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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기사

[70주년 창간기획-문학평론가 임헌영의 필화 70년](4) 경향신문 필화 1호 사건과 언론인 우승규

2016년 10월 27일 2034

ㆍ“친일파 청산 없이는 모조리 헛된 일” 이승만에 직격탄 날린 논객 미군정 3년은 전반기와 후반기로 나뉘고, 1947년 6월 이후인 후반기를 통상 ‘남조선 과도정부’라 부른다. 점령 전반기에 군정은 민족 주체성을 탈색시키기 위해 중국 상해 임시정부와 건국준비위원회를 분해시켰고, 친일파를 앞세워 진보적인 민주통일 세력의 날개를 꺾었다. 이런 바탕에서 세운 남조선과도정부 입법의원은 군정의 자문역할을 넘어서지 못했다. 입법의원이 제정한 친일파 숙청법(민족반역자·부일협력자·간상배에 대한 특별법 조례)이 그 한 예이다. 1946년 대구 10월 항쟁이 친일파 때문에 일어났기에 1947년 7월2일 입법의원은 이 법을 통과시켰지만 미군정은 거부했는데, 그 핑계가 재밌다. “반역자 또는 협력자로서 규정받는 자가 누구인가를 확인하는 문제는 상당히 곤란하다.” 그러면서도 “원칙적으로 이런 종류의 법률이 필요”하지만, 입법의원 전원이 민선으로 선출된 상태에서 해야 된다면서 “본관은 이 법안의 조문을 검토하는 것을 삼간다”(군정장관 대리 G.C.헬믹)고 했다.  1946년 5월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된 후부터 군정은 중도 좌우합작을 도왔는데, 필시 좌파세력을 약화시키고 제2차 미소공위를 파탄내기 위한 술책으로 보인다. 미군정이 진정 한반도 통일과 민주정부를 원했다면 건국준비위원회(혹은 상해 임정, 아니면 두 연립)만 인정했으면 간단했다. 그들은 결국 좌우합작운동 지원을 1947년 3월 철회하고, 노골적으로 친일-친미 정권 창출에 나섰다. ‘남의 불에 게 구워 먹을 수는 없다’는 게 냉혹한 국제정치판이다. 이미 이승만은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한 정읍 발언(1946년 6월3일) 이후 사실상 남한의 대통령처럼 행세하면서 통일이나 친일파 청산 같은 문제를 암매장시키는 데 주력했다. ■친일파 청산

[스토리펀딩] 9화 친일을 끊은대신 가난을 물려주다

2016년 10월 26일 1044

[캠페인] 역사 독립군 임종국 Project by 조호진 (기자, 시인) About you 친일과 친독재로 양지만을 쫓았던 변신의 귀재, 반민족행위에 대한 일체의 반성 없이 생을 마친 미당 서정주를 기리는 <중앙일보>의 ‘미당문학상’ 제정에 반대하며 1인 시위를 했던 시인. 민족문제연구소 회원이자 <오마이뉴스> 특임기자. Project story 친일문제 연구의 선구자 임종국 선생(1929~1989)을 기리는 조형물 건립을 추진한다. 이를 위해 이 시대의 독립군(추진위원) 4389명을 모신다. 추진위원 숫자는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친일파 숫자다. 한 명의 추진위원이 한 명의 친일파를 청산하자는 의미다. Funding plan 후원금은 임종국 선생 조형물 제작 등의 건립비용으로 사용된다. 조형물은 ‘평화의 소녀상’을 만든 김서경·김운성 작가가 제작한다. 조형물 건립 장소는 친일청산의 마지막 투혼을 불살랐던 충남 천안이며 건립 시기는 선생의 27주기인 11월 12일에 맞출 계획이다. Details 선생의 삶은 가난과 외로움 그리고, 투병으로 점철됐다. 병든 몸을 이끌고 대학 도서관과 공공도서관의 방대한 자료를 뒤지며 육필로 눌러쓴 선생의 친일 인명 카드 1만 2천 장은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을 역사의 심판대에 세운 <친일인명사전>의 씨알이 되었다. 친일청산을 위해 목숨을 바친 역사 독립군 임종국 선생 앞에서 이 시대의 독립군인 우리들은 이렇게 각성하며 다짐한다. “1만 2천 장의 친일 인명 카드 <친일인명사전> “우리들은 선생님처럼 살진 못하지만 선생님의 삶을 기억할 수 있고, 친일청산의 뜨거운 가슴을 나눌 수 있으며, 선생님을 기리는 추진위원 4389명의 일원이 될 순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선생님의 유업을 잇는 역사

