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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발상 시즌3] 영화 주제가로 보는 대중가요의 역사 4부_”1960년대 (1)”
☞ (04.30) ‘역발상’ 시즌 3: 영화 주제가로 보는 대중가요의 역사 4부_”1960년대 (1)” 오늘의 이야기 : 영화 주제가로 보는 대중가요의 역사 4부_”1960년대 (1)” 초대손님 : 이영미(대중문화연구자) 이준희(옛가요 전문 연구자) <빨간 마후라> 영화: 1964년 3월 명보극장에서 개봉. 신상옥 연출, 신영균·최은희·최무룡·남궁원·윤인자 등 출연. 원작은 1963년 10월부터 6주 동안 MBC 라디오에서 방송된 한운사 작 연속극 주제가: 1964년 자니브라더즈 노래. 한운사 작사, 황문평 작곡. 연속극 주제가는 같은 한운사·황문평 작품이기는 하지만 분위기가 전혀 다른 곡 <아빠의 청춘> 영화: 1966년 7월 아세아극장·파고다극장에서 개봉. 정승문 연출, 김승호·남정임·태현실·이대엽 등 출연. 원작은 1964년 7월부터 한 달 동안 MBC 라디오에서 방송된 박홍근 작 연속극 주제가: 1966년 오기택 노래. 반야월 작사, 손목인 작곡 <모녀 기타> 영화: 1964년 5월 을지극장에서 개봉. 강찬우 연출, 이민자·태현실·신영균·김희갑·황해·남일해 등 출연 주제가: 1964년 최숙자 노래. 조진구 작사, 손목인 작곡. 현재 확인되는 마지막 SP음반 1940~60년대 20년 동안 전개된 대중음악의 변화상을 곡절 많은 가족 스토리와 엮어 낸 작품. 주제가 음반은 최숙자가 녹음했지만, 영화에서는 백설희가 노래. 주인공인 어머니(이민자)의 노래는 이남순, 딸(태현실)의 노래는 백설희가 전담 <맨발의 청춘> 영화: 1964년 2월 아카데미극장 개봉. 김기덕 연출, 신성일·엄앵란·트위스트김 등 출연 주제가: 1964년 최희준 노래. 유호 작사, 이봉조 작곡 1960년대 한국 영화, 대중가요의 반짝이는 순간을 표상하는 작품. 그래서 신성일 자서전의 제목도 <청춘은 맨발이다> <총각김치> 영화: 1964년 8월
[한겨레] 유네스코 기록유산 4·19, 세계 시민혁명의 교과서 되다 [왜냐면]
‘이승만과 4·19혁명’ 연속 기고 ④ 오유석 | 성공회대 연구교수(사회학) 유네스코 집행이사회는 지난해 5월19일 ‘4·19혁명 기록물’을 세계기록유산으로 공식 등재했다. 역사적 사건의 기록이 국제적으로 인정받았다는 점을 넘어, 4·19혁명이 한국 민주주의의 중요한 이정표로 자리매김했다는 의미다. 이 기록은 1960년 2·28 대구 학생시위부터 3·15 부정선거에 항의해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4·19혁명까지 그 원인, 전개, 그리고 혁명 이후 사건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 피해자 보상 등 혁명의 전후 과정과 관련한 것들이다. 4월혁명에 참여한 다양한 주체들이 생산한 문헌, 녹음·영상, 구술, 사진, 수기 및 편지, 일기, 박물, 신문, 정부 공문서, 유인물·선언문·성명서 등을 포함한다. 현장 사진기록과 수기들은 지금도 우리가 왜 민주주의를 배우고 가르쳐야 하는지, 그리고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깨우쳐준다. 1960년 4월19일 그날, 민중의 지팡이가 아니라 독재의 하수인이 된 경찰의 발포로 무고한 학생과 시민 186명이 사망했고 6026명이 부상했다. 그러나 고등학생, 대학생, 시민은 죽음을 무릅쓰고 끝까지 싸워서 이승만 독재정권을 무너뜨리고 민주정부를 수립했다. 이렇게 피로 세운 용기의 기록이 오늘날까지 울려 퍼지고 있다. 4·19혁명은 식민지에서 해방된 지 15년, 냉전이 빚은 한국전쟁 종료 이후 7년밖에 안 된 상황에서 아래로부터 일어나 성공한 혁명으로, 세계 민주화 운동의 횃불이 됐다. 한국이라는 분단된 최빈국에서 비롯한 이 혁명은 한국에 대한 국제사회의 인식을 바꾸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영국 ‘더 타임스’에 실렸던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기대하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를 기대하는 것과
