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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내일을 여는 역사 6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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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평] ‘건국절 사관’에 입각해 집필 중인 반 헌법적인 국정교과서를 즉각 폐기하라
[논평] ‘건국절 사관’에 입각해 집필 중인 반 헌법적인 국정교과서를 즉각 폐기하라 1. 2015교육과정 고시에 따르면 역사 과목은 검정과정을 거쳐 2018년에 중·고등학교에 적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가 중학교 ‘역사’와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를 국정화 하고 이의 적용 시기를 2017년으로 1년 앞당기면서 각종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음은 익히 알려진 바이다. 이처럼 무리하게 교과서 국정화를 밀어붙이고 있는 교육부가 출판사에까지 ‘건국절 사관’을 강요하고 있음이 드러났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교육부가 지난달 18일과 26일 역사부도 발행 출판사 관계자들을 모아 놓고, 내년에 배포될 역사부도 수정 본에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1948년 대한민국 수립’으로 바꿀 것을 요구하였다고 한다. 이로써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건국’으로 못 박은 박근혜 정부가 ‘건국절 역사관’을 기존의 검정 역사부도에까지 덧씌우려는 음모가 폭로되었다. 2. 역사부도는 지도와 연표, 각종 이미지 자료로 구성된 보조교재로 검정을 거쳐 역사 교과서와 같은 시기에 배포되어 왔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가 국정교과서 배포를 2017년으로 1년 앞당김에 따라 교과서와 짝을 이뤄야 하는 검정 역사부도는 국정교과서와 함께 배포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다급해진 교육부는 이전 교육과정에 의해 제작된 역사부도를 수정하여 2017년에 국정교과서와 함께 보급하겠다는 꼼수를 들고 나왔다. 그 결과 내년에 고등학교에 입학하여 한국사를 배워야 하는 학생들은, 2015교육과정에 따라 제작된 국정교과서와 함께 이전 2009교육과정을 토대로 개발된 역사부도로 수업을 받아야 하는 최악의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초래한 교육부가,
“‘홍난파 가옥’에 서린 항일역사, 친일파 이름에 가려져”
항일언론인 베델 소유, 홍어길·한치진 등도 거쳐가 민족문제硏 “등록문화재 명칭 변경해달라 청원할 것” (서울=연합뉴스) 김은경 기자 = 서울 종로구에 있는 ‘홍난파 가옥’을 거쳐 간 수많은 독립운동가의 흔적이 친일 행적이 드러난 작곡가 ‘홍난파’ 이름 때문에 가려지고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25일 민족문제연구소에 따르면 이 단체의 이순우 책임연구원은 최근 ‘민족사랑’에 기고한 ‘친일파 기념공간으로 변질된 베델의 집터 – 홍난파 가옥에 가려진 항일의 역사’라는 글에서 “‘홍난파 가옥’이라는 등록문화재 명칭을 변경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등록문화재 제90호인 ‘홍난파 가옥’은 ‘고향의 봄’, ‘봉선화’ 등을 작곡한 홍난파가 세상을 뜨기 전까지 7년여간 살았던 곳이다. 홍난파는 1937년 독립운동단체인 수양동우회 회원이라는 이유로 검거되고서 친일음악가로 변절, 국민총력조선연맹의 문화위원으로 활동하며 친일 작품을 발표했다. 홍파동 2-16번지에 있는 이 집은 대한제국 시기 항일 언론인으로 유명했던 영국인 어니스트 베델 대한매일신보 사장의 땅 위에 세워진 것이다. 1917년 경성부청 지적조사국이 발행한 ‘경성부관내지적목록’에는 이 땅의 소유자가 그의 부인인 메리 모드 베델로 표기돼 있다. 그러던 것이 1920년대말 이후 여러 지번으로 분할돼 주택지가 형성됐다. 홍난파 가옥 앞에 설치된 문화재 안내문 안에는 이 집의 건축 시기를 1930년으로 잡으면서 ‘독일계통 선교사의 주택으로, 근처 송월동에 독일영사관이 있었기 때문에 이 일대에 독일인 주거지가 형성됐는데 주변의 건물은 다 헐리고 이 집만 남아 있다’고 적어놓았다. 하지만 이 연구원은 “독일영사관의 소재지는 송월동이 아니라 ‘평동 26번지’”라며 “1914년 일본의 선전포고로 외교관계가 단절되면서
역사학자들이 말하는 영화 ‘밀정’ 그리고 황옥
▲ 영화 ‘밀정‘ 스틸컷(이하 사진=워너브러더스코리아 제공) 700만 관객 고지를 넘보는 송강호, 공유 주연의 화제작 ‘밀정'(감독 김지운)에 대해 역사학자들은 어떤 말을 해줄 수 있을까. 영화 ‘밀정’은 일제의 극심한 탄압으로 항일 독립운동 세력이 커다란 위기를 맞았던 1920년대 말, 일제 주요시설을 파괴하기 위해 상해에서 경성으로 폭탄을 들여오려는 의열단과 이를 쫓는 일본 경찰 사이의 암투, 회유를 그리고 있다. 이 영화는 이미 알려졌듯이 ‘황옥 경부 폭탄사건’에 바탕을 두고 있다.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의 ‘독립운동사 자료집’에 따르면, 1923년 경성에서 일제 통치의 상징과도 같은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 사건으로 일대 동요가 일어난다. 조선 민중들은 신출귀몰하게 일제의 추적을 따돌리던 김상옥 의사의 도주를 응원했다. 김상옥 의사가 사망한 직후 무장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은 조선총독부를 비롯한 일제의 거점 시설을 파괴할 2차 거사를 계획한다. 국내에서는 파괴력이 뛰어난 폭탄을 제조하는 것이 불가능했기에, 헝가리 혁명가인 폭탄 제조 전문가와 손잡고 상해에서 폭탄을 대량 제조해 경성으로 들어오려 한 것이다. 그런데 안둥과 신의주를 거쳐 폭탄을 들여오는 과정에서 한때 독립운동진영에 속했으나, 변절한 뒤 일제 경찰의 경부로 일하고 있던 황옥이 의열단의 새로운 리더인 김시현과 함께 했다는 놀라운 사실이 드러난다. 영화 ‘밀정’은 실존인물인 김시현을 바탕으로, 극중 고미술상을 운영하며 미술품을 들여오는 명분으로 경성과 상해를 오가며 의열단 활동의 최전선에 서 있는 김우진(공유)을 탄생시켰다. 또한 황옥에 모티브를 두고는, 의열단의 친구가 돼 핵심 정보를 빼내라는 특명을 받고 김우진에게 접근하지만 그와