“박정희 미화 책 펴낸 출판사, 이광수마저 복권 시도”

2016년 11월 30일 1921

민족문제연구소와 자유실천위원회, ‘친일문인 기념문학상 반대 긴급토론회’ 친일문학상이 폐지되기는커녕 오히려 늘고 있다. 일제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을 미화·찬양한 민족반역 행위에 대한 단죄는커녕 문학상을 만드는 것은 친일파들이 여전히 득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친일청산을 염원하는 시민들도 만만치 않아 친일문학상을 둘러싼 갈등이 예상된다. 한국문인협회가 지난 7월 추진하다 역사·시민단체의 반대에 부딪혀 취소됐던 친일문인 육당 최남선(1890∼1957)과 춘원 이광수(1892∼1950)에 대한 학술상과 문학상을 출판사 <동서문화사>(대표 고정일)가 제정했다. 이 출판사가 12월 1일 육당학술상과 춘원문학상 시상식을 하겠다고 밝힌 가운데 민족문제연구소와 한국작가회의 산하 자유실천위원회가 29일 오후 2시 대학로 함춘회관에서 ‘친일문인 기념문학상 반대 긴급토론회’를 진행했다. 이들 단체들은 “서정주를 기리는 <중앙일보>의 ‘미당문학상’과 김동인을 기리는 <조선일보>의 ‘동인문학상’이 언론권력의 지원을 받으며 자리 잡은 지 오래”라면서 “이제는 여론의 반대를 무릅쓰고 최남선과 이광수마저 복권시키려는 시도까지 이어지고 있는 현실”이라면서 친일문인들이 득세하는 풍조를 비판했다. 이들 단체는 또한 “한국문인협회가 거센 역풍을 맞고 사업 자체를 전면 취소한 육당과 춘원문학상에 대해 동서문화사가 12월 1일 시상식을 가지겠다고 발표했다”면서 “동서문화사는 박정희를 미화한 책을 여러 권 발간하였으며 <조선일보> 이전에 ‘동인문학상’을 운영한 전력의 출판사”라고 밝혔다. 1956년 12월 창립한 동서문화사는 인문학을 비롯해 사회과학과 예술 그리고, 아동 등의 책을 출간하고 있으며 ‘동인문학상’을 10년간 운영한 바 있다. 임헌영 소장 “번식하는 친일파 이데올로기… 일본 파시즘에 일조한 친일문학” 문학평론가인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은 ‘친일문인 기념문학상’ 이대로 둘 것인가?’라는 제목의 긴급토론회 기조강연에서 “친일문학은 학도병에 지원하라는 식의

