1856-1930) 등의 반대에도 아랑곳 않고 을사조약에 찬성함으로써 스스로 매국노의 길을 택한 것이다. (참고: 사건으로 본 법조 100년; 김이조 지음; 2005) 2) 그로부터 100여 년, 양승태(梁承泰·70) 대법원장 시절 대법원과 법원행정처가 저지른 헌법과 사법질서 파괴 행위는 그 끝이 어딜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우리를 분노하게 만들고 있다. 법조인의 역할과 역사적 사명이 가진 무게를 새삼 되짚어 보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3) 세상에서 어떤 일을 하려 해도 세 가지
이승만 ‘1919년 건국’ 주창, 한국당 왜 ‘건국절’ 집착?
도진순 교수 “이승만·김구 주장 왜곡 전복돼 개탄… 1919년 임시정부 법통 이어받았다는 이승만의 기억” 지난 15일 광복절 73주년을 앞두고 일부 자유한국당 의원과 보수진영에선 ‘건국 70주년’을 주장하며 또 해묵은 이념 논쟁을 시도했다. 하지만 이들이 그토록 치켜세우는 이승만 전 대통령마저 ‘1919년 건국’의 창시자이자 주도자였다는 역사학계 발표가 계속 나오면서 1948년 8월15일 ‘건국절’ 제정 요구는 더욱 무색해졌다. 지난 22일 한국근현대사학회에서 주최로 동국대 서울캠퍼스 법학관에서 열린 ‘독립운동, 그 기록과 기념의 역사’ 학술회의에선 최근 언론 보도로 주목을 받았던 도진순 창원대 사학과 교수(60)의 주제 발표가 있었다. 도 교수는 이날 발표문에서 “나는 국정교과서도 반대했고, 1948년 8월15일 건국절 지정에도 전혀 지지한 바 없다”면서 “그간의 ‘건국절’ 등 논쟁에 일절 참여하지 않은 것은 논쟁이 이념적 단죄에 치우쳐 있었고, 이승만과 김구의 주장이 왜곡·전복되는 개탄스러운 상황이었기 때문”이라고 술회했다. 이날 도 교수 주제발표의 요지는 이승만 전 대통령이야말로 ‘1919년 건국, 1948년 정부수립’이라는 기억의 창시자이자 주도자였다는 데 있다. 1948년 당시 이승만과 김구의 정치행로는 적대적으로 분리되기 시작하는데 이승만은 5·10 총선을 주도하고 5월31일 국회의장으로서 국회 개회 식사를 발표했다. 이 개회 식사에서 이승만 의장은 “1919년 3월1일에 우리 13도 대표들이 서울에 모여 국민대회를 열고 대한독립민주국가임을 세계에 공포하고 임시정부를 건설하여 민주주의의 기초를 세웠다”고 말한다. “이승만이야말로 1919년 건국론 창시자이자 주도자” 이승만의 이런 입장은 그가 주도한 제헌헌법 전문에 그대로 반영됐다. 제헌헌법 전문에는 “유구한 역사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