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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기사

[성명] 피해자들을 통한 속에 돌아가시게 만든 사법부, 법복을 벗어라

2018년 5월 29일 1921

피해자들을 통한 속에 돌아가시게 만든 사법부, 법복을 벗어라 지난 5월 25일 발표된 ‘대법원 사법행정권 남용의혹 관련 특별조사단’의 보고서를 통하여 헌법을 수호하고 법관의 독립을 지켜야 할 대법원이 오히려 헌법을 위반하고 청와대와 행정부와 담합하여 일제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정의에의 호소’를 무참하게 짓밟았음이 명확하게 드러났다. 특조단의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대법원은 상고법원을 설치하기 위하여 청와대에 대한 대응전략을 마련하는 차원에서 “개인별 맞춤형 접촉, 설득 방안”을 수립하고 이병기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의 최대 관심사가 “한일 우호관계의 복원”에 있다고 파악하면서 특히 “일제강제징용 피해자 손해배상청구사건(대법원 2013[보고서엔 20013으로 되어있음]다61381, 2013다67587)에 대하여 청구기각취지의 파기환송판결 기대할 것으로 예상”한다는 문건을 작성하였다. 이 문건에 따라 해당 재판부에 구체적으로 어떠한 압력이 행사되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이는 특정한 사건에 대한 판결을 청와대와의 정략적 흥정의 대상으로 삼았을 뿐만 아니라 “한일 우호관계의 복원”이라는 모호한 명분으로 일제강제동원 피해자들의 권리를 희생시켰음을 명확하게 한 것으로 통탄과 분노를 금치 못하게 한다. 이 문건이 언급하는 “일제강제징용 피해자 손해배상청구사건”이란 것은 해방 전 미쓰비시중공업과 일본제철(현 신일철주금)에 강제동원되어 강제노동을 당한 피해자들이 각각 2000년과 2005년에 한국법원에 제기한 사건을 말한다. 이 사건들에서 대법원은 획기적인 2012년 판결을 통하여 원고들의 손해배상청구권을 인정하고 사건을 고등법원으로 파기환송 했다. 이 판결에서 대법원은 무엇보다 “일제강점기 일본의 한반도 지배는 규범적인 관점에서 불법적인 강점”이라고 하고, 이 사건들에 선행하는 원고들의 청구를 기각한 일본법원의 판결들은 “일제강점기의 강제동원 자체를 불법이라고 보고 있는 대한민국

[보도자료] ‘박정희 혈서 조작’ 주장 정미홍 2심도 패소

2018년 5월 25일 2413

서울중앙지법 제2형사부 이수영 판사는 25일, 민족문제연구소에 대한 정보통신망법상 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된 정미홍씨의 항소를 기각했다. 이 판결로 지난 2017년 8월 31일에 형사소송 1심 재판부가 내린 ‘벌금 30만원에 처한다’는 원심이 유지되게 되었다. 이수영 판사는 피고 정미홍씨가 항소를 제기하였으나 항소이유서를 제출하지 않아서 재판부의 결정으로 항소를 기각한다고 밝혔다.   정미홍씨는 2013년, ‘들통난 민족문제연구소의 박정희 혈서기사 조작’이라는 글을 자신의 트위터로 인용하며 민족문제연구소가 박정희 혈서기사를 조작했다는 허위사실을 퍼뜨렸다. 이에 민족문제연구소는 정미홍씨에 대해 민·형사 소송을 제기하였고 민사소송은 2017년 1월에 대법원 판결이 확정되었다. 민사소송에 대한 대법원 판결로 민족문제연구소에 300만원을 배상한 정미홍씨는 이번 형사소송으로 벌금 30만원을 또 물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박정희 혈서기사를 조작했다는 정미홍씨 주장의 핵심근거는 ‘말바꾸기’였다. 박정희 혈서기사가 게재된 신문의 이름을 갑자기 바꾼 것이 조작의 결정적 증거라고 주장했다. 수년동안 ‘만주일보’에 박정희 혈서기사가 실렸다고 주장하던 민족문제연구소가 2009년에 갑자기 ‘만주일보가’가 아니라 ‘만주신문’이라고 말을 바꾸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정미홍씨의 주장은 아무런 근거가 없었다. 재판부는 정미홍씨에게 주장을 뒷받침할 증거를 제출하라고 요구했으나 정미홍씨는 끝내 증거를 제출하지 못했다. 결정적인 증거는 오히려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나왔다. 공식 출판된 책 ‘만화 박정희’(시대의 창, 2005)의 내용을 근거로 민족문제연구소가 2005년부터 ‘만주신문’을 언급한 사실이 증명되었다. 재판부는 이러한 증거를 받아들였고 정미홍씨의 주장이 근거 없는 허위사실이며 민족문제연구소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판단하였다.   정미홍씨가 항소이유서를 제출하지 못한 이유에 대해 민족문제연구소 법무담당 임선화