[70주년 창간기획-문학평론가 임헌영의 필화 70년](3) 미군정 땐 필화, 북한선 처형 ‘비극 시인’ 임화

2016년 10월 26일 1999

ㆍ“남부 조선 더러운 하늘…동포여 깃발을 내리자” 비판 시 ‘불온’ 낙인 반미와 신탁통치 지지는 분단 독재 시기의 성역이었다. 8·15 직후 민족 내분을 격화시킨 분수령은 신탁통치였는데, 그 단서는 오보에서 비롯했다.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소련의 구실은 분할, 미국은 즉시 독립 주장”(동아일보 1945년 12월27일자)이란 기사는 제목만으로도 반소(반공) 감정의 강력한 불쏘시개였다. 다른 신문들도 내용이 비슷했기에 이 매체만을 오보의 주범으로 몰아붙일 수는 없다. 워싱턴발 AP통신 기사를 국내 합동통신이 받아 배포하면서 비롯된 이 엄청난 오보는 비스마르크가 고의로 사실을 비틀고 과장한 보도자료 때문에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을 일으킨 것에 비교할 만하다. ■신탁통치, 민족사의 굴레 조선은 20~30년간 신탁통치를 할 필요가 있다고 최초로 구상한 것은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이었다. 그가 세상을 뜬 이후 열린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미국이 제안하자 소련은 즉각 독립을 주장하며 반대하다가 받아들이면서 기간이 5년으로 단축됐다. “조선을 민주주의적 원칙 하에 발전시키는 조건을 조성”해 주고자 “임시 조선민주주의 정부를 수립”하며, 이를 위해 미·소 공동위원회를 구성, 조선의 임시정부와 정당 사회단체와 협의하여 4개국 탁치 협약을 한다는 게 요지다. 소련은 왜곡보도를 미국 측에 정정요청했으나 묵살당했고, 국내 언론들은 진상 여부에 아랑곳없이 반탁=민족진영, 친탁=소련에 나라 팔아먹으려는 반민족 공산세력으로 몰아갔다. 반탁의 선봉은 상해 임정 세력이었다. 그들은 분단 고착화 조짐이 보이자 통일노선을 선택해버렸기 때문에 결국 분단 이후 집권 지배층은 친일의 죄악을 친미로 세탁한 인사들이 다수였다. 한반도 문제는 오늘까지도 4개국의 원심력에서 탈출하지

민족硏 “국방부의 ‘박정희 광복군’ 경력세탁은 사기”

2016년 10월 25일 2885

[바로듣기] – 軍 박정희 광복군 보도자료는 왜곡 – 박정희의 광복군 지원은 8.15 광복후 – 朴 친일경력은 상식, 국방부도 안다 – 국정역사교과서 사전포석 우려 ■ 방송 :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 FM 98.1 (07:30~09:00) ■ 진행 : 변상욱 대기자 (김현정 앵커 휴가로 대신 진행) ■ 대담 : 박한용 (민족문제연구소 교육홍보실장)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45년 광복군에서 활동을 했다.’ 국방부 공식 보도자료가 온라인을 발칵 뒤집어놨습니다. 친일문제를 연구해왔던 민족문제연구소에서는 이 보도자료를 둘러싼 상황을 두고 ‘이건 역사왜곡이다, 심각한 문제다’라고 지적을 합니다. 직접 들어보겠습니다. 민족문제연구소의 교육홍보실장을 맡고 있는 박한용 실장을 연결해 보죠. 박 실장님. ◆ 박한용> 안녕하세요. ◇ 변상욱> 국방부의 보도자료가 논란인데 어떤 점이 문제라고 보시는 겁니까? ◆ 박한용> 어렵게 이야기하자면 미필적 고의라고 할까요? ‘미필적 고의에 의한 역사 왜곡과 미화’, 즉 ‘박정희 미화’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 변상욱> 그러니까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고 내버려뒀다, 이 뜻이 됩니까? ◆ 박한용> 네. 이 보도자료는 국방부가 박정희 대통령 37주기 추모식에 맞춰서 나온 보도자료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생전 업적이라든지 또는 행적에 대해서 내놓은 것이겠죠. 그런데 이 내용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일제강점기인 1944년에 일본의 괴뢰국인 만주국의 사관학교인 만주군관학교를 마친 다음에 1945년 광복군에 들어가서 활동했다’ 이렇게 돼 있어요. 이 부분 자체가 심각한 역사왜곡과 역사미화가 되어서 논란이 되고 있고, 또 사실과 전혀 다르기 때문에 문제가 되고

