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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기사

[오마이뉴스] 범상치 않은 친일파, 한글을 모독한 대표적 문인

2023년 10월 10일 536

[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김용제 세종대왕은 <훈민정음> 서문에서 “나랏말싸미 듕귁에 달아”라고 말했다. 이 나랏말쌈은 중국뿐 아니라 일본과도 당연히 달랐지만, 일본제국주의는 한국인들에게 일본어를 강요했다. 그들의 용어로 하면 ‘국어 상용화’ 정책을 강제한 것이다. 일제가 한국의 말과 글을 억압한 1차적 의도는 징병제에 있었다. 한국인을 일본 군인으로 만들려면 한국어부터 없애야 한다는 게 그들의 판단이었다. 2019년에 <일본문화학보> 제83집에 수록된 송숙정 중원대 연구교수의 논문 ‘일본이 식민지에서 자행한 국어 상용화 정책에 관한 일고찰’에 조선총독부의 1942년 자료인 <극비 조선인 징집에 관한 조사>가 인용됐다. 이 자료에 따르면, 징병제 실시 계획이 발표된 1942년에 한국인 징병 적령자 21만 4229명 중에서 일본어를 해득할 것으로 추정되는 사람은 24%인 5만 1959명이었다. 외국 지배자의 입장에서 볼 때, 징세 대상자는 언어가 달라도 무방하지만 징병 대상자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지휘관의 명령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고, 병사들 간에도 전우애가 형성되기 어렵다. 이런 상태로는 한국 청년들을 일본 군인으로 개조하기 힘들다는 게 일본의 판단이었다. 1942년에 국어 상용화 정책이 조선에서 실시된 데는 그런 판단이 크게 작용했다. 친일파들은 그 정책을 위해서도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일본어 상용화 정책은 총독부 단독으로는 관철되기 힘들었다. 한국어 사용자들을 일어 사용자로 만드는 일이었으므로, 두 언어에 모두 능한 친일파들이 앞장서야 정책이 수월하게 성사될 수 있었다. 이 일에 앞장선 대표적 친일파가 김용제다. 지금은 널리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가 얼마나 많은

[법률신문] 정부, 친일파 이해승 후손 홍은동 땅 국고환수 소송 패소 확정

2023년 10월 6일 437

(법률신문, 2023.10.06) 기사원문 보기 ☞[판결] 정부, 친일파 이해승 후손 홍은동 땅 국고환수 소송 패소 확정 [판결] 정부, 친일파 이해승 후손 홍은동 땅 국고환수 소송 패소 확정 정부가 친일파 이해승의 후손이 소유한 서울 서대문구 홍은동 임야를 국고로 환수하기 위해 소송을 냈지만 패소가 확정됐다. 대법원 민사1부(주심 노태악 대법관)는 9월 21일 국가가 이해승의 손자 이우영 그랜드힐튼호텔 회장을 상대로 낸 소유권이전등기소송(2022다258774)에서 원고패소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 판결문에 따르면 철종의 아버지 전계대원군의 5대손인 이해승은 국권침탈 때 기여한 공으로 1910년 일제로부터 후작작위를 받았다. 1912년 ‘종전 한일 관계에 공적이 있다’는 이유로 한국병합 기념장을 받았고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귀족 지위와 특권을 누렸다. 이해승은 1917년 홍은동 임야 2만7905㎡를 취득했다. 이 땅은 1957년 손자인 이우영 회장에게 소유권이 넘어갔다. 그러나 근저당권이 설정돼 있던 이 땅은 1966년 경매에 부쳐져 제일은행이 낙찰받았다. 이 회장은 이듬해 이 땅을 도로 사들였다. 이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이해승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지정하자 정부는 홍은동 임야를 환수하기 위해 소유권이전등기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중략… ※관련동영상 ☞KBS뉴스: ‘일제 후작’ 이해승 후손 땅 환수 실패…정부 최종 패소 [오늘 이슈] ☞JTBC뉴스: 1998년까지 되찾은 땅만 ‘여의도 면적 3배’…’거물 친일파’ 이해승은 누구?

[팟캐스트] 역발상 시즌2_조선혁명선언 100년 3부_의열단은 어떻게 조선혁명선언을 계승하고 실천했나?