[오마이뉴스] 이것이 ‘친일 재테크’… 그 재산 다 어디서 났을까
[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조진태 일제는 고위층 친일파의 통장 잔고에도 신경을 썼다. 이는 일본의 의리가 좋았기 때문은 아니다. 친일파들의 협력이 없으면 한국을 지배하기 힘들 정도로 민중의 동향이 심상치 않았다. 우호세력을 지켜주고자 주요 친일파들의 재정 상태에 관심을 기울였던 것이다. 1894년에 일본은 동학혁명군을 진압하고자 군대를 출동시켰다. 이 군대는 조선 정부군과 청나라군에 이어 동학군까지 제압했다. 하지만 이런 군사적 우위만으로는 조선을 강점하기 힘들었다. 의병 투쟁 등이 만만치 않은 데다가 러시아를 비롯한 국제사회의 견제도 무시할 수 없었다. 전면전 방식으로 조선을 강점하기 힘들었던 일본은 1905년에 외교권을 빼앗고 1907년에 군대를 해산하고 1910년에 경찰권을 빼앗는 방법으로 대한제국을 약화시켰다. 1894년의 군대 출병으로 우위를 확보하기는 했지만, 일반 민중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대한제국을 멸망시켰다. 그래서 친일파들의 협력이 더욱 절실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협력을 받자니, 그들이 경제적으로 곤란해지지 않도록 신경을 써야 했던 것이다. 임야 착취에 친일파 참여시킨 일제 일제는 주요 친일파들이 재테크에 대해 새로운 안목을 갖게 만들었다. 이들을 위해 특강도 열어줬다. 제1차 세계대전 중인 1915년 10월 20일에 훗날 한국외환은행(하나은행)이 들어설 조선귀족회관에서도 그런 강좌가 열렸다. 강사는 바다 건너온 사람이었다. 그달 23일 자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2면 중간은 그를 혼다 박사로 부른다. 일본 박사인 혼다의 강의를 듣기 위해 이완용 백작 등을 비롯한 저명인사들이 이곳을 찾았다. 기사는 “이완용 백(伯), 박제순 자(子), 조중응 자,
[한겨레21] ‘시민의 송현공원’에서 이승만·이건희·주차장은 빼라
[기사원문] <2024-04-26> 한겨레21☞ ‘시민의 송현공원’에서 이승만·이건희·주차장은 빼라 시민단체 연대체 ‘서울워치’, 졸속 결정된 개발 계획 공론화 요구 전문가들, 균형발전·환경·교통·조경 관점에서 재검토 필요 2024년 4월19일 오전 민족문제연구소 등 16개 독립운동·민주화운동 관련 단체들과 더불어민주당 김영호, 김영배, 오기형 의원, 곽상언 당선자 등은 국회 소통관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들은 “우리 국민은 제22대 총선을 통해 윤석열 정부의 총체적 실정과 역사 퇴행을 준엄하게 심판했다. 이제 윤석열 정부와 여당 그리고 오세훈 서울시장은 더 이상 이승만기념관은 물론 독재자 이승만에 대한 그 어떤 우상화와 미화 작업에서도 당장 손을 뗄 것을 요구한다”고 밝혔다. 최근 이승만대통령기념재단(이사장 김황식)이 추진 중인 ‘이승만기념관’의 열린송현녹지광장(이하 송현공원) 안 건립을 지원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오세훈 서울시장의 설익은 발언 같은 날 불교계에서도 이승만기념관 반대 목소리가 나왔다.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 총동문회(회장 최승태)는 이날 오전 서울 종로구 송현공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이승만은 불교계를 범죄의 소굴로 몰고 ‘정화 유시’를 발표하여 불교계를 분열과 갈등의 나락으로 몰아간 장본인이다. 