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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기사

‘일본의 메이지 산업혁명 유산’서 자행된 강제노동 실상 – (일본어 자막)

2017년 12월 13일 1782

[한국어 ver] [영어 ver] ※참고자료: [다운로드] 2017 유네스코 가이드북 [한글(2018.6.1 수정)] [영문 (Corrected on 12/31/2017)] [일문(Corrected on 01/30/2018)]

보수세력이 ‘1919년 건국’을 부정하는 까닭

2017년 12월 16일 2240

[역사로 보는 오늘의 이슈] “대한민국은 미군정의 하사물이 아니다” 미국이 건국일은 1776년 7월 4일이다. 정조 임금이 즉위한 그해 4월 27일(음력 3월 10일)로부터 68일 뒤다. 그날 미국인들은 독립을 선언하고 영국 식민지배를 거부했다. 그런데 대통령이 선출되고 정부가 구성된 해는 1789년이다. 4월 30일 조지 워싱턴이 초대 대통령이 되면서 미국 정부가 모습을 갖췄다. 건국된 날, 그러니까 독립을 선언한 날로부터 23년 만이었다. 미국 헌법 제7조는 1789년이 아니라 1776년을 독립 원년, 미국 1년으로 계산한다. 미국 땅을 실효적으로 지배할 정부가 갖춰지지 않았어도 독립을 선언한 해에 미국이 건국됐다고 보는 것이다. 대한민국 헌법 전문(서문)에서도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선언했다. 3·1운동이 있은 1919년을 대한민국 출발점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미국 사례에서 나타나듯이, 1919년을 대한민국의 시작으로 간주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문제가 되는 것은, 보수세력이 1919년이 아닌 1948년을 대한민국 출발점으로 보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헌법 전문을 무시하고 1948년 8월 15일을 건국일로 보고 있다. 보수세력이 그렇게 하는 데는 숨은 동기가 있다. 지난 7일 서울특별시와 ‘3·1운동 100주년 서울시 기념사업’이 태화복지재단 강당에서 주최한 ‘민주공화정 100년 심포지엄’에서 나온 이야기들을 듣다 보면, 보수세력이 1919년을 외면하고 기피하는 동기를 쉽게 유추할 수 있다. 태화복지재단은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선언문을 낭독한 태화관이 있었던 곳이다. 위 심포지엄은 3·1운동 100주년이 되는 2019년이 다가오는 상황에서 3·1운동이 어떻게 대한민국의 출발점이 됐는지 규명하고자 열린

“군함도는 지옥”…日시민단체, 진상은폐 日정부 ‘꼼수’에 맞선다

2017년 12월 12일 2320

“산업혁명유산에 어두운 역사도 담겨야…강제동원 상처 아물지 않았다” 日강제동원네트워크, 민족문제연구소와 ‘강제노동’ 가이드북 출간 (도쿄=연합뉴스) 최이락 특파원 = “강제동원된 조선인들에게 하시마는 쇠창살 없는 감옥이자 공포의 노동 현장이었다.” 일본 정부가 재작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시킨 나가사키(長崎)현 하시마(端島, 일명 ‘군함도’) 등 메이지 산업시설의 강제동원 역사 은폐에 나서고 있는 가운데 일본 시민단체가 진상 알리기에 발벗고 나서 눈길을 끌고 있다. 일본 정부는 세계유산 등재시 약속한 강제동원 실상을 알리는 정보센터를 하시마에서 1천㎞를 훌쩍 뛰어넘는 도쿄에 설치하기로 하는 등 각종 꼼수를 동원해 은폐에 급급한 상태다. 이런 일본 정부에 맞서는 일본 시민단체는 ‘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다. 이 단체는 최근 우리나라 민족문제연구소와 공동으로 ‘일본의 메이지 산업혁명 유산과 강제동원’이라는 책자를 내고 산업혁명 유산이라는 이름에 가려진 2차대전 당시 일본의 만행을 속속들이 고발했다. 한국과 일본의 양심있는 사람들이 함께 참가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이 책을 ‘한일 시민이 함께 만든 세계유산 가이드북’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우선 하시마에 대해 가이드북은 “군함처럼 보인다고 해서 군함도로 불린다”며 “하시마 전체가 탄광으로, 바다 곳곳으로 갱도가 펼쳐져 있다”고 소개했다. 이어 1939년부터 하시마와 바로 옆 섬에 있는 다카시마탄광에는 4천명 정도의 조선인이 강제동원됐다고 설명했다. 이어 “강제동원된 조선인들에게 하시마는 쇠창살 없는 감옥이자 공포의 노동 현장이었다”며 “탈출은 어려웠고 끌려간 이들에게 그곳은 지옥섬이었다”고 가혹했던 실태를 전했다. 네트워크의 조사에 따르면 군함도에는 1939년부터 1945년에 걸쳐 1천명이 넘는 조선인들이 동원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화장(火葬)