2023년 10월 10일 217

☞ (10.03) ‘역발상’ 시즌 2: 조선혁명선언 100년 3부_의열단은 어떻게 조선혁명선언을 계승하고 실천했나? 100년 전 1923년 1월 ‘조선혁명선언’이 중국 상해에서 의열단 이름으로 나왔다. 출연_김영범(대구대 명예교수) 오늘의 이야기 1.혁명적 폭력 사상의 전승 2.의열단의 혁명운동과 혁명당적 행보 3.민족혁명당의 조선혁명론 재정립 4.조선민족혁명단 혁명노선에서의 유의미한 변화들 5.조선혁명선언의 역사적 의의와 현재적 의미 ※지난 방송 ☞ (09.26) ‘역발상’ 시즌 2: 조선혁명선언 100년 2부_조선혁명선언 전문 읽기 ☞ (09.19) ‘역발상’ 시즌 2: 조선혁명선언 100년 1부_조선혁명선언에 담긴 혁명사상 ☞ (09.05) ‘역발상’ 시즌 2: 간토대학살 100년 2부 “학살 이후 식민지 조선에서는 어떤일들이?” ☞ (08.31) ‘역발상’ 시즌 2: 소설 ‘범도’의 작가 방현석과 함께_특별편성2부 ☞ (08.30) ‘역발상’ 시즌 2: 소설 ‘범도’의 작가 방현석과 함께_특별편성1부 ☞ (08.29) ‘역발상’ 시즌 2: 간토대학살 100년_1부 “은폐된 학살_누가 어떻게 얼마나 학살하였나?” ☞ (07.11) ‘역발상’ 시즌 2: 항일음악 이야기(4) “중일전쟁 이후 청년들의 공연활동과 항일음악” ☞ (07.04) ‘역발상’ 시즌 2: 항일음악 이야기(3) “항일음악 속 우리민요와 일제 잔재” ☞ (06.27) ‘역발상’ 시즌 2: 항일음악 이야기(2) “신흥무관학교의 항일노래” ☞ (06.20) ‘역발상’ 시즌 2: 항일음악 이야기(1) “항일음악 종소리 프로젝트” ☞ (06.13) ‘역발상’ 시즌 2: 친일파와 반민특위_나는 이렇게 본다 2부 ☞ (06.06) ‘역발상’ 시즌 2: 친일파와 반민특위_나는 이렇게 본다 1부 ☞ (05.30) ‘역발상’ 시즌 2: 이승만의 역사적 평가는 끝났다_씻을 수 없은 이승만의 죄과들 ☞ (05.23) ‘역발상’ 시즌 2: 이승만 띄우기에 나선 보훈처_기념사업에 약 460억원 추산 ☞ (05.16) ‘역발상’ 시즌

[추석특집대담]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 청산안된 일제잔재 친일정권의 역사전쟁

2023년 10월 4일 980

  ■ 추석특집대담 :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 청산안된 일제잔재 친일정권의 역사전쟁 ■ 진행 : 이경은 전국비상시국집행위원 ■ #대한제국보다일제가더낫다? #윤석열은미일합작품 #역사를왜곡하려는자 #홍범도장군님이하늘에서웃으신다 ☞ 전국비상시국회의 공식홈 