[팟캐스트] ‘내역사’ 시즌 2: “역사의 심판, 정의봉과 박기서”

2018년 5월 24일 1165

[바로듣기] ☞ (5.24) ‘내역사’ 시즌2: 비하인드히스토리“역사의 심판, 정의봉과 박기서” ☞ (5.22) ‘내역사’ 시즌2: 역전다방“조선공산당 2편: 강달영과 6.10만세운동” ☞ (5.17) ‘내역사’ 시즌2: 미식가“망국의 굴욕 헌상품” ☞ (5.15) ‘내역사’ 시즌2: 역전다방” “조선공산당 1편_조선공산당은 어떻게 만들어졌나?” ☞ (5.10) ‘내역사’ 시즌2: 비하인드 히스토리 “금기의 70년, 제주 4.3” ☞ (5.08) ‘내역사’ 시즌2: 역전다방 “최초의 비밀결사 신민회 2편_데라우치 암살미수 사건” ☞ (5.03) ‘내역사’ 시즌2: 미식가 경복궁 수난사 – ‘조선물산공진회’ ☞ (5.01) ‘내역사’ 시즌2: 역전다방 “최초의 비밀결사 신민회 1편_입헌공화국을 꿈꾸다” ☞ (4.26) ‘내역사’ 시즌2: 비하인드 히스토리 “친일파가 그린 충무공 표준영정” ☞ (4.19) ‘내역사’ 시즌2: 미식가(미리 식민지역사박물관에 가다)2회 “파이팅은 일제 잔재인가” ☞ (4.17) ‘내역사’ 시즌2: 역전다방 3회 임시정부와 3.1혁명 3편 – 임시정부는 어떤 나라를 세우려고 했나?” ☞ (4.12) ‘내역사’ 시즌2: 비하인드히스토리 “경희대학교의 뿌리 신흥무관학교??” ☞ (4.10) ‘내역사’ 시즌2: 역전다방 2회 임시정부와 3.1혁명 2편 – 3.1혁명의 이름없는 영웅들” ☞ (4.05) ‘내역사’ 시즌2: 미식가(미리 식민지역사박물관에 가다)1회 식목일의 기원 ☞ (4.03) ‘내역사’ 시즌2: 역전다방 1회 임시정부와 3.1혁명 1편 – “왜 3.1운동이 아니라 3.1혁명인가” [팟캐스트] 내일을 여는 역사 시즌 2 “우리 역사의 뿌리가 친일독재 세력에 의해 흔들리고 훼손되었습니다. 우리가 지난 겨울 촛불을 들고 싸운 상대는 과연 누구였을까요. 역사적폐의 주범들의 실체와 이들이 저지른 역사범죄의 동기를 파헤쳐보고자 합니다.”

