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⑥독립운동가 아내 육필 수기 20년 만에 재출간
민족문제연구소, 독립운동가 김예진 선생 아내 한도신 여사 회고록 “독립운동 참여·성원한 여성의 삶·사상 이해할 수 있는 가치있는 책” (서울=연합뉴스) 이대희 기자 = “나는 죽지 못해 산다! 죽일 테면 죽여라! 너희 육법전서에 아무나 죽여도 된다는 법이 있으면 죽여라!” 이 강단 있는 호통과 부르짖음은 1920년 둘째를 임신한 상태에서 독립운동가인 남편 김예진(1898∼1950) 선생의 행방을 물으며 총구를 들이댄 일본 순사에게 김 선생의 부인 한도신(1895∼1986) 여사가 던진 말이다. 민족문제연구소는 광복 71주년을 맞아 한 여사의 육필 회고록을 출간 20년 만에 재출간한다. 이 책은 한 여사가 남편의 독립운동을 뒷바라지하며 겪은 모진 고초를 섬세하고 솔직하게 적은 원고지 1천200매 분량의 육필 원고를 묶은 것이다. ▲ 1966년 5월 김예진 선생의 서울 현충원 안장식 후 가족 기념촬영. [민족문제연구소 제공] 한 여사는 1919년 2월 28일 남편의 3·1 운동 거사를 도와 재봉틀로 대형 태극기를 제작하며 굴곡진 시대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길고 긴 기미년 2월 그믐밤을 꼬박 새웠다. 나는 당목에 큰 태극기 재봉을 계속하다 새벽녘에 다른 식구들 몰래 밤참을 만들어 안방 사람들을 대접했다. 안방 사람들은 태극기를 종이에 그려 대나무 꼬챙이에 매달아 수기(手旗)를 만들고 있었다.” (‘감옥소 면회인생의 시작’ 중) 한 여사는 독립운동을 하며 쫓기는 남편에 대한 애틋한 마음도 적었다. “순사들이 들이닥칠까 무서우니 그냥 저녁 먹다 남은 찬밥을 얼른 드릴까 하다가 한겨울 한밤에
“독립·민주 기리고 평화통일 지향”…독립민주비 제막식
시민 626명이 3000만원 모아 근현대사기념관에 마련 ▲ 15일 오후 강북구 근현대사기념관 ‘독립민주기념비 제막식’에 참여한 관계자들과 강북구민들의 모습 ⓒ천지일보(뉴스천지) ▲ 제71주년 광복절인 15일 서울 강북구 수유동 근현대사기념관 앞마당에서 박겸수 강북구청장과 함세웅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 등이 독립민주기념비 제막식을 갖고 만세삼창을 하고 있다(강북구 제공). ⓒNews1 제71주년 광복절인 15일 정오 서울 강북구(구청장 박겸수)에 위치한 근현대사기념관에서 ‘독립민주기념비’ 제막식이 열렸다. 독립민주기념비는 독립정신과 민주주의를 기리는 조형물이다. 한 지역의 백범 김구 선생 조형물이 훼손되고 방치되어 있는 모습을 본 유정호씨와 김윤민씨가 지난해 온라인을 통해 조형물 모금운동을 벌였다. 누리꾼들이 자발적으로 성금 3000만원을 마련했고 이는 민족문제연구소에 전달돼 독립·민주정신 기념 조형물 제작에 쓰였다. 일본대사관 앞 ‘평화의 소녀상’을 만든 부부 조각가 김운성씨와 김서경씨는 재능기부 형태로 조형물 제작에 참여했다. 강북구는 근현대사기념관 옆에 장소를 제공하고 미관작업을 지원했다. 이날 행사는 함세웅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과 박겸수 강북구청장, 천준호 더불어민주당 강북갑지역위원장, 모금에 참여한 누리꾼, 지역주민 등 300여명이 참석했다. 함 이사장은 독립과 민주주의를 기리는 한편 앞으로 해야 할 숙제로 ‘평화통일’을 언급했다. 함 이사장은 “우리가 앞으로 이룩해야 할 것은 평화통일”이라며 “기념비는 평화통일을 지향하는 우리의 약속과 다짐”이라고 강조했다.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역시 통일을 거론했다. 그는 조형물에 적힌 글귀 ’38선 때문에 우리에게는 통일과 독립이 없고 자주와 민주도 없다. 어찌 그뿐이랴. 대중의 기아가 있고 가정의 이산이 있고 동족의 상잔까지 있게 되는 것이다. 마음 속에 38선이
‘부민관 의거’ 현장을 아십니까?..서울시의회 재조명