[오마이뉴스] 김일성 곁으로 간 열성 친일파… 뉴라이트가 덥썩 물다

2023년 10월 10일 374

[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장헌근 해방 직후의 급격한 인구이동에서 나타난 특징 중 하나는 친일파들의 대거 남하다. 일본제국주의에 부역한 반민족행위자들이 38도선 이북에서 이남으로 남하하는 현상이 있었다. 미군정이 남한 진보진영을 견제할 목적으로 이북 출신 극우세력을 끌어들이고 후원했기 때문에, 남쪽을 향하는 친일파들의 발걸음은 한층 가벼웠다. 그런데 이런 흐름에 역행하는 사례들도 있었다. 북에서 내려오는 친일파들의 틈을 비집고 북으로 올라가는 소수의 친일파다. 1946년 7월에 월북한 무용가 최승희는 이남에서 친일 행적이 논란이 되자, 이를 피해 북으로 달아난 사례다. <친일인명사전> 제3권 최승희 편은 그가 중국에서 1946년 5월 귀국한 일을 설명한 직후 “일제강점기 행적 등이 문제가 되어 정착하지 못하고 7월 20일 남편 안막, 큰오빠 최승일과 함께 월북했다”고 기술한다. 그 뒤 김일성의 지원 하에 최승희무용연구소를 열고 활발하게 활동했다. 최승희처럼 친일파인데도 월북해 북한 사회의 중심적 인물로 활약한 인물들은 더 있다. 조선총독부 자문기관인 중추원의 참의를 지낸 장헌근도 그런 사례로 거론되고 있다. 일제의 녹봉 받아먹던 장헌근의 36년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보고서> 제4-15권과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에서 친일파로 규정된 장헌근은 임오군란 1년 전인 1881년 6월 28일 출생했다. 태어난 곳은 서울이다. 그의 프로필에서 눈에 띄는 것은 10대 시절부터 경력이 꽤 다채롭다는 점이다. 이곳저곳에서 여러 가지 경험을 한 것이 이목을 끈다. <친일인명사전>에 따르면, 16세 때인 1897년에 일본 야마구치현에서 양잠을 배우고, 이듬해 사가현에서 직물 실습을 배웠다.

[팟캐스트] 역발상 시즌2_조선혁명선언 100년 2부_조선혁명선언 전문 읽기

2023년 9월 26일 710

☞ (09.26) ‘역발상’ 시즌 2: 조선혁명선언 100년 2부_조선혁명선언 전문 읽기 2부에서는 조선혁명선언 전문을 낭독합니다. 낭독_MC노 조선혁명선언 강도 일본이 우리의 국호(國號)를 없이하며, 우리의 정권을 빼앗으며, 우리의 생존적 필요조건을 박탈하였다. 경제의 생명인 산림, 천택(川澤), 철도, 광산, 어장 … 내지 소(小)공업 원료까지 다 빼앗아 일절의 생산기능을 칼로 베이며 도끼로 끊고, 토지세, 가옥세, 인구세, 가축세, 백일(百一)세, 지방세, 주초(酒草)세, 비료세, 종자세, 영업세, 청결세, 소득세 … 기타 각종 잡세가 날로 증가하여 혈액을 있는 대로 다 빨아가고, 웬만한 상업가들은 일본의 제조품을 조선인에게 매개하는 중간인이 되어 차차 자본 집중의 원칙하에서 멸망할 뿐이오, 대다수 인민 곧 일반농민들은 피땀을 흘리어 토지를 갈아, 그 종년(終年) 소득으로 일신과 처자의 호구거리도 남기지 못하고, 우리를 잡아 먹으려는 일본 강도에게 진공하여 그 살을 찌워주는 영세의 우마(牛馬)가 될 뿐이오, 내종(乃終)에는 그 우마의 생활도 못하게 일본 이민의 수입(輸入)이 연년(年年) 고도의 속율(速率)로 증가하여 ‘딸깍발이’등쌀에 우리 민족은 발 디딜 땅이 없어 산으로 물로 서간도로 북간도로 시베리아의 황야로 몰리어 가 아귀(餓鬼)부터 류귀(流鬼)가 될 뿐이며… 이하 생략……. ※지난 방송 ☞ (09.19) ‘역발상’ 시즌 2: 조선혁명선언 100년 1부_조선혁명선언에 담긴 혁명사상 ☞ (09.05) ‘역발상’ 시즌 2: 간토대학살 100년 2부 “학살 이후 식민지 조선에서는 어떤일들이?” ☞ (08.31) ‘역발상’ 시즌 2: 소설 ‘범도’의 작가 방현석과 함께_특별편성2부 ☞ (08.30) ‘역발상’ 시즌 2: 소설 ‘범도’의 작가 방현석과 함께_특별편성1부 ☞ (08.29) ‘역발상’ 시즌