[단독] MB정권, 친일파 청산 방해하려 국정원 동원

2018년 5월 18일 10653

정권 비판 인사 아닌 ‘친일 과거사 청산 방해’ 왜?…어버이연합 시위도 지원 이명박 정부 시절 국가정보원이 ‘친일인명사전’ 발간을 주도한 민족문제연구소와 임헌영 소장을 비판하는 사이버 심리전을 벌인 사실이 파악됐다. 특히 이같은 공작에는 원세훈 전 원장이 직접 관여한 것으로 밝혀졌다. 국정원은 최근 국회 정보위원회 소속 위원들에게 7개 추가 의혹 사건에 대한 감찰 결과의 일부를 보고하면서 이같이 밝혔다. 국정원이 당시 야당 정치인이나, 정권 비판 문화예술인, 시민단체 인사 등을 넘어 ‘친일 과거사 청산’ 작업 자체에 대해 방해 공작을 했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확인된 것은 처음이다. 국정원은 지난해 12월 개혁발전위원회 활동 종료 이후 자체적으로 △간첩증거 조작사건 수사방해, △2002년 총선 자금지원·선거개입, △김대중 정부 진보 문화계 지원·보수 차별, △노무현 정부 진보 문화계 지원·보수 차별, △4대강 사업 민간인 사찰, △노조파괴 공작 관여, △다큐멘터리 <백년전쟁> 관련 부당 개입 등 7개 사안에 대해 감찰했다. <백년전쟁>은 이승만 전 대통령의 친일 행적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상물로, 민족문제연구소가 지난 2012년 11월 유튜브 등을 통해 공개했다. 국정원은 원 전 원장 시절의 국정원이 <백년전쟁>을 제작한 민족문제연구소에 대해 심리전단 활동을 했다고 보고 자체 조사를 벌여왔다. 그 가운데 2009년 벌였던 공작의 내용이 이번 조사 결과로 드러난 것이다. 국정원이 민족문제연구소에 대해 여론전을 시작한 것은 지난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인명사전을 발간하면서부터다. 친일인명사전 공개 사흘 후인 2009년 11월 11일, 국정원 심리전단은 민족문제연구소와 임헌영 소장을

[이만열칼럼] ‘판문점 선언’의 역사적 위치를 살핀다

2018년 5월 20일 1427

2018년 4월 27일 남북정상회담에서 채택한 ‘판문점 선언’은 한반도의 휴(정)전 상태를 종전 및 평화체제로 만들고, 20여 년 이상 끌어오던 핵 문제를 ‘완전한 비핵화’로 약속하며, 남북의 군사충돌을 예방하고 경제 사회 문화의 교류협력을 강화하자는 합의를 담았다. 이 선언이 실천되면 한반도는 물론 동북아지형에도 큰 변화를 가져올 것이며, 세계사적으로는 2차대전과 냉전체제의 산물이 마지막으로 청산되는 결과를 가져올 것으로 기대한다. 이 선언의 정확한 이름은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 통일을 위한 판문점 선언”이다. 이 선언은, 1948년 남북이 분단된 이래 두 정부가 무릎을 맞대고 합의하여 공동으로 발표한 최초의 선언인 ‘7·4 남북공동성명’(1972년)에서 기산하면 46년 만에 발표된 것이다. 그 뒤 한반도 문제 및 통일 문제와 관련하여, 남북은 독자적으로는 많은 성명을 발표하였으나 공동명의로 발표한 것은 ‘판문점 선언’까지 6개뿐이다. ‘판문점 선언’에 앞서 발표된 이 5개의 공동선언을 먼저 개괄적으로 소개하고, 그것이 역사적으로 ‘판문점 선언’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살펴보겠다. 1. ‘7·4남북공동성명’(1972.7.4) 분단 이후 남북이 최초로 합의하여 발표한 공동성명이다. 6·25 한국전쟁 이후 남북은 각각 상대방에 대해 적대정책을 쓰면서 통일문제를 논의하지 않았다. 1953년 휴전 이후 이승만은 북진멸공통일을 주장해 왔고 북은 적화통일노선을 추구해 왔다. 1961년 박정희의 군사쿠데타 이후도 마찬가지였다. 1969년 닉슨 독트린이 발표되고 미국의 아시아 정책에 변화가 왔다. 미국은 1971년 핑퐁외교로 중국과의 교류를 시작했고, 이듬해 2월에는 닉슨이 중국을 방문, ‘상하이 공동성명’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미·중 사이의 이 같은 해빙 무드와

