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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불교계 이완용’의 정체… 이것까지 일본에 넘기려 했다
[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이회광 숭유억불은 조선시대의 불교 탄압을 설명하는 용어다. 일제는 한국 침략 과정에서 승려들의 친일을 이끌어내기 위해 이 용어를 활용했다. 세종의 아들인 문종이 임금일 때인 1451년부터 승려의 도성 출입이 금지됐다. 숭유억불의 상징이 된 이 조치가 해제된 것은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한 뒤였다. 1894년에 동학혁명 진압을 빌미로 조선에 무단 진입한 일본군이 그해 7월 23일(음6.21) 대궐을 점령하고 조선 조정을 손아귀에 넣은 이후의 일이다. 음력으로 고종 32년 3월 29일자(양1895.4.23) <승정원일기>는 숭유억불의 상징적 조치가 해제되는 역사적 장면을 보여준다. 이날 총리대신 김홍집이 “지금부터 승도의 입성 금지를 풀어주기를 청합니다. 어떠십니까?”라고 묻자 고종이 재가했다고 일기는 알려준다. 일기에 따르면, 그날은 낮에 비가 오다가 밤에 맑아졌다. 조선왕조의 억압을 받다가 왕조 막판에 입성금지 해제를 받은 불교계의 처지와 맞아떨어지는 날씨 변화다. 그런데 이 조치의 배후에 일본 승려 사노 젠레이가 있었다. 일제강점기의 친일 역사학자 이능화는 1918년에 펴낸 <조선불교통사>에서 사노 젠레이가 김홍집에게 건의한 내용이 그렇게 실현됐다고 말했다. 한국 불교계의 역량이 상당했기에 고종이 건의를 받아들인 측면도 컸지만, 일본의 간섭을 받는 상황에서 일본 승려의 역할에 힘입어 입성 금지가 해제됐다는 엄연한 현실을 외면하기는 힘들다.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제3-3권은 이렇게 말한다. “한말에 조선불교가 천대당하고 숭려들이 천민 취급 당하고 있던 조선의 현실을 간파한 일본이 1876년 개항 이후 조선에 압력을 넣어 조선불교계의 염원인 도성 출입금지를 해금시키면서
[성명] 일본 정부의 사도광산 세계유산 등재 시도에 대한 민족문제연구소 성명
[성명] [다운로드] <일본 정부의 사도광산 세계유산 등재 시도에 대한 민족문제연구소 성명> 일본 정부는 조선인 강제노동의 역사를 인정하라! 한국 정부는 대일 굴종외교를 버리고 일본 정부에 강력히 대응하라! 유네스코의 자문기구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이코모스)가 일제강점기에 1500여 명의 조선인이 강제동원 되어 강제노동을 당한 사도광산의 세계유산 등재와 관련하여 ‘정보조회’를 통보하여 ‘보류’를 권고한 것으로 알려졌다. 우리는 한일 양국 정부에 다음과 같이 요구한다. 일본 정부는 조선인 강제노동의 역사를 숨기지 말고 역사적 사실을 인정하라. 한국 정부는 대일 굴종외교를 버리고 일본 정부에 강력히 대응하라. 특히 우리는 이코모스가 일본 정부에 추가적인 권고로 “설명과 전시에 대해 메이지 이후를 포함한 전체 역사를 다루도록 배려할 것을 요구했다.”라는 점에 주목한다. 2015년 메이지 일본 산업혁명 유산의 세계유산 등재 당시 일본 정부는 조선인 강제노동의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고 희생자를 기억하기 위한 적절한 조치를 하겠다고 국제사회에 약속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징용은 합법적’이었다며 강제노동을 ‘조선반도 출신 노동자 문제’라고 왜곡하는 등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2021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일본 정부에 ‘강한 유감’을 밝히고 약속의 이행을 촉구하는 결의까지 채택했지만, 일본 정부는 이마저 제대로 지키지 않았다. 오히려 윤석열 정부가 대일 굴종외교로 이 문제에 대해 손을 놓고 있는 사이에 일본 정부의 역사 왜곡은 더욱 심각해진 상황이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일본의 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와 연대하여 메이지 일본 산업혁명 유산 문제에 대해 가이드북 발간, 홈페이지 제작, 현지조사를 통한 모니터링,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대응