[오마이뉴스] 친일경찰 성공기… 윤 정권에서 부활한 그의 후예들

2023년 9월 26일 696

[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전봉덕 해방 이후 80년 가까이 되도록 친일 청산이 성사되지 못했다. 이를 훼방하는 세력이 항상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윤석열 정권이 그 바통을 쥐고 있다. 친일파 백선엽을 띄우고 독립투사 홍범도를 폄하하는 윤석열 정권의 모습에서 그 세력의 노골적인 몸부림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런 노골성을 선구적으로 보여준 인물이 있다. 친일파 아무개보다는 헌병사령관이나 법사학자(法史學者)로 더 많이 기억되는 전봉덕이다. 일제강점기의 친일행위보다는 해방 이후의 친일청산 훼방에서 훨씬 혁혁한 기록을 세운 인물이다. 친일 경찰, 일제 패망 후에는 ‘친일 청산’ 훼방 전봉덕은 백선엽의 고향인 평안남도 강서군의 동쪽인 평양에서 태어났다. 출생 연도는 백선엽보다 10년 빠르다. 1910년 12월 12일이다. 22세 때인 1932년에 경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만주 펑톈(봉천)보통학교 교원이 된 그는 1934년 경성제국대학 예과에 들어갔다. 그런 다음, 1937년 경성제대 법문학부에 입학해 3년 뒤 졸업했다. 그의 인생이 친일의 궤적으로 접어들고 있음을 표상하는 상징적인 두 사건이 대학 졸업 1년 전에 있었다. <친일인명사전> 제3권 전봉덕 편은 “재학 중이던 1939년 10월 일본 고등문관시험 행정과에, 같은 해 11월 사법과에 합격했다”고 설명한다. 행정고시와 사법시험을 1개월 간격으로 통과했던 것이다. 그는 두 개의 ‘고문’ 시험에 합격한 상태에서 30세 때인 1940년 3월 경성제대를 졸업하고 조선총독부 내무국에서 수습 생활을 시작했다. 그런 뒤인 1941년 2월, 평안북도경찰부 보안과장으로 기용됐다. 1993년에 발간된 <친일파 99인> 제2권에 수록된 김무용 구로역사연구소 연구원의 기고문 ‘전봉덕:

[일요신문] [인터뷰] ‘지청천 외손자’ 이준식 “홍범도 흉상 이전, 모든 독립투사 모욕”

2023년 9월 22일 1557

(일요신문, 2023.09.22) 기사원문 보기 ☞ [인터뷰] ‘지청천 외손자’ 이준식 “홍범도 흉상 이전, 모든 독립투사 모욕” “일부 극우 예비역 장성들, 독립군과 단절 시도…반공은 육사·국군의 최종 지향점 아냐” [일요신문] 육군사관학교에 설치된 홍범도 장군 흉상 이전을 둘러싼 논란이 뜨겁다. 9월 15일 육군사관학교로부터 명예졸업증서를 받았던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은 졸업장을 반납하며 항의 뜻을 나타냈다. 윤기섭 선생 외손자 정철승 변호사, 지청천 장군 외손자 이준식 전 독립기념관장, 이상룡 선생 증손자 이항증 국무령이상룡기념사업회 상임이사 등이 참여했다. 일요신문은 9월 21일 이준식 전 관장을 만나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이 전 관장은 통일부 공보관,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회 상임위원, 근현대사기념관장 등을 역임했고, 현재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다음은 일문일답. ―흉상 이전 방침을 언제 처음 들었나. “8월 24일 연락을 받았다. 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 사무총장이었다. 저녁 7시쯤이었다. 당시 집사람과 저녁을 준비하고 있었다. 사무총장은 내일(8월 25일) 육사에서 다섯 분(홍범도 지청천 이회영 이범석 김좌진)의 흉상을 철거하려고 한다고 했다. 소식을 듣고 한동안 멍하게 있었다. 상황 파악이 잘 안 됐다. 그다음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독립운동가들에게 이렇게 모욕을 줄 수 있는가. 참담했다. 그날 잠도 잘 못 잤다. 외할아버지(지청천)에 대한 모욕을 떠나 독립운동을 한 모든 이들에 대한 모욕이다.” ―바로 기자회견을 열었다. “소식을 들은 날 급하게 주변 사람들과 의견을 나눴다. 가만히 있으면 안 되겠다고 판단했다. 다음 날(8월 25일) 국회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했다. 김좌진 장군의 후손인 김을동 전

[한겨레] “일본 산업화 유산, ‘강제동원 삭제’ 안 돼”