절절한 인간애 토로한 ‘시인’ 문익환

2018년 5월 23일 1394

‘두 손바닥은 따뜻하다’, 탄생 100주년 기념 출간 (서울=연합뉴스) 임미나 기자 = “이게 누구 손이지/어두움 속에서 더듬더듬/손이 손을 잡는다/잡히는 손이 잡는 손을 믿는다/잡는 손이 잡히는 손을 믿는다/두 손바닥은 따뜻하다/인정이 오가며/마음이 마음을 믿는다/깜깜하던 마음들에 이슬 맺히며/내일이 밝아 온다” 민주화와 통일운동의 상징 문익환(1918∼1994) 목사가 쓴 시 ‘손바닥 믿음’ 전문이다. 만주 북간도에서 태어나 1955년부터 한국신학대학 교수이자 목사로 활동한 그는 1968년부터 구약성서를 번역하는 과정에서 본격적으로 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는 첫 시집 ‘새삼스런 하루’에 후기로 쓴 글에서 시인이 된 과정을 이렇게 설명했다. “문학작품 중의 문학작품이라는 구약성서를 어떻게 훌륭한 작품으로 옮겨 내느냐는 생각이 처음부터 나의 가슴을 무겁게 눌렀소. ‘특히 그 시들을 어떻게 하느냐?’ 처음에는 한국 시단을 총동원할 심산이었는데, 그것이 뜻대로 안 되더군요. 그러고 보니 나는 궁지에 몰리게 된 셈이었소.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내가 시 공부를 시작할 밖에 없었던 것이오.” 사회운동가의 모습으로만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시인 문익환을 만날 수 있게 해주는 시집이 나왔다. 그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출간된 시집 ‘두 손바닥은 따뜻하다'(사계절). 그가 생전 펴낸 시집 5권(‘새삼스런 하루’, ‘꿈을 비는 마음’, ‘난 뒤로 물러설 자리가 없어요’, ‘두 하늘 한 하늘’, ‘옥중일기’)과 신문·잡지에 발표한 시 가운데 70편을 뽑아 묶었다. 문학평론가이자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인 임헌영은 문 목사를 “일흔여섯 생애 중 여섯 차례에 걸쳐 11년 2개월을 옥중에서 보냈던 우리 민족의 겸허한

정세현 “북한 도와야 핵문제 해결…전쟁공포 없이 사는 길”

2018년 5월 18일 1527

“북, 미국이 종전·불가침만 약속하면 핵 포기할 것” “남북정상회담은 북미회담으로 가려는 북한 기획의 연장선” (서울=연합뉴스) 김지헌 기자 =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18일 “북한은 미국이 종전과 불가침만 약속하면 핵을 포기할 것”이라며 “북한을 도와야 핵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밝혔다. 정 전 장관은 이날 서울 용산구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열린 ‘4·27 판문점 선언과 한반도의 미래’ 특별대담에서 “북한은 남북정상회담에 응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북미정상회담으로 나아가려 한 것”이며 이렇게 진단했다. 그는 “이번 남북회담은 김정은 위원장이 북미정상회담을 하려고 처음부터 기획적으로 벌인 일의 연장선상에서 성사됐다고 본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미국은 그동안은 북한이 무시해도 좋을 만한 정도의 핵 능력만 갖췄으므로 압박과 제재로 나서려 했다”며 “지난해 11월 29일 북한이 사거리 1만3천㎞짜리 대륙간탄도미사일 발사에 성공한 이후로는 김정은과 북한을 만만하게 보지 못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또 “(김 위원장은) 남북정상회담은 과정과 수단으로 생각하지 그 자체가 최종목적은 아니다”라며 “평창올림픽에 참가하고 싶다고 해놓고는 왜 여동생을 시켜서 친서를 보냈을까. 북미수교까지 생각하고 문재인 대통령에게 트럼프를 소개해 달라고 하는 것 말고는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이어 “김 위원장은 미국이 종전과 불가침만 약속하면 핵은 폐기하겠다, 포기하겠다는 것이며 경제적으로 넉넉하게 살고 싶다는 것”이라며 “북미수교까지 끌어내면 아시아개발은행(ADB)이나 국제부흥개발은행(IBRD)의 장기저리차관이 쉽게 들어올 여건이 조성돼 경제적 여건이 좋아질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정 전 장관은 “북한을 돕는 것이 북핵 해결의 길을 여는 것”이라며 “북한에 돈이 들어간다고 걱정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민족사랑 2018년 05월호

2018년 5월 18일 1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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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세에 길이 전한다”… 포천 ‘전두환 공덕비’를 아시나요

