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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100년 전 학생들이 겪은 간토학살…“기록 없다” 발뺌 언제까지?

2023년 9월 2일 301

(KBS뉴스,  2023.9.02) 기사원문보기 ☞ 100년 전 학생들이 겪은 간토학살…“기록 없다” 발뺌 언제까지? [특파원 리포트] 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wiki/간토_대학살) : 간토 대학살(關東大虐殺) 혹은 관동 대학살은 1923년 일본 도쿄 등을 포함한 간토 지방에서 발생한 간토 대지진으로 당시 혼란을 조선 민간인에게 전가하여 무차별 대량한 학살한 사건이다.  ‘간토 대지진 조선인 학살 사건'(關東大地震朝鮮人虐殺事件) 또는 ‘1923년 조선인 대학살’이라고도 불린다. 희생자 수는 약 6,000명[1] 혹은 6,600명[2]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이후 추가 자료가 발굴되면서, 희생자가 약 2만 3,058명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3][4 <기사 발췌> KBS가 100년 전 많은 조선인이 희생된 간토 학살, 그 참상의 기록을 새롭게 발굴했습니다. 간토대지진은 도쿄를 비롯해 일본 수도권을 초토화 시켰습니다. 극심한 혼란 속 유언비어가 난무했습니다.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 ‘조선인들이 방화한다’ 같은 어이없는 내용이었음에도 조선인들은 일본인 자경단 등으로부터 무차별 공격을 받았습니다. ■유언비어 속 조선인 무차별 공격 “메구로(※도쿄에 있는 한 행정구역 지명) 방면에서 여자아이가 파랗게 질린 채 보자기를 메고 도망쳐 왔다. 듣고 보니 ‘조선인 3,000명이 메구로 화약고를 덮친다는 것이다. (중략) 모두 물을 끼얹은 듯 고요했다. 칼을 든 사람, 창을 든 사람, 막대기를 든 사람이 무리를 지어 경비하고 있다. 꼭 갑옷을 입지는 않았지만, 옛날 무사 같았다. 조선인 같은 사람은 한 사람도 오지 않았다. 조선인 소란으로 밤을 새웠다.” – <진재기 3-갑(甲)> 중에서- “저녁에 조선인들이 방화하거나 우물에 독을 넣거나 한다고 전해 들어 지역민들은 안전하지 않다고 생각해

[오마이뉴스] 윤석열 국방부, 홍범도 흉상 철거로 친일을 선언하다

2023년 9월 2일 367

민족문제연구소 방학진 실장 ‘겨레강좌’에서 주장올바른 근현대사 역사인식이 중요 8월 겨레강좌가 지난 30일 저녁 6시 뉴스타파 리영희홀에서 진행되었다. 이날 강사는 민족문제연구소 방학진 실장이었다. 방학진 실장은 ‘윤석열 국방부의 친일선언’이라는 주제하에 열띤 강의를 진행하였으며, 특히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홍범도장군 흉상 이전과 관련된 주제를 강의하여 더욱 큰 호응을 받았다. 방학진 실장은 “흉상 이전과 관련된 근현대사 역사 인식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의 강의 내용 일부를 수록한다. 2010년 육군사관학교 홈페이지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렸다. 미군정 당시 설립된 군사영어학교와 관련된 언급이었다. 사설 및 유사 군사단체와 광복군, 일본군, 만주군 등에서 경력을 쌓은 수많은 자원들이 있었지만 제각기 다른 군사적 배경과 경력을 가진 이들을 한 자리에 모아 통일된 교육을 실시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이러한 어려움에 처한 당시의 군 당국은 미국식 군사제도와 교리를 도입하기로 결정한 후 우선적으로 언어적 장벽을 극복하는 일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미 군정청과의 원활한 협조에 필요한 통역관을 양성하는 일이 시급했으며…”(이하 생략) 당시 군사영어학교의 초대 교장은 리스 미군 소령이었으며 부교장은 원용덕으로서 친일 군인이었다. 현재의 육사는 미 군정기인 1945년 12월 미군이 세운 군사영어학교에서 기인한다.당시 미군은 남한 통치에 필요한 언어의 통역관이 필요했다. 미 군정은 정상적인 정치집단이 아닌 군인들이 통치하는 곳이기에 당연히 군사 영어학교를 만들어 장교를 양성했던 것이다. 이후 이곳은 지금의 육군사관학교가 된다. 군사영어학교는 애초 태생부터 친일군인들을 중용하였고,