2023년 9월 21일 401

(한겨레, 2023.09.21) 기사원문 보기 ☞ “일본 산업화 유산, ‘강제동원 삭제’ 안 돼” 일본 근대산업유산 특별전 ‘세계유산에서 기억해야 할 강제동원의 역사’ 2015년에 ‘8개 현 23개 시설’ 등재 유네스코, 전체 역사 알도록 권고 일 정부, 약속하고도 지키지 않아 등재 신청 중인 사도광산에 촉각 “일본의 산업유산 현장은 왜곡되고 역사는 사라졌습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은평구 녹번동 너나들이센터 기획전시실에서 강제동원 및 일본 근대산업유산 특별전 ‘세계유산에서 기억해야 할 강제동원의 역사’ 전시회(9월 5~24일)를 열고 있다. 14일 전시 현장에서 만난 김승은 민족문제연구소 식민지역사박물관 학예실장은 “일본이 산업화 유산 속에서 산업 발전의 밝은 면만 알리고 전쟁을 위해 강제동원한 사실을 외면하거나 삭제하면 안 된다”며 “그래서 우리는 강제동원 역사를 증언하는 피해자의 목소리에 더욱 귀 기울여야 한다”고 했다. 이번 전시는 2015년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일본 메이지 산업혁명 유산’ 현장을 소개하며, 일본 정부가 의도적으로 배제한 침략 전쟁, 식민 지배, 강제동원의 역사를 알리고 있다. 일본 메이지 산업혁명 유산은 1850년대부터 1910년까지 철강·조선·석탄산업을 중심으로 구성됐다. 모두 8개 현 11개 도시에 흩어져 있는 23개 시설이다. 일본정부는 유산의 가치를 ‘서구와 기술 교류를 통해 비서구 국가에서 달성한 최초의 산업화 유산’이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정작 강제노동의 역사는 쏙 빠져있다. 한국인과 중국인, 연합군 포로들을 강제노동시켰던 현장은 후쿠오카현 기타큐슈시에 있는 야하타제철소, 오무타시의 미쓰이 미이케탄광, 나가사키현 나가사키시의 미쓰비시 나가사키조선소, 다카시마탄광, 하시마탄광(군함도) 등 5곳이다. 민족문제연구소의 노력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등재 당시 각

[한겨레] [현장] 일본 군함도 홍보관, ‘조선인 차별 없었다’ 왜곡 추가

2023년 9월 21일 449

(한겨레,  2023.9.21) 기사원문보기 ☞ [현장] 일본 군함도 홍보관, ‘조선인 차별 없었다’ 왜곡 추가 도쿄 ‘세계유산 등재 홍보관’ 가보니…개악 엉뚱한 사업장 급여 자료로 “대우 좋아” <기사 발췌> 20일 오전 일본 도쿄 신주쿠구 총무성 제2청사 별관 1층. 이곳엔 일본 정부가 2015년 군함도(하시마) 등 일본 근대산업시설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하며 시설과 관련한 ‘모든 역사’를 기억하겠다고 약속한 뒤 만든 산업유산정보센터가 자리해 있다. 일본 정부 입장에선 널리 홍보해야 할 시설이지만, 어쩐 일인지 3년 넘게 사전 예약을 해야 갈 수 있고 내부 사진은 전혀 찍을 수 없는 등 폐쇄적인 운영 방침을 유지하고 있다. …중략… 위원회는 결정문에 방문객들이 정보무늬(QR코드)를 통해 세계유산 등재 과정에서 한·일 정부 대표가 했던 발언을 확인할 수 있는 곳이 생겼다는 점을 긍정 평가했다. 실제 큐알코드를 찍어보니, 2015년 7월 하시마 등의 세계유산 등재가 결정된 위원회 회의 장면이 동영상으로 연결됐다. 일본 대표인 사토 구니 주유네스코 일본대사와 한국 대표인 최종문 유네스코 협력대표의 발언이 잇따라 나왔다. 사토 대사는 “1940년대 일부 시설에서 수많은 한국인과 여타 국민이 본인의 의사에 반해 동원돼 가혹한 조건에서 강제로 노역했다. 일본은 정보센터 설립 등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한 적절한 조치를 하겠다”고 약속했다. 다만 일본어 자막이 없이 영어 발언만 나와 방문객들이 얼마나 이를 이해할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들었다. 큐알코드 바로 옆에 새로 설치된 ‘희생자를 기억에 남기다’라는 제목의 티브이 모니터 전시도 유네스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