2018년 5월 19일 2501

경기북부 시민단체들 “43번 국도 전두환 친필 비석 철거해야”… 철거 민원 처리는 ‘오리무중’ 5.18 광주민주화운동 38주년을 앞두고 있는 가운데 경기 북부의 시민사회단체들이 포천시에 있는 ‘전두환 공덕비’에 대한 철거운동을 벌이고 있다. 지난 수년간 해마다 5.18 기념일이 다가오면 포천시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역사 바로 세우기’ 차원에서 공덕비를 철거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았다. 이 비석은 경기도 의정부~포천을 연결하는 43번 국도변 축석고개에 있다. 지난 1987년 43번 국도를 확포장하면서 전두환 전 대통령의 공덕을 기린다면서 세워졌다. 이 비석은 높이 5m, 폭 2m의 대형 화강암으로, 비석 몸체 전면에 한자로 ‘호국로’라고 새겨져 있다. 43번 국도가 완공되면서 전씨가 직접 호국로라고 이름 붙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친필로 호국로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으며 ‘대통령 전두환’이라는 문구가 나란히 있다. “이 길은 전두환 각하의 분부로…” 비석 앞면과 뒷면의 녹색 받침돌에는 “개국 이래 수많은 외침으로부터 굳건히 나라를 지켜온 선열의 거룩한 얼이 깃들인 이 길은 전두환 각하의 분부로 건설부와 국방부가 시행한 공사로서 호국로라고 명명하시고 글씨를 써주셨으므로 이 뜻을 후세에 길이 전한다”라고 적혀 있다. 일종의 찬양 문구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공덕비의 측면에 “이 길은 6천만 민족의 민족통일 염원과 전두환 대통령 각하의 호국 의지 그리고 12만 포천군민의 애향심이 만나는 민족웅비의 활로이다. 1987년 12월 10일 국회의원 이한동”이라는 글귀를 새긴 조형물이 있었으나 현재는 찾아 볼 수 없다. 포천시에 따르면, 지난 2011년 5월부터 도로 확장

국채보상운동 벌인 아버지,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아들

2018년 5월 19일 1963

너무나 초라한 서상돈의 무덤… 부자의 행적이 왜 이렇게 다를까 1904∼1905년 러일전쟁의 승리와 1905년 을사늑약 등으로 한반도에서의 정치적·군사적 지배권을 장악한 일본은 한국을 경제적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 차관을 강요한다. 한국의 경제 발전을 위한 차관이 아니었다. 일본은 한국에 식민지를 건설하는 데 소요되는 경비를 모두 한국 정부에 부담시켰고, 차관은 그 수단이었다. 강제로 빚을 우리나라에 떠안긴 일본 1907년 2월 21일 대구 광문사의 사장 김광제(金光濟, 1866.7.1.∼19 20.7.24.)와 부사장 서상돈(徐相敦, 1850.10.17~1913.6.30) 등이 앞장서서 국채보상운동을 본격화했다. 이 무렵 우리나라가 일본에 진 빚은 1300만 원이었다. 그러던 것이 1910년에는 일본에 갚아야 할 국가 부채가 4400만 원을 훌쩍 넘어섰다. 1907년의 1300만 원은 당시 우리나라의 1년 예산에 해당되는 금액이었다. 국가의 1년 예산과 견줘보는 것은 1300만 원과 4400만 원이 어느 정도 규모의 부채인지를 쉽게 가늠할 수 있는 좋은 잣대가 되기 때문이다. 민간에서 시작된 나라빚 갚기 운동 금연을 해서 모은 돈으로 나라빚을 갚자는 국채보상운동이 시작되자 호응이 뜨거웠다. 일제는 언론 중 가장 적극적으로 이 운동을 이끌어간 대한매일신보의 양기탁을 모금한 돈을 횡령했다고 누명을 씌워 1908년 7월 21일 구속했다. 양기탁은 9월 29일 무죄로 석방되지만 그 사이 국채보상운동은 활기를 잃고 시들어버렸다. 일제의 간교한 술책이 마침내 성공을 거두었던 것이다. 서상돈의 묘소는 수성구 범안로 120, 즉 범물동 산227-1의 천주교 모역 안에 있다. 본래 달성군에 있었는데 1974년 이곳으로 이장되었다. 서상돈 가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