<앵커> 지금의 서울시의회 건물이 일제시대 최후의 의열 투쟁, ‘부민관 폭파 의거’ 현장이라는 사실 아십니까? 대부분 사라진 의열 투쟁 현장과 달리 이곳은 아직 우리 곁에 남아있습니다. 정혜진 기자가 다녀왔습니다. <기자> 일제 패망 20여일 전인 1945년 7월 24일, 친일파의 거두 박춘금이 당시 시민회관이었던 경성 부민관에서 ‘아세아 민족 분격 대회’를 개최합니다. [일본군 장군 역 : 박춘금 선생, 지금 관동대지진 때 했던 조선인 시체 청소, 그걸 이번엔 이 조선 땅에서 하겠다는 겁니까?] 바로 이날, 애국청년당 소속 유만수, 강윤국, 조문기 지사가 부민관에 잠입합니다. [유만수 지사 역 : (폭탄 의거가) 위험하다 한들, 이 나라 꼴, 지금 이 세상보다 더하겠니.] 세 애국지사는 일제의 학살 음모를 막기 위해 폭탄을 터뜨렸고 집회는 열리지 못했습니다. [조문기/지사, 2005년 생전 인터뷰 : 독립운동은 일제 마지막 순간까지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 사건이라는 것에 (자부심을 느낍니다.)] 서울시의회 건물입니다. [조완기/서울시의회 입법정책자문관 : 현재 의장단석이 무대라고 보고, 그 출입문 입구에서 터진 겁니다, 폭탄이.] 광복절을 앞두고 지상 12층 높이의 옥탑도 SBS 취재진에 처음 공개됐습니다. 일제 시대 서울에서 가장 높았던 곳이어서 시내 곳곳을 감시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어 관련 연구도 필요해 보입니다. [이순우/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 : 일제가 만든 그 일제의 잔존물이라 하더라도 (그 속에 우리 민족의) 항거의식이랄까 그것이 오롯이 담겨 있는 공간입니다.] 의열 투쟁 현장 대부분이 사라진 만큼 부민관 의거
‘부민관 의거’ 현장을 아십니까?..서울시의회 재조명
<앵커> 지금의 서울시의회 건물이 일제시대 최후의 의열 투쟁, ‘부민관 폭파 의거’ 현장이라는 사실 아십니까? 대부분 사라진 의열 투쟁 현장과 달리 이곳은 아직 우리 곁에 남아있습니다. 정혜진 기자가 다녀왔습니다. <기자> 일제 패망 20여일 전인 1945년 7월 24일, 친일파의 거두 박춘금이 당시 시민회관이었던 경성 부민관에서 ‘아세아 민족 분격 대회’를 개최합니다. [일본군 장군 역 : 박춘금 선생, 지금 관동대지진 때 했던 조선인 시체 청소, 그걸 이번엔 이 조선 땅에서 하겠다는 겁니까?] 바로 이날, 애국청년당 소속 유만수, 강윤국, 조문기 지사가 부민관에 잠입합니다. [유만수 지사 역 : (폭탄 의거가) 위험하다 한들, 이 나라 꼴, 지금 이 세상보다 더하겠니.] 세 애국지사는 일제의 학살 음모를 막기 위해 폭탄을 터뜨렸고 집회는 열리지 못했습니다. [조문기/지사, 2005년 생전 인터뷰 : 독립운동은 일제 마지막 순간까지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 사건이라는 것에 (자부심을 느낍니다.)] 서울시의회 건물입니다. [조완기/서울시의회 입법정책자문관 : 현재 의장단석이 무대라고 보고, 그 출입문 입구에서 터진 겁니다, 폭탄이.] 광복절을 앞두고 지상 12층 높이의 옥탑도 SBS 취재진에 처음 공개됐습니다. 일제 시대 서울에서 가장 높았던 곳이어서 시내 곳곳을 감시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어 관련 연구도 필요해 보입니다. [이순우/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 : 일제가 만든 그 일제의 잔존물이라 하더라도 (그 속에 우리 민족의) 항거의식이랄까 그것이 오롯이 담겨 있는 공간입니다.] 의열 투쟁 현장 대부분이 사라진 만큼 부민관
“현직 있는 친일파 처단하면 혼란”하다고 했던 국부 이승만