[스토리펀딩] 8화 꼿꼿하게 죽은 독립군 임종국

2016년 10월 20일 2114

[캠페인] 역사 독립군 임종국 Project by 조호진 (기자, 시인) About you 친일과 친독재로 양지만을 쫓았던 변신의 귀재, 반민족행위에 대한 일체의 반성 없이 생을 마친 미당 서정주를 기리는 <중앙일보>의 ‘미당문학상’ 제정에 반대하며 1인 시위를 했던 시인. 민족문제연구소 회원이자 <오마이뉴스> 특임기자. Project story 친일문제 연구의 선구자 임종국 선생(1929~1989)을 기리는 조형물 건립을 추진한다. 이를 위해 이 시대의 독립군(추진위원) 4389명을 모신다. 추진위원 숫자는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친일파 숫자다. 한 명의 추진위원이 한 명의 친일파를 청산하자는 의미다. Funding plan 후원금은 임종국 선생 조형물 제작 등의 건립비용으로 사용된다. 조형물은 ‘평화의 소녀상’을 만든 김서경·김운성 작가가 제작한다. 조형물 건립 장소는 친일청산의 마지막 투혼을 불살랐던 충남 천안이며 건립 시기는 선생의 27주기인 11월 12일에 맞출 계획이다. Details 선생의 삶은 가난과 외로움 그리고, 투병으로 점철됐다. 병든 몸을 이끌고 대학 도서관과 공공도서관의 방대한 자료를 뒤지며 육필로 눌러쓴 선생의 친일 인명 카드 1만 2천 장은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을 역사의 심판대에 세운 <친일인명사전>의 씨알이 되었다. 친일청산을 위해 목숨을 바친 역사 독립군 임종국 선생 앞에서 이 시대의 독립군인 우리들은 이렇게 각성하며 다짐한다. “1만 2천 장의 친일 인명 카드 <친일인명사전> “우리들은 선생님처럼 살진 못하지만 선생님의 삶을 기억할 수 있고, 친일청산의 뜨거운 가슴을 나눌 수 있으며, 선생님을 기리는 추진위원 4389명의 일원이 될 순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선생님의 유업을 잇는 역사

[논평] 일본 정치인들의 침략신사 야스쿠니 참배를 강력히 규탄한다.

2016년 10월 19일 1976

[논평] 일본 정치인들의 침략신사 야스쿠니 참배를 강력히 규탄한다. 일본의 초당파 의원연맹인 ‘다함께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하는 국회의원 모임’ 소속 의원 85명이 추계예대제에 맞춰 지난 18일 집단으로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한 데 이어, 오늘 아베 신조 총리의 최측근 가운데 한 명인 에토 세이치(衛藤晟一) 총리 보좌관이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했다. 또한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는 2013년 12월 26일의 직접 참배에 이어, 지난 17일 ‘마사카키’라고 불리는 공물을 봉납했다. 세계 여론의 비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여야 정치인들이 매년 야스쿠니 참배를 되풀이하는 것은 그들이 과거의 침략전쟁을 전혀 반성하지 않고 있으며, 시대착오적인 역사인식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명확한 증거이다. 제국주의 일본이 일으킨 침략전쟁의 전사자 246만 6천여 명과 A급 전범 14명까지 합사되어 있는 야스쿠니신사의 본질은 ‘침략신사’ 그 자체이다. 국제적인 비판 여론을 의식하여 야스쿠니를 직접 참배하지 못하고 공물을 봉납하는 아베 신조 총리의 행위도 직접 참배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사죄의 편지를 보낼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다”고 발언한 아베 총리의 저열한 역사인식에 대해서는 차마 비판할 가치조차 느끼지 못한다. 아베 총리가 말하는 한일 간의 ‘우호’는 가식적인 미사여구에 불과한 거짓말이다. 지금 아베 정권은 집단적 자위권의 행사를 허용하여 자위대의 해외파병을 추진하고 평화헌법의 개정을 시도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해외로 파병한 자위대원 가운데 전사자가 나올 경우 제국주의 시대와 같이 야스쿠니에 합사할 것인가의 여부가 현실적인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이는 아베 정권이 국제