남태평양 ‘트럭섬’으로 끌려간 조선인 위안부 26명 첫 확인

2017년 12월 12일 1986

서울시, 서울대인권센터와 승선명부·신문 기사 등 비교·검토 대구 거주 ‘하토가와 후쿠준’, 故 이복순 할머니로 판명 (서울=연합뉴스) 이태수 기자 =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 해군 함대 기지가 있던 남태평양 ‘트럭섬'(Chuuk Islands)으로 끌려간 조선인 위안부 26명의 명부와 사진이 처음으로 확인됐다. 서울시는 서울대인권센터 정진성 교수 연구팀과 함께 미군 전투일지, 호위함 ‘이키노’호의 승선명부, 사진 자료, 1946년 3월 뉴욕타임스 기사 등의 자료를 비교·검토한 끝에 이들 위안부 26명의 존재를 밝혀냈다고 11일 밝혔다. 시는 “그동안 증언으로만 있었던 트럭섬의 조선인 위안부가 실제로 존재했다는 것을 처음으로 공식 확인한 것”이라고 이번 연구의 의의를 설명했다. 트럭섬, 공식 명칭 ‘축(Chuuk) 제도’는 미크로네시아 연방을 구성하는 4개 주(州) 가운데 하나인 섬으로 태평양 남서쪽에 있다. 일본식 발음인 ‘토라크’를 접한 한국인들은 이곳을 ‘트럭섬’이라고 불러 왔다고 한다. 이번 연구는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의 자료를 발굴해 조사·분석해 이뤄졌다. 미군 전투일지에 따르면 당시 트럭섬에서 귀환한 1만4천298명 가운데 조선인은 3천483명이었다. 이 중 군인이 190명, 해군 노무자가 3천49명, 민간인이 244명으로 나타났다. 조선인들은 트럭섬 환초 ‘드블론’이라는 곳에서 1946년 1월 17일 호위함 ‘이키노’호를 타고 일본을 거쳐 고향 땅으로 돌아왔다. 이 배에는 조선인 위안부 26명과 아이 3명이 타고 있던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1946년 3월 2일 자 ‘트럭의 일본인들은 포로가 아니다’라는 제하의 뉴욕타임스 기사는 당시 상황을 구체적으로 그리고 있다. 기사는 “트럭섬 사령관인 해병 준장 로버트