[노컷뉴스] [기고]육사와 국방부 앞세운 친일극우세력의 역사 쿠데타

2023년 8월 31일 331

(노컷뉴스,  2023.8.31) 기사원문보기 ☞ [기고]육사와 국방부 앞세운 친일극우세력의 역사 쿠데타 육군, 해군·공군과 달리 한동안 독립운동을 뿌리로 인정않아 ‘흉상’으로 ‘반성’했던 육군, 尹정부 들어 독립운동사 지우기 궁극적으로 대통령이 동의…’뉴라이트’ 친일극우세력 인식 반영 홍범도는 시작…김구 등 독립운동가 차례차례 ‘적’ 규정될 것 육사·국방부 앞세운 ‘역사 쿠데타’, 국민이 막아내야 지난주 목요일 저녁 육군사관학교(육사)가 교내에 세운 독립운동가 다섯 분의 흉상을 철거하려고 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어이가 없어서 그날 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그리고 날이 밝자마자 국회 소통관에 가서 흉상 철거 시도 규탄 기자회견을 가졌다. 그 자리에서 ‘독립전쟁 영웅 흉상을 철거하고 대신에 친일군인 흉상을 세우려는 게 맞는다면 그건 대한민국 정부가 아니라 일본 정부의 총독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그로부터 며칠 지난 뒤 상황을 보면 내 말이 틀린 게 아니라는 확신이 든다. 여론이 나빠지자 대통령실과 국방부는 소련공산당 입당 경력이 있는 홍범도 장군 흉상만 철거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한발 물러서는 시늉을 했지만 문제의 본질이 바뀐 것은 아니다. 육사 교내에 흉상이 세워질 만한 독립운동가조차도 마음만 먹으면 모욕하는 게 가능하다는 사실을 대통령실과 국방부가 확인해주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국군은 한동안 독립운동을 자신의 뿌리로 인정하지 않았다. 특히 육군이 그랬다. 친일군인들이 정부 수립 이후 육군의 주도권을 장악했기 때문이다. 제1대부터 제10대에 이르기까지 역대 육군 참모총장이 모두 일본군 아니면 만주군 장교 출신이었다. 그런 가운데 21세기에 들어서면서 해군과 공군이 자신의

[오마이뉴스] 윤석열 정권이 생각하는 홍범도의 ‘죄목’ 살펴보니

2023년 8월 31일 1115

[김종성의 히,스토리] 홍범도와 자유시 참변 ☞(오마이뉴스, 2023.8.30) 기사 원문보기 무장 독립투사 다섯 분의 흉상을 육사 경내에서 치우겠다고 나선 윤석열 정권의 공세가 홍범도 쪽으로 집중되고 있다. 국민들의 격한 반발로 인해 5인 전체를 폄하하기가 쉽지 않아서인지, 소련과 연계된 홍범도의 ‘결격 사유’를 부각시키는 흐름이 강해지고 있다. 28일 국방부가 배포한 입장문에 따르면, 윤 정권이 생각하는 홍범도의 ‘죄목’은 이렇다. “장군께서 1921년 소련 자유시로 이동한 이후 보이신 행적과 관련해서는 독립운동 업적과는 다른 평가가 있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 “홍범도 장군이 소련공산당 군정의회를 중심으로 하는 독립군 통합을 지지했고, 소련공산당의 자유시 참변 재판에 재판위원으로 활동한 사실, 자유시 참변 발생 후 이르쿠츠크로 이동하여 소련 적군 5군단 소속 조선여단 1대대장으로 임명 등의 역사적 사실이 있음.” “1921년 6월 러시아공산당 극동공화국 군대가 자유시에 있던 독립군을 몰살시켰던 자유시 참변과 연관되어 있다는 의혹이 있음.” 국방부는 ‘자유시 참변’을 소련공산당과 연관 지어 설명했지만, 이는 부정확하다. 1921년 6월 28일 자유를 의미하는 스보보드니에서 발생한 자유시 참변 당시, 현지에서 공권력을 행사한 주체는 소비에트공산당이 아니었다. 1920년 4월 6일 수립된 극동공화국(원동공화국·치타공화국)이 주권을 행사하는 곳이었다. 극동공화국은 소련과 긴밀한 관련이 있었지만, 소비에트의 일원은 아니었다. 법적으로 별개였다. 소비에트에 합병된 것은 1922년 11월이다. 2005년 <대동문화연구> 제52집에 수록된 홍웅호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연구교수의 논문 ‘극동공화국 건설에 나타난 소련의 동아시아정책의 한 단면’은 “소비에트공화국과 긴밀한 연관성을 지니면서도 일정한 독자성을 지닌 독특한