[카드뉴스] 6738일 18년 5개월 10일

2016년 10월 18일 4928

※ [바로가기] 식민지역사박물관 후원안내 모금참여

[70주년 창간기획-문학평론가 임헌영의 필화 70년] (2) 첫 필화 사형수 시인 유진오

2016년 10월 18일 2217

ㆍ“썩은 강냉이에 배탈이 나고…” 새로운 점령자 미국 향해 돌직구 8·15 직후 통일 독립국가를 세우지 못한 건 미국, 소련, 일본 등 외세 개입과 국내 정치지도자들의 과오 때문이었다. 사상과 이념이 달라도 민족의 이름으로 최선을 다했던가에 대한 반성과 속죄는 70여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없고, 정치판은 여전히 싸움질이다. 이치로 따진다면 사상과 표현의 자유만이 아니라 정치적인 집회결사의 자유도 보장해준 연합군 최고사령부(GHQ)의 일본 통치 사례가 한국에도 적용되어야 했다. 그런데 필화사건을 통해서만 본다면 미군정은 점령 초기부터 반소 친미정권의 수립이란 제국주의적인 의도가 있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 미국을 몰랐던 정치세력 심하게 말하면 민족독립 사상을 탈색시키고, 친일 친미세력에게 유리하도록 정치기반을 조성하기 위한 검열과 통제로 일관했다. 이에 가장 비판적이어야 할 조선공산당은 ‘8월 테제’에서 미국을 진보적인 민주주의 국가로 평가했다. 당 기관지 ‘해방일보’에 미군정 비판 기사가 처음 등장한 게 1946년 4월2일이었다. “미군과 일본군 헌병의 차이는 키가 더 크다는 것뿐”이라는 농담과 “미군정이 일제 때보다 못하다”는 여론이 팽배할 때였는데도 말이다. 조선정판사 사건(1946년 5월) 이후에야 공산당은 신전술로 전환했지만 여전히 미군정과 미소공동위원회에 기대를 걸고 일방적인 구애를 계속했다. 이강국은 <민주주의 조선의 건설>에서 “군정은 모름지기 우리의 완전독립을 후원할 것”이고, 하지 중장은 “실로 조선민족의 은인이며 민주주의의 사도”라 했다. 백남운은 <조선민족의 진로. 재론>에서 미국의 경제 원조를 ‘남조선 단독 조치설’과 결부시켜 경계하는 수준이었다. 박헌영이 대미 강경노선으로 선회한 건 자신에 대한 체포령(1946년 9월7일) 이후였고,

‘얼’ 빠진 국방부 ‘민족의 얼’을 찾아라

2016년 10월 24일 881

국방부 혈서로 만주국 육군군관학교 입학한 박정희 대통령이 광복군이라 밝혀 故(고) 박정희 대통령이 ‘광복군 활동’을 했다는 새로운 주장이 나와 논란이 되고 있다. 국방부 23일 ‘고 박정희 대통령 추모 37 추모식’과 관련된 보도자료를 통해 ‘1944년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1945년 광복군에서 활동하였다’고 밝혔다. 고 박정희 대통령의 광복이전 행적에 대해서는 역사적으로 논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방부가 아무런 검증 없이 ‘보도자료’를 내 논란이 일고 있다. ■광복군 박정희는 역사 날조 고 박정희 대통령은 1917년 11월 14일 경북 선산에서 태어나, 1937년 대구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교사로 3년간 재직하다 1940년 만주국 육군군관학교(이하 만주군관학교)에 입학했다. 일본 국회도서관에 보존 중인 1939년 3월 31일자 만주신문은 ‘혈서 군관 지원 – 반도의 젊은 훈도로부터’라는 제목으로 고 박정희 대통령이 혈서로 만주 군관학교에 지원했다고 보도했다. 이와 관련해 박한용 민족문제연구소 교육홍보실장은 “국가기관인 국방부가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호도하고 역사왜곡과 날조에 나선 꼴”이라고 비난했다. 박한용 실장은 “보도자료는 박 대통령이 만주 군관학교와 일본육사를 거쳐 항일운동을 토벌하던 만주군 8단(8연대) 을종부관이 된 행적을 빼버렸다”면서 “마치 그가 마치 광복군이 되기 위해 일본육사를 지원한 것처럼 보이게 했다“고 설명했다. 박한용 실장은 또 “국방부는 군인에 대한 경의와 민족정신을 지켜야 할 공공기관임에도 불구하고 전직 대통령에 대한 치적을 알리는 것에 열을 올리는지 의문이 든다”고 덧붙였다. 박 실장은 “박 대통령이 광복군에 편입된 것은 9월 21일 이지만, 자발적 편입이 아니었다. 1945년 8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