그런데 송현광장(송현공원)은 4·19혁명 당시 경무대(청와대)로 가는 길목이며, 조계종과 태고종 (사찰) 등 불교계와 이웃하고 있다. 이런 공간에 이승만기념관을 짓는 것은 불교계를 모독하는 처사”라고 밝혔다. 이승만기념관 반대 목소리는 미국에서도 나왔다. 안창호, 박은식, 심훈 등 11명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은 이날 성명을 발표해 “오늘날 이승만에 대해 많은 사료에 근거한 평가는 독립운동 지도자로서 실패한 인물이라는 사실로 귀결된다. 그동안 축적된 여러 사료들은 이승만이 독립운동 전반에 부정적인 영향을
[영상] 일본 국회의원을 만난 강제동원 대법원 판결 승소 원고단
강제동원 대법원 판결 승소 원고단 조속한 판결 이행을 촉구하기 위해 일본 국회의원을 만나다 -2023년 3월 26일 일본 도쿄 -참가자: 이고운(일본제철 강제동원 피해자 이춘식), 정종건(미쓰비스중공업 강제동원 피해자 고 정창희), 박상운(미쓰비시중공업 강제동원 피해자 양금덕), 장완익(변호단), 김정희(변호단), 임재성(변호단), 이국언(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 김정은(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 김세호(민족문제연구소 PD), 김영환(민족문제연구소) 강제동원 대법원판결 승소 원고단 일본 피고기업 항의 방문
[한겨레] 이승만은 끝까지 책임을 전가하며 권력을 지키려 했다 [왜냐면]
‘이승만과 4·19혁명’ 연속 기고 ③ 오수창 |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객원연구원 4・19혁명으로 국민의 뜻이 확인되자 이승만은 4월26일 ‘하야 성명’을 발표했으며 ‘책임을 지고’ 또는 ‘학생들 주장이 옳다 하고 스스로 물러났다’는 설명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과연 그랬던가? 그 담화에서 이승만은 더 이상 국민의 뜻을 확인할 여지가 없는데도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라는 단서를 붙였다. 마지막 문장은 “만일 국민이 원한다면 내각 책임제 개헌을 하겠다”였다. 사임의 조건을 걸고 개헌 의지를 밝힌 담화를 물러나겠다는 성명으로 읽을 수는 없다. 그날 오후 국회에서 이승만의 담화가 무슨 뜻인지 논란이 일어난 것은 당연하다. 허정 외무부 장관이 문구상의 표현일 뿐 사실상 하야라고 전했지만, 그것이 이승만의 진의인지 확인할 길은 없었다. 결국 국회는 만장일치로 “이승만 대통령은 즉시 하야할 것”을 결의했다. 오전의 담화를 사임으로 여기지 않은 것이다. 다음날 이승만은 국회에 “나 리승만은 국회의 결의를 존중하여 대통령의 직을 사임”한다는 사임서를 제출했다. 대통령직 사임이 국회의 결의로 인한 것이라고 스스로 밝혔다. 이승만의 4월26일 담화가 ‘하야 성명’이라고 불리게 된 데는 이유가 없지 않다. 담화에 앞서 이승만을 면담한 시민・학생 대표, 그리고 계엄사령부까지 그의 ‘하야’를 발표하여 사임을 기정사실화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승만이 4월19일 항쟁은 물론 25일 대학 교수단 시위 후 마지막 순간까지 대통령 지위를 지키려 했던 사실은 국민의 항거가 시작된 후 추이를 살펴보면 그 본모습을 뚜렷이 확인할 수 있다. 이승만은 앞서
[한겨레] ‘동학농민혁명 대상’ 이만열 전 국사편찬위원장