정권 바뀌니 달라진 육사…‘임시정부’서 뿌리 찾는다

2017년 12월 9일 1518

ㆍ“독립군·광복군 정신 계승, 국군 역사에 편입 검토” 학술대회 개최 이례적 육군사관학교가 “독립군·광복군 정신을 계승하겠다”는 취지로 특별 학술대회를 개최한다. 관련 시민단체들을 중심으로 군의 기원을 독립군·광복군에서 찾는 내용의 세미나 등을 개최했으나, 육사가 직접 이 같은 토론의 장을 마련한 것은 처음이다. 육사가 그간 독립군·광복군 역사 계승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여왔던 점을 감안하면 이례적이기까지 하다. 육사는 11일 서울 노원구 학교에서 ‘독립군·광복군의 독립전쟁과 육군의 역사’라는 주제로 특별 학술대회를 연다고 7일 밝혔다. 김완태 육사 교장(중장)은 학술대회를 알리는 포스터에 게재된 초대 말씀에서 “현재 군이 일제강점기에 독립군과 광복군이 수행한 독립전쟁을 국군의 역사와 연계 및 편입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며 “육사는 이번 학술대회를 통해 독립군과 광복군의 정신을 계승하려 한다”고 말했다. 육군의 뿌리를 독립군·광복군에서 찾는 움직임을 이번 학술대회 개최를 계기로 공론화하겠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이번 학술대회는 ‘신흥무관학교와 무장독립투쟁’ ‘독립군·광복군과 육군의 기원’ ‘육사의 효시에 대한 연구’ 등 3가지 소주제에 대한 발표와 토론 형식으로 진행된다.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상임대표인 윤경로 전 한성대 총장, 한시준 단국대 교수, 독립기념관 김용달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장 등 다수의 독립운동 관련 전문가들이 토론과 발제에 참여한다. 신민회 창립을 주도하고,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한 독립운동가 우당 이회영 선생의 손자인 더불어민주당 이종걸 의원이 축사를 할 예정이다. 육사의 이런 움직임은 과거와 뚜렷이 대조된다. 육사는 이명박 정권 시절이던 2011년 ‘신흥무관학교 100주년 기념사업회’가 100주년 기념식을 육사에서 열게 해달라고 요청했으나 이를 거절하는 등

[크리틱] ‘다른 세계’의 카메라 / 이명원

2017년 12월 9일 1201

이명원 문학평론가·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2014년 가을 두명의 청년을 만났다. 화가 김원중과 다큐멘터리 감독 양수환이 그들이다. 당시 김원중은 인도네시아 아체 지역에서 귀국한 직후였는데, 이들은 공동의 프로젝트를 진행할 생각을 갖고 있었다. 접이식 자전거를 타고, 대만·오키나와·한국을 기행하면서 각 지역의 주민운동과 사회운동을 취재하고, 이를 다큐멘터리 영화로 제작하겠다는 것이었다. 다큐멘터리는 장소성에 기반하고 있고, 거기에는 모순을 품고 있는 사회적 의제가 있으며, 그 장소와 의제 안에서 억압당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좋은 다큐멘터리는 단순한 풍경이나 물리적 공간으로 존재했던 곳에 실존적·역사적 의미를 부여하면서 고유한 장소의식을 만들어낸다. 이 실존적·역사적 장소의식이라는 것은 결국 사람들의 기억에 의해 구축되는데, 따라서 어떻게 사람들의 마음속으로 카메라의 시선을 내밀하게 투시하는가가 중요하다. 그해 여름에 나는 조사 연구차 방문한 오키나와의 한 식당에서 후지모토 유키히사 감독을 우연히 만난 적이 있다. 당시 그는 가게야마 아사코 감독과 15년간 홋카이도 지역에서 ‘동아시아 워크숍’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된 조선인 노무자 유골 발굴 작업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것이 다큐멘터리 영화 <조릿대 묘표>(笹の墓標)였고, 내가 만났을 당시에는 이 영화의 한국어 자막을 만들고 있는 중이었다. 이 작업에 대해서는 한국에 돌아와 민족문제연구소에 있는 김영환에게 자세한 내용을 듣고 자료 등을 검토해 뒤늦게 나의 무지를 교정할 수 있었다. 당시 후지모토와 가게야마 감독은 삿포로에 6개월, 오키나와에 6개월씩 체류하면서 삿포로에서는 <조릿대 묘표>를 편집하고, 오키나와에서는 다카에와 헤노코의 반기지 운동을 기록하고 있었다. 그 영화 가운데 <러브 오키나와>는 2016년