[오마이뉴스] 육사 출신 예비역 장군의 일갈 “백선엽은 가짜 영웅”

2023년 8월 31일 803

한설 예비역 준장, 페이스북 통해 백선엽 강도 높게 비판 ☞(오마이뉴스, 2023.8.30) 기사 원문보기: 육사 출신 예비역 장군의 일갈 “백선엽은 가짜 영웅” 육군사관학교(육사) 출신의 한 예비역 장군이 육사의 독립투사 흉상 이전 방침을 지적하면서 백선엽 장군 동상을 육사에 세우려는 움직임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 육군역사연구소장을 지낸 한설 예비역 육군 준장(육사 40기)은 30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한국전쟁을 알기나 하고서 백선엽 운운하는가?’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육사가 독립투사 흉상을 철거하고 백선엽 동상을 세운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이 무슨 해괴한 소리가 있는가 하는 생각을 했다”고 성토했다. 한 장군은 “많은 사람들이 한국전쟁의 전쟁영웅 동상을 왜 육사에 세우지 않는가 하는 질문을 많이 하는 것 같다. 그러면서 다들 백선엽을 이야기한다”며 “백선엽은 가짜 영웅이면서, 진짜 영웅들을 모두 역사의 뒤안길로 매장해 버린 장본인”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백선엽을 왜 한국전쟁의 영웅이라고 생각하는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며 “백선엽은 한국전쟁 초기 제1사단의 붕괴에 직접적인 책임을 져야 하는 사단장이었다. 부대를 버려두고 농부옷으로 갈아입고 사라졌다 3일 만에 나타난 사람”이라고 비판했다. 한국전쟁 초기 단계에서 부대가 철수하고 무너지는 상황에서 백 장군이 자신이 지휘해야 할 1사단을 버리고 혼자 도망쳤다는 것이다. 백 장군의 최대 전공으로 꼽는 다부동 전투에 대해서도 한 장군은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다부동 전투로 낙동강 방어선을 지킨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원래 다부동 전투는 실패한 전투”라면서 “백선엽의 제1사단이 방어를 잘못해서 북한군이

[팟캐스트] 역발상 시즌2_소설 ‘범도’의 작가 방현석과 함께_특별편성1, 2부

2023년 8월 30일 601

☞ (08.31) ‘역발상’ 시즌 2: 소설 ‘범도’의 작가 방현석과 함께_특별편성2부 ☞ (08.30) ‘역발상’ 시즌 2: 소설 ‘범도’의 작가 방현석과 함께_특별편성1부 홍범도의 삶과 항일독립전쟁을 다룬 신간 ‘범도’를 방현석 작가를 직접 모시고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방현석 작가는 울산에에서 태어나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를 나왔습니다. 대학시절에는 시와 소설을 공부하면서 학생운동을 하기도 했고, 1980년대 중반에는 인천의 공장에 다니기도 하였습니다. 1988년에 발표한 데뷔작 <내딛는 첫발은>은 그 당시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후로 소설집 《새벽출정》과 《내일을 여는 집》, 《랍스터를 먹는 시간》을 발표했고, 이 작품들로 신동엽문학상과 황순원문학상, 오영수문학상 등을 받습니다 방송에서 방현석 작가는 말했다 저는 만주와 러시아, 중앙아시아를 답사하고 홍범도의 삶을 추적하며 <범도>를 집필한 지난 13년 동안 단 한 번도 홍범도가 자신을 위해 무엇인가를 한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봉오동 전투에서는 총사령관 자리를 최진동에게 양보하고 1군사령관으로 내려가 싸웠고, 죽기 열흘 전에는 잔치를 열어 옛 동지들을 배불리 먹이고 위로했습니다. 그는 단 한 번도 배불리 먹지 못하고 누구로부터도 인정받지 못한 부하들에게 극장 수위로 모은 돈을 모두 털어주고 이역만리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에서 홀연히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아내는 일본군의 고문으로 죽었습니다. 그와 함께 싸웠던 큰아들 양순은 일본군과 교전 중에 전사했고, 작은아들 용환도 항일전선에서 숨졌습니다. 재산 한 푼 남기지 않았고, 핏줄 하나 남기지 못했습니다. 그는 아무것도 남기지 못했지만 우리는 그들이 남긴 나라에서 살고 있습니다. 단 한 순간도 항전을 포기하지