[한겨레] 반민특위 유족·시민들 75년 만에 “경찰청장 공식사과” 요구
이학영 국회부의장 “22대 국회서 꼭 지원방안 찾겠다” 김상덕 반민특위 위원장 아들, 이승만 대통령 비화 소개 6월6일은 현충일이다. 그러나 이날이 친일파 척결을 위해 대한민국 제헌국회에 설치됐던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강제해산된 날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반민특위를 기억하는 시민 300여명과 유족들이 반민특위 강제해산 이후 75년 만에 처음으로 “경찰청장 공식사과” 등 사죄와 명예회복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서울 도심에서 열었다. 구순이 된 고 김상덕 반민특위 위원장의 아들이 참석해 비화를 소개했고, 현직 국회의장도 “국회에서 지원방안을 찾겠다”는 발언으로 무게를 실어주었다. 6일 오후 서울 중구 저동 명동성당 가톨릭회관 1층 강당에서 열린 ‘반민특위 사죄촉구 기자회견’은 유족이 중심이 된 반민특위·국회프락치 기억연대가 주최하고 민족문제연구소, 항일독립선열선양단체연합 우사김규식선생기념사업회, 시민모임 독립, 청년백범등이 후원했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직후인 1948년 9월 제헌국회 의원들의 압도적 지지로 통과된 반민족행위자처벌법(반민법)에 따라 10월 국회 내 구성된 반민특위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나 그 가족을 악의로 살상 박해한 자 또는 이를 지휘한 자는 5년 이상 무기징역과 함께 그 재산의 전부 혹은 일부를 몰수하도록 했으나 친일파와 이승만 대통령의 반감을 샀다. 반민특위가 활동을 중단하지 않자 반민법 제정에 적극적이던 소장파 의원들이 국가보안법 혐의로 구속되는데, 급기야는 의원들을 남로당 간첩혐의로 모는 ‘국회 프락치 사건’까지 벌어졌다. 그리고 1949년 6월6일 아침, 서울 중부경찰서(당시 서장 윤기병) 경찰들이 현재의 명동 롯데백화점 맞은편 스탠포드 호텔 자리(서울 남대문로 84)에 있던 반민특위 사무실을 습격해 반민특위 특별경찰대원(특경대)들을 무장해제시킨 뒤
[오마이뉴스] “친일 반민족·반민주행위자를 현충원에서 이장하라”
대전지역단체들, 대전현충원에서 ‘국립묘지법 개정’ 촉구 시민대회 개최 “독립유공자 통탄한다. 친일파의 무덤을 국립묘지에서 이장하라” “민간인 학살자가 국립묘지가 웬 말이냐 당장 이장하라” “국립묘지법 개정으로 민족정기 바로 세워라” 제69회 현충일인 6일 오전. 대전 유성구 국립대전현충원 입구가 친일파와 군사쿠데타 주역 이장을 촉구하는 시민단체 회원들의 목소리로 소란해졌다. 민족문제연구소대전지역위원회, 평화재향군인회, 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대전지역모임, 세상을 바꾸는 대전민중의힘 등 대전지역 시민사회단체 및 진보정당 등은 이날 이 자리에서 ‘국립묘지법 개정 촉구 시민대회’를 개최했다. 이들은 이른 아침부터 현충일을 맞아 대전현충원을 찾은 추모객을 향해 친일반민족행위자와 5.18민주항쟁 가해자 등 현충원에서 강제 이장시킬 수 있도록 국립묘지법개정에 관심을 가져달라고 호소했다. 이들은 현충원 입구 보도에 대전현충원에 안장되어 있는 김창룡, 유학성, 백선엽 등 반민족, 반민주행위자들의 이름과 사진, 행적 등이 담긴 판넬을 전시하면서 “이러한 자들로 인해 애국지사와 선국선열들이 모셔져 있는 현충원을 더 이상 더럽혀서는 안 된다”며 신속한 국립묘지법개정을 촉구했다. 또한 보도블록 위에는 친일행위자 37명, 군사반란 가담자 22명, 민간인학살 관련자 8명, 반헌법행위자 7명 등 대전현충원에 안장되어 있는 74명의 이장 대상 반민족행위자의 이름이 적힌 현수막을 깔아 놓고 지나가는 추모객이 이를 밟고 지나가도록 하기도 했다. 이날 규탄발언에 나선 홍경표 민족문제연구소대전지역위원장은 “참으로 침통한 심정이다. 20여년이 넘도록 이곳 대전현충원에 안장되어서는 안 될 부적격자들의 이장을 외치고 있지만 아직까지도 국립묘지법개정은 되지 않고 있다”며 “이런 적폐를 청산해 달라고 21대 총선에서 야당에 180여 석을 몰아줬지만, 여전히 친일 반민족행위자들은
[역발상 시즌3] 청일전쟁 130년,러일전쟁 120년 특별 시리즈 1부 “청일전쟁은 왜 일어났을까?”