‘70년 恨’ 납북 제헌의원 명예회복은 언제쯤

2017년 12월 9일 1282

法, 김영동 의원 서훈요청 비해당결정처분 취소소송 ‘각하’…낙담한 가족 “실추된 명예 회복 노력” 한국전쟁 당시 납북된 제헌 국회의원의 후손이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냈지만 또 졌다. 후손들은 정부를 상대로 민사, 행정 소송들을 수차례 제기했으나 연달아 패소해 현재까지 별다른 보상을 받지 못하고 있다. 서울행정법원 행정5부(재판장 강석규 부장판사)는 김영동 의원(1907~?)의 아들 흥수(72)씨가 “아버지에게 훈장을 달라”며 행정자치부장관을 상대로 제기한 ‘납북제헌의원들의 누락된 서훈요청 비해당 결정처분 취소’ 소송을 각하했다고 8일 밝혔다. 전북 고창 출신인 김 의원은 1948년 5월 남한에서 처음 치러진 총선에서 당선(전북 김제)돼 함께 뽑힌 197명과 함께 같은 해 7월 17일 대한민국 헌법을 제정·공포했다. 하지만 김 의원을 포함한 40여명은 1950년 한국전쟁 당시 납북돼 현재까지 돌아오지 못하고 있으며, 김 의원 등 수 명은 생사도 확인되지 않았다. 이번 행정소송은 지난 7월 흥수씨의 서훈 요청을 행자부가 “김 의원이 공식 납북자로 인정됐으나, 현재 대한민국 내에 있지 않아 적절한 심사가 어려워 서훈을 수여할 수 없다”고 민원회신하며 물리치자 이뤄졌다. 법원도 흥수씨의 민원회신이 행정소송의 대상이 될 수 없다며 ‘각하’ 판결했다. 각하란 소송이나 청구가 요건을 갖추지 못했을 때 청구인의 주장을 판단하지 않고 그대로 심판을 끝내는 결정이다. 재판부는 “행정청의 거부 행위가 항고소송의 대상이 되는 행정처분이 되려면, 행정청의 행위를 요구할 법규상 또는 조리상의 신청권이 국민에게 있어야 한다”면서 “이러한 신청권의 근거없이 한 국민의 신청을 행정청이 받아들이지 않은

미당문학상 시상, 반대집회에도 불구하고 강행

2017년 12월 7일 2164

[뉴스페이퍼 = 김상훈 기자] 올해 문단의 화두 중 하나는 친일문인 기념문학상이었다. 특히 2001년 제정 이후 한국문단에 뿌리박혀버린 미당문학상은 16년 말 본격화된 반대 운동으로 인해 쟁점으로 부각됐으며, 17년에는 송경동, 심보선, 이장욱 시인 등이 후보에 오르는 것을 거부하기도 했다. 제17회 미당문학상 수상자는 박상순 시인이었다. 미당문학상 시상식이 진행 중인 12월 5일 프레스센터 앞에는 플래카드를 들고 두툼하게 차려입은 이들이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한국작가회의 자유실천위원회, 민족문제연구소, 역사정의실천연대, 역사교육바로세우기시민네트워크, 청년문학회 ‘부도심’ 등 친일문학상에 반대하는 단체들이 미당문학상 폐지를 위한 항의집회에 참여한 것이다. 집회에는 “친일문학상 폐지하라”, “미당문학상 웬말인가” 등의 문구가 적힌 플래카드가 휘날렸으며 영하 10도의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집회한 참여한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한국민예총 권역 상임 이사장 정세훈 시인은 규탄 발언을 통해 “기득권자들, 권력자들이 역사의 거짓을 만들어왔다. 그 와중에 가장 양심적이어야 할 예술에서 촌철살인의 정신으로 임해야 하는 작가들이 아직도 친일행위를 한 자를 기리고, 상을 만들고 심사하고 주고받고 있다.”며 “본인들 스스로 부끄러운 줄 알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이라고 비판했다. 청년문학회 ‘부도심’의 조정빈 씨는 “처음에 예술을 배웠을 때 예술에는 사람의 진정성이 있어야 빛을 발한다고 배웠다. 예술은 육체가 아니라 영혼을 배불리기 위한 것이다. 먹고 살기 위해 국가, 뿌리를 배신한다는 것은 예술이 아니라 기만에 가까운 위선이라고 생각한다.”고 작가의 친일 행위를 비판했으며 “후대에 이어질 문학의 대를 위해 끊어야 할 것은 끊어야 하고 바로잡아야