[반민특위의 재구성②] 반공논리로 친일역사 청산 무산… 폭력과 협박으로 반민특위 방해공작 이 기사는 스토리펀딩에서 후원할 수 있습니다. [후원하기] “김구 암살사건, 반민특위 습격사건, 국회프락치사건. 세 가지는 친일세력의 친위쿠데타였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 1949년 6월26일 현역 육군소위 안두희가 김구를 암살했다. 친일청산의 정신적 지주가 사라진 사건이다. 안두희가 단독으로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결론이 났다. 그러나 1992년 4월 안두희는 자신의 배후에 김창룡이 있었다고 말했다. 김창룡은 일제시기 독립운동을 추적해 일제에 고발했던 일본관동군 헌병출신 인물로 해방 후 ‘이승만의 양자’로 불린 사람이다. ▲ 1949년 6월26일 낮 12시 서대문 경교장 2층 서재에서 현역 육군 소위 안두희에게 저격 당한 직후의 백범 김구. 7월5일 국민장. 사진=국가기록원 20일전인 6월6일 반민특위(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요원들은 치욕을 겪었다. 당시 조사관이었던 정철용의 회고록에 따르면 이날 오전 9시 정철용은 특경대원 2명과 함께 출근했다. 반민특위 정문 경비경찰은 처음보는 얼굴이었고 복장도 평소와 달랐다. 경비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정문을 열어줬다. 들어갔더니 경찰이 그를 에워쌌다. 그는 신분증과 권총을 뺏기고 사무실 뒷마당에 끌려갔다. 미리 출근한 요원들이 머리에 손을 얹고 무릎을 꿇고 있었다. 특별검찰부장 권승렬(검찰총장)이 말단 순경에게 총과 신분증을 빼앗긴 뒤 쫓겨나는 굴욕을 겪기도 했다. “이놈들, 내가 누군 줄 아느냐” 그러자 순경이 “네, 검찰총장입니다”라고 답했다. “그런데 내게 그런 불손한 태도를 취하느냐”고 꾸짖자 순경은 “상부지시입니다”라고 했다. 이어 권승렬은 “너희들의 최고 상부가 내가 아니냐?”라고 했다. 습격사건 배후에 경무대가 있었던 것이다.
민족 반역자 이두황 100년만에 단죄됐다
▲ 민족문제연구소 전북지부는 13일 전주 견훤로 기린봉 입구에서 친일파 이두황 단죄비 제막식을 가졌다./민족문제연구소 전북지부 제공 명성황후 암살을 주도한 친일파 이두황이 100년만에 단죄됐다. 민족문제연구소 전북지부는 13일 전북 전주시 견훤로 기린봉 초입에서 이두황 단죄비를 세웠다. 가로 1m, 세로 2m의 크기로 세워진 단죄비에는‘백 년 만의 단죄, 친일 반민족행위자 이두황’이라는 제목 아래 이두황의 친일행적이 적혔다. 이두황은 동학혁명 농민군을 학살했으며 37세에 명성황후의 암살을 주도했다. 그는 친일 공로로 1910년부터 사망한 1916년까지 전라북도의 도장관(현 도지사)의 요직을 지냈다. 이두황의 묘는 전주시 완산구 기린봉 중턱에 있다. 크기부터 위세를 가진 묘는 비석 높이만 2m에 달하며 제단이 일본식으로 꾸며져 있다. 친일파들의 명단은 모두 지워져 있다. 그의 묘가 전북 전주에 세워진 것은 태생은 서울이었으나 전북에서 도장관을 지냈고 임종도 전북서 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이 묘는 이두황에게 살해당한 동학혁명군 차치구 접주의 손자인 차길진씨가 1951년 찾아낸 것이다. 차씨는 이두황을 부관참시를 하려 했으나 일본 불교신자였던 탓에 화장을 해 버려 뜻을 이루지 못했다. ▲ 친일파 이두황의 묘를 지난 11일 김재호 민족문제연구소 전북지부장과 고영현 사무국장이 둘러보고 있다./전북일보 제공 이두황은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일어났을 때 훈련대 1대대장으로 암살을 이끌었다. 1908년에는 전라북도 관찰사에 임명되어 이른바 일본의 ‘남한대토벌’로 불리던 호남지역 의병운동을 초토화하는데 앞장섰다. 6년 동안 전라북도 도장관으로 재직중에는 일제의 토지 수탈에 협력했다. 단죄비 제막식을 마친 김재호 민족문제연구소 전북지부장은 “이두황은 한국
한일 시민단체, 아베 총리에 ‘야스쿠니 신사 문제’ 첫 공개질의