☞ (06.04) ‘역발상’ 시즌 3: 청일전쟁 130년,러일전쟁 120년 특별 시리즈 1부 “청일전쟁은 왜 일어났을까?” 오늘의 이야기 : 청일전쟁은 왜 일어났을까? 초대손님 : 서민교 교수 Q. 1894년에 일어난 청일전쟁을 이해하기 위해선 그 전에(19세기 후반) 조선과 동아시아(중국/일본)에서 무슨 일들이 벌어졌는가를 살펴봐야 하지 않을까요? -갑신정변 후 10년간 군비를 강화하는 일본 Q. 메이지 유신 후 일본은 군국주의 국가,전쟁을 통해 성장하는 국가로 가게 되는데요. 당시 정한론처럼 그들은 왜 조선(한반도)를 침략하려 했을까요? Q. 청일전쟁의 발발은 동학농민혁명으로 시작되는거죠? 어떻게 시작되었나요? -동학농민군의 희생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된 전사자들 Q. 청일전쟁은 어떻게 전개되었나요? -일본이 1894년(고종 31) 조선에서 벌인 첫 번째 군사 행동은 6월 21일(음력)의 경복궁 점령 어떻게 한 나라의 궁궐이 이렇게 허무하게 점령되었을까요? -우리 땅에서 벌어진 외국군대의 전투들 > 풍도해전과 성환전투,평양전투 -중국 요동반도에서 벌어진 전투들 Q. 일본의 승리로 끝난 청일전쟁의 결과는 어떠했나요? -시모노세키 조약 -변화된 동아시아 질서 -막대한 배상금으로 군사력을 키우는 일본 ※지난 방송 – 팟캐스트 역발상 시즌3 ☞ (05.28) ‘역발상’ 시즌 3: 영화 주제가로 보는 대중가요의 역사 8부_ “1990년대 이후” ☞ (05.21) ‘역발상’ 시즌 3: 영화 주제가로 보는 대중가요의 역사 7부_ “1980년대” ☞ (05.14) ‘역발상’ 시즌 3: 영화 주제가로 보는 대중가요의 역사 6부_ “1970년대” ☞ (05.07) ‘역발상’ 시즌 3: 영화 주제가로 보는 대중가요의 역사 5부_ “1960년대 (2)” ☞ (04.30) ‘역발상’ 시즌 3: 영화 주제가로 보는 대중가요의
[오마이뉴스] 농지개혁이 이승만의 공적? 극우 세력의 괴이한 결론
[전강수의 경세제민] 농지개혁법의 실질적 공로자들…조봉암, 강정택, 강진국 요즘 1950년에 단행된 농지개혁을 상찬하는 극우 인사들이 적지 않게 보인다. 2010년대 후반 뉴라이트의 대표적인 이론가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가 농지개혁 상찬의 물꼬를 튼 이후, 그의 뒤를 잇는 목소리가 간간이 이어지더니 윤석열 정권 출범 후에는 그 목소리가 급격히 강해져서, 최근에는 한동훈 전 법무부 장관까지 그 대열에 가세했다. 지난 2월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 <건국전쟁>에서는 농지개혁이 대한민국 경제발전의 발판이 됐음을 강조하며 농지개혁 상찬에 상당한 분량을 할애했다. 이런 움직임을 지켜보면서 참 기이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유상 방식이기는 했지만, 해방 직후 대표적 자산가였던 지주들의 땅을 강제로 몰수해 생산자인 농민들에게 분배한 엄청난 개혁을 보수 인사들이 나서서 지지하니 말이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토지와 부동산은 대표적인 자산이고 그 분배는 극도로 불평등하다. 현재 한국 사회의 최대 질곡이라 일컬어지는 불평등과 양극화는 여기서 기인하는 바가 크다. 만일 어떤 정치세력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50년대 농지개혁 방식으로 토지와 부동산을 유상몰수·유상분배하겠다고 한다면, 농지개혁을 상찬하던 인사들은 태도를 바꾸어 사생결단 반대할 것이다. 대표적 보수 논객으로 꼽히는 정규재는 지금 보수세력이 농지개혁을 상찬하는 데 대해 강력하게 비판한다. 그는 농지개혁을 ‘좌익적 대안’이라고 단정하고 한국의 보수세력이 그런 정책을 상찬하는 이유를 도무지 모르겠다고 탄식한다. 하여간 정규재는 일관성이라도 있다. 극우 인사들이 농지개혁 띄우는 이유 극우 인사들은 왜 좌익적 대안이라고까지 매도당하는 농지개혁을 애써 띄우는
[영상] 일본 ‘일어서라! 합창단’ 식민지역사박물관 방문’