[오마이뉴스] “육사 정신이 제대로 박혀 있었으면 결코 할 수 없는 일”

2023년 8월 30일 455

(오마이뉴스,  2023.8.30) 기사원문보기 ☞ “육사 정신이 제대로 박혀 있었으면 결코 할 수 없는 일” [이게 이슈] 육군본부 정훈감 지낸 표명렬 예비역 준장 인터뷰 육군사관학교(육사)가 봉오동·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끈 항일독립운동가 홍범도 장군의 흉상을 이전하기로 해 논란이 일고 있다. 이에 대해 육군본부 정훈감을 지낸 표명렬 예비역 육군 준장은 “홍범도 장군의 흉상을 치우는 건 육사의 정신이 제대로 박혀 있었으면 결코 할 수 없는 일”이라고 평가했다. 1938년생인 표명렬 예비역 장군은 육사 18기(1958년)로 중위 복무 중이던 1965년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다. 이후 한국으로 돌아온 표 장군은 ‘공보정훈’ 관련 보직을 연이어 맡으며 육군의 ‘정신 무장’에 대한 고민을 지속해 왔다. 표 장군은 정훈감 재직 시 독립군과 광복군 인사들을 육사로 초청해 생도들의 사열을 받게 해 화제가 된 바 있다. 예편한 후에는 우리 군을 인권 존중의 ‘민주군대’, 평화통일을 뒷받침하는 ‘통일군대’로 개혁할 것을 주장하며 천주교인권위원회, 민족문제연구소 등에서 활동했다. 이라크 파병이 추진될 당시 이에 반대하며 대한민국재향군인회를 나와 평화재향군인회를 설립하기도 했다. 독립군과 광복군 출신 인사들을 대한민국 ‘육사’로 초청했던 예비역 장군은 이번 홍범도 흉상 논란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30일 오후 표명렬 장군을 인터뷰했다. – 간단한 자기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일생 동안 대한민국 군대 개혁에 관심을 두고 살아온 표명렬입니다. 저는 지난 1965년 당시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위관 장교였습니다. 이때 미군과 합동작전을 펼치는 과정에서 큰 깨달음을 얻어, 지금껏 정훈 관련

[기자회견문] 국방부發 역사쿠테타 당장 멈추고 국민 앞에 사죄하라!

2023년 8월 30일 394

[기자회견문] 국방부發 역사쿠테타 당장 멈추고 국민 앞에 사죄하라! 윤석열 정부 국방부는 독립전쟁 영웅에게 공산주의 망령을 뒤집어 씌워 역사에서 지워내려 하고 있습니다. 역사에 씻을 수 없는 죄를 짓고 있습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항일독립전쟁 영웅 다섯 분의 흉상 철거 계획을 전면 백지화하고 독립운동가의 명예를 훼손하고 反헌법적 행위를 지시한 자는 반드시 책임져야 할 것입니다. 다섯 분의 흉상은 그냥 세운 것이 아닙니다. 대한독립군과 광복군이 국군의 뿌리고 자랑스러운 독립전쟁의 역사를 바로 세우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번 철거 시도는 독립군과 광복군을 국군의 뿌리로 인정하지 않겠다고 선언이기에 국민이 저항하는 것입니다. 국방부에게 묻겠습니다. 한국군의 전사(前史)에서 독립군과 광복군의 역사를 지워버리면, 국군의 정통성은 어디서 찾는다는 말입니까? 국군 창설 이후의 역사만 기리겠다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도 부정하는 것입니까? 광복을 세계 2차대전 이후 전후 처리 과정에서 생긴 부산물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광복은 결코 밖에서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우리 선조들이 나라를 빼앗긴 날부터 독립을 되찾는 날까지 죽음을 무릅쓰고 싸워 이겨낸 결과입니다. 우리에게는 빛나는 ‘독립전쟁’의 역사가 있었고 봉오동전투·청산리대첩이라는 자랑스러운 승리 역사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오로지 조국 독립만을 외치며 목숨 바친 홍범도 장군, 김좌진 장군 그리고 수많은 무명용사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흉상 철거 문제를 두고 진보, 보수 가리지 않고 국민들이 분노하는 이유는 국민적 상식에 반하는 처사이기 때문입니다. 조국의 자주독립을 위해 고귀한 희생을 다하신 독립전쟁 영웅의 명예를 더럽히고 공산주의자로