▲ 아베 야스쿠니 참배 후 한국, 중국 등 주변국들의 반발이 거세다. 일본 내에서도 비판적인 여론이 높아지고 있다. 사진은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야스쿠니 신사를 방문해 참배를 위해 복도를 걸어가고 있는 모습.ⓒAP/뉴시스 한일 양국의 시민단체가 아베 신조 일본 총리에게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인 야스쿠니 신사에 대한 입장을 묻는 공개 질의서를 12일 전달한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이희자 야스쿠니반대 공동행동 한국위원회 공동대표와 즈시 미노루 일본 위원회 사무국장이 이날 오후 2시 일본 총리 관저를 방문해 ‘야스쿠니 문제 공개 질의서’ 전달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우경화 행보를 보여준 아베 정권에 한국과 일본의 시민단체가 야스쿠니 신사에 대한 입장을 묻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공개질의서에는 한국과 일본의 시민들은 침략전쟁을 ‘성전’으로 미화하고 있는 이른바 야스쿠니사관에 대한 아베 총리의 역사인식과 ‘안보관련법’의 제정을 통한 집단자위권의 행사로 인해 발생할 전사자의 야스쿠니 합사 여부를 묻는 등의 내용이 담겼다. 공동행동은 “야스쿠니신사는 단순한 종교기관이 아니”라며 “민족의 문화를 말살하고 천황제 이데올로기를 전파하는 도구로 일제의 침략전쟁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 ‘침략신사’”라고 강조했다. 이어 “이러한 침략신사에는 지금도 침략전쟁에 동원되어 희생당한 조선인 2만1천181명이 합사되어 있으며, 억울하게 죽어간 가족의 이름을 빼달라는 한국 유족들의 당연한 요구도 여전히 묵살당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들은 앞서 공개한 질의서를 통해 “야스쿠니신사의 전시관인 유슈칸에는 아시아·태평양전쟁을 침략전쟁이 아니라 식민지 해방을 위한 싸움, 즉 성전이라 주장하고 있다”면서 야스쿠니신사의 이러한 역사인식에 아베 총리는 동의하는지를 물었다. 또한
[보도자료] 2016 ‘평화의 촛불을! 야스쿠니의 어둠에’ 도쿄 촛불행동
[보도자료] [다운로드] 2016 ‘평화의 촛불을! 야스쿠니의 어둠에’ 도쿄 촛불행동(아베 신조 일본 총리에게 보내는 야스쿠니 문제 공개질의서 전달) 동아시아의 평화를 염원하는 한국과 일본의 시민들은 올해도 어김없이 도쿄에서 야스쿠니의 어둠을 밝히기 위한 평화의 촛불을 듭니다. 2006년부터 시작된 야스쿠니반대도쿄촛불행동은 이제 일본 시민사회에서 평화시위의 새로운 전형으로 자리매김 되었습니다. 그러나 평화로운 촛불행진에 대한 우익들의 노골적인 위협과 방해는 해마다 그 도를 더해가고 있습니다. 야스쿠니신사는 단순한 종교기관이 아닙니다. 민족의 문화를 말살하고 천황제 이데올로기를 전파하는 도구로 일제의 침략전쟁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 ‘침략신사’입니다. 이러한 침략신사에는 지금도 침략전쟁에 동원되어 희생당한 조선인 21,181명이 합사되어 있으며, 억울하게 죽어간 가족의 이름을 빼달라는 한국 유족들의 당연한 요구도 여전히 묵살당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번 행사에 참가하는 한국 대표단과 일본 시민단체 대표는 8월 12일(금) 오후 2시 총리 관저를 방문하여 아베 총리에게 보내는 공개질의서를 전달할 예정입니다(첨부파일 참조). 이 공개질의서에서 한국과 일본의 시민들은 침략전쟁을 ‘성전’으로 미화하고 있는 이른바 야스쿠니사관에 대한 아베 총리의 역사인식과 ‘안보관련법’의 제정으로 앞으로 필연적으로 발생할 전사자의 야스쿠니 합사 여부를 묻고 답변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1. 아베 신조 일본 총리에게 보내는 야스쿠니 문제 공개질의서 전달 – 때: 2016년 8월 12일(금), 오후 2시 – 곳: 일본 총리 관저 – 참석자: 이희자(야스쿠니반대공동행동한국위원회 공동대표, 유족) 김민철(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집행위원장) 야노 히데키(한일관계재설정 캠페인 사무국장) 즈시 미노루(야스쿠니반대공동행동 일본위원회 사무국) 2. 2016 ‘평화의 촛불을!