☞ 쇼츠(Shorts): 일본 ‘일어서라! 합창단’ 식민지역사박물관 방문’
[브라보마이라이프] 할아버지의 친일을 사죄합니다
[기사원문] <2024-05-30> 브라보 마이 라이프☞ [카드뉴스] 할아버지의 친일을 사죄합니다 ·········<중략>········· “민족문제연구소 사무국장입니다. 선생님 글을 회보에 실어도 되겠습니까?” 가슴이 철렁했다. 그 말인즉 친일파 자손이라는 사실을 커밍아웃하라는 뜻이다. 내가 쓴 글 제목은 이러했다. ‘저는 친일파의 손자입니다. 역사와 민족 앞에 사죄드립니다.’ 2011년, 글쓰기를 배우기 시작한 내가 처음 받은 과제는 가족을 주제로 에세이 쓰기였다. 난 한 번도 뵌 적 없는 할아버지가 늘 궁금했다. 1890년대 일본 유학을 다녀와 대한제국 농상공부 관리를 하고, 나중에 군수까지 했다는 나의 할아버지. 무척 영특했다던 사진 속 그를 찾아 나섰다. 할아버지의 흔적을 발견한 건 도서관에서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친일인명사전을 꺼내 들었고 물음표는 느낌표가 됐다. 마음이 이상했다. 나라의 명운이 왔다 갔다 하던 때에 유학을 다녀왔다는 사실이 석연치 않다고는 생각했지만 설마 친일파이리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해방 후 친일파를 청산하지 않은 것이 역사의 치명적 약점이라며 누구보다 분개하던 내가 그 후손이라니…! 겨우 마음을 추스르고 첫 과제를 제출했다. 민족문제연구소에도 회원 가입하고 숙제를 갈무리해서 회원만 볼 수 있게 올렸다. 얼마 뒤 사무국장에게서 연락이 왔다. 나는 넌지시 가족회의를 열었다. 그리고 우린 가족의 치부를 드러내기로 결정했다. 세간은 잠시 난리가 났다. 포털 사이트 검색어 1위에 올랐고, 인터뷰 요청이 쇄도했다. 첫 과제를 내고 13년여가 흘러 일흔을 바라보고 있다. 그동안 치열하게 글을 배우고 또 썼다. 공저 포함 다섯 권 넘게 출간했고, 글쓰기
[오마이뉴스] 이승만 재평가? 그는 정말 반공을 잘했던 걸까
[좌파의 우파책 읽기] 연설집 <이승만 스피치 1948>를 읽어도 풀리지 않는 의문들 ‘우파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를 자주 궁금해하던 좌파의 정체성을 살려, 직접 우파 서적을 비판적으로 읽어보고자 합니다.[기자말] 최근 몇 년간 보수 진영의 ‘추앙’ 대상이 ‘경제의 박정희’에서 ‘건국의 이승만’으로 점점 옮겨가는 것 같다. 공무원, 언론사 직원 등을 동원했다는 논란은 있지만 100만 명 이상이 2월에 개봉한 〈건국전쟁〉을 관람했고, 이승만을 다룬 또 다른 영화 〈기적의 시작〉도 5월에 개봉했다. 윤석열 정부가 추진하는 독립유공자 공적 재평가를 두고는 ‘이승만을 위한 포석’이라는 예상이 나온다. 윤 대통령은 3.1절 기념식에서 “목숨을 걸고 치열하게 무장독립운동을 벌인 투사들이 계셨고, 국제정치의 흐름을 꿰뚫어 보며 세계 각국에서 외교독립운동에 나선 선각자들도 있었다”고 했는데, 이는 이승만의 외교독립운동 재평가를 염두에 둔 것으로 해석된다. 올해 1월에는 국가보훈부가 32년 만에 처음으로 이승만을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기도 했다. 보수 진영을 중심으로 전방위적인 ‘이승만 재평가’가 시도되는 셈이다. 1948~1949년 이승만 연설을 모은 〈이승만 스피치 1948〉도 그런 흐름에 놓인 책이다. 올해 3월에 나온 이 책은, 서문이나 추천사 등에서 직접 이승만을 찬양하지는 않지만, “대한민국의 건국과 초기 발전 과정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펼쳤던 비전과 지도력을 재조명하고 그의 정치‧사회‧경제적 공로를 이해하는 데 보탬이 될 것”이라는 인터넷 서점의 책 소개에서 이승만을 바라보는 시각이 드러난다. 최근의 ‘이승만 재평가’에 의구심을 품고 있었기에 정말 이승만이 그렇게 대단한지를 한번 확인해보고 싶었다. 다른 사람의 해석이 아닌 이승만 본인의 말을 직접 듣고 판단하자는 생각으로 이 책을 집었다. 민주주의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