[KBS] [뉴스 더하기] “달력에도 없는데 어찌 압니까?”…‘8월 29일’ 무슨 날이길래

2023년 8월 30일 391

(KBS,  2023.8.29) 기사원문보기 ☞ [뉴스 더하기] “달력에도 없는데 어찌 압니까?”…‘8월 29일’ 무슨 날이길래 – 일부 발췌 8월 29일, 오늘이 어떤 날인지 알고 계신가요? 바로 113년 전 오늘, 경술년, 그러니까 1910년 8월 22일, 당시 대한제국 총리대신이었던 이완용. 일본 측과 한일병합조약을 체결했고, 일주일 뒤인 1910년 8월 29일에 공포됐는데요. 경술년에 일어난 국가적 치욕이라는 의미로 ‘경술국치일’이라고 하죠. ‘경술국치일’, 광복 직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이날을 건국기념일과 함께 5대 기념일로 정하기도 했습니다. 대한민국 정부가 들어선 뒤 ‘국치일’은 국가기념일로 계승되지 않았고 언젠가부터 달력에서도 사라져 버렸습니다. 아픈 역사, 치욕의 역사는 잊어도 되는 걸까요?

[팟캐스트] 역발상 시즌2_간토대학살 100년_1부 “은폐된 학살_누가 어떻게 얼마나 학살하였나?”

2023년 8월 29일 539

☞ (08.29) ‘역발상’ 시즌 2: 간토대학살 100년_1부 “은폐된 학살_누가 어떻게 얼마나 학살하였나?” 오늘의 이야기 주제: 간토대학살 100년 *출연: 김강산 (- 성균관대학교 사학과 한국근대사 전공. 1923한일재일시민연대, 사회적협동조합 기억과평화, 만인만색연구자네트워크 소속) 지진이 일어났는데 도대체 왜 조선인들이 학살당하는가 하는 점. 직접적인 원인이 두 가지가 있음. 바로 유언비어와 계엄령 사람들이 왜 유언비어를 믿게 되었는가? 당시 내무대신이었던 미즈노 렌타로, 1919년 3.1운동 이후 조선에 부임한 인물이기도 한데, 이 때 미즈노 렌타로가 계엄령을 선포하면서 뭐라고 했냐면 “생각지도 못하게 조선인 소요(폭동)가 발생했기 때문에” 부득이 계엄령을 선포한다고 함. 이렇게 계엄령의 원인을 조선인들의 폭동으로 특정해 놓았기 때문에 이후 계엄령에 근거하여 출병하는 군대나 그에 준해서 현장에서 치안을 유지하는 경찰, 그리고 일반 민중들이 “조선인은 국가의 적”이라고 판단하게 됨. 다시 말하면 당시의 계엄령은 지진 이후에 구호라던가 복구라던가 그런 재난 이후의 통상적인 대처로 선포된 게 아니라는 점. 그래서 계엄령은 조선인 학살의 강력한 동기가 되었고, 아주 잔인한 방식의 학살이 가능하게 했음 ※지난 방송 ☞ (07.11) ‘역발상’ 시즌 2: 항일음악 이야기(4) “중일전쟁 이후 청년들의 공연활동과 항일음악” ☞ (07.04) ‘역발상’ 시즌 2: 항일음악 이야기(3) “항일음악 속 우리민요와 일제 잔재” ☞ (06.27) ‘역발상’ 시즌 2: 항일음악 이야기(2) “신흥무관학교의 항일노래” ☞ (06.20) ‘역발상’ 시즌 2: 항일음악 이야기(1) “항일음악 종소리 프로젝트” ☞ (06.13) ‘역발상’ 시즌 2: 친일파와 반민특위_나는 이렇게 본다 2부 ☞ (06.06) ‘역발상’ 시즌 2: 친일파와