전북 정읍시는 제14회 동학농민혁명 대상 수상자로 이만열 전 국사편찬위원장을 선정했다고 23일 밝혔다. 이 전 위원장은 동학농민혁명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추진위원장을 역임했고, 숙명여대 한국사학과 교수로 30여년간 재직한 국내 역사학계의 석학으로 평가받는다. 특히 2005년부터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명예회복심의위원회 활동을 통해 혁명 참여자와 그 유족의 명예를 회복하는 데 공헌했고, 동학농민혁명기록물의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이뤄내 혁명의 세계사적 가치를 높이는 데 기여했다. 시상식은 5월 11일 제57회 동학농민혁명기념제 기념식에서 진행되며, 상패와 시상금 2000만원을 전달할 예정이다. 이학수 정읍시장은 “이 전 위원장은 세계사적 혁명인 동학농민혁명의 위상을 높인 공적을 인정받았다”며 “정읍시는 혁명 정신의 전국화와 세계화를 위해 헌신하는 인재를 지속해서 발굴하겠다”고 말했다. 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 <2024-04-23> 한겨레 ☞기사원문: ‘동학농민혁명 대상’ 이만열 전 국사편찬위원장 ※관련기사 ☞연합뉴스: 제14회 동학농민혁명 대상에 이만열 전 국사편찬위원장 ☞전라일보: 정읍 동학농민혁명 대상에 이만열 전 국사편찬위원장 선정 ☞전북중앙: 동학농민혁명대상 수상자에 이만열
[한겨레] “1919년 대한민국 건립” 외친 이승만이 ‘건국의 아버지’라니 [왜냐면]
‘이승만과 4·19혁명’ 연속 기고 ① 이준식 | 전 독립기념관 관장 이승만 하면 많은 사람이 독재자를 떠올린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뉴라이트를 중심으로 대한민국의 초석을 쌓은 ‘건국의 아버지’ 이승만을 띄우려는 움직임이 나타난 바 있다. 최근에는 윤석열 정부가 여기에 가세했다. 급기야는 오세훈 서울시장이 종로구 열린송현광장에 이승만 기념관을 세우겠다는 황당한 이야기를 하기에 이르렀다. 이승만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끝났다. 이승만은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통령과 대한민국 대통령 자리에서 두 번이나 쫓겨났다. 더 이상 어떤 평가가 필요한가? 설사 작은 공이 있더라도 그 이상으로 과가 크다. 이승만에게 공이 있다면 그것은 자신이 일부에서 강변하는 ‘건국의 아버지’가 결코 될 수 없음을 스스로 인정한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1948년 5·10 선거로 구성된 제헌국회에서 이승만은 초대 국회의장에 선출되었다. 이승만은 5월31일 제헌국회 개회사에서 “대한독립민주정부의 재건설”을 역설했다. 대한독립민주정부는 다른 말로 하면 민국 곧 대한민국이다. 다시 이승만의 말을 인용하면 “29년만의 민국의 부활일임을 우리는 이에 공포하며 민국 연호는 기미년(1919년)에서 기산”해야 한다는 것이다. 헌법을 만들 때 나라 이름을 무엇으로 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논란이 일어났지만 1919년에 이미 출범한 대한민국을 계승해 나라 이름으로 계속 쓰자는 결론이 났다. 그 결과 제헌헌법 전문에 “우리들 대한국민은 기미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이제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한다는 구절이 들어갔다. 독립운동 과정에서 이미 대한민국이 세워졌으며 제헌헌법에 따른 정부의 출범은 대한민국의 재건이라는 뜻이었다. 1948년
[연합뉴스] 영화 ‘파묘’로 재조명된 이름 김상덕…”젊은세대 관심 다행”