[보도자료] 8·15 맞아 누리꾼의 힘으로 ‘독립민주기념비’ 건립
[보도자료] 8·15 맞아 누리꾼의 힘으로 ‘독립민주기념비’ 건립 제71주년 광복절을 맞이하여 애국선열들의 묘역과 국립4·19민주묘지가 자리잡고 있는 북한산 자락에 독립정신과 민주주의를 상징하는 조형물이 들어선다. ‘독립민주기념비’라 명명된 이 조형물은 누리꾼들의 자발적인 모금으로 제작됐다. 다른 지역에 설치된 백범 김구 선생 조형물이 훼손되고 방치되어 있는 모습을 본 유정호·김윤민 씨가 지난해 온라인 커뮤니티 ‘웃긴대학’과 ‘오늘의유머’에 호소문을 올렸고, 작년 9월 14일부터 10월 22일까지 전개된 누리꾼들의 모금운동으로 이어져 3000만원이 마련됐다. (☞관련기사: 네티즌 모금으로 독립·민주·통일 상징조형물 건립) 설치 장소 확보 등 실무 추진에 어려움을 겪던 모금 참여자들은 지난 2월 성금 전액을 민족문제연구소에 기탁하고 사업집행을 일임했다. 강북구 근현대사기념관 위탁운영기관인 민족문제연구소는 강북구와 협의를 거쳐 지난 3월 2일 강북구청에서 함세웅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 박겸수 강북구청장, 모금 대표와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협약식을 가지고 본격적으로 건립을 추진해왔다. 근현대사기념관 전경ⓒ강북구청 일본대사관 앞 ‘평화의 소녀상’ 작가 김운성·김서경 부부가 재능기부로 기념비를 제작하였으며, 강북구는 근현대사기념관 옆에 설치 장소를 제공하고 미관작업을 지원하였다. 작가들은 “네티즌들의 모금 취지는 백범 김구 선생을 기리는 조형물 제작이었지만, 이 뜻을 살리면서도 단순한 동상이 아닌 항일투쟁과 사월혁명의 자랑스러운 역사가 담긴 작품을 만들려 노력했다”고 제작 소감을 밝혔다. 강북구는 북한산 둘레길을 따라 3·1운동의 발상지인 봉황각과 이준 손병희 이시영 김창숙 신익희 등 독립운동사에 빛나는 선열들의 묘소가 자리잡고 있고, 국립4·19민주묘지와 지난 5월 개관한 근현대사기념관 등이 위치해 떠오르는 역사교육의 현장으로 주목받고 있다.
[스토리펀딩] 1화. 펜으로 싸운 항일 레지스탕스 임종국
[캠페인] 역사 독립군 임종국 Project by 조호진 (기자, 시인) About you 친일과 친독재로 양지만을 쫓았던 변신의 귀재, 반민족행위에 대한 일체의 반성 없이 생을 마친 미당 서정주를 기리는 <중앙일보>의 ‘미당문학상’ 제정에 반대하며 1인 시위를 했던 시인. 민족문제연구소 회원이자 <오마이뉴스> 특임기자. Project story 친일문제 연구의 선구자 임종국 선생(1929~1989)을 기리는 조형물 건립을 추진한다. 이를 위해 이 시대의 독립군(추진위원) 4389명을 모신다. 추진위원 숫자는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친일파 숫자다. 한 명의 추진위원이 한 명의 친일파를 청산하자는 의미다. Funding plan 후원금은 임종국 선생 조형물 제작 등의 건립비용으로 사용된다. 조형물은 ‘평화의 소녀상’을 만든 김서경·김운성 작가가 제작한다. 조형물 건립 장소는 친일청산의 마지막 투혼을 불살랐던 충남 천안이며 건립 시기는 선생의 27주기인 11월 12일에 맞출 계획이다. Details 선생의 삶은 가난과 외로움 그리고, 투병으로 점철됐다. 병든 몸을 이끌고 대학 도서관과 공공도서관의 방대한 자료를 뒤지며 육필로 눌러쓴 선생의 친일 인명 카드 1만 2천 장은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을 역사의 심판대에 세운 <친일인명사전>의 씨알이 되었다. 친일청산을 위해 목숨을 바친 역사 독립군 임종국 선생 앞에서 이 시대의 독립군인 우리들은 이렇게 각성하며 다짐한다. “1만 2천 장의 친일 인명 카드 <친일인명사전> “우리들은 선생님처럼 살진 못하지만 선생님의 삶을 기억할 수 있고, 친일청산의 뜨거운 가슴을 나눌 수 있으며, 선생님을 기리는 추진위원 4389명의 일원이 될 순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선생님의 유업을 잇는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