[보도자료] 민족문제연구소, 한국인 BC급 전범 이학래 회고록 『전범이 된 조선청년』 출간

2017년 12월 5일 2478

[다운로드] [보도자료] 민족문제연구소, 한국인 BC급 전범 이학래 회고록 『전범이 된 조선청년』출간 12월 1일 민족문제연구소는 한국인 BC급 전범 이학래의 회고록 『전범이 된 조선청년』을 발간했다. 이 책은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전쟁에 강제동원 되어 타이에서 포로감시원으로 복무하다 전쟁 종료 후 BC급 전범으로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고 감형되어 수년 간 감옥 생활을 했던 한국인 BC급 전범 이학래의 파란만장한 인생을 담고 있다. 『전범이 된 조선청년』은 일본에서 출판된 『한국인 전 BC급 전범의 호소』를 번역한 책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일본군의 최말단에 속했던 한국인 포로감시원들이 일상적으로 포로를 대면했다는 이유로 부당하게 일제의 포로 정책의 책임을 떠안고 BC급 전범으로 처벌되었던 아픈 과거를 회고한다. 특히 한국인 BC급 전범 문제는 일제가 자행한 여러 유형의 강제동원 가운데서도 일반인들에게는 낯선 분야라 할 수 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2013년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전범이 된 조선청년들-한국인 포로감시원의 기록’이라는 특별전을 개최하여 한국 사회에 이 문제를 환기한 바 있다. 이학래 선생의 회고록 『전범이 된 조선청년』의 출판으로 다시 한 번 한국 사회에 한국인 BC급 전범 문제가 재조명되기를 기대한다. 일제는 1937년부터 1945년 패전하기까지 아시아 태평양 일대를 참혹한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었다. 일제가 일으킨 침략전쟁에 조선인들도 대거 동원됐다. 군인, 군속, 노동자, 일본군 ‘위안부’ 등 일제가 강제동원한 조선인은 무려 800만 명에 이른다. 이들 가운데 오랫동안 외면당하고 잊혀진 사람들이 바로 태평양전쟁 당시 연합국 포로의 감시를 맡았던 민간인 군무원, 포로감시원이었다. 일제는

“日 세계유산, 강제노동 외면…사죄하고 제대로 기록해야”

2017년 12월 1일 1726

시민단체, 일본대사관 앞 퍼포먼스…8천752명 항의서명 전달 거부당해 (서울=연합뉴스) 황재하 기자 = 시민사회단체와 노동자 단체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메이지(明治) 일본 산업혁명 유산’에서 자행된 강제노동 역사를 온전히 기록하고 피해자들에게 사과하라고 일본에 촉구했다. 우리겨레 하나되기 운동본부(겨레하나), 민족문제연구소, 민주노총, 한국노총은 30일 서울 종로구 일본 대사관 건물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강제노동 역사를 알릴 것을 촉구하는 퍼포먼스를 벌였다. 겨레하나 등은 일본이 2015년 군함도(하시마)를 비롯한 ‘메이지(明治) 일본 산업혁명 유산’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될 때 유네스코로부터 ‘전체 역사를 알 수 있도록 하라’는 권고를 받고도 조선인 강제동원 역사를 제대로 설명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이들은 회견문에서 “인류 보편적 가치를 보존하기 위한 세계문화유산이라면 침략전쟁 피해자들의 역사가 마땅히 기록돼야 한다”며 “가해자 일본은 역사를 외면하거나 감추지 말고 겸허한 자세로 임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겨레하나 등은 조선인 노동자들이 강제 징용됐던 군함도와 미이케 탄광, 야하타 제철소, 나가사키 조선소의 사진을 부착한 패널 일부를 떼어내면 그 아래 기록돼 있는 피해자들의 증언이 드러나는 퍼포먼스를 했다. 이어 일본의 사과를 촉구하는 시민 8천752명의 서명과 항의서한을 일본대사관에 전달하려 했지만 거부당했다. 이들은 대사관 측이 경비 인력으로 입구를 막아서자 실랑이 끝에 건물 앞에 서명용지를 남기고 철수했다. jaeh@yna.co.kr <2017-11-30> 연합뉴스 ☞기사원문: “日 세계유산, 강제노동 외면…사죄하고 제대로 기록해야” ※관련기사 ☞오마이뉴스: [사진] “군함도에는 조선인 강제 노동자들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