[기사원문] <2024-04-23> 연합뉴스☞ 영화 ‘파묘’로 재조명된 이름 김상덕…”젊은세대 관심 다행” 반민특위 위원장 지낸 독립운동가…’파묘’ 최민식 극중 이름 아들 김정륙 옹 “父 68주기…경찰 사과가 명예회복 첫걸음” (서울=연합뉴스) 최원정 기자 ·········<중략>········· 독립운동가 김상덕(1892∼1956) 선생의 아들 김정륙(89)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고문은 최근 관객 1천만명을 돌파한 영화 ‘파묘’의 흥행 소감을 이같이 전했다. 영화 ‘파묘’는 극중 곳곳에 숨어 있는 ‘항일 코드’, 특히 등장인물들의 이름이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의 이름을 차용한 것이라는 입소문이 퍼지면서 더욱 화제가 됐다. 배우 최민식이 연기한 풍수사의 배역 이름도 독립운동가로서 1948년 창설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 위원장을 지낸 김상덕 선생의 이름에서 따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략>········· 1935년 중국 난징에서 태어난 김 고문은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던 아버지를 따라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며 성장했다. 그 과정에서 어머니와 갓난아이였던 막내 여동생은 끝내 숨을 거뒀고 네 살이던 김 고문도 누나와 함께 고아원에 맡겨졌다. “막내가 굶어 죽고 나니 충격을 크게 받으셨죠. 평소에는 자식들이 까부는 걸 보고 기분 좋아하시던 분이 고아원 가는 길에는 고개를 숙이고 입을 꾹 다물고 계셨죠. 보름에 한 번 고아원을 찾아올 때마다 아들을 꼭 끌어안아 주시던 자상한 아버지셨어요.” 해방 뒤 제헌 국회의원을 지낸 김상덕은 일제강점기 친일파의 반민족행위를 조사·처벌하기 위해 반민특위 설치에 앞장섰고 위원장까지 맡았다. ·········<중략>········· 결국 며칠 뒤인 6월 6일 반민특위는 경찰 습격으로 무력화됐고, 이후 김상덕은 1950년 7월께 북한 정치보위부 직원 2명에 의해
[역발상 시즌3] 영화 주제가로 보는 대중가요의 역사 3부 “1950년대말~1960년대초”
☞ 쇼츠(Shorts): 작곡가 박시춘의 영화 ☞ (04.23) ‘역발상’ 시즌 3: 영화 주제가로 보는 대중가요의 역사 3부 “1950년대말~1960년대초” 오늘의 이야기 : 영화 주제가로 본 대중가요의 역사_1950년대말~1960년대초 초대손님 : 이영미(대중문화연구자) 이준희(옛가요 전문 연구자) <나 하나의 사랑> 영화: 1958년 4월 국도극장에서 개봉한 <나 혼자만이>. 한형모 연출, 김진규·조미령·장동휘·이대엽 등 출연. 원작은 1957년 4월부터 12월까지 잡지 <희망>에 연재된 박계주의 ‘영화소설’. 제목의 유래는 1955년 송민도의 노래 <나 하나의 사랑> 가사 첫 대목. 때문에 영화 제목도 ‘일명 나 하나의 사랑’ 주제가: 1958년 권혜경 노래. 손석우 작사·작곡. 원곡은 1955년에 발표된 송민도의 노래 대중가요가 소설로, 소설이 영화로, 영화가 또 다른 버전의 주제가로 연결된 ‘꼬꼬작’. 나름 ‘뮤지컬’을 지향했다고 하는데, 필름이 사라져 볼 수 없는 작품 <꿈은 사라지고> 영화: 1959년 2월 명보극장에서 개봉. 노필 연출, 최무룡·문정숙·엄앵란·김승호 등 출연. 원작은 1958년 9월 말부터 3주 동안 KBS 라디오에서 방송된 김석야 작 저녁 연속극 주제가: 1959년 최무룡 노래. 김석야 작사, 손석우 작곡. 원곡은 주제가로 방송된 안다성의 노래 방송에서 먼저 사용된 주제가와 영화를 위해 새로 만들어진 주제가 <나는 가야지>가 동반 히트. <이별의 종착역> 영화: 1960년 6월 명보극장에서 개봉. 박영환 연출, 최무룡·조미령·이민·김희갑 등 출연 주제가: 1960년 손시향 노래. 손석우 작사·작곡 1950년대 중후반 이후 한국 대중음악의 새로운 흐름을 선도하면서 영화 주제가에서도 많은 활약을 한 손석우의 대표작. <유정 천리>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