[스토리펀딩] 5화 “독립군 아버지가 원망스러웠다”
[캠페인] 역사 독립군 임종국 Project by 조호진 (기자, 시인) About you 친일과 친독재로 양지만을 쫓았던 변신의 귀재, 반민족행위에 대한 일체의 반성 없이 생을 마친 미당 서정주를 기리는 <중앙일보>의 ‘미당문학상’ 제정에 반대하며 1인 시위를 했던 시인. 민족문제연구소 회원이자 <오마이뉴스> 특임기자. Project story 친일문제 연구의 선구자 임종국 선생(1929~1989)을 기리는 조형물 건립을 추진한다. 이를 위해 이 시대의 독립군(추진위원) 4389명을 모신다. 추진위원 숫자는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친일파 숫자다. 한 명의 추진위원이 한 명의 친일파를 청산하자는 의미다. Funding plan 후원금은 임종국 선생 조형물 제작 등의 건립비용으로 사용된다. 조형물은 ‘평화의 소녀상’을 만든 김서경·김운성 작가가 제작한다. 조형물 건립 장소는 친일청산의 마지막 투혼을 불살랐던 충남 천안이며 건립 시기는 선생의 27주기인 11월 12일에 맞출 계획이다. Details 선생의 삶은 가난과 외로움 그리고, 투병으로 점철됐다. 병든 몸을 이끌고 대학 도서관과 공공도서관의 방대한 자료를 뒤지며 육필로 눌러쓴 선생의 친일 인명 카드 1만 2천 장은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을 역사의 심판대에 세운 <친일인명사전>의 씨알이 되었다. 친일청산을 위해 목숨을 바친 역사 독립군 임종국 선생 앞에서 이 시대의 독립군인 우리들은 이렇게 각성하며 다짐한다. “1만 2천 장의 친일 인명 카드 <친일인명사전> “우리들은 선생님처럼 살진 못하지만 선생님의 삶을 기억할 수 있고, 친일청산의 뜨거운 가슴을 나눌 수 있으며, 선생님을 기리는 추진위원 4389명의 일원이 될 순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선생님의 유업을 잇는 역사
민족사랑 2016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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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역사박물관] 뉴라이트의 건국절 주장에 박한용이 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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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드뉴스] 건국절?? 뭣이 중헌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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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민특위에서 풀려난 친일 헌병, 김주열을 쐈다
[반민특위의 재구성 ⑤] 반민특위 한계와 비극의 반복, 노무현 때 친일문제 다시 다뤘지만 반쪽짜리 1960년 3월15일 밤10시, 마산경찰서 경비주임 박종표는 동료로부터 ‘최루탄이 눈에 박힌 괴이한 형상의 시체를 발견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이를 보고받은 서장 손석래는 ‘적당히 알아서 처리하라’고 지시했다. 박종표는 순경, 운전수 등과 함께 마산세관 앞 해변으로 갔다. 돌덩이 여섯 개가 매달린 시체는 물속으로 사라졌다. 4월11일 오전 10시 중앙부두 앞바다에 ‘주먹을 꽉 쥔’ 시체가 떠올랐다. 부산일보 허종 기자가 촬영해 AP통신을 통해 전 세계로 알렸다. 김주열. 그는 사망 하루 전인 3월14일 마산상고에 합격한 뒤 이승만 정권 부정선거에 항의하다 박종표가 쏜 최루탄에 맞았다. 학생의 처참한 모습을 본 마산시민이 다시 궐기했다. 전국으로 퍼진 시위는 4·19혁명이라고 불린다. ▲ 4.19혁명의 도화선이 된 김주열이 왼쪽눈에 최루탄을 직격으로 맞은 모습. 사진=연합뉴스 박종표는 혁명재판소에서 최루탄 발사와 시신 유기 사실을 자백했다.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나중에 시신 유기만 인정해 무기징역으로 감형받았다. 시인 고은은 ‘박종표’라는 시에서 “대구교도소 형장/ 일제 시대 이승만 시대의 끝이 그의 끝이었다”고 했다. 가해자 박종표는 잊혔다. 국민들은 4월혁명을 배울 때 김주열만 한번 들어볼 뿐이다. 박종표는 우연히 등장한 경찰이 아니다. 일본 헌병대에 근무하면서 조선독립운동가 등을 고문한 혐의로 반민특위(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됐다. 허나 이승만 정권이 반민특위를 무산하는 과정에서 무죄를 받고 풀려난 인물이다. 민족반역의 대가로 처벌이 아닌 출세 길을 달렸다. 친일헌병은 ‘애국경찰’로 변신